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후반 남아프리카 공화국 흑역사의 한 쪽을 잔혹한 살인과 살육으로 꾸민 루이스 반 스쿠르가 영국 BBC 탐사보도가 그의 만행을 새롭게 폭로하고 의문점을 제시한 지 사흘 만에 7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절단한 다리의 감염 증세를 치료하기 위해 병원에 입원 중이었는데 그의 딸은 "패혈증 합병증 때문에" 고인이 지난 25일(현지시간) 저녁에 숨을 거뒀다고 BBC에 확인했다. 그에게 오빠 에드워드가 살해된 마를렌 음범비는 그가 죽었다는 소식에 충격을 받았다며 그의 사망에 관계 없이 경찰이 재조사해 진상을 규명해야 한다는 바람을 표명했다. 마를렌은 "그가 너무 쉽게 갔다! (피해자) 가족들은 정의를 누릴 자격이 있다. 우리는 지금까지도 답을 듣지 못했고 고통은 여전하다"고 강조했다.
당시 경호업체 직원었던 그는 흑인 남성 수십명의 사체에 총을 쏜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는데 자신의 만행이 경찰의 사주에 의한 것이라고 지난 22일 BBC에 털어놓았다. 그는 자신이 수행한 살인에 대한 책임을 다른 이들이 나눠 져야 한다고 말한다. 지난 4년 넘게 BBC 아프리카 아이(Africa Eye)와 얘기를 나눠 온 그는 자신이 감옥에서 일찍 풀려난 이유에 대해 진지한 의문점들을 풀어놓기도 했다.
BBC 월드 서비스는 그의 침대 곁에서 인터뷰를 진행했는데 그가 살아가는 환경은 한눈에 봐도 끔찍하고 암담했다. 그는 치아들이 빠져 있었다. 건강은 형편없이 나빴다. 심장마비를 일으킨 뒤 그의 두 다리는 최근 절단돼 그는 휠체어에 앉아 지낸다. 두 다리에는 고통스런 상처들이 가득했다. 의사가 절단 수술을 진행할 때 반 스쿠르는 일반 마취제 대신 경막외 주사를 놓게 해 그는 다리를 자르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었다.
그는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내가 괴물이 아니란 점을” 우리에게 납득시키고 싶다고 털어놓았다.
1980년대 3년 넘게 남아공의 아파르트헤이트 시스템은 백인 남아공인을 맨꼭대기에 앉히는 엄격한 위계질서를 밀어붙였고, 반 스쿠르는 적어도 39명의 흑인에 총질을 하거나 살해했다. 가장 젊은 피해자가 고작 열두 살이었다. 강풍이 몰아치는 것으로 유명한 이스턴 케이프 지역의 도시 이스트 런던에서 자행된 일이었다.
반 스쿠르는 경비요원으로 70%가 백인 소유인 식당, 점포, 공장과 학교를 지키는 임무로 고용됐다. 그는 자신이 살해한 모두는 이들 건물에 불법 침입해 붙잡은 범죄자들이었다고 오랫동안 주장했다. 반 스쿠르 사건을 20년 동안 추적해 온 남아공 기자 겸 영화감독 이사 제이콥슨은 "그는 잔인무도한 살인자였다. 그는 더티 하리 캐릭터였다”면서 "이들 침입자들은 많은 경우 먹을 것이 절실했던 이들이었을 뿐이다. 먹거리를 훔치려는 가련한 범죄자들이었다"고 말했다.
하룻밤에 여러 건도 자행되기 마련이었던 그의 살인은 이스트 런던의 흑인 사회를 공포로 몰아넣었다. 한밤중 사람들을 사라지게 하는 수염 기른 남자 얘기는 온 도시로 퍼져나갔다. 그렇다고 그의 총격이 비밀리에 수행된 것도 아니었다.
1986년부터 1989년까지 그는 자신이 살해한 모든 사건을 모두 스스로 경찰에 신고했다. 하지만 1990년 넬슨 만델라가 교도소에서 풀려나면서 그에 대한 면책은 끝났다는 신호가 켜졌다. 변화의 바람이 남아공을 휩쓸었다. 활동가들과 기자들이 압력을 가해 반 스쿠르는 이듬해 체포됐다.
그의 재판은 남아공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살인 재판 가운데 하나였다. 목격자가 수십명에 포렌식 증거 문서만 수천쪽이었다. 하지만 그를 기소한 사건 대부분은 법원에서 무너졌다. 그의 재판 시기에도 아파르트헤이트 시스템은 사법부 안에 자리를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적어도 39명을 살해했는데도 그는 단 7건의 살인으로만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는 징역 12년만 복역하면 풀려날 것으로 전망됐다.
다른 32건의 살인은 경찰에 의해 “정당한 살해”로 분류됐다. 아파르트헤이트 시대의 법률은 침입자가 체포에 반항하거나 달아나면 치명적인 완력을 써도 된다고 인정했다. 반 스쿠르는 달아나려는 범죄자들을 응징했다고 계속 주장해 재판부에 받아들여진 것이다.
1987년 반 스쿠르에게 살해된 에드워드의 형제인 마를렌 음범비는 “가슴 아프고 화난 단계에 갇힌 것처럼 보인다"고 말했다. 에드워드의 시신은 가족 동의도 구하지 않고 당국에 의해 무연고 묘역에 버려졌다. “많은 사람이 여전히 실종 상태이며 심지어 묘지에도 없다. 따라서 이들 사건은 종결되지 않는다.”
반 스쿠르 사건은 아파르트헤이트 시대 범죄 피해자들에게 보상을 제공한 1995년 진실과 화해 위원회 활동 때도 제대로 다뤄지지 않았다. 남아공 당국이 반 스쿠르를 기소하도록 압력을 넣는 데 앞장섰던 활동가 출신 샤를렌 크라게(Sharlene Crage)는 그가 지금도 자유롭게 돌아다니도록 허용하는 데 격분했다. "이것은 충격적인 정의의 유산(miscarriage)이다. 그의 사건이 재심리되지 말아야 할 어떤 이유도 없다.”
반 스쿠르는 1992년 재판이 끝났을 때 징역 90년 이상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판사는 각각의 형기를 끊어 복역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그는 2004년 가석방으로 풀려났다. 아파르트헤이트 시절 살인범들을 조기 석방하는 일은 남아공에서 늘상 있는 이슈다.
2022년 요하네스버그에서 Janusz Walus 가석방에 항의하는 시위가 벌어졌는데 그는 아파르트헤이트에 격렬하게 반대한 정치인 크리스 하니를 살해한 인물이었다. 그 몇 년 전에는 수십명의 흑인 활동가들을 납치하고 고문하며 살해한 죽음의 처형대를 지휘한 유진 드 콕이 풀려났다.
반 스쿠르는 세상을 뜨기 얼마 전 럭비 중계와 흡연, 반려견 로트와일러 브루투스와 놀며 시간을 보낸다. 그는 자신이 저지른 살인이 얼마나 많은지 기억하지 못한다고 털어놓는다. 몇몇 보도는 검증 없이 그가 100명은 살해했다고 주장했다. 반 스쿠르는 부인하면서도 기록된 39명보다 많다는 점은 순순히 시인했다.
과거 행동이 자랑스럽다는 어처구니없는 얘기도 늘어놓았다. “어떤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다. 속으로 어떤 뉘우침도 없다.”
BBC는 남아공 경찰과 접촉, 코멘트를 요청했으나 어떤 반응도 듣지 못했다고 했다. 당국은 왜 반 스쿠르 살인 사건이 포스트 아파르트헤이트 시대에도 재평가되지 않았는지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마를렌 음범비는 "너무 많은 고통이 있다. 그리고 지금도 우리가 치유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조치가 이뤄졌다고 느끼지 않는다"면서 “반 스쿠르에게 살해된 이들만이 아니다. 아파르트헤이트 정권에 살해된 비슷한 얘기를 지닌 이들도”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