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호사가 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동네 쌀가게 영감의 부인이 나를 찾아왔다. 온순하고 성격이 좋은 부부라는 소리가 있었다. 얼굴에 걱정이 가득한 표정으로 부인이 말했다.
“거래처 사람이 쌀을 사겠다면서 영감에게 수표를 잠깐 빌려달라고 했어요. 기일에 돈을 틀림없이 입금시키겠다고 그랬어요. 그런데 돈을 은행에 넣지 않고 사라져 버렸어요. 수표 빌려준 죄로 영감이 감옥에 갔어요.”
수표를 발행하고 만기일에 지급이 되지 않으면 ‘부정수표 단속법 위반’으로 거의 기계적으로 구속이 될 때였다. 수표를 빌려간 사람이 입금을 시키지 않을 마음을 먹고 쌀을 샀다면 사기죄의 공범 혐의도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수표를 빌려주면 위험한 걸 모르셨어요?”
내가 물었다.
“알기야 알았죠. 우리 영감은 평생 쌀가게를 해 왔어요. 아주 착한 사람이예요. 누가 뭘 부탁해도 거절하는 법이 없어요. 사람이 찾아와도 그냥 보내는 법이 없어요. 심지어 점원이 수금한 돈을 횡령해도 싫은 소리를 못하는 성격이예요. 그래서 그런지 다른 쌀장수들이 매점매석을 해서 떼돈을 벌어 빌딩을 사도 우리는 초라한 쌀가게를 벗어나지 못해요. 영감은 누가 악하게 굴어도 저항을 하지 못하는 양같은 인간이예요.”
무능력하다는 것인지 무저항주의자라는 것인지 칭찬인지 원망인지 구분할 수 없는 얘기 같았다.
나는 다음날 서울구치소로 가서 쌀가게 영감을 만났다. 냉기서린 접견실에 헐렁한 홋겹의 죄수복을 입은 쌀가게 영감이 접견실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없이 담담한 표정이었다.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결제되지 않은 내 수표로 쌀을 샀다니까 사기도 맞고 입금을 못했으니까 제가 죄인이 틀림없네요.”
그의 말에 나는 얼떨떨했다. 그는 사실 전부 선의였다. 힘들다는 거래처 사람에게 수표 형태로 돈을 빌려준 셈이다. 만기일에 틀림없이 돈을 은행에 입금시키겠다는 말을 순박하게 믿었다. 그걸 알았더라면 그가 어떻게든지 돈을 구해서 입금했을 것이다. 고의로 부도가 날 수표를 발행한 게 아니었다. 그런데도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나서는 것이다. 더러 이런 사람이 있었다. 그가 말을 계속했다.
“하나님이 이런 식으로 저를 붙잡네요. 성경읽고 묵상하고 기도하라고 저를 감옥으로 보낸 것 같아요. 여기서 일요일이면 감방스피커를 통해 유명한 목사님들의 설교가 교대로 나오는데 정말 은혜받습니다.”
그가 세상을 받아들이는 태도였다. 그 며칠 후 수표를 받고 쌀을 판 사람이 그를 처벌하지 말아달라고 법원에 호소하는 진정서를 냈다. 쌀값도 받지 않겠다고 하면서 수표를 그에게 돌려주었다. 주심 판사가 내게 보석신청을 하라고 먼저 권유했다. 법원이 석방을 시키고 싶다는 의사표시였다. 보이지 않는 존재가 판사나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강하게 움직이는 것 같았다. 그 며칠 후 쌀가게 영감 부부가 나를 찾아왔다. 부인이 옆에 앉은 남편을 보면서 입을 열었다.
“면회갔다 올 때 영감을 차디찬 감옥에 두고 오자니까 가슴이 찢어졌어요. 제가 집에 와서 연탄불도 때지 않고 냉골에 무릎 꿇고 밤늦게까지 기도했죠. 영감을 살려달라구요.”
남편과 같이 고통을 느끼려고 그녀는 불을 때지 않은 것 같았다. 옆에 있던 영감이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감옥에서 저녁 먹고 성경 좀 보다가 찬 바닥에 누우려니까 늙어서 그런지 몸이 뻣뻣해지더라구요. 아이고 이제는 하나님이 내보내주시지 않을까 바라면서 담요를 깔고 누웠어요. 잠이 안오더라구요. 그러는데 쇠문이 철컹 열리면서 교도관이 짐싸들고 나오라는 거예요. 집에 가서 자래요.”
나는 쌀가게 영감에게서 작은 예수를 보는 것 같았다. 그는 자기를 속이고 수표를 가져간 사람에 대한 미움이나 원망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양보와 사랑으로 그를 괴롭힌 사람들의 영혼에 물결을 일으켜 회개의 마음을 일으키는 것 같았다. 그는 억울함에 저항하지 않고 섭리로 받아들였다. 감옥에 간 것은 그가 스스로 진 자기 십자가였다.
예수는 악에 대항하지 말라며 무저항주의를 말했다. 배신자를 미워하지 않았다. 적을 억압한 게 아니라 자신의 몸을 십자가 위에 올렸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지는 것이다. 완전히 적에게 양보하는 것이다. 적에게 우롱을 당하는 일이었다. 십자가는 치욕과 억울함의 표상이었다. 그런데 예수는 세상을 이겼다고 했다. 무기력 무능력이 아니라 죽을 용기까지 가지고 있으면서 져 준다는 것 그걸 의미하는 것 같았다. 완전한 승리는 하나님을 통해 하는 것일까 생각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