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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추는 세대(누가복음 7:29~35)
2024년 10월 13일 성락교회 주일연합예배 설교: 김성현 감독
모든 백성과 세리들은 이미 요한의 침례를 받은지라 이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의롭다 하되 오직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은 그 침례를 받지 아니한지라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니라 또 가라사대 이 세대의 사람을 무엇으로 비유할꼬 무엇과 같은고 비유컨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서로 불러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을 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침례 요한이 와서 떡도 먹지 아니하며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매 너희 말이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너희 말이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누가복음 7:29~35)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구원받으셨습니까? 그리고 여기 또 젊은 영혼들도 있는데, 여러분도 구원받으셨습니까? 전에 우리 교회는 구원받는 것을 인식하는 데 있어서 그 의미를 날카롭게, 균형있게 갖지 못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왜 그럴까?’ 하는 의문을 8년 넘게 가졌는데, 지금 보니 구원이라는 의미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균형 있게 다루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보여집니다.
‘구원’이라는 것이 무엇일까? 이전에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말했던 것이 생각이 납니다. ‘지옥에서 구원’, ‘율법에서 구원’ 또 ‘마귀에게서 구원’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마귀에게서 구원됐고, 지옥에서도 구원됐고, 율법에서 구원됐으면, 이제 자기를 제재할 것도 없고, 제재를 받을 일도 없는 것 아닙니까? 그러면 ‘범죄를 해도 괜찮은 것이다.’라고 생각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기게 됩니다. 그래서 그 부분에 대해서는 조금씩 조금씩 허용을 하여서 ‘아, 괜찮은가 보다.’ 하다가 나중엔 범죄하고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할 수 있는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계속 정확하게 하나님 말씀을 듣고,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구조적으로 잘 깨닫고, 말씀을 잘 받고, 그 말씀에 합당한 우리 삶을 만들어 가야 되는데, 만약에 설명이 충분히 주어지지 않았다면 오해할 수 있는 부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잘못 이해하고 갈 수 있는 부분이 많습니다.
성경적 구원을 더 확실하게 보면 어떤 것일까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지옥에서의 구원이라 하면 ”우와! 이제 아무렇게나 해도 다 천국 가네! 신난다!” 하고 ‘이제는 타락해도 괜찮구나.’ 하는 결론이 납니다. 또 율법에서의 구원도, ‘오!? 율법에서 해방? 이야~ 율법이 필요 없구나!’ 하게 됩니다. 그러면 안 되는 것입니다, 율법은 완성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구원의 본질은 죄의 힘에서, 죄의 권능에서의 구원받는 데 있습니다. 죄의 속박력, 죄의 속이는 힘에서 구원받은 것입니다. 예를 들어, 방울뱀이 꼬리 끝을 흔들고 있습니다. 다가오지 말라고 자기를 방어하기 위한 경고의 신호거든요? 그런데 그 모습이 재미있어서 가까이 다가가면 잠깐 한 눈 판 사이 뱀에게 ‘확’ 물리고 말 것입니다.
또 바다에 사는 어떤 생물은 엄청 큰데, 꼬리를 흔들어서 자기를 작은 물고기처럼 보이게 해서생물들을 유인합니다. 그래서 생물들이 다가오면 입을 벌려서 무방비상태에 있던 그것들을 잡아먹는 것입니다.
죄의 무는 힘과 속이는 힘이 이와 같습니다. 그것을 인간이 당해 내질 못합니다. 인류는 최초 이후로 죄에 계속 당해왔습니다. 그러나 이제 주님께서 우리 죄를 사하셨습니다. 이는 죄를 사하셨을 뿐만 아니라 죄의 속박을 다 깨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마귀의 왕국이 이미 무너졌습니다. 다만 마귀는 실형 선고받을 날만을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구원의 의미는 죄의 구속력에서 구원된 데에 있습니다. 무서운 죄에 항상 끌려 다녔는데, 이제는 이겨낼 수 있게 되었다.
그럼 여기 중요한 게 무엇이겠습니까? 죄를 거절할 수 있고, 죄를 이겨낼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그럴 힘이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죄를 이길 힘이 없습니다. ‘왜 죄를 피해야 되지?’ 그런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자기의 힘으로요? 아닙니다. 이기려고 하는 자에게 하나님이 힘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능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성경에서 능을 받는다는 것은 ‘인간이 할 수 없는 것을 성령이 능력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능력을 주는 것은 99프로가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내게 죄를 이길 힘을, 하나님을 섬길 능력을, 또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 수 있는 그 재능을 부여받는 것입니다. 죄를 이기는 힘.
죄를 이기는 힘은 어떻게 생길까요? 예수 믿을 때 우리가 얼마나 악한 죄인이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그리고 그 죄를 주님이, 대신 그 죄책을 가져서 그분이 자신이 죄가 되어서 형벌을 당하셨다는 것, 그래서 우리를 죄에서 놔주셨다는 사실인데, 가만히 나는 아무것도 안 했는데 그분이 나의 불행을 이미 대신 가져가 주셨습니다. 그리고 내게는 행복의 가능성이 남았습니다. 행복할 수 있는, 나의 행복을 만들어가는 그 즐거운 여정이 내 눈 앞에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을 때에 ‘나 이렇게 악한 죄인인데, 이제 나 그렇게 하지 말아야겠구나. 이거 벗어나야겠구나. 하나님의 자녀처럼 살아야 겠구나. 하나님처럼 살아야 되는 거구나.’ 하는 대결단을 합니다. 사실은 인생에 대해 울고불고 해서 정서적으로 대대적인 변화가, 지각변동, 대단한 상처가 있는 아픔이지만 최고의 기쁨과 함께 오는 이 시기를 지나야 합니다. 예수 믿을 때 받는 굉장한 영적체험에 대해 우리는 고민해야 될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지금 우리는 고민할 새도 없습니다. 사태로 인해 교회를 보호하고, 안전하게 지키는 데에 거의 모든 에너지를 쏟고 있습니다. 또 저는 저 나름대로 이외에도 교회를 살리기 위한 애를 쓰고 있어서 당장은 하지 못하지만, 우리가 이런 일들도 다 해야 됩니다.
많은 성도들은 그런데 예수 믿을 때 ‘어? 교회 오라는데? 나 구원받았다는데?’ 하고 신앙생활을 시작합니다. ‘나 죄 지었다는데, 죄를 다 사해 주셨다는데?’ 이렇게 생각하니까, 신앙의 본질에 대해서 꿰뚫지 못하고 그 주변에만 맴돌고 있는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압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을 그동안 들어온 것이 많이 있기 때문에, 그 심령 속에 이미 착념되어서 여러분 마음속에서 계속 주의를 주고, 여러분을 이끌고 있는 그 말씀들이 있습니다. 이 말씀의 조각들이 여러분 속에 있어서 계속 역사하는 것입니다. 우리 젊은 영혼들이라도 선생님들을 통하여 많이 들어왔을 것으로 봅니다.
다만, 우리 젊은 영혼들은 주일 오전 예배를 여기 대성전에서 회중들과 함께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면에서 우리처럼 심각한 고민을 해 오는 것이 없다 보니 ‘그런 감동이 있을까?’ 하고 좀 걱정되긴 합니다만, 함께 있을 때 또 그런 얘기를 좀 하고 싶습니다.
예수 믿는 것은 ‘내가 얼마나 주님에게 악한 원수였는가?’ 하는 것을 깨달은 것, 그리고 이런 못된 나를 대신하여 죽으신 하나님께 대하여 정말 몸 둘 바를 모르는 그 감사함으로 일생을 사는 것이거든요? 그는 우리에게 은혜 베풀어 주실 뿐 아니라 자녀까지 삼아주셨습니다. 원수를 자기의 아들로 또는 딸로 삼아 주신 것입니다. 바로 우리를 그렇게 한 것은 우리 미래에 대한 걱정하지 않도록 하나님의 아들로, 그의 나라의 왕자로 인정하고 왕자에 대한 권리를 주고, 인간들처럼 속이지 않고, 끝까지 데려가시겠다는 것입니다.
그가 성령을 우리에게 부어주실 때는 우리를 그의 것으로 완전히 도장을 찍는 것입니다. 인을 찍는 것입니다. 이것은 ‘This is mine.’ 이렇게 하나님의 도장을 찍는 것입니다. 또 ‘반드시 와서 너의 몸까지 구원하리라.’
그래서 신앙의 체험을 가지고 그리스도인이 되는 데에는 마음에 대충격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마음을 꼭 붙들 수 있는, 굉장히 큰 자국이 남는 충격이 없는 사람에게는 신앙에 대한 확신이 부족합니다. 믿음의 확신이 최고치가 100%라 그러면 저는 우리 성도들이85%, 90%는 돼야 된다고 보는데, 어쩌면 그런 격정적인 체험이 없는 성도들은 정말 불과 20%, 30%밖에 안 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되게 아쉬운 일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들도 나름대로의 열심을 다해서 하겠지만, 제일 중요한 건 마음의 신앙입니다.
뭐가 구원받습니까? “아~ 나 다 구원 받았대, 율법에서, 뭐 지옥에서~” 이런 사람들은 “당신은 어떤 의미에서 구원받는 사람이죠?”라고 할 때 “나 교회 다녀요. 이제는 나 천국 갑니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마치 교회에 참석하는 것이, 자기가 여기 멤버인 것이 곧 구원이 다 이루어진 것에 대한 보장과 다름없는, 오늘 ‘뿅’ 하고 목적지에 다 도달한, ‘오늘 예배 드리고 있으니 난 구원된 거다.’ 하는 직접적 증거로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사태를 겪고 특별히 사태와 관련해서 여러 가지 사건들을 통해서 교회에 참여하는 자가 하늘에 속한 자가 아니라는 증거를 많이 봤습니다. 하늘에 속한 자들이 와서 교회를 다 때려 부시고, 교회를 상대로 해서 고소 고발하고 하지 않습니다. 또 거짓 증거로 주의 종을 제거하려 하고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지금도 여전히 거짓 증거로 교회를 어렵게 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또 과거 부족한 일부 성도들의 모습들, 이런 것들을 볼 때 많은 사람이 구원이라는 것을 잘못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구원은 우리 속에서 역사하는 마귀의 끈이 끊어진 것입니다. 마귀는 계속 나를 부리고 속이면서 내게 세상의 그림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를 데리고 높은 곳에 올라가서 세상의 영광을 보여주면서 유혹했던 것처럼, 마귀는 자꾸 우리로 세상을 보게 합니다. 구원은 죄에서 구원입니다. 마음이 구원되는 것입니다. 주께서 우리와 연결돼 있던 이 사단의 끈을 ‘팍!’ 잘라버리셨습니다. 그래서 선포가 됐습니다. ‘마귀에게 속하면 멸망한다.’ 이제 마귀를 따르면 멸망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살려주셨습니다. 이제 마귀를 따라가면 안 되고, 이제부터는 하나님을 따라가야 됩니다.
신앙은 보통 사람이 신앙을 좀 갖고 삶에 도움이 되고 하는 정도의 차원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왕자입니다, 하늘의 왕자. 그 왕자에게는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지금 이 타이틀은 하늘에 들어갔다는 비자 정도가 아닌 것입니다.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면, 자기 아버지 명예를 위해서 오늘 이 땅에서 다 망하고 한 푼도 없는 자라 해도 하나도 불행하지 않을 것입니다. 단지 그 나라를 위해서, 자기 나라를 위해서 계속 정신이 거기 가 있을 것입니다. 내 나라 위해서.
또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의 제자들입니다. 예수의 제자라면, 그가 자기의 선생님이면서, 또 자기의 ‘주님’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주님이냐? 난 노예고 그분은 나를 소유한 주인입니다. 나는 주님의 노예입니다. 그러니 난 주님이 원하는 대로 할 뿐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인이요, 난 예수의 제자입니다.’ 이것이 누구에게는 불편한 족쇄일지 모르지만, 많은 그리스도인에게는 대단한 명예인 것입니다. ‘나는 이 땅에 오셨던 하나님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다!’
우리에게는 명예가 부족하지 않습니다. 어떤 면에서 그러냐? 여기에 단지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지난주에도 좀 말씀드렸지만, 충분히 말씀을 못 드린 것이 있는데, 우리의 본질이 다 선하지가 않습니다. 우린 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로마서라든지, 바울 사도의 가르침을 통해 나온 하나님의 말씀 보면, 우리 가운데 의로운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맞습니다. 다 따지고 보면 ‘와! 의롭다! 너는 자동으로 구원이다.’라고 할 사람이 없다는 것이지, 그렇다고 전부 악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상대적으로 착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들이 안 하는 것이 있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안 하는 것은, 예를 들어 어디 돈이 든 지갑이 떨어져 있습니다. ‘오? 돈이네.’ 그럴 때 ‘흠…이거 어떡하지… 아이 모르겠다.’ 하고 쓱 가져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음…안 돼.’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기서 지갑을 쓱 가져간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전혀 다릅니다. 믿는 사람은 악을 범할 수 있지만은 하지 않는 걸 결단한 자입니다. 이런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조금 높은 수위에 있고, 교회를 부시고 “다 끌어내려!” 하는 그 사람보다 조금 낮은 수위겠지만, 그 차이가 지옥과 천국이라는 차이를 만듭니다.
자동으로 하나님의 율법에 합당하게 여겨질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 기준을 자꾸 내세우지 마세요. 그것은 유대인들의 거만한 태도를 대응하기 위한 하나님 말씀입니다. 선한 사람, 할 수 있지만은 하지 않고, 이 속에 더러운 것도 있지마는 이기고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더러움에 자기를 다 내주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난 지금도 더러움에 자기를 완전히 내준 사람 때문에 인생이 회색빛이 되었습니다. 얼마나 이 전쟁이 오래갈까? 사태가 오래 가니까 너무 피곤하고 힘들고. 어떤 목사님은 내가 편하게 잘 지내고 있는 줄 압니다. 하지만 나의 하루는 나의 트로피 같은, 나에게는 힘든 일정입니다. 힘든 하루 견뎌가는 것이.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해도 되는 것을 안 하는 것입니다. 악을 행할 수 있는데 하지 않는 것입니다. ‘나는 원수를 이기고 있습니다. 나는 흠이 많고 죄악이 많지만, 마지막 날까지 나는 그리스도의 영광이 될 거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성분이 100프로가 의롭진 않습니다. 이만큼은 의롭고, 이만큼은 악합니다. 그런데 어떤 자는 그 악한 것으로 계속 뭔가 노리고 있다가 교회에 어디 구멍을 뚫어가지고 계속 자기 주머니에 돈을 넣고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교회를 위해서 자기를 희생하고 사랑합니다. 이 둘의 차이는 엄청납니다. 둘다 똑같이 악한 죄인의 본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본성으로 자기 그 악을 이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악에 자기를 내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빛에 거하라 하셨습니다. ‘빛으로 임하시네~’ 하는 노래도 있지 않습니까? 주님은 자신을 빛이라 하셨습니다. 무엇을 비추는 빛일까요? 우리의 마음을 비추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빛을 비추실 죄 짓고 있는 우리 육체를 비추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몸이 아니라 마음을 비추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자기 마음에 빛이 들어오는 것을 싫어합니다. 빛이 비춰지는 것이 싫습니다. ‘왜 죄에 대해서 자꾸 얘기해? 나에 대해서 얘기하는 것 같은데?’ 하면서 듣기 싫어합니다. 우리의 구원은 죄의 악력에서의 구원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에 보면, 침례 요한이 침례를 베풀러 오는데,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그거는 옛날 구약식의 이야기 아닙니까?’ 그렇게 말하지 마세요. 이는 그리스도 교회의 침례와 본질은 똑같습니다. ‘나 죄인이다. 나를 씻어 주옵소서.’ 하고 하나님 앞에 나온 것입니다. “나 죄인입니다. 씻어주십시오. 나, 새롭게 시작하고 싶습니다. 내 악한 마음을 멸하여 주십시오. 내 악한 마음이 멸하여지기를 원합니다.”
겉으로 보기에 바리새인들은 우아하고, 종교의 전문가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침례받지 않았습니다. 침례 받으러 간다는 것은 ‘나 죄인입니다.’라는 걸 인정하는 것이었습니다. 주님 앞에 나오는 자들도 원래 죄인이지만, 마음이 구원받을 자입니다. 그들은 이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처럼 ‘난 침례 안 받는다!’고 고집부리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죄인인 것은 온 백성이 아는 사실이었습니다. ‘세리? 완전히 깡패지. 완전히 악한 놈들이야.’ 사람들은 그들이 죄인인 것을 어차피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우리 죄인입니다. 날 씻어 주십시오. 씻기를 원합니다.” 하고 침례를 받으러 주님 앞에 나온 것입니다. 악의 힘을 이기기 원합니다.
바리새인이나, 율법사들에 대해 주님은 ‘이 세대의 사람이다.’라고 했습니다. ‘이 세대 사람’은 무엇일까요? ‘비유컨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서 서로 불러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을 하여도 울지 않았다.[1]’ 했습니다. 그러면서 침례 요한에 대해서는 ‘떡도 안 먹고 포도주도 마시지 않네? 정신이 나간 자다.[2]’라 하고, 주 예수께서 오셨을 때는 ‘봐라, 먹기를 좋아하고 탐하기를 좋아하고…[3]’라고 하면서 거짓을 끌어와서 막 비판을 하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릴 구원하러 나타나셨을 때는 이들 세대같이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세대는 춤추라고 피리를 불면 춤춰야 합니다. 또 같이 울자고 슬픈 노래 부르면 같이 울어야 합니다. 이것은 자기가 하기 나름입니다.
‘춤추는 세대’라는 노래가 있는데, 춤추는 세대라니까 ‘요즘은 그리스도 교회에서 막 춤춰도 괜찮은가 보다.’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그런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말씀을 빗대어서 한 것으로 보입니다. ‘주님을 기쁘게 한 것이라면, 또 주님의 나라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면, 누가 주님의 영광을 위한 반주를 조금 해주면, 차라리 춤을 추고, 그가 슬픈 노래를 부를 때 같이 엉엉 울겠다. 그러나 악의 구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악을 오히려 미워하지 않고 싫어하지 않는 자들은 그들을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거만하게 춤추지 않고, 슬픈 피리를 불어도 울지도 않는다. 거만할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춤추겠다.’ 하는 것입니다.
춤을 추는 것이 중요한 거 아닙니다. 춤을 추든지, 재주를 넘든지, 어떤 행위든 상관없습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는 뭐라도 하겠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이끄시는 대로 반응하겠다는 것입니다. 주님 나타나셨을 때 함께 기뻐하고, 주님 슬플 때 함께 슬퍼하고, 내 마음이 변화받겠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면 우리 교회를 사랑하는 것으로 보여야 합니다. 교회를 위해서 희생하는 것으로 보여져야 합니다. “난 오직 주님만 사랑합니다.” 하는 말은 ‘나는 하나님을 속이면서 죄를 범하겠습니다.’ 하는 소리로 밖에 들리지 않습니다.
자기 양심이 화인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디모데전서 4:2)
절대 이렇게 되지 말아야 합니다. 양심이 타락하면, 마음이 타락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리스도 교회의 신앙은 마음입니다. 영이 중요하다 하면서 몸으로는 막 죄를 짓고도 자기 영혼이 잘 보존된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있는데,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에베소서에서도 봤지만, 마음에 구원되는 것입니다.
또 디모데전서 3장에 보면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라야 할찌니”(딤전 3:9)라고 했는데, 집사의 요건입니다.
내 마음에, 양심에 말씀을 받고, 주님을 영접해야 합니다. 그러면 누가 뭐래도 상관이 없습니다. ‘나는 내 심령에 주님 모시고, 주님께 정직하고, 주님께 내 부족한 걸 아뢰고 하소연하고 주님의 인도를 받기를 원하는 나는 죄를 이긴 자다. 구원받은 자다! 나 같은 죄인도 받아주셔서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주님께 영광 돌립니다.’ 오늘 오전의 말씀과 일치하는 부분이 있는데, 이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내일 또 베대원 기숙사 ‘비츠힐’을 열게 되는데, ‘우리 기숙사 새로 오픈하는구나.’ 이 정도가 아니라, 거기 거쳐 온 많은 기억들이 있습니다. 아프고 쓰라리고 한 그런 것들. 또 사모와 나는 또 앞으로 해결해야 되는 법적인 것들이 있습니다. ‘왜 과거에 우리와 함께 했던 자들이 저렇게 할까?’ 빨리 지나가고 싶습니다.
이제는 우리 양심으로 하나님을 뵈올 때가 된 것입니다[4]. 겉으로 “나 몇 십 년 교회 다녔다.” 하지 마세요. 우리 성락교회 앞으로 희망이 없습니다. 지금 이렇게 되고, 희망이 없고, 이제는 우리가 저 바닥에서 우리가 전도하는 데 어려움이 없는 단계로 올라와야 합니다. 어떻게 할 수 있을까? 교회를 이렇게 괴롭히고, 교회를 파괴하려고 하면은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춤추는 세대’라고 해서 춤 열심히 추라는 얘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주님이 노래할 때 춤추겠다. 주님이 단조를 부르면 같이 울겠다. 주님이 장조를 부르면 같이 춤추겠다.’ 하는 여러분 되시길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기도하겠습니다. 우리 하나님, 우리를 받아 주시옵소서. 춤추는 세대가 되길 원합니다. 주님의 마음을 흡족케 하기 위해 함께 춤을 추고, 주님의 마음을 위로하기 위하여 함께 울겠습니다. 우리를 받아주시되, 내 마음이 원수에게 빼앗기지 않고 온전히 주님께 속한 내 심령을 주님 앞에 바칩니다. 우리를 받아주시고 역사하시고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다 같이 합심으로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오늘 말씀들은 우리 성도들 다 도와주시고, 우리 성도들의 심령을 역사해 주시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겉으로 하는 외형적 의식, 우리의 참여하는 회원증, 이런 것이 아닌,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주님을 영접한 것, 그것이 더 중요한 것임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원수에게 붙잡힌 자가 아닌, 구원의 하나님께 속한 우리의 심령이 되기를 원합니다. 부족한 것이 많지만은 우리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정말 주께서 기뻐하실 때 함께 춤을 추고, 또 다윗처럼 함께 춤을 추고, 또 주께서 슬프고 교회가 어려울 때에 함께 울길 원합니다. 우리를 역사해 주시옵시고, 참 신앙을 우리 속에 심어주시옵소서.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녹취: 성락교회 성락선교센터
[1] 비유컨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서로 불러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을 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눅 7:32)
[2] 침례 요한이 와서 떡도 먹지 아니하며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매 너희 말이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3]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너희 말이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눅 7:34)
[4]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히 9:14)
[출처] 20241013 춤추는 세대(누가복음 7:29~35) 성락교회 주일연합예배 김성현감독|작성자 이기택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