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60405. 묵상글 ( 주님 부활 대축일. - 부활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아직/ 06:33 추가.
@ 맨 아래 “십자가의 길”에 대한 작은형제회 수사님의 자료를 드립니다.
https://cafe.daum.net/ThomasMoreSeoul/Ut47/124
----------------------------------------------------
260405. 주님 부활 대축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04.05 06:30
- 내 안에서 빛이 부활하는
갈수록 관상의 중요함을 많이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번 부활 대축일을 맞아서도 부활 관상과 함께 빛 관상을 하게 되는데
그토록 우리에게 어둠과 혼란을 주는 트럼프와 네타냐후 같은 인간을 생각하며
더더욱 빛 관상을 이 부활 대축일에 하게 됩니다.
물론 트럼프와 네타냐후뿐이 아닙니다.
힘을 지닌 자들은 거의 대부분 힘을 자기를 위해 쓰기에 세상을 어둡게 합니다.
그런데 이들이 우리와 세상을 어둡게 하는 방법은 이렇습니다.
어둠이 빛보다 더 힘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여 우리 마음을 우울하게 하면서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는 믿음을 흔들며 우리 믿음의 눈을 어둡게 합니다.
이렇게 믿음이 흔들리며 우리 믿음의 눈이 어두워지면 희망의 눈도 어두워집니다.
이 어둠이 나아지지 않고 계속될 것이라고 절망하게 되고
그래서 빛으로의 희망을 전혀 보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때부터는 시선이 어둠에 사로잡히고 다른 데 눈을 돌리지 못하게 됩니다.
실로 우리는 매일 중동이 어떻게 되나 거기에 시선이 온통 가 있고 신경을 씁니다.
이런 생각을 이어가다 보니 화가 났습니다.
이렇게 만드는 그들에게 화가 났고,
이들에게 이렇게 당하는 내게 화가 났습니다.
이 자들이 온 세상을 이렇게 어둡게 해도 되나? 화가 난 것이고,
이들에 의해 내가 이렇게 어둡게 된 것 때문에 내게 화가 난 것인데,
이들이 노리는 것이 바로 이것이 아니겠나? 하는 반성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지지 않으려면 그럴수록 빛의 관상을 하고,
더 나아가 빛을 발산해야겠다는 빛의 오기가 있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어제는 빛의 예식을 할 때 하느님께서 전례의 은혜를 제게 베풀어주셨습니다.
화로의 불에서 불을 따 부활초에 붙일 때 이런 생각이 제 안에서 올라왔습니다.
나는 어둠 가운데서 최초를 불을 붙이는 사람이다.
그러니 더 이상 어둠과 어둡게 하는 사람을 탓하지 말고,
하느님 불로부터 불을 받아 빛과 열을 주는 사람이 되어야겠다!
그렇게 빛의 오기를 부렸더니 한동안 제 안에 있던 어둠이 사라지고
빛이 부활이 제 안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그리스도 우리의 빛!’ 다음에 부활초에서 빛을 받아 참석자에게
빛을 나눌 때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모두 세상에 불을 붙이는 사람,
세상의 어둠을 밝히는 빛의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우리와 세상의 어둠은 그들의 탓만이 아닙니다.
그들이 그렇게 할 때 우리는 화만 낼 뿐 어쩔 수 없다고 하며
패배주의적으로 어둠에 안주한 측면이 없지 않고 기도도 열심히 하지 않았지요.
기도를 열심히 하지 않았다는 것은 하느님께 눈을 돌리지 않았다는 표시입니다.
우리는 내게든 네게든 인간에게 화를 낼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기도했어야지요.
우리가 하는 것을 보면 같이 기도해야 할 것을 같이 화를 내고 있습니다.
화를 내면 지는 것인데 같이 화를 내면 같이 지는 것에 불과한 것이지요.
여기서 우리의 깊은 성찰이 필요합니다.
나든 너든 인간을 보면 우리에게는 어둠밖에 없고 화낼 것밖에 없습니다.
빛이신 하느님 없이 서로만 보면 어둠밖에 없고 화낼 것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나와 우리 공동체가 어둡다고 생각될 때 얼른 눈을 하느님께 돌려
빛 관상을 의지적으로 해야 하고 화낼 시간에 기도해야겠습니다.
부활 축하 드립니다.
요즘 많이 힘드시더라도
이럴 때일수록 하느님께 더욱 매달리며
어려움을 같이 그리고 하느님 안에서 해결해나가야겠습니다.
---------------------
# 주님 부활 대축일, 그간 신부님 묵상글 들
https://cafe.daum.net/ThomasMoreSeoul/UtFb/1224
----------------------------------------------------
260405. 주님 부활 대축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동이 트기 전의 어두움! - 열세 번째 주간 실천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성 토요일은 우리의 가장 깊은 밤에도 하느님께서 우리를 바라보고 계심을 선포합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예수님과 희생 염소 메커니즘의 종말
동이 트기 전의 어두움
2026년 4월 4일 토요일
성 토요일
저자 스테파니 던컨 스미스(Stephanie Duncan Smith)는 성 토요일 안에서 위로를 발견합니다. 성토요일은 상실과 새 생명 사이의 시간이 거룩하다는 사실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파스카의 이야기는 성금요일의 죽음과 성토요일의 침묵을 품고, 마침내 부활주일의 환희로 터져 나옵니다. 이는 우리가 세례로 참여한 신비의 패턴이며, 전례의 이야기는 이 "혹독한 사이의 날"을 빼놓고는 결코 온전히 전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성토요일을 압니다. 왜냐하면 마음은 깨어 지켜보는 경계의 시간을 알기 때문입니다. 몸이 희망과 두려움 사이에서 선택하지 못할 때, 우리는 그 깨어 있으면서 무엇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지켜 보며 그 안 머물게 됩니다. 우리는 관계가 회복되기를, 중독이 끊어지기를, 몸이 치유되기를, 깨달음이 오기를, 자녀들이 무사히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그 긴장된 시간을 압니다. 우리는 기다림 속에서 갈망하며, 제자들처럼 하느님께서 어디로 가셨는지 묻습니다.
깨어 있음은 다른 두 가지의 극적인 결말―생명과 죽음―을 긴장 속에 붙들고 있으면서, 그 이야기가 어느 쪽으로 기울지에 대해서 우리가 결코 좌우할 수 없음을 아는 것입니다.
아침은 반드시 밝아올 것입니다. "알렐루야"는 다시 우리에게 돌아올 것입니다. 하지만 착오하지는 마십시오: 지금 여기는 부서진 알렐루야의 파편들로 흩어진 지옥 같은 풍경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쩌면 이것이 성토요일의 낯선 선물일지도 모릅니다. 가장 긴 밤은 우리의 산산이 부서진 희망과 "어찌하여"라는 울부짖음, 끝없이 소용돌이치는 두려움이 정직하게 머물 수 있는 자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지극한 깨어 있음과 상처 입은 기다림 속에서도, 하느님께서 그 지옥 같은 풍경 안에 우리와 함께 계심을 마음 깊이 새길 수 있습니다.…
이야기의 순서는 중요합니다. 빛이 터져 나오기 전에, 즉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신다는 불가능한 기쁨이 오기 전에, 성토요일은 우리의 가장 깊은 밤에도 하느님께서 우리를 바라보고 계심을 선포합니다. 그리고 부활은 우리가 그곳에 영원히 머물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증언합니다.
References
Stephanie Duncan Smith, Even After Everything: The Spiritual Practice of Knowing the Risks and Loving Anyway (Convergent Books, 2024), 98, 99–100.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Vaishak Pilai, untitled (detail), 2020, photo, India,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벽에 새겨진 저 거친 십자가는 우리가 희생 염소를 지목하려는 인간적 충동의 표지가 됩니다. 이는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것을 얼마나 쉽게 다른 이에게 떠넘기는지를 드러냅니다.
++++++++++++++++
숨영성 묵상글
"부활 축하합니다!"라는 인사말의 심오한 의미를 살아냅시다!
초대 교회의 강론과 맥을 같이하여,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말했습니다. 막달라의 마리아가 무덤에 다가갈 수 있었던 것은 그에게 더 이상 잃을 것이 없었기 때문이라고요.
사도들은 여전히 자신을 지키거나 무엇인가를 붙들려 했기에 달아났습니다. 마리아는 모든 것을 잃었기에, '무덤마저 잃게 될까 두려워 무덤 곁을 떠날 수 없었다'고 그는 말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막달레나는 무덤마저 잃었습니다. 그곳은 더 이상 무덤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몸은 그곳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바로 이 철저한 결핍의 자리에서 부활이 일어났습니다. 부활은 산꼭대기나 빛나는 구름 위에서가 아니라, 무덤 한가운데, 즉 인간 삶의 가장 깊숙한 곳이자 우리 삶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 곁에 머물렀기에, 그녀는 부활 소식을 전한 첫 증인이 되었고, 첫 주님께서 부활하셨다고 선포하는 첫 번째 설교자가 된것 입니다.
처음에 막달레나는 예수님을 어디에서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왜일까요? 이에 대한 답으로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막달레나는 예수님이 현존하시는 곳보다 더 멀리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말달레는 주님의 죽은 육신이라는 하나의 대상만을 찾기 위해 저 멀리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예수님은 살아 계셔서 자기 곁에 서 계셨던 것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어쩌면 이렇게 거리를 두고 사물을 다루는 지식을 모든 지식의 기준으로 삼습니다. 말하자면 우리는 눈에 보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대상'에 대한 지식을 가장 확실한 것으로 여기며, 그것을 모든 지식의 기준으로 삼으면서 살아가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어떤 사물보다도 우리에게 더 가까이 계십니다. "어찌하여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서 찾느냐?"(루카 24,5) 하고 천사들이 말하지 않습니까?!
오랫동안 그리스도인들은 무덤 입구를 막았던 큰 돌에 대해 깊이 묵상해 왔습니다. 마리아 막달레가 무덤에 갔을 때, 그 돌은 치워져 있었습니다. 믿음을 가로막는 듯한 그 큰 물질적 장애물이 사라졌고, 막달레나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진리의 첫 증인이 되었습니다. 이 땅의 어떤 무덤도 생명의 주님을 가둘 수 없습니다. 아무리 무거운 돌이라도 그분을 가둘 수 없습니다. 그러나 물질적 돌보다 더 무겁고 완고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논리적 사고, 즉 이성적 생각입니다.
겉으로 보기에 생각은 눈에 보이지 않고 손으로 만질 수도 없으니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집니다. 하지만 실제로 살아가다 보면, 우리의 마음속 생각이 때로는 돌덩이보다 더 무겁고 단단하게 우리를 짓누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마음과 정신을 고정관념, 편견, 증오, 두려움이라는 움직이지 않는 돌로 진정한 현실로 들어서는 입구를 봉인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부활을 목격하려면 먼저 우리 마음에서 돌이 굴려져야 한다"라고 5세기의 성 베드로 크리솔로고는 말했습니다.
우리의 논리적 사고는 주님의 부활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우리의 논리적 사고를 내려놓고 당신의 아들 예수님을 죽음으로부터 일으키신 하느님께서 우리 삶의 한가운데로 들어오시도록 우리 마음을 열 수만 있다면 우리는 주님의 부활이 그저 하나의 신화로서가 아니라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현실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부활 대축일이면 우리는 서로에게 "부활 축하합니다!" 하고 인사합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부활하셨다고 하니까 이런 인사를 나누긴 합니다만, 이 인사말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를 깊이 숙고하지 않은 채 이 말을 쓰고 있는지 모릅니다. 사실 주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가지고 서로에게 축하 인사를 전하는 이유는 우리도 주님처럼 부활할 것이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일 겁니다. 그 사실이 단순히 다른 어떤 사람에게서 일어난 일이거나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라면 우리가 서로에게 이런 인사를 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주님의 부활은 사랑이 미움을 이길 수 있고, 빛이 어둠을 몰아낼 수 있다는 확신 가운데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 확신 때문에 예수님은 십자가상의 죽음까지 받아들이신 거고, 바로 이 죽음까지 받아들인 사랑의 힘이 주님을 부활케 한 것입니다. 그 사랑이 바로 하느님이신 거고요!
비록 우리가 나약하기 그지없어서 우리 에고의 생각이라는 완고하고 무거운 돌덩어리에 걸려 계속 넘어지고 또 넘어지더라도 이 확신을 붙들고자 노력하는 한 우리는 끄떡없습니다! 이 확신 자체가 바로 하느님의 영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확신이 우리를 다시 또다시 사랑의 하느님 쪽으로 시선을 두도록 우리를 이끌어 줄 것이고, 마침내는 우리도 죽음을 넘어 부활한 이들의 삶에 합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여기서부터 말입니다....
우리가 이런 희망을 견지하고 살아가는 것이 바로 하느님의 뜻입니다. 비록 우리에게 죄와 어둠으로 기울어지는 경향이 크다 하더라도 우리가 하느님으로부터 사랑받고 있다는 확신과 우리가 결국은 그 하느님 사랑에 의해 죽음을 넘어 영원한 생명으로 건너갈(파스카, 부활)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우리에게 가장 긴급한 일입니다. 여기서부터 우리 삶의 전환(회개)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여기서부터 우리는 사랑을 선택할 힘을 키워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은 토마스 머튼의 묵상 글 하나를 함께 묵상해 보고 싶습니다:
– 도둑 프로메테우스 –
살아계신 하느님께서는 하느님 사랑의 불을 찾는 사람을 죽이기는커녕 사람이 가야 할 운명을 살아갈 수 있게 하기 위해 당신 스스로 죽음을 겪으실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신 후, 그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셔서 성령이라는 불을 우리에게 쏟아 부어주셨는데도 우리는 왜 우리의 생명과 사랑에 대한 희망이 도둑과 같은 희망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어쩌면 우리는 벌을 받게 되어 있다는 어둠에 빠져 살아가고 있는지 모른다.
우리는 왜 그분께서 우리에게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셨는데도 ‘그 희망의 날을 보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이 하느님께서는 원치 않는 어떤 것인 것처럼 행동해야 하는가? 우리가 승리를 바라는 것을, 왜 우리는 잘못된 것인 양 스스로 자책하고 있는가? 우리는 왜 패배를 자랑하고 좌절을 자랑거리로 여기는가?
우리가 우리의 생명을 우리 자신만을 위해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생명과 사랑이 우리에게보다 하느님께 더욱 중요하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행복을 우리 자신만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행복이 또한 그분의 행복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슬픔을 우리 자신만의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그것이 그보다 훨씬 더 큰 문제임을 믿지 않는다: 우리의 슬픔은 그분의 슬픔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분에게서 훔쳐낼 것이 하나도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분에게서 몰래 훔치려고 생각하는 것이 이미 우리에게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
----------------------------------------------------
260405. 주님 부활 대축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알렐루야! 부활 대축일을 축하드립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빈 무덤’을 봅니다. ‘빈 무덤’, 그것은 적어도 예수님의 죽음을 둘러싸고, 그 어떤 일인가가 벌어졌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곧 죽음 안에서 새로운 일이 발생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결국 ‘빈 무덤’은 ‘지나간’ 자리입니다. ‘무덤’이 생명에서 죽음으로 건너간 자리라면, ‘빈 무덤’은 죽음에서 생명으로 지나간, ‘파스카’의 자리입니다.
“파스카”의 의미를 성경과 교부전통에서는 여러 방식으로 해석해왔습니다.
하느님의 천사가 이집트에 있는 히브리인들의 집을 치지 않고 그 위를 지나갔다고 할 때, 파스카는 ‘위를 지나감’(hyperbasis)이요, 이집트로부터 약속된 땅으로, 곧 종살이에서 자유로 지나간 백성들을 가리킬 때, 파스카는 ‘통과해 지나감’(diabasis)이요, 인간이 아래의 것들로부터 위의 것들로 지나갈 때, 파스카는 ‘위를 향해 지나감’(anabasis)이요, 인간이 죄의 종살이에서 벗어날 때, 파스카는 ‘밖으로 지나감’(exodus), 곧 ‘엑소더스’(탈출)요, 인간이 선과 거룩함에 있어 진보할 때, 파스카는 ‘앞을 향해 지나감’(progressio)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이 다섯 가지의 파스카가 동시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빈 무덤’은 혹 부활의 근거는 될지언정, 부활의 직접적인 증거나 부활이 사건으로 체험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빈 무덤’은 제자들이 눈으로 직접 본 역사적 사실이긴 하지만, 오히려 그것은 부활의 참 뜻을 우리가 ‘눈으로는 볼 수 없다’는 상징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무덤’이 죽은 이를 묻는 곳이라면, ‘빈 무덤’은 죽음 그 자체를 묻어버리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자유’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곧 ‘빈 무덤’, 그것은 예수님마저 죽어 사라져버린 예수님의 빈자리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수님이신 분을 넘어, 진정 예수님이신 예수님이 되게 하는 ‘빈자리’라 할 수 있습니다. 마치 야훼 하느님께서 “나는 나다”(탈출 3,14)라고 하시면서 당신 이름에 구속되지 않으신 것처럼, 자신을 비워버린 ‘빈자리의 자유’입니다. 사실, ‘빈 무덤’, 그것은 당신의 본래의 자리인 동시에 우리의 본래의 자리일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본래의 이 자리로, 본래의 생명으로 되돌려놓으십니다. 곧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는 본래의 우리의 생명으로 되돌려놓으십니다. 이를 두고 사도 바오로는 고백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습니다.
~우리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습니다.”(콜로 3,1-3)
그렇습니다. 이제 우리는 비로소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던 우리의 생명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빈 무덤’으로 비어 있어 볼 수 없다고 해서, 결코 없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여기에 “부활”은 우리의 믿음을 요청합니다.
그러기에, ‘무덤’이 죽은 이들의 공간이라면, ‘빈 무덤’은 우리가 찾아가야 할 의미의 빈 공간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무덤’이 ‘예수님은 죽었다’는 생각의 공간이라면, ‘빈 무덤’은 ‘예수님은 죽었다’는 생각을 놓는 빈 공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마에스트로 엑카르트는 앎의 틀 안에 갇혀있지 말고 벗어날 것을 이렇게 말합니다.
“가난해지려는 사람은 ~더 나아가 그는 자기 안에 있는 모든 앎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워져야 한다.” “정신적로 가난하고자 하는 사람은 신에 대해서도 피조물에 대해서도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모르고 있을 정도로 모든 것에서 가난해져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안에 예수님의 ‘무덤’이 있는지, 아니면 예수님의 ‘빈 무덤’이 있는 지를 보아야 합니다. 만약, 우리 안에 예수님의 무덤이 있다면, 이미 죽은 예수님을 우리는 만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서 ‘빈 무덤’을 본다면 부활을 체험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이토록,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던 우리의 생명이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로,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부활은 다름 아닌, 숨겨져 있던 우리의 생명이 다시 살아난 일입니다. 그러니 오늘이 바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우리의 탄생일인 것입니다.
주님의 파스카를 다시 한 번 축하하며, 여러분들의 생일도 축복합니다. 알렐루야.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무덤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보고 믿었다.”(요한 20,8)
주님!
제 안에 드소서.
제 안에 마련해 두신 텅 빈 자리에 드소서.
제 안에 숨겨진 당신의 생명을 드러내소서.
죽음의 무덤을 비우시고
당신 생명과 사랑이 드러나게 하소서. 아멘.
----------------------------------------------------
260405. 주님 부활 대축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부활 축하드립니다. 오늘, 어제 세례받은 15명의 새 신자가 이 미사에도 함께 하고 있습니다. 힘찬 박수로 환영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예전에 4행시를 만들곤 했습니다. 오늘 ‘예수 부활’로 4행시를 만들었습니다. 여러분이 ‘예수 부활’이라고 운을 떼시면 제가 말하겠습니다.
예 – 예수님, 정말 살아나셨습니다! 무덤이 텅 비었습니다!
수 – 수난과 고통을 끝났습니다. 절망이 희망으로 바뀌었습니다.
부 – 부활은 ‘과거 사건’이 아니라, 오늘 내 삶에서 다시 시작됩니다.
활 – 활짝 열린 무덤처럼 활짝 웃으며 외칩니다. 주님은 참으로 부활하셨도다!
2026년 부활입니다. 부활은 축하해야 할 사건이고, 기뻐해야 할 사건입니다. 그러나 부활은 우리에게 또 다른 의미로 다가옵니다. 그리스어로 부활은 ‘일어난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무덤에서 일어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무엇으로부터 일어나야 할까요? 절망에서 희망으로 일어나야 합니다. 두려움에서 담대함으로 일어나야 합니다. 불평과 원망에서 감사와 기쁨으로 일어나야 합니다. 어둠에서 빛으로 일어나야 합니다. 그래서 부활은 죽음을 넘어서 있을 미래의 사건이 아닙니다. 그래서 부활은 2000년 전에 있었던 과거의 사건이 아닙니다. 부활은 지금 이곳에서 삶으로 드러나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했던 제자들은 절망에서 희망으로 일어났습니다. 두려움에서 담대함으로 일어났습니다. 불평과 원망에서 감사와 기쁨으로 일어났습니다. 어둠에서 빛으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숨어 있던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우리들 또한 불평과 원망이 있다면 가사와 기쁨으로 일어나면 좋겠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 때입니다. 어머님은 저를 ‘주산학원’에 보냈습니다. 지금은 먼 추억 속의 ‘물건’이지만 ‘주판’은 했던 당시에는 계산 능력을 키워주고, 머리를 좋게 하는 도구였습니다. 그러던 주산학원은 ‘전자계산기’가 나오면서 조금씩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주산학원의 자리는 ‘컴퓨터 학원’으로 채워졌습니다. 저도 컴퓨터 학원을 조금 다녔습니다. 그러던 컴퓨터 학원은 ‘PC(Personal Computer)’가 나오면서 조금씩 사라졌습니다. 초고속 인터넷이 보급되면서 ‘검색의 시대’가 열렸습니다. 궁금한 것은 검색하면 찾을 수 있었습니다. 2022년 12월 1일 ‘인공지능 챗지피티’가 등장했습니다. 인공지능은 ‘무엇이든지 물어 보세요?’라고 이야기합니다. 이제 인공지능과 대화하면서 살아가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인공지능은 철학, 문학, 건축, 예술, 음악, 종교에 관한 것까지 우리가 질문하는 모든 것에 관해서 전문가 수준으로 대답해 줍니다. 저는 주판, 전자계산기, 컴퓨터, 초고속 인터넷, 인공지능의 시대를 경험하였습니다. 인공지능은 이제 저와 함께 지내고 있습니다. 인공지능의 시대에 저는 더 이상 ‘주판’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인공지능의 시대에 저는 더 이상 ‘검색’으로 정보를 찾지 않습니다. 인공지능은 제게 이정표와 같습니다. 인공지능은 제게 유능한 비서와 같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십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다면,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세상의 것을 추구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다면 이제 우리는 바오로 사도가 말한 것처럼 ‘저 위의 것’을 추구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가 말한 “저 위의 것”을 추구한 사람들은 세상의 높은 자리를 선택한 이들이 아니라, 가장 낮은 자리로 내려간 이들이었습니다. 이태석 신부님은 안정된 의사의 길을 내려놓고 아프리카 남수단으로 가서 병자를 돌보고 아이들을 가르치며 자신의 생을 내어주었습니다. 오웅진 신부님은 거리의 아이들과 노숙인들 곁에서 가족이 되어 주며 ‘꽃동네’라는 사랑의 공동체를 세웠습니다. 그분들은 성공과 명예의 바벨탑을 쌓지 않았습니다. 겸손과 나눔과 봉사의 사랑탑을 하늘 높이 쌓았습니다.
우리는 곧 본당 50주년을 맞이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너희는 어떤 탑을 쌓아 왔느냐?” 혹시 우리는 성공과 규모와 숫자로 바벨탑을 쌓으려 하지는 않았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50주년을 준비하는 지금, 우리가 쌓아야 할 탑은 더 크고 더 높은 건물이 아니라, 더 깊고 더 단단한 사랑의 탑입니다. 겸손으로 서로를 품어 주는 탑, 나눔으로 이웃을 살리는 탑, 봉사로 공동체를 세워 가는 탑입니다. 이름 없이 제대를 닦는 손길, 주방에서 묵묵히 음식을 준비하는 손길, 아픈 교우를 찾아가는 발걸음 하나하나가 바로 사랑의 벽돌입니다. 그런 벽돌이 모일 때 우리 본당의 50년은 단순한 시간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 닿아 있는 사랑의 역사로 완성될 것입니다. 저 위의 것을 추구하는 공동체는 더 높아지려는 공동체가 아니라, 더 낮아지려는 공동체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곳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사는 삶은 결국 더 많이 가지는 삶이 아니라, 더 많이 내어주는 삶임을 그분들이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
----------------------------------------------------
260405. 주님 부활 대축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https://cafe.daum.net/bbadaking/LgBn/2042
박 베로니카 26.04.05 00:19
우리를 위해 부활하신 주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부활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매년, 그리고 수십 번도 더 부활절을 맞이하지만, 물에 물탄 듯 술에 술 탄 듯 특별한 감흥이 없이 밋밋한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약간의 성찰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내 삶에 과연 어떤 의미인지? 내 안에서 죽음 체험과 부활 체험이 있었는지?
지난 세월 돌아보니, 주님께서 제게 각별한 은총을 베푸셨던지, 제 신앙 여정 안에 이런저런 작은 죽음 체험, 그리고 작은 부활 체험이 있었습니다.
젊은 시절 제 머릿속을 가득 채우던 생각들입니다. “이렇게 벌써 내가 시드는구나, 아직 채 피어나지도 못했는데, 청춘을 즐기지도 못했는데, 억울해서 어떡하지?” 사실 당시 저는 죽었다고 생각했습니다. 희망이라고는 조금도 없었으니까요.
그런데 하느님 참 묘하시더군요. 죽어가는 저를 이렇게 그냥 두시는가 싶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끝이구나, 싶었는데, 그 절박하던 순간 주님께서는 제게 누군가 한 존재를 보내주시더군요.그분을 통해 세상 따뜻하고 자상한 주님의 손길을 온 몸으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 따스한 손길이 저를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오게 하더군요.
우리네 인생이 그런 것 같습니다. 삶 속에 죽음이 있습니다. 이런저런 병고, 상처, 실패, 시련... 일종의 작은 죽음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작은 죽음에서 헤어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고, 또 하느님께 간절히 매달릴 때, 어느 순간 하느님께서 작은 부활 체험을 하게 해주십니다.
하느님, 참 묘한 분이십니다. 이 세상 살아가다 보면 사방이 가로막힌 극한 체험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처럼 성금요일 오후 골고타 언덕 체험을 하게 됩니다. 고통이 너무 극심해 도대체 하느님이 어디 계시는가? 당신이 계시다면, 어찌 이리 큰 시련을 주시냐고 울부짖습니다.
울부짖는 가운데서도 우리가 취해야 할 중요한 태도 하나가 있습니다. 울부짖는 가운데서도 우리의 시선을 이쪽저쪽으로 돌리고 또 돌려야 합니다. 더 큰 고통 겪고 계신 예수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동시에 우리 삶 이쪽저쪽을 살펴 봐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열어두신 새로운 문 하나가 어디에 있는지 열심히 찾아야 합니다.
우리 가톨릭 교회 전례도 그렇게, 우리네 삶도 그런 것 같습니다. 때로 우리 삶이 사순시기의 연속인 듯하지만, 잘 견뎌내다 보면 반드시 부활시기가 찾아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삶이 마냥 기쁨의 연속만이 아닙니다.
부활 시기에 이어 연중시기가 따라옵니다. 반복되는 지루한 일상이 계속됩니다. 그 일상도 지극히 소중합니다. 충실히 하루 하루 살아가다보면 어느새 또 다시 대림시기가 찾아오고, 기쁨 충만한 성탄시기를 맞이합니다. 이것이 우리 교회 전례력입니다.
기쁨과 환희의 시기에는 겸손하게 고통과 십자가의 때를 묵상해야 할 것입니다. 고통과 십자가의 시기가 다가오면 반대로 영광과 축제의 시기를 희망하고 기다려야 합니다. 그것이 무한 반복되는 것이 우리네 인생이고 우리 가톨릭 전례인 것입니다.
부활의 아침입니다. 낙담한 얼굴로 엠마오를 향해 걸어가던 제자들 사이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슬그머니 끼어드십니다. 함께 길을 걸으시며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십니다. 차근차근 설명해주시고, 자극도 주시고, 동반해 주십니다.
오늘 이런저런 고통과 시련 속에 휘청거리며 길을 걸어가는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로 부활하신 주님께서 끼어드실 것입니다. 힘을 주시고 위로를 주실 것입니다. 자극도 주시고 격려도 해주실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 부활하신 주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
https://story.kakao.com/ 黃Dami 매일묵상 ---------------- 07:30 추가.
4월5일 [주님 부활 대축일]
참 사랑이 충만한 이곳, 여기에 부활하신 주님께서 계십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의 진수요 핵심, 본질이요 전부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교 교리며 전례, 신학이나 전승 등 모든 것은, 예수님 부활이라는 정점을 중심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부활은 단 한보도 뒤로 물러설 수 없으며, 타협하거나 절충할 수 없는 그리스도교 절대 가치요 핵심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가톨릭 교회의 전례 안에서 예수님의 부활은 최고봉이요 정점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부활대축제보다 더 상위에 놓을 수 있는 축일은 없습니다.
따라서 교회는 8일 동안 부활 팔일 축제를 경축하며, 부활시기는 50일간이나 지속됩니다.
좀더 강조되고 경축해야 할 축제가 예수님의 부활 축제입니다.
그분의 부활 빼놓는다면 우리 교회는 아무 것도 아닌 단체로 전락하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부활 없이는 그 어떤 것도 의미를 지닐 수 없습니다.
그분의 부활로 인해 모든 것이 의미와 가치를 지니며 제 빛깔을 지니게 됩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잘 파악하고 있었던 바오로 사도는 부활의 중요성에 대해서 이렇게 강조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복음 선포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됩니다.”
(1 코린토서 15장 14절)
결국 예수님의 부활 사건 자체가 복음이요 기쁜 소식 전부입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부활은 진실이라는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참으로 부활하셨다는 것입니다.
가톨릭 교회 역사 안에서 셀수도 없이 많은 예수님의 부활과 관련된 그릇된 교리와 오류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났고, 신앙교리성으로부터의 단죄와 처벌이 있었습니다.
어떤 신학자는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 너무 과도하게 연구하고 고민하던 끝에 아주 엉뚱한 방향으로 빠져버렸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이후, 제자들은 더욱 똘똘 뭉쳤습니다.
제자공동체는 매일 그분과 동고동락하면서 느끼고 체험했던 그분의 말씀, 그분의 행동,
그분의 몸짓을 상기했습니다.
결국 예수님 자신이 하느님의 현존을 생생히 드러내는 특권적 상징임을 깨달았습니다.
제자들은 끊임없이 스승님과 함께 했던 시간들을 기억해냈고, 그러한 기억을 표현한 기록이 바로 성경 속 부활 이야기입니다.”
신앙의 신비인 부활입니다.
인간의 지성으로는 백번 천번 고민해도 이해할 수 없는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이런 부활을 자꾸 인간적 사고의 틀 안에 가둬놓고 설명하려고 기를 쓰다보면 생겨나는 것이, 이단이요 오류인 듯 합니다.
결국 부활의 신비를 열수 있는 열쇠는 어린이 같은 단순성이요, 순수한 신앙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아가페적 사랑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 좀 더 깊어지면, 그분의 부활은 좀 더 우리 가까이 다가올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안치되었던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분의 무덤은 텅 비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부활하셨으므로 더 이상 여기에 계시지 않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계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불신과 의혹으로 가득한 이곳, 여기에 더 이상 주님께서 계시지 않습니다.
거짓과 위선, 악의와 폭력으로 가득한 이곳, 여기에 더 이상 주님께서 계시지 않습니다.
참 사랑이 충만한 이곳, 여기에 부활하신 주님께서 계십니다.
풍요로운 사랑의 나눔 있는 이곳, 여기에 부활하신 주님께서 계십니다.
상호 존경과 헌신이 있는 이곳, 주님의 성령으로 가득한 이곳, 고통과 결핍 속에서도 기뻐하고 희망하는 이곳에 부활하신 주님께서 계십니다.
----------------------------------------------------
260405. 주님 부활 대축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강만연님
https://bbs.catholic.or.kr/bbs/bbs_view.asp?num=2&id=2131015&menu=4770
강만연 [fisherpeter] 2026-04-04 ㅣNo.188898
■ 생활묵상 : 엄마 뱃속에서는 부활을 할 수 없습니다.
부활은 죽음의 장막을 걷어내고 생명으로 옮아감을 상징합니다. 부활하지 않는 몸은 평생 엄마 뱃속에 머물러 있는 태아와 같습니다. 태아는 엄마 뱃속에 열 달만 살면 이 세상에 나와야 합니다. 엄마의 뱃속은 어둠의 장막과 같습니다. 태아에겐 그렇습니다. 그런 환경 속에서도 살 수 있다는 건 생명의 신비입니다. 우리도 똑같습니다. 이 세상은 마치 엄마의 태중과 같습니다. 이 세상은 죄악으로 물든 세상입니다. 우리 모두는 이 세상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죄악이 난무하는 세상 속에서도 죄악에 물들지 않으려고 사투를 벌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투는 바로 부활을 앞두고 세상을 향해 나가려고 하는 태아의 발버둥과 같습니다.
태아에겐 엄마 뱃속에 사는 기간이 열 달이라는 마지노선이 있습니다. 이 마지노선을 더는 더 넘어가게 되면 태아는 더 이상 생존에 치명상을 입게 될 것입니다. 엄마 뱃속을 나가는 게 두려워 그 속에 있다간 생명에 위협이 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이 순간 이 세상이 더 좋은 것처럼 여겨 이 세상에 물들어 이 세상에 안주하게 되는 게 마치 태아가 엄마 뱃속에 계속 있으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게 되면 결말은 어떻게 될지는 불을 보듯 뻔합니다. 고통이 있지만 나와야만 살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고통의 최종 막바지에 와 있습니다. 이제 생명은 움틀거리고 있습니다. 부활의 몸짓을 하고 훨훨 날 준비를 하고 태동을 힘껏 누리고 있습니다. 병아리가 달걀 껍질을 깨야만이 병아리로 부화되듯이 우리도 이 껍질을 깨야만 부활할 수 있습니다. 깨는 건 자기 스스로 해야 합니다. 애벌레로 성충에서 될 때 그때 그 고통을 들어주려고 도와주게 되면 화려하게 부활할 수 없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죽게 됩니다. 우리의 부활도 그렇습니다. 자신의 힘으로 부활로 이어져야 합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많은 아픔이 있게 됩니다. 그 아픔은 태아가 세상을 향해 나갈 때 겪는 탄생의 고통과 같은 것입니다. 그 고통을 온전히 몸으로 겪고 그걸 이긴 태아만이 새로운 생명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제 몇 시간 남지 않았습니다. 이 몇 시간만이라도 예수님께 부활을 할 수 있게 우리와 같이 함께 있어주셔서 힘을 주시길 청했으면 합니다. 얼마 후에 있을 부활의 기쁨을 누리게 될 우리의 모습을 상상하며 부활을 맞이했으면 좋을 듯합니다. 감사합니다.
----------------------------------------------------
260405. 주님 부활 대축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요한 20,1–9
막달라 마리아는 이른 아침, 어둠이 남아 있을 때 무덤에 갑니다.
돌이 치워져 있는 것을 보고 달려가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에게 알립니다.
두 제자는 무덤으로 달려가고,
먼저 도착한 제자는 들어가지 않고 굽어봅니다.
베드로가 들어가 아마포와 수건을 봅니다.
그리고 마침내 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 믿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덧붙입니다.
그들은 아직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서 되살아나셔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깨닫지 못했다고.
성 예로니모는
부활 신앙이 단지 “증거를 맞추는 계산”이 아니라
말씀 안에서 열리는 새 시야라고 가르칩니다.
무덤의 빈자리만 보고도
모든 것을 다 이해한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보고 믿는” 믿음이 시작됩니다.
예로니모의 눈으로 보면
부활의 아침은
‘완벽히 이해한 사람들의 승리’가 아니라
어둠 속에서도 한 걸음 더 나아가는
성실한 사랑의 달리기에서 열립니다.
마리아는 어둠 속에서도 갔고,
제자들은 달려갔고,
마침내 믿음이 태어납니다.
오늘 1주 성실/온유/절제의 부활 복음은
우리에게 이렇게 길을 제시합니다.
• 성실: 어둠 속에서도 무덤으로 가는 한 걸음
• 온유: 죽음을 조롱하지 않고, 슬픔을 품고 기다리는 마음
• 절제: 성급한 결론 대신, 말씀을 기다리며 믿음을 지키는 태도
부활은 “모든 것이 다 끝났다”는 선언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새 일을 시작하셨다”는 선포입니다.
그리고 그 새 일은
성실한 발걸음, 온유한 마음, 절제된 기다림 속에서
우리 안에 자라기 시작합니다.
부활하신 주님,
어둠이 남아 있을 때에도
당신을 찾는 성실을 제게 주소서.
상처 앞에서 온유를 잃지 않게 하시고,
성급한 판단을 절제하며
말씀 안에서 믿음이 자라게 하소서.
아멘.
----------------------------------------------------
260405. 주님 부활 대축일. 예수고난회 김준수 아오스딩 신부님.
주님 부활 대축일 파스카 성야: 마태오 28, 1 ~10
이 밤은 부활절의 시작인 파스카의 밤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 부활 성야는 모든 전야제(=밤샘 기도)의 어머니로 존경받는다. 』 라고 설교하였습니다. 이 밤은 오랜 관습(탈 12, 42)에 따라 주님을 위하여 밤을 새우며, 복음의 권고에 따라(루 12, 35) 신자들은 손에 등불을 밝혀 들고 주인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깨어 있다가, 돌아오는 주인과 함께 식탁에 앉을 수 있도록 마음을 가다듬는 밤입니다.
이 거룩한 밤을 맞기까지 성삼일의 마지막 날인 성토요일에 교회는 길고도 무거운 침묵의 시간을 보냅니다. 그 까닭은 예수님께서 무덤에 묻혀 계신 날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애도하고 기억하기 위한다는 차원에서, 교회는 오늘 해 떨어지기 전까지는 아무 전례도 거행하지 않습니다. 죽음은 우주의 침묵이며, 침묵의 자리가 바로 무덤입니다. 침묵은 블랙홀 Black hole처럼 생명의 숨과 얼을 삼켜버립니다. 그러나 침묵은 사람이 되신 말씀을 삼키지는 못합니다. 침묵은 말씀이 더 큰 의미로 되살아나는 자리입니다. 왜냐하면 침묵이 있기에 소리는 잦아들고, 침묵에서 말씀은 본래의 의미로 되살아납니다. 이와 동시에, 무덤은 부활(復活-Pascha-過越-건너감)의 자리이며 조건입니다. 침묵을 통해 소리가 제 본성대로 되살아나듯, 죽어 무덤에 묻힐 때만이 부활도 있습니다. 무덤은 살아있는 모든 것을 삼키는 블랙홀입니다. 무덤은 살아온 모든 시간과 머물렀던 모든 공간에서 배우고 행한 모든 것을 삼킵니다. 그러나 무덤이 삼키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영원한 사랑과 영원한 생명은 삼키지 못합니다. 오히려 무덤은 사랑과 생명의 씨앗이 되살아나는 자리입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 12, 24) 모든 것을 삼키는 무덤도 사랑과 생명을 간직한 씨앗을 삼키지 못합니다. 사랑과 생명의 신비를 알려주기 위해 오늘 밤 예수님은 침묵 속에 잠긴 말씀처럼, 땅에 떨어진 씨앗처럼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천사는 “그분께서는 여기에(=무덤) 계시지 않는다. 말씀하신 대로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 (28, 6) 알렐루야!
파스카 성야 전례의 움직임은 밤에서 새벽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이집트에서 약속된 땅으로, 종살이에서 자유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아래에서 위로 향하는 역동적 움직임입니다. 이 움직임은 빛의 예식과 행렬을 통해서, 그리고 창세기로부터 에젤키엘 예언서로 흐르는 구약의 7독서, 로마서와 복음으로 이어지는 장엄한 말씀을 통해 그리고 세례 의식과 성찬 전례의 모든 부분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움직임이 파스카의 신비를 선포하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런 거대한 배경에서 오늘 복음은 우리의 시선과 행위가 어디에서 시작하여 어디로 귀결해야 할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부활의 첫 목격자인 막달레나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는 “주간 첫날이 밝아 올 무렵에” (28,1) 그러니까 아직 어둠이 채 가기 전에 무덤을 보러, 일상의 자리에서 경계인 무덤으로 향했던 것입니다. 떠나는 자만이 보이고 떠나는 자만이 찾게 됩니다. 슬픔과 절망에서 일어선 자만이 환희와 희망을 맞게 됩니다. 물론 그들에게 아직 뚜렷하지 않은 부활 대신에 텅 빈 무덤과 마주하였습니다. 비어 있는 무덤의 의미를 비록 알아차리지 못했었지만, 빈 무덤은 허무와 죽음에 대한 승리의 암시暗示였습니다. 그들의 그런 내적 상태를 알아차린 그녀들에게 천사는,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찾는 줄을 나는 안다. 그분께서는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말씀하신 대로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28, 5~6)라고 구체적으로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부활 신앙은 감성적이고 이성적인 차원이 아니라 실질적인 사실 Fact이며 현실적인 사건입니다. 하지만 부활을 감각적으로 확인하려는 이들에게는 사실Nonfiction이 아니며 한낱 상상 Fiction의 허구虛構라고 단정할 것입니다. 천사의 말을 듣고서 그녀들은 육신의 눈과 귀가 아닌 마음의 눈과 귀로 받아들임으로써 차츰 부활을 향해 영적으로 달려가기 시작했었습니다. 이렇게 마음을 열고, 의심을 내려놓고 비울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천사의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 이제 여러분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가실 터이니, 여러분은 그분을 거기에서 뵙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내가 너희에게 알리는 말이다. 그 여자들은 두려워하면서도 크게 기뻐하며 서둘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소식을 전하러 달려갔다.”(28, 7~8) 이로써 믿는 이들은 보이는 것만으로 보고 믿는 사람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믿음으로 믿고 행동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바탕에는 이미 예수님으로부터 죽으셨다, 다시 살아나실 것이라는 예고 말씀을 들었지만, 들어 본 적도 없었으며 상상조차 할 수도 없는 부활 사건을 직면하면서 이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즉각적으로 행동할 수 있었습니다.
영성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막달레나 성녀는 예수님의 죽으심처럼 그녀 또한 영적으로 죽었으며, 주님께서 무덤에 머무셨다가 일어서신 것처럼 그녀 또한 절망과 상실에 머물다가 그 모든 것을 영적 무덤에 내려놓고 믿음과 사랑으로 일어났던 것입니다. 내려놓고 비울 때만이 다시 붙잡고 채울 수 있습니다. 이런 영적 죽음을 통해서 우리 또한 부활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예전에 최인호 베드로 작가의 유고집인 「눈물」을 읽고 공감했던 부분이 다름 아닌 부활에 대한 그의 체험적 묘사였습니다. 그는 자신 나름대로 부활의 신비를 깨닫고 이렇게 기술했습니다. 『 우리의 주님도 돌아가신 후 무덤에 묻히셨습니다. 그러나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부활하시기 전에 주님께서 묻히셨던 무덤이 먼저 텅 비었음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의 두 손이 텅 비었을 때야 비로소 우리의 두 손을 오롯이 합장하여 기도할 수 있는 것처럼 무덤이 비지 않으면 주님도 부활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죽어야 합니다. 죽어서 무덤 속에 묻혀야 합니다. 그런 후 마음의 무덤은 성녀의 빈손처럼 무無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만 살아 계신 주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도 주님처럼 새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 묻힌 자만이 무덤에서 다시 일어설 수 있으며, 죽은 자만이 다시 살아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오늘 독서 로마에서 이렇게 가르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니, 그분과 함께 살리라고 우리는 믿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시어 다시는 돌아가시지 않으리라는 점을 압니다. 죽음은 더 이상 그분 위에 군림하지 못합니다. 그분께서 돌아가신 것은 죄와 관련하여 단 한 번 돌아가신 것이고, 그분께서 사시는 것은 하느님을 위하여 사시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여러분 자신도 죄에서는 죽었지만,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을 위하여 살고 있다고 생각하십시오.”(6, 8~11)
“두려워하지 마라.”(28, 5)라는 천사의 격려의 말씀은 과거 사랑했던 사람의 상실에 대한 슬픈 현실 상태이고, “평안하냐?”(28, 9)라는 예수님 위로의 말씀은 사랑해야 할 사람을 되찾은 기쁜 미래로 변화의 초대입니다. 천사의 “말씀하신 대로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 나셨습니다.”(28, 6. 7)라는 말씀에서 시작된 변화의 조짐은, 마침내 예수님께서,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28, 10)라는 말씀을 들음으로써 그 변화의 정점에 도달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 기쁜 소식입니다. 인간이 무엇을 해서가 아니라 무상으로, 거저 공짜로 받은 구원입니다. 단지 그곳, 갈릴레아에 가고, 그곳에 감으로써 새로운 날, 모든 것이 새롭게 펼쳐진 첫날을 만끽할 것입니다. 그곳, 갈릴레아는 바로 그리스도인에게는 파스카의 아침이 시작되는 구원의 땅입니다. 그곳, 갈릴레아에서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과 새로운 날을 시작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시어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실 것입니다.”(28, 20) 아멘.
----------------------------------------------------
260405. 주님 부활 대축일. 키엣 대주교님. ------- 23:55 추가.
부활의 빛
성당은 깊은 어둠에 잠겨 있습니다. 그 어둠 속에서 부활초가 입당하고, 작은 촛불들이 하나씩 밝혀지며 성전은 서서히 빛으로 가득 찹니다. 어둠은 물러가고, 빛이 승리합니다. 어둠은 죽음을, 빛은 생명을 상징합니다. 생명이 죽음을 이긴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 성야 미사의 깊은 의미입니다. 생명을 주시는 그 빛이 전례와 말씀 안에서 우리에게 드러납니다.
전례는 죽음의 어둠이 온 세상을 뒤덮고 있는 상태에서 시작됩니다. 그러나 새 불이 켜지고 부활초가 빛을 발하는 순간, 어둠은 더 이상 머물지 못하고 물러갑니다. 이는 곧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생명의 빛으로 우리 가운데 오시는 사건입니다. 사실 빛과 어둠의 싸움은 오랜 구원의 역사 안에서 이어져 온 이야기이며, 그 모든 역사가 오늘 이 말씀 전례 안에서 다시 살아납니다.
전능하신 하느님께서는 무(無)의 어둠에서 세상을 불러내어 존재의 빛으로 이끄셨습니다.
거룩하신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죄의 어둠에서 불러내어 의로움의 빛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권능의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의 노예 생활에서 해방시켜 자유의 빛이 가득한 약속의 땅으로 이끄셨습니다.
사랑의 하느님께서는 배신과 죄의 어둠 속에 있는 인류를 사랑의 빛으로 끌어올리십니다.
생명의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굳어버린 돌 같은 마음을 치우시어 사랑으로 살아 있는 마음을 새롭게 하십니다.
이 빛과 어둠의 싸움은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 안에서 절정에 이릅니다.
예수님께서는 돌무덤에 묻히셨습니다. 무덤은 어둠의 세계이며 죽음의 왕국입니다. 그 어둠은 무덤을 막고 있는 돌과 봉인, 그리고 경비병들에 의해 더욱 굳게 닫혀 있었습니다. 마치 아무도 그 죽음의 문을 열 수 없을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곳에서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무덤을 막고 있던 돌이 굴려지고, 경비병들은 두려움에 떨며 쓰러집니다. 더 놀라운 것은 그 힘이 밖에서 온 것이 아니라, 무덤 안에서 터져 나왔다는 사실입니다.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니라 죽음을 겪으신 분에게서 생명의 힘이 솟아났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것입니다. 부활의 능력은 온 세상을 흔들며, 죽음의 권세를 그 중심에서 무너뜨립니다. 그리고 그 빛은 온 세상에 퍼져 나가 모든 어둠을 밀어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죽음을 이기셨다는 사실은 인류에게 가장 큰 기쁨이며 우리는 부활의 은총을 세례를 통해 받습니다.
세례 중 부활초가 물에 잠길 때, 그 물은 생명의 물로 변화되고 우리가 그 물에 잠길 때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묻히고, 다시 일어날 때 그리스도와 함께 새로운 삶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이제 우리는 죄에 물든 옛 삶에서 벗어나, 하느님 안에서 새로운 생명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마귀와 그 모든 유혹을 끊어 버리고, 삼위일체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고 세상의 유혹을 넘어, 하늘의 가치를 바라보며 살아가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세례 전례에 참여하며 믿음의 촛불을 밝혀, 부활하신 주님의 빛이 우리 삶을 비추도록 합시다.
죄의 어둠을 떠나, 그리스도의 은총의 빛 안에서 살아갑시다.
부활의 빛이 우리의 길을 인도하게 합시다.
그 빛은 생명을 주는 빛이며,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이끄는 빛입니다.
바로 이 길이 우리가 부활의 신비 안에서 살아가는 길입니다.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지금 내 삶 안에서 나를 어둠에 머물게 하는 것은 무엇인지 돌아보십시오.
2. 부활하신 주님의 빛이 이미 내 삶 안에 들어와 있음을 나는 믿고 있습니까? 혹시 아직도 어둠에 머물러 있지는 않은 지 깊이 성찰해 보십시오.
3. 세례를 통해 받은 새로운 삶을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 지 되돌아보십시오.
----------------------------------------------------
260405. 주님 부활 대축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문득 70년대 초등학교 다닐 때가 생각났습니다. 선생님께서 가정 환경 조사를 하셨는데, ‘가족은 몇 명인가?’라고 물어보셨고 여기에 집에 무슨 가전제품이 있는지를 물어 손들게 했습니다. 라디오, 텔레비전, 냉장고, 전화기, 곤로 등등…. 아마 지금에야 거의 다 가지고 있는 가전제품이겠지만 당시에는 이런 가전제품이 없는 집이 더 많았습니다. 그런데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는 가전제품이 우리 집에는 다 있었습니다. 이때 들은 생각은 “우리 집, 부자구나.”였습니다.
집에 가서 어머니께 “우리 집 부자지?”라고 물었습니다. 단호하게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상, 중, 하로 따진다면 ‘중’이라는 것입니다. 분명히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가전제품이 다 있고, 친구 집에 놀러 가도 우리 집이 더 크고 좋았는데도 말입니다.
부는 상대적입니다. 긴 연필 1번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더 긴 연필 2번이 있습니다. 자기보다 더 긴 연필 2번을 보고서, 긴 연필 1번은 ‘나는 작다’라고 생각합니다. 아마 더 긴 연필 2번도 자기보다 더 긴 연필을 보면 ‘나는 작다’라고 할 것입니다. 이처럼 비교하지 않아야 자기의 행복을 간직할 수 있습니다. 자기가 가진 것을 바라보고 만족할 수 있는 사람만이 행복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죽음의 어둠을 이기시고 생명의 빛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안에서 커다란 행복을 깨닫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게 하는 주님의 부활이기 때문입니다. 유일한 부활이며, 이를 통해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어떻게 다가오는지를 깨닫고 희망의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부활만으로도 세상 안에서 비교할 필요가 없음을 깨닫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부활을 생각하지 않고, 또 보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세상 안에서 계속 비교하면서 어렵고 힘든 삶을 살게 됩니다.
마리아 막달레나가 예수님 무덤에 갔다가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음을 발견합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요한 20,2)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베드로와 다른 제자가 무덤을 향해 달려갑니다. 그때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예수님께서 이미 세 번이나 당신의 부활을 예고하셨음에도 그들은 잊어버렸습니다. 예수님께서 안 계신다는 사실에만 집중하면서 말씀 자체를 잊어버린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의 상징인 수의(아마포)와 얼굴을 쌌던 수건을 무덤에 남겨두셨습니다. 비록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보여주지는 않으셨지만, 부활의 흔적을 남기신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아직 깨닫지 못합니다. 세상의 기준, 부정적인 생각으로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놀라움으로 부활하신 예수님께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의 기준, 나의 부정적인 마음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기쁨과 행복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알렐루야!!!!
오늘의 명언: 신은 우리를 죽이기 위해 절망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새로운 삶으로 일깨우기 위해 그것을 보낸다(헤르만 헤세).
----------------------------------------------------
260405. 주님 부활 대축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부활하신 주님이 바라는 사람은 누구인가?
“관상가, 신비가, 활동가”
“이날이 주께서 마련하신 날,
이날을 기뻐하자 춤들을 추자.”(시편118,24)
방금 우리는 화답송 후렴을 참으로 흥겹게, 기쁘게 부르며 주님 부활을 경축했습니다. 오늘 하루 끊임없이 노래 기도로 바치려 합니다. 때맞춰 동시적으로 활짝 피어나기 시작한 사랑의 파스카 봄꽃들도 함께 부활하신 주님을 찬미합니다. 이어 복음 선포전 힘차게 부른 부속가와 알렐루야도 우리의 기쁨을 배가합니다. 후반부 일부를 나눕니다.
“내 희망 그리스도 살아계시니, 그 제자들 앞에서 갈릴래아로 가시리라.
그리스도 죽은 자들 가운데서, 정녕 부활하심을 우리는 아노니,
승리자 임금이시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알렐루야, 알렐루야, 알렐루야
그리스도 우리의 파스카 제물로 희생되셨도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늘 함께 하시니, 아침 저녁 수도원 하늘길 산책시 외우는 다음 고백과 더불어 제 발걸음도 더욱 힘차게 되었습니다.
“임그리울 때
수도원 하늘길
하늘 향해 쭉쭉 뻗은
하늘의 사신
메타세콰이어 가로수들 사열받으며
임과 함께
하늘 보며, 하늘 기운 숨쉬며
하늘 품위 되찾고 하늘의 왕자되어
가슴펴고, 자유로이, 힘차게
나는 듯 걷는다
수도원 하늘길 날마다
이 기쁨, 이 행복에 산다”
주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주님과 함께 우리도 부활하였습니다. 주님 부활 축일을 경축할 뿐 아니라, 우리 몸소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부활의 기쁨을 살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지금 여기서 죽음의 아닌 생명을, 절망이 아닌 희망을, 어둠이 아닌 빛을, 슬픔이 아닌 기쁨을, 불안이 아닌 평화를, 분열이 아닌 일치를, 불행이 아닌 행복을, 파스카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주님과 함께 새 하늘, 새 땅의 부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특권이자 의무요 책임입니다. 어떻게? 바로 부활하신 주님께서 바라시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첫째, 사랑의 “관상가”입니다.
바로 그 빛나는 모범이 오늘 복음의 애제자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의 빈무덤 소식에 놀란 수제자 베드로와 애제자가 달렸는데 애제자가 앞서 달려 빈무덤에 도착했고, 빈무덤에 들어갈 때는 수제자 베드로를 앞세웠습니다. 그대로 애제자의 주님 사랑의 표현입니다. 주님 향한 “열렬한 사랑”이 베드로 앞서 달리게 했고, “겸손한 사랑”이 빈무덤 입장시 수제자 베드로를 앞세웠습니다.
빈무덤의 상황을 보는 순간, 전광석화 곧장 “보고 믿었다”하니, 애제자 요한의 사랑의 눈이 활짝 열려 주님 부활을 직감한 것입니다. 애제자의 주님과 우정의 깊이가 얼마나 깊은지 짐작이 갑니다. 과연 사랑의 관상가, 신비가의 모범인 애제자 요한입니다.
둘째, 사랑의 “신비가”입니다.
바로 그 빛나는 모범이 오늘 제2독서의 저자 바오로 사도입니다. 바로 제2독서 콜로새서 말씀은 사랑의 신비가 바오로 사도의 금과옥조의 설교입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우리에게도 감동스럽게 전달됩니다. 설명이 필요없을 정도로 단숨에 읽힙니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십니다.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이미 죽었고, 여러분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여러분도 그와 함께 영광 속에 나타날 것입니다.”
과연 대신비가 바오로 영성의 절정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물음이라면 그리스도 예수님은 답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을 모르면 나도 모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은 우리의 생명이요 우리 영혼의 영혼이기 때문입니다. 인간 무지와 허무에 대한 답도 그리스도 예수님뿐입니다.
아무리 세상 공부 많이 해도 하느님의 지혜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모르면 무지의 어리석음에서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세상에 그리스도 예수님을 모름으로 자기를 모르고 살다가 헛되이 헛것으로 살다가 세상 떠나는 가련한 이들은 얼마나 많겠는지요! 부활하신 주님의 신비에 정통한 사랑의 대신비가 바오로 사도입니다.
지상에 살되 지상의 것들에 초연하고 초탈한, 천상을 향한 자유인의 삶이요. 대신비가 바오로 사도가 바로 그 모범입니다. 대신비가 바오로의 절정은 코린토 전서 13장 <사랑의 찬가>에서 잘 드러납니다.
셋째, 사랑의 “활동가”입니다.
바로 그 빛나는 모범이 제1독서 사도행전의 베드로 사도입니다. 사도행전의 주인공으로 맹활약을 펼치는 베드로는 예전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던 그 베드로가 아닙니다. 오늘 제1독서 사도행전은 베드로가 주님 부활을 체험한 후 주님의 용사가 되어 코르넬리우스 집에서 주님 부활을 선포하는 열화와 같은, 폭포수같은 설교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나무에 매달아 죽였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사흘만에 일으키시어 사람들에게 나타나게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미리 증인으로 선택하신 우리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우리는 그분과 함께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였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하느님께서 당신을 산 이들과 죽은 이들의 심판관으로 임명하셨다는 것을 백성에게 선포하고 증언하라고 우리에게 분부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체험이라 설교가 살아 있고 힘이 있습니다. 대신비가 바오로도, 복음선포의 대활동가 베드로도 부활하신 주님과 하나되어 부활의 삶을 살고 계심을 깨닫습니다.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가 사는 것’이란 바오로의 고백도 이해됩니다.
셋은 구별될지언정 분리되지 않습니다. 이 셋을 다 하나로 살아야 합니다. 이 셋 앞에는 반드시 <사랑>이 붙습니다. 바로 사랑이 일치의 삶을 살게 합니다. 안으로는 주님의 사랑의 관상가 애제자 요한처럼, 사랑의 신비가 바오로 사도처럼, 밖으로는 주님의 사랑의 활동가 베드로처럼 사는 것입니다.
안으로는 베타니아의 관상가이자 신비가인 마리아로 밖으로는 베타니아의 사랑의 활동가 마르타로 사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를 주님을 닮은 주님 사랑의 관상가, 신비가, 활동가로, 이 셋이 하나로 통합된 영성가로 살게 해 줍니다.
“집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주님이 이루신 일,
우리 눈에는 놀랍기만 하네.”(시편118,22-23). 아멘.
----------------------------------------------------
==========================================================
이하 자료는 1차 게시 이후 공유할 묵상글(강론글)로 07시 이후 09시 사이
또는 더 늦게 추가할 수 있습니다.
==========================================================
----------------------------------------------------
260405. 주님 부활 대축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 07:30, 추가.
<믿음과 인내>
“주간 첫날 이른 아침, 아직도 어두울 때에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에 가서 보니,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었다.
그래서 그 여자는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였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베드로와 다른 제자는 밖으로 나와 무덤으로 갔다.
두 사람이 함께 달렸는데,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 무덤에 먼저 다다랐다. 그는 몸을 굽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기는 하였지만,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시몬 베드로가 뒤따라와서 무덤으로 들어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예수님의 얼굴을 쌌던 수건은 아마포와 함께 놓여 있지 않고, 따로 한곳에 개켜져 있었다.
그제야 무덤에 먼저 다다른 다른 제자도 들어갔다.
그리고 보고 믿었다.
사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요한 20,1-9).”
1) 신앙인은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믿는 사람이고,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지만 부활하셨음을 믿는 사람이고,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면 예수님처럼 부활해서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게 된다는 것을 믿는
사람이고, 그 생명을 얻기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믿고 있으면서도, 사랑하는 사람이 세상을 떠나면 슬퍼하고 고통스러워합니다.
스테파노의 순교 때의 일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독실한 사람 몇이 스테파노의 장사를 지내고
그를 생각하며 크게 통곡하였다(사도 8,2).”
또 바오로 사도가 예루살렘으로 가면서 에페소 교회의 원로들에게 작별 인사를 했을 때, 그 원로들도 슬퍼하면서 울었습니다(사도 20,37-38).
그런 모습들에 대해서,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이
“당신들은 부활을 믿는다면서 왜 죽음을 슬퍼하는가?” 라고 물을 것입니다.
스테파노의 경우를 보면, 순교 직전에 하느님과 예수님이 마중 나오셨다고 증언했습니다(사도 7,56).
그래서 우리는 스테파노의 영혼이 곧바로 하늘나라로 들어갔다고 믿고 있습니다.
초대교회 신자들도 그렇게 믿었을 텐데, 그들은 왜 크게 통곡했을까?
또 바오로 사도는 왜 “아무도 다시는 내 얼굴을 볼 수 없다.”는 말을(사도 20,25) 했을까? 작별 인사를 하더라도 나중에 하늘나라에서 다시 만나자고 말했어야 하지 않는가?
부활을 믿고 있으면서도 누군가의 죽음에 대해
슬퍼하는 것은, 죽음 자체를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이별을 슬퍼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나중에 다시 만난다는 것을 믿는다고 해도 이별이 슬픈 것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은, “지상에서는 나를 못 보겠지만 하늘나라에서 보게 될 것이다.”로 해석됩니다.>
죽음 앞에서 슬퍼하고 고통스러워하고, 허무감과
무기력감에 빠지는 것은 인간의 본성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러니 믿음이 부족해서 그런다고 나무랄 일은 아닙니다.
어떻든 부활을 믿는 사람은, 슬퍼하면서도 믿음으로 슬픔을 극복하는데, 부활을 안 믿는 사람은, 슬픔 때문에 살아갈 힘을 잃어버립니다.
2)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잘못 때문에 죽음에 넘겨지셨지만, 우리를 의롭게 하시려고 되살아나셨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의롭게 된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립니다.
믿음 덕분에,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가 서 있는 이 은총 속으로 들어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리라는 희망을 자랑으로 여깁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환난도 자랑으로 여깁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환난은 인내를 자아내고 인내는 수양을, 수양은 희망을 자아냅니다. 그리고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로마 4,25-5,5).”
여기서 “환난도 자랑으로 여깁니다.”는 “환난을 겪어도 기뻐합니다.”로 해석됩니다.
믿음에서 인내가 생기고, 인내에서 기쁨이 생깁니다.
그래서 믿음이 있으면 환난을 겪어도 인내할 수 있고, 기쁨 속에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나 자신의 부활을 믿어도 환난 자체가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믿음과 인내로 환난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 없으면 굴복할 것이고......>
3) 히브리서 저자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의 시련을 훈육으로 여겨 견디어 내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자녀로 대하십니다. 아버지에게서 훈육을 받지 않는 아들이 어디 있습니까?
모든 훈육이 당장은 기쁨이 아니라 슬픔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그것으로 훈련된 이들에게 평화와 의로움의 열매를 가져다줍니다(히브 12,7.11).”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음을 믿는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음을 믿는 것이고, 예수님께서 당신의 죽음과 부활로 ‘죽음이라는 것’을 정복하셨음을 믿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 ‘죽음이라는 것’이, 또 우리를 억압하는 ‘죽음의 세력의 힘’이 아직도 우리 삶 안에 남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승리에 참여하려면 ‘인내’가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마태 10,22).” 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사실 신앙생활은 ‘인내하는 생활’입니다.
----------------------------------------------------
260405. 주님 부활 대축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 10:50. 추가.
요한 20,1-9 “보고 믿었다.“
오늘은 주님 부활 대축일입니다. 죽음에 이르기까지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철저히 순명하신 주님께서,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그 놀라운 사건을 기뻐하고 기념하는 날이지요. 우리가 주님의 부활을 기뻐하고 기념하는 이유는 완전한 죽음에 빠지셨던 그분이 그 죽음을 극복하고 참된 생명으로 건너가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주님의 부활을 통해 우리도 그분을 굳게 믿고 따르면 죽음을 극복하고 영원한 생명으로 건너갈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죽으셨음을 확인할 수 있는 ‘증거’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첫번째로 그분의 시신을 감쌌던 ‘수의’가 있습니다. 누군가를 수의로 감쌌다는 것은 그의 안에서 타오르던 생명의 불꽃이 꺼졌다는 것을, 그래서 자기 힘으로는 온전한 모습으로 이 세상에 머무를 수 없다는 것을 상징하지요. 두번째로 주님의 무덤 입구를 막았던 ‘큰 돌’이 있습니다. 이 돌은 이승과 저승 사이의 경계를 상징합니다. 그렇기에 주님의 시신을 묻은 무덤을 큰 돌로 막아놓았다는 것은 그분께서 ‘저 세상’으로 건너가셨으며 이 세상에서 그분과 함께 했던 시간들이 ‘과거의 추억’이 되어 주님과 함께 무덤에 묻혔음을 뜻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수의’가, 그리고 ‘큰 돌’이 정말 주님께서 죽으셨음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객관적 증거라고 할 수 있을까요? 주님의 시신을 실제로 감쌌던 천이라고 알려진 ‘토리노 수의’는 그 진위 여부가 확실히 가려지지 않았습니다. 또한 그분의 무덤이라고 알려진 장소 역시 교회의 전승 안에서 맞다고 전해지니 그렇다고 믿을 뿐, 주님께서 실제로 그곳에 묻혀 계셨는지는 누구도 완벽하게 입증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객관적 증거’를 찾는 일 자체가 사실 무의미하다고 할 수 있지요. 그런데 믿지 않는 사람들은 주님께서 부활하셨음을 객관적으로 입증해보라며 그 증거를 요구합니다. 물론 ‘수의’나 ‘큰 돌’ 정도의 증거는 얼마든지 제시할 수 있습니다. 주간 첫날 아침 아직 해가 뜨지 않아 어둡던 때에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에 가서 보니, 그분의 무덤을 막았던 큰 돌이 한쪽으로 치워져 있었고 무덤은 텅 비어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당신 말씀대로 부활하시어 무덤 입구를 막았던 돌을 밀어내고 밖으로 나가셨다고 생각할 수 있지요. 주님 죽음의 증거였던 ‘큰 돌’이 주님 부활의 증거로 뒤바뀌는 순간입니다. 하지만 누군가는 이런 반론을 제시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분께서 부활하셨다는 거짓 소문을 퍼뜨리기 위해 캄캄한 밤중에 몰래 그분의 무덤을 찾아가 시신을 훔쳐간 게 아니냐고 말이지요. 하지만 그분의 시신을 감쌌던 수의가 무덤에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고 그분의 얼굴을 쌌던 수건은 따로 한곳에 잘 개켜져 있었습니다. 만약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몰래 빼돌리고자 했다면 사람들이 못알아보도록 시신을 더 꽁꽁 감쌌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주님 죽음의 증거였던 수의 역시 그분 부활의 증거로 전환된다고 할 수 있지요.
그러므로 주님의 부활을 이야기할 때 ‘증거’를 찾는 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가 어떤 사건의 ‘증거’라고 생각하는 것들에는 반드시 그 사건에 대한 주관적인 ‘해석’이 들어가 있기 때문입니다. 애초에 반박 불가능한 100% 객관적인 증거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지요. 무덤이 비었기 때문에 주님이 부활하신 게 아니라, 주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무덤이 비어 있었던 것입니다. 수의와 수건이 남아 있어서 주님이 부활하신 게 아니라, 주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더 이상 그것들이 필요 없어진 것입니다. 그러니 증거에서 출발하려 하지 말고 믿음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세례자 요한이 주님의 무덤에서 본 것은 돌이나 천 조각이 아니었습니다. 반대자들의 손에 붙잡혀 죽으셨다가 사흘만에 되살아나리라는 주님의 ‘말씀’이었습니다. 그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는 ‘믿음의 눈’으로 보았기에, 대수롭지 않게 여겨 그냥 지나칠 수도 있었던 사소하고 평범한 것들이 그에게는 자기 믿음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하는 ‘표징’이 된 것이지요.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는 참된 믿음은 증거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신뢰와 사랑이 우리의 영적인 눈을 뜨게 하여 하느님의 현존을, 그분 사랑의 섭리를 알아보게 만듭니다.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보고서야 믿는 믿음’이 아니라, ‘보지 않고도 믿는 믿음’인 것이지요.
주님의 부활을 가리키는 ‘파스카’는 ‘건너가다’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부활을 경축하며 기념하는 것으로 그칠 게 아니라 직접 ‘건너가야’ 합니다. 증거를 보고서야 믿는 믿음에서, 보지 않고도 믿는 믿음으로 건너가야 합니다. 사랑에 조건을 걸고 대가를 요구하는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마음에서, 내가 먼저, 조건 없이, 제한 없이, 끝까지 사랑하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마음으로 건너가야 합니다. 자기 자신만 생각하며 본능에 따라 ‘생존’하는 ‘동물적 삶’에서, 우리 모두를 생각하며 하느님 뜻에 따라 ‘현존’하는 ‘하느님 자녀의 삶’으로 건너가야 합니다. 세상 것들에 목숨을 걸고 집착하는 ‘땅의 사람’에서, 하늘나라의 가치를 추구하며 하늘에 보화를 쌓는 ‘하늘의 사람’으로 건너가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의 부활이 나와 별 상관 없고 아무 감흥도 없는 ‘이벤트’가 아니라, 나를 참된 기쁨과 행복으로 채워주는 ‘삶의 일부’가 됩니다.
----------------------------------------------------
#########################################################################################
사진묵상(264) 십자가의 길(예루살렘 성지 순례) - 성 프란치스코 선종 800주년 기념
https://cafe.naver.com/f-e/cafes/30893450/articles/2866?referrerAllArticles=true
정무 바울로
2026.04.04. 16:08
십자가의 길(예루살렘 성지 순례)을 잘하셨나요?!
- 성 프란치스코 선종 800주년 기념-
<역사적 배경으로 보는 십자가의 길의 의미>
십자가의 길은 단순한 전례가 아니라, 예수님의 사랑과 평화의 영성을 ‘역사 속에서 계승한 신앙의 여정’이다. 오늘 우리가 이 길을 걷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사랑을 삶 속에서 다시 살아내는 것이며, 십자가의 길을 나의 발걸음으로 바꾸는 선택이다.
이에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고 십자가의 길의 의미를 알아 보고자 한다.
1. 성 프란치스코는 ‘왜’ 성지를 찾았는가?
* 예수님의 수난과 사랑을 현장에서 체험하고자 함.
* 무슬림 세계와의 평화적 대화와 복음적 증언을 위해.
* 전쟁의 시대에 비폭력·평화의 길을 보여주기 위해.
2. 성 프란치스코는 ‘어떻게’ 성지를 갔는가?
* 1219년, 십자군 전쟁터였던 이집트 다미에타로 맨몸으로 건너감.
* 술탄 알–카밀과 대화를 나누며 상호 존중을 경험.
* 술탄의 허락으로 성지 방문이 가능해짐.
➡ 성지는 전쟁이 아니라 평화로 열린 길이 되었다.
3. 프란치스코회가 성지(이스라엘-예루살렘)를 맡게 된 배경
* 십자군 이후 성지는 폐허와 혼란에 빠졌다.
* 교황청은 폭력보다 평화적 방식으로 성지를 보호할 공동체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 성 프란치스코가 무슬림 술탄과 평화적 만남을 이룬 이후,
1342년 교황 교령으로 성지 사도직이 프란치스코회에 공식 위임되었다.
4. 십자가의 길의 유래
* 초대 교회 신자들은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의 실제 수난 여정을 걸으며 묵상했다(Via Dolorosa).
* 중세 전쟁과 이슬람 통치로 성지 순례가 어려워지자,
성지의 여정을 지역 교회에 재현한 ‘대체 순례’가 시작되었다.
* 프란치스코회가 이를 14처 구조로 정리하며 오늘의 십자가의 길 형태가 확립되었다.
5. 역사적 배경 속 십자가의 길의 의미
* 평화의 길: 폭력의 시대, 예수님의 길은 평화의 메시지였음.
* 대체 순례의 은총: 성지에 갈 수 없는 이들에게 영적 성지 체험 제공.
* 고통의 일치: 예수의 수난과 인간의 삶의 고통이 만나는 지점.
* 보편 교회 전통: 세계 어디서나 같은 여정을 따라 기도할 수 있게 됨.
6. 현대 신앙인이 내면화해야 할 점
* 관계로 받아들이기
– 십자가는 과거 사건이 아니라 나를 위한 사랑의 행위.
* 시대의 수난자들과 연결
– 고통받는 이들 안에서 예수를 만남.
* 내 상처를 통한 묵상
– 나의 고통이 예수와 만나는 자리.
* 평화 실천
– 십자가의 길은 결국 ‘평화를 만드는 삶’으로 나아가게 함.
♣ 프란치스코회 수도자들은 800년 넘게 성지를 지켜오면서 "무기 대신 기도와 인내"를 방패로 삼았습니다. 이들은 십자군이 떠난 뒤에도 홀로 남아 이슬람권과 공존하며 성지를 보존한'비폭력 수호자'의 상징으로 평가받습니다.
♣ 성지는 곧 프란치스코회 사도직의 심장으로 지금도 매일 새벽, 프란치스코회 수도자들은 성묘성당 안에서 그리스도의 무덤을 중심으로 미사를 봉헌하며, 800년 가까이 이어져 온 ‘성지 수호’ 임무를 계속 수행합니다.
https://youtu.be/YjjqkTWqclU?si=ctwK4W6eGP3GzVBy
♣ 프란치스코회는 성지 예루살렘과 그 주변에서 수 세기 동안 복음 전파와 성지 수호 사명을 수행하면서 많은 수도자가 순교했습니다. 공식적으로 집계된 순교자 수는 약 150명 이상, 일부 기록에서는 158명 정도로 전해집니다.
♣ 전쟁 중에도 이스라엘(예루살렘성지) 수호를 위해 헌신하는 작은형제회(OFM,프란치스코회) 수도자들을 기도 가운데 기억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평화의 기도>
주님, 저를 당신의 도구로 써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신앙을
그릇됨이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두움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는 이 되게 하소서.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여 주소서.
저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 본 문서는 AI 도움을 받았으며 포토(그림) 중 일부도 AI로 제작하였습니다.
※ 작성자 - 정무停无 임성일 바울로
첨부파일
역사적 배경으로 보는 십자가의 길의 의미.pdf
null파일 다운로드
※ 본 카페에 올린 것은 요약본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첨부파일에서 확인해 주세요. 감사합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