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할머니
할머닌 14세에 우리집안으로 시집오시어 아들 셋 딸 셋 낳으시고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어 청상이 되시었다
작은아들에게 시집온 때문에 작은애기가 집안에서의 호칭이었고
친정집 동네 이름따라 학동댁이란 댁호로 통하셨는데
여자에게도 호적이 생기는 바람에 조학동이라 이름 올리신 우리 할머니시다.
생전에 큰 성냄 한번 제대로 내신 적이 없으시고
아무리 화가난 일이 있더라도 밥은 꼭 챙겨 드시었다
청상의 외로운 마음 달래려고 시작하신 담배는 우리할머니의 유일한 기호품이었고
옛날 풍년초 시절엔 누런 풍년초 봉지를 모아두었다가 올
벼쌀을 만드셔서 한 봉지씩 담아서 어린 손자들에게 나누어 주셨기에
난 올벼쌀 맛이 원래 쌉쓰름한 담배맛이 나는 줄 알고 자라왔을 정도다
평생을 두고 돈을 모르고 살으셨기에 물건을 사실 줄도 모른다
할머님 말씀이 시장에서 물건을 사는 것은 남정네나 상것(?)들이 하는 일이지
아녀자가 절대로 장을 봐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한동안 도시에서 중고등 다니던 오빠들의 자취수발을 들으셨을 때도
오빠가 갈치며 고등어를 지푸라기 끈에 매달아 사들고 오면 그것으로 반찬을 만드시곤 하셨다
다른 할머니들은 고쟁이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어 손자들에게 사탕도 사주시고
용돈도 주시더구만 우리할머닌 돈이 필요 없으신 분이기에
고쟁이에 주머니를 달 필요도 없으셨다
할머니가 물건을 사셨다면 그건 곡식을 퍼주고 보따리 장수들한테 일용품 산 게 고작이셨다
그리고 우리할머닌 여느 분들이 모두 하시는 그런 것은 전혀 하시지 않았다
잔치집가면 으레 할머니들은 손수건에 떡이며 전 등등을 싸가지고 오시어
자식손자에게 나누어 주시 것만 절대 그러는 법이 없으셨으니
며느리인 우리엄마도 그 짓만은 하지 못하셨다
할머닌 남존여비가 투철하신 분이시다 TV 일기예보를 보시면서
남자가 일기예보를 하면 '어이 어이~'알았네~ 하시지만
여자통보관이 예보를 하면 '니까짓것이 뭘 안다고 그러냐~~ '하셨다
그러면서도 잘생긴 남자 탤런트나 아나운서들을 보고도 내 아들보담 인물이 못하다고만 우기신다
당신의 아들이 이 세상에 최고로 잘난 아들이다
읍내에서 오리쯤 떨어진 할머니 집에서 우리 집에 오시려면 짜곡재란 고개를 넘어야한다
그 고개에서 쉬고 계실 때 지나가던 장돌뱅이 닭장수가 말을 걸어오니
싸오신 비단 옷보따리 건네주며 가다가 김아무개 우리 아들네집에 내려주고 가라하고
가벼운 몸으로 집에 오시어 온집안 식구들의 놀림(?)의 대상이 되셨어도
'시상에 어떤 간큰 넘이 내 아들집 물건을 갖고 도망가~ 감히!!' 이런 분이시다
세상이 아무리 바뀌어도 자기 고집으로만 살아가신 분
오빠가 발바닥에 못이 찔려 아파할 때 언니의 메니큐어(머큐롬?) 발라주며 방방 뛰게 만드셨고
손자 따라 서울로 이사를 오셨는데 마포에서 한강을 바라보며 시상엔 한강보다 넓은 강은 없다 하시며
바다보다 크다하셨다 (할머니 친정은 작은 바닷마을이었다)
마포에 사시던 할머니 댁에 다니러가 늦은 밤에 우리 집으로 돌아올라치면
달도 없는데 어찌 가냐며 걱정하셨다 불빛천지 서울시내 이련만 항상 그리 말씀하셨다 그
건 진정 달빛이 없는 때문이 아니라 보내는 섭섭한 맘을 그리 표현하셨을 게다
시골에서는 보지도 듣지도 못한 임연수 생선을 보시고는 까맣고 입이 커서인지 아님 이름이 비슷한 때문인지
이미자라 하셨고 한 집에 기거하는 미쓰리도 미숙이라고 부르셨다
단명한 우리집안에 유일하게 90을 넘기신 우리할머님은 돌아가실 때도 한숨 자야것다 하시며
낮잠 주무시러 들어가시어 영원히 하늘나라로 가셨다.
젊은태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