癡愚發蒙 章=치우발몽 장 ※ 이글을 作成한지가 近十餘年이 가까워오니 그동안 世態의 흐름이 많이 변하여 이글을 지을때와의 관점이 많이 틀려돌고 있고 또 잘못알고 있던 생각과 지식을 제대로 알고자하는 마당에 와 있으나 지난날의 미흡한 생각을 적어 그글들이 이제와서 사람되어 말하는 것처럼 하고 있으니 즉 글도 글같잖은 내용으로 되어 있으면서 한다는 말들이 우리를 왜 세상에 내놓아 빛을 보게하지 않느냐는 식으로 내 心相을 롭히고 있는 것이다 洛書와 같은 글을 찌들린 삶의 痛恨과 같은 心情을 吐露한 獨白에 말을 적은 것임에 지나지 않은 것을 또 외톨박이 서로 휩쓸리는 것을 꺼려해 용기가 없어서만 아니라 하는 행동과 생각이 민하게 여겨지게 보여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이용하지나 않을까 하는 피해의식이 앞서고 또 세상렇게 사람을 몰기를 잘한다 해서 어디로 가서 문을 두드려야할지 누구를 붙들고 심정에 있는 뜻을 내비치고 상담하고 타협점을 모색해야할지 모르는 그런 나이고 보니…. 한마디로 말해서 무능하고 게으른 내행동 뒤틀려 가는 내심사는 시아비 하길 즐겨 비판적 시각만 키우는 글을 짓게만 하였던 것이다 이미 벌써 불태워 없앴어야 마땅했었거늘 무슨 마음에 미련이 남아있다고 그냥 내버려두었더니 그에 빠져드는 집착은 십여星相을 두고 마음을 괴롭히고 있는 것이다。그래서 유치하고 덜된 내용이나마 이렇게 다시 적어보는 것이다 내 그 집착에서 떨치고 일어서면 되는데 워낙 골이깊었던 세파에 찌들린 한풀이 하는 것 같은 사연들이라 또 범은 가죽을 남긴다는데 하는 공명심은 그렇게 떨치질 못하게 하고 계속 질긴 끈 붙들고 늘어지듯 늘어지고 있는 것이다. 참(眞)은 없지만 말하려니까 참으로 진리라 하는 것이 (가련=가로안엔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았음 이제의 생각이 가련이란 말을 넣은 것이 적당할 것 갖다)코나 믿는자에게 코가 꿰인 소처럼 일하느라고 따라오느라고 허덕이니까 약속을 하듯 베푼다고 한 것은 지켜야 할일 저가 베푼다고 한 것은 제 차지가 되어 제게 돌아와 제가 짐을 져야하니까 허덕이면서 힘이들어 돌부리에 체이면서도 따라오지 못하면 진리는 거짓말장이가 될테니까 또 갚지 못할 利得을 취한 빗장이가 될테니까 무슨 이득을 취하였는가? 진리라 하여서 추종자를 긁어모은 利得이다) 왜? 능력이라는 것을 불신하는 것이 아니라 꼭 갚기엔 너무 벅찬듯 보이니까? 실제로도 데놈 배나온 도적같은 놈의 심보의 뜻일 수도 있다. 왜? 저를 풍요롭게 영화롭게 채우기 위해서이니까 그러니 진리神은 僞善的이요 가짜다 또 善이란 말씀이 可笑롭고 虛僞롭다 진리라 하는 것은 이 모두 허망하고 된 것이니 가련타 아니하리! 팔십팔년 9월四일로 마무리 되 있음. 지금 정리때는 九七年七月四日子丑時이다。 ○ 승패는 없다 진짜는 진짜를 갖고 유세하고 가짜는 가짜라고 유세한다 삿진리와 삿진리로다 하루는 같으나 그 內用이 조금 差異가 있을 뿐이다 ◎ 앞에서도 많이 거론했고 이 뒤로도 계속 연이어 擧論하겠지만 어떻게 하면 아무러크소니에 대한 적절한 표현이 될까?…。어떤이가 만일 스스로를 卵이라 自稱한다면 이 노란자위로써 흰자위를 우상의 대상체로 여겨 믿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자꾸「그것이다」추구하다보면 흰자위의 헛된게 幻影이 되어 이를테면 못에 비친 하늘의 뭉게구름과 거울속의 아름답게 내비치는 꽃그림과 같은 것 등 그가 뜻하는 여러가지가 몽매지간이라도 빠져나와「내가 그것이다 내가 그것이다」할지 모르리라 즉 마음에 은연중 동경해서 어느 한 곳에 갈무려져 있던 것들이 그 바라고 동경하는 形을 이루어 내가 그것이다 할것이다.그러나 아무러크소니는 이것이 아니다。아무러크소니는 卵이란 實體를 경우에 따라서는 탈로 쓸런지 모르나 그 다양性面을 볼때 어느 한 것의 특이한 탈만을 쓰지 않는다 즉 아무러크소니는 우상숭배나 신앙의 대상體도아니요 어떠한 목적과 취지등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다 또 그런것이라한들 무슨 병폐 있으려만은 하지만 그아니다 아무러크소니는 그냥 아무러크소니 (의之 행)인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러크소니는 그 卵을 만들었다고도 하지 않고 또 만들었지도 않고 협조자나 도움을 줬다고도 하지 않고 寃과 恨을 갖고 있지도 않고 내꺼로 하고자도 않고 부리고자 쓰고자 먹고자도 않나니 . 슬기로운 체하는 어리석은 노란자위와 흰자위가 서로가 으르렁거릴뿐이다。그러니 우리 모두 그 속에 빠져 나온자 몇이나 되어 그 아니 불쌍코 가련타 아니하리! 진리를 주장하는 것이 아무러크소니의 立長에서, 볼땐 이 모두가 삿된 것이니 어찌 삿된 진리요 그 삿實體의 形狀이 아니라 하리 이러한 삿진리와 이 서로가 서로를 물고 겸쟁(※ 말하자면 계란、돌、사람、짐승、요괴、신령、잡귀 잡동산이 오내지 육감 외의 外形으로 나타나지 않는 무감 無相등등) 하여 자웅을 겨루고자 하는 것이다. 서로들 말씀만은 행동만은 실체형상 속내용만은 하는 것들을 그럴듯하게 포장(우리는 실제에는 그렇치 않다 또 그런 것 이런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좋은 리상을 추구하는 여러가지 形과 行이다 등등) 해가지곤 말이다。 고를 脫破 무수개념에 들면 아무러크소니에 가까우리라 여러行態를 개의치 말 것이다.또 삿된 진리라 하는 것을 바르고 옳은 진리라 한들 무슨 상관 있으리! 아무러크소니는 아무래도이다。도시 보는 관점을 이에다 저에다 뒀다 않뒀다 할뿐인 것이다. 마치 바람에 나부끼는 갈대처럼 순풍일때는 이리로 역풍일땐 저리로 휘는 것처럼 말이다。사람이 별것 아닌 것을 갖고도 비위를 건드리면 어깃장을 놓듯이 우격다짐 않을 것도 계속 반론의 비판을 펴는 것처럼 말이다。열을 올리고 속을 상하게 하면 순응할 것도 하지 않고 샛길로 가고자한다。잘하는데도 노파심에 의해 충고하면 하기 싫은 것처럼 늙은 소가 밭을 잘가는데 농부가 소귀에 경을 읽다못해 고삐를 후려치니 더 잘한다는게 들구튀던가 옆으로 달아날 밖에 더 있겠는가? 미련한 농부 그러다가 쟁기망가지면 소만 탓한다 삿된 것이라고 나무라지 않고 진리라고 헐뜯지 않고 그것이 아니라고 서로가 서로를 心手삿대질 하며 우기지 않으면 무슨 상관 있으리 그저 아무러크소니니라 기실은 이글을 쓰는 이가 무엇을 어디다 어떻게 할 줄 몰라 답답하고 꽉 막힌 마음에 그렇게 남을 헐뜯는 內用을 갖고 (제못난 주제는 파악 못하고 자기를 어떻게 좀、내보일려하는 어리석은 행위를 필로 옮기고 있음인 것이다. 無言의 고(罟)脫破를 할려함에도 방해가 있음은 無言聲이 울려나가 듣는 자가 있어 훼방하나니 이는 아무리크소니가 방해함이 아니라 아무러크소니(그 허심탄회한 마음을 뚫고나가 또는 空을 뚫고 나아가는 것을 그 아무개의 行이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를 뚫고나가 닿히는 저 공간쪽의 훼방이니 호사다마에 마 노릇을 하려는 것은 듣는 이를 내려깎으려(卑下)하려는 연유와 그 듣는이가 자기보다 더 높이 올라설려는 것을 시련 시험이란 명분으로 시샘하고 있음에서 비롯된 것이거나 아니면 더 열심히 잘하라는 독려 역할을 한다는 것이 그렇게 나타난다 할 것이니 그 듣는이가 하나란 뜻만이 아니요 전체 또는 개중일 수도 있다。듣는이라하여 사람만을 지칭하느 것은 아니다 무슨 일에 열중하여 한창 정신을 쏟고 있는데 누가 찾는다던가 전화가 온다던가 부득이한 일이 터진다 귀객이 온다는 등등으로 그 흐름가락을 끊어놓는 것은 삿된 끝이 저를 궁지로 몰아세우는 것을 막아내기 위해 또는 가만히 있는 나를 왜 찾느냐는 식으로 저를 부름으로 여겨 예쁘게 단장하고 찾아오는 것이다 즉, 아무리 내게 도전해도 나만 못하지 하고선 말이다。동화에 나오는 이야기 처럼°거울아 거울아 누가 예쁘니 하면 :백설공주가: 하는 듯이 말이다 (※ 여기까진 八八八二四日前일 것이다。그 중간에 또다른 이와 관련없는 내용이 적혀있고 八八八二四로 되 있다) 그렇치 백설공주가 예쁘지 說하는 이가 예쁜가? 說(탈=說은 脫通) 하는 이가 예쁘면 백설공주이지 說하는 이 이겠는가? 하다못해 등에 벌레가 기어가는 것으로도 가락을 끊고자 한다。그가 곧 삿진리이나 예쁜 걸 어떻게 하나 그리고 시공섭리를 만들었다 함인 것일:。(※ 後에 깨우침 받았지만 眞理는 一切의 法相을 가르키다는 것을 釋氏는 가르키고 있다) ※분잡한 것을 가즈런히 정리해 놓치 않고선 무슨 일을 집중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八八八二七로 되있는 것을 丁丑年 陰六月一日子丑時에 정리하다 ○ 공간이 줄에 메여 있어 때때로 그 일을 막고 못하게 하는 수도 있으나 나머지가 잘 풀리는 것은 순풍에 돛단듯이 하는 것은 사람의 머리가 잘 풀리는 것은 자극 받지 않고 원래 그런 것이거니 하고 그 막히는 것만 탓하고 있기 때문이다。 空時는 理氣 神鬼 宇宙 復號 일뿐이다。八八八二四ㆍ 해(太陽)가 世造가 아니라 구름이 이 창조주이니(※ 지금 정리때 와서 생각할제 이모다 어리석은 생각에 의한 落書와 같은 글들 뿐이다) ◎ 異性과 禁忌 사람이 異性에 의한 지혜가 있다는 것은 뭣인가 대하여 순응하는 마음을 갖고 있지 않음에서 왔다할 것이다.즉、거부 저항 반항 부정 하는 마음에서 그반대를 어떻게하면 제압할까 하는데서 명분과 合理性을 띈 책략이 형성되고 그러한 가운데 지혜란 것을 머리에서 울궈짜듯 하는 것이다.徒時 슬기란 것이 자기를 에워싼 모든 공격체들로부터 대항코자하는 순순히 따라줘 먹이가 되지 않겠다는 본능적인 성질에서 왔다는 것을 왜 모르나? 이런 것을 다른 척도에서 재어볼때 리성에 의한 지혜라 표현하는 것이다。사람은 리성이 있음으로 사리를 분간할 줄 알며 오욕칠정속의 愛憎을 일으키기도 하나 또한 스스로를 제어할 줄도 안다하나 이 또한 큰 힘에 눌림 당해 어쩔 수 없이 질서라는 것을 지키는 것이지 보기에 광란의 짓같은 힘의 분출같은 폭팔성面을 언제나 누구던지 끌어안고 있으며 그 분출할 기회나 장소를 항상 엿보고 있다. 할 것이다. 흑자가 말하길 이말이 알쏭달쏭한 내용이다. 할런지 모르나 실제에 있어서 한번 자기성찰을 해 볼 것이다. 그러면 실증적 증명이 있다. 할 것이다. 글을 쓰다보니 말하고자하는 요지가 다른 곳으로 흐른 것 같다。아무튼 다른 것들은 모두가다 時空 논리에 순종하였나니라 한다면 이렇게 말하는 것이 또한 앞내용과의 문맥이 이어지질 않고 헛된 뜻이 되어 모순 투성이라 할 것이다 또한 아무튼 아무러크소니는 세상 만들어졌다는 섭리說을 믿지 않아 말씀코자 아니하나 꽃과 나비는 그 말씀에 순종하였나니라。이렇게 하여도 또 문맥이 뒤틀려져서 이어지질 않아 말이 제대로 흐르지 않는 것이 되었다。중간에 草案에 없던 말을 넣어 잘 윤색 칠한다는 것이 그만 말하고자하는 요지는 어데로 도망가고 엉뚱한 내용으로 변질되 버린 것이다.그러니 나무가 휘어도 보통 흰 것이 아니라 아무리 먹줄을 튕겨도 발쿼지지 않게 되었다.그래서 나무재목을 뚝끊어 치우듯 하고 꽃과 나비는 섭리에 순종하였나니라를 머리로 하여 써내려 갈까 한다. 이렇게 쉽게 가르켜줘도 알지못하면 정말로 사람일뿐이로다(단순한 껍데기 역할만 하는 사람) 그 이성이라는 것이 사탄이요 魔頭인 것을 왜 모르나 거꾸로 검산해 볼 때 어쩌면 그만 들었다는자가 그렇게도 어리석은고…。 대항 저항 반항 불굴하는 (自存) 성질로 구성시켜놓곤 내가 만들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실제에 있어선 만들은 것이 아니라 오는길 역할을 한 것 뿐인데 도리혀 오는 자가 그 以前에 오기 위하여 길을 만들었을 뿐인 것이다.이것은 저- 뒤에 나오는 內用의 일부이다) 절대 순응 하라 하는 것은 어딘가가 앞뒤가 맞지 않는 모순이라 할 것이다。이것은 순전 자기만이라는 독선 아집 같은 그런데서 오는 것이라 할 것이다。어떠한 피조체이던간 그 뜻 本然의 幻身이니 그 格을 존중치 않곤 만들음 자체를 만들은 자 스스로가 스스로를 격멸하는 것이니 그러한 격멸하는 행위는 스스로가 완만치 못한 부덕한 소치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내보이고 있는 것이라 할 것이다 사탄과 마두는 길을 나란히 하는 저쪽에 行하는 철로의 궤도와 같고 짝하는 바퀴와 같다 할 것이다。어떻 게 이겨 볼려고 기승을 부리는 것은 궤도를 똑같은 길이를 만들어 物事 열차를 쉼없이 운행시키고자 하는 것과 같음인 것이다。무엇을 만들었다 하는 자는 대항체에 대하여 여지껏 한번도 이겨보지 못했다。하늘 창조자라 하는 것이 있다면 그는 홀로 行치 못함을 두려워 하는자 그래서 반항성의 대항체를 만들었을 것이니 왜? 막막한 곳을 외롭지 않게 동반하기 위해서 일것이다.또한 만약 이겼다한다면 物事열차는 길이와 폭을 달리하는 궤도로 인하여 이탈전복되어 이미 벌써 적멸의 경지에 들었을 것이다。이런 것을 본다면 그 世造라하는 귀신의 어리석음과 오만함과 如他를 무시함은 어디다데고 비길 바 없다 할 것이다。(※ 만약상 世造가 있다면 귀신이라해서 卑下될리 만무하다) 허허한 아무러크소니가 볼때 가소롭기 그지없는 것이니 그러고선 나는 만들은 자니 순종하라 한다면 순종할 것인가? 어린애 어거지 떼쓰듯해서 뜻대로 되질 않아 恨만 쌓이고 악만 쓰는 것으로 보일 뿐인 것이다。순종치 않을 걸 알고 순종치 않을 슬기를 집어넣고 순종하라하니 순종치 않을 수 밖에 더 있는가? 그러곤 순종하라 억지인가? 아예 식물인간처럼 모든걸 만들고 하나 둘을 가르키는게 낳지? 애초에 이성이란 지혜의 성분을 집어넣지 않았다면 슬기의 家門을 세우지 않았다면 이성이란 슬기가 저쪽어디엔가 있어 유혹하는 꽃이 되었을리 모를 일이다(허나 그렇치 못한 것이 지금의 人性成態인 것이다)또、赤子가 毒인지 불인지 알게 뭔가? 막 끄러잡다 뜨거우면 울고 그것이 불인줄 차차 알고 아프면 그것이 毒인줄 머리에다 차차로 새길래기지…。그래서 世造섭리라 하는것에 순종한 목석금수는 (내 알 수 없는 것이니) 그 뜻대로이고 이성이들은 인간등등은 뜻대로 되는 것이 더러 일 수 밖에 더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八八八二五 말라는 禁忌事項은 格言과 같은 內用을 갖고 명령적인 語투를 취하여 말하는 것이라 할 것이다. 이러한 「말라「라는 말은 부정적인 것을 강조하는 말로써 즉「순종치 말라! 거스려라」의 뜻을 가르킨다 할 것이다. 마음은 일등을 하고자 하나 머리와 손발의 행동이 맞질않아 항상 어긋나는 듯하여 끝에서 빙빙 돌음은 이「말라「에서 비롯됨인 것이니 순종치 말라 하여놓곤 순종하라 하면은 순종할 것인가? 禁忌의 否定的인 視覺을 만들어논 것이「말라「이며 이것이 곧 異性의 터전이며 지혜의 샘이며 거스림의 源泉이 됨인 것이다。그…。어리석은 지고…。뜻을 거스리는 개중의 하나둘만 칭하는 꽃(=앞서의 꽃과 나비는 순종하였다에서 꽃인지 아님 뜻을 거스리는 개중의 하나들만 칭하는 꼴…인지 오래되서 확실치 않다워낙 글씨체가 휘갈긴체라서 자신이 알아보기도 힘들 정도의 글씨체들이다) 들을 취하다니 따지고 보면 순종한다는 것은 반대의 반대가 되어 뜻을 거스린 것을 취한 것이 됨인것이다. 순종치 말라하여서 순종치 마는 것으로 뜻을 따른 것들은 모두 버려 치우고 異性에 의한 異端으로 몰아붙치고 몰아붙쳐 그 異端이 되어 끝없는 고뇌속에서 헤쳐나오려고 허우적거리고 있는 것처럼 하게하곤 즉 그것이 누가시킴이 아님이요 저마다가 그렇게하게 말이다(또、말흐름이 순조롭지 못하여 모순투성이인 것 같다) 八八八二六。슬기가 있는데 왜! 꼴지를 하나! 하곤 또 머리에서 의문을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말라라는 부정의식性面은 감히 그가 만들지 못했을던지 모를 일이다。그리곤 항상 두려움속에 있어「가까히 말라!「했을 거이니 부정적인 시각을 만든다는 것은 긍정적인 시각을 만드는 것보다 매우 高次元的이라 할까 차원을 달리한다고나 할까 한 것이니 어리석게 마흔여덟 無動을 튀게하는 것처럼하여를 얽어메는 듯한 재주를 갖곤 도저히 불가능한 일일런지도 모르리라 그러면 말라는 누구에 의함인가? 그렇다고 아무러크소니가 하찮은「말라「를 하겠다고 변신하였을리 만무할테고 말라는 따로 있다면 아마도 그 섭리를 만들은 자와 차원을 달리하는 것일 것이다。어떤 行事에 대하여 잘안되어서 변통의 꾀책을 짜내는 것이 이 슬기이다。이는 앞서서 계속논했듯이「말라「라는 부정적인 거에서부터 싹을 틔웠다할 것이다。슬기는 그 아무개의 만들음이 아닐 것이다。억측건데 그것을 다른 차원에서 형성되어와 있는 것일 것이며 그 아무개가 이성을 불어넣었다는 것은 영리한체하면서도 신념 고(罟)에 메인 어리석은 자들의 생각일 것이다. = ○ 「하지 말라」금기사항을 누가만들었는지 그만들음이 불찰일 수도 있다。시험의 명분 운운…한마디로 말해 가소롭기 그지없다。「말라「이것이 순종치 말라는 뜻이 아니고 뭔가? 대결하자는 악취미를 가졌음이니 徒是 높이 추앙할 건덕지가 없다할 것이다 미친듯이 짚쑤성이로 공을 만들어 나무가지에 메어달고 치고박고 차는 것 같도다 저가 먼저 집적거리고 공이오면「왜 와 거기있지」「하곤 또치고 또치고하는 것처럼 말이다。가만히 있는 공이 올리는 만무하다 그 집쩍거렸다는 것이 이상을 집어넣었다는 뜻이니 간단히 해설하긴 어려우나 꽃이니까 눈길을 주었겠지…。저를 만들고 제맘대로 못할 것인가? 이리하라하면 이리할 것이고 저리하라하면 저리할 것이고 순종치마라하면 순종치 않을 것이니 마치 그림자와 같을 것이다。이와 반론으로「말라「는 만들지 못한 것이니 반대 立長으로 몰은 것들이다 라고도 할 수 있다。뒤집혀 된 것처럼 보이는 저 검은 별처럼 말이다。그 말라는 슬기와 같은 것이 쌓여있는 곳이니 긍정적인 입장°만들음에서 볼 때 斜視的인 것 倒視的인 것들일 것이다。무엇을 저가 만들었다는 것은 나만이 이것을 잘 판단하고 잘 만들 수 있다는 그런 독단적이고 독선적인 面을 갖고 있다는 뜻이요그 주된 목적과 취지를 갖고 있음을 가르킴이요 또 그 질서와 위계를 세운 것을 뜻함이라 그러므로 不容恕 즉 달리를 헤아릴 수 없게한 경직된 것일 뿐인 것이다。이반면 만들지 않았다는、 만들지 못했다는 그렇게 만들수 없다는、뜻의「말라「는 융통이다 즉 융통의 길이요 그 門을 여럿이 열어논 것임인 것이다. 말라의 길은 그 數를 헤아릴 수 없고 그 門 또한 셀 수 없다 지혜의 쌓임은 어느 것을 택하던간 융변통의 논리가 成立된다.그러므로써 이 또한 (선택의 여지가 많음으로써 그래서 한가지의 가견을 이룰 수 있는 길이 있음으로) 아무러크소니는 아닌 것이다。비뚤어진 시각을 갖고 있다 할지 모르나 그 비뚤어진 시각도 또한 그 아무개가 아니요 그 비뚤어진 시각이라고 지칭하는 것도 더더욱 아무개가 아니다(※ 이것이 정신분열증 있는 자의 분열을 일으키는 광적인 洛書와 같으나 사람의 마음에서 奸끼를 빼고나면 아무것도 없다。이것은 세상을 창조했다는 입장에서 본 보편성 원칙 대부분 그렇게 인식하게 시리 쇠뇌되 있음 더욱이 西來 사상과 문명 문물이 도래한 以後로 부터는 그 자극시키는 강도가 높아져 영향이 더 커졌다 할 것임 이러한 未達한 관점에서 이글을 立案 한 것임으로 정리때와의 관점과 많은 차이점이 있다할 것이다. 또 앞으로도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관점과 관념은 자꾸만 달리 돌아간다 할 것이다。마치 나선형의 살아있는 움직임을 뜻하는 것처럼…)九七七七 子丑時 ※ 本能的인 習性 行爲가 異性을 生成하는 것이다。 ◎ 아무러크소니를 보려고 알려고 만약 어디를 가고자한다면 아무러크소니가 이렇게 깨닭게 할다。나를 보려거든 번화한 곳으로 가라 거기가면 나의 幻身을 보리니 이는 저는 하여 가르키는 것은 있기가 편편치 못한자리라서 반석과 같은 자리를 찾아서 내가 앉아 있나니라 왜냐하면 나는 物象이 있것에만 빠지지 않고 事行에서 유희하듯 살아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또 고요한 곳에서 무엇을 얻겠다. 갈구하는 그러한 것에서도 나는 늘상 빠짐없이 있나니라。 찰라에도 삼라는 하염없이 유동하므로 내 아니없을 수 없나니라할 것이다。(※ 이것이 그 아무개의 글형식과 뜻을 환태하거나 흉내내는게 아닌가하는 생각을 계속 떨쳐 버릴 수 없다 만약 그렇담 새로운 것은 영원히 없다는 뜻이고 그 아무개들이 환신하여 나를 현재 제압하고 지배하고 있다는 뜻이 될 것이다) 다시 앞머리 중간쯤의 말로 되돌아가서 이는 저는 하여 가르키는 것은 내 그에 있음을 말한 것 같으나 이는 거짓된 나의 허상일 뿐이니 왜냐하면 나를 주지시키고 깨닫게 하는 것은 내가 아니기 때문이다。즉、깨닫게 하는 것엔 내가 아니다 왜냐? 깨닫게 했음으로서니라 (成家의 見解는 삿된 것으로 나아가므로 내가 아니란 뜻) 徒是「내가」하는 나라는거와 본다는 거와 깨닫게 한다는 것이 그 아무것도 아니라 했는데 격상의 높낮이를 논할 것 없이 이 아무러크소니도 아닌 것이다。즉 아무러크소니가 아니나니라。앞서두에 어디란 장소적인 뜻을 말하였는데 그 어디를 지칭하는 것은 무슨 象界나 世界만을 뜻하는 것만이 아니라 行覺의 停處에 비중을 둔 것이라 할 것이다。또 數多界라 한들 무슨 상관 있으랴? 아무렴하는 아무러크소니이기 때문에 아무런 상관을 이렇쿵 저러쿵 할게 없다 할 것이다。계속 엎치락 뒤치락 하는 것 같으나 그 깨닫는 停處의 覺이 소리로 깨닫던 냄새로 깨닫던 어떠한 감으로 깨닫던간에 그 깨닫는 정처의 각의 뜻에는 아무런변화가 없는 것이다。말을 함에 있어서 모순을 배제할 수 없지만 철저하게 모순을 배제한다는 것이 또한 가소롭잖은가? 그렇게되면 아무러크소니인가? 아무러크소니가 아니고 진리의 家見을 이룬 것이 되지…。모순을 배제한다는 것이 한쪽으로 치우친 하나의 줏대를 세우는 것이니 편벽되어 삿된 진리라 할 수 밖에 더 있을 것인가? ○ 설사 이 말씀을 設하는 이를 억만년의 무쇠옥에 가둔다하더라도 아무러크소니의 논리를 면박하고 破하지 못하리라 (또 破한들이다…。왜? 아무러크소니이니까?) 또한 아무러크소니의 논리를 設하는 이를 꼬챙이로 후벼파듯 심금을 울려 격하시키고 능욕을 보인다하더라도 아무러크소니의 말씀논리를 어찌하지 못하리라 왜? 設하는 이가 아무리크소니가 아니기 때문이다(또 어찌한들이다…。모순과 반론과 그에 의한 미련의 여운을 채우기 위한 공백을 남겨두기 위해서라지만 한쪽으로 몰아서 눌러논 것들이 계속 들썩거리며 뚫고 올라서서 숨통을 트고 살아볼려고 하는 行態이다.그러나 야속하고 야멸찬 행동이지만 그냥 죽으라고 꽉눌러 재킬뿐이다) 삿된진리가「너가 그렇게 잘 알면」하고 삿된 것을 갖고 說하는 이를 시험하는데 이것이 아무러크소니를 시험함이 아니라 곧 삿진리가 삿진리를 시험하고 있는 것임인 것이다. 왜! 說하는이의 정신과 생각과 그에 의한 想想이 이 아무러크소니가 아니기 때문이다。삿진리가 아무리크소니를 시험할래야 시험치 못하나니라 즉、시험할 차원에 다달아 있지 못하나니라 說하는 이가 능욕을 보인 진리에게 너그럽게 용서하는 바를 그 아무것이와 또 아무리크소니와 똑같이 아니 아무러크소니처럼 해 갖곤 禮拜한다 하더라도 僞善의 階梯가 아니라 겸양의 미덕을 갖춰 그런 모습을 利用 說하는이가 그보다 크고자하는 얇은 어느방면에선 심도 있는) 책략에 지나지 않는 것이 됨일진데…。設하는이가 이러하고자 않을진데 하물며 아무러크소니가 그러하랴? (또 그러한들이다) 이러므로 삿진리가 아무러크소니를 시험할 차원에 있지 못하나니라 또한 아무리 하여도 아무러크소니의 位에 서질못하나니라。그러므로 아무러크소니位엔 아무도 없고 아무것도 없고 아무것도 아니고 삿된진리가 흉내를 낼래야 찾질 못하나니라 (「狂者」하곤 또 시험함이로다…각자 아무렇게나 생각해라 풀으라 이다) 아무러크소니가 삿진리의 정신과 생각에 줄을 곡예사처럼 타고 삿진리를 役事시킨다기보다 琴위의 선률처럼 흐르고 있도다. 범이 제잡힐 덫을 스스로 놓겠는가? 行하다보면 사람이 논덫이 제가 논덫처럼 되어 걸릴래기지 그는 왜그런가? 足跡을 남기거나 빠져나가기 어려운 험로를 통과하는 표식을 남김으로서니라。 이처럼 삿진리가 제잡힐 덫을 놓치않아 아무러크소니가 될 수 없으나 또 또다른 삿진리가 있어 투망을 펴대 놓아줄 고기라면 투망을 베풀리가 있겠는가? 일시로는 부득이한 영향力을 받아 방생할지 몰라도 언젠가는 다시 그물을 펴기를 벼르는 것처럼 진리가 그 삿진리라는 것을 깨트리기 전에는 아무러크소니가 되질 못하리라(※ 行하다 보면 아무러크소니가 되고 계속 行하다보면 원위치로 가까이 오는듯 되돌림의 축적이 이루어져 覺相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문맥이 서로들 통치않는 것 같으나 읽고 새기는 자가 문맥을 좀통하게 해볼것이니라 필자의 필력이 모자라서 뜻은 있어 서두는 꺼냈으나 휘감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이 곳곳에서 나타나 동문서답처럼 서로가 이완되어 딴말을 하고 있는 것처럼 되어 감인것이다 이쪽엔 해가 나는데 저쪽엔 소낙비오는 것처럼 한 구름장이 이런저런 재주를 한꺼번에 피운다하는 것이 적절한 표현일런지 알 수 없다。혹이 말하길 主說은 얼마안되고 왠 客說이 그렇게 많아 가리키는 뜻 흐리게하는게 구정물 같구나 할런지도 알 수 없다. 「깨트리기前에는 아무러크소니가 되길 못하리라」에서 혹이 또 울컥 내지르듯 내밀고 반론을 제기하길 「아니! 될 수 있다」하였다。반론을 이렇게 저렇게 꾸며서 데어볼 것이다。필자는 이제 필력도 모자르고 진력이 나서 그만둘까한다。윤색칠 한 것도 그 노릇을 할 수 있으나 牛毛歲月에 모진 풍상을 겪다보면 본색이 드러나고 드러나서 다시 칠하여야 하나 돌부처는 깍이고 깎여도 그 형체를 알아볼 수 없더라도 돌이나니라 그돌이 다하여 티끌될지라도 돌의 성분엔 변함이 없으리라 티끌이란 명분과 뜻이 이 풀어지지 않은 고(罟)이나니라. 즉, 성분을 갖고 있는 以上 깨트려버리지 않는 이상 그는 그지 이것이 아닌 것이다。본색이 험한 탈색을 쓰기도 하고 험한 본색이 좋은 탈색을 쓰기도 하니 그 뜻 흐름에 따라 아무렇케 나니라.八八八二七前 이라 적혀 있다. 否定은 또 否定을 낳고 그 子는 또 그 子를 낳는다。물론 긍정도 마찬가지일테지만…이따금씩 잘行하는 수레에 돌이 채여 삐끄덕 거림이 좀 있을 것이지만 아무러크소니가 이 삿된 것이라 한들 무슨 상관 있으리 그냥 아무러크소니나니라。八八八二八 (이것은 하루의 시간이란게 흘러서 그진리인 것처럼 생각됐던 조임 나사가 좀 풀어졌다는 뜻이겠다) 또한 說하는 이가 辱될 것도 없으니 삿된 걸 삿되다 하였음에 욕된 쪽으로 생각이 짚힘은 삿된진리의 일편이 그렇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八八八三一 또 시간이란게 흘러 먹었던 생각(그렇게 봤던 관점)이 풀어졌다는 뜻이다. ◎ 心性覺은 삿相(진리)의 유희場이다。大凡한 생각 너그러운 마음이라도 진리라하는 것에게 놀이터를 제공한 것이요 옹졸하고 편벽되어도 또한 그렇다 진리가 의지해 터할 곳을 성깔이란 것을 부려 부정하듯 파괴하면 그 유희의 작난이 없어질지 모르리라。그 성깔과 성깔이라는 것이 의지한 것도 때려부셔 버려라°그러면 삿진리의 胎動이 없어지리라 그러나 이래도 저래도 놀아난 감을 떨쳐버릴 수 없다면 출로 없는 迷路에서 헤메는 것이니 실력없음을 자인하는 육손이처럼 풀길을 얻지 못해 눌러 잡는듯한 막연한 窮道에 있음을 해 볼도리 없다 할 것이다. 여하한 處地라도 自他를 裕餘하게 收用할 줄 아는 자세가 되어있는 자는 즉、자신의 단점을 인정 성찰반성하고 그 단점을 잘 보완하고 남의 實力을 收用할 줄 아는 자세가 되어 있는자는 大人(참사람)의 틀을 가진자라°여럿의 사표가 된다할 것이다。즉 이와같은 자세로 모든 것에 임하라는 뜻이다。다음 나오는 말씀이 또한 이와 일맥상통하는 점 있을지 모른다。몸이 아파서 병균을 죽여 없애렴(즉 病鬼를 解寃시키렴) 약 값이 아까우나 약을 사먹을 수 밖에 해볼도리 있겠는가? 병균이 가진 하나의 生命體로 태동하여 저行이 寃行인줄 잘 몰를지 모르나 時線에 의한 공간이 얽힌 것이니 들어줘 풀어줄 수 밖에…。運勢라는 것이 뜻을 이기니 해 볼도리 없어 그 운세를 없앨 삿진리의 집(그렇게 보는 관점이나 관념相)을 때려부숴야 할 것인데 때려부숴 치우고 나면 역시 때려 부신행동 그것자체가 운세였다。할 것이다。저기의 病되다하는 것이 여기의 살뼈가 되고 록이 되는 것이 있는 것을 또 그 밖에 많은 것이 되는 것을 왜 모를까만은 그것이 그된 유세를 하니 그 유세를 하는 꼬락서니하곤 더럽다 아니할 것인가? 떨어놓고 갈적마다 원풀이 한마당으로 고롭게함이로다 그것만이 아닌 자의 권능이 바로 이런 것들이니 무슨 환영할게 그렇게 많을 까만은 오는 빈객을 막지 않는다는 옛철인 말씀과 같이 받아서 좋게 여러가지로 應用함이로다 그러므로써 삿진리들이 시험의 명분으로 제 풀길을 얻으려고 모두 모이니 떼고 떼내어 걸인의 행색처럼 해놓고 온갖 혐오감이 드는 것을 속속들이 베게하고 뒤집어 쓰게함인 것이다。그러나 아무러크소니를 그렇게 못하곤 엉뚱하게도 그 說하는 이에게 그렇게 함이니 아주 잡아먹어치우려 하는 것이다。그래서 조금이라도 남는 쭉정이라도 있다면 바람을 타고 신선이 되어 저멀리 정처없는 극락행을 하게하고 있는 것이다。그러면 저 화려함은 축복하는 한물벗은 원풀이들인가? 아님 갖은 능력이란 탈을 쓴 자들의 宴會인가? 의구심이 또 제기된다 할 것이다。능력은 무슨능력 業報란 것을 등에 업은 부여된 결정된 운명의 한마당이겠지…。모다 이 부질없는 하찮은 性覺의 작은 因果이니, 무엇을 이렇다 저렇다 물고 늘어질것 있으랴? 그 아무것이를 찾고자 하나 찾을 길이 없고 아무러크소니를 여기 서도 그 보고자하나 없으니 어디가서 찾아 볼까나?(※ 九七七八 정리) 神에 대한 조건을 걸음과 그 대처방안 및 마음의 자세등등…. 혹이(누가) 신령과 귀신과 나아가선 하늘과 땅과 그 밖에 삿진리 등등을 부리는 方法을 묻는다면 그렇게해서 實利를 추구키를 원한다면 주제넘지만 삿진리의 답변이 이러할지 모르리라。즉「너가 겸손하여라!」할 것이다。또는「정성스레 들어 모시는 것이 조건을 거는 것이되어 너의 뜻대로 될 것이니 그렇게 하여라!」할 것이다。성의만 통하면 감응이 있을 것이니 어느길을 택하던 간 열중하여 집착과 신념을쏟으면 그願에 대한 영혼을 불어놓는 것처럼 되어 그들을 불러들이고 불러오는 것이 될 것이니 한번해볼것이다(※ 정리때의 생각。불확실성을 갖고 누구에게 무엇을 권한다는 것은 위험천만한 발상이라할 것이다) 즉 씨가되고 알알이 맺히는 것이 되어 원대로 이뤄질 것이다。어려운 것은 더러는 시련도 있으리라그러나 아무리크소니는 이러하지도 않고 그렇게 해도 오지 않으리라 앞서 말했듯이 아무러크소니는 어떠한 신앙의 偶像形을 짓지 않음으로 어떤 신앙의 대상체가 아니라 아무런 상관을 짓던 않짓던 하는 그 行이기 때문이다. - 그 방면에 대하여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체 하면은 그 아는 자가 희롱한다。육신에 딸린 정신의 고통을 해결하고 그 굶주림을 먹여살리기 위해 가련하게 메여 감겨 情에 유약한 뜻을 움직여 그 돌아보고돌아볼 것이다。어떤 표시를 하여놓고 내가 그것이다(그렇게 해야만 나인 줄 안다) 할 것이다 그러나 삿진리가 삿된 本然에 時空흐름가락을 내다본 것에 불과한 것이니 이 邪端일 뿐 그 아니나니라 또 그라한들무슨 상관 있으리。그 아무것이는 아무래도이다 (탈허물을 잡지 않는다는 뜻이겠지…) 이길을 택하던 저길을 택하던 가는자의 마음 뜻대로이다. 그래서 길을 잘들으라 한 말이 생겨났을 것이다. 世上이 시공으로 있음에 득실을 擧論하나 뭣이 得이 되고 뭣이 失이 될 것인가? 갈피를 못잡는 셈도 있다할 것이나 또 그(억측이나 추측 대상相)는 붙들어 쥐어 확실하게 밝혀보고자 하나 언제나 한발앞서 간다할 것이다.(※ 정리때의 생각 以上은 가까운 얼님 같으신 분들을 도리혀 귀찮게 하는 일이고 사탄의 꾀임에 넘어가는 論이다. 조건을 건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원숭이도 나무에 떨어질때가 있는 法 언젠가는 잘못을 보여 함정에 사로 잡혀 먹이가 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이쪽을 어떤 이유에선가 (제 원풀이 하겠다는 것이라던가 종을 삼겠다던가 등등) 시험 또는 利用하겠다는 상대방 삿된 끝의 영리하기가 그 무엇으로 따라 잡을수 없을 정도이니 이는 이쪽 생각相을 올라타고 있음으로 즉 명경처럼 훤히 들여다보고 있기 때문이다.그래서 제 있다는 것만을 알리고 그 조건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쪽이 걸려들 함정을 판다 할것이니 생활의 여건을 점점 여의롭지 못하게 하여 내가 이렇게까지 했는데 조건의 대접이 겨우 이 정도이냐 하는 식으로 분개하는 개강심을 일으키게 해서 벗어날 방도를 만드는 것이다。이것이 운명의 흐름을 쫓는다 할 것이나如何한 처지가 닥친다 하더라도 감내하고 항상 초연해야 한다할 것이다。또한 조건이라 하는 것은 군령장을 쓰는 거와 같아 어기면 엄한 문책이 있게 됨으로 함부로 조건을 걸지 말고 조건을 걸라고 원귀가 귀찮게 굴더라도 개의치말고 超然한 立長으로 있어야한다 할 것이다. 그러나 인연을 짓겠다고 애걸하는 相인데 운명의 흐름이 그렇게 닥치는데 그것을 거스리겠다고 모른체한다거나 한다면 그에서 벗어나겠다고 하는 것이 도리혀 초연치 못한 것인지도 모른다 할 것이다。 否定의 執着은 새로운 家見을 낳는다。그 것만이 아니다 라고 계속 고집하는 것은 새로운 편당의 家見을 이루어 도리혀 그것이 그것만이다로 변형하게 되는 것이다.그러므로 他의 理想과 그 行을 비판적 시각으로만 몰려하는 부정의 집착에서 생각을 뗄 것이다. 또한 그를 공략하고자하는 삿된 견해를 새로 갖고자 애쓰지 말것이다。규명이나 도전은 잘못하면 그릇된 시각 저만이라는 삿된 家見을 낳는 原因이 된다. 남에 이상을 거름삼아 자기를 내세우려하는 이론을 싹틔우고 꽃피우고자 하는 것은 참다운 人格者라고하질 못하리라 只今 이 말씀은 필자 자신을 잡고자 하는 덫을 놓는 말일 것이다.왜냐하면 필자는 여지껏 그러함을 취하였기 때문이다。이것을 갖다 自害殺筆이할지 모르겠다. 正을 말하고 또다시 邪를 들추는 것은 論理矛盾이다 그것이 正인 것을 새기기 위해 견주는 假象體를 定立해서 邪로 모는 것은 완전히 시아비타적 利己主義 논리이다。따라서 合一도 논리모순이요 共存도 논리모순이다 왜냐하면 그 反面을 생각케해서 헛상을 세우게하는 원인제공 역할을 한 것이 되게 되기 때문이다. ◎ 精神은 바로 보지 못하는 愚를 犯한다。 따라서 정신은 삿된 끝(邪端)의 始初相이며 末相이다。사람의 생각이 (그렇치 않을까하는 상상억측은 그런 것처럼 둔갑 착각을 일으킴) 人靈外에 갖가지 形象의 森羅의 靈을 삿된 끝으로 몰면 뭔가가 잘못된 견해에 의해 삿된 眞理相을 따르고 있음인 것이다。어떠한 신앙대상의 偶像神을 보고자 마음속에 계속 되뇌이면 삿된 진리의 靈이란게 갖은 슬기와 技巧로써 몽매지간이라도 願에 答이란걸 그럴듯하게 갖고 나와 나타나보이고 정신속에서도 그려지게 된다 할 것이다。이는 邪端을 낳는 異性體 生覺이 억측을 낳고 억측은 기정사실인 것처럼 신앙대상의 우상으로 化하여 나타나 보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또한 이는 슬기로운체 하면서도 어리석은 생각을 낳는 異性連覺인 精神의 얽힘 계통이 혼돈한 삿된 진리임으로써 그러함인 것이다。생각이 어디서 왔는가? 心性속에 無感 有感(五感乃至 六感)에서 왔다할 것이다. 感함이 없어도 또한 흐르는 정신이 그리는 想想 또한 생각인 것이다。말씀이 그림으로 그려지기도 한다。우상 神의 슬기와 기교는 정신次元의 지혜와 覺을 항상 간파하고 있어 어려운 문제에 답하듯 놀라고 탄복하게 하여 실제로 그런 것처럼 잡아메어 벗어나면 어떻게 될 것처럼 불안감을 조성하여 자신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對相의 偶像은 스스로에게서 그려지는 것이지 실제무엇이 있는게 아니다 즉 상상력에 그려진 헛상인 것이다。대상의 우상이란 것이 있어 보았다는 것이 이 삿된道에 떨어졌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물론 삿진리 相을 이루었더라도 그것을 편벽된 것으로만 몬다는 것은 正觀하는 자세가 아니라 할 것이다°(이 말씀은 차원을 달리해서 하는 論說이다。八八八。二空) 時空間은 鬼神解寃의 터전(基田)이다。物과 事는 寃鬼에게 시달리는 집(家)과 꺼리(件)이다 時間的인 리듬가락은 그의 원풀이 놀음이다. 弟子야! 하나란? 줏대를 내세우는 누리에서 (끊임없는 메아리로 쇠뇌시키듯하여 사로 잡음) 벗어날지어다. 어쩌면 그러한 時場所를 제공해 주는 것이 위대하다 할런지 모르지만 이! 다! 모든 것이 시달리는 苦海의 늪이나니라 이러한 생각조차 느낌 받친 原因조차 永 고이니 이마져도 깨트려져라。벗어져라! 하라 八八、二十一 二十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