마태의 초대로 예수님이 식사하실 때
마태복음 9:14에 오늘 읽은 말씀에 [그 때에~]라고 시작합니다. 그 때는 지난 주일 말씀드린 것처럼 예수님이 마태의 초대를 받아 식사를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마태는 레위이고 그는 세리였습니다. 당시 세리는 죄인 취급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주님이 마태를 제자로 부르시니 마태가 주님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태는 자신의 친구들을 주님께 소개도 하고 이제 자신은 주님의 제자의 길을 나서게 되니 친구들과 작별 식사도 하고 싶을 것입니다. 주님을 초대하여 마태의 친구들과 함께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하여 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와서 예수님께 질문을 합니다. 14절 말씀입니다.
”그 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마태복음 9:14]
그 시대에 바리새인들이나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아주 엄격하게 금식도 하고 종교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은 함께 먹으며 즐거워하고 또 죄인들과 함께 즐겁게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주님께 물으신 것입니다.
그 때에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데 금식하게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신랑을 빼앗기게 될 날이 이르면 금식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이 말씀으로 은혜받기를 원합니다.
첫째, 신랑 되신 예수님과 함께 하는 신앙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냐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마태복음 9:15]
결혼하는 집은 잔치집입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축제를 합니다. 로마서 12장의 말씀에도 ‘기뻐하는 자와 함께 즐거워하고 슬퍼하는 자와 함께 울라’고 하였습니다. 혼인한 잔치집에 가서는 함께 즐거워해야지 그 집에서 금식하고 울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아주 지당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 주님이 신랑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을 신랑으로 비유하고 우리 성도를 신부로 비유를 많이 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을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그러나 나는”
[고린도후서 11:2]
사도 바울이 신랑이 되신 예수님께로 성도들을 중매하는 것이 전도라고 표현을 합니다.
구약성경에는 하나님을 남편으로 비유하고 이스라엘 백성들 즉 주의 백성들을 아내로 비유합니다. 그래서 아내는 남편이 되시는 하나님만 믿고 섬겨야 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남편을 내팽개치고 다른 신을 우상으로 섬기니 다른 남편을 따르는 여인과 같다고 표현을 많이 합니다.
마태복음 25:1에는 신랑 되시는 예수님을 기다리는 처녀들을 비유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마태복음 25:1]
라고 비유로 말씀을 하시죠. 신랑 되신 예수님이 오실 것을 기다리는 처녀를 비유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신랑 되신 예수님과 함께 하는데 슬퍼하고 금식하고 통곡하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잔칫날 함께 즐거워하고 축제에 동참하는 것이 마땅한 도리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신랑의 친구들로 비유를 합니다. 신랑 되시는 주님과 함께 잔치에 즐거워하는 친구로 비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금식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원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금식하는 날은 하루 있었습니다. 모세가 전해준 말씀에는 대속죄일 금식하도록 했습니다.
“일곱째 달 열흘날은 속죄일이니 너희는 성회를 열고 스스로 괴롭게 하며 여호와께 화제를 드리고”
[레위기 23:27]
7월10일이 대속죄일입니다. 이스라엘에 있어서 달력이 두 개입니다. 하나는 종교력이고 하나는 민간력입니다. 종교력은 원래 사용하던 달력입니다. 1월 아빕월 혹는 닛산월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한 달입니다. 1월14일 어린양을 잡고 1월 15일 출애굽했습니다. 양력으로 3월 정도 됩니다.
그리고 7월1일이 민간력으로 1월1일이 됩니다. 6개월 차이 나는데 이 달력은 농사 등을 위해서 만든 민간력입니다. 민간력으로 1월10일 대속죄입니다. 새해가 시작될 때 지난 해의 묵은 죄를 다 버리고 사함을 받고 새해를 새롭게 출발하는 것입니다. 원래 종교력으로 하면 7월10일이 됩니다. 양력으로 9월 정도 됩니다.
대속죄일에 금식하며 괴로워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지난 죄를 회개하고 사함을 받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염소 두 마리를 성전에 몰고 옵니다. 그러면 제사장은 그 염소에게 안수하고 죄를 전가합니다. 한 마리는 잡아서 피를 뿌리고 번제로 드립니다. 한 마리는 아사셀이라 하여 먼 산으로 데리고 가서 풀어줍니다. 자유롭게 가라는 다니라는 뜻입니다. 죄에서 자유롭게 된 인간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원래 모세오경을 통해서 전해준 금식하는 날은 일 년에 이 날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훗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또 우상을 숭배하여 법죄하여 나라가 망하고 예루살렘이 폐허가 된 날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생활을 70년 마치고 돌아와서 그 날 아빕월 9일을 금식하는 날로 정하였습니다.
그리고 부림절 전날 금식을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갔을 때 아각의 후손인 하만 총리가 모르드개 뿐 아니라 유다민족 전체를 말살하려고 왕의 조서를 꾸몄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대적 하만과 아각의 후손들을 물리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원을 얻고 승리를 얻었습니다. 그 때 왕후 에스더와 문지기 모르드개가 총리가 되어 대적을 물리치는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그 제비 뽑아 죽임을 당하려고 날을 잡은 그 날 오히려 구원의 날이 되고 대적을 물리치는 승리의 날이 도이 되었습니다. 그 부림절 이틀을 절기를 지켰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절기 전날 하루 금식을 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금식하는 날이 많아져서 예수님 공생애 시절에는 바리새인들이 일주일에 월요일과 목요일 이틀이나 금식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그들이 회개하고 새롭게 되기 위해 금식을 했는데 세월이 지남으로 그들이 남에게 보이려고 금식을 하는 외식하는 신앙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반대로 먹고 즐거워하고 잔치를 열고 떠들고 하니 바리새인들과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질문을 한 것입니다. 왜 선생님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신랑 되신 주님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함께 즐거워하고 축제를 여는 것이 마땅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그러나 [신랑을 빼앗기는 날이 오리니 그 날에 금식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고발당하시고 체포당하셔서 고난을 받으시게 됩니다. 머리에 가시관을 쓰기고 등에는 채찍에 맞으시고 또 무거운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 언덕을 오르십니다. 그리고 양손과 양발에 굵은 대못이 박혀서 죽임 당하실 때 주님의 제자들은 금식하며 괴로워 할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우리가 고난주간이 되면 성도들 가운데 금식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주님의 그 고난을 깊이 묵상하며 금식하며 죄를 회개하고 또 주님께 감사하는 시간을 가지는 것입니다. 아멘
둘째, 새 술은 새 부대에 넣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어서 말씀하시기를 17절 말씀에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
[마태복음 9:17]
포도주는 발효하는 음식입니다. 포도 농사를 지어서 그 포도를 따서 밟아 이겨서 큰 구덩이 담가서 즙을 짭니다. 그리고 그 즙을 염소가죽으로 만든 부대에 넣어서 보관을 합니다. 시원한데 보관을 하면 술이 발효가 되어 부풀어 오릅니다. 그리고 효소가 일어나서 영양가 있고 맛이 나는 포도주 혹은 포도즙이 됩니다.
이 때에 새 포도주는 발효를 많이 합니다. 그래서 새 가죽부대에 넣어야 합니다. 만일 오래된 헌 가죽부대에 넣으면 새 포도주가 발효를 심하게 하여 가죽부대가 터져버리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술도 쏟아지게 되고 가죽부대도 터져서 쓸 수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새 포도주는 새 가죽부대에 넣어야 합니다. 새 가죽부대는 신축성이 있어서 새 포도주가 발효를 많이 하더라도 가죽부대가 잘 견뎌내서 좋은 술을 만들어 낼 수가 있습니다. 물론 오래된 술은 발효를 심하게 하지 않으니 오래된 가죽부대에 그대로 보관을 해도 무관할 것입니다. 술은 오래 될수록 맛이 있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의 비유는 예수님으로 시작된 복음의 나라, 즉 하나님의 나라 신앙, 오늘날의 신약의 교회를 두고 하는 말씀입니다. 신약의 교회는 구약의 종교 틀에 맞추면 안 됩니다. 구약시대에는 구약시대의 종교 틀이 있습니다. 그들의 엄격한 율법중심의 신앙과 또 금식을 포함한 그 시대의 종교모습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함께하시는 신약 기독교는 활발하고 생기가 있고 생명력이 있는 종교입니다. 주님이 함께하시기 때문에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신앙입니다. 구약시대처럼 금식하고 고통스러워하고 엄격한 율법에 매여 살아가는 그런 신앙보다는 주 안에서 즐거워하고 성령충만함으로 능력 있는 삶을 사는 그런 새 생명의 삶인 것입니다.
성령 충만함으로 살아있는 생명력이 있는 그런 믿음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신약의 기독교 신앙을 구약의 율법 중심의 신앙에 맞추려 하며 포도주 부대가 터져버릴 것입니다.
예수님은 비슷한 비유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됨이요”
[마태복음 9:16]
헌 옷이 떨어졌는데 새로운 생베 조각을 기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생베 조각은 새로운 천이라서 탄력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탄력성도 없는 낡은 옷에 기우면 옷이 늘어나서 댕기면 옷이 찢어져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생베 조각은 탄력성이 있어서 쭉쭉 늘어지는데 낡은 옷은 늘어지지 않으니 오히려 찢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옷도 버리게 되고 새 천도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낡은 옷에는 낡은 천 조각을 새 옷에는 새 천조각을 붙여야 둘 다 보전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신앙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성도입니다. 우리의 신랑 되시는 예수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신약의 성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이 기쁨이 충만하고 성령 충만하고 즐거워하고 생명력 있는 삶과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만일 오늘날 신약의 기독교 신앙생활을 하면서 구약의 성도들처럼 율법주의로 산다든지, 금식과 슬픔으로 가득 차 있다든지 생명력이 있는 삶이 되지 못하는 그런 종교생활을 한다면 기독교 신앙과 맞지 않은 것입니다.
물론 금식 자체가 잘못은 아닙니다. 예수님도 공생애를 시작할 때에 40일 금식을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마귀의 공격을 물리치셨습니다. 그리고 능력 있는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또한 오늘날 살아가는 성도들 역시 큰 문제를 앞두고 금식하며 간절히 기도할 때 하나님의 역사함이 더 큽니다. 그리고 우리가 죄를 깨달을 때 때로는 금식하며 회개하고 기도할 필요도 있습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신약의 성도는 혼인집 신랑을 모시고 있는 친구들과 같습니다. 우리 신랑이 되시는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잔치집 같이 즐거워하고 축제를 열고 기뻐하는 신앙이 기독교 신앙입니다.
물론 기독교 성도도 금식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 주님이 체포되시어서 고난을 받으시고 고통받으신 것을 기념할 때, 우리는 금식하며 울고 통회하고 기도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멘
결론-주님의 나라 백성은 새로운 나라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타종교와 다른 믿음생활을 해야 합니다. 타종교는 많은 경우 자신을 괴롭히거나 고통을 감내하여 득도를 하려고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는 정반대입니다. 주님을 믿고 주님을 의지하여 기뻐하는 신앙으로 승리하는 종교입니다.
우리는 이전의 모습을 버려야 합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말씀처럼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기독교 성도가 되었는데 이전의 모습과 같이 변화되지 못하고 세상의 걱정과 염려와 죄와 탐욕에 사로잡혀서 살아서는 안 됩니다.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과 동행함으로 세상을 이기고 승리하는 기쁨의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