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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왕국, 덕유산 – 동엽령,백암봉,중봉,향적봉
1. 백암봉 가는 길의 눈꽃
언 바람 우는 빈 가지에
순백의 알몸 던져 피워 올리는
상처 난 것들의 눈물꽃
뜨거운 새싹의 흰 눈꽃
―― 박노해, 「눈꽃」에서
▶ 산행일시 : 2023년 12월 31일(일) 산에는 진눈깨비 내리다 싸락눈 내리고 흐림
▶ 산행코스 : 안성탐방지원센터,동엽령,백암봉,중봉,향적봉,백련사,구천동
▶ 산행거리 : 도상 16.8km
▶ 산행시간 : 6시간 30분(09 : 52 ~ 16 : 22)
▶ 교 통 편 : 다음매일산악회(20명) 우등버스로 가고 옴
▶ 구간별 시간
07 : 00 – 양재역
08 : 15 – 옥산휴게소( ~ 08 : 35)
09 : 52 – 안성탐방지원센터, 산행시작
10 : 07 – 문덕소(問德沼)
10 : 13 - ┣자 칠연폭포(0.3km) 갈림길
11 : 32 – 동엽령(冬葉嶺), 휴식( ~ 11 : 40), 백암봉 2.2km
12 : 33 – 백암봉(白岩峰, 1,503m), 향적봉 2.1km
12 : 58 – 중봉(1,594m)
13 : 15 – 향적봉대피소, 점심( ~ 13 : 42)
13 : 48 – 향적봉(香積峰, 1,614m)
14 : 38 – 백련사 계단(戒壇)
14 : 47 – 백련사(白蓮寺)
15 : 42 – 비파담(琵琶潭)
16 : 00 – 덕유산국립공원 탐방안내소
16 : 04 – 월하탄(月下灘)
16 : 20 – 삼공리 주차장, 산행종료, 저녁( ~ 17 : 00)
18 : 05 – 신탄진휴게소( ~ 18 : 15)
19 : 45 – 양재역
2. 산행지도
3. 산행 그래프
어제는 겨울답게 눈이 펄펄 내리더니 오늘은 겨울답지 않게 비가 주룩주룩 내린다. 어제 뿌린 눈을 오늘 비로 모조
리 거두어간다. 생뚱맞게(?) 리 톰슨 감독의 미국 영화 ‘대장 부리바(Taras Bulba, 1962)’가 생각난다. 기마족 코사
크의 대장 부리바(율 부린너)가 그들의 땅인 대초원을 찾고자 폴란드와 전쟁을 하게 되고, 대장 부리바의 아들 안드
레이(토니 커티스)는 사랑하는 폴란드 귀족인 나탈리아(크리스틴 카우프만)를 구하려고 몰래 성안으로 소떼를 몰고
가려다 아버지에게 들키고 만다. 그런 아들을 아버지가 직접 총살한다.
“내가 너에게 생명을 주었으니, 그 생명을 거두는 것도 내가 하겠다.”라고 하며.
이 영화의 원제는 ‘타라스 불바(Taras Bulba)’이나 일본어 번역인 ‘隊長ブーリバ’를 우리말로 옮겼다.
오늘 새벽부터 덕유산 산행 들머리인 안성탐방지원센터로 가는 내내 비가 내린다. 안개가 자욱하여 차창 밖의 산은
보이지 않지만 들녘과 도로에 쌓였던 눈은 다 녹았다. 이 덕분에 버스는 쾌속으로 달려 예상보다 이르게 안성탐방지
원센터에 왔다. 여느 때는 안성탐방지원센터 주차장이 비좁아 마을 동구에 버스를 세우지만 오늘은 한산하여 고맙
게도 안성탐방지원센터까지 왔다. 금년 1월에 덕유산 산행 때 이곳을 왔었는데, 오늘이 그때와 똑같이 궂은 날씨다.
화장실 처마 아래에서 배낭 커버 씌우고 스패츠 차는 등 산행채비를 마친다.
이 화장실은 안 좋은 추억이 있다. 언젠가 오지산행이 이쪽으로 하산할 때 하늘재 님이 이 화장실 문 앞에다 스틱을
두고 갔다. 한참 뒤에 버스 안에서 그 생각이 났다. 화장실 바로 옆에 있는 국공사무실에 전화를 걸었다. 수고스럽지
만 혹시 화장실 문 앞에 주인 잃은 스틱이 있는지 보아주시라고. 잠시 후 국공의 대답은 “없습니다”였다. 그러자
동행했던 숙이 님 말씀이 여러 사람을 웃게 했다. “조금 낫네. 나 혼자만 거기에다 스틱을 두고 온 줄 알았는데.”
비가 내리는 모양이 눈에 보이는가 했더니 진눈깨비로 변했다. 임도이자 등로 왼쪽 옆의 통안천에 큰물이 흐른다.
이 한겨울에 눈 구경이 아닌 물 구경을 한다. 여러 폭포 중 문덕소 폭포가 대폭이다. 임도 비킨 관폭대에 다가가 바
라본다. ‘문덕소’라는 이름은 이곳 물웅덩이에서 도를 닦고 있는 도인에게 옥황상제가 나타나서 살면서 덕을 얼마나
쌓았는지 물어보았다는 전설이 전해서 문덕소라는 이름으로 불린다고 한다. 그렇다면 ‘問德沼’이다.
임도인 등로는 칠연폭포 갈림길에서 끝난다. 이 갈림길에서 칠연폭포까지는 이정표에 0.3km이다. 거기에 갔다 오
려고 하는 사람이 없다. 아무리 물 구경이라 해도 진눈깨비 내리고 안개 자욱하여 어둑한 이 날씨에는 당연한 일이
다. 나도 미련 없이 지나친다. 등로는 소로의 계곡 길로 이어진다. 진눈깨비는 싸락눈으로 변한다. 등로 곳곳이 얼었
다. 이제는 발밑에 느끼는 미끌미끌한 스릴을 오히려 경계한다. 몇 번이나 엎어질 뻔하다 그예 아이젠을 꺼내어 맨
다. 발걸음이 한결 가볍다.
카메라 들면 모든 것이 사진 찍을 거리로 보인다. 전후좌우 안개 속 수림의 풍경이 대폭 수묵화다. 고도를 점차 높일
수록 풍경은 달라진다. 점입가경이다. 상고대 눈꽃이 움트기 시작한다. 동엽령 0.7km 전부터 데크계단 오르막이다.
그 끝을 올려다보면 데크계단은 하늘로 가는 길 같다. 바람이 일기 시작한다. 나뭇가지 끝을 훑는 그 요란한 소리에
지레 움츠러든다. 나무마다 눈꽃은 경염하듯 점점 화려해진다. 눈부신 싸리나무 숲 지나 동엽령이다.
4. 문덕소
5. 통안천 주변은 안개가 지욱하다
6. 상고대 눈꽃이 움튼다
8. 동엽령 주변
9. 동엽령에서 백암봉 가는 길
12. 백암봉 가는 길의 1,378m봉
13. 백암봉 가는 길
덕유주릉의 야트막한 안부인 동엽령은 겨울왕국의 관문이다. 사방 안개가 짙어 어스름하다. 고갯마루 데크 쉼터에
는 일단의 등산객들이 설한풍에 맞서 비닐쉘터를 쳤다. 그 안에서 들리는 도란도란한 말소리와 가가대소가 나도 즐
겁다. 간이대피소에는 나까지 5명이 들어갈 수 있다. 장의자에 밀착하여 배낭 안고 앉아 탁주 꺼내 목 축인다. 대피
소 밖은 여러 등산객들이 대기하고 있어 얼른 자리 빼준다.
오늘 아침에 안성탐방지원센터로 오는 버스 안에서 이장 산행진행대장님은 안내방송에 덕유산에는 비가 아닌 눈이
내린다고 하며, 우리보다 더 일찍 산행한 등산객들이 있어 그들이 제발 러셀을 해놓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나로서는
약간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러셀 또한 겨울산행의 빼놓을 수 없는 묘미가 아닌가. 그 묘미를 남에게 앗기려고 하다
니. 덕유주릉은 우리에 앞서서 오간 사람들이 많았다. 눈길이 잘 다져져 스패츠는 소용없고 아이젠이 잰걸음 발동한다.
능선은 바람이 거세게 부는데 등로는 그 좌우의 숲속 사면이라 마음껏 눈꽃 구경한다. 눈꽃 터널의 연속이다.
이재무 시인의 「산속의 눈꽃」이다.
다 늙은 山의 살갗에 달려들어
눈꽃은 더욱 입술을 꼭꼭 문질러대고 있었다
山은 끙, 하고 돌아누웠다
그때마다 자지러지게 가지가
몸을 흔들어 소복이 쌓인 소녀들의 웃음
깔깔깔 날려대었다 그렇게
하루 한나절 천상의 소녀들의 한바탕
소란하게 소풍 마치고 가면
山의 살결은 나이도 잊은 채
떡고물처럼 찰지고 부드러워지는 거였다
우리의, 흥분한 땀방울이 두꺼운 살을
벗어나 소용돌이치며 급하게 빠져나갔다
등로 벗어나면 눈이 깊다. 무릎까지 빠진다. 맞은편에서 오는 등산객에게 먼저 지나가시라 길을 양보할 때는 그 깊
은 눈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눈이 울퉁불퉁한 돌길을 매끈하게 포장한 터라 내닫기 아주 좋다. 1,378m봉
을 대깍 넘어 스르르 내린다. 사방 조망이 트일 능선에 올라도 무중이다. 백암봉. 칼바람이 분다. 커다란 등산안내도
가 바람막이다. ┣자 갈림길 오른쪽으로 백두대간 못봉(지봉) 가는 눈길이 조용하다.
백암봉을 약간 내렸다가 한 차례 느긋이 오른 1,483m봉을 넘으면 광활한 설원이 펼쳐진다. 덕유평전이다. 칼바람을
온몸에 고스란히 맞는다. 싸락눈에 얼굴이 따갑다. 데크계단 오르막이 가파르고 길다. 가다 말고 바위를 바람벽 삼
아 휴식하며 요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허리 잔뜩 구부리고 바람 속을 돌파한다. 오수자굴 갈림길에서 잠시 가쁜 숨
돌리고 마저 오른다. 중봉. 데크전망대에 서서 둘러보지만 만천만지한 안개뿐이다. 무중이 심해이기도 하다. 주변의
진달래는 탐스런 산호초로 변했다.
중봉을 벗어나면 바람이 시들하다. 그래서인지 눈꽃은 여태와는 다르게 볼품이 없다. 그래도 무주리조트에서 곤도
라 타고 향적봉을 오른 사람들은 대단한 설경인지 등로 막고 사진 찍기에 바쁘다. 나는 곧장 향적봉을 오르지 않고
대피소에서 점심을 먹으며 시간을 벌 요량이다. 그러면 혹시 조망이 트이게 될지 모르므로. 대피소 안은 만원이라
야외 탁자에 자리 잡는다. 야외 탁자에도 많은 등산객들이 몰렸다. 내가 잡은 자리가 천하명당이다.
15. 백암봉 가는 길
22. 백암봉
24. 중봉 가는 길
4명의 등산객들과 합석했는데 그들은 덕유산을 소풍 온 것 같다. 스티로폼 박스에 참치회와 갓김치를 가져왔고, 잘
익은 매실주를 대병에 담아왔다. 나더러 함께 먹자고 강권한다. 불감청고소원이다. 사양도 지나치면 비례(非禮)인
법. 참치 너 본 지 오래다 하고 덤빈다. 나이 연만한 국공은 탁자를 돌며 제발 술 좀 마시지 말라고 타이르기 목이 쉴
지경이다. 어느 탁자 치고 술병 없는 데가 없다. 하도 단속하니 술을 보온병이나 코펠 등의 용기에 몰래 부어놓고
마신다.
모처럼 미주가효에 불콰하여 향적봉을 오른다. 향적봉 정상은 인증사진 찍으려는 사람들이 길게 줄섰다. 조망은 트
일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고, 사람이나 구경한다. 어디로 내릴까? 조망이 트일 기미가 보인다면 중봉으로 뒤돌아가
오수자굴을 경유하여 백련사로 내리겠는데 그럴 가망이 없다. 설천봉에서 칠봉을 넘어가는 코스도 마찬가지다. 그
냥 백련사로 직하하기로 한다. 백련사 가는 길이 엄청 가파른 내리막이다. 뚝뚝 떨어진다. 설사면보다 목계단을 내
리기가 더 고약하다. 목계단에는 눈이 똥똥하게 쌓였다.
눈꽃은 백련사 내림 길이 덕유주릉보다 훨씬 못하다. 별다른 볼 것이 없으니 그저 쭉쭉 내린다. 가파른 내리막은
백련사 계단(戒檀)에서 잠깐 멈칫하고서 한 차례 더 내리쏟으면 백련사다. 절집을 둘러본다. 대웅전의 단아한 현판
이 덕유산의 위엄에 썩 어울린다. 조선 최고 명필인 한석봉의 글씨다.
한편 문곡대사(文谷大師)가 만년에 이곳 백련사에 머물며 여러 불경을 사방에서 오는 자들을 가르쳐 주었다고 하는
데, 번암 채제공(樊巖 蔡濟恭 1720~1799)이 「문곡대사 비명(文谷大師碑銘)」에서 보인 생각은 유불(儒佛)을 초월한
지식인의 올곧은 자세라 할만하다.
吾是吾儒 나는 유학자인데
佛何足媚 불가에 어찌 아첨하랴마는
銘以示後 명문을 후세에 보여 줌은
唯是一言契意 한 마디 말에 뜻이 맞아서라네
한 마디 말은 문곡대사가 “입으로 하는 공부는 수고롭고 마음으로 하는 공부는 고양된다(口學勞心學高).”라는 말이
라고 한다.
백련사에서 구천동주차장까지 6.4km다. 더구나 포장한 임도다. 물론 구천동계곡 건너로 구천동 어사길이 소로로
나 있지만 지루하고 따분하기는 별반 다를 게 없다. 구천동 33경을 각각 설명하는 안내판과 실경을 대조하며 간다.
구천동 33경 중 제1경은 무엇일까? 나제통문이다. 제33경은? 향적봉이다. 연화폭포, 백련담, 구천폭포, 안심대,
호탄암, 비파담, 인월담, 청류암, 월하탄. 다가가 들여다본다. 그중 월하탄이 구천동천의 하이라이트이다.
먹자동네에 들어선다. 불야성이다. 손님들이 북적이는 음식점을 찾는다. 해물파전과 탁주 1병을 주문한다. 혼술한
다. 오징어가 비싸고 쪽파도 엄청 비싸다고 하는데 해물파전이 푸짐하다. 절반 밖에 먹지 못하겠다. 탁주도 다 마시
지 못했다. 싸달라고 하여 배낭에 넣는다. 오늘 산행시간은 7시간으로 마감시간은 17시다. 일행 전원이 이 시간에
맞췄다. 서울 가는 길. 설핏 졸음에 덕유주릉의 그 화려하던 눈꽃이 어른거린다.
26. 중봉
27. 향적봉 가는 길
28. 향적봉, 인증사진을 찍기 위해 줄섰다.
30. 백련사 가는 길
32. 백련사 대웅전 현판, 한석봉의 글씨다
33. 비파담
34. 인월담
35. 월하탄, 구천동천의 하이라이트이다
첫댓글 한 때 최애의 산행코스였었죠. 봄 여름 겨울마다. 가을엔 다른 곳에 유혹되어 못간 곳. 신년산행에서 동행친구가 심장마비로 향적봉에서 하늘나라로 간 어느 해부터 왠지 발길이 머뭇거리는 곳이 되었네요. 겨울이면 더욱 생각나는 곳. 덕유능선이 그립네요.
그런 가슴 아픈 추억이 있군요.
신년산행이셨으니 그때도 눈꽃은 화려했겠지요.
덕유산은 언제가도 볼거리가 풍성하더군요.^^
멋지고, 황홀한 송년 산행이었네요..하얀 눈 꽃구경 잘했습니다...올 한해도 건강하시고, 산행은 느긋하게 하십시요^^
조망이 트였다면 금상첨화였을 덕유산이었습니다.
하루종일 먹먹한 하늘이었습니다.
새해에는 메대장님도 더욱 왕성한 산행을 이어가시기를 바랍니다.^^
겨울 덕유산은 언제봐도 멋집니다.
언젠가 오지산행에서 덕유산 갔을 때, 70도짜리 고량주를 나눠 먹었던 기억이 나네요.
목구멍부터 타들어가는 ㅎㅎㅎ
눈구경 실컷 잘 했습니다.
감사합니다.
Those were the days 입니다.ㅋㅋ
역시 덕유 설경입니다. 한번 가봐야겠어요...
궂은 날에도 저러하니 날이 맑으면 더욱 좋겠지요.^^
대피소에서 라면 끓여 묵을라 카는데...가능할지???
버너불 피워 드시는 건 대피소 안은 물론 대피소 밖 야외탁자에도 가능합니다.
야외탁자마다 라면 끓여 먹느라 야단입니다.
라면 뿐만아니라 삼겹살을 구워먹어도 괜찮습니다.
다만 라벨 붙은 막걸리 등 술은 몰래 드시는 게 예의입니다. ^^
@악수 ㅋ 캄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