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4일 월요일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마르코 4,35-41
복음
<그의 이름은 요한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57-66.80
57 엘리사벳은 해산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다.
58 이웃과 친척들은 주님께서 엘리사벳에게 큰 자비를 베푸셨다는 것을 듣고,
그와 함께 기뻐하였다.
59 여드레째 되는 날, 그들은 아기의 할례식에 갔다가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아기를 즈카르야라고 부르려 하였다.
60 그러나 아기 어머니는
“안 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61 그들은 “당신의 친척 가운데에는 그런 이름을 가진 이가 없습니다.” 하며,
62 그 아버지에게 아기의 이름을 무엇이라 하겠느냐고 손짓으로 물었다.
63 즈카르야는 글 쓰는 판을 달라고 하여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썼다.
그러자 모두 놀라워하였다.
64 그때에 즈카르야는 즉시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65 그리하여 이웃이 모두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유다의 온 산악 지방에서 화제가 되었다.
66 소문을 들은 이들은 모두 그것을 마음에 새기며,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하고 말하였다.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
80 아기는 자라면서 정신도 굳세어졌다.
그리고 그는 이스라엘 백성 앞에 나타날 때까지 광야에서 살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비혼주의: 행복할까?
오늘은 세례자 요한 탄생 대축일입니다. 세례자 요한 탄생의 특이한 점은 세례자 요한이 태어나기 전부터 하느님 뜻에 봉헌된 나지르인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오늘은 그의 이름을 천사가 일러준 대로 요한이라고 지으며 처음에 의심했던 즈카르야까지도 아들의 사명의 협조자가 됩니다.
그러자 그동안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였다가 입이 풀려 주님을 찬미하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주님 뜻을 따르는 이를 긍정하고 도와주기만 해도 그 사람의 수준이 하느님과 친밀한 대화를 할 수 있는 존재가 된다는 것을 일깨워줍니다.
즈카르야가 귀와 입이 풀렸다는 말은 하느님을 찬미할 수 있는 수준이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그전에는 아무리 외쳐도 하느님께 목소리가 닿지 않는 존재였습니다.
하느님과 만날 수 있는 자격을 ‘의로움’이라고 합니다. 이 의로움은 양심의 자유에서 나옵니다. 아담과 하와는 자기 스스로 의로워지려고 나뭇잎으로 몸을 가렸으나 주님 앞에 나설 수 없었습니다. 의로움은 오로지 하느님 자비에서 옵니다. 그리스도를 입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입고 의로워진 이는 그 받은 것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느낍니다. 그래서 자신도 자녀를 그렇게 하느님 자녀로 만들지 않으면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양심은 ‘정의’ 시스템이기 때문입니다.
유튜브 ‘오리를 엄마로 착각한 길잃은 강아지’는 이를 잘 보여줍니다. 어미를 잃은 강아지는 착해 보이는 오리에게 다가갑니다. 오리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다가 강아지를 태우고 돌아다닙니다. 강아지가 안정됩니다. 강아지는 오리를 어미처럼 따릅니다. 시간이 흘러 강아지는 꽤 자랐습니다. 오리는 새끼를 낳았습니다. 그러나 나이가 많은 오리는 새끼들을 잘 돌보지 못합니다. 그러자 개가 대신 새끼들을 돌봐줍니다. 받은 게 있으니 주는 것입니다.
모기들은 알을 낳아주는 데까지만 받았습니다. 그래서 알을 낳고 그만입니다. 개는 두 달 이상 어미가 돌봐줍니다. 그렇게 받은 만큼만 해 줍니다. 인간은 20년 동안 그렇게 합니다. 그래야 양심의 자유를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하느님의 은총으로 하느님 자녀가 되었다면 언제 양심의 자유를 누릴까요? 나의 자녀도 하느님 자녀로 만들 때입니다. 나의 자녀가 신앙이 없고 하느님 뜻에 자기를 봉헌하지 않았음에도 마음이 평화롭다면 나 자신이 하느님 자녀로 새로 태어나는 고마움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마카베오 하권 7장에는 일곱 아들을 낳은 어머니가 나옵니다. 이 용감한 어머니는 셀레우코스 왕 안티오코스 4세가 자신의 일곱 아들을 고문하고 처형하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그녀는 아들들에게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믿음을 굳게 지키라고 말하면서 하느님의 율법에 충실할 것을 격려했습니다.
그녀는 그들에게 영원한 보상과 부활의 희망을 상기시켰습니다. 만약 자녀에게 생명을 구하라고 했다면 어머니는 하느님 앞에 나아갈 때 “나는 너를 하느님 자녀로 낳았는데, 너는 네 자녀까지도 하느님 자녀로 만들지 못했느냐?”라고 혼이 날 것입니다.
우리나라 미혼 남녀 15%는 자신은 비혼주의라고 하고 51.7%는 비혼을 생각 중이라고 하며 결혼을 꼭 하겠다는 청년들은 33.3%였습니다. 부모가 나를 키워주었는데도 나는 자녀를 안 키우겠다고 한다면 이제 부모와의 소통이 단절됩니다. 그 자격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느님 자녀를 탄생시키지 못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양심이 가만 놔두지 않습니다. 비싼 핸드백을 들고 맛있는 음식을 찍어 인스타에 올려도 마음은 공허하고 점점 불안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양심의 원리입니다.
오늘 엘리사벳과 즈카르야가 자기 아들을 ‘요한’이라고 짓는 동시에 그들은 아들을 주님 뜻에 바친 것입니다. 주님 뜻에 바친다는 말은 순교자로 만든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부모들이 하느님 앞에 의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의로운 사람이 양심의 평화를 얻습니다.
이스라엘은 왜 자녀 출산율이 1위일까요? 구약시대부터 하느님께 자녀를 봉헌하는 것을 내 행복을 위해서도 가장 중요한 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사무엘을 주님께 바치기 위해 아들을 청한 한나를 생각해봅시다. 그녀는 처음부터 하느님께 바치겠다는 서원을 하고 아들을 주님께 청했습니다. 아들을 하느님께 바쳐야 하느님 자녀로서의 자신의 마음에 평화를 얻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자녀를 낳음이 없이는 하느님 자녀로 태어난 자가 하느님 앞에서 의로워질 수 없음을 명심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