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르스크전투(Battle of Kursk)는 2차 대전중 동부 전선 모스크바 남쪽 450 km 지점에 있는 쿠르스크 지역에서 1943년 7~8월에 걸쳐 전개된 독일과 소련의 작전이었다. 이 전투는 프로호로프스카 전투(Battle of Prokhorovka)와 더불어 사상 최대의 전차전이었으며, 공중전 사상 기간대비 가장 피해 규모가 큰 전투이기도 하였다. 쿠르스크전투는 독일이 동부 전선의 상황 타결을 위해 전개한 마지막 전략적 공세였으며 소련이 승리를 거두게 되어 향후 전쟁의 방향을 결정지었다.
독일은 스칼린그라드 전투(Battle of Stalingrad)의 패전 이후 쿠르스키 일대의 소련군을 일소하여 보급로를 단축하고 북부 및 남부로 우회하여 소련군을 포위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소련은 우수한 정보망을 통해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의 의도를 사전에 접수하였는데다가, 독일이 티거(Tiger)와 판터(Panther)라는 신무기의 생산을 기다리는 동안 작전을 지연시킴으로써 소련군이 일련의 방어선을 구축하고 반격을 위한 막대한 예비전력을 규합할 수 있는 시간을 주고말았다.
쿠르스크전투는 심도있게 준비된 전략적 방어 앞에서 전격전(Blitzkrieg)이 얼마나 무력한지를 증명한 예가 되었다. 몇개월간 소련은 독일의 강력한 기갑전력을 무력화시키기 위하여 지뢰밭과 각종 화포를 배치하였고, 독일의 진격속도를 늦추고, 먼 거리를 돌게 만들고, 지치게 하는 8겹의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쿠르스크 방어선은 250 km 깊이로 구성되어 마지노 선(Maginot Line)의 10배에 달하며, 독일 전차의 수에 1:1 이상의 비율로 필적하는 양의 대전차포가 배치되어 사상 최대의 방어선으로 남게되었다. 이는 당시 독일 기갑 전력의 돌파력 세배에 해당하는 수준이었다.
독일이 방어선을 돌파하지 못하여 허덕이는 동안 소련은 반격을 개시하여 8월 5일 오렐과 벨고그라드를, 23일에는 하르코프를 탈환하였으며, 독일군을 전선 멀리 밀어내는데 성공하였다.
소련군은 전년 겨울에 이미 승기를 잡는데 성공하였지만 이 전투는 소련군의 첫 전략적 승리가 되었다. 이 전투의 결과는 여러 전술학교에서 교육하는 주제가 되었다.
배경
1942년과 1943년 사이의 겨울 동안 소련군은 스탈린그라드에서 잠정적으로 승리하였다. 80만 추축국 전력이 상실되었으며 독일은 제 6 군을 통째로 잃음으로써 동부 전선 전력에 상당한 타격을 입었다.
1917년 독일은 유명한 힌덴부르크 방어선(Hindenburg Line)을 서부전선에 구축, 전선을 단축하고 방어를 강화한 바 있었다. 독일은 이 전략을 소련에 대해서도 적용하기로 계획하고 판터-보탄 방어선(Panther-Wotan line)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일련의 대규모 방어선을 구축하기 시작하였다. 독일은 1943년 말 이 방어선으로 퇴각하여 재정비가 될때까지 소련군의 발목을 잡아둘 계획이었다.
1943년 2월과 3월 독일 원수 에리히 폰 만슈타인(Erich von Manstein)은 하르코프에서 승리를 거두어 레닌그라드로부터 남으로 로스토프까지 전선을 만들어냈다. 이 중앙부 오렐과 하르코프 사이에는 200 km 너비 150 km 깊이의 소련 점령지가 있었다.
독일 최전선 지휘관들 대다수는 소련의 공세에 대처하고 반격을 가하기 위하여 방어 전술로 전환하는 것을 최우선이라고 생각하였다. 히틀러는 이러한 의견을 받아들였다. 만슈타인은 선제공격의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고 남쪽 지역을 다시 점령하기 위한 첫단계로 쿠르스크의 소련군을 일소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이것이 가능하려면 적어도 5월에는 공격을 시작해야 한다고 보았지만 당시 독일 기갑 전력에 문제가 있다고 본 히틀러는 새로운 전차가 투입 가능한 7월까지 이를 지연시켰다. 독일군 수뇌부는 이로써 동부 전선의 승기를 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보았다.
독일의 계획
만슈타인은 하르코프에서의 승리에 이어 동일 지역에서 압박을 가하였고, 소련군의 길게 늘어진 공세를 잘라내는데 성공하였다. 그는 소련군을 기만하여 남쪽의 우크라이나로 유인하고 그 사이 하르코프에서 동부로 진격해 바다를 끼고 소련군의 측면 공세를 완전히 포위해야 한다고 제안하였다.
독일 육군 최고 지휘부(Oberkommando der Wehrmacht, OKW)는 만슈타인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대신 쿠르스크에 주목하였다. 소련군 전체 전력의 15%, 보로네츠 전선(Voronezh Front)과 중앙 전선(Central Front)이라는 두개 소련 전선이 이 지역에서 만나고 있었다. 쿠르스크만 장악할 수 있다면 그 결과는 만슈타인의 제안보다 더 달콤한 것이었다.
3월, 계획은 명백해졌다. 발터 모델(Walter Model)의 제 9 군이 오렐에서부터 남부를 진격해 들어가는 동안 헤르만 호트(Hermann Hoth)의 제 4 기갑군과 만슈타인의 파견군이 하르코프로부터 북부를 침공한다는 것이었다. 공세가 잘만 진행된다면 이들은 쿠르스크에서 합류, 돈 강(Don River) 유역에 새 방어선을 구축한다는 큰 그림을 염두해 두고 각자의 판단에 따른다는 허가를 받았다.
히틀러는 당시 행보와 다르게 최고 지휘부에 작전권 상당부분을 맡겼다. 이후 몇주간 독일은 작전 투입 전력을 증강하고 다른 전선에서 전력을 차출하였다. 이들은 5월 4일을 작전 개시일로 잡았지만 티거와 판터라는 새 전차의 도착을 기다리기 위해 작전을 지연시켰다. 히틀러 또한 여러차례 작전을 연기하였다. 5월 5일에 이르러 작전일은 6월 12일로 연기되었고, 연합군이 이탈리아에 상륙하여 위협을 가하자 작전은 다시 6월 20일로 연기되었다. 6월 17일 히틀러는 7월 3일로 연기할 것을 지시하였고, 다시 7월 5일로 연기하였다.
독일은 그동안 대개 성공적인 결과를 가져온 가마솥 전투(Kesselschlacht), 즉 이중 포위라는 전통적 공세 전략을 채택하였다. 독일은 이러한 칸나에(Cannae) 유형 방법론에 전격전의 요소를 더해 효율성을 증강시켜왔다. 전격전의 요체는 대량의 군을 빠르게 진군시켜 적에게 충격을 가해 적의 지휘 통제와 보급을 어렵게 하는 것이었다.
독일의 이러한 전략은 예기치 않은 상황에서 빛을 발했다. 독일은 1940년 아르덴과 1941년 키예프, 1942년 코카서스에서 이를 입증한바 있었다. 최고 지휘부는 쿠르스키 지역에 대한 공세를 ‘시타델 작전(Operation Citadel, Unternehmen Zitadelle)’으로 명명하였는데, 군사 전략에 조금이라도 기초가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쿠르스크를 공략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상황이었기에 이 작전은 기습 공격의 기본을 망각한 것이었다. 때문에 몇몇 지휘관들은 이 작전에 의문을 제기하였다. 이러한 지휘관들 중 한명이었던 하인츠 구데리안(Heinz Guderian) 또한 히틀러에게 쿠르스크 공략의 무모함을 지적하였지만, 히틀러의 대답은 자신도 알고 있으며, 이 생각에 장이 뒤틀릴 지경이라고 할 뿐이었다.
독일이 투입할 전력은 모두 50개 사단에 달하였다. 이중에는 17개 기갑사단 및 장갑착탄(Panzergrenadiere) 사단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육군 최정예 그로스도이칠란트 사단(Großdeutschland Division) 뿐 아니라 무장친위대(Waffen-SS) 제 1 사단 라이브슈탄달테 아돌프 히틀러(1st SS PzGrenDiv Leibstandarte Adolf Hitler), 제 2 사단 다스 라이히(2nd SS PzGrenDiv Das Reich), 제 3 사단 토텐코프(3rd SS PzGrenDiv Totenkopf)가 제 2 무장친위대 기갑군단이라는 이름으로 참가하고 있었다. 최고 지휘부는 기갑 전력을 총동원했는데, 티거와 판터 이외에도 새로 개발된 자주포 페르디난트(Ferdinand)도 동원하였다. 여기에 가용한 모든 공군력과 포병도 참가하게 되었다.
독일이 ‘시타델 작전’이라는 방어적인 느낌의 이름을 붙인것은 일종의 기만책이었다. 모델은 또한 수많은 전차 엔진소리를 녹음하도록 지시하였는데, 이를 전장에서 스피커로 크게 재생하여 소련군에게 혼란을 야기하기 위해서였다. 작전에 동원되는 전차들은 이번 작전만을 위한 새로운 사단 문양이 그려졌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기만 전술들은 그다지 효용이 없었다.
소련의 계획
소련군은 나름대로 하계 공세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그 양상은 독일의 기획과 유사하였다. 오렐과 하르코프에 대한 전면 공격으로 전선을 단축하고 돌파구를 찾는다는 것이었다.
소련 지휘관들은 독일의 계획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이전 독일의 공격들은 대개 기습적으로 이루어졌지만 이번만은 쿠르스크가 공격 대상이 될 것이라고 예측되었다. 모스크바는 스위스 주재 루시 스파이 조직(Lucy spy ring)으로부터 독일의 계획을 입수하였고, 러시아 정부 또한 영국의 존 케인크로스(John Cairncross)로부터 독일의 암호를 해독한 중요한 정보를 제공받았다. 게오르기 주코프(Georgiy Zhukov) 원수는 최소 4월 8일경 소련군 참모부(Stavka)에 보낸 보고서에서 독일이 쿠르스크를 공격할 것으로 예견하였음은 몰론 대응 방안까지 제시하였다. 아나스타스 미코얀(Anastas Mikoyan)은 3월 27일 요세프 스탈린(Joseph Stalin)에게 독일의 공격 계획에 대한 내용을 알렸다고 회고록에 기록하였다.
이 시점까지의 독일 공세는 성공적이었다. 전격전 전술은 모든 상대에게 먹혀들었으며 소련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러나 소련은 겨울을 지나는 동안 자신들의 공세가 점점 효율을 더한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스탈린과 참모부 장교들은 선공을 원했다. 하지만 주코프를 비롯한 참모부 대다수는 독일이 전력을 소모하며 지쳐가는 것을 기다리자는 입장이었다. 주코프는 1943년 4월 8일 스탈린에게 서한을 보내어, 독일이 방어선에서 전력을 소모하였을 시점에 전투로 지치지 않은 예비전력을 투입하여 역공을 취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독일이 작전 개시를 지연시키면서 소련은 4개월간 쿠르스크 지역을 역사상 유래가 없을 정도의 방어선으로 재편할 수 있었다. 중앙 전선과 보로네츠 전선은 방어를 담당하고 대초원 전선(Steppe Front)은 예비전력으로 지정되었다. 소련군은 민간인 수천명을 동원하여 434,667개의 지뢰를 매설하고 604개의 대전차 장애물을 설치하였으며, 175 km 구간에 걸쳐 총 길이 5000 km에 이르는 참호를 팠다. 이곳에 130만 병력과 3,600 대의 전차, 2만 문의 화포, 2,792 대의 항공기가 배치되었는데, 이는 전체 소련군 인원과 화포의 26%, 항공기의 35%, 전차의 46%에 해당하는 전력이었다. 소련은 전차 생산에 곤란을 겪고있던 독일과 달리 인구와 산업 생산력 덕분에 대비 속도가 빨랐고, 그 격차는 시간이 갈수록 벌어졌다. 독일은 쿠르스크에 소련군이 속속 결집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지만 새로운 전차가 이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 판단하여 공세를 계속 지연시켰다.
초기 쿠르스크 방어에 투입된 전력은 대부분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치른 고참들이었지만 1943년 차출된 신병 백만이 여기에 추가되었다. 스탈린그라드에서 막대한 희생을 치렀지만 소련군은 1942년 당시보다 오히려 증가되어 있었다. 독일의 공세 지연 덕분에 새로 추가된 신병들은 보통의 경우보다 긴 시간 훈련에 임할 수 있었다.
쿠르스크에 배치된 화력의 규모도 비범한 수준이었다. 이곳에는 보병 연대보다 포병 연대가 많이 배치되었다. 소련군은 지뢰와 화포로 독일군을 갈아버리기로 작정하였다. 곡사포의 간접 포화로 독일군 보병의 진격을 저지하는 동안 45mm, 57mm, 그리고 85 mm 견인식 대전차포와 76.2mm 사단 야포가 직접 포화로 전차들을 상대하는 것이었다. 독일 제 9 군을 상대하게 될 소련 제 13 군은 1 km 구간당 23.7문의 화포를 배치하였다. 소련 제 6 위병 육군과 7 위병 육군은 이보다 낮아서, 1 km 구간 안에 10문의 화포를 배치하였다.
소련군 공병의 활약도 이어졌다. 자료에 따르면 이들은 503,993개의 대전차 지뢰와 439,348개의 대인지뢰를 매설하였다. 최전방에는 평균잡아 1 km 구간당 1,500개의 대전차 지뢰와 1,700개의 대인지뢰가 매설되었는데, 낮은 곳도 1,400개 이상이었으며 많은 곳은 2,000개에 달하였다. 소련군 공병들은 이외에도 참호를 파고 철조망을 걸고 대전차 장애물 및 수천개의 포격 진지를 건설하였다.
독일군이 많은 부분 기만전술을 적용한 것과 마찬가지로 소련군도 기만전술을 사용하였는데, 소련측이 독일측과 달랐던 점은 이러한 기만전술이 대부분 성공하였다는 것이었다. 소련이 만든 가짜 진지와 가짜 비행장, 그 위에 놓인 가짜 비행기, 그리고 가짜 무선교신은 독일 정보부를 교란시키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실제 진지와 지뢰밭 위장 또한 놀라운 수준이었다. 독일군은 자신들의 차량이 폭발하는 광경을 보고서야 비로소 그곳에 지뢰밭이나 고정 포대가 있다는 것을 겨우 눈치챌 수 있었다.
소련 공군의 상황
소련 공군(VVS)은 1941~1942년 동안 36,900대의 항공기를 잃었다. I-16 이나 MiG-3, LaGG-3 과 같은 구형 기종들로 공백을 유지하는 동안 소련 항공 산업은 생산에 전념하여 이러한 손실을 메울 수 있었다. 쿠르스크에서 가장 널리 사용된 소련 전투기는 Yak-1, Yak-7B 그리고 La-5였다. La-5FN의 경우 독일의 Bf-109 또는 Fw-190와 비견되는 기종이었다.
그러나 조종사 훈련이 문제였다. 1942년 훈련을 받은 13,383명의 신참 소련 조종사들은 전투에 투입되기 전에 고작 13~15시간의 비행을 경험해보았을 정도였다. Il-2 슈투르모비크(Shturmovik)와 폭격기 조종사들도 각각 18, 15 시간 비행이 고작이었다. 쿠르스크에 참전한 소련 폭격기 및 지상공격기 조종사들 중 단지 7%만이 실전경험이 있었다. 신참들은 전투에서 조종할 기종으로 강제 훈련을 받았으며, 이 과정에서 1943년 여름까지 10,600대의 항공기를 사고로 잃었다. 소련은 쿠르스크 지역에 VVS 참모장인 알렉산드르 노비코프(Aleksandr Novikov) 연대장과 같은 유능한 리더들을 배치하였지만, 조종사들의 경험 부족과 수준 미달로 많은 손실을 치렀다.
쿠르스크전투 이후 소련 공군은 지상군과 긴밀한 공조 관계에 들어갔다. 조종사들에게도 보다 발전된 훈련 프로그램이 적용되었다. 결과적으로 소련은 고도로 숙련된 조종사들로 구성된 적기(Red Banner) 부대를 만들 수 있었다. 쿠르스크전투 6개월만에 소련 조종사와 독일 조종사의 손실 비율은 4:1에서 3:2까지 가게 되었다.
양측 전력
<독일 육군>
1. 중앙 집단군(Army Group Center) : 귄터 폰 클루게(Gunther von Kluge) 총지휘 (1) 제 9 군 : 발터 모델 지휘. - 제 20 육군단 : 루돌프 로만(Rudolf von Roman) 지휘. 제 45, 72, 137, 251 보병사단 - 제 46 육군단 : 한스 초른(Hans Zorn) 지휘. 제 7, 31, 102, 258 보병사단 - 제 47 육군단 : 요아힘 레멜센(Joachim Lemelsen) 지휘. 제 2, 9, 20 기갑사단, 제 6 보병사단 - 제 23 육군단 : 요하네스 프라이슈너(Johannes Frießner) 지휘. 제 216, 383 보병사단, 제 78 돌격사단 - 예비전력 : 제 4, 12 기갑사단, 제 10 장갑척탄병사단 (2) 제 2 기갑군 : 에리히 하인리히 클뢰슈너(Erich-Heinrich Cloßner) 지휘. - 제 35 육군단 : 로타 렌두릭(Lothar Rendulic) 지휘. 제 34, 56, 262, 299 보병사단 - 제 53 육군단 : 프리드리히 골비처(Friedrich Gollwitzer) 지휘. 제 208, 211, 293 보병사단, 제 25 장갑척탄병사단. - 제 55 육군단 : 에리히 야스케(Erich Jaschke) 지휘. 제 110, 134, 296, 339 보병사단 - 예비전력 : 제 112 보병사단 (3) 예비 집단군 : 제 5, 8 기갑사단
2. 남부 집단군(Army Group South) : 에리히 폰 만슈타인 총지휘 (1) 제 4 기갑군 : 헤르만 호트 지휘. - 제 52 육군단 : 오이겐 오트(Eugen_Ott) 지휘. 제 57, 255, 332 보병사단 - 제 48 기갑군단 : 오토 폰 크노벨스도르프(Otto von Knobelsdorff) 지휘. 제 3, 11 기갑사단, 제 167 보병사단, 그로스도이칠란트 사단 - 제 2 무장친위대 기갑군단 : 파울 하우저(Paul Hausser) 지휘. 제 1, 2, 3 무장친위대 장갑척탄병 사단 (2) 켐프 육군 파견부대(Army Detachment Kempf) : 베르너 켐프(Werner Kempf) 지휘 - 제 3 기갑군단 : 헤르만 브라이트(Hermann Breith) 지휘. 제 6, 7, 19 기갑사단, 제 168 보병사단 - 라우스 군단(Korps Raus) : 에르하르트 라우스(Erhard Raus) 지휘. 제 106, 320 보병사단 - 제 42 육군단 : 프란츠 마텐클로트(Franz Mattenklot) 지휘. 제 39, 161, 282 보병사단 (3) 예비 집단군 : 제 24 기갑군단(제 5 무장친위대 장갑척탄병사단, 제 17 기갑사단)
<소련 육군>
1. 중앙 전선 : 콘스탄틴 로코소프스키(Konstantin Rokossovsky) 총지휘 (1) 제 13 군 : 푸호프(N. Puchow) 지휘. - 제 17 위병 소총 군단 : 제 6, 70, 75 위병 소총 사단 - 제 18 위병 소총 군단 : 제 2, 3, 4 공수 위병 소총 사단 - 제 15 소총 군단 : 제 8, 74, 148 소총 사단 - 제 29 소총 군단 : 제 15, 81, 307 소총 사단 (2) 제 48 군 : 프로코피 로마넨코(Prokofiy Romanenko) 지휘 - 제 42 소총 군단 : 제 6, 70, 75 위병 소총 사단 - 제 73 소총 군단 : 제 2, 3, 4 공수 위병 소총 사단 (3) 제 60 군 : 체르냐초프스키(I. Tschernjachowski) 지휘 - 제 24 소총 군단 : 제 42, 112 소총 사단 - 제 30 소총 군단 : 제 121, 141, 322 소총 사단 - 독립부대 : 제 55 소총 사단 (4) 제 65 군 : 체르냐초프스키 지휘 - 제 18 소총 군단 : 제 69, 149, 246 소총 사단 - 제 27 소총 군단 : 제 60, 193 소총 사단 - 독립부대 : 제 37 위병 소총 사단, 제 181, 194, 354 소총 사단 (5) 제 70 군 : 갈라닌(I. Galanin) 지휘 - 제 28 소총 군단 : 제 132, 211, 280 소총 사단 - 독립부대 : 제 102, 106, 140, 162 소총 사단 (6) 제 2 기갑군 : A. 로딘(A. Rodin) 지휘. - 제 3 기갑 군단 - 제 16 기갑 군단 (7) 예비 전력 - 제 9 기갑 군단 - 제 19 기갑 군단
2. 보로네츠 전선 : 니콜라이 바투틴(Nikolai Vatutin) 지휘 (1) 제 6 위병군 : 치스챠코브(I. Tschistjakow) 지휘 - 제 22 위병 소총 군단 : 제 61, 71, 90 위병 소총 사단 - 제 23 위병 소총 군단 : 제 51, 52 위병 소총 사단, 제 375 소총 사단 - 독립부대 : 제 89 위병 소총 사단 (2) 제 7 위병군 : 수밀로프(M. Schumilow) 지휘 - 제 24 위병 소총 군단 : 제 15, 36, 72 위병 소총 사단 - 제 25 위병 소총 군단 : 제 73, 78, 81 위병 소총 사단 - 독립부대 : 제 213 소총 사단 (3) 제 40 군 : 모스칼렌코(K. Moskalenko) 지휘 - 제 47 소총 군단 : 제 161, 206, 237 소총 사단 - 제 52 소총 군단 : 제 100, 219, 309 소총 사단 (4) 제 69 군 : 크루첸킨(W. Krutschenkin) 지휘 - 제 48 소총 군단 : 제 107, 183, 307 소총 사단 - 제 49 소총 군단 : 제 111, 270 소총 사단 (5) 제 1 위병 기갑군 : 미하일 카투코프(Mikhail Katukov) 지휘 - 제 6 기갑군단 - 제 31 기갑군단 - 제 3 기계화 군단 (6) 예비 전력 - 제 35 위병 소총 군단 : 제 92, 93, 94 위병 소총 사단 - 독립부대 : 제 2, 3 위병 기갑 군단
3. 대초원 전선 : 이반 코네프(Ivan Konev) 지휘 (1) 제 5 위병군 : 자도프(A. Zhadov) 지휘 - 제 32 위병 소총 군단 : 제 13, 66 위병 소총 사단, 제 6 공수 위병 소총 사단 - 제 33 위병 소총 군단 : 제 95, 97 위병 소총 사단, 제 9 공수 위병 소총 사단 - 독립부대 : 제 42 위병 소총 사단, 제 10 기갑 군단 (2) 제 5 위병 기갑군 : 로트미스트로프(P.Rotmistrov) 지휘 - 제 5 위병 소총 군단 - 제 29 기갑 군단
<전력 비교>
1. 독일 공격단계 참가병력 : 실참가 소련군 1,426,352 / 독일군 518,271 (비율 2.8:1), 전체 소련군 1,910,361 / 독일군 778,907 (비율 2.5:1) 전차동원 : 실참가 소련군 4,938 / 독일군 2,465 (비율 2:1), 전체 소련군 5,128 / 독일군 2,928 (비율 1.7:1) 화포동원 : 소련군 31,415 / 독일군 7,417 (비율 4:1)
2. 소련 반격단계 참가병력 : 실참가 소련군 1,987,463 / 독일군 625,271 (비율 3.2:1), 전체 소련군 2,500,000 / 독일군 940,900 (비율 2.7:1) 전차동원 : 실참가 소련군 8,200 / 독일군 2,699 (비율 3:1), 증원 제외 전체 소련군 7,360 / 독일군 3,253 (비율 2.3:1) 화포동원 : 소련군 47,416 / 독일군 9,467 (비율 5:1)
독일은 공격 당시 3개 군과 동부 전선 전차 과반수를 동원하였다. 제 9 군은 전투원 223,000 명을 포함한 335,000 명, 제 4 기갑군은 전투원 149,271 명 포함한 223,907 명, 켐프 파견부대는 전투원 66,000 포함 100,000 명으로, 전체 전투원 518,271 포함 778,907 명이었다.
소련군은 2개 전선을 방어로, 1개 전선을 예비전력으로 두었다. 중앙 전선은 전투원 510,983 명을 포함한 711,575 명, 보로네츠 전선은 전투원 446,236 명 포함 625,591 명, 대초원 전선은 전투원 449,133 명 포함 573,195 명으로, 전체 전투원 1,426,352 명 포함한 1,910,361 명이었다.
소련군이 북쪽으로부터 역공을 개시할 당시 독일 제 2 기갑군은 브리얀스크 전선(Brijansk Front)과 서부 전선(West Front)의 2개 전선군으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제 2 기갑군 107,000 명은 전투원 650,000 명 포함 950,000 명의 육군 지원을 받았다. 2개 전선군이 가세한 소련군의 수는 전투원 1,987,463 포함 2,629,458 명에 달하였다.
항공 예선전
소련 공군은 독일의 전투준비를 방해하기 위한 중요한 임무를 맡았다. 1943년 4월 17일 소련은 오르샤의 독일 비행장을 공습하여 1F/100, 4F/121 수색정찰대 소속 5대의 Ju 88 정찰기, 제 2 야간수색정찰대 소속 3대의 Do 17/Do 217을 파괴하였다. 3일후 공습에서는 10대의 고고도 정찰기가 지상에서 추가로 파괴되었다. 결과적으로 독일에게 있어서 전략 정찰 비행대는 4F/14 만이 남게 되었다.
독일 공군(Luftwaffe) 또한 본 작전을 앞두고 바쁜 나날을 보냈다. 독일은 1943년 6월 내내 GAZ(Gorkovsky Avtomobilny Zavod)사의 전차공장을 맹폭하였다. 6월 4일과 5일 사이의 야간에는 KG1(Kampfgeschwader 1), KG3, KG4, KG55, KG100 소속 He 111 기들이 179톤의 폭탄을 퍼부어 공장과 생산라인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GAZ 제 1 공장의 건물 50채, 콘베이어 9,000 미터, 장비류 5,900 개, 전차 엔진 8,000 여개가 파괴되었다. 그러나 독일은 폭격 목표 선정에 실수를 저질렀다. GAZ 1번 공장은 T-70 경전차만을 생산하였기 때문이다. 인근의 112번 공장이야말로 두번째로 많은 T-34 전차를 생산하는 공장이었고, 폭격에 영향을 받지 않은 이 공장에서 1943년 2,851대, 1944년 3,619대, 1945년 3,255대의 T-34가 생산되었다. 폭격을 받은 생산시설의 복구에는 6주가 소요되었다. 독일 공군은 라보치킨(Lavochkin) La-5, La-5FN 항공기를 생산하는 92번 공장도 놓치고 말았다.
지상 예선전
히틀러가 만슈타인에게 공격 명령을 내린 것은 4개월이나 지난 시점이었고, 모두 90대의 엘레판트 대전차 자주포(Elefant Panzerjagers), 79 대의 Hs 129 지상공격기, 270 대의 티거와 4호 전차 후기형 및 T-34 노획 전차들이 추가된 시점이었다. 도합 3,000 여대의 전차와 자주포, 2,110 대의 항공기, 435,000 명의 병력이 준비되었다. 이는 사상 최고의 독일군 전투력 결집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틀러는 적절성에 의심을 표현하였다.
이 시기 서부 유럽에서의 연합군이 독일군에 막대한 타격을 입히기 시작하였다. 게다가 북아프리카의 몰타, 튀니지에서 1942년 4/4 분기부터 1943년 상반기까지 공군력 40%를 상실하였다. 이제 독일의 제공권은 장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소련 공군은 독일 공군에 숫적 우세를 점하였으며 질적으로도 비슷해지고 있었다. 양측은 모두 기갑차량을 상대하기에 적합한 지상공격기를 보유하고 있었는데, 소련의 일류신(Ilyushin) Il-2 슈투르모비크와 독일의 융커스(Junkers) Ju 87G (Ju 87D-3/5 기종에 37 mm 기관포 장착)가 그것이었다.
공격 개시일이 계속 지연되다가 7월 1일에 이르러 7월 5일로 날짜가 재확정되었을때 소련 원수 알렉산드르 바실리에프스키(Aleksandr Vasilevsky)는 전선 지휘관들에게 드디어 독일이 7월 3일에서 6일 사이에 공격해올 것이라고 알렸다. 수개월간 소련은 붉은 오케스트라 스파이 조직(Red Orchestra spy ring, Rote Kapelle)과 루시 스파이 조직으로부터 자세한 첩보를 받아보고 있었다. 이들 조직은 헤르만 괴링(Hermann Goring)의 공군성 및 다른 나치(Nazi) 기관으로부터 정보를 빼내왔다.
1943년 7월 4일 첫 전투가 시작되었다. 남쪽에서 독일 제 4 기갑군은 7월 5일 본 공격에 앞서서 소련의 전초기지를 점령하기 위해 나섬으로써 기습효과를 희생시켰다. 니콜라이 표도로비치 바투틴(Nikolai Fyodorovich Vatutin)은 독일의 공격이 임박하였다는 보고를 받고 7월 4일 야간에 독일군 지역을 폭격할 것을 보로네츠 전선에 지시하였다.
오후에 Ju 87 슈투카(Stuka) 급강하 폭격기들이 북쪽 소련 전선을 공격해왔고, 독일 포병의 포격이 시작될 즈음 돌아갔다. 켐프의 기갑 첨병 역할을 하는 제 3 기갑군단은 자비도프스카 주변의 소련군 주둔지역으로 진격해들어갔다. 이와 발맞추어 그로스도이칠란트 사단이 비가 내리는 가운데 부토보로 진입하였으며 제 11 기갑사단이 부토보 주변의 고지대를 점령하였다. 부토보 서쪽으로의 진입은 쉽지 않았는데, 독일군은 한밤중이 되어서야 소련군의 저항을 제압할 수 있었다. 제 2 무장친위대 기갑군단은 소련군 관측진지를 확보한 후 소련군의 완강한 저항에 직면했지만 화염방사기의 도움으로 벙커들을 처리할 수 있었다.
02:30 시경 소련군은 독일의 진격속도를 늦추고 대형을 망가뜨리기 위한 포격을 남북 양측으로부터 하였다. 3,000 문의 화포와 박격포가 쉴새없이 뿜어대는 포화는 큰 피해를 야기하지는 못했지만 독일군 포병 활동을 절반으로 누그러뜨리고 7월 5일의 본격적 침공에 어느정도 제동을 걸었다.
독일의 맹습
제 9 군은 에정대로 7월 5일 본격적인 공격을 시작하였고, 소련군 중앙 전선군이 이에 맞섰다. 45 km 에 걸친 넓은 전선에서 전개된 공격 과정에서 독일군은 거대한 지뢰밭에 맞닥뜨렸고, 소련군의 포격이 이어지는 가운데 공병에 의한 지뢰 제거 작업이 진행되었다. 골리앗(Goliath)과 보그바드(Borgward) 같은 원격 제어 공병 차량이 몇대 있었지만 별반 성공적이지 못했는데, 작업을 마쳐도 지뢰를 제거하였다는 표식을 하는 기능이 없었는데다가 소련군이 포격과 더불어 사격을 가해와 작업 속도를 더욱 더디게 하였다.
독일군의 피해는 적지 않았다. 독일 제 653 중자주포 대대의 경우 49대의 페르디난트/엘레판트 대전차 자주포로 침공을 시작하였지만 7월 5일 17:00 시경까지 37대가 지뢰밭에서 주저앉았다. 비록 이들중 대다수는 완파된 것이 아니라 단지 이동능력만을 상실한 것이었기에 수리는 가능하였지만 당장은 사용할 수 없게 되었을 뿐 아니라 소련군의 좋은 표적이 되었다. 독일군은 진격과 수리를 병행하며 되살릴 수 있는 차량을 최대한 수리하였다. 작전 개시 첫날 독일군은 8 km 돌파를 하는 동안 1,287 명의 병력을 잃었고 5,921 명이 부상을 당하였다.
독일군은 이 날 기갑 차량들, 특히 엘레판트 자주포 차량에 중대 결함을 발견하였다. 이들은 중장거리에서 소련군의 전차를 파괴하는데 매우 훌륭하였지만 부차적인 무기가 없었기에 일단 중기관총의 엄호를 벗어나면 참호에 틀어박힌 소련군에게 손쓸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구데리안은 일기에 이에 따른 고충을 토로하기도 하였다.
다음날 로코소프스키의 중앙 전선군은 독일 제 9 군, 특히 제 46 기갑군단을 향한 역공을 개시하였다. 소련군 제 2 기갑군은 독일 제 19 기갑군단에 공격을 시작하였지만 역공 너무 시기가 빨랐다. 소련군은 티거 전차와의 첫 대면에서 극심한 타격을 입었는데, 제 107 및 164 기갑여단은 모두 69 대의 전차를 잃고 공격을 중단할 수 밖에 없었다. 티거의 위력을 경험한 로코소프스키는 휘하 전차들 대부분을 참호에 묻어 고정식 대전차포로 활용하기로 하였다.
이후 이틀간 북부지역 최강의 진지중 하나인 포니리 주변의 진지를 두고 치열한 전투가 전개되었다. 양측 모두에게 중요한 지점이었던 덕에 양보할 수 없는 곳이었다. 독일 전차들은 1 km 진격할때마다 70 문의 대전차포와 맞닥뜨려야 했다. 7월 7일 독일 제 86, 292 보병사단이 포니리에 진입, 격렬한 시가전을 치르고서야 마을을 접수할 수 있었다. 소련군은 즉각 반격을 개시하여 독일군을 일시적으로 몰아냈지만 독일도 다시 공세를 재개하여 마을은 수차례 주인이 바뀌었다. 7월 8일 저녁이 되기 전까지 마을 대부분을 점령한 독일군은 페르디난트 대전차 자주포를 불러들여 253.3 고지를 공격해 9일 수중에 넣었다. 포니리에서의 양측 사상자는 상당하였고, 훗날 역사가 존 키건(John Keegan)은 포니리를 가리켜 제 2의 두오몽(Douaumont) 납골당이라 칭했다. 소련군의 전력이 예비전력으로 교체되는 가운데 독일군은 지쳐갔다.
발터 모델은 재정비를 위해 진격을 일시 중단하기로 결정하였다. 7월 10일 모델은 공군 지원을 불러 새로 공격을 개시하였지만 별다른 소득은 없었다. 예비전력으로 교체된 소련군의 저항에 맞닥뜨렸기 때문이었다. 모델은 결국 진격을 다시 중단시켰다.
진격 중단으로 인하여 독일군의 계획은 변경을 요하게 되었다. 현재 보유한 전투력으로는 소련군을 직접 돌파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인 모델은 강력한 소련 진지들을 제 46 기갑군단에게 맡기고, 나머지 전력은 이를 우회해 진격하는 방안으로 전략을 수정하였다. 그는 또한 전차를 집중하는 방법을 취해 서서히 진격하였는데, 전차 전력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게 된 덕분에 7월 12일까지 제 9 군에 살아남은 전차는 자주포 포함 63대에 불과하였다.
소련 제 3 기갑군과 제 11 위병군은 독일 제 9 군의 후미에 있던 제 2 기갑군을 공격하였다. 숫적으로 우세한 소련의 공격에 제 2 기갑군은 곤경에 빠졌고, 독일군의 보급로가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소련군이 오렐 방면으로 진군하게 되면 제 9 군은 포위당하는 형국이 되게 되었다.
북부에서의 시타델 작전 종결
제 9 군은 포위되지 않기 위하여 공군의 도움으로 퇴각을 하였다. 제 9 군의 공세는 이렇게 종결되었다. 7월 5일에서 14일까지 파괴된 제 9 군 전차의 수는 143대에 달하였는데, 남부 집단군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전차의 수가 적었기에 전차 손실은 비교적 높았다. 소련 중앙 전선군은 모두 526대의 전차를 잃었고, 예비전력 보급이 원활히 이루어지지 않는 가운데 일부 대전차포를 독일이게 빼앗기기도 하였다. 소련의 역공은 모델에게 하여금 철수를 해야 할지 공멸을 해야 할지를 두고 고민하게 만들었다.
남부에서의 독일 공세
만슈타인의 병력은 모델의 병력보다 장비면에서 우월하였다. 제 4 기갑군과 켐프 부대는 모두 1,377 대의 전차와 자주포를 보유하였는데, 모델은 988 대를 보유하였다. 이중 티거가 102대, 판터가 200 대였다.
호트가 지휘하는 제 4 기갑군은 두갈래로 길을 나누어 공격을 개시하였다. 각각의 공격은 제 48 기갑군단과 제 2 무장친위대 기갑군단이 담당하는 가운데 이들의 엄호는 52 군단이 좌측, 켐프 부대가 우측을 맡았다. 각각의 선봉중 보다 앞쪽을 담당하게 된 제 48 기갑군단은 200 대의 판터가 주어졌다. 이들의 상대는 보로네츠 전선군이었다.
공격은 04:00 시경 시작되었다. 소련군의 방어와 지뢰밭의 저항이 있었지만 진격속도는 대체로 순조로왔다. 만슈타인의 전차대는 북쪽의 모델에 비해 더 효율을 발휘하였는데, 그가 전차 운용 전술에 더 능숙하였기 때문이었다. 소련군은 독일군의 정확한 공격지점을 짚어낼 수 없어서 결국 방어선을 넓게 형성하였다. 보로네츠 전선군의 4개 군 중 3개는 1 km 당 10 문의 대전차포를 배치하였는데, 이는 중앙 집단군의 절반 수준에 불과하였다. 보로네츠 전선군은 결국 최전선에 최소한의 부대만을 남겨두고 후방 깊숙히 주둔하는 방법을 택했다. 중앙 전선군보다 약한 방어력으로 더 강한 적을 상대하여야 했기 때문이었다.
새 판터 전차는 생각했던 것보다 나은 성능을 보이지 못했다. 판터가 고장을 일으켜 수리소에 들어오면 대기중이었던 200여명의 수리공 중 45명이 수리에 매달려야 했다. 고장나지 않은 나머지 판터들도 진격하는 족족 지뢰를 밟아 멈추어서곤 했다.
제 2 무장친위대 기갑군단은 첫 이틀동안 25 km 거리를 돌파해 야코블레보를 점령하는 전과를 올렸다. 제 48 기갑군단의 판터 200 여대는 전장보다 수리소에 있는 시간이 더 많았다. 제 2 무장친위대 기갑군단을 엄호하던 켐프 부대는 도네크를 건너는 중 숫적으로 우세한 소련군과 맞닥뜨려 곤경에 처했다.
독일의 진격 속도를 늦추지 못하는 상황에서 소련 지휘관들은 예비전력을 모두 투입한다는 결단을 내려야 했다. 대초원 전선군은 수개월 전에 편성되어 예비전력으로 대기중이었는데, 참모부의 지시에 따라 7월 6일부터 점진적으로 일선에 배치되었다. 바투틴은 역공을 계획하였지만 북부에서의 역공이 실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를 취소하였으며, 로코소프스키가 그러하였듯이 전차들을 묻어 고정 대전차포로 활용하였다. 주코프는 전차를 이런 식으로 활용하는 것에 불만을 가지고 항의하였지만 바투틴의 명령은 그대로 이행되었다.
독일의 진격은 이러한 땅에 묻힌 조용한 전차들에 의하여 점차 늦추어졌다. 본체가 감추어진채 포탑만 나와있는 적을 찾아내 제거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소련군은 이렇게 전차들을 묻고도 역공에 사용할 전차들을 조달하는데 어려움이 없었다. 7월 8일 무장친위대 하사 프란츠 스타우데거(Franz Staudegger)가 탑승한 티거 전차는 전방에서 50대의 T-34를 발견하였고, 포격을 주고받은 끝에 이중 22대의 전차를 격파하여 티거 전차장으로는 최초로 기사 십자장(Knights Cross)을 받았다.
7월 9일 독일군 선봉이 프셀 강(Psel River)에 도달하였고, 다음날 첫 도하가 이루어졌다. 7월 10일까지 독일이 남부에서 잃은 전차는 166대였다. 지뢰가 깔린 방어선을 돌파한 것 치고는 상당히 낮은 피해 숫자였다. 7월 11일은 독일군에게 성공적인 하루였다. 켐프 부대는 결국 돌파구를 찾았고, 제 3 기갑군단은 소련군 방어선 깊이 진격했다. 밤에는 제 6 기갑사단이 기습적으로 도네크의 교량을 접수하였다. 켐프의 제 3 기갑군단이 남쪽으로부터 프로호로프카로 진격해 들어가는 동안 제 2 무장친위대 기갑군단은 서쪽에서 진입하여 소련 제 69 군을 거의 궁지에 몰아넣었다. 이 시점에 만슈타인은 자신이 목적을 성취하였으며, 이제 소련군 예비전력을 구축하는 일만 남았다고 판단하였다. 이때 소련군은 거대한 역공을 계획하고 있었다.
프로호로프카
당시 참전자들의 증언은 상반적이다. 소련측 참전자들은 용맹하게 꾸준히 돌격하였기에 큰 희생이 발생하고서도 독일군을 몰아낼 수 있었다고 주장하였는데, 근래의 연구에 따르면 소련군은 오히려 대실패를 하였다고 한다. 그것은 소련군 T-34 전차들이 독일군과 소련 대전차포 사이로 달려들면서 많은 수가 아군 포화에 파괴되었기 때문이었다. 원인이야 어떻든 소련은 독일군의 진격을 멈추게 하는데 엄청난 댓가를 지불하였다. 독일군의 진격이 멈춘 순간이 소련에서 말하는 대 애국 전쟁(Great Patriotic War)의 전환점이 되었다.
7월 12일 아침 호트는 제 4 기갑군의 예비전력을 모아 프로호로프카로 진군을 시작하였다. 이와 같은 시각 소련 제 5 위병 전차군은 역공을 시작하고 있었다. 무장친위대와 위병 전차군은 프로호로프카 서쪽에서 충돌하였다.
숨막힐듯한 열기 속에서 8시간에 걸친 전투가 시작되었다. 독일은 494대의 전차와 자주포를 보유하였으며 이중 90%가 가용상태였다. 독일군은 야음을 틈타 이동해온 소련 제 5 위병 전차군이 593대의 전차와 37대의 자주포를 보유, 숫적으로 훨씬 우세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는데, 특히나 소련군은 전투를 치르지 않은 신규 전력이기도 하였다.
소련 제 31 전차군단과 33 위병 소총 군단은 독일 제 3 무장친위대 토텐코프 사단과 교전에 들어갔고, 최대한 근거리로 접근하여 티거의 약점을 공략하기 시작하였다. 무장친위대는 방어로 전환할 수 밖에 없었지만 초기 접전에서 기갑차량의 절반을 잃게되었다. 7월 11일과 12일 사이의 야간에 독일이 거둔 성공이라고는 도네츠 강(Donets river)의 교량 입구를 접수한 것 뿐이었다. 무장친위대 제 1 사단 라이브슈탄달테는 소련 제 18 전차군단에 발목이 잡혔고, 제 3 기갑군단과 무장친위대 제 2 사단 다스 라이히는 소련 제 2 위병 전차군단 및 예비군단에 가로막혔다.
공중에서의 전투도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만슈타인은 소련군의 돌파를 허용하지 않기 위해 결정타를 날려보내고자 하였다. 291 ShAD에서 출격한 슈투르모비크 공격기들은 주간 동안 무장친위대 제 2 기갑사단을 공격하여 상당한 타격을 입혔고, 이에 맞추어 Hs 129와 Ju 87들이 출격하여 소련 제 69 군과 제 5 위병군을 폭격했다. 소련측의 피해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소련 제 29 기갑군단이 막심한 피해를 입어 진격을 중단하고 방어로 전환했다는 보고가 남아있다. 소련 공군이 독일 제 4 기갑군의 측면 공략에 집중하는 동안 프로호로프카의 제공권은 독일 공군의 것이었다.
이 전투는 양측에 상당한 피해만을 야기한채 무승부로 끝났다. 양측 모두 이 날 목적한 바를 이루지 못했지만, 그나마 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소련군은 고장난 차량을 회수하고 부상병을 돌볼 여유는 있었다.
이 날의 전투에서 양측 전차가 얼마나 손실되었는지는 여전히 논란거리다. 소련측의 손실은 200 에서 822 까지 다양하게 추정되며, 약 300대 완파에 비슷한 수 손상으로 추측된다. 독일측의 손실은 낮게는 80 에서 많게는 수백으로 추정되는데, 독일의 경우 전차 손실을 계산하는 방법이 특이하여 정확한 수를 알 수가 없다. 다만 60에서 70대의 전차들이 완파되었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소련측은 이날 독일 전차 400대 파괴에 병력 3,500 사살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실상에 따라 어쩌면 사상 최대의 전차전이라는 이름은 쿠르스크전투 전체가 아닌, 이 날의 프로호로프카 전투 자체에 붙어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남부에서의 시타델 작전 종결
북부에서의 독일 진공은 7월 10일 정지되었지만 당시 남쪽에선 12일까지도 양측 균형이 유지되고 있었다. 그동안 2개 방어선을 돌파한 독일군은 지칠대로 지친 상태였지만 자신들이 이제 마지막 방어선만을 남기고 있다고 믿었다. 사실상 그 뒷편으로 5개의 방어선이 더 있었는데, 대개 앞의 두개 방어선보다 방어력이 떨어졌고 일부는 병력 자체가 배치되지 않은 곳도 있었다. 소련측은 방어력이 약화되었으며 예비전력 대부분도 투입한 상태였다. 하지만 미투입한 예비 전력이 얼마 되지 않았다고 해도 독일측보다는 많았다.
7월 16일 독일군은 처음 공세를 시작한 지점까지 후퇴하였다. 대폭으로 감소된 그들이 맞이하게 된 것은 8월 3일 벨고그라드-하르코프 지역에서 독일군을 분쇄하기 위해 시작된 폴코보데츠 루미얀초프 작전(Operation Polkovodets Rumyantsev)이었다. 독일군은 치열하게 저항했지만 8월 5일 벨고그라드가 함락되었고, 8월 23일에는 하르코프가 무너졌다. 소련은 하르코프의 함락 시점을 쿠르스크전투의 종결로 간주하였다.
히틀러의 작전 취소
7월 9일에서 10일 사이 밤 연합군이 시실리에 상륙하였다. 3일이 지나 히틀러는 귄터 폰 클루게와 에리히 폰 만슈타인을 동프러시아에 있는 볼프산체(Wolfsschanze), 즉 늑대 소굴 본부로 불러 일시적으로 시타델 작전을 취소하라고 지시하였다. 만슈타인은 시타델 작전 성공이 목전이라며 히틀러를 만류하였고, 히틀러는 만슈타인에게 며칠 말미를 더 주기로 결정하였지만, 7월 17일 결국 작전 취소를 지시하면서 모든 무장친위대 기갑전력을 이탈리아로 이동시키도록 지시하였다.
전투가 절정에 달하였을 즈음에 히틀러가 작전을 취소한 것을 두고 당시 독일 장군들은 회고록에서 많은 비판을 가했다. 특히나 무장친위대 전력은 시실리로 이동하는데 3개월이나 소요되었지만 시실리에서 별다른 역할을 하지도 못하였는데, 그대로 쿠르스크에 두었더라면 더 큰 역할을 할 수 있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실제 바로 이탈리아로 이동한 것은 즉각 장비 없이 빈손으로 떠난 라이브슈탄달테 사단 뿐이었다. 나머지는 동부 전선에 남아 소련군의 역공에 저항하는데 주력하였다.
소련의 역공 : 쿠투초프 작전
쿠투초프 작전(Operation Kutuzov)은 7월 12일 독일 중앙 집단군 남쪽 측면으로부터 개시되었다. 작전이 시작되기 얼마 전에 독일이 진격을 멈춘 상태였기에 쿠투초프 작전은 남쪽에서 전개되었던 역공에 비하여 더욱 효과가 컸다.
마키안 포포프(Markian Popov)가 지휘하는 브리얀스크 전선군과 바실리 소코로프스키(Vasily Sokolovsky)가 지휘하는 서부 전선군은 7월 12일 무방비 상태였던 독일 제 2 기갑군을 공격하였다. 제 2 기갑군은 다른 군으로 전차들을 차출시킨 상태였다. 역공을 시작한 소련군의 전력은 1,401대의 전차와 15,109문의 화포, 487,111명의 병력이었다. 3일후 독일 제 9 군에 대한 공격이 시작되면서 쿠투초프 작전은 2단계로 접어들었다. 이제 쿠투초프 작전 투입 전력은 전차 2,409대, 화포 26,379문, 병력 1,286,049명이었다.
브리얀스크 전선군의 작전은 소련 하계 공세의 시작점이 되었다. 엄청난 규모의 포격이 시작되면서 독일 최전선은 붕괴되었다. 독일의 방어선이 생각보다 깊어 많은 소련군 선봉부대들이 심각한 피해를 입었지만, 일부 지역에서는 소련군이 방어선을 돌파하는데 성공하였다. 독일의 경우 이에 대처할 예비전력이 거의 없었기에 제 2 기갑군의 상황은 매우 위험해졌다. 7월 13일 중앙 집단군은 제 2 기갑군의 지휘권을 제 9 군 지휘권자인 발터 모델에게 부여하였다. 모델은 이로써 오렐 지역의 모든 독일군을 관장하게 되었다.
소련의 진군이 독일 제 9 군 전체를 위협하게 되면서 독일군의 사정은 더욱 나빠졌다. 모델은 전차를 모두 동원하여 무너지기 직전인 제 2 기갑군을 지원하였으며, 북부의 제 4 군은 제 253 보병사단을 보내왔다. 독일은 이로써 일시적으로 전선을 안정화시켰으며 제 9 군은 퇴각을 시작하였다. 소련 중앙 전선군은 이를 추격하고자 하였지만 독일군의 공습으로 쉽지 않았다. 7월 18일 제 9 군은 시타델 작전 시작 시점인 7월 5일 당시 지점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소련 전차대는 숫적 우위에도 불구하고 독일군을 돌파하지 못하였으며, 똑같은 전술과 위치를 고수하다가 전차와 병력만 잔뜩 잃었다. 소련 제 4 기갑군은 전체 T-34 전차 84%와 경전차 46%를 잃었다. 제 3 위병 전차군 또한 전체 800대의 전차중 절반을 잃었다. 독일군은 교전과 퇴각을 병행하며 하겐-스텔룽(Hagen-Stellung)으로 이동하였다.
소련군이 조직한 100,000 여명의 파르티잔들이 소련군을 지원하였다. 독일은 파르티잔들에게 철도와 보급로를 위협받게 되었으며, 8월 3일 파르티잔들은 독일의 후미를 대대적으로 공격하여 ‘철도 전쟁(Railway-war)’을 벌였다.
전선이 단축되면서 독일은 19개 사단을 작전에서 해제하여 예비전력화 하였다. 소련군은 전차와 화포를 집중해 독일군의 약한 방어선을 집중 타격하여 방어선 돌파를 이루어냈다. 쿠투초프 작전은 소련식의 전술이 성공한 완벽한 사례가 되었다. 8월 5일 제 3 위병 전차군은 오렐에 진입하였고, 8월 8일에는 브리얀스크 전선군이 브리얀스크 시에 진입하면서 일대의 독일군을 모두 일소하였다.
쿠투초프 작전은 쿠르스크전투중에 발생한 사건중 가장 피비린내 나는 것이었다. 독일군은 86,064 명을 잃었으며, 소련군은 112,529명 사망에 317,361명 부상을 기록하였다. 소련군의 손실은 전차와 자주포가 비교적 컸는데, 작전중 2,586대가 손실되었다. 독일의 피해 규모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는데, 중앙 집단군의 경우 시타델 작전부터 쿠투초프 작전까지 모두 343대의 전차와 자주포를 잃었다.
소련 지휘관 일부는 비록 승리하였지만 그 성과가 생각보다 적은데 불쾌함을 표현하였다. 로코소프스키 원수는 적을 포위하는 대신 밀어낸 것에 그쳤다며 만약 양쪽으로 군을 진격시켜 브리얀스크에서 만나도록 하였다면 포위 섬멸이 가능하였을 것이라고 하였다. 주코프도 이와 유사한 의견을 냈다. 그러나 스탈린은 독일이 약화되면 언제든지 포위가 가능하다며 독일을 영토에서 몰아낸 것에 만족감을 나타냈다.
소련의 역공 : 폴코보데츠 루미얀초프 작전
남부에서는 7월동안 독일에게 받은 피해를 재정비하는데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기에 8월까지 역공을 펼칠 수가 없었다. 8월 3일 폴코보데츠 루미얀초프 작전이 발효되고, 소련 참모부는 이를 하계 공세의 핵심으로 삼고자 하였다. 이 작전의 목표는 만슈타인의 제 4 군과 켐프 집단군을 분쇄하고 더 나아가 남부 집단군(Heeresgruppe Sud, Army Group South)에 타격을 입히는데 있었다. 최근 독일 제 6 군으로 새로 편제가 바뀐 제 1 전차군은 소련군이 흑해로 진군함에 따라 포위되어 있었다. 이들은 소련 남부 전선군 및 남서부 전선군과 7월 17일부터 교전하고 있었다.
보로네츠 전선과 대초원 전선은 병력 1,144,000명, 전차 2,418대, 화포 및 로켓 13,633문을 동원한 반면, 독일은 237대의 전차밖에 없었다. 만슈타인은 소련이 남부에서 반격을 펼치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해 예비전력(제 2 무장친위대 기갑군단, 제 24 군단, 제 48 기갑군단)을 모두 드네프르 강(Dnieper River)과 뮤즈 강(Mius River) 쪽 공세를 막는데 돌렸다. 그러나 소련군의 이쪽 방면으로의 공격은 독일군의 눈을 돌리기 위한 교란작전이었고, 작전은 먹혀들었다. 하르코프에서의 독일군 예비전력은 사라졌고, 비록 소련 참모부는 뮤즈 강에서도 승전하기를 원하였지만 하르코프의 전력 약화라는 최우선 목표는 달성되었다.
하르코프 공략을 위하여 소련은 30 km 전선 안에 가공할 화력을 집중하였다. 제 5, 6 위병군이 공격의 주력을 맡는 가운데 제 53 군이 가담하게 되었다. 쿠르스크와 하르코프 사이에 있는 5개 독일 방어선을 돌파하는데 화포 집중도 필수적인 요소였다. 제 1 기갑군과 제 5 위병군은 다른 2개 기계화 군단의 지원을 받아 각각 남북으로 하르코프를 포위하기로 하였다. 서쪽으로는 4개의 기갑군단이 제 20 군과 40 군을 지원하고, 동쪽과 남동쪽으로는 제 69 및 7 위병군이 남서부 전선군 소속 제 57 군의 지원을 받아 공격에 들어간다는 계획이었다.
8워 3일의 초기 공격은 소련의 전술이 얼마나 다듬어졌는지를 잘 보여주는 예가 되었다. 독일의 역공에 대비한 대전차 타격 부대들이 지원하는 가운데 중장구경 화포들이 독일군 지역을 향하여 불을 뿜고, 2개 기갑군이 무력화된 방어선으로 진주하여 결정타를 날렸다. 8월 5일 소련은 독일군 방어선 깊숙히 60 km을 돌파하여 벨고그라드를 점령하였으며 계속해서 독일군은 북부와 동부에서 압박하였다.
독일 예비전력은 오렐과 돈바 지역에서 서둘러 돌아와 소련의 공격을 저지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8월 6~7일간 소련 제 40 군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지연시킨 그로스도이칠란트 사단을 제외하고는 이렇다할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4개 보병 사단과 7개 기갑 및 기계화 사단이 제 3 기갑군단이라는 이름 하에 재편되었다. 만슈타인은 소련군 전선이 너무 확장되어 독일의 승리로 끝난 하르코프 3차 전투를 되풀이하고자 하였다. 당시 패전을 경험한 소련도 그러한 위험을 알고 있었다. 8월 12일 저넌에 도착한 제 2 무장친위대 기갑사단 다스 라이히와 토텐코프 사단이 하르코프 30 km 북서쪽 보고두호프 부근에서 역공을 개시하였고, 이들은 진격하는 가운데 많은 소련군 부대들을 포위 섬멸하였다. 소련 제 6 위병 기갑군과 제 1 기갑군을 지원하기 위해 제 5 위병 전차군이 가담하였다. 작전 초기에 가담한 3개 소련군은 1,112대의 전차중 800대 이상을 잃고 고전하고 있었다. 2개 독일 사단의 역공 이후 소련 전차군들은 더이상 공세를 지속시킬 수 없었다. 보고두호프 근방의 소련군은 발목이 잡혔고, 8월 18일 토텐코프 사단과 그로스도이칠란트 사단은 진격을 계속하여 소련군 후방에서 만났다. 이들에 의하여 소련 2개 기갑군단을 비롯한 일부 전력이 포위되어 버렸지만, 포위당한 소련군의 규모는 포위한 독일군 규모보다 더 컸다. 소련군은 사상자가 속출하는 가운데 포위망을 돌파할 수 있었으며 하르코프에 집중하여 8월 23일 치열한 전투 끝에 결국 하르코프를 점령하였다. 독일은 이 전투를 하르코프 4차 전투라고 부르고, 소련은 벨고로드-하르코프 공세 작전이라고 부른다.
벨고로드-하르코프 지역에서 사망한 소련군은 71,611명, 부상당한 인원은 183,955명이었으며, 전차 1,864대와 화포 423문을 상실하였다. 독일은 약 10,000명 사망에 20,000명 부상을 당했다. 정확한 집계는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독일 전차 손실은 소련 손실의 1/8 정도로 추정된다.
결과
쿠르스크전투는 소련의 결정적인 승리로 끝났으며, 독일의 대규모 공세가 좌절된 첫 사례가 되었다. 전년도에 비해 기술적으로 더욱 진보한 기갑차량을 보유하였던 독일은 소련군의 깊은 방어선을 돌파하지 못하였으며 소련군의 예비전력 양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는 예상치 못한 결과였으며 동부 전선의 향방을 결정지었다. 승리의 댓가는 싸지 않았다. 소련군은 비록 독일군을 막아내는데 성공하였지만 독일군보다 훨씬 많은 희생을 치렀다.
이 시점부터 동부 전선의 역학관계는 바뀌었다. 이제 공격은 소련의 것이 되었으며, 독일은 남은 기간 대부분을 공격보다는 응전으로 보내야 하였다. 이탈리아에 새로운 전선이 형성되어 독일의 자원과 주의가 분산되게 되었기도 하다. 소련과 독일 양측 모두 상당한 피해를 입었지만 소련만이 이를 완전히 복구할 능력이 있었다. 독일은 이후 쿠르스크 이전의 전력을 회복하지 못하였으며, 동부 전선에서는 더이상 대규모 공세를 펼칠수가 없게 되었다.
쿠르스크에서의 패전으로 히틀러는 참모들을 더욱 믿지 못하게 되었다. 그는 점차 군사적인 문제에 개입하였고, 전쟁 말에는 전술적 결정까지 하게 되었다. 히틀러가 개입하면서 독일군은 점차 전력을 잃어갔다. 소련의 스탈린은 이와 정반대였다. 전투의 승리로 참모부를 신뢰하게 된 스탈린은 작전 계획에서 한발 물러났고, 이후 좀처럼 군사적 결정을 좌지우지하지 않았다. 이는 소련군의 전략과 전술에 자유도를 부여하여 승리의 토대가 되었다.
발생 피해
독일 사학자 칼 하인츠 프리저(Karl-Heinz Frieser)에 따르면 독일군은 시타델 작전 동안 54,182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이중 9,036명이 죽고, 1,960명이 실종되었으며, 43,159명이 부상을 입었다. 독일 중앙 집단군 소속 제 9 군의 경우 23,345 명의 사상자를 냈으며, 남부 집단군의 경우 30,837명이었다.
프리저는 폴코보데츠 루미얀초프 작전 동안 독일 육군과 무장친위대가 25,068명의 사상자를 냈다고 한다. 이중 8,933명이 사망 또는 실종되었다. 쿠투초프 작전의 경우 86,064명의 사상자 중 14,215명이 죽고 11,300명이 실종되었으며 60,549명이 부상을 당했다고 한다. 쿠르스크전투 사상자의 총합은 약 170,000명에 이른다.
프리저는 또한 시타델 작전 동안 252대의 전차와 자주포가 파괴되었다고 하였다. 남부 집단군은 7월 16일까지 161대의 전차와 14대의 자주포를 잃었다. 이중 티거 전차가 10대, 판터가 42대, 페르디난트와 엘레판트가 19대였다. 나머지는 4호 전차 109대, 3호 전차 38대, 화염방사전차 3대, 기타 자주포 31대였다. 이후 소련의 역공 단계까지 총합한 전차 상실 대수는 정확히 집계가 어렵지만 프리저는 1,331대가 7~8월 동안 동부 전선에서 파괴되었다고 한다. 그는 쿠르스크전투 기간 동안 파괴된 전차가 760대라고 추정하였다. 그러나 이중 몇대가 수리 가능 상태였는지는 알 수 없다.
한편 데이빗 글란츠(David Glantz)는 사상자를 49,822명으로 집계하면서, 소련 역공 단계에서의 독일 사상자는 알 수 없다고 하였다. 글란츠는 1,612대의 전차와 자주포가 손상되거나 고장났고, 이중 323대가 파괴되었다고 집계하였다. 글란츠는 소련 역공 단게에서의 독일 전차 피해 상황은 언급하지 않았다.
프리저는 항공기 총 524대 피해가 발생하였다고 하였다. 시타델 작전 기간 동안 159대, 쿠투초프 작전과 폴코보데츠 루미얀초프 작전 기간 동안 218대가 파괴되었다고 한다. 크리스터 베르그스트룀(Christer Bergstrom)은 7월 5일과 31일 사이에 681대가 파괴되었다고 한다.
소련측의 주장에 따르면 1943년 7월 5일에서 8월 23일까지 독일군 500,000명이 사상되거나 포로가 되었으며 1,500대의 전차와 3,700대의 항공기가 파괴되었다고 한다.
글란츠는 소련 전쟁사학자 그리고리 키리보셰예프(Grigoriy Krivosheyev)가 가장 정확한 소련측 피해 상황을 집계하였다고 하였다. 글란츠는 소련 정부기록을 참조하였다는 키리보셰예프의 기록을 인용, 소련이 시타델 작전 기간 동안 177,874명의 사상자를 냈으며, 중앙 전선군의 경우 15,336명 사망, 18,561명 부상으로 총 33,897명의 사상자를 냈다고 한다. 보로네츠 전선군의 경우 총 73,892명의 사상자 중 27,542명이 죽고, 46,350명이 부상을 당했다. 대초원 전선군은 총 70,085명의 사상자 중 27,452명이 사망하고 42,606명이 부상을 당했다.
글란츠는 또한 쿠투조프 작전중 소련군 사상자 429,890명이 발생하였는데, 이중 112,529명이 사망하고 317,361명이 부상을 당했다고 한다. 서부 전선군은 25,585명 사망에 76,85명 부상, 브리얀스크 전선군은 39,173명 사망에 123,234명 부상, 중앙 전선군은 47,771명 사망에 117,271명 부상을 기록하였다. 이로써 쿠르스크전투 사상자는 모두 863,303명이 된다.
글란츠는 또한 폴코보데츠 루미얀초프 작전중 소련 사상자는 255,556명으로 이중 71,611명이 사망하고 183,955명이 부상당했다고 한다. 전선군별로는 보로네츠가 총 157,293명중 사망 48,339명 부상 108,954명, 대초원 전선군이 98,273명 중 23,272명 사망 75,001명 부상하였다고 한다. 시타델 작전 기간 동안 소련은 총 3,925대 중 절반 이상인 2,586대의 전차와 자주포를 잃었으며, 폴코보데츠 루미얀초프 작전중에도 총 2,439대 중 절반 이상인 1,864대의 전차와 자주포를 잃었다고 한다. 이러한 피해규모는 독일의 약 5배에 달한다.
크리스터 베르그스트룀은 소련 공군이 시타델 작전 동안 북부에서 677대, 남부에서 439대의 항공기를 잃었으며, 제 2 공군은 7월 기간 동안 433명, 제 17 공군은 244명의 조종사 사상자가 발생하였다고 하였다. 다른 부대의 사상자는 알려지지 않았다. 베르그스트룀에 의하면 소련은 7월 12일부터 8월 18일까지 1,104대의 항공기를 잃은것이 된다.
출처 : 네이버 블로그
요약 :
독일
성채 작전 5만 4182명 전사 전차 323대 손실 항공기 159기 격추 박격포 500문 손실 쿠르스크 전투 20만 3000명 전사 전차 720대 손실 항공기 681기 격추
소련
성채 작전 17만 7847명 전사 전차 1614 ~ 1956대 손실 항공기 459 ~ 1961기 격추 박격포 3929문 손실 쿠르스크 전투 86만 3303명 전사 전차 6064대 손실 항공기 1626기 격추
박격포 5244문 손실
출처 ㅣ 콯 프럼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패배한 독일수뇌부가 80만 명의 병사와 2,700대의 전차, 그리고 1,800대의 공군기로 구성된 독일군은 제2차 세계대전 중 최대 규모의 공격군을 조직하여 쿠르스크에 존재하는 소련군을 괴멸시키기 위해 공격을 감행하지만 소련군의 탱크 수는 3,600대, 공군기는 2,400대로 독일을 압도했고
뭐, 만약 전쟁이 벌어진다면 한국군도 300만 단위로 동원이 될테니까요... 2차대전 개전 직전의 독일 인구가 6천만 정도인데, 지금 한국이 5천만이고... 그 독일이 바르바로사에 동원한 병력만 305만이니... 프랑스나 국내에 잔존한 예비대, 해군병력등을 생각하면 한국도 충분히 그렇게 동원하겠죠. 한국전쟁때는 아직 국력도 약하고 동원체계도 안되어 있던 시절이라 그렇게 동원이 안되었던거지만...
첫댓글 그러나 교환비는...
뭐 애초부터 소련과 독일의 짐재력이 달랐다는 증거겠죠
교환비보소...좀만더 소모가 적엇다면 ㅜㅜ
소련이 독일이 이긴거슨 정말 레알 기적...1941년 6월에만 해도 아무도 소련이 이길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ㅜㅜ
전사자 수가 상상이 안 됨;;;
5만 명이면 우리나라 해/공군 수이고,
20만 명이면 대갈수 많은 우리나라 육군의 1/3인데
한 전투에서.... 전투에서;;;;;;;
뭐, 만약 전쟁이 벌어진다면 한국군도 300만 단위로 동원이 될테니까요... 2차대전 개전 직전의 독일 인구가 6천만 정도인데, 지금 한국이 5천만이고... 그 독일이 바르바로사에 동원한 병력만 305만이니... 프랑스나 국내에 잔존한 예비대, 해군병력등을 생각하면 한국도 충분히 그렇게 동원하겠죠. 한국전쟁때는 아직 국력도 약하고 동원체계도 안되어 있던 시절이라 그렇게 동원이 안되었던거지만...
어찌보면 디데이보다 이쪽이 2차대전의 전환점이라고 하기도 하죠.
만일 독일이 뚫었다면?!
솔까 디데이야말로 숟가락 얹기일 뿐이죠... 이미 끝난 전쟁... 막말로 영미군이 상륙을 아예 안했더라도, 손실이 더 커지고 시간은 길어졌을 망정, 쏘련군이 단독으로 베를린을 터는게 당시로서는 시간문제였을 뿐일텐데요...
글구 독일이 뚫었더라도 쏘련군의 전략예비대가 충분해서, 다시 쏘련군의 방어선과 대치하는 형국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합니다. 다만, 뚫지 못한, 실제 결과에서처럼 독일군이 끊임없는 역베를린 레이스를 펼치기 까지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겠죠.
소련과 독일 아웅다웅의 스케일을 보면 서유럽 전선은 진짜 잉여스럽죠
오버로드 작전이 2차대전 전환점 이라는건 말이 안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