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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4. 28. 주일 큐티
다니엘 4:18 ~ 27
다니엘이 해석한 큰 나무 꿈
관찰 :
1) 해석을 밝히 말하라
- 18절. “나 느부갓네살 왕이 이 꿈을 꾸었나니 너 벨드사살아 그 해석을 밝히 말하라 내 나라 모든 지혜자가 능히 내게 그 해석을 알게 하지 못하였으나 오직 너는 능히 하리니 이는 거룩한 신들의 영이 네 안에 있음이라” => 느부갓네살은 다니엘에게 엄하게 명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꿈을 해석하라는 것입니다. 어쩌면 느부갓네살은 이미 어렴풋이 이 꿈의 해석을 짐작했을 것으로 짐작이 됩니다. 그러나 다니엘을 통하여 분명한 해석을 듣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다니엘에게 거룩한 신들의 영이 존재하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즉, 성령과 동행하는 다니엘을 느부갓네살은 존중하고 있는 것입니다. 갈대아의 모든 지혜자가 다 똑바로 해석하지 못하는 것을 유일하게 해석해 줄 존재로 다니엘을 기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2) 다니엘의 꿈 해석
- 19절. “벨드사살이라 이름한 다니엘이 한동안 놀라며 마음으로 번민하는지라 왕이 그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벨드사살아 너는 이 꿈과 그 해석으로 말미암아 번민할 것이 아니니라 벨드사살이 대답하여 이르되 내 주여 그 꿈은 왕을 미워하는 자에게 응하며 그 해석은 왕의 대적에게 응하기를 원하나이다” => 다니엘은 그 꿈의 내용을 듣자마자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 내용에 대해서 상당히 황망하게 반응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니엘이 느부갓네살을 군왕으로 여기고 그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태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를 자신의 나라를 망하게 한 원수로 여겼다면 이런 식의 반응을 보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다니엘은 느부갓네살을 왕으로 인정하고 그에게 나쁜 일이 임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한 다니엘을 눈치챈 느부갓네살은 무슨 해석이던지 바르게 할 것을 종용하고, 다니엘은 그 꿈의 내용이 느부갓네살의 대적에게 응하게 되기를 바라는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이 꿈이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이기 때문에 그럴지라도 다니엘은 정직하게 그 꿈을 해석하게 됩니다.
- 20절 ~ 21절. “왕께서 보신 그 나무가 자라서 견고하여지고 그 높이는 하늘에 닿았으니 땅 끝에서도 보이겠고 그 잎사귀는 아름답고 그 열매는 많아서 만민의 먹을 것이 될 만하고 들짐승은 그 아래에 살며 공중에 나는 새는 그 가지에 깃들었나이다” => 느부갓네살이 그 꿈에서 본 나무는 그 위용이 대단했습니다. 하늘까지 닿는 나무여서 땅의 끝에서도 보일지경이었습니다. 다니엘은 느부갓네살이 무시무시한 신상의 꿈을 자신이 직접 경험하였듯이 이번 느부갓네살의 꿈도 마치 자신이 직접 꾼 것과 같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환상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 나무는 모든 나라의 만민의 먹을 것을 제공하고, 들짐승과 길짐승이 깃들어 살기에 부족함이 없는 나무였습니다. 너무나 훌륭하고 아름다운 나무로서 열방과 만물을 위하여 섬기는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 22절. “왕이여 이 나무는 곧 왕이시라 이는 왕이 자라서 견고하여지고 창대하사 하늘에 닿으시며 권세는 땅 끝까지 미치심이니이다” => 다니엘은 그 큰 나무의 존재가 바로 느부갓네살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물론 그것은 하나님의 알려주심입니다. 느부갓네살은 그 큰 나무와 같이 하늘에 이르는 위용으로 만민과 만물을 섬기는 존재가 되는 위대한 자리에 서게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섬김의 자리로 이해하지 않고 자신의 욕망을 위한 자리, 교만의 자리가 될 때 하늘에서 한 순찰자가 내려오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 23절. “왕이 보신즉 한 순찰자, 한 거룩한 자가 하늘에서 내려와서 이르기를 그 나무를 베어 없애라 그러나 그 뿌리의 그루터기는 땅에 남겨 두고 쇠와 놋줄로 동이고 그것을 들 풀 가운데에 두라 그것이 하늘 이슬에 젖고 또 들짐승들과 더불어 제 몫을 얻으며 일곱 때를 지내리라 하였나이다” => 아무리 느부갓네살의 권세가 지상 최강이라할지라도 하늘에서 내려온 권세 앞에서는 어찌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가 그 큰 나무를 베라는 명령이 내리자 나무는 베어지게 되었습니다. 그 뿌리의 그루터기는 남겨두라 하자 그 그루터기만 남게 됩니다. 쇠와 놋불로 동이라 하자 그렇게 묶이게 됩니다. 들 풀 가운데 들짐승과 같이 지내며 일곱 때, 즉 칠년의 시간을 지낼 것을 명하자 그렇게 됩니다. 하늘의 명령이 내려오면 이 땅의 어떠한 권세도 다 복종하게 되는 것이고, 어떤 권세자도 그 자리에서 내려와 짐승과 같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하늘의 명령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그 순찰자를 부리시는 하나님에게 그 모든 주권이 달려있는 것입니다.
- 24절. “왕이여 그 해석은 이러하니이다 곧 지극히 높으신 이가 명령하신 것이 내 주 왕에게 미칠 것이라” => 이런 흉한 해석을 하는 것은 보통 강심장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해석입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담담히 자신의 자리나 생명을 연연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는 일에 자신의 목숨을 걸고 있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이”, 즉 이방인들이 표현하는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이 느부갓네살에게 임할 것임을 큰 나무 꿈의 해석을 통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아무리 느부갓네살 왕이라 할지라도 피할 수 없는 명령임을 알아야 할 것임을 전제로 말하고 있습니다.
- 25절. “왕이 사람에게서 쫓겨나서 들짐승과 함께 살며 소처럼 풀을 먹으며 하늘 이슬에 젖을 것이요 이와 같이 일곱 때를 지낼 것이라 그 때에 지극히 높으신 이가 사람의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줄을 아시리이다” => 느부갓네살이 왕에서 쫓겨나게 될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왕 앞에서 이런 말을 한다는 것 자체가 불경이고 죽을 수 있는 일이지만 하나님이 보여주시고 알려주신 것이기에 증거되어야 하는 메시지였습니다. 그런데 그 내용은 참혹하기까지 합니다. 왕이었던 자가 들로 나가 들짐승과 함께 살게 되고, 산해진미를 먹던 자가 소처럼 풀을 먹고 들에서 잠을 자기에 이슬에 젖어서 칠년이나 살게 될 것이라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감옥에 갇힌다면 인간 취급이라도 받을텐데, 이것은 사람이 아닌 짐승이 된다는 말인 것입니다. 느부갓네살이 그렇게 되는 이유는 지극히 높으신 이가 사람의 나라, 제국을 다스리시며, 그 나라를 하나님의 원하시는 자에게 맡기시는 권세가 있음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는 말씀입니다.
- 26절. “또 그들이 그 나무뿌리의 그루터기를 남겨 두라 하였은즉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줄을 왕이 깨달은 후에야 왕의 나라가 견고하리이다” => 느부갓네살이 하나님이 그 나라를 다스리시는 참 통치자이심을 깨달은 후에야 바벨론을 다시 다스리게 되고, 또 그 나라가 견고하게 될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제국의 황제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선택하신 자에게 다시금 하나님을 인정하도록 기회를 주실 것임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당연한 귀결은 하나님 여호와를 인정하고 하나님을 인정하는 통치를 할 것을 당부하게 되는 것입니다.
- 27절. “그런즉 왕이여 내가 아뢰는 것을 받으시고 공의를 행함으로 죄를 사하고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김으로 죄악을 사하소서 그리하시면 왕의 평안함이 혹시 장구하리이다 하니라” => 다니엘은 느부갓네살에게 그가 꾼 꿈이 그대로 이루어지게 될 것임을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상황에서의 최선의 방책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예언을 선포하는 자의 기본 자세입니다. 문제만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 해법을 같이 제공해야 하는 것입니다. 타인의 잘잘못을 지적하는 것은 아마도 누구나 언제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 타당한 해법까지 제시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거기까지 나아가는 자가 하나님의 사람이어야 합니다. 다니엘이 제시하는 해법은 공의를 행하는 것, 왕에게 죄지은 자의 죄를 사해주는 것,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기는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것으로 하나님 앞에서 통치자로서 마땅한 행위를 보임으로 느부갓네살이 범한 죄악에 대해서 반성하는 태도를 보일 것을 권면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 하나님이 보시기에 긍휼히 여겨주신다면 느부갓네살이 7년 뒤에 돌아와서의 형편 속에 평안함이 길어질 수 있을 것임을 희망적으로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가르침 :
1) 느부갓네살은 큰 나무와 같은 자로서 만민과 만물을 어우르고 그들 모두를 섬길 수 있는 권세를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았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공의를 행하고, 죄를 사하고,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기는 통치를 했어야 합니다. 그러나 느부갓네살은 제국의 통치를 위해 권력을 중앙집권적으로 모으고, 그것을 위하여 사람을 풀무에 집어넣을 정도로 잔인한 통치를 눈하나 까딱하지 않고 수행한 제왕이었습니다. 그리고 교만했습니다. 눈에 뵈는 것이 없었습니다. 자신을 반대하는 것들은, 그것이 사람이던지, 나라이던지 모두 파괴하고 정복해 버렸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으로부터 그 권력이 회수되게 된 것입니다. 다만 죽음은 면하고 7년간 사람이 아닌 짐승과 같이 살게 될 것을 하나님이 보여주시고 알려주신 것입니다. 그 목적은 하나님이 제국을 다스리시는 진짜 통치자이심을 알려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또한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를 그 제국의 통치자의 자리에 앉히심도 보여주시고 알려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또한 느부갓네살이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을 인정하게 됨으로 돌아와 왕위를 되찾았을 때, 부족한 존재일지라도 하나님의 선택으로 왕의 자리에 앉게 됨을 인정하게 하시고자 하심이었습니다.
2) 다니엘은 흉한 예언도 두려움이 없이 순종함으로 느부갓네살 왕 앞에서 해몽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자의 태도입니다. 언제나 좋은 말만 좋게 좋게 하는 것이 옳은 것이 아닙니다. 흉한 것, 저주를 선포하게 되더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메시지라면 선포해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종의 자세요 태도입니다.
3) 또한 다니엘은 문제만 지적하고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최악의 상황에서조차 그 상황에서의 실천 가능한 최선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이 참된 지혜자의 모습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자의 자세요 태도여야 합니다. 항상 자신은 옳고 타인은 그르다는 식의 주장은 위험한 것입니다. 그리고 타인의 잘못만을 지적하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그것을 넘어서서 진짜 실천 가능한 대안을 제시하고 그 대안을 실천할 수 있도록 돕고 섬길 수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다니엘이 느부갓네살이 7년간 들짐승과 같이 살다가 돌아왔을 때 그의 복권을 위해서 가장 힘을 써주고, 또한 그것이 가능하도록 여러 가지 좋은 정책과 선행을 자신의 이름이 아닌 느부갓네살의 이름으로 행했다는 것을 느부갓네살이 회상하고 있는 다니엘 4장의 기사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다니엘은 그렇게 대안을 가지고 접근한 참된 지혜자였습니다. 이 지혜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고, 다니엘은 그 지혜에 순종한 자였던 것입니다.
적용 :
1) 느부갓네살은 그야말로 만인지상(萬人之上)의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분 앞에서 겸손했어야 했습니다. 아무리 권력이 크고, 세상의 모든 부와 권세를 다 동원하는 존재라 할지라도 겸손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용도 폐기시키셔도 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느부갓네살은 자신이 짐승과 같은 삶을 살게 됨에 있어서 그 어떤 항변도 하지 못했습니다. 교만은 패망의 지름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내가 무엇인가를 했다고 잘난 것을 생각하는 순간 망하는 것입니다. 나는 그저 주 예수의 보혈의 공로로 구원받은 그 은혜만으로도 만족하는 존재여야 합니다. 다른 무엇으로, 내가 이룬 어떤 조그만 일로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혹은 사람들 앞에서 잘난 척을 할 수 있는 어떠한 조그만 것 중의 부스러기도 없는 존재입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나 자신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진짜 지혜이고, 진짜 복 받는 길입니다.
2) 타인 혹은 공동체에 대한 어떤 문제제기는 그 문제에 대해서만 할 것이 아니라 그에 합당한 대안을 가질 때에라야 합당합니다. 그것도 나 자신이 그 일에 몸을 던질 각오가 되고, 도와줄 각오가 되고서야 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은 느부갓네살에게 큰 나무의 꿈을 꾸게 하시고, 그 꿈을 다니엘에게 해석하게 하심으로 느부갓네살이 미쳤다가 돌아올 7년 뒤를 준비하게 하셨습니다. 다니엘이 느부갓네살에게 제안한 대안은 립서비스가 아니라 다니엘로 하여금 또 다른 헌신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럴 수 없다면 진정한 문제제기는 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3) 주님께서 교만한 자를 심판하심을 믿고 겸손함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바라보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