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편지
황동규
1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背景)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산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 보리라.
2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 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 때 기다림의 자세(姿勢)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치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들 믿는다.
(『현대문학』 47호, 1958.11)
[작품해설]
이 시는 수동적이 아닌, 적극적인 기다림의 자세를 노래했다는 점에서 우리의 전통적인 연시(戀詩) 계보에서 새로운 영역을 개첫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작품이다 황동규의 등다작의 하나인 이 시는 두 개의 독립된 시를 연결해 놓은 듯 하지만, 실상은 2연으로 이루어진 산문시로, 변함없이 기다리는 사랑을 노래하고 있다.
아름다운 사랑은 많아도 영원한 사랑은 없다. 영원하리라 믿었던 사랑도 결국엔 세월과 함께 사라져버린다. 바뀌어져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것을 좀도 자세하게 풀어 보면 다으돠 같다.
1연 : 내가 그대를 생각하는 것은, 해 지고 바람 부는 것과 같은 자연 현상처럼 사소하고 보잘것없는 일이지만, 결코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워할 때, 그 평범하고 변함없는 사랑으로 그대를 불러 볼 것이다.
2연 : 정말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나의 사랑을 자연 현상처럼 한없는 기다림으로 바꾸어 버린 데 있다. 시간이 지나 또 눈이 퍼붓고, 그 눈이 그치는 것처럼 내 사랑도 언젠가는 끝날 때가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안다. 그러나 그 때도 나를 지탱시켜 줄 것은 기다림일 뿐이다. 그 과정에서도 자연 현상은 여전히 계속될 것이고, 나는 나의 사랑을 기다릴 것이다.
사랑이란 그 이름만으로도 아름답고 가슴 벅찬 것이지만, 변화무쌍하고 일시적이며 사치스러운 것이기도 하다. 커다란 위안과 억누를 수 없는 행복을 가져다조기도 하지만, 세월을 따라 언젠가는 끝나고 만다. 영원할 것이라 믿었지만, 그것은 내리고 있는 눈과 같아서 시간이 흐르면 반드시 그치고 만다. 그리므로 우리 삶에 중요한 것은 일시적으로 휩쓸리는 일회성의 격정이 아니라, 아픔까지도 다 포용할 수 있는 기다림일 것이다. 왜냐하면 기달밍란 그리움과는 달리 변함없음이라는항구적인 정서를 바탕으로 ‘그대’의 반응 유무에 관계없이 지속적으로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고통스러운 일임이 분명하지만, 그 눈 내리는 고통의 계절을 몸소 이겨내면서 이루어 낸 기다림의 자세야말로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만큼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화자가 기다리고 있는 대상인 ‘그대’는 꼭 사람으로 국한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것은 자연일 수도 있고 신과 같은 절대자일 수도 있다.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자연 현상처럼 또는 우주적 질서에 따라 자연의 순환 원리처럼 변함없는 기다림, 그거삼이 화자에겐 중요한 것이다.
그런데 이 시를 황동규 시의 중심축의 하나인 아이러니라는 측면으로 살펴보면, 이와는 다르게 이해될 수 있다. 1연에서 사랑하는 일의 ‘서소함’을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에 비유한 것은 사랑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인간의 사건임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거대한 자연 현상을 사소한 것으로 판단하는 아이러니가 개입되어 있다. 사랑의 사소함이 자연의 사소함에 비유됨으로써 그 사소함의 의미가 새로워지게 된다. 결국 사랑은 사소하지 않으면서도 사소한 일이 되는 것이다.
2연에서 화자는 기다림에 대해 말하고 있다. 기다림이란 한국 전통 서정시의 경우, 부재하는 임에 대한 사랑을 지키려는 화자의 일반적인 태도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그런 관습적 의미에다 몇 가지의 아이러니를 개입시킨다. 그것은 2연의 진술들이 ‘그대’가 아닌 ‘나’를 지향하고 있는 데서 알 수 있다.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버린 데 있었다’라고 화자가 고백할 때, 그 고백은 ‘그대’가 아닌 ‘나 자신’을 향해 발화(發話)된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그대’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나’ 스스로 설정한 자세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리고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라는 묘사에 이어,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라는 단정적 진술이 나오게 되는데, 자연 현상에 관한 이러한 묘사는 사랑에 대한 화자의 단호한 태도를 드러내기 위한 시 ⸱ 공간적 근거가 되기에 충분하다.
이와 같은 단정은 사랑의 사소함에 관한 진술의 연장이면서 동시에 기다림의 영원성에 대한 관습적인 관념을 뒤엎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단정은 사랑의 무상함에 대한 예감과도 관련되지만, 사랑이라는 사건 역시 변화하는 자연 현상의 일부라는 것을 드러내어 그 사소함의 아이러니를 다시금 상기시킨다. 이런 문맥으로 본다면 이 시는 사랑의 절대성과 영원성을 노래하고 있다기 보다는 전통적인 연시의 어법을 차용하고 있으면서도 사랑으라는 관념의 무게를 가볍게 만드는 변용을 취함으로써 사랑의 사소람에 관한 작은 속삭임의 시가 되었다고 할 수도 있다. 이러한 아이러니는 ‘그대’를 향해 보내는 ‘나’의 전언이 ‘즐거운 편지’로 되어 있는 제목에 이미 잘 암시되어 있다.
[작가소개]
황동규(黃東奎)
1938년 서울 출생
서울대학교 영문과 및 동 대학원 졸업
1958년 『현대문학』에 시 「시월」, 「즐거운 편지」 등이 추천되어 등단
1968년 제13회 현대문학상 수상
1980년 한국문학상 수상
1990년 제1회 김종삼문학상 수상
1995년 대산문학상
2001년 제1회 미당문학상 수상
서울대학교 영문과 교수 역임
시집 : 『어떤 개인 날』(1961), 『비가(悲歌)』(1965), 『평균율 1』(공저, 1968), 『평균율 2』(공저, 1972), 『삼남(三南)에 내리는 눈』(1975),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1978), 『열하일기』(1982), 『풍장(風葬)』(1984), 『악어를 조심하라고?』(1986), 『견딜 수 없이 가벼운 존재들』(1989), 『몰운대 행(行)』(1991), 『K에게』(1991), 『미시령 큰 바람』(1993), 『외계인』(1997), 『어떤 개인날 악어를 조심하라고』(1998), 『황동규시전집』(1998), 『버클리풍의 사랑 노래』(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