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南山의 마음 가는대로] 인사동 화랑에서 마주친 그 사람
시우(時雨) 김영재- 사진작가전을 보고
블루(그림자)Ⅰ, 2023, 75×100. 숟가락을 소품으로 한 인간군상 시리즈. 지구촌에서 한데 어우러져 공생공존하는 인간들의 모습들을 설치미술로 조형화하고 이를 사진 작품으로 만들었다. /김영재
# 그는 시골에서 농고 졸업 후 무작정 상경했다. 때는 1960년대 우리나라가 아주 어려운 시절이었다.
을지로에 정착해 드럼을 배웠다. 그러나 입에 풀칠하기가 어려웠다. 입대해서 군악대로 차출돼 월남(베트남)에 파병됐다.
제대 후 살기 위해 의정부 조그만 자동차 부품회사에 취직해서 월급쟁이로 살았다. 설왕설래 끝에 결국 작은 회사를 차렸다.
생활 가구나 인테리어 소품들을 만드는 회사였다. 타고난 성실성과 손재주로 제품들을 세련되게 만들며 고객을 늘려나가기 시작했다.
회심의 승부처는 국제화. 이태리 최고의 현관문・방문 손잡이 제조 회사를 알게 돼 수년간 ‘삼고초려’ 끝에 수입권을 따낸 후 돈방석에 앉았다.
사업이 안정궤도에 접어든 후 그는 핏속에 흐르는 예술가적 끼를 주체하지 못해 틈만 나면 방랑하며 사진을 찍었다. 그것이 그에겐 삶의 희열이자 휴식처이자 자기 확인 과정이었다.
그는 사업가에서 예술가로 거듭났다.
“예술은 나의 삶의 쉼표이자 나를 직시해볼 수 있는 거울이다.”
한 달에 한 번씩 만나는 문화예술 모임에 속했지만 내밀하게 만나는 사이가 아니었던 그를 술자리에서 만나 이런 저런 삶의 이력을 들으면서 ‘이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심리학자 매슬로우가 주장하는 ‘인간 욕구 5단계설’중 최종단계인 ‘자기실현(self-actualization)'의 길로 가는 모습이었다.
# 마침 그의 사진개인전이 열린다기에 전시장을 찾았다.
서울 종로구 인사동 인사1010 갤러리. ‘2024년 개인전 시우(時雨) 김영재- 길 끝에’.
나는 미술 평론을 할 만한 사람이 아니다. 그러나 작품을 둘러보니 직관적으로 좋았다.
스타일도, 의미도 들어왔다. 크게 어렵지 않았다.
그의 작품은 사진과 설치미술 두 가지가 혼합된 것이었다. 작품 주제 역시 바다와 인간군상 시리즈 두가지였다.
바다를 주제로 한 사진들은 한 폭의 동양화 같았다. 해무 낀 풍경이 마치 운무(雲霧) 산수화같았다. 흑백사진에서 수묵의 맛을, 컬러사진에서 수묵 담채화의 맛이 느껴졌다.
제주 해안의 주상절리(柱狀節理)는 화산폭발이 만들어 놓은 절경이다. 철원 한탄강 주상절리와 비슷한 풍경이다.
작가는 제주해안의 주상절리에 꽂혀 여러 작품을 선보였다. 바다라는 수평과 주상절리라는 수직을 절묘하게 포착한 작품들은 마음을 평온하면서도 역동적으로 만들어준다. 수평수직 구조는 단순, 심미, 절제를 응축해준다.
대포주름치마, 2024, 750×1000. 제주도 주상절리 절벽에 파도치는 모습을 담았다. /김영재
숟가락을 소품으로 한 인간군상 시리즈에는 재미있는 탄생 배경이 있다. 서울 중구 황학동 주방용품 중고시장에서 의자 아래 수북이 쌓여있는 숟가락을 보면서 서로 의자에 먼저 기어올라 차지하려는 인간군상들이 오버랩됐다고 한다.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자리(권력), 돈, 명예, 지위를 차지하려고 싸우는 우리 정치권 군상과 우리들의 모습을 떠올렸다고 한다.
내게는 구부러진 숟가락들이 난자를 향해 돌진하는 정자들의 용감무쌍한 모습으로도 연상됐다.
당초 생존경쟁의 부정적 의미가 강했던 ‘숟가락’ 조형물들은 진화돼 어느 때부턴가 지구촌에서 한데 어우러져 공생공존하는 긍정적 인간들의 모습들로 바뀌어졌다. ‘숟가락 지구’ 조형물은 그렇게 탄생했다고 한다.
# 전시회 공식 파티가 조촐하게 열렸다.
첼리스트 오주은이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 1번 프렐류드’, 엘가의 ‘사랑의 인사’, 동요 ‘섬집 아기’를 연주했다. 톤이 매우 힘이 있고 터치가 굵직하게 느껴졌다. 마음은 평화로워졌다.
이어서 소프라노 박성희가 등장해 ‘그리운 금강산’, ‘오 솔레미오’를 불렀다. 분위기가 업 되며 마음에서 기쁨이 솟아올랐다.
주인공인 김영재 작가는 간단하게 고맙다고 인사하고 내려왔다. 작품처럼 절제미가 있었다.
이어서 와인파티, 그리고 우리 몇 사람은 뒤풀이로 인사동 뒷골목에 가서 한잔 더했다.
5월 어느 좋은 날, 미술과 음악, 삶과 철학, 술과 대화가 어우러진 친교의 시간이었다.
출처 : 마음건강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