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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04. 묵상글 ( 성토요일. 파스카 성야. - 주님과 똑같을 수는 없다.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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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04. 성토요일. 파스카 성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김찬선 신부님 올해 오늘 강론글 : 아직 /
< 2012년 강론>
2012.04.07 03:23
성 토요일 - 주님과 똑같을 수는 없다
오늘은 미사가 없는 날이니 말씀 나누기가 아니라
어제 성 금요일을 어떻게 지냈는지 나누고자 합니다.
성삼일을 지내면서 저는 오래간만에 양성 수도원,
특히 수련소에서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고 다른 신자들을 고려하지 않은,
다시 말해서 우리만을 위한 전례를 하는 거지요.
그래서 성 목요일 만찬 미사를 3시간에 걸쳐
아주 의미 있고 풍성하게 드렸고,
십자가의 길은 수도원이 아닌 밖에 나가서 6시간에 걸쳐 하였습니다.
어제 아침 키레네 사람 요셉이 주님의 십자가를 거들었는데
나는 어떻게 주님의 십자가를 거들까 고민을 하였지요.
고민고민하다가 저는 두 가지로 방향을 잡았습니다.
9시부터 12시까지 3시간은 주님의 마음고생에 동참하고
12시부터 3시까지 3시간은 주님의 몸 고생에 동참하기로.
마음고생은 주님께서 돌아가시기까지 겪으신 것들,
겟세마니에서의 그 마음의 번민, 다시 말해서
수난을 피하고픈 마음과 감당해야 하는 것 사이의 번민,
감당해야 할 수난에 대한 엄청난 두려움,
그리고 병사들이나 유대인들의 조롱으로 인한 수치심,
10처에서 옷 벗김 당하시고 십자가 위에서 모욕을 당하신 것을
할 수 있는 한 저도 경험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대전역에 가서 구걸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것은 주님을 위해 수치와 모욕을 당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성 금요일은 가난한 이들의 고통에 동참하는 날이기도 하기에
저는 새터민들 장학금 마련을 위해서도 구걸을 하기로 하였습니다.
후원회원들이 보내 주시는 것으로 편히 장학금을 주는 것이 아니라
제가 수치를 당해 얻은 것을 조금이나마 장학금에 보태고 싶었지요.
그러나 막상 구걸을 하며 수치 당할 것을 생각하니 너무나 두렵고 떨려
대전역까지 걸어가는 내내 아주 열심히 묵주기도를 바쳤습니다.
그리고 역사에서 나오는 첫 사람에게 가서 구걸을 하였습니다.
30대 남자였는데 눈길도 주지 않았습니다.
그의 그 차디찬 무시를 경험하고 나니 두려움이 더 커져서
거의 1시간을 도움을 청하려다 그만 두기를 반복하다가,
다시 또 청하니 이번에는 “에이”라고 하면서
불쾌한 감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되니 두려움은 더욱 커져서 겟세마니의 주님처럼
그만 두고픈 마음과 한 사람한테라도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그 두 마음 사이에서 번민에 번민을 거듭하였습니다.
결국 저는 두 번 밖에 구걸을 못하고 12시가 되어 역을 떠났습니다.
이어진 몸 고생은 마라톤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번민만 하고 수치와 모욕은 별로 당하지 않은 것이 마음에 걸려,
저는 보상심리로 혹독하게 몸 고생을 시키기로 작정을 하였습니다.
2시간을 달리고 중간 중간 1시간은 걸었습니다.
아침, 점심을 굶고 3시간을 달리니 힘들기는 하였지만
그래도 몸의 고통은 마음의 고통에 비길 것이 못되었고,
그래서 그렇게 몸을 학대하다시피 했는데도 마음은 찜찜했습니다.
육체적인 고통보다 확실히 수치와 모욕의 고통이
더 받아들이기도 힘들고 견디기도 힘듭니다.
자기를 죽여야 하기 때문일 겁니다.
집에 돌아와서 생각해보니
제가 구걸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저의 가난이 절실하거나
누군가를 너무도 사랑하여 그를 위해 구걸을 해야 했다면
저도 수치와 모욕을 두려워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가난하지도 주님과 새터민을 너무 사랑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번민만 많이 했지 수치와 모욕은 별로 당하지 않았습니다.
두 번의 모욕과 수치를 당함,
이것이 주님과 이웃에 대한 제 사랑의 정도입니다.
그래도 제가 위안 삼는 것이 있습니다.
오늘 제가 생각했던 것만큼의 수치와 모욕을 제가 당하였고,
구걸도 많이 하였다면 저는 저 자신에 대해 대단히 만족하였을 겁니다.
그러나 실패 덕분에 저는 겸손할 수 있었고
주님의 실패의 고통을 같이 느낄 수 있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어느 해 빵 두 개만 가지고 섬에 들어가 단식을 합니다.
그런데 사순절이 끝나갈 때 아무 것도 먹지 않았기에
빵 두 개가 그대로 남았습니다.
예수님과 똑같이 완전 단식을 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면
주님과 똑같이 완전한 단식을 하였다는 자만감과 허영에 빠질까봐
그리고 주님과 똑같을 수 없다는 겸손 때문에 반쪽만 먹었지요.
그러나 부끄러운 체험 덕분에 제가 얻은 더 큰 것은
주님께 대한 저의 사랑에 비해 저에 대한 주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크게 깨달은 것입니다.
아니, 이렇게 얘기해야겠습니다.
저에 대한 주님의 사랑에 비해 주님께 대한 저의 사랑이
얼마나 작은지 뼈저리게 깨달은 것입니다.
우리에 대한 주님의 수난의 사랑을 Passion이라고 하지요.
주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은 Compassion이라 할 수 있는데
비록 저의 작은 Compassion이지만
주님의 그 크신 Passion에 동참하고 동감하는 소중한 사랑입니다.
이렇게 사순절을 마치는 것이 죄송하지만
아직도 차가운 봄바람이지만 양지바른 곳에서 볕을 쬐는 병아리처럼
주님의 따듯한 사랑에 감사드리는 성 토요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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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04. 성토요일. 파스카 성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예수님께서는 용서하십니다!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예수님, 당신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대가를 치르시면서까지 십자가에 못 박는 자가 되기를 거부하셨습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예수님과 희생 염소 메커니즘의 종말
예수님께서는 용서하십니다.
2026년 4월 3일 금요일
성(선한) 금요일
리처드 신부는 묵상을 인도하시며, 청중들이 예수님의 십자가상 현존 안에 함께 머물도록 초대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 앞에 서 있는 자신을 마음으로 그려 보십시오. 그분께서는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 곧 벌거벗음과 드러남, 나약함과 실패가 되셨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죄에서 해방하시기 위해 죄가 되셨습니다(2코린 5,21 참조). 또한 그분은 우리가 서로에게 가하는 폭력과 희생 염소 만들기를 끊어내시기 위해 그것을 당신 안에 받아들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써 우리가 더 이상 서로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않도록 해 주셨습니다. 그분은 당신의 고통을 다른 이들에게 전가하지 않으셨습니다.
리처드 신부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직접 말씀하시며, 하느님의 사랑과 용서를 베푸시는 모습을 묵상 속에서 그려냅니다:
내 사랑하는 이여, 나는 곧 그대 자신이다. 나는 그대의 아름다움이며, 그대가 파괴하고 있는 그대 자신의 선함이다. 나는 그대가 사랑해야 할 것을 향해 그대가 행하는 모습이다. 나는 그대가 두려워하는 것, 곧 가장 깊고 가장 참된, 가장 벌거벗은 그대의 자아—그대의 영혼이다. 그대의 죄는 주로 그대 내면과 다른 이들 내면에 있는 선을 해치는 데 있다. 그대는 선을 두려워하한다. 곧 나를 두려워하는 것이다. 그대는 사랑해야 할 것을 죽이고, 그대를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을 미워한다. 나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다. 나는 그대 자신이며, 나는 온 인류이다.
그리고 우리는 십자가 위에 계신 예수님께 다음과 같이 응답하도록 초대받고 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 당신은 저의 생명이시며 또한 저의 죽음이십니다. 당신은 저의 아름다움이시고, 저의 가능성이시며, 저의 온전한 자아이십니다. 당신은 제가 갈망하는 모든 것이시며, 동시에 제가 두려워하는 모든 것이십니다. 당신은 제가 바라는 모든 것이시며, 또한 제가 부인하는 모든 것이십니다. 당신은 제가 터무니없이 외면하고 방치해 온 저의 영혼이십니다.
예수님, 당신의 사랑은 제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저는 아무 조건 없이 사랑받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당신과의 친밀함, 그리고 누구와의 친밀함도 저를 두렵게 합니다.
저는 이제 제 몸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 곧 세상 어디서나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그것을 멈추고 싶습니다. 저 자신에게, 세상에, 그리고 당신께 가하는 폭력을 멈추고 싶습니다. 이제는 제 마음속에서조차 어떤 희생양도 만들지 않겠습니다.
예수님, 당신만이 십자가에 못 박는 자가 되기를 거부하시고, 오히려 십자가에 못 박히심을 받아들이셨습니다. 당신은 결코 동정을 요구하지 않으셨고, 결코 희생자 역할을 하거나 복수를 청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당신은 용서를 숨결로 내쉬셨습니다.
우리는 인간으로서 불신하고, 죽이며, 공격합니다. 이제 저는 인류가 미워하는 대상은 당신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우리는 사실 자신을 미워하지만, 잘못하여 당신을 죽입니다. 저는 이 땅에서, 그리고 제 형제 자매들 안에서 당신의 거룩한 몸을 더 이상 못 박아서는 안 됩니다.
이제 저는 당신께서 제 안에 살아 계시고, 제가 당신 안에 살아간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당신은 저를 끝없는 환상과 폭력의 악순환에서 불러내고 계십니다. 당신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이십니다. 당신은 저를 구원하고 계십니다. 당신의 완전한 사랑 안에서, 당신은 저와 일치를 이루시기를 선택하셨고, 저는 이제 서서히 그것이 참되다는 것을 믿는 법을 배워 가고 있습니다.
우리 공동체 이야기
저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죽으셨다”는 이미지에 대해 오랫동안 어려움을 느껴왔지만, 동시에 십자가 사건이 제게 어떤 의미인지 표현하는 데에도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서툴게나마 제 의식은 예수님의 죽음을, 인류가 다시금 하느님의 ‘충만한 생명’에 대한 본래 의도에 열려 나아가도록 길을 열어 주신 사건으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신시아 부르조의 묵상(the meditation)에서 저는 제가 붙잡으려 했던 것을 설명해 주는 말씀을 읽었습니다: “핵심은 예수님의 삶을 성사로 읽는 데 있습니다. 곧, 예수님의 삶은 단순히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신자들에게 힘을 주는 거룩한 신비인 것입니다.”
—Shona H.
References
Adapted from Richard Rohr, “Jesus: Forgiving Victim, Transforming Savior,” On Transformation: Collected Talks, vol. 1 (St. Anthony Messenger Press, 1997), Audible audio ed.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Vaishak Pilai, untitled (detail), 2020, photo, India,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벽에 새겨진 저 거친 십자가는 우리가 희생 염소를 지목하려는 인간적 충동의 표지가 됩니다. 이는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것을 얼마나 쉽게 다른 이에게 떠넘기는지를 드러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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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영성 묵상글
우리는 오늘 저녁 모두 함께 우리의 작그만 촛불을 들고 예수님의 이 위대한 부활에 참여합니다!~~~
성토요일에는 성체성사가 거행되지 않습니다. 제대는 모두 치워지고 감실은 비어진 채 열려 있습니다. 이는 가톨릭 신앙 안에서 매우 강력한 상징입니다. 온 교회가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하나가 됩니다. 우리는 반드시 이 체험을 해야 합니다. 비움과 슬픔, 상실을 스스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전례는 지혜로운 스승입니다. 그러나 신심은 곧바로 "감실의 빈자리"의 힘을 무효화시키며, 고해 제대보다 훨씬 더 화려하게 꽃과 촛불로 장식된 "성체 보관 제대"(수난 제대)를 마련합니다. 우리는 단 하루라도 비어 있는 듯한 상태를 견디기 어려워합니다.
프랑스계 미국인이며 문학 비평가요 사상가, 철학자였던 조지 스타이너(Francis George Seiner: 1929-2020)와 같은 사람들은 오늘날 우리의 세계가 일종의 "성토요일 시대"라고 말했습니다. 곧, 성금요일과 부활주일 사이, 패배와 희망 사이의 시대라는 것입니다. 오늘, 그리스도인의 마음은 세상의 어둠을 느끼며, 자기 안의 어둠을 직시하도록 자신을 내어줍니다.
우리가 스스로 느끼도록 허락한 그 비움과 어둠은 부활의 빛을 더욱 찬란하게 드러낼 것입니다. 우리는 어둠 속에서 부활 성야를 맞이합니다. 검은 하늘 아래서 부활의 불을 밝힙니다. 그러나 만일 그리스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이는 허망한 몸짓에 불과할 것입니다. 갑자기 파스카 초가 빛을 발합니다. Lumen Christi! – 그리스도의 빛이 우리의 어둠을 밝힙니다. Exultet! – "모든 피조물은 환호하라! 빛나는 광채 속에 땅은 기뻐하라! 너의 임금의 찬란한 빛으로 빛나며… 어둠은 영원히 사라지리라! 이곳이 기쁨으로 가득 차, 하느님의 모든 백성이 부르는 힘찬 노래로 울려 퍼지게 하라!"
자그만 촛불이지만 이 부활초가 상징하는 바는 참으로 위대합니다. 왜냐하면 그 작은 불빛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작은 희망을 의미하며, 또한 이 작은 희망이 모일 때 크나큰 희망의 불빛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회의 어떤 사안에 대해 항거하거나 지지할 때 큰 횃불이 아니라 작은 촛불을 들고 모여 서로의 의지를 확인하며 '내'가 들은 작은 촛불이 우리의 연대 안에서 위대한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부활 성야를 함께 거행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작은(?) 불빛에서 빛을 받아 작은 촛불을 들고 어두움 가운데 함께 서 있을 것입니다.
자~ 이것이 바로 우리 믿음의 의미가 아닐까 합니다. 우리의 믿음이 아무리 작더라도 상관이 없습니다. 그저 믿음이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예수님을 죽음으로부터 일으키신 하느님께는 크나큰 지지요 함께함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홀로의 힘이 아니라 부족한(?) 제자들을 뽑아 함께함으로 하느님의 사랑과 그 사랑의 힘을 세상에 퍼트리게 하신 것이었고, 또 그 제자들로 하여금 세상 끝까지 가서 만나는 모든 이를 당신의 제자로 삼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당신의 부활을 기념하기 위해 모이는 우리에게 자그만 믿음을 하찮게 여기지 말라고 당부하십니다. 그 자그만 믿음은 하느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심어 주신 희망의 불씨라고 말씀하시면서 말입니다!
요즘 들어 저는 성무일도를 바칠 때 가끔씩 이전 더 젊었을 때보다 성무일도의 시편들이 저에게 저의 삶인 양 다가오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초기에 수도원에 들어와서 성무일도를 바쳤을 때는 '이 기도를 왜 바치는 걸까?' 하는 의문을 갖곤 했었는데, 물론 여전히 부족함을 느끼지만, 이제는 그 시편의 구절들이, 그것이 탄원(기도)이 되었든, 찬미(찬양)가 되었든, 감사(감사와 신뢰의 고백)가 되었든, 저의 삶을 표현하는 내용들로 마음에 더 살갑게 다가옵니다. 아마도 삶의 우여곡절을 조금이나마 거치고 난 이후의 마음이겠지요?!
그렇습니다. 그러니 삶의 이런 우여곡절에 함께해 오신 주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겠지요?!
어제는 성 금요일 '주님 수난 예식'을 거행하면서 "내가 정말로 이 주님의 무한한 사랑의 수난에 얼마나 깊이 참여했었는가?" 하는 질문을 저 스스로에게 하게 되더군요.... 그러나 "비록 성의 없이, 온전하지 못한 마음으로 주님의 수난에 참여한 적이 많았지만, 그것마저도 어여삐 받아주셨던 사랑의 주님이 계시기에 지금까지 왔나 보다..." 하는 자그만 위안이 들었습니다.
여전히 작은 믿음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그 작은 믿음이라도 크나큰 선물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그것이 우리의 크나큰 믿음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저녁 모두 함께 우리의 작은 촛불을 들고 예수님의 이 위대한 부활 성야 미사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이런 의미에서 미국의 가르멜 수녀회의 수도자이자 시인인 제시카 파워스(Jessica Powers: 1905-1988)의 [하느님의 자비 안에서(The Mercy of God)]라는 시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하느님의 자비 안에서
나는 마음의 기억에서 꺼내어 적어 두네,
그날은 하느님을 그늘진 두려움으로 두려워하던
내가 그 두려움을 멈춘 날.
그날을 덕행의 기둥을 헤아리며
공로의 창을 통해 가까운 관을 바라본 날이라 부를 수 있을까?
아, 아니네. 그것은 오히려 내가 참으로 깨달은 날,
내가 무(無)에서 나와 다시 무로 향한다는 것,
내 손의 모든 행위가 영원히 끝나지 않는 왕국의 가장 위대한 임금님 앞에서 헛된 것임을 깨닫게 된 날.
나는 열심히 가꾸고 자존심으로 지켜온 '자아의 밭'에서 일어나,
그 모든 것을 떠나 하느님의 자비의 숲으로 들어갔네.
그리고 지금 여기 머무르네.
그곳에는 푸르름과 평온과 서늘함,
머리 위 심판의 태양을 가려주는 잎사귀의 덮개,
그분의 평화의 고요,
그분의 자비의 이끼 위를 걷는 발걸음.
내게 있는 것은 오직 하느님을 찾는 의지뿐,
내 안에 타오르는 사랑조차 무한한 사랑의 한 조각일 뿐, 결코 내 것이 아니네.
나는 더 이상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않네.
나는 앞으로 나아가, 영원히 방황하리라, 그분의 무한한 자비의 광야 안에서만.
I am copying down in a book from my heart’s archive
the day that I ceased to fear God with a shadowy fear.
Would you name it the day that I measured my column of virtue
and sighted through windows of merit a crown that was near?
Ah, no, it was rather the day I began to see truly
that I came forth from nothing and ever toward nothingness tend,
that the works of my hands are a foolishness wrought in the presence
of the worthiest king in a kingdom that never shall end.
I rose up from the acres of self that I tended with passion
and defended with flurries of pride:
I walked out of myself and went into the woods of God’s mercy,
and here I abide.
There is greenness and calmness and coolness,
a soft leafy covering
from judgment of sun overhead, and the hush of His peace,
and the moss of His mercy to tread.
I have nought but my will seeking God;
even love burning in me is a fragment of infinite loving
and never my own.
And I fear God no more; I go forward to wander forever
in a wilderness of His infinite mercy al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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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04. 성토요일. 파스카 성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주님 부활 대축일 파스카 성야(마태 28, 1-10)
알렐루야! 찬미 부활! 파스카를 축하합니다.
“오늘 밤은 왜 다른 밤들과 다른가?”
이는 유대인들의 “세다 예식” 중에 있는 질문입니다. “세다 예식”이란 파스카 축제 첫날 밤, 온 가족이 식탁에 둘러앉아 하는 가족 식사를 말합니다. 이 식사에서 아버지는 가족들에게 <출애굽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 이 질문을 던집니다.
오늘, 우리도 이 질문을 던져 봅니다.
오늘 밤은 왜 다른 밤들과 다른가? 대체, 이 밤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지금 우리에게는,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톨스토이가 쓴 글 중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사나운 임금님이 사제들에게 명령했습니다. ‘하느님을 볼 수 있도록 해 달라.’ 그러나 사제들은 임금님에게 하느님을 볼 수 있게 해 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양치기가 그 문제를 해결해주겠다고 나섰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임금님께서는 눈이 좋지 않아서, 하느님을 볼 수 없습니다.’ 그러자 임금은 말했습니다. ‘하느님을 볼 수 없다면, 하느님이 무엇을 하는 지만이라도 알고 싶구나.’ 그러자 양치기는 말했습니다. ‘그 질문에 대답하려면, 임금님과 제가 서로 옷을 바꾸어 입어야만 합니다.’ 임금은 서슴지 않고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자, 마침내 양치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느님은 이처럼, ‘거룩한 바꿈’을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오늘 밤, 우리에게 ‘거룩한 바꿈’을 이루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죽음을 가져가시고, 우리에게 당신의 생명을 주셨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이 얼마나 고귀한 교환인지요?
이처럼, ‘예수님의 부활’은 사람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따라서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새로워진 삶을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를 사도 바오로는 오늘 <제8독서>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통하여 죽은 이들 가운데서 되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로마 6,4)
이제, 우리의 몸은 거룩한 몸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사도 바오로의 표현대로, ‘그리스도를 입었습니다.’(갈라 3,27 참조). ‘새 인간을 입었습니다.’(골로 3,10; 에페 4,24 참조).
이처럼,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죽음을 취하시어, 인간이 당신의 생명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습니다. ~우리의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는 까닭입니다.”(콜로 3,1-3).
이 교환을 가리켜,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합니다.
“우리의 죽음은 그분의 것이 되었고, 그분의 생명은 우리의 것이 되었다.”
이렇게, 오늘 우리는 하느님의 생명으로 부활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밤 우리에게 일어난 일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오늘, 우리에게 이루신 사랑입니다. 그러니 부활한다는 것은 단지 죽었던 생명이 다시 살아나 생명을 연장해 간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변화된 생명, 곧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의미합니다. 그러기에, 오늘 밤, 우리는 새로이 탄생되고, 변화된 것입니다. 그러기에 진정한 의미의 “생일”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의 사랑으로 이루어진 참으로 거룩한 생일, 거룩한 변화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자 내가 여러분에게 신비 하나를 말해주겠습니다.
우리 모두 죽지 않고 다 변화할 것입니다.”(1코린 15,51)
이토록, ‘부활’은 단지 우리를 새로운 삶에로 바꾸는 정도가 아니라, 우리 존재 자체를 바꾸어 놓는 일입니다. 그러기에, 이 밤은 참으로 기묘한, 참으로 거룩한 교환의 밤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만들어낸 참으로 기묘한, 하늘과 땅이 결합되고 하느님과 인간이 결합된 밤입니다. 하느님의 끝 모르는 사랑이 이루신 파스카의 밤입니다.
그렇습니다. 거룩한 이 밤에,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임이 바로 부활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면, 바로 지금, 거룩한 교환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바로 지금, 새로운 창조와 새로운 탄생의 대전환의 삶이 피어나는 것입니다. 바로 지금이 이 놀라운 부활의 밤입니다. 바로 지금이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가는 파스카의 밤입니다. 알렐루야!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마태 28,10)
주님!
그분을 뵙는 일, 이보다 기쁘고 아름다운 일은 없을 것입니다.
제가 가는 곳에 항상 먼저 와 계신, 먼저 오시어 나를 기다리시는 분,
결코 저를 떠나지를 못하시는,
그 보고 싶은 분을 보는 일, 그보다 아름다운 일은 없을 것입니다.
제가 찾으면 ‘나 여기 있노라’ 하시고,
제가 숨으면 ‘너 어디 있느냐?’고 제가 찾기도 전부터 저를 찾으시고,
먼저 제 안에 들어와 ‘어서 가자’고 이끄시는.
그 보고 싶은 분을 보는 일, 그보다 아름다운 일은 없을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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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04. 성토요일. 파스카 성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부활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그리고 오늘 세례를 받으시는 15명의 예비자 여러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여러분은 오늘, 이 밤에 단순히 한 예식을 치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나는 은총의 순간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공동체를 대표해서, 그리고 사제로서 진심으로 환영하고 축하드립니다. 우리는 왜 축하합니까? 생일을 축하하는 것은 한 생명이 세상에 왔기 때문입니다. 졸업을 축하하는 것은 긴 과정을 견뎌냈기 때문입니다. 결혼을 축하하는 것은 새로운 가정을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대한민국이 4강에 올랐을 때입니다. 전 국민이 축하했습니다. 꿈이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달라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은 2027년에 본당 설립 50주년을 맞이합니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50년을 지낼 수 있었기에 내년에 다채로운 축하 행사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축하할 때는 그에 합당한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저도 축하받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1991년 8월 23일 사제가 되었을 때입니다. 10년간의 신학교 과정을 마치고 드디어 복음을 선포하는 사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1999년 10월 1일 처음 본당 신부가 되었을 때입니다. 보좌 신부라는 직책에서 벗어나 본당 신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2022년 9월 3일 그린카드가 나왔을 때입니다. 미국에서 합법적으로 머물 수 있게 되었고 그래서 지금 이곳에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근본적으로 ‘축하’는 좋은 일이 있을 때 하는 것이고, 받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주님의 부활을 축하합니까? 부활의 의미를 제대로 안다면 부활의 기쁨은 훨씬 더 커질 것입니다. 의미를 모르면 해마다 반복되는 행사로 지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의미를 알면 부활은 우리의 존재 이유가 됩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축하하는 이유는 단순히 한 사건의 기념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과 희망의 근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선포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됩니다.”라고 하며, 부활이 신앙의 핵심임을 분명히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참으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고 그분의 부활은 죄와 죽음을 이기신 승리이며 우리가 모두 새 생명에 참여하게 되었음을 선포하는 기쁜 소식입니다. 또한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라고 권고하며, 부활은 단지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힘임을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안에서 죽음을 넘어선 희망과 영원한 생명의 약속을 발견하며, 그 승리를 기쁨과 감사로 축하하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에게는 예수님의 탄생, 공생활, 수난과 죽음은 큰 의미가 없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오히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잡으러 다녔기 때문입니다.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바오로 사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체험했습니다. 그리고 ‘회심’하였습니다. 베드로 사도와 함께 초대교회의 기둥이 되었습니다.
초대교회 공동체에 예수님의 부활은 단순한 기적 사건이 아니라, 두려움에서 담대함으로, 절망에서 선교로 나아가게 한 결정적 전환점이었습니다. 십자가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난 줄 알았던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한 뒤 완전히 변화되었고, 바오로 사도의 고백처럼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셨다”라는 선포는 공동체의 신앙 고백이자 존재 이유가 되었습니다. 부활은 예수님이 참으로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드러낸 하느님의 확증이었고 죄와 죽음의 권세가 더 이상 최종 권력이 아님을 선언하는 승리의 표지였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는 박해와 고난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았고,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라는 확신으로 세상 한가운데로 나갔습니다. 부활은 그들에게 교리 이전에 체험이었고, 희망이었으며, 공동체를 하나로 묶는 생명의 중심이었습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습니다. 뿌리가 없는 나무는 열매 맺을 수 없습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은 환상일 뿐입니다. 또한 부활이 없는 십자가는 고통일 뿐입니다.
2026년의 부활은 나에게 단순한 전례적 기념일이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서 다시 시작하라는 하느님의 초대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하십니다. 갈릴래아는 특별한 장소가 아니라, 내가 처음 부르심을 받았던 자리, 기쁨과 상처, 실패와 희망이 함께 있었던 삶의 현장입니다. 부활은 먼 훗날의 약속이기 전에 오늘의 결단이며, 바오로 사도의 고백처럼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십니다.”라는 삶으로 드러나는 현재의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활을 축하하는 사람으로서 절망 대신 희망을 선택하고, 두려움 대신 사랑을 선택하며, 상처 입은 이웃을 향해 한 걸음 더 다가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주님의 부활은 2천 년 전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 나의 갈릴래아에서 다시 시작되는 생명의 사건입니다. 오늘 나의 갈릴래아는 달라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입니다. 오늘 나의 갈릴래아는 내가 만나는 가족, 이웃입니다.
오늘 세례를 받으시는 15명의 형제자매 여러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이 밤, 주님의 빛이 여러분의 삶을 영원히 밝히시기를 기도합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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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04. 성토요일. 파스카 성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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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베로니카. 21326.04.04 04:51
죽음의 장소였던 무덤이 이제 축제와 환희의 장소로!
이런저런 전반적인 신체 진단을 마친 젊은 의사 선생님 왈, “아니, 아버님, 또래 어르신들처럼 심신이 편안하셔야 하는데, 뭐 이렇게 걱정 근심이 많으시고, 생각도 많으시고, 스트레스 지수가 높은가요? 여기 이 지표들은 거짓말을 안 합니다.”
그래서 한 말씀 제대로 듣고 나왔는데, 묘하게도 그 말씀은 제가 교우들에게 늘 건네고 있는 훈화 말씀이었습니다. “걱정과 근심이 만병의 근원입니다, 웬만한 건 마음에 담고 있지 마시고 그때그때 흘려보내시면 좋겠습니다. 아무쪼록 마음 편히 가지시고 가급적 스트레스 피하시길 바랍니다.”
돌아오는 길에 스스로에게 자문을 해봤습니다. 내가 그렇게 걱정과 근심이 많나? 스트레스의 원인이 무엇일까? 곰곰이 짚어보니 근심 걱정, 스트레스 유발 거리들이 없진 않았습니다. 요즘 자주 꾸는 꿈들이 있습니다.
침실이며 식사며 준비가 전혀 안 되어 있는 데, 갑자기 피정객들을 잔뜩 실은 버스 두 대가 밀고 들어오는 꿈. 잘 돌아가던 보일러가 갑자기 멈춰 피정객들이 오들오들 떨고 있는 꿈. 특강 시간이 촉박한데, 서해대교에서 차가 꽉 막혀 발을 동동 구르는 꿈 등등.
생각해보니 사목자로서의 나름 스트레스, 근심 걱정이 있었던가 봅니다. 따지고 보니 행복한 근심 걱정이요, 기쁨으로 가득한 스트레스입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 겪으셨던 번민과 스트레스 역시 우리를 살리기 위한 것이었기에 기쁨 충만한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분의 수난과 죽음은 영광스러운 부활을 전제로 한 것이기에 행복한 것이었을 것입니다.
수난 직전 예수님께서도 극도의 스트레스로 인해 심신이 쇠약해지셨습니다. 올리브 산에서 기도하실 때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공포와 번민에 휩싸이셨습니다. 그래서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핏방울처럼 되어 땅에 떨어졌습니다.
얼마나 마음이 괴로우셨던지 제자들에게 솔직한 마음을 털어놓으셨습니다. “내 마음이 너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 너희는 여기 남아서 깨어 있어라.” 아버지께도 간절히 청하셨습니다. “아빠!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 아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신성을 지니신 하느님이셨지만 동시에 철저하게 한 인간이셨던 분이셨습니다. 수난과 죽음을 앞두고 그분께서 보이신 모습, 극도의 공포와 번민, 스트레스에 휩싸여 계시던 모습이 그 뚜렷한 증거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예수님께서는 초인적인 인내와 순명, 우리 인간에 대한 극진한 사랑으로 수난과 죽음의 강을 무사이 건너 영광스러운 부활에 도달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고통과 수난이 생략된 부활과 영원한 생명을 추구합니다. 피땀 흘리는 고뇌와 번민, 극도의 스트레스를 가급적 피하며 하느님 나라를 찾습니다. 한 마디로 어불성설입니다.
은혜로운 부활 성야에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수난 없이는 구원이 없습니다. 십자가 없이는 영원한 생명도 없습니다. 순명 없이는 하느님 나라도 없습니다. 자기희생을 동반한 십자가 외에 천국으로 향하는 다른 길은 없습니다.
안식일 다음 날 이른 새벽 주님과의 사별로 인한 슬픔을 애도하기 위해 여인들이 찾아간 무덤은 천사에 의해 입구가 활짝 열렸습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안쪽을 들여다보니 무덤은 빈무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인해 이제 꽉 막혀있던 하느님 나라를 향하는 문이 활짝 열렸습니다. 죽음의 장소였던 무덤이 이제 축제와 환희의 장소로 탈바꿈했습니다. 주님의 영광스러운 부활로 인해 우리 각자 개인의 죽음도 슬픔과 통곡의 순간이 아니라 천상에서 다시 태어나는 기쁨과 은총의 순간으로 바뀌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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黃Dami 매일묵상 260404, 07 ~ 08 사이
4월4일 [파스카 성야]
마태오 28,1-10
두려워하지 마라. 나는 죽음을 딛고 되살아났다. 내 죽음으로 인해 죽음이 정복되었다!
작년 늦가을에 심었던 튤립이 피정 센터 곳곳에 마구 꽃망울을 터트리기 시작했습니다.
어여쁘고 탐스러운 샛노란 꽃망울을 바라보며 주님 부활의 신비를 묵상하게 됩니다.
꽁꽁 언 땅에 묻을 때는 과연 긴 겨울을 잘 견뎌낼 수 있을까, 걱정이었습니다만, 언제 그랬냐는 듯이 화사한 얼굴을 내미는 친구들에게서 부활하신 예수님의 향기를 진하게 맡을 수 있었습니다.
올해 부활 성야 미사 복음의 주제어는 두려움입니다.
마태오 복음 사가는 짧은 구절 안에 거듭 반복해서 두려움이란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먼저 무덤 경비자들의 두려움을 소개합니다.
갑작스러운 큰 지진과 함께 천사들이 등장해서 예수님의 무덤을 막았던 큰 돌을 옆으로 굴려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 그 모습은 번개 같고 옷은 눈처럼 희었습니다.
경천동지할 광경에 무덤 경비자들은 큰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얼마나 두려웠던지 사시나무 떨듯이 떨다가 까무러쳤습니다.
기절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앞에 신앙 없는 사람들이 보이는 전형적인 반응입니다.
이어서 소개되는 두려움은 무덤을 찾아온 마리아 막달레나와 다른 마리아가 느낀 두려움입니다.
안 그래도 그토록 사랑했던 스승님과의 사별과 단절로 인한 두려움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습니다.
더구나 천사가 열어놓은 무덤 안에 스승님의 시신이 보이지 않자, 여자들이 느낀 두려움은 더욱 증폭되었을 것입니다.
천사는 큰 두려움에 사로잡힌 여자들을 이렇게 위로하고 격려합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그분께서는 여기 계시지 않는다. 말씀하신 대로 그분께서는 되살아 나셨다.
와서 그분께서 누워 계셨던 곳을 보아라.”(마태오 복음 28장 5~7절)
이 순간부터 여자들의 두려움은 기존의 두려움과 다른 양상을 지닙니다.
막연한 두려움이 아니라 기쁨의 두려움입니다.
여자들은 두려워하면서도 크게 기뻐하며 서둘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소식을 전하러 달려갔습니다.
여자들의 두려움은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제자들을 향해 전력 질주하던 여자들 앞에 부활하신 예수님, 꿈속에서도 그리웠던 예수님께서 등장하십니다.
완전히 돌아가셨던 분이 되살아나셨으니 여자들은 당연히 두려웠을 것입니다.
자신도 모르게 예수님 앞으로 다가가 엎드렸습니다.
그분의 발을 꼭 붙잡고 연신 절을 했습니다.
두려워하는 여인들을 향해 예수님께서 천사와 똑같은 내용의 말씀을 건네십니다.
세상 자상하고 따뜻한 목소리, 바로 그분 목소리였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
예수님의 그 말씀으로 인해 여인들은 더 이상 이 세상에서 두려울 것이 없게 되었습니다.
적대자들도, 세상의 박해도, 죽음조차도 두렵지 않게 되었습니다.
용감하고 담대한 복음 선포자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느끼는 두려움은 무엇입니까? 다들 비슷할 것입니다.
쥐고 있는 것이 조금씩 사라져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 노화와 병고에 대한 두려움.
사별과 나 자신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 내 인생이 이렇게 작아지고 쪼그라드는 것에 대한 두려움.
이런저런 다양한 두려움에 시달리며 슬퍼하는 우리를 향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똑같은 내용의 말씀을 건네실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나는 죽음을 딛고 되살아났다. 내 죽음으로 인해 죽음이 정복되었다.
더 이상 죽음은 죽음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으로 건너가는 사다리가 되었다.
죽음은 이제 끝이 아니다.
이 세상 지나가면, 이 세상보다 몇천 배, 몇만 배 더 충만하고 아름다운 하느님 나라가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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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04. 성토요일. 파스카 성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마태 28,1–10
안식일이 지나고 새벽이 밝아올 무렵,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찾아갑니다.
그때 큰 지진이 일어나고
주님의 천사가 내려와 돌을 굴려 놓습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찾고 있음을 안다.
그분은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되살아나셨다.”
성 암브로시오는
부활의 첫 말이
‘증명’이 아니라 두려워하지 말라는 위로라는 점을 강조하듯 읽습니다.
부활은 단지 사건의 확인이 아니라
인간 마음의 가장 깊은 감옥—두려움—을 여는 은총입니다.
죽음이 끝이라는 공포,
삶이 무의미하다는 절망,
사랑이 배신당했다는 상처.
부활은 그 모든 어둠 속에
하느님의 빛이 실제로 들어오셨다는 선포입니다.
부활은 과거로 돌아가는 회복이 아닙니다.
암브로시오의 시선에서
부활은 새 창조입니다.
이전과 똑같은 삶을 되찾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통과한 새로운 생명으로 들어가는 길입니다.
그래서 천사는 말합니다.
“가서 제자들에게 전하여라.”
부활의 기쁨은
혼자 간직하는 감정이 아니라
세상으로 흘러가야 할 파견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 말씀하십니다.
“평안하냐?”
그리고 “두려워하지 마라.”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에게 먼저 임무를 주기보다
먼저 평화를 주십니다.
부활은 속도를 높이는 명령이 아니라
사명을 지탱할 수 있는 평화를 주는 선물입니다.
부활하신 주님,
저의 두려움을 붙잡지 말게 하시고
당신의 평화를 붙잡게 하소서.
끝이라고 믿었던 자리에서
당신이 새 생명을 시작하셨음을 믿게 하소서.
저를 기쁨의 증인으로 보내 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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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04. 성토요일. 파스카 성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강만연님
■ Re: 댓글을 달기 보다는 이게 더 낫겠다 싶어 남깁니다. 마르코 형제님
# https://bbs.catholic.or.kr/bbs/bbs_view.asp?num=18&id=2130946&menu=4770 관련
지금 몸살이 심해 처음 글 올라온 것 보고 간단하게만 댓글 남겼습니다. 사실 전부 공감합니다. 주일미사 신자들 수가 준다는 건 잘 모르겠습니다. 지금 현재 한인교회를 말씀하시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여러 가지 공감하는데 신자들의 기도도 있고 매일미사에 관한 언급 이 두 부분만 잠시 언급하겠습니다. 공감의 취지로 언급할게요.
처음 신자들의 기도 이건 제가 천주교에서 하는 전례의 일부분이라 정확하게 그 판단을 하는 건 좀 어렵습니다. 다만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형제님의 말씀에 동의합니다. 천주교 신자는 사실 개인기도가 잘 안 됩니다. 이미 우리는 교회에서 공식적으로 틀에 박힌 기도문으로만 기도하는 게 일반화가 돼서 그런 면도 있습니다. 2000년의 세월 동안 다져지고 다듬어진 기도문이 있어서 정말 화려하고 수려한 면이 있다는 건 절대 부정하지 않습니다. 제가 최근에 발견한 기도문이 있었습니다. 미사전 기도인데요 암브로시오 성인이 만드신 기도인지는 모르지만 기도문 이름이 암브로시오 기도문이라고 나오긴 했습니다. 일반 미사전 기도문과 비교하면 이것도 다양한 버전으로 있는 것 같았습니다. 제가 3년 전쯤에 매일미사 대용으로 평생 소장용으로 독서와 전례 신자용을 구입했습니다. 원래는 네 권만 있으면 되는데 한 권은 특별한 미사를 위해서 사용되는 것 같아 혹시 몰라 한 권을 더 구입했습니다. 이 책 안에 이 기도문이 있는 걸 우연히 발견했습니다.
이 기도문을 보고서 생각한 게 앞으로 이 기도문을 바치고 미사를 참례하면 정말 은혜롭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저는 나중에는 이처럼 자기만의 고유기도문을 만들 생각입니다. 이건 일반적인 세상의 표현으로 하자면 문장면에서는 정말 뛰어난 미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옥의 티라고는 할 수 없지만 티라고 굳이 한다고 하면 단 하나가 있습니다. 형제님이 언급하긴 것처럼 자신의 이성으로 생각한 기도문 즉 다시 말해 영혼 없는 남의 기도가 될 수 있다는 맹점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게 약간의 우려 아닌 우려가 될 수 있습니다. 이런 맹점 외에는 아주 좋은 점도 있다고 봅니다.
사실 어떤 경우는 기도를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한 분에게는 아주 좋은 경우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긍정적인 면도 있다고 보여집니다. 사람은 다 능력이 저마다 다릅니다. 모든 신자가 다 이런 게 필요 없을 정도로 다 뛰어난 신자들만 있는 게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달란트가 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이쪽으로 달란트가 부족한 사람에게는 이렇게 교회가 공식적으로 인준한 기도문을 사용하는 것도 가히 나쁘진 않다고 판단됩니다. 그런 면에서 이건 좀 생각을 유연하게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다만 이와 관련해서 우리는 개신교처럼 대표기도 같은 건 아니더라도 평소에 누군가에게 보여주는 기도는 아니더라도 자기가 자기 스스로를 위해 기도를 할 수 있는 그 정도의 자유기도는 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예전에 어떤 피정을 했는데 마침 그때 자유기도를 해야 하는 그런 사정이 있었습니다. 사실 다 들어보면 이건 기도라고도 할 수 없을 정도의 부끄러운 기도였습니다. 물론 우리는 화살기도라는 게 있긴 하지만 말입니다.
원래는 몇 줄만 의견을 피력할려고 했는데 하다 보니 길어지는군요. 또 하나 매일미사에 대해 언급하셨습니다. 이것도 지금 말씀드린 것과 맥을 같이 합니다. 사실 몇 년 전에 어떤 신부님의 기고문을 봤습니다. 그분은 매일미사 책 폐간을 주장하시더군요. 저는 그때 그 신부님의 기고문을 보고 전적으로 동의를 했습니다. 폐간에 동의를 하는 게 아니고 매일미사의 부정적인 면을 언급하신 그 부분에 동의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매일미사 책 자체만을 놓고 보면 부정적으로 보고 싶지 않습니다. 다만 이걸 신자들이 활용을 제대로 잘 하지 못한다는 점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 신부님은 이 매일미사로 인해 신자들이 말씀을 단편적으로 본다는 데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 저는 좀 더 살은 붙인다면 요즘 현실을 보면 매일미사는 그냥 미사 때만 보는 말씀으로 전락한 게 현실입니다.
요즘에는 앱도 있기 때문에 매일미사를 구입하는 게 전보다는 많이 줄어들었습니다. 앱과 상관없이 이제는 또 매일미사 자체를 구입하지 않는 사람도 많습니다. 지금부터 언급하는 건 엄청나고 심각한 교회 현실을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지는지 그 이유를 언급하겠습니다. 말씀과 그렇게 친하지 않으니 그런 현상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잠시 미사때만 보는 용도로 전락했기 때문입니다. 있어도 볼까 말까 하는 판국에 없으면 어떤 결과가 일어나겠습니까? 그냥 미사 예절은 다 알고 있으니 가서 그대로 하는대로 하기만 하면 미사 참례가 되기 때문에 그렇게 문제가 된다고 인식을 하지 못한다는 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이건 사실 무지의 소치입니다. 이건 미사 전례가 단순히 성전에 가서 몸만 일어났다가 앉았다가 하는 동작과 기본적으로 우리가 응송을 하는 그런 걸로 이게 온전한 미사라고 생각하고 또 최종적으로 영성체만을 하면 그게 완전한 미사의 은총으로 착각을 하고 있다는 게 문제입니다.
미사에 관한 전문적인 책을 공부한 지 좀 돼서 기억이 가물합니다만 그 책에 나와 있는 걸 보면 이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뭐냐 하면 말씀인 독서와 복음을 잘 연구하지 않고 또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사실은 반쪽짜리 미사도 안 됩니다. 불완전 미사입니다. 그런 상태에서 영성체까지 하면 그 영성체도 제대로 된 영성체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이걸 신학적으로 설명을 했는데 정말 맞다고 보여집니다. 제가 구체적으로 왜 그런지는 사제가 아니기 때문에 그 설명은 생략을 하겠습니다. 제가 신자이기 때문에 그 선을 넘으면 안 될 것 같아 그렇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오늘날 강론에도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복음의 기쁨에도 이 부분에 대해 언급한 내용이 있습니다. 이게 또 다른 교회 문헌에도 나오는 게 있는데 제가 지금 기억이 잘 나지 않네요. 어디서 봤는지 하지만 복음의 기쁨에 나온 내용을 바탕으로 해서 판단하면 실제 강론은 복음을 언급해야 합니다. 사실 이게 어느 정도까지 언급을 해야 복음을 언급했다고 하는 기준은 없긴 하지만 문헌과 교황님의 저서를 통합해 생각한다면 복음의 스토리를 잘 이해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신자들이 그 맥락과 전체를 알게 된다면 그런 게 필요가 없을 겁니다. 일반 신자들은 신부님들만큼 성경과 신학을 공부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역할을 대신해 주셔야 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근데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많은 경우 강론에서 복음과 전혀 관련 없는 내용으로 세상 일을 가지고 언급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나마 어떤 경우는 복음에 나오는 한 구절 정도 언급하면 다행일 정도입니다. 복음의 한 구절을 언급하는 정도로 그날 강론에 대해 복음을 서술했다고 하긴 조금 창피한 내용이지 않겠습니까? 이런 문제는 교회가 심각하게 고민을 해야 할 문제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천주교에서 그동안 신앙생활을 하며 문제점 아닌 문제점을 하나 언급한다면 시간 상의 제약도 있지만 우리는 복음을 이해할 때 단순히 복음 그 부분만 한정해서 이야기합니다. 구약과 연결해 언급하는 것은 거의 들어보지를 못했습니다. 딱 한 번 제가 옆 본당에서 한 번 미사를 한 적이 있는데 그때 아마 몇 년 전 사순 때인 것 같습니다. 그 본당 신부님 신학교 동기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때 소개를 하긴 했는제 부산교구에서 오신 손님 신부님이었습니다. 그날 강론에서 인상적인 게 복음의 한 구절을 원어로 설명을 하시면서 구약을 매치하셨습니다. 제가 그날 처음으로 천주교로 개종해서 그것도 그렇게 세세하게 구약과 복음을 매치해서 강론을 들은 건 처음이었습니다. 개신교도 그 정도까지는 깊이 들어가지 않습니다. 그때 그 강론에 대해 인상적인 부분이 있어서 제 묵상글에도 언급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사실 우리가 천주교 신자는 말씀을 잘 안 본다고 하기 이전에 알아야 할 게 있습니다. 그런 걸 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지 못한 사실에 대해 교회도 반성을 해야 합니다. 정말 성경을 유기적으로 잘 매치해서 강론을 하게 된다면 말씀이 주는 미묘한 즐거움이 있을 텐데 교회가 그런 걸 제공하지 못하니 신자들이 말씀의 매력을 못 느낀다면 그건 교회에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이건 정말 교회가 심각하게 고민해야 하고 반성해야 합니다. 신자들에게만 책임을 전가하는 건 무책임한 행동이 될 수 있습니다. 형제님, 원래는 단 몇 줄만 언급하려고 했는데 길어졌습니다. 또 제가 지금 컨디션만 좋다면 아마 더 언급했을 텐데 제가 약속을 했기 때문에 하긴 했습니다. 이런 부분을 묵상하게 계기를 만들어주신 부분에 대해 다시 한 번 더 감사를 드립니다. 항상 댓글만 보다가 이렇게 글 올려주시니 감사드립니다. 부활 축하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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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04. 성토요일. 파스카 성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Mark Choi 님
■ 부활절에 드리는 두 가지 청원?! 살아있는 기도, 살아있는 말씀
제목: 부활절에 드리는 두 가지 청원 — 살아있는 기도, 살아있는 말씀
Title: Two Petitions for Easter — Living Prayer, Living Word
몸이 불편한 중에도 이렇게 깊이 있는 댓글을 남겨주신 형제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형제님의 말씀 하나하나가 제 글의 의도를 더욱 풍성하게 살려주셨습니다. 덕분에 이 글을 더 심도 있게 다듬을 수 있었습니다.
I am sincerely grateful to our brother who, even while suffering from illness, offered such a thoughtful and substantive response. His reflections have enriched and deepened the original intent of this article considerably.
먼저 한 가지 오해를 바로잡겠습니다
A Clarification First
신자 수 감소에 관한 언급은 한인 교회를 가리킨 것이 아닙니다. 미국 천주교회 전반, 즉 미국인 신자들의 주일 미사 참례율이 급격히 떨어지고 있는 현실을 말씀드린 것입니다. 미국 개신교 역시 마찬가지 현상을 겪고 있습니다. 이것은 특정 민족 공동체의 문제가 아니라, 서구 그리스도교 전체가 직면한 구조적 위기입니다.
Two Petitions for Easter — Living Prayer, Living Word
The reference to declining attendance was not directed at Korean-American parishes. It referred to the broader reality of American Catholics — and American Protestants alike — stepping away from Sunday worship in significant numbers. This is not an ethnic community issue; it is a structural crisis facing Western Christianity as a whole.
첫 번째 청원: 신자들의 기도 — 미사 그 순간만이라도
First Petition: The Prayer of the Faithful — At Least in That Moment
형제님께서 정확히 짚어주셨습니다. 천주교 신자들은 개인 자유기도에 익숙하지 않습니다. 2000년의 세월 동안 다듬어진 교회 공식 기도문은 분명 그 나름의 깊이와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성 암브로시오 기도문처럼 오래된 전통 기도문이 주는 영적 풍요로움은 결코 가볍게 볼 수 없습니다. 또한 기도를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한 신자에게는 잘 다듬어진 기도문이 큰 도움이 된다는 사실도 인정합니다. 달란트는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가 드리고자 한 청원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미사 전체의 전례 기도문을 바꾸자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신자들의 기도" 그 순간만큼은, 기도하는 이가 자신의 언어로, 지금 이 공동체의 아픔과 기쁨을 담아 드릴 수 있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미사라는 엄숙한 전례의 틀 안에서도, 그 짧은 순간 하나만이라도 살아있는 육성이 하느님께 올라갈 수 있다면, 그것이 전례를 해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형제님께서 피정 중 자유기도를 해야 했던 순간을 떠올리셨듯이, 우리 천주교 신자들은 화살기도조차 버거워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공식 기도문의 아름다움을 지키면서도, 자신의 말로 하느님께 아뢸 수 있는 최소한의 자유를 회복하는 것 — 그것이 이 청원의 진정한 의도입니다.
Our brother has identified the issue precisely. Catholic faithful are generally unaccustomed to spontaneous personal prayer. The Church's officially sanctioned prayers, refined over two millennia — such as the Ambrosian prayer he discovered — possess undeniable spiritual depth and beauty. And for those who do not know how to pray on their own, such texts can be a genuine gift, since each person receives different talents from God.
However, the core of this petition is not to abolish liturgical prayer. It is to ask that in that one specific moment — the Prayer of the Faithful — whoever leads the prayer might be free to speak in their own words, bringing the community's present joys and sorrows before God. Within the solemn framework of the Mass, if even one brief moment carries a living human voice rising to heaven, that does not diminish the liturgy. It completes it.
As our brother recalled from his retreat experience, many Catholic faithful struggle even with short spontaneous prayers. While preserving the beauty of official prayer texts, recovering even a minimum of freedom to address God in one's own words — that is the true intent of this petition.
두 번째 청원: 매일미사책 — 문제는 책이 아니라 구조다
Second Petition: The Daily Missal — The Problem Is Not the Book Itself
형제님께서 이 부분에 대해 매우 깊이 있는 통찰을 나눠주셨고, 그 핵심은 제 의도와 거의 일치합니다. 몇 년 전 어느 신부님이 매일미사책 폐간을 주장하는 기고문을 쓰셨다는 사실도 의미심장합니다. 그 신부님이 지적하신 핵심, 즉 매일미사책으로 인해 신자들이 말씀을 단편적으로 읽게 된다는 문제 — 이것이 바로 제가 우려하는 바입니다.
매일미사책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그것이 어느 순간 성경 자체를 대체해버렸다는 데 있습니다. 신자들은 매일미사책에 눈을 고정한 채 성경을 펼치지 않습니다. 말씀을 직접 만나는 대신, 이미 편집되고 발췌된 텍스트를 읽습니다. 요즘은 앱까지 등장해 매일미사책 구입 자체도 줄었지만, 그렇다고 성경을 더 읽게 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말씀과의 거리가 더 멀어졌을 뿐입니다.
형제님께서 지적하신 더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미사를 단순히 성전에 와서 몸을 일으켰다 앉혔다 하고, 정해진 응송을 하고, 마지막에 영성체만 하면 된다는 인식입니다. 그러나 전례 신학은 분명히 말합니다. 말씀의 전례, 즉 독서와 복음을 온 마음으로 듣고 묵상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온전한 미사가 아닙니다. 그런 상태에서 받는 영성체 역시 온전한 영성체라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엄중한 신학적 사실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반드시 짚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신자들만 탓할 수 없습니다. 교회가 말씀의 풍요로움을 신자들에게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 책임이 큽니다. 형제님께서 부산교구 신부님의 강론에서 처음으로 구약과 복음을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강론을 들으셨다는 경험은 많은 것을 시사합니다. 그것이 예외적인 경험이 아니라 모든 주일 강론의 기본이 되어야 합니다. 교황 프란치스코의 『복음의 기쁨』도 이 점을 분명히 강조합니다. 강론은 복음의 이야기를 신자들이 온전히 이해하도록 이끌어야 한다고.
교회가 말씀의 깊이와 아름다움을 신자들에게 살아있게 전달하지 못하는 한, 매일미사책의 유무는 사실 부차적인 문제입니다. 핵심은 이것입니다 — 신자들이 말씀 앞에 직접 설 수 있는 환경을 교회가 만들어야 합니다. 전례 담당자와 권한 있는 분들이 이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깊이 고민할 때가 되었습니다.
Our brother's insights on this point align very closely with the original intent. The fact that a priest once wrote a published piece calling for the abolition of the daily missal is itself significant. His core concern — that the missal causes the faithful to read Scripture in fragments — is precisely what troubles us here.
The daily missal is not inherently harmful. The problem is that it has gradually replaced Scripture itself. The faithful fix their eyes on the missal and never open the Bible. They read pre-selected, pre-edited excerpts rather than encountering the Word directly. The rise of apps has reduced missal purchases, but this has not led to more Bible reading. If anything, the distance from the Word has grown wider.
Our brother identifies an even deeper problem: the widespread assumption that attending Mass means physically showing up, going through the motions of sitting and standing, responding at the appointed moments, and receiving Communion — and that this constitutes a complete Mass. Liturgical theology states clearly otherwise. Without genuinely hearing and meditating on the Liturgy of the Word — the readings and the Gospel — the Mass is incomplete. And Communion received in such a state is not fully what Communion is meant to be. This is a serious theological reality.
Yet the faithful cannot bear this responsibility alone. The Church itself must examine its failure to transmit the richness of Scripture to its people. Our brother's experience of hearing, for the first time, a homily that organically connected the Old Testament with the Gospel — from a visiting priest from the Diocese of Busan — should not be a rare exception. It should be the standard for every Sunday homily. Pope Francis's Evangelii Gaudium states this plainly: the homily must lead the faithful to a full understanding of the Gospel narrative.
As long as the Church fails to make the depth and beauty of the Word come alive for its people, the question of whether the daily missal exists is secondary. The core issue is this — the Church must create the conditions in which the faithful can stand directly before the living Word. The time has come for those responsible for liturgy and those with the authority to act to take this matter with the utmost seriousness.
맺음말: 작은 부활이 큰 부활의 시작이다
Closing: A Small Resurrection Is the Beginning of a Great One
부활절은 죽음이 끝이 아님을 선포하는 날입니다. 그렇다면 굳어버린 전례의 관행도 부활할 수 있습니다. 두 가지만 청합니다. 신자들의 기도에서 살아있는 목소리를 회복하고, 매일미사책 너머 성경 자체를 신자들의 손에 돌려주십시오. 이 작은 변화가 한국 천주교회, 그리고 세계 교회가 진정한 말씀의 공동체로 부활하는 첫걸음이 될 것입니다.
몸이 불편하신 중에도 깊은 통찰을 나눠주신 형제님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속히 쾌유하시길 기도드립니다.
알렐루야. 주님께서 부활하셨나이다.
Easter proclaims that death is not the final word. Then neither must the hardened habits of our liturgy remain unchanged. Two petitions remain: restore a living voice to the Prayer of the Faithful, and return the Scripture itself — beyond the daily missal — into the hands of the faithful. These small changes may be the first steps toward a true resurrection of the Korean Church, and the universal Church, as a genuine community of the Word.
Sincere gratitude once again to our brother, who shared such profound reflections despite his illness. We pray for his swift recovery.
Alleluia. The Lord is risen indeed.
부활절 2026 · Easter 2026 · Marco 마르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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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04. 성토요일. 파스카 성야. 송영진 모세 신부님 ----------------- 09:45. 추가.
<예수님 부활의 유일한 증거는 ‘만남’입니다.>
<안식일이 지나고 주간 첫날이 밝아 올 무렵, 마리아 막달레나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러 갔다.
그런데 갑자기 큰 지진이 일어났다.
그리고 주님의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오더니 무덤으로 다가가 돌을 옆으로 굴리고서는 그 위에 앉는 것이었다.
그의 모습은 번개 같고 옷은 눈처럼 희었다. 무덤을 경비하던 자들은 천사를 보고 두려워 떨다가 까무러쳤다.
그때에 천사가 여자들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찾는 줄을 나는 안다.
그분께서는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말씀하신 대로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
와서 그분께서 누워 계셨던 곳을 보아라.
그러니 서둘러 가서 그분의 제자들에게 가서 이렇게 일러라.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
이제 여러분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가실 터이니, 여러분은 그분을 거기에서 뵙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내가 너희에게 알리는 말이다.”
그 여자들은 두려워하면서도 크게 기뻐하며 서둘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소식을 전하러 달려갔다.
그런데 갑자기 예수님께서 마주 오시면서 그 여자들에게 “평안하냐?” 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다가가 엎드려 그분의 발을 붙잡고 절하였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두려워하지 마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마태 28,1-10)>
1) 예수님 부활의 유일한 증거는, 부활하신 예수님과 사도들(신앙인들)의 ‘만남’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증언합니다.
“우리는 그분께서 유다 지방과 예루살렘에서
하신 모든 일의 증인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나무에 매달아 죽였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사흘 만에 일으키시어 사람들에게 나타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모든 백성에게 나타나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미리 증인으로 선택하신 우리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신 뒤에 우리는 그분과 함께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였습니다.
그분께서는 하느님께서 당신을 산 이들과 죽은 이들의 심판관으로 임명하셨다는 것을 백성에게 선포하고 증언하라고 우리에게 분부하셨습니다(사도 10,39-42).”
그리고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증언합니다.
“나도 전해 받았고 여러분에게 무엇보다 먼저 전해 준 복음은 이렇습니다.
곧 그리스도께서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성경 말씀대로 사흗날에 되살아나시어, 케파에게, 또 이어서 열두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다음에는 한 번에 오백 명이 넘는 형제들에게 나타나셨는데, 그 가운데 더러는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대부분은 아직도 살아 있습니다. 그다음에는 야고보에게, 또 이어서 다른 모든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맨 마지막으로는 칠삭둥이 같은 나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사도 15,3-8).”
사도들의 증언은 아주 단순합니다.
“나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
사도들에게 ‘예수님 부활’은 ‘이론’이 아니라
‘생생한 현실’이었습니다.
2) ‘빈 무덤’은 예수님의 ‘시신’이 무덤에 없다는 표시일 뿐이고, 부활을 증명하는 증거가 아닙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할 때 ‘빈 무덤’은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초대교회의 일부 신자들이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 있는 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증거다.” 라고 주장하긴 했는데, 그 주장은 “당신들이 몰래 시신을 옮긴 것이다.” 라는 유대인들의 주장에 가로막혔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갔다.’는 유대인들의 주장은 증명할 수 없는 가설이고, “우리는 예수님의 시신을 훔치지 않았다.” 라는 신자들의 주장도 증명할 수 없는 무의미한
반박이기 때문에, ‘빈 무덤’에 관해 말하는 것 자체가 아무 의미 없는 일입니다.
3) 무덤을 막은 돌을 천사가 옆으로 굴린 일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무덤을 떠나신 뒤의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큰 돌로 막혀 있는 무덤을 그대로 놓아두고 ‘그냥’ 떠나셨습니다.
천사가 한 일은, 무덤에 예수님이 계시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니 돌을 굴려서 무덤을 개방한 일은
부활의 시작이 아닙니다.
‘갈릴래아’로 가라는 지시는, 예수님께서 처음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하셨던 곳으로 가라는 지시인데, 이제 온 세상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선포할 때가 되었음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4) 부활하신 예수님과 신앙인의 ‘만남’은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처럼 예수님을 안 믿고 있는데도
‘만남’을 체험하고 신앙인이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실 신앙생활은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사는’,
또는 ‘매 순간 순간 예수님을 만나는’ 생활입니다.
따라서 신앙생활 자체가 예수님 부활을 증언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신앙생활이 곧 부활을 증언하는 일이 된다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거는 사람은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라고 말하는데(1코린 15,19), 이 말을 반대로 표현하면,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그 부활에 참여하기를 희망하면서, 영원한 생명을 향해 나아가는 신앙인은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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