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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알라딘을 통하여 구매했던 두 권의 책을 택배로 받았다. 한권은 김자야 작가가 쓴 '내 사랑 백석'이고 다른 한권은 안도현 시인이 쓴 '백석 평전'이다. 내가 그토록 열광했던 백석 시인을 직접 책을 통해 만날 수 있는 기회다. 포장을 뜯는 내 손이 살며시 떨려왔다.
벌써 15년이 지났을 게다. 계룡작가회에서 문학 활동하고 있었을 때 논산 센뿔여고 교사였던 어느 시인은 내게 백석의 시집을 읽어봤냐고 물었다. 난 사실 부끄럽지만 그때까지만해도 백석의 시인의 이름조차 모르고 있었다. 센뿔여고 교사는 본인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이라면서 꼭 한번 읽어보라고 내게 권유했다.
그날 저녁 백석의 시를 읽었을 때는 사뭇 충격이었다. 윤동주 시인이 왜 백석의 시집을 읽고 다섯번이나 필사를 했는지, 신경림 시인이 왜 백석의 시집을 읽은 후 저녁밥을 반 사발만 먹고 꼬막 밤을 세웠는지, 일본 시인인 노리다케 가스오가 왜 '서정주는 내 발 밑에 있지만 백석은 내 머리 위에 있는 시인이다'라고 피력했는지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내 사랑 백석'을 쓴 김자야 작가는 천재 시인 백석이 사랑했던 기생 자야 김영한 여사다. 사실 백석 시인이 우리한테 알려진 것은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광복후 백석은 월북작가로 분류되어 시집 자체가 금서였다. 그러다가 1987년 노태우 정권의 6.29 선언으로 월북작가에서 재북작가로 해금되면서 우리에게 비로소 모습을 드러냈다.
백석이 해금된 이듬해에 이동순 교수는 '배석 시선집'을 창작과 비평사에서 펴냈다. 마침 그 책을 읽은 김영한 작가가 이동순 교수를 찾으면서 지고지순한 둘만의 사랑이야기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김영한 여사는 백석을 잊지 못하고 당시 천억- 지금은 1조가 넘는다고 한다- 을 호가하던 성북동 대원각을 법정 스님에게 시주하게 된다. 법정 스님은 무소유자이기 때문에 대원각 시주 받는 것을 거부했지만 김영한 여사는 미국에서 법정 스님의 설법에 감동 받은 후 3년 동안 쫓아다니면서 결국 시주를 하게 되고 마침내 대원각 부지에 길상사라는 절이 세워지게 된다.
김영한 여사는 그 후 백석문상학을 만들어서 우리 나라의 시인을 키웠고 이 세상을 떠나기 며칠 전에 젊은 신문 기자가 천 억이 아깝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는데 때가 따로 있나, 천 억이 그 사람 시 한줄만 못해' 라는 말을 남기면서 눈 오는날 재로 뿌려 줄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
김영한은 열여섯살에...
김영한은 1916년 서울의 관철동의 제법 부유한 집에서 태어났다. 앞뜰과 뒤뜰에 살구나무, 사과나무, 배나무까지 있어서 제철에 과일을 따로 사먹지 않아도 되었고 사랑채의 유성기에서는 음악이 흘러나오는 단란한 집안이었다.
김영한은 열여섯살 때, 할머니의 친척 되는 사람이 어느날 집에 불쑥 찾아와서는 광산 사업을 하겠다면서 집문서를 잠시 빌려달라고 한다. 할머니가 이를 거부하자 그 사람은 인감도장과 집문서를 위변조하여 은행에다 저당 잡히고 감쪽같이 돈을 빼돌린다.
그 후 김연한 집안의 영락으로 어쩔수 없이 1932년에 권번-기생조합-에 들어가 기생이 된다. 권번가에서는 재능과 예능이 출중한 김영한을 보고 해어화 - 말귀를 잘 알아듣는 꽃-로 칭했고 책임자였던 해관 선생은 김영한의 재능이 아까워 일본 유학까지 보내게 된다. 그후 해관 선생이 독립운동으로 투옥되면서 김영한은 해관선생을 면회라도 하기 위해 스스로 다시 권번에 들어가 기생이 된다.
운명같은 첫만남
김영한은 함흥관 기생으로 나갔던 바로 첫날에 영생고보의 영어교사인 멋쟁이 시인 총각 백석을 만나게 된다. 두 사람은 한 순간의 섬광처럼 만나 영원한 사랑의 실타래를 풀어헤치고 만다.
"오늘부터 당신은 나의 영원한 마누라야. 죽기 전에 우리 사이에 이별은 없어요"
백석의 부드럽고 다정한 이 첫마디가 김영한의 가슴에 날아와 박혔다. 백석은 그날 밤 헤어질 때 서슴없이 '오늘부터 마누라 뜻대로 내 몸을 맡아 주어야해요'하면서 육중한 몸을 김영한한테 기대고 둘은 마침내 한쌍의 어여쁜 원앙이 되어 사랑의 불씨를 지핀다. 그때 김영한은 방기 22세였다.
김영한이 살던 하숙집은 백석의 영생고보가 아래쪽에 있는 함흥의 반룡산 기슭이었다. 하숙집 대문을 나서면 사진관이 있었는데 백석은 진열장 속의 여인을 늘 외면하고 걸었다. 김영한이 이유를 물었더니 백석은 '나는 당신말고 다른 여자는 아예 눈도 주기 싫어!'라고 해서 함께 웃은 적이 있다.
백석은 학교의 일과가 끝나면 바람처럼 하숙집으로 들어왔고 김영한이 꽁꽁언 백석의 손을 품속에서 녹이려고 할라치면 백석은 정열적인 포옹으로 자야를 풀어주지 않다가 새벽이면 다시 학교로 돌아갔다.
김영한은 함흥 시내에서 나들이 갔다가 '자야오가(子夜吳歌)'라는 선집을 사서 백석에게 보여주었다. 백석은 책자를 읽더니 '나 당신에게 아호를 하나 지어줄 거야. 이제부터 자야라고 합시다. 그후 김연한은 백석의 '자야'가 되었다.
자야의 원래 이름은, 그 옛날 중국 동진시절에 국경을 넘어온 북방민족의 친입으로 자야랴는 여인이 있었는데 남편을 전쟁터에 빼앗기고 생이별을 서러워하며 임을 그리워한다는 이태백의 민요조인 자야오가(子夜吳歌)에 나오는 말이다.
아, 사랑이여
파도같이 넘실거리는 사랑으로 한없이 행복했지만 자야는 가끔가끔 기생 출신이라는 신분의 한계로 가슴을 쓸어내리고는 했다. 어느날 자야는 백석에게 그 가슴 아픈 이야기를 하고야 말았다.
"당신은 사회에서나 가정에서나 남들에게 인정받는 성실한 가정을 이루도록 하세요. 그리고 우리나라 문단에 큰 버팀목이 되어주시기를 축원할 뿐이어요" 자야의 이 말이 끝나자 마다 백석은,
"당신이 어찌 그런 말을 내 앞에서 할 수 있단 말이오? 소위 동경 유학까지 마친 신여성으로서의 시대감각이 그렇게 없소. 당신은 나아갈 길을 나에게 맡기고 영리하게 마음 편히 삽시다."
자야는 백석의 매서운 질책에 그 어떤 한마디 대꾸도 하지 못한 채 청승맞은 눈물만을 애써 숨기며 어깨만 들썩였다.
하루는 백석이 수심에 가득한 얼굴로 힘없이 집에 돌아왔다. 알고보니 서울에 계신 아버지가 방학이 시작되는 대로 곧장 올라오라는 편지가 왔다는 것이다. 자야는 '편지가 아니왔어도 부모님을 뵙는 것이 당연한 도리가 아닌가요' 했고 백석은 '당신을 두고 나 혼자 떨어져 갈수는 없소'라고 했다.
다음 날, 어쩔 수 없이 함흥역에서 백석을 배웅하고 집에 왔을 때는 어둠처럼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그런데 별안간 문밖에서 '자야, 자야!'하는 소리가 들렸다. 백석은 '기차는 아니오고, 당신은 혼자 종종걸음으로 달아나고, 바람은 쌩쌩, 달은 휘영청 밝고..'하면서 무성영화의 변사처럼 구성지게 서울에 가지 않은 변명을 에둘러 대고 있었다.
백석은 서울로 간 뒤에 하숙집 대문칸에는 매일같이 백석이 보낸 편지가 떨어져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오전부터 백석의 편지는 보이지 않았다. 자야는 불안하고 허전한 마음을 가눌 수가 없었다. 이튿날도 다시 다음날도 일주일동안 편지가 없었고 자야의 마음은 생초목에 불이 당기듯이 바싹바싹 가슴이 타들어 갔다.
그로부터 수삼 일이 지난 어느 밤, 백석은 귀신처럼 홀연히 나타났다. 백석은 수척해진 자야의 손을 잡으면서 가슴이 와지끈 부서질 정도로 자야를 끌어 안았다. 백석은 서울로 갔더니 평안도 정주의 큰아버님도 오시고 갑자기 강제로 장가를 들게 되었는데 그 사실이 미안하고 양심의 가책이 되어 그동안 편지를 못했다고 했다. 백석은 '그래도 나는 색시 얼굴도 안 봤어! 당신 내 성질 알잖아'하면서 안절부절 못하며 자야에게 애절하게 호소했다.
자야는 백석의 부모가 명망있는 집으로 장가를 보려는 것도 이해할 수 있었고 그저 사실대로 털어놓는 백석이 말이 신열에 들뜨게 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마음 속에는 행복으로 가득 찼다.
백석은 어느날 갑자기 집에 들어오자마자 달뜬 목속리로 둘이 살수 있는 만주땅 신경으로 떠나자고 했다. 자야는 무인도가 아니라 어딘들 못 따라가리오마는 미천한 여자로 말미암아 앞길이 양양한 백석의 입신과 출세를 가로막을 수 없었다.
자야는 백석이 신경으로 떠나기 위해 꾸려놓았던 짐보퉁이를 들고 백석 몰래 서울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귀청을 찢는 기적 소리에 기차는 서서히 움직였고 백석을 떠난다는 무서운 공포와 두 눈에서 흘러나오는 걷잡을 수 없는 눈물에 제 정신이 아니었다.
자야가 혼자 떨어진 서울에서 외로움, 서러움에 울며불며 지낸 지 서 너달쯤 되었을까. 어느날 백석이 보낸 사람이 자야가 보고싶다는 친필을 들고 찾아왔다. 자야는 단숨에 백석한테 달려갔다. 자야는 백석을 아프게 했다는 생각에 염라대왕 앞처럼 떨고 있었고 백석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태연자약하고 인자하게 반가운 미소를 지었다.
백석은 출근을 하기 위해 한마디 남기는 말도 없이 총총히 봍투 한 장을 떨어뜨리고 갔다. 누런 미농지봉투를 뜯어보니 백석이 친필로 쓴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가>가 들어있었다. 그것을 찬찬히 읽어 내려가자 자야의 몸과 마음은 야릇한 감격에 휩싸여 오싹 자지러지고야 말았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 나타샤는 사랑을 하고 눈을 푹푹 나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면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 눈이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손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 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자야는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백석이 왔다간 지 스무날이 쯤 되던 1938년 유월 어느 날, 백석은 아무런 기별도 없이 별안간 대문칸을 들어섰다. 조선학생축구연맹에서 주최하는 제2회 조선고등축구연맹전이 서울에서 열리게 되어 인솔교사로 왔다고 했다.
백석은 경기가 끝나면 학생들을 여관으로 데려다주고 곧장 자야가 있는 청진동 집으로 달려왔다. 학생들은 밤에 네온사인에 현혹이 되어 길거리를 거침없이 쏘다녔다. 시골학생들은 풍기를 단속하는 교사들이 깔려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학생들은 풍기교사에게 적발되었고 추궁을 당하다보니 선생님은 시합이 끝나면 여관에 데려다 주고 다른 곳에 주무시다가 아침에 왔다고 했다.
학교 이사회에서는 긴급회의를 열어 징계에 회부했으나 시인이자 촉망받는 영문학도의 백석을 여자고보로 전근발령내는 것으로 끝냈다. 하지만 백석은 여름방학이 되자 아예 사표를 내고 '여보 나, 서울로 아주 왔어! 함흥엔 이제 두번 다시 안 갈 거야!'하면서 짐 보다리를 챙겨서 서울로 왔다.
백석은 서울에 있는 조선일보사에 입사했다. 자야는 어느 날 외출나간 김에 검은색 바탕에 다홍빛 체크무늬가 그어진 넥타이를 샀다. 백석은 어린아이처럼 너무도 좋아하면서 ' 당신이 영감 하나는 잘 골랐지'하면서 영감이라고 너스레를 떠는데 자야는 나이 먹는다는 생각에 숙연해지고 만다. 다음날 백석은 '여보 오늘 아무개를 만났는데, 이 넥타이가 나한테 참 잘 어울린대'해고 그 뒤로 매일 출근할 때뿐만이 아니라 바깥나들이를 하때도 그 넥타이를 맸다.
백석은 말수가 적었고 남의 결점을 화제로 떠올리는 법이 없었지만 문학에 관한 화제가 나오면 갑자기 눈빛이 반짝이면서 많은 이야기를 했다. 자야는 백석의 이야기를 웃기만 하고 들을 뿐 절대 아는 척을 하지 않았다.
백석과 자야는 서로가 외유내강했고 부드러우면서도 까다로왔지만 조화를 잘 이루었다. 특히 지성인으로서 고의로 남을 괴롭히지 아니하니 늘 평안하기만 했다.
"나는 불결한 것을 못 보고 여자들의 잔소리, 쓸데없는 간섭을 싫어해요. 그런데 당신은 갑자기 표정하나 변하지 않고 야멸차게 도망을 해버리는데 난 그게 딱 질색이란 말이야. 다시 또 그러면 정말 혼내 줄 거야!" 이렇게 정색을 하고 짐짓 꾸짓는 말투로 하면 자야는 화가 치밀어서,
"내가 도망친 것은 누구 땜에? 그 이유를 몰라서 큰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울고 싶은 아이를 건드리는 격이지!"
백석은 할말이 없으면 아무렇게나 부둥켜안고 쓰러져서 입술을 포개어 말문을 꽉 막아버렸다. 자야가 정색을 하며 뾰로통해지면 백석은 곧바로 받아서, ' 그 골치 아픈, 뻔히 아는 사실을 구태여 말로 아니해도, 눈과 눈으로 전수하고 또 모자라면 입과 입을 포개서 대화하면 통하는 것을, 그래도 통하지 않으면 벽창호지' 라고 말을 했다.
백석은 말을 하지 않다가도 일단 말문을 열면 그 특유의 위트와 해학으로 자야를 단숨에 제압해버렸다. 그렇게 소록소록 살다가 1938년 12월 24은 자야에게 있어서 지워버리고 싶지만 지울 수 없는 날이 되었다. 백석이 조선일보사로 출근을 했는데 저녁이 되어도 집에 돌아오지 않았던 것이다. 자야는 동지섣달 기나긴 밤을 기다리다가 심상치 않은 육감에 사로 잡혔다.
십여일이 지나고 백석의 연락을 알려준 것은 백석의 친구 조선생이었다. 조선생은 백군이 지난해 십이월 이십사일에 두번째 장가를 들었다는 것이다. 자야는 심한 충격을 받고 겁에 질려 있었다.
백석이 집에 들어 온 것은 그 일이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백석은 당당하고 태연하게 집에 들어오더니 무슨 속셈인지 전등불을 짤깍 꺼버렸다. 자야는 이부자리에 머리를 파묻고 꺼익꺼익 울었다. 백석은 질풍처럼 자야를 꼼작도 못하게 쓰러뜨리고 위에서 자야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 말이야. 나, 변한 건 아무것도 없어!' 사실 자야는 혹시나 '나 장가들었댔어!' 이말이 튀어나올까봐 가슴을 졸이고 있었다.
그후 조선생이 다시 찾아왔다. 지금 백석의 집에서는 난리가 났다고 했다. 두 번이나 장가를 들고도 가장이라는 사람이 도무지 가사를 돌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야는 소름이 쫙 끼쳤다. 자야는 백석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 사람을 떠나는 일이라 생각했다. 자야는 백석이 돌아오기 전에 동소문 밖으로 이사를 했다.
하지만 백석은 몹시도 추웠던 겨울 밤에 자야를 찾아냈다. '자야, 자야' 꿈결에 소리를 듣는 것같았지만 귀신의 소리도 아니었다. 자야는 버선발로 달려나가서 백석의 품에 안겼다.
그 일이 있은 후 백석은 세번째 장가를 들고 집에 왔다. 백석이 돌아오지 않자 본댁에서는 사람을 시켜 당장 내 아들을 돌려보내라는 모멸적인 전갈을 보내오기도 했다. 자야는 내가 아주 멀리 떠나는 길만이 모든일을 제대로 풀려가는 일이라 생각하고 바다에 풍덩 몸을 던지기 위해 황해 바다를 건너는 배에 몸을 실었으나 낌새를 눈치 챈 친구로 인해 자살은 미수로 그치고 말았다.
달포만에 집에 돌아왔을 때 책상위에는 백석의 쪽지가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자야는 그렇게도 기다려준 백석이 고맙기도 했고 죄스럽기도 했다. 자야는 한달만에 돌아온 슬픈 사연을 차마 말할 수 없었다. 그런데 백석은 싸한 표정을 하고 있었고 자야는 눈빛이 무서워서 숨을 죽이고 있었다.
"나 신경 가기로 결정했어"
이 한마디에 순간 가슴 깊이 쌓였던 서러움에 눈물이 왈칵 터져 엉엉 소리내어 울고 말았다. 백석이 만주로 떠나기로 한 것은 뛰어넘을 수 없는 복잡한 가정사와 봉건적인 관습 때문이었다. 자야의 소망은 단 하나 백석을 따라 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신분의 차이는 여전히 시퍼렇게 남아 있었다. 자야는 부모님의 불화에 불씨를 차마 남기고 싶지 않았다. 자야는 온통 눈물에 젖어서 애원했다.
"여보, 이번 만큼은 제발 혼자 가주셔요"
백석이 떠나고 자야는 명동에 나갔다가 제일다방에서 백석의 친구인 허준을 만났다. 허준은 '여보시오! 백군을 그토록 참혹하게 홀로 황막한 북만주로 보내놓고, 당신은 혼자서만 이렇게 뻐기고 다니기요?' 자야는 억장이 무너져 내렸다.
그후 광복이 되었고 남북으로 갈리어 영원히 백석과 자야는 생이별을 해야만 했다. 남북동란 때 9.28수복이 되어 국군이 북으로까지 올라갔을 때 백석은 고향 사람들의 추대를 받아서 정주군수를 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를 누군가를 통해서 들었을 뿐이었다.
'내 사랑 백석'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참 드라마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백석에 대한 논문이 봇물처럼 쏟아지고 연구도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또 안도현 시인은 평전형식으로 백석의 생애를 조명한 '백석 평전'을 펴내기까지 했다. 백석은 1930년대의 모더니즘과 민족주의를 결합한 유일한 사례다.
사실 우리나라의 최고의 시를 뽑으라고 한다면 나는 백석의 '여승'을 뽑는데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어떻게 시인은 한편의 소설을 몇줄에 시에 함축할 수 있었을지 신기하다 못해 심오하기까지 하다. 우리 때 배우지 못한 백석의 시를 지금 수능시험문제까지 출제가 되고 있다는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생전의 김영한 여사는 백석의 생일이 7월 1일이 돌아오면 사랑하는 연인 백석에 대한 그리움과 만주를 따라가지 않았다는 죄의식으로 일체의 음식을 입에 대지 않았다고 한다. 내가 이렇게 백석의 생애를 장황하게 쓴 이유는 백석의 소설같은 이야기가 내 심금을 울린 것도 있지만 정작 시간이 된다면 백석의 생애를 소설에 담고 싶어서다.
아마 내게 백석의 소설을 쓰라고 한다면 아래처럼 서두를 풀어나갈 것이다.
<프롤로그>
길상사 참나무 아래는 언제 떠올랐는지 모를 초승달이 비스듬히 걸려 있었다. 반역을 모르는 바람이 가을잎을 마당에 떨어뜨리는 광경을 무연히 바라보는 자야의 눈시울은 돌연 붉어지고 있었다.
팔순이 넘었는데도 지난 날의 어떤 순간들이 뜻밖에도 명료하고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것은 그 사람의 마음이 아직도 가슴 속에 꿈틀거리고 있기 때문이었을까. 자야는 고개를 젓고는 적삼을 벗었다.
동이의 물이 마치 좋게 담겨져 있었다. 몇 달 전 췌장암 판단을 받은 후로는 몸이 몰라보도록 꼬챙이처럼 말라갔다. 씻을 힘이 없어서 사람을 부를까 하다가 그만 두었다. 몸을 씻는 소리가 잣새의 울음소리에 섞이고 있었다.
목욕을 끝내고 자야는 법당으로 향했다. 삼배를 들일 참이었다. 주지 스님의 독경소리는 바람이 툭툭 끊고 있었다. 마당에 깔리는 반야심경은 그 사람을 기다린 것처럼 가슴을 후비고 있었다.
합장을 하고 삼배를 올리는 손이 부르르 떨려왔다. 어쩌면 오늘 밤이 마지막일 거라는 생각이 고개를 쳐들었다. 반야심경의 ‘시대명주 시대 등등주 모지사바하’ 독경소리가 귀를 훑고 지나갔다.
“보살님이 바깥에 계시기에는 바람이 찹습니다. 이제 그만 침소에 드시지요?”
삼배를 하고 나오는 길에 주지 스님이 안타까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자야는 아무렇지 않은 듯이 마주서서 합장을 하고 숙소인 길상헌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 사람의 마지막 목소리가 귓전을 스쳤다.
“내 만주에 거처를 마련했으니 따라 오소”
기생 신분과는 혼인할 수 없다던 부모의 눈을 피해 그 사람은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같이 살기를 바랐다. 하지만 자야는 앞길이 창창한 그 사람의 장래에 장애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진득히 입술을 깨물며 만주를 가지 않았던 이듬해 남북은 분단되어 철조망이 가로놓여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이국의 땅이 되었다.
자야는 눕기 전에 소매에 있는 시 한편을 꺼냈다. 바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라는 시였다. 그 사람은 어쩌자고 50년 전에 누런 미농지 속에 든 이 시를 써서 내게 주었을까. 그의 손글씨를 보는 순간 다시 눈이 애애하게 아파왔다.
아침 예불을 드릴 때에도, 아침 공양 때에도 자야는 보이지 않았다. 불길한 예감이 든 주지스님이 자야가 기거하는 길상헌을 찾아갔을 때 이미 자야는 전날 목욕재계한 그대로의 모습으로 손에는 백석의 시를 꼭 쥐은 채 운명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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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유난히 성북동 길과 인연이 있어
애뜻한 길상사를
이곳에서 반갑게 만나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