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의 추억
정 금 자
갈수록 점점 날씨가 차거워 지는 가을이다. 농부에게는 이 계절이 가을의 보람과 뿌듯함을 느끼게 되어 즐겁다. 바로 풍요로운 수확의 기쁨을 맛보는 계절이기 때문이다. 들판은 황금파도의 물결로 모양을 뽐내며 가을걷이를 반기고 있다. 아무런 댓가도 없이 자연이 우리에게 내려준 찬란한 햇볕, 서늘한 바람, 갖가지 곡식들이 풍성하게 익어가는 가을이 농부에겐 추수할 기쁨에 가슴 벅차고 고된 일에도 웃음꽃이 핀다.
무엇이든 마찬가지겠지만 농사는 힘든 시작과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이 다른 업종과 다르다. 내 생각과 노동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수확할 때까지 마음을 놓을 수 없다. 하늘이 도와주고 땅이 도와야 하는 것이 농사다. 내가 하는 농사는 전문적인 농사가 아닌 자급자족의 텃밭 농사다. 소규모로 다양한 종류의 농작물을 조금씩 키운다. 처음엔 적은 수확의 기쁨을 얻기 위해 텃밭을 갈았다.
달리는 창밖을 바라본다. 많은 것들이 지나가고 있었지만 무엇보다 시간과 계절이
쉴새 없이 지나간다. 코로나를 심하게 격으며 생과 사의 갈림길에 서 있다는 느낌으로 많은 것을 생각해 보게 되었다. 한꺼풀 한꺼풀 던져 버리고 싶은 간절한 마음에 떨치고 일어나려 하지만 쉽지 않았다. 살아도 살아도 철이 들지않는 풋풋한 마음은 바람결에 흔들리는 영원한 나그네처럼 누워만 있었다.
어느 날 김장 무 씨앗을 파종할 때가 되었다며 그윽한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씨앗의 파종은 적당한 시기를 맞추어야 하겠기에 정신이 펄쩍 들었다. 절기는 이렇게 무심하게 돌아왔는데 사람만은 무심속에서 회복이 참 어렵다. 나이와 세월을 느껴본다. 절박한 현실 감각에 놓여서 다시 꿈을 꿀 수 있었으면 좋겠다. 아직은 꿈을 단념할 만큼 마음까지도 늙었다고는 생각이 들지는 않는다. 길가에 핀 코스모스가 너무 아름다워 옆모습을 바라보며 활짝 핀 웃음이 내 마음을 즐겁게 한다. 다리가 아프도록 온종일 걷고 싶다. 얼마 전 짙은 녹색 나뭇잎이 울긋불긋한 단풍으로 변모하는 요즈음이다. 단풍이 아름답게 물들일 때 대지를 먹여 살리는 흙이 한 해 동안 길러낸 보물을 쏟아 내느라 바쁘다.
어릴 적 고향을 찾았을 때 울고 싶을 만큼 지난날을 그리워 하는 내 마음은 옛 추억이 그립다. 어머니가 내일 벼 베기를 한다는데 조금만 더 있다가 벼 베기를 하면안되느냐고 말을 했다. 벼 베기는 비가오면 하루이틀이 아니고 열흘도 더 기다려야 하기에 서둘러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여름 동안 장마와 태풍 병충해를 이기고 돌아온 개선장군처럼 황금 물결로 파도치는 벼가 자랑스러웠다. 논을 바라보며 새쫒던 추억도 눈에 선하다. 행복했던 시절이다. 그림 같은 들녘이 너무 보기 좋아 좀더 보았으면 싶었다.
오늘은 벼 베기를 하는 날이다. 어머니와 이웃집 아주머니는 밥 광주리를 머리에 이고 가는데 강아지도 좋아 하며 덩달아 따라나선다. 울퉁불퉁한 길에 머리에 이고 가는 광주리가 무거웠는지 어머니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혔다. 나는 바가지 꾸러미를 손에 들고 따라갔었다. 논둑에 밥상이 차려졌다. 반찬 이래야 김치, 각종 나물과 청국장. 무생채. 꽁치 몇 토막이지만 맛있게 먹는 모습이 즐거워 보인다.
나는 그동안 메뚜기를 잡으러 논으로 갔다. 메뚜기를 병에 많이 잡았을 때다 메뚜기의 파닥거리는 소리가 살려 달라고 애원하는 소리로 들려 깜짝 놀랐다. 불쌍한 생각에 병뚜껑을 열고 놓아 주고 나니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일꾼들의 식사가 끝난 뒤 밥과 반찬이 많이 남았으니 우리도 먹고 가자며 바가지에 나물과 청국장에 무 생채를 넣어 비빔밥을 만들었다. 어찌나 맛있던지 지금도 생각이 난다.
나는 어릴 적 보았던 봉숭아, 채송아, 매드라미만 봐도 정겹고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진다. 고향을 만난 듯 동심이 되살아난다. 나는 자연이 주는 온갖 좋은 것들과 더불어 자연이 신음하고 울부짖는 소리에 귀 기울이며 땅을 가꾸어 살기 좋은 고장으로 가꾸어 나가길 희망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