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
임승환
종이컵에 얼룩진 선이 있다
네가 그어놓은 선 같다 그 부분까지
끓는 물을 부으면 그 선이 지워질까
한동안 기다렸던 생각, 말라붙은
감정의 밑바닥이 풀어진다 컵에
온기가 돈다 컵이 따뜻해졌다면
이미 식어가는 커피의 온도, 휘저어
가라앉은 기분을 일으킨다 어제도 그랬다
커피는 자주 가볍게 대화하는 건데
나는 컵 언저리에서 맴도는 거품처럼
짧은 시간에 우물쭈물했다
미지근한 컵을 감싸 쥐고
너도 지루하게 식어갔다 홀로
달궈진 생각을 내밀지 못했다 감정까지
가라앉은 농도는 더욱 짙어지고
침묵을 견디는 동안 식어버린 커피를
어제의 너처럼 천천히 마신다 허공에서
흔들렸을 눈빛이 엎질러지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았다 오랫동안
눅눅해진 무늬들을 본다 식어버린
커피 맛이 입안에 맴돈다 이제 그만
종이컵을 구겨버리려다가
좀 더 기다리기로 한다
커피포트를 다시 켠다 자주
커피를 마시며 가볍게
안부 인사만 나누기로 한다
강남행 광역버스
도대체 하루는
아침부터 왜 이렇게 엎질러지는 걸까요
커피 자판기에서 하루를 뽑아 들고 서있습니다
정거장 구석에 버린 날들이
벌써 수북하게 쌓여있습니다 허겁지겁 뜨거운 시간,
종이컵은 금방 식고 쏟아진 커피
얼룩은 지워질 때까지 밟힙니다
힘이 센 내일을 믿어야 하나요
밖은 파랗게 살아나는데 만원 버스에 매달려
하루가 빈 컵처럼 구겨집니다
꽉 막힌 숨을 내쉬며 바라보는 창밖은 언제나
어디나 똑같습니다 시간을 밀고 당기면
넘어지던 아모르파티가 경쾌하게 일어설까요
숨이 막힐수록 빨리 달리기를 응원하지만
급할수록 더 막히는 시간 위의 길, 차가
다 건너갈 때까지 기다려주지 않는
신호등을 무시하고 달리는 순간
눈을 감아야 할 때가 많습니다 급브레이크에
가슴을 잃어버리기도 합니다 얼굴이 투명한
그녀가 내 가슴을 주워 들고 놀란 눈으로
쳐다보네요 허공을 맴도는 두 발, 벌써 강남 근처인지
디딜 땅이 마땅치 않습니다. 어디서든
내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녀에게
자판기 커피라도 한 잔 권하고 싶은데
하루가 품절일지도 모르고, 오랜 동행이라고
다 믿을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컵 회수기에
차곡차곡 쌓인 날들은 재생이 될까요
버스에서 쏟아져 내려와
발길질하면 뒹구는 건 빈 컵들뿐인
아침입니다 구겨진 와이셔츠를 펴고
느슨하게 풀었던 넥타이를 다시 졸라맵니다 오늘도
출근 시간은 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