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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22일 [연중 제20주간 화요일]
마태오 19,23-30
낙타가 바늘귀 통과하는 유일한 방법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라고 하십니다.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주고 당신을
따르라고 했지만, 그럴 수 없어서 우울해진 부자를 보며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사람을 그 ‘크기’로 보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부자는 낙타의 크기이고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바늘귀보다 작아야 합니다.
사람마다 정말 크기가 다양합니다.
본래 우리의 크기는 태어날 때 우리의 본모습입니다.
우리는 숨만 쉬고 있어도 행복한, 그러나 낳아주지 않고 만들어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이것이 우리 본래 크기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하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하셨는데, 그 뜻은 이렇게 작아져야 한다는 뜻이었습니다.
작아짐이 겸손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성장하면서 세상의 영향으로 자기의 몸집도 키웁니다. 누군가의 자녀로, 누군가의 형제로, 누군가의 친구로, 무엇을 가진 사람으로, 어떤 스팩을 지닌 사람으로, 예쁜 사람으로 자신을 덮어씌워 갑니다.
이 껍데기들이 마치 양파처럼 자기 몸집을 키웁니다.
그것들이 마치 나의 살과 피가 되어 그것을 떼어내면 살이 떨어져 나가는 아픔을 느낍니다.
그리고 그 껍데기가 벗겨질까봐 두려워서 쉽게 화를 냅니다.
창세기 6장에 나필족이라는 거인이 나오는데 그 거인은 하늘의 사람, 곧 바늘귀보다 작아서 하늘을 날 수 있는 크기였다가 땅의 여인들과, 곧 재물이나 애정, 명예 등과 혼인하여 자신의 몸집을 키운 존재를 의미합니다.
나필족은 노아의 배에 들어올 수 없었습니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려면 이 세상에 태어날 때처럼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바늘귀보다 작은 존재가
돼야 합니다.
막시밀리아노 콜베 신부님은 탈출을 시도하다가 잡힌 사람 때문에 열 명이 처형을 당해야 하는데 죽기 싫어하는 사람을 위해 가차 없이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었습니다.
어차피 세상에서 잃을 게 없는 존재로 자신을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우리 몸집을 줄일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사람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어떻게 껍데기를 벗고 바늘귀보다 작게 되도록 하신다는 것일까요?
그리스에 알렉산더대왕이, 몽골에 징기스칸이 있다면 인도엔 아소카 대왕이 있습니다.
아소카 대왕은 정복 군주이면서도 알렉산더나 칭기즈칸과는 다른 덕목이 있었습니다.
가장 잔혹한 살육자에서 평화주의자로 극적인 전환을 이뤘기 때문입니다.
아소카 대왕은 인도를 침략한 알렉산더의 군대를 몰아내고 인도 최초의 통일왕국을 연 마우리아왕조 창건자 찬드라굽타의 손자입니다.
찬드라굽타의 아들 빈두사라왕은 중앙인도와 데칸고원까지 넓힌 영토를 분할통치하기 위해 무려 16명의 부인을 맞아들여 101명의 왕자를 두었습니다.
아소카 대왕은 친동생 한 명만 빼고 이복형제 99명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렇게 즉위한 8년 뒤 치른 칼링가 전투는 피의 전쟁이었습니다.
칼링가국은 코끼리부대까지 갖춰 찬드라굽타마저도 정복하지 못한 강소국이었는데 마우리아국이 벵골만으로 진출해 동남아와 스리랑카까지 교역로를 넓히기 위해 반드시 확보해야 하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칼링가 전투에서 이기기는 했지만 수십만 명의 사상자를 본 아소카대왕은 다야강에 칼을 버리고, ‘이제 (전쟁의) 북소리의 정복자가 아닌 담마(진리)의 정복자가 되자’라고 다짐했습니다.
자신의 정복으로 인한 파괴와 인명 손실에 겁을 먹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경험도 합니다.
“왕궁 베란다에서 어느 날 길거리를 내려다보던 아소카 대왕은 어린 사문(승려)이 위풍당당하게
걸어가는 모습을 보고 데려오라고 합니다.
이야기를 듣다 보니 그는 왕위 계승 1순위였다가 독살당한 이복형 수시마의 아들 니그로다였습니다.
그로부터 짧은 ‘법구경’을 듣고 아소카 대왕의 마음이 움직였다고 하나, 이복형에 대한 미안함으로 니그로다의 종교를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아소카 대왕이 없었다면 불교는 세계적인 종교가 되지 못한 채 인도에서 소멸했을지 모릅니다.
아소카대왕이 담마 사절단 혹은 전법사를 스리랑카는 물론 지중해 연안인 이집트, 그리스, 시리아까지도 파견했기에 한·중·일 삼국은 물론 동남아 전체에 불교가 전통 종교로 자리매김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제국 전역의 바위와 기둥에 새긴 일련의 칙령으로 ‘다르마’를 공포했습니다.
이 칙령은 비폭력, 모든 생명체에 대한 존중, 다양한 종교적 관행에 대한 관용, 인간과 동물 모두를 위한 병원 설립을 설교했습니다.
아소카 대왕이 인도의 가장 강력한 폭군에서 인도의 가장 덕망 있는 왕이 된 데는 바로 그 자신이 찌르고 죽은 이들을 자기 눈으로 직접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아니었다면 그를 작게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을 것입니다.
사람이 작아지는 방법은 나의 욕심 때문에 피해를 본 사람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는 양심이 있어서 그 모습을 바라보면 내가 작아집니다.
어머니의 죽음이 나의 잘못 때문이었음을 안다면 어떨까요? 작아집니다.
껍데기를 벗어버리게 됩니다.
아이가 작아질 수 있는 이유는 부모가 자신 때문에 받은 상처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어느 소매치기가 자신의 범죄 때문에 어머니가 수술하지 못해 죽었다면 그가 이젠 소매치기로 커지는 일을 계속할 수 있을까요? 양심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 겸손해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우리 죄로 인해 당하신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 십자가를 바라봅시다.
그러면 작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십자가가 유일한 구원의 힘이 되는 이유는 그분이 바로 나 때문에 피를 흘리셨기 때문입니다.
저 또한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라는 말씀으로 작아짐을 느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그분이 나의 죄 때문에 흘린 피를 묵상하면 됩니다.
그래서 아침마다 ‘주님 수난 7기도’를 바치기를 강력히 권고합니다.
내가 작아져 결국엔 연옥도 거치지 않고 바늘귀보다 작은 문으로 천국으로 바로 들어가게 만드는 기도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8월22일 [연중 제20주간 화요일]
마태오 19장 23-30절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니 저희는 무엇을 받겠습니까?”
여러분은 도둑입니다
아이들과 저녁식사를 할 때였습니다.
한 개구쟁이 친구가 다가오더니 심각한 표정으로 제게 할 말이 좀 있답니다.
가만히 듣고 있노라니 아이 입장에서는 정말 큰 고민꺼리였습니다.
“신부님, 제 말 좀 들어보세요.
저희 반 통틀어 핸드폰 없는 사람이 저 포함해서 딱 두 명이었거든요.
그런데 얼마 전에 ‘그 친구’ 외할머니가 핸드폰을 사줬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결론은 저희 반에서 핸드폰 없는 사람은 유일하게 딱 한명, 바로 저란 말입니다.
신부님, 입장을 한번 바꿔서 생각해보세요.
신부님이 제 입장이라면 어떻겠냐고요?
그래서 결론은 뭐시냐, 삼촌한테 잘 이야기해서 꼭 제 소원 좀 들어주게 해달라고요.
신부님, 알겠죠?
신부님만 믿습니다!”
때로 심각한 얼굴로 진지하게, 때로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애원조로 매달리는 녀석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그 모습이 얼마나 귀여운지 모릅니다.
또 다른 녀석, 이제는 완전히 자랄 대로 자라서 꽤나 ‘부담스러워진’ 녀석이 저한테 자리에서 일어서보라네요.
왜 그러나 했더니 자기하고 키를 한번 재보자는 것입니다.
한 달 전까지는 분명이 저보다 1cm 정도 작았는데, 이번에는 녀석의 키가 저보다 훨씬 더 커버렸습니다.
드디어 저보다 더 커졌다며 활짝 웃는 녀석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마음이 갑자기 부자가 된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참으로 행복한 저녁시간이었습니다.
요즘은 수도회 안에서 별로 영양가 없는 이런 저런 책임을 맡다보니 아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많이 줄어들었습니다.
지난 시절을 돌아보니 돈보스코의 아들로서, 살레시안으로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아무래도 철부지 녀석들과 함께 티격태격, 아옹다옹할 때였습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아이들이 하루하루 몰라보게 달라지는 모습을 눈으로 확인한다는 것은 참으로 큰 보람이었습니다.
흔들리던 아이들이 안정을 되찾고 갈팡질팡하던 아이들이 제 갈 길을 걸어가는 모습을 바라본다는 것은 이 세상 그 어떤 기쁨보다 큰 것이었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하는 기쁨이 얼마나 큰 것인지, 그들을 동반하면서 얻는 행복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잘 알고 있었던 돈보스코였기에 이런 말까지 남겼습니다.
“나는 청소년 여러분과 함께 있는 것이 정말 기쁩니다.
내게 있어 가장 큰 기쁨은 이렇게 청소년 여러분과 함께 있는 것입니다.”
“청소년 여러분, 멀리서나 가까이서나 항상 여러분을 생각합니다.
내게 있어 단 한 가지 소원은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나 저 세상에서나 행복한 것을 보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청소년 여러분, 여러분은 도둑입니다.
왜냐하면 제 마음을 송두리째 빼앗아가 버렸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청소년의 사도 돈보스코 성인의 탄생일입니다.
오는 2015년이 탄생 200주년이니, 아직 살아계셨더라면 올해로 연세가 196세가 되겠네요.
돈보스코는 1815년 8월 16일 토리노 근교 베끼라는 작은 시골마을에서 아버지 프란치스코 루이지 보스코와 어머니 말가리다 오키에나 보스코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어린 요한 보스코에게 큰 비극이 닥쳤습니다.
아버지 프란치스코 보스코가 1817년 5월 11일 서른 세 살의 나이로 사망한 것입니다.
차가운 지하실에서 일하다가 폐렴에 걸린 지 이레 만의 일이었습니다.
돈보스코는 당시 두 살이 채 안되었지만, ‘오라토리오 회고록’에서 애절한 어조로 그 슬픈 사건을 회상합니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은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내 인생 최초의 기억이라 할 수 있다.
모든 사람들이 아버지가 숨을 거둔 방에서 나갔다.
그러나 나는 그들을 따라 나가려고 하지 않았다.
비애에 잠긴 어머니는 거듭 타일렀다.
“요한아, 어서 이리 온. 엄마랑 나가자.”
“아빠가 안 가면 나도 안 갈 테야.”
“가엾은 것, 이제 너는 아빠가 안 계시단다!”
어머니는 울음을 터트리며 나를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어머니가 우는 것을 보고 나도 덩달아 울었다.
아버지를 잃는다는 것이 얼마나 큰 불행인지 아직 이해할 수 없는 나이였기 때문이다.
프란치스코 보스코가 사망한 뒤, 말가리다가 이끄는 가족의 재정 상황은 이태 동안의 가뭄과 기근을 고려하더라도 몹시 악화되었음에 틀림없습니다.
예를 들어 가축 우리에는 암소한 마리와 송아지 한 마리만 있었던 듯합니다.
말가리다의 빚은 프란치스코 소유의 모든 가축을 합한 값에 달했습니다.
돈보스코는 그의 어머니가 이 무렵 이름을 밝힐 수 없는 신사에게서 아주 유리한 제의, 하지만 아이들은 데려가지 않는다는 조건을 받았다는 사실도 애기합니다.
“아들들은 좋은 후견인에게 맡길 수도 있다는 애기를 듣고” 그녀는 “온 세상의 금을 다 준다 해도 결코 아이들을 버리지 못합니다.”라며 그 제안을
단호히 거절했습니다.
돈보스코가 이 일에 대해 분명하게 말한 것은 아니지만, 이것은 청혼이었고, 젊은 과부가 보통 택하는 행로였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거의 없었습니다.
이것은 말가리다 입장에서 용기 있는 결단이었습니다.
19세기 과부들은 고아들처럼 고대(古代)에서와 마찬가지로 아직 사회에서 가장 힘없는 존재였습니다.
많은 과부들이 그런 제안을 덥석 받아들이곤 했습니다.
그녀의 결정은 영웅적인 것이었으며, 보스코가(家) 아이들은 운이 좋은 것이었습니다.
말가리다는 자신의 앞길에 무엇이 놓여있었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지독한 가난 속에서 그녀는 이제 가족의 생계를 도맡아야 했던 것입니다.
혹독한 노동과 한없는 희생을 감내해도 혼자 벌어 다섯 식구를 먹여 살리기 빠듯했습니다.
이렇게 보스코 가족은 1820년대를 힘겹게 버텨냈습니다.
아버지와의 때 이른 사별, 그리고 곧 다가온 혹독한 가난은 솔직히 돈보스코 성소 여정에 참으로 많은 어려움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러나 어린 시절 체험했던 아버지 부재 체험,
가난으로 인해 견뎌내야 했던 많은 어려움들은 오히려 그가 나중에 가난한 청소년들을 위해 깊이 투신하는 배경이 되어주었습니다.
돈보스코는 베드로 사도처럼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자신이 지니고 있던 모든 것들, 건강 젊음, 능력, 마음, 사랑, 미래 모두를 자신을 위해 사용한 것이 아니고 살아있는 예수님이신 가난한 청소년들을 위해 바쳤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 결과 무엇을 받았을까요?
엄청난 선물을 받았습니다.
살아있을 때부터 성인 칭호를 들었습니다.
돌아가시고 나서 얼마나 그에 대한 칭송이 대단했던지 신속하게 시복시성 절차를 밟기 시작했습니다.
수많은 제자들이 그의 교육노선에 박수를 보내며 자신의 교육활동의 이정표로 삼았습니다.
셀 수도 없이 많은 남녀 살레시오 수도자들, 협력자들, 살레시오 가족들이 돈보스코의 영성에 따라 열심히 살아가고 있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20주간 화요일 강론>
(2023. 8. 22. 화)(마태 19,23-30)
(복되신 동정 마리아 모후 기념일)
<낙타와 바늘구멍>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는 하늘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려울 것이다.
내가 다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제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몹시 놀라서, ‘그렇다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눈여겨보며 이르셨다.
‘사람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마태 19,23-26)”
낙타는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라는 말씀은, “부자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라는 뜻입니다.
바로 앞에 있는 “부자는 하늘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려울 것이다.” 라는 말씀도, 부자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을 듣고 제자들이 ‘몹시’ 놀란 것은, 자기들의 생각과 너무 다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당시의 유대인들처럼 사도들도 ‘부유함’을 ‘하느님의 복’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렇다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라는 말은, “하느님의 복을 많이 받았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이 하느님 나라에 못 들어간다면, 누가 들어갈 수 있는가?” 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그들을 눈여겨보며” 라는 말은, “그들의 마음속을 꿰뚫어보며” 라는 뜻인데, 예수님께서 특별하고 새로운 가르침을 주려고 하신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사람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라는 말씀은, “사람은 자신의 힘만으로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하느님께서 자비를 베풀어 주셔야만 그 나라에 들어간다.” 라는 뜻입니다.
그 나라는 ‘내가 나의 힘으로’ 들어갈 수 있는 나라가 아닙니다.
들어가고 싶어 한다고 해서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나라도 아니고, 자격을 갖추었으니 들어가게 해 달라고 요구할 수 있는 나라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나라는 전적으로 하느님께서 받아 주셔야만,
또는 하느님께서 문을 열어 주셔야만 들어갈 수 있는 나라입니다.
이 원칙에 예외는 없습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일은, ‘내가’ 하는 일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나를 데리고 들어가시는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충실하게 살면서, 예수님께서 나를 데리고 가시기를 청할 뿐이고, 나의 간청을 받아 주시기를 기다릴 뿐입니다.>
그런데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부자”는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다음 두 사람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어떤 부유한 사람이 땅에서 많은 소출을 거두었다. 그래서 그는 속으로 ‘내가 수확한 것을 모아 둘 데가 없으니 어떻게 하나?’ 하고 생각하였다. 그러다가 말하였다.
‘이렇게 해야지. 곳간들을 헐어 내고 더 큰 것들을 지어, 거기에다
내 모든 곡식과 재물을 모아 두어야겠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 말해야지.
′자, 네가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
그러나 하느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루카 12,16-20)”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 그의 집 대문 앞에는 라자로라는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 있었다.
그는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개들까지 와서 그의 종기를 핥곤 하였다(루카 16,19-21).”
이 두 비유에 나오는 부자는 어쩌면 ‘같은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자신의 쾌락만 생각하면서 이웃의 사정에 무관심한 것, 인생이 얼마나 덧없는지를 생각하지 않는 것,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일에는 관심도 없고, 희망하지도 않고, 노력하지도 않는 것, 그런 점에서 두 부자는 똑같이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오늘날에도 그렇게 어리석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재산이 많고 적음을 떠나서......>
“그때에 베드로가 그 말씀을 받아 예수님께 물었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니 저희는 무엇을 받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러운 자기 옥좌에 앉게 되는 새 세상이 오면, 나를 따른 너희도 열두 옥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심판할 것이다.
그리고 내 이름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아버지나 어머니,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모두 백 배로 받을 것이고 영원한 생명도 받을 것이다.
그런데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마태 19,27-30)”
여기서 “가족을 버린다.” 라는 말은, 실제로 가족을 버리거나 포기하는 것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 가족에 대한 세속적이고 현세적인 집착을 버린다는 뜻입니다.
가족은 결코 ‘버림’과 ‘포기’의 대상이 아닙니다.
우리는 끝까지, 하느님 나라에 도착할 때까지,
가족을 사랑해야 하고, 가족과 함께 구원받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세속적이고 현세적인 집착이란, 가족을 사랑한다고 주장하지만, 가족을 하느님 나라의 반대쪽으로 데리고 가는, 헛되고, 속되고, 어리석은 일들, 부질없는 욕심 같은 것들입니다.>
여기서 “그런데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인간 세상에서는 마음껏 부귀영화를 누리는 사람들을 첫째로 생각하지만, 그 사람들이 바늘구멍을 빠져나가지 못하는 낙타와 같은 사람들이라면, 하느님 나라에서는 꼴찌가 될 것이다,
즉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라는 뜻입니다.
<뜻을 생각하면 ‘그런데’보다는 ‘그래서’로 번역하는 것이 더 적절합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