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23일 [연중 제20주간 수요일]
마태오 20,1-16
목표를 이룬 이들이 하게 되는 것들
오늘 복음은 하늘 나라에서 어떤 사람들이 더 사랑을 받고 어떤 사람들이 덜 사랑 받는지에 관한
내용입니다.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사람들은 주님의 포도밭에서 일을 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품삯은 한 데나리온, 곧 구원이라는 같은 은총입니다.
그런데 같은 은총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높고 낮음이 결정됩니다.
어떤 이들은 자신들은 더 받아야 한다고 여기고 어떤 이들은 그것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결국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은 겸손한 사람일 수밖에 없습니다.
어차피 들어가는 하늘 나라라면 첫째를 노려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구원의 값인 한 데나리온에 어떻게 만족하고 감사할 수 있을지 생각해야 합니다.
한 데나리온은 그리스도의 피 값입니다.
그것에 충분한 감사를 하지 못하는 이유는 다른 것을 바라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다른 것을 바랄 때 이것에 대한 감사가 적어집니다.
우리의 바람이 오로지 구원, 하나로 모아질 때 하늘에서 그만큼 앞자리를 차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가정 먼저 하루 종일 일한 종들의 문제점은 무엇이었을까요?
그들은 아주 오랜 시간 자신들이 구원을 당연히 받을 만하다고 여긴 이들입니다.
일찌감치 구원의 길로 들어선 이들입니다.
그런 이들의 문제점은 더는 목표가 없어졌다는 데 있습니다.
저는 십일조를 내고 한 가지 죄로라도 끊임없이 고해성사를 할 수 있다면 구원을 확신해도 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열심한 신자들 대부분은 그런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들에게 더는 목표가 없습니다.
이루는 한 데나리온을 받을 것이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늦게서야 부름을 받고 일하러 온 종들은 ‘이렇게 적게 일했는데도 과연 한 데나리온을 다 주실까?’ 라며 불안해합니다.
그래서 한 시간을 일해도 하루 종일 일한 사람보다 열심히 합니다.
결국 그들이 하루 종일 일한 사람들보다 더 인정받게 됩니다.
결국 오늘 복음의 핵심은 하늘 나라에 들어가더라도 끝까지 정진을 멈추지 않는 사람이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지금 축구계에서는 호날두, 네이마르, 벤제마 등 유명 선수들이 사우디 리그로 발을 옮기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제공하는 엄청난 연봉 때문입니다.
메시도 호날두 연봉의 두 배에 달하는 연봉 6,000억에 러브콜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연봉 700억에 미국을 택했습니다.
그에게 축구를 잘하는 능력이 곧 돈과 직결되지는 않습니다.
어떤 이들은 자기 능력을 돈으로 바꾸려고 하지만, 어떤 이들은 의미를 추구합니다.
그리고 메시는 현재 매우 행복해 보입니다.
메시 덕분으로 미국 리그가 세계적 조명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메시는 미국으로 건너가 꼴찌팀 인터 마이애미를 일곱 경기만에 전승으로 창단 이래 최초 우승으로 이끌었습니다.
그는 몇 번의 은퇴를 번복하며 자신을 끝까지 믿어주고 축구의 길로 들어서게 한 할머니께, 그리고 성호경을 그으며 하느님께 쉬지 않고 가고 있습니다.
그가 돈을 목적으로 하지 않고 끊임없이 나아가고 있는 것이 행복할까요, 아니면 돈을 바라고 안주하는 삶이 행복할까요?
만약 어떤 아이가 ‘나는 이미 자녀인데 뭐!’라며 더 좋은 자녀가 되기를 노력하지 않는다면 그 아이는 이제 집에서 하게 되는 것이 무엇일까요? ‘불평’입니다.
자녀인데 왜 부모로서 의무를 다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이 그렇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자녀가 되어가는 과정에 있습니다.
예수님도 아버지의 마음에 드시기 위해 영원으로부터 노력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물며 우리가 정진을 멈추어야 하겠습니까?
제가 신학교 때 들은 말 중에 “사제가 되려고 하지 마라!”였습니다.
사제가 되고 나면 더는 할 게 없어서 이제 누리려고만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술이나, 여자, 돈이나 비싼 차, 돈 많이 드는 운동이나 여행 등에 빠진다는 것입니다.
내심 ‘내가 사제인데 이 정도는 해야 하지 않나?’라는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목표를 달성했는데 생각보다 보상이 적다고 생각하여 스스로 그 보상을 채우려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수 신부님은 사제가 되려고 하지 말고
‘성인 사제가 돼라!’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부부도 마찬가지입니다.
결혼이 목적이라면 결혼하기까지 고생한 것을 누리려고만 합니다.
하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즐겁지 않습니다.
그러니 불만이 생기고 그 탓을 상대에게 하거나
아니면 밖에서 그 보상을 찾으려 합니다.
혹은 배우자보다는 자녀에게서 만족을 얻으려 합니다.
그것이 자녀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이용하는 것이 되기도 합니다.
목적이 없는 삶은 편한 것 같지만 여러모로 우리 삶을 피폐하게 합니다.
겉으로 보기는 편해 보여도 사실 더 고통스러운 것이 정진하지 않는 삶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요한은 성자께서 아버지와 함께 계신다거나(“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요한 1,1.2)
아버지와 가까이 계신다고 말할 때(“아버지와 가장 가까우신 외아드님”: 요한 1,18)라고 말할 때
전치사 ‘프로스’(pros)를 쓰거나 ‘에이스’(eis)를 씁니다.
이것은 사실 ‘함께’나 ‘가까이’로 번역하기 어려운 단어들입니다.
이는 움직이는 사물이 어디를 향하고 있음을 말할 때 사용하는 전치사들입니다.
요한은 결코 아드님과 아버지를 이미 고정되어버린 관계로 여기지 않습니다.
계속 움직이는 역동적인 관계로 보는 것입니다. 영원히 멈추지 않고 서로를 향하는 분으로 그리스도를 표현합니다.
하물며 우리가 마치 당연히 구원된 사람들처럼 이제 누리려고만 해서는 되겠습니까? 이 지상의 삶에서, 그리고 영원한 삶에서 우리는 하느님을 더 사랑하는 방향으로 영원히 노력해야 합니다.
이것이 뒤처지지 않는 방법입니다.
목표를 이룬 이들이 하게 되는 것들은 불만과 죄뿐입니다.
그러니 하느님께 나아가는 데 멈추지 않는 목표를 세웁시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8월23일 [연중 제20주간 수요일]
마태20,1-16
주님의 셈법과 우리의 셈법은 철저하게 다릅니다!
포도밭 일꾼’ 비유에 대한 교부들의 해석이 참으로 은혜롭습니다.
“이른 아침에 불린 일꾼들은 아담과 에녹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아홉 시에 불린 일꾼들은 노아와 셈의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열두 시에 불려간 일꾼들은 할례의 법이 세워진 아브라함의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오후 세 시에 불려간 사람들은 모세와 다윗의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오후 다섯 시에 불려간 사람들은 이민족 사람들이었습니다.
저같이 게으름뱅이며 늑장부리기의 대가에게는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주님께서는 이스라엘 사람이든 이방인이든, 빨리 온 사람이든 늦게 온 사람이든 상관하지 않으시고,
우리 모두에게 공평하게 한 데나리온, 곧 성령의 은총을 선물하심으로써, 우리 모두가 하느님과
온전히 일치되게 하십니다.
우리 각자의 영혼에 하느님의 인장을 찍으시며 불멸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맨 먼저 포도밭에 와서 하루 온 종일 일한 사람들의 불평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 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마태오 복음 20장 12절)
이 사람들의 투덜거림에서 또 다른 한 얼굴이 떠오릅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 등장하는 첫째 아들의 얼굴이지요.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군요.”(루카 복음 15장 29~30절)
이 대목에서 우리는 주님의 생각과 인간의 생각이 철저하게 다르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해볼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선인에게나 악인에게나 똑같이 은총의 햇빛과 단비를 선물로 주시는 크신 하느님이십니다.
아무리 죽을죄를 저지른 사람이라 할지라도 끝끝내 회개하기를 인내롭게 기다리십니다.
주님께서 내게 베푸신 크신 은총과 축복에 깊이 감사하고 찬미 드리면 그만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받은 더 큰 은총과 축복을 보고 시기질투 하거나 배 아파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누군가가 주님으로부터 관대한 사랑을 받았다면 함께 기뻐해 주고 축하해주어야 할 것입니다.
자칫 잘못하면 우리 역시 맨 먼저 포도밭에 온 사람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큽니다.
맨 먼저 온 사람들은 어쩌면, 하느님으로부터 가장 먼저 선택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그저 감지덕지하면서 겸손하게 살았어야 했는데, 먼저 불림 받았다는 것에 대한 우월감, 자만심으로 가득했고, 그 결과 주님으로부터 큰 질타를 받은 것입니다.
“당신 품삯이나 받아서 돌아가시오.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아니면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마태 20, 14-15)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08.23.수.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마태 20, 15)
감사를 잊어버린
우리들 삶입니다.
새날이
밝았습니다.
주님께서 주신
새날입니다.
자기만의
역사를 통해
주님을
만날 것입니다.
저마다의
여정안에서
주님을 만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렇듯 만남을
가능케 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삶의 목적은
주님의 자비를
깨닫고 감사하는
삶의 진실입니다.
우리가 왜
여기에 있는지를
알게됩니다.
모든 여정의
기준점이 되시는
사랑의 주님이
계십니다.
한쪽 끝에도
반대쪽에도
그 가운데도
여정을 사랑하시는
주님이 함께 하십니다.
우리모두를
똑같이
사랑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우리를
살게하시고
움직이게 하시는
주님을 믿고
주님의 새날에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만들어낸
삶의 공식이 아닌
주님께서 주시는
성숙의 시간입니다.
이 모든 시간이
분명 은총이
되게하시는
주님께서
우리의 여정을
끌어안으십니다.
이 모든 것이
은총이 되기 위해
주님께서는
저마다 오늘도
가장 알맞은 때를
위해 기다려주십니다.
은총과 기다림에
무관한 삶은
없습니다.
사람에 머무는
여정이 아니라
주님의 초대에
감사하는
여정입니다.
주님께서
지니신 은총의
그 힘을 믿습니다.
한 데나리온의
은총을 가지고
믿음의 길을
충실히
걸어갈 것입니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