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4452
12월28일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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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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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2DhTbYGscM8
[한국외방선교회 최정열 안드레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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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0.01 밀리미터씩 성장하는 그대!>
오늘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입니다. 세상 안에서 결혼생활을 꾸려가고 있는 모든 분들, 너나 할 것 없이 세상 안에서의 교회, 성가정(聖家庭)을 꿈꿉니다. 그러나 희망 사항과 현실 사이의 괴리감은 엄청나다는 것을 매일 온몸으로 체험하며 살아가고 계실 것입니다.
영원할 것 같았던 사랑이 초단기간에 허물어지는 것을 확인하며 절규합니다. 한때 목숨 바쳐 사랑했던 그였는데, 그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돌변하는 모습에 ‘사랑이 어떻게 변하냐?’고 외치며 울부짖습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았던 존재들, 내 분신이요 전부라고 여겼던 자녀들이 이제 머리가 커졌다고 한마디씩 툭툭 던지는데, 한 마디 한 마디가 비수처럼 심장을 찌릅니다.
성가정 건설!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무한한 인내와 너그러움이 필요합니다. 크게 한 걸음 뒤로 물러나는 여유가 요구됩니다. 인간적인 시각이 아니라 영적인 시각, 주님의 시각으로 바라보려는 태도가 중요합니다.
나자렛 성가정의 멤버들도 순탄한 길만 걷지 않았습니다. 워낙 특별한 가정, 워낙 베일에 싸여있는 신비스러운 가정, 영적인 가정이었기에,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하기 위해 더 많은 노력이 필요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율법 규정에 따라 아기 예수님을 예루살렘 성전으로 모시고 가서 봉헌하였습니다. 그때 성전에 있던 시메온 예언자는 아기 예수님을 팔에 안고 감사의 찬가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마리아를 향해 특별한 말 한마디를 건넵니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루카 2, 34-35)
성가정의 주요 구성원이셨던 마리아 역시 성가정을 꾸려가는 동안 수시로 영혼이 칼에 꿰찔렸습니다. 물론 행복했던 순간들도 많았을 것입니다. 성가정 안에서 천국 체험도 앞당겨 맛보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큰 상처와 희생, 각고의 노력과 헌신이 요구되었을 것입니다.
성가정 축일에 한 가지 진리를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상대방은 우리 눈에 띄지 않게 아주 천천히 성장합니다. 하루 0.01 밀리미터씩이나 성장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상대방이 하루에 1미터씩 성장하기를 기대합니다. 기대치가 크다 보니 당연히 실망도 상처도 커져만 갑니다.
나자렛 성가정 공동체 안에서 예수, 마리아, 요셉 성인께서 서로가 서로를 위해 가장 크게 노력한 덕은 인내의 덕이었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위해 늘 인내하면서, 늘 기도하면서, 늘 격려하면서, 절대로 들볶지 않고, 모질게 대하지 않으면서 그렇게 사랑의 공동체를 건설해나간 것입니다.
오늘 우리 모든 공동체 안에 부성애가 가득 담긴 바오로 사도의 권고가 기억되고 꾸준히 실현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형제 여러분, 하느님께 선택된 사람, 거룩한 사람, 사랑받는 사람답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동정과 호의와 겸손과 온유와 인내를 입으십시오. 누가 누구에게 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서로 참아주고 서로 용서해 주십시오.”(콜로 3, 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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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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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 가진 부모님들 필독: 사윗감 고를 때 '이것' 하나만 확인하세요>
찬미 예수님. 오늘은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입니다. 영국의 왕 헨리 8세는 본래 교황청으로부터 '신앙의 수호자(Defender of the Faith)'라는 칭호를 받을 만큼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습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신앙보다 더 거대한 집착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왕조의 보존'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가문을 잇기 위해서는 반드시 '아들'이 있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왕비였던 아라곤의 캐서린에게서 아들을 얻지 못하자, 그는 하느님의 법을 자신의 뜻에 맞게 고치기로 결심합니다. 교황청이 혼인 무효를 허락하지 않자, 그는 "내 가족과 왕조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교회의 법도 필요 없다"며 가톨릭교회와 결별하고 스스로 교회의 수장이 되어 이혼을 감행합니다. 그는 이것이 가문을 위한 가장 현실적이고 지혜로운 가장의 선택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 결과는 어땠을까요? 그가 그토록 지키고 싶어 했던 가정은 피바람 속에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첫 번째 아내 캐서린은 쫓겨나 외롭게 죽었고, 두 번째 아내 앤 불린은 아들을 낳지 못했다는 이유로 참수당했습니다.
그는 총 여섯 번이나 결혼했지만, 그 과정에서 아내들은 죽거나 버림받았습니다. 더 비극적인 것은 자녀들이었습니다. 딸 메리와 엘리자베스는 어머니가 처형되거나 쫓겨나는 것을 보며 공포 속에 자랐고, 훗날 서로의 종교를 탄압하며 '피의 메리(Bloody Mary)'라 불리는 살육의 역사를 썼습니다.
헨리 8세는 임종 순간, 자신이 세운 교회의 의식이 아니라 가톨릭 사제를 찾으며 두려움에 떨었다고 합니다. 그가 신앙을 버리면서까지 지키려 했던 튜더 왕조는 결국 엘리자베스 1세를 끝으로 대가 끊기며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가장이 하느님의 뜻(혼인의 신성함)을 버리고 인간적인 계산(아들 욕심)을 선택했을 때, 그 가정은 가장 화려한 왕궁에 살면서도 가장 비참한 지옥을 맛보아야 했습니다.
성경에도 이와 비슷한 인물이 있습니다. 지혜의 왕 솔로몬입니다. 그는 말년에 하느님의 보호하심보다 자신의 '외교술'을 더 믿었습니다. 이웃 나라의 침략을 막고 가족(왕실)의 안위를 지키기 위해, 그는 이방 공주들과 정략결혼을 하고 그들이 가져온 우상들을 위해 산당을 지어주었습니다. "가족을 평안하게 해 주어야 나라가 평안하다"는 인간적인 계산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진노하셨고, 그의 사후 나라는 남북으로 쪼개져 서로 칼을 겨누는 동족상잔의
비극이 시작되었습니다. 아버지가 들여온 우상이 자식들의 미래를 찢어놓은 것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삼위일체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사랑을 주는 이(Lover, 성부), 사랑을 받는 이(Beloved, 성자), 그리고 그들 사이의 사랑(Love, 성령)." 가정도 이 모델을 따릅니다. 남편은 아내에게 사랑(Love, 성령)을 주는 존재(Lover)이고, 아내는 그 사랑을 받아(Beloved) 순종하며, 그러면 그 삼위일체 사랑이 완성된 사이에서 새로운 생명(자녀)이 태어납니다. 그리고 엄마는 자녀와 또 이런 삼위일체 관계를 맺게 됩니다.
이것이 하느님이 설계하신 가정의 질서입니다. 아버지와 아드님의 성령을 통한 사랑 안에서 교회가 탄생한 것과 같고, 그렇게 탄생한 하느님의 자녀들이 교회와의 관계에서 선교를 통해 새로운 자녀를 탄생시키는 모습과 같습니다. 이 모델이 가정에도 적용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가장 중요한 비밀이 하나 있습니다.
아버지가 온전한 '사랑을 주는 이'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그 자신이 하느님께로부터 '사랑을 받는 이'가 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수도꼭지가 저수지와 연결되어 있지 않으면 물을 줄 수 없듯이, 아버지도 하느님께 연결되어 사랑을 공급받지 못하면, 가족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자기 욕심이나 강요뿐입니다.
자연계를 보면 이 원리가 더 명확해집니다. 아프리카의 군대개미는 눈이 퇴화하여 앞서가는 개미가 남긴 냄새(페로몬)만을 따라갑니다. 그런데 선두 개미가 길을 잃어 냄새를 놓치고 자기 꼬리를 따라 돌기 시작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뒤따르던 수만 마리의 개미 떼가 거대한 원을 그리며 뱅뱅 돌다가 집단으로 탈진해 죽습니다. 이를 '앤트 밀(Ant Mill, 죽음의 소용돌이)'이라고 합니다.
가장이 하느님이라는 영적 방향(냄새)을 놓치고, 자신의 꼬리(욕망이나 불안)를 물고 돌기 시작하면, 그를 믿고 따르던 온 가족이 출구 없는 미로에 갇혀 공멸하게 됩니다.
반면 철새들의 이동을 보십시오. 기러기 떼가 V자로 수만 킬로미터를 비행할 수 있는 것은, 맨 앞의 리더가 눈에 보이지 않는 지구의 '자기장'을 느끼며 날아가기 때문입니다. 리더가 자기 눈에 보이는 대로 날면 바다에 빠져 죽습니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힘(자기장)에 순종할 때 무리 전체가 목적지에 도착합니다. 가장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뜻(자기장)을 예민하게 감지하고 따르는 존재여야 합니다.
또한, 아버지는 가정의 '피뢰침'과도 같습니다. 피뢰침은 벼락이라는 거대한 에너지를 맞았을 때,
그것을 품고 있지 않고 땅으로 안전하게 흘려보내 건물을 보호합니다. 아버지가 기도하지 않으면,
세상의 시련과 스트레스라는 벼락을 맞았을 때 그것을 가족들에게 폭발시키게 됩니다. 하지만 기도하는 아버지는 그 고통을 하느님께로 흘려보내(Grounding) 가정을 안전하게 지킵니다.
오늘 복음의 성 요셉은 바로 이 '자기장을 읽는 아버지'이자 '가정의 피뢰침'이었습니다. 헤로데가 아기를 죽이려 할 때, 요셉은 꿈을 꿉니다.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라." 한밤중에 갓난아기를 데리고 말도 안 통하는 이집트로 가라니, 인간적인 상식으로는 무모하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요셉은 토를 달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상식보다 하느님의 꿈(계시)을 더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하느님의 뜻에 철저히 순종했기에, 아기 예수님과 성모님은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창세기의 노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늘은 맑고 비 한 방울 내리지 않는데, 노아는 산 꼭대기에서 거대한 배를 짓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미쳤다고 조롱했지만, 가족들은 아버지의 권위에 순종하여 배 짓는 일을 도왔습니다. 노아의 권위는 어디서 나왔습니까? 그가 맑은 하늘 너머에 있는 하느님의 경고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상식이 아니라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고 행동하는 아버지 덕분에 가족 모두가 구원받았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진정한 가장의 권위는 큰 목소리나 경제력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하느님 앞에 무릎 꿇는 그 모습에서 나옵니다. 성녀 소화 데레사도 어린 시절, 미사 중에 기도하는 아버지 루이 마르탱의 뒷모습을 보며 이렇게 적었습니다. "아빠가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성인들이 어떻게 기도하는지 알 수 있었다. 아빠의 얼굴에는 천국이 비치고 있었다."
데레사의 아버지는 훈계로 자녀를 가르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경외하는 그 '등'으로 가르쳤습니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자녀들에게는 가장 큰 안정감이요, 따라야 할 이정표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가정의 가장 여러분, 그리고 부모 여러분. 여러분의 기도는 단순히 개인의 신심 행위가 아닙니다. 그것은 '군대개미의 죽음'을 막고, '기러기의 비행'을 가능하게 하는 생존의 문제입니다. 가장의 기도는 가정이라는 배의 키를 잡는 행위입니다.
여러분이 딸이 있고 딸을 시집보내려고 할 때, 그 사위가 될 사람을 잘 살펴보십시오. 그가 자기 뜻대로 가정을 이끌 것인지, 아니면 하늘의 뜻을 찾는 기도하는 사람인지. 그것에 따라 딸과 손주들의 운명이 결정됩니다. 물론 딸도 그 권위에 순종하여 생명을 낳는 지혜로운 여인으로 키워야 합니다.
오늘 성가정 축일을 맞아, 우리 모두가 내 뜻이 아닌 하느님의 뜻을 묻고 듣는 '요셉 같은 가장', '요셉 같은 신앙인'이 되기를 청합시다. 하느님께 무릎 꿇는 아버지라야 가족을 일으켜 세울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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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오늘은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이며, 가정 성화 주간을 맞아 우리가 잃어버린 것, 그리고 다시 찾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함께 묵상하고자 합니다. 예전에 읽었던 글이 떠오릅니다. 한 대기업 간부가 멕시코의 작은 어촌으로 여행을 갔습니다. 그는 바다에 잠깐 나갔다가 시간을 가족과 웃으며 보내는 어부를 보며 이렇게 조언했습니다. “조금만 더 열심히 일하면 돈을 더 벌고, 배를 더 사고, 결국 나처럼 좋은 휴가를 올 수 있습니다.” 그러자 어부는 잔잔하게 대답했습니다. “저는 이미 매일 가족과 휴가 같은 삶을 살고 있는데, 왜 가족과의 시간을 포기해야 합니까?” 간부는 어부의 말을 듣고 자신을 돌아보았습니다. 앞만 보고 달리느라 아이들의 생일도, 졸업식도, 결혼기념일도 지나가 버렸고, 가족들과의 대화도 사라졌었습니다. 그는 그제야 깨달았습니다. 가장 소중한 것은 ‘미래에 누릴 행복’이 아니라 ‘지금 함께 있는 사람들과 나누는 시간’이라는 것을.
『문명의 역습』이라는 책의 지적도 이와 닮았습니다. 현대 아이들은 더 안전한 환경에서 살고 있지만, 정작 자연을 잃고, 자유시간을 잃고, 경험이라는 산소를 잃고 있습니다. 햇빛 부족으로 근시는 늘고, 스트레스로 약을 먹고, ADHD 약 판매량은 폭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문명의 편리함을 얻는 대신,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본질을 잃어버린 것은 아닐까요? 크고 웅장한 집은 살 수 있어도 그 집 안에서 오가는 가족의 대화는 살 수 없습니다. 아름다운 식탁은 살 수 있어도 함께 웃으며 밥을 먹는 시간은 살 수 없습니다. 우리가 쌓고 있는 바벨탑은 결국 사막의 신기루처럼 우리를 속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듭니다. 보는 것은 ‘나’가 주체입니다. 내가 보고, 내가 즐기고, 내가 판단합니다. 그러나 듣는 것은 ‘남’이 주체입니다. 남이 말을 해야 듣게 됩니다. 그래서 영원한 생명은 ‘보는 것’이 아니라 ‘듣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이스라엘의 신앙도 “들어라, 이스라엘아!”로 시작되었고, 예언자들은 모두 말씀을 ‘들었기 때문에’ 전할 수 있었습니다. 이사야는 외쳤습니다. “들어라, 너희가 살리라.” 요한복음은 선포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들을 귀 있는 자는 알아들어라.”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나자렛의 성가정은 바로 이 ‘듣는 신앙’ 위에 세워졌습니다. 마리아는 천사의 말을 듣고 “말씀대로 이루어지소서.”라고 고백했습니다. 요셉은 파혼하려 했지만, 천사의 말을 듣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요르단강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라는 음성을 들으셨고, 겟세마니에서 “아버지 뜻대로 하십시오.”라고 순명하셨습니다. 성가정은 거창한 기적이 아니라 듣는 마음, 순명하는 마음, 서로의 삶을 받아들이는 마음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예전에 읽었던 글을 나누고 싶습니다. 우리가 가정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비가 오는데 키가 큰 사람과 작은 사람이 우산 하나로 비를 피해야 한다고 합시다. 키 큰 사람에게 맞추면 작은 사람은 젖고, 작은 사람에게 맞추면 큰 사람이 젖습니다. 서로 탓하기 시작하면 둘 다 불행해지고 목적지에도 가지 못합니다. 하지만 키 큰 사람이 작은 사람을 업고, 작은 사람이 우산을 든다면 둘 다 비를 피하며 갈 길을 갈 수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서로에 대한 믿음, 나눔, 배려의 경험이 생기게 됩니다.” 가정은 바로 이런 곳입니다. 누구는 업어야 하고, 누구는 우산을 들어야 하고, 누구는 기다리고, 누구는 양보해야 하는 곳입니다. 그렇게 서로를 통해 성숙해 가는 곳이 바로 성가정입니다. 우리의 가정도 나자렛의 성가정처럼, 서로의 말을 들어주는 귀, 마음을 열어 주는 대화, 조용히 서로를 믿어 주는 신뢰, 그리고 “말씀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는 순명의 고백 위에 세워져야 하겠습니다.
“자비하신 하느님,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을 본받아 우리의 가정도 기도와 사랑과 대화의 집이 되게 하소서. 서로의 말을 들어주고, 서로에게 마음을 열고, 서로를 위해 기꺼이 희생하며 살아가는 작은 나자렛의 가정이 되게 하소서. 가정 안에서 피어나는 신뢰와 평화를 통하여 당신 나라의 기쁨을 미리 맛볼 수 있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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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삼의 딸들 수녀회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님]
주님께서는 사람이 되어 오실 때 어머니와 아버지가 있는 가정에서 태어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이 가정은 위협과 적대감에 쫓기며 두려움, 불확실성, 시련으로 이어지는 난민의 고통을 경험합니다.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헤로데는 아기 예수님을 놓치고 나서 바로 포기하지 않고 군사들을 보내 줄곧 이 가족을 추격하였다고 합니다. 이 가족은 헤로데의 군사들을 피하여 여기저기서 몇 시간, 하루, 며칠, 길게는 6개월을 머물렀고, 때로는 나무 밑에서 때로는 어느 집에서 머물렀으며, 때로는 배를 타고 강을 건너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성가정은 이집트에서 3년 11개월 정도 머물렀다고 전해집니다. 갓난아기를 데리고 낯선 나라를 떠돌아다녀야 하였던 이 부부의 삶은 얼마나 고달팠을까요? 마리아와 요셉이 하느님께 순종한 결과는 이렇게 시작하여 평생 이어집니다. 그들은 그 모든 결과를 감수하면서 늘 하느님께 충실하였고, 이 가족의 순종은 우리를 모두 구원으로 이끌었습니다.
오늘 복음으로 성가정의 여정에 함께하면서 이주민과 난민들의 현실을 떠올리고 프란치스코 교황의 말씀을 되뇌입니다. “요셉과 마리아의 발걸음에는 수많은 발걸음이 숨어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날 떠나야만 하는 수많은 가족의 발자취를 봅니다. …… 많은 경우, 이 떠남에는 생존이라는 한 가지 이름만 있습니다. …… 이 시대의 헤로데들로부터 살아남으려는 것입니다.”(2017년 성탄 전야 미사 강론)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이주민이 되심으로써 인간이 위험에 놓인 곳, 거부와 적대적 위협을 경험하는 곳에 하느님께서 함께하심을 보여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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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2,13-15.19-23: 이집트 피난
1. 가정, 강생의 신비 안에서 드러난 하느님의 구원 도구
오늘은 성가정 축일이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신 신비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 공동체인 ‘가정’을 통하여 구원이 역사 안에 뿌리내리도록 하신 사랑의 신비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창조하신 분이시지만,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는 인간의 품, 곧 가정의 품을 원하셨다.”(Sermo 184,1) 즉, 하느님은 구원의 계획을 가정의 형태로 실현하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요셉과 마리아와 함께 사는 나자렛의 삶을 통하여 인류의 삶을 완전히 체험하셨다. 따라서 강생의 신비는 단순히 “하느님이 사람이 되셨다.”는 사건이 아니라, “하느님이 가족의 일원이 되셨다.”는 사건이기도 하다.
2. 가정의 시련과 하느님께 대한 신뢰
오늘 복음은 “이집트 피난” 사건을 다룬다. 아기 예수, 마리아, 요셉은 예언자들의 말처럼(호세 11,1)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피난길에 오른다. 천사는 요셉에게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라.”(13절) 말하며, 가족을 한 몸으로 묶는다. 이 표현은 “분리될 수 없는 사랑의 연대”를 상징한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렇게 묵상한다. “요셉은 단지 순종한 사람이 아니라, 사랑의 보호자였다. 그는 하느님께 순종함으로써 아기와 어머니를 보호하였고, 그들의 피난은 단순한 도피가 아니라 하느님의 섭리에 대한 신앙의 행위였다.”(In Matthaeum homiliae, 8,2) 이 나자렛 가정은 고난의 한복판에서도 하느님을 신뢰하며, 사랑으로 서로를 지탱하는 가족의 모범을 보여준다. 가정의 신앙은 평화로운 순간에만 증명되는 것이 아니라, 고통 속에서도 서로를 지켜주는 사랑 안에서 드러나는 것이다.
3. 나자렛의 사랑: 일치와 협력의 모범
아기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이지만, 인간으로서 부모의 보호가 필요했다. 마리아와 요셉은 단순히 아이를 양육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함께 이룬 협력자들이었다. 교부들은 이 점을 강조한다. 성 암브로시오는 말한다. “요셉의 침묵은 믿음의 언어였고, 마리아의 순종은 은총의 통로였다.”(Expositio in Lucam, II,45) 이렇듯 가정의 신앙은 말보다 순종과 행동으로 증거되는 것이다. 그들의 일치는 인간적인 사랑의 조화이면서 동시에 하느님 뜻에 대한 응답의 일치였다.
4. 가정의 본질: 사랑 안의 개방성
나자렛 성가정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첫 번째 교훈은, “가정의 참된 의미는 사랑 안에서만 존재한다.” 사랑은 모든 시련을 이기게 하고, 서로를 결합해 주며, 심지어 가정의 상처마저 치유한다.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이렇게 말했다. “성가정 축일은 가정이 지녀야 할 모든 가치, 사랑, 헌신, 희생, 정덕, 생명 존중, 노동, 평화, 환희를 이해하는 열쇠이다.”(Homilia in Festum Sanctae Familiae, 1980) 사랑이 없는 가정은 구조적으로 무너질 수밖에 없다. 사랑만이 가정을 회복시키며, 하느님의 현존을 드러나게 한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1요한 4,8) 그분이 현존하시는 곳에 참된 가정의 생명이 있다.
5. 가정의 신앙적 사명: 하느님께 열려 있는 공동체
두 번째로, 가정은 하느님 계획의 일부이다. 가정은 사랑의 학교이며, 생명의 성소이다. 교리서는 이렇게 가르친다. “가정은 교회의 가장 작은 세포이며, ‘가정 교회’로서 신앙과 희망과 사랑의 공동체이다.”(2204항) 따라서 진정한 가정은 하느님께 열려 있는 공동체여야 한다. 기도와 말씀, 미사와 성사 생활을 통해 하느님과의 친교를 가꾸는 곳이 되어야 한다. 가정이 종교적 감각을 잃을 때, 인간적 사랑조차 쉽게 흔들린다. 나자렛 가정처럼, 하느님 말씀에 귀 기울이는 가정이 되어야 한다.
6. 개방된 가정: 세상을 위한 사랑
세 번째로, 나자렛 성가정은 세상에 닫히지 않은 가정이었다. 그들은 세상과 타인을 위한 가정이었다. 예수님은 “나자렛 사람”(마태 2,23)으로 불리심으로써, 가난하고 평범한 모든 사람과 자신을 동일시하셨다. 성 그레고리오는 이렇게 주석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가난을 통해 하느님의 부요를 드러내셨다. 나자렛의 겸손 속에서, 하늘나라의 문이 열렸다.”(Homiliae in Evangelia, 8,3) 가정은 사랑 안에서 개방되어야 한다. 사랑이 닫히면, 더 이상 사랑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가정은 이웃에게 따뜻함을 전하고, 사회 속에서 희망의 표징이 되어야 한다.
7. 가정의 영성: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일치
바오로 사도는 콜로새서에서 이렇게 권고한다. “아내들은 남편에게 순종하고, 남편들은 아내를 사랑하십시오. 자녀들은 부모에게 순종하고, 아버지들은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마십시오.”(콜로 3,18-21) 이것은 단순한 도덕적 명령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이루어지는 사랑의 질서”를 의미한다. 교리서는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혼인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결합을 드러내며, 부부 사랑은 그리스도의 사랑의 표징이다.”(1617항) 그리스도와 일치된 가정은, 사회의 작은 교회로서 서로를 거룩하게 이끌어준다. 그 안에서 세대 간의 이해, 신뢰, 생명 존중이 자라난다.
결론: 하느님의 축복 안에 세워진 가정
진정한 가정의 기적은 하느님 사랑의 축복 안에서만 가능하다. 인간의 사랑은 약하지만, 하느님 안에서 새로워질 때 완전해진다. 성가정의 모범은 우리가 가정 안에서 사랑과 용서, 기도와 봉사를 배우도록 초대한다.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성가정 축일 강론에서 이렇게 마무리했다. “성가정은 교회의 첫 학교이며, 인간이 사랑을 배우는 첫 자리다. 나자렛의 조용한 집에서 세상이 구원의 길을 배웠다.”(Homilia, 1981.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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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거룩한 가정>
마태오 2,13-15.19-23 (이집트로 피신하시다, 헤로데가 아기들을 학살하다)
박사들이 돌아간 뒤, 꿈에 주님의 천사가 요셉에게 나타나서 말하였다.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 내가 너에게 일러 줄 때까지 거기에 있어라. 헤로데가 아기를 찾아 없애 버리려고 한다.” 요셉은 일어나 밤에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가서, 헤로데가 죽을 때까지 거기에 있었다.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내가 내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었다.”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헤로데가 죽자, 꿈에 주님의 천사가 이집트에 있는 요셉에게 나타나서 말하였다.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거라. 아기의 목숨을 노리던 자들이 죽었다.” 요셉은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아르켈라오스가 아버지 헤로데를 이어 유다를 다스린다는 말을 듣고, 그곳으로 가기를 두려워하였다. 그러다가 꿈에 지시를 받고 갈릴래아 지방으로 떠나, 나자렛이라고 하는 고을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 이로써 예언자들을 통하여 “그는 나자렛 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거룩한 가정>
“요셉은 일어나 밤에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가서”(마태 2,14)
“요셉은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갔다.”(마태 2,21)
“그러다가 꿈에 지시를 받고 갈릴래아 지방으로 떠나, 자렛이라고 하는 고을 가서 자리를 잡았다.”(마태 2,22ㄴ-3)
하느님의 믿음 닮아
나는 너를 믿고
너는 나를 믿어
나는 네가 되고
너는 내가 되는
믿음의 가정이
거룩한 가정입니다
하느님의 희망 닮아
나는 너를 희망하고
너는 나를 희망하여
나는 네가 되고
너는 내가 되는
희망의 가정이
거룩한 가정입니다
하느님의 사랑 닮아
나는 너를 사랑하고
너는 나를 사랑하여
나는 네가 되고
너는 내가 되는
사랑의 가정이
거룩한 가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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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주님께서 맺어 주셨으니, 주님께서 지켜 주실 것입니다.>
“박사들이 돌아간 뒤, 꿈에 주님의 천사가 요셉에게 나타나서 말하였다.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 내가 너에게 일러 줄 때까지 거기에 있어라. 헤로데가 아기를 찾아 없애 버리려고 한다.’ 요셉은 일어나 밤에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가서, 헤로데가 죽을 때까지 거기에 있었다.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내가 내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었다.’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마태 2,13-15)
“헤로데가 죽자, 꿈에 주님의 천사가 이집트에 있는 요셉에게 나타나서 말하였다.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거라. 아기의 목숨을 노리던 자들이 죽었다.’ 요셉은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아르켈라오스가 아버지 헤로데를 이어 유다를 다스린다는 말을 듣고, 그곳으로 가기를 두려워하였다. 그러다가 꿈에 지시를 받고 갈릴래아 지방으로 떠나, 나자렛이라고 하는 고을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 이로써 예언자들을 통하여 ‘그는 나자렛 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마태 2,19-23)
1) 우리는 ‘성가정’이 정말로 많은 고난을 겪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 고난들은 구원받는 것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는 자들, 회개하기를 거부하고, 메시아를 배척한 자들의 박해 때문에 생긴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성가정이 겪은 고난 자체가 아닙니다. 그 고난들을 성가정이 어떻게 견딜 수 있었는지, 또 어떻게 극복할 수 있었는지, 바로 그것이 우리에게 중요합니다. 만일에 성가정이 겪은 고난들만 생각하고, 그 고난들을 인내하고 극복한 과정은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병’만 보면서 ‘치료법’은 보지 않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입니다.
<어떤 일로 힘들어하는 사람에게 가서 “힘내라.”라는 말만 하고 그친다면, 힘든 사람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힘이 더 빠지는 일이 됩니다. “힘내라. 하느님께서 도와주신다. 나도 도와주겠다.”라고 ‘진심으로’ 말해야 합니다. ‘내 안에’ 더 이상 남아 있는 힘이 없다면 ‘밖에서’ 그 힘이 와야 하는데, 신앙인들은 그 힘을 하느님에게서 얻고, 그리고 이웃에게서도 얻게 됩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이웃의 사랑은 우리가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의 원천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하느님과 이웃의 사랑을 받고 있는 존재입니다.>
2) 모든 부부와 모든 가정은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부부이고 가정입니다.(마태 19,6) 성가정은 특히 더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가정이니, 하느님께서 지켜 주시고 도와주시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성가정의 이야기들을 보면, 천사가 나타나서 알려 주거나 도와주었다는 말이 자주 나옵니다.
천사가 도와준 것은 곧 하느님께서 도와주신 것입니다. 요셉과 마리아 쪽의 ‘믿음’과 ‘기도’와 ‘인내’도 중요합니다. 그들은 천사가 시키는 대로, 수동적으로 움직인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위기를 극복하려고 노력했고, 하느님의 보호를 믿었고, 믿었으니까 기도했고 인내했습니다. ‘믿음’과 ‘기도’에서 ‘인내’가 생기고, ‘지혜’가 생깁니다.
3)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도와주실 때, 직접 도와주시기도 하고, 천사를 보내셔서 도와주시기도 하고, ‘착한 사람들’을 통해서 도와주시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도움을 받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믿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천사’도, ‘천사처럼 착한 사람’이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헤로데가 예수님을 죽이려고 계획했을 때, ‘누군가’가 베들레헴으로 급히 가서 그것을 동방박사들에게 알리고, 동방박사들이 다시 그것을 요셉에게 전해 주었을 수도 있습니다. 헤로데의 측근이나 군대에 나쁜 사람들만 있었던 것은 아닐 것이고, 선한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성가정이 이집트로 피신할 때, 또 이집트에서 지낼 때, 미움과 박해만 받은 것은 아니고, 착하고 친절한 사람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을 것입니다. 동방박사들이 예수님께 바친 황금, 유향, 몰약은 ‘피난살이’에 큰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4) 각 개인의 가정을 보면, 어느 가정이든지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크고 작은 고난과 위기들을 만납니다. 그런 때에 꼭 필요한 것은 하느님에 대한 믿음과 식구들 사이의 믿음입니다. 요셉과 마리아의 경우에, 요셉은 하느님을 믿었고, 또 마리아를 믿었습니다. 마리아도 하느님을 믿었고 요셉을 믿었습니다. 부부가, 또 식구들이 서로 신뢰하고 서로 의지하는 것은, 고난과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큰 힘이 됩니다.
‘기도’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도움을 잘 받는 방법입니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겠다.”라는 예수님의 약속은(마태 18,20), 식구들이 마음을 모아서 함께 기도할 때 그대로 적용됩니다. 교회 공동체의 기도와 도움도 꼭 필요합니다. 어떤 힘든 일이 생겼을 때, 교회 공동체에 도와달라고 요청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 당연히 해야 하는 일입니다. 공동체는 한 몸이기 때문입니다.(1코린 12,2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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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내 삶의 중심은 무엇인가?>
한 해의 끝자락에서 하느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에 감사드리며 새해에도 주님께서 늘 동행해 주시고 은총으로 감싸주시길 기도한다. 마주하는 모든 이에게 늘 복된 사람으로, 꼭 필요한 사람으로 기억되길 바란다.
'백악관을 기도실로 바꾼 대통령 링컨'이라는 책을 보면 너무나 가난했던 링컨의 어머니는 어린 링컨에게 성경만을 가르쳤다. 다른 것은 아무것도 해 줄 수가 없었다. 결국, 세상을 떠나면서 유산으로 남긴 것도 성경 한 권이다. 링컨은 성경을 읽고 또 읽어 지혜를 얻었고 링컨의 삶을 이끌었던 분은 하느님이셨다. 그는 대통령이 되어 집무실 책상 위에 항상 성경을 두고 읽었으며 그 말씀대로 실천하려 애썼다. 그는 "성경은 하느님께서 주신 가장 좋은 선물"이라고 말하였고, 노예해방을 선언하기도 하였다. 주님과 함께한 결과다. 성가정의 핵심은 바로 삶의 중심에 하느님의 말씀, 말씀이 사람이 되신 예수님을 모시고 사느냐? 기도하고 사느냐에 달려있다.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을 보면, 아버지 요셉은 목수 일을 충실히 하였고 그런 중에 하느님께서 보낸 천사의 말을 듣고, 믿었으며 마리아를 아내로 받아들였다. 거기에서 오는 어려움들을 묵묵히 잘 견디어 냈다. 전 생애 동안 가난을 감수하면서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했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의로운 아버지가 요셉이다.
성모님은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였고, 아들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길 바랐으며 그에게 일어나는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루카2,35). 이라는 시메온의 예언의 말씀을 들었으나, ‘주님의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셨기에’ 흔들리지 않았다. 성모님은 믿음으로 복되신 분이다.
예수님은 부모의 마음을 헤아려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 부모에게 순종하며 지내셨다.
나자렛 성가정에는 인간적 갈등과 고뇌도 있었으나 어려운 처지와 상황, 예기치 않은 일에도 불구하고 서로 간의 신뢰와 순종, 그리고 사랑이 넘쳤다. 서로의 다른 모습 안에서도 하느님의 뜻을 찾고 따르며 지켰고, 각자의 소명에 충실하였다. 이것이 성가정의 모범이다. 성가정은 고통이나 시련이 없는 가정이 아니라 믿음과 사랑으로 시련과 고통을 이겨낸 가정이다. “우리는 가정 안에서 서로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법을 배운다. 여기서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속해 있다. 그리고 부모가 자녀에게 신앙을 물려주는 곳이 바로 가정이다”(프란치스코 교황).
우리는 쉽게 흔들리고 기대를 채우지 못해 상처를 주며 자기주장을 굽히지 않음으로써 벽을 쌓기도 한다. 상대를 배려한다고 하면서도 자기 방식으로 참견하면서 불화를 일으킨다. 하느님의 뜻을 찾기는커녕 상대를 무시하고 깔보기까지 한다. 손해 보는 일, 희생하는 일은 하지 않으면서 내가 ‘이만큼 했으면 됐지’ 뭘 더 바라느냐는 식이다. 부부 사이에도 부모와 자녀 간의 관계에도 서로의 눈높이를 맞추기가 너무도 힘들다. 각자의 위치에서 서로 존중하고 배려하며 자기 역할을 해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 우리 가정의 위기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에 머무는 사람은 ‘아무리 해도 다 할 수 없는 사랑의 의무’를 생각한다. 예수님께서는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13,34). 하셨다. 말씀은 곧 우리 삶의 길이다. 그리고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오신 예수님은 우리의 해답이다. 모든 문제의 해답이 예수님 안에 있다. 따라서 하느님의 말씀을 기초로 삼고 영성체를 통해서 주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말씀대로 실천하여 성가정을 이뤄야 한다. 예수님은 행복의 원천이며 모든 문제의 해답이다.
“주님, 저희 가정을 주님의 은총과 평화로 굳건하게 지켜 주소서.” 아멘.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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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교구 이승구 토마스 신부님]
<우리의 마음과 시선을 하느님께로 향하기>
루카 복음서에는 여인들이 예수님을 찾는 장면이 두 번 등장합니다. 하나는 오늘 복음에서 볼 수 있듯이, 마리아가(요셉과 함께) 예수님을 찾는 장면이고, 또 다른 하나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빈 무덤에서 찾고 있는 여인들입니다.
이 두 장면에서 등장하는 여인들은 비슷한 질문을 받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예수님께로부터,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라는 질문을, 다른 장면에서는 여인들이 천사로부터 “어찌하여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찾고 있느냐?”라는 질문을 받습니다.
이렇듯 ‘예수님을 왜 찾고 있는지’ 에 대한 두 가지 질문을 함께 보았을 때, 예수님을 찾았던 마리아와 여인들은, 어쩌면 예수님을 다른 곳에서, 곧 하느님 밖에서 찾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해보게 됩니다.
예수님을 찾지 못하고, 예수님을 잃어버렸던 여인들이 자신의 마음과 시선을 생명이신 하느님께로 돌렸을 때, 여인들은 마침내 예수님을 찾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늘 교회는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성가정 축일을 지내며 듣게 된 오늘 복음을 통해 우리 가정은 어디에 마음과 시선을 두고 있는지 되돌아보게 됩니다.
예수님을 잃어버린 성모님과 요셉 성인의 고통과 슬픔처럼, 우리 가정도 다양한 이유로 고통과 슬픔 중에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 더욱 하느님께 시선을 향하셨고, 아마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하며 도움을 청하셨을 성모님과 요셉 성인처럼, 우리 가정도 더욱 하느님께 시선을 두고 하느님께 기도하며 도움을 청해야 할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그 충만한 기쁨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가정도 기쁨이 충만한 가정이 될 수 있도록 하느님께 마음과 시선을 고정시키고, 하느님을 가정의 중심에 모시기로 다짐해야겠습니다. 아울러, 해체된 가정과 위기를 겪는 가정들을 위해서 기도 중에 함께 기억하는 한 주간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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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송양업 토마스 신부님]
<머무르고 싶고, 가고 싶은 ‘거룩한’ 집 ‘성가정’>
힘이 빠지고 지쳤을 때 어떤 생각이 떠오르십니까? 여러 생각이 들겠지만 많은 경우에 그리고 저의 경우에도 ‘집’ 생각이 먼저 떠오릅니다. 힘들면 입버릇처럼 한숨과 함께 “아! 집에 가고 싶다.” 혹은 “아! 집에 가야지,”라는 말이, 크게 의식하지 않아도 뱉어집니다. 집이라는 곳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입니다. 또 나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을 수 있는 곳, 내가 다시 힘을 얻을 수 있는 곳입니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집에서 멀리 떠나고자 하는 상황과 마음이 생기기도 합니다. 우리 중에 그런 경험이 있는 분들도 있을 것이고, 우리가 잘 아는 루카 복음에 등장하는 ‘돌아온 둘째 아들’도 그러했습니다. 삶의 끝자락을 마주하는 듯한 상황에서 가장 먼저 떠올렸던 곳이 ‘아버지께서 계신 집’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 소년 예수님께서도 ‘아버지의 집’에 오래도록 머무르고 싶으셨나 봅니다. 결국 ‘집’이란 우리가 머물러야 할 곳, 우리가 돌아가야 할 곳, 가장 가고 싶은 곳입니다. 우리가 가장 가고 싶어 하는 그 ‘집’과 ‘뜰’을 ‘가정(家庭)’이라 부릅니다.
머무르고 싶고, 가고 싶은 집을 이루기 위한 방법을 오늘 제1독서와 제2독서에서 전해 들었습니다. 먼저 제1독서의 집회서는 부모를 공경하라 가르칩니다. 그리고 제2독서의 바오로 사도는 가정의 각 구성원들에게 당부합니다. 독서의 말씀들은 표현에 있어서 지금 시대와 꼭 맞 아떨어지지 않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 뜻은 어느 시대와 세대를 막론하고 이루어야 할 사랑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한 주간을 ‘가정 성화 주간’ 으로 지냅니다. 나자렛의 성가정을 본받고자 기도하고 노력하는 시기입니다. 나자렛의 가정이 ‘거룩한 가정’인 성가정인 이유는 예수님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분들 모두가 서로 공경하고 사랑하며, 머무르고 싶은 집, 가고 싶은 집을 이루려 노력하셨고, 그것을 이루어내셨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우리가 이루어야 할 ‘거룩함’이란 그저 멀리 있어 가까이 갈 수 없고, 우리의 현실과는 동떨어진 저 너머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편히 머무를 수 있고, 편히 갈 수 있고, 언제나 가까이. 함께 하고 싶은 것이 ‘거룩함’이라 생각합니다. 이번 한 주간 ‘거룩한 우리 집’을 이루도록 기도하고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나아가 ‘거룩한 우리 본당’을 이루도록 기도하고 힘써야 하겠습니다.
◾ 나의 아버지의 집에
(엔 토이스 투 파트로스 무 ἐν τοῖς τοῦ πατρός μου ) 그리스말 본문에는 ‘집’이란 단어가 없습니다. 직역하자면, ‘나의 아버지의 그것들 안에’인데, 보통 ‘그것들’을 ‘집’이나 ‘일들’정도로 번역합니다.
집이든, 일이든, 예수님은 ‘아버지 하느님’과의 내적 일치 안에 계신다는 것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이해하면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머무시는 곳은 늘 아버지의 자리였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 역시 매사에 하느님의 마음으로, 하느님의 자리에서 생각하고 행동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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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윤웅렬 하상바오로 신부님]
<신비를 바라보고 기다릴 줄 아는 사랑>
성가정(聖家庭), 거룩한 가정. 우리 신자들 안에서는 가족 전체가 가톨릭교회의 세례를 받을 때 비로소 ‘성가정이 되었다.’ 말하곤 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인은 세례성사를 통해 자신의 모든 죄가 씻기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 때문입니다. 온 가족이 그렇게 거룩하다면 당연히 성가정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그래서 많은 교우분들이, 이 성가정의 꿈을 이루기 위해 아직 성당에 나오지 않는 가족을 채근하곤 합니다. 때때로 그 ‘거룩한 독촉’에 자못 부작용이 뒤따르기도 하지만 말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에는, 예수님께서 열두 살 때 온 가족이다 함께 예루살렘 성전에 축제를 지내러 가신 장면이 나옵니다. 유다인들은 이집트 탈출을 기념하는 ‘파스카’ 축제일이 오면 반드시 예루살렘 성전에 가서 제사를 지내야 했습니다. 이 축제 때는 온 지역에서 몰려온 사람들로 어마어마한 인파가 붐볐습니다. 그런데 돌아오는 길에 그만, 그 부모님은 어린 예수님을 잃어버렸습니다. 루카 복음서가 전해주는 것처럼, 아이를 찾기까지 사흘이 걸렸습니다. 말이 사흗날이지, 그 어린 아이를 예루살렘 북새통에 잃어버린 채로 보낸 그 삼일 간의 시간 동안 부모님의 애간장이 얼마나 녹아 녹아내렸을까요.
마침내, 성전에서 아이를 찾았습니다. 그런데 웬걸, 태연히 율법 교사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아이입니다. 시커멓게 타버린 부모의 속은 아는지 모르는지…. 이럴때, 보통의 부모라면 어떻게 할까요. ‘이놈의 자식, 엄마 아빠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기나 하느냐?’ 1976년에 작고한 막스 에른스트(Max Ernst)라는 독일의 화가가 있습니다. 그는 1926년에 그린 자신의 한 작품에서, 어린 예수님을 무릎에 올려놓고 그 볼기를 사정없이 후려치는 성모님의 모습을 표현하여 논란을 일으킨 바 있습니다. 얼마나 세게 후려쳤는지, 어린 예수님의 후광이 바닥에 내동댕이쳐 질 정도였으니까요. 불경한 그림이라는 인상이 강하지만, 한편으로는 공감이 되는 부분도 있습니다. 보통의 부모라면 그럴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거룩한 부모님께서는 그러지 않으셨습니다. 성경이 전해줍니다.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루카 2,51) 사흘 동안, 당신들 속이 정말 시커멓게 타버렸을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모님과 성 요셉은 그 순간에 소년 예수님께서 하느님 아버지와 함께하시는 놀라운 신비를 보셨습니다. 자신의 속 타는 마음보다, 아이 안에서 일어나는 신비를 먼저 바라보고 기다릴 줄 아는 이 거룩한 부모의 사랑에, 어린 예수님 역시도 존경과 순종의 마음으로 당신의 사랑을 부모님에게 표현합니다.
한 해를 마치며, 서로의 신비를 바라보고 기다릴줄 아는 이 아름다운 나자렛 성가정의 사랑이, 세상의 모든 가정 안에 깃들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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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김홍주 베드로 신부님]
<하느님께서 지켜 주시는 가정 공동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성령의 도우심에 힘입어 복음을 살아가며 하느님의 뜻에 온전히 협력해야 합니다. 그 협력이 이루어지는 첫 번째 자리가 바로 가정입니다. 오랫동안 서로 다른 길을 걸어온 남자와 여자가 혼인을 통해 사랑으로 자신을 내어주고, 그 결실로 자녀를 낳아 기르는 가정 공동체는 하느님의 창조 신비가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자리와도 같습니다.
부모는 자녀를 사랑으로 양육하며 모든 것을 내어주려 합니다. 그 가운데 부모가 자녀에게 줄 수 있는 가장 고귀한 선물은 단연 '신앙'입니다. 얼마 전 주일학교를 같이 다녔던 친구를 만났습니다. 예전에 복사단장을 맡을 정도로 열심이었던 그 친구는 딸아이가 첫영성체를 받고 복사단에 들어가게 되었다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과 감사의 마음을 고백했습니다.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신앙을 자녀에게 물려주는 그 순간은 말로 다할 수 없는 기쁨임을, 저는 친구를 보며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하느님 창조의 신비가 이어지고, 생명을 살리는 신앙이 전수되는 현장이기에 가정 공동체는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가장 중요한 공동체라 할 수 있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사회 공동체의 가장 기본이 되는 세포로서 가정을 '가정 교회'라 부릅니다. 또한 <가톨릭교회 교리서>는 '그리스도교 생활의 첫 번째 학교이자 더욱 풍요로운 인간성을 기르는 학교'라고 말합니다. (1657 참조)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는 이 거룩한 터전을 누구보다 아끼고 보호해 주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의 천사가 요셉의 꿈에 나타나 헤로데의 위협을 알려 이집트로 피신하여 곤경을 면하게 하는 장면을 통해 우리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사랑이 머무는 가정 공동체를 결코 홀로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보호해 주신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마태 2,13-15.19-20 참조)
하느님을 신뢰하며 아내를 지극히 아꼈던 요셉 성인, 하느님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평생을 봉헌하신 성모님, 그리고 부모에게 순종하며 효성을 다하신 예수님. 이 세 분이 이루신 성가정은 삼위일체의 사랑을 온전하게 드러낸 아름다운 공동체입니다. 우리 모든 가정이 지향하고 닮아야 할 모습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가정 공동체를 하느님께서는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처럼 지켜주실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당신께서 지어 내신 것을 싫어하실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지혜 11,24) 그렇게 하느님 창조의 신비에 협력하고, 신앙의 유산을 전하며, 서로 내어주는 자기 비움의 사랑을 통해 세상 모든 성가정이 주님께서 주시는 참된 행복을 만끽하는 보금자리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아멘.(《서울주보》 제259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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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오늘은 성가정 축일입니다. 우리는 흔히 성가정 하면, 막연히 거룩하고 평화롭고 행복이 넘치는 가정, 이 세상의 모든 좋은 것들이 충만한 가정으로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성가정을 본받는다, 고 기도할 때, 우리 마음의 한 부분은 우리가 가지지 못했지만, 성가정이 지녔을 법한 행복이, 우리 가정에 실현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기도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쓰는 말 중의 ‘거룩하다’란 의미의 성聖이란 말은 히브리어 ‘자르다. 분리하다’ 란 말에서 파생된 말로서 세속적인 것과 종교적인 것을 구별하기 위해 사용된 말입니다. 그런데 이 말이 어떤 인물이나 장소, 그리고 물건 등과 함께 쓰이게 되면서 단순한 구별보다는 인물이나 장소, 그리고 물건 그 자체를 거룩한 것으로 취급합니다.
그러나 성(=거룩함)이란 말을 그것과 함께 사용되는 사람이나 사물 그 자체가 거룩한 것이다, 란 제한된 의미보다는 다른 의미 혹 넓은 의미에서 이해하고 해석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래서 이 성이란 개념을 하느님과 관계된 혹은 하느님과 연결된 것이란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더 적절치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예를 들면, 한국에 참 많은 성지가 있습니다. 순교 성지. 제가 활동했던 베트남에도 ‘라방’ 성모성지聖地가 있습니다. 이처럼 성지란 말도 땅 그 자체가 거룩하고 다른 땅에 없는 신성한 기운이 있는 땅이란 의미보다는 하느님과 관계를 맺었던 땅이란 의미가 더 타당하리라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오늘 성가정 축일을 지내는데 이 성가정이란 의미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는 흔히 성가정 하면 그 가정 자체의 거룩함을 떠오르기 쉽습니다. 그러기에 이 가정은 다른 가정에는 없는 신성함과 거룩함, 평화로움과 행복, 그리고 세상의 모든 선이 충만한 가정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조금만 깊이 들여다보면 성가정이란 말은 이러한 의미에서 사용된 말이 아니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그 일면을 보지만 외적으로 드러난 성가정은 세상이 불행의 요소로 생각하는 많은 것들로 점철된 불행한 가정이 바로 성가정입니다. 가난, 갈등, 불화, 불효, 고통, 남편의 죽음과 아들의 죽음 등, 외적인 조건만으로 판단한다면 행복과는 거리가 먼 가정이요, 우리가 환상 속에 그리는 핑크빛 가정이 아니라 어둠의 그림자를 동시에 가진 가정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역설적인 것은 이런 모든 불행의 요소를 가진 이 가정을 교회는 여전히 성가정이라 부르고 있고, 우리 모든 가정이 성가정의 모범을 본받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바로 이 가정이 가졌던 모든 것을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볼 수 있는 눈, 불행의 요소마저도 하느님과 연결시켜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 그리고 이 모든 일들을 신앙으로 받아들이고 순명했다, 는 사실 때문입니다. 사실 이 가정은 경제적으로 매우 가난한 가정이었습니다. 요셉의 직업은 장인, 목수이었는데, 그 시대 이스라엘의 목수는 대개 가난한 일용직 막노동자였기에 한 끼 배부르게 먹는 것도 힘겨웠다고 합니다. 오늘날 인건비가 비싼 한국 땅에서도 일일 노동자들의 삶이 고단하다면, 2000년 전 작은 도시 나자렛에서 막노동으로 삶을 살아갔을 성가정의 경제적 모습은 쉽게 상상하고도 남을 만큼 경제적으로 궁핍했습니다. 성가정은 물론 과거 우리 부모 세대와 비교하면, 현재의 우리 가정들은 경제적으로 훨씬 부자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네 가정이 예전에 비하면 행복하냐고 한다면, 꼭 그렇지 않습니다. 이는 물질이 부족해 성가정을 꾸리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물질 때문에 성가정을 꾸리지 못할 정도로 우리는 지금 부자입니다. 가난하다고 불행한 것은 아닙니다.
인생을 풍요롭고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 물질이라면 성가정은 물질의 풍요로움을 누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물질이 가정을 화목하게 평화롭게 하는 것이 아니기에 예수님과 마리아는 가난하게 사셨던 것입니다. 늘 하느님의 시선에서 하느님과 관련해서 바라볼 수 있었기에, 가난한 현실을 거부하고 부정하지 않고 주어진 것에 만족하며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고 당신 삶의 체험을 바탕으로 사람들에게 참된 행복을 선언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둘째로 이 가정은, 부부간의 불신과 오해가 있는 가정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결혼 풍습에서 바라볼 때, 결혼도 하기 전에 마리아가 임신하자 요셉은 파혼하기로 마음을 먹을 만큼 갈등과 오해로 부부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이것을 보면 부부 사이에 충돌이 전혀 없어야 성가정을 이루는 것도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 갈등 없는 부부관계나 가정은 존재하지 않을 겁니다. 그런 갈등 속에서도 오늘 제2 독서에서 사도 바오로가 강조한 것처럼 서로에게 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서로 참아주고, 서로 용서해 줄 때, 갈등은 서로에 대한 신뢰와 사랑을 바탕으로 더욱 굳건해질 것입니다. 결국 성가정은 갈등과 오해 속에서도 모든 것을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부부관계를 바라보고 이해하고 받아들였고, 이 모든 어려운 갈등을 부부가 함께 신앙으로 극복해 나갔기에 성가정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가정이 살아야 할 모습, 닮아야 할 모습인 배우자 상호 간에 대한 순종과 존경, 신뢰와 배려로 갈등과 오해를 풀어나가야 하리라 봅니다.
세 번째로, 나자렛 성가정 역시 자식의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복음에도 그 한 면을 볼 수 있지만 예수님께서 열두 살 되던 해 과월절에, 예루살렘 성전을 순례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던 중 부모는 아들 예수를 잃어버리게 되고 이 때문에 부모는 오던 길을 되돌아가 어렵게 성전에서 그 아들을 되찾게 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때 부모의 애타는 마음에 대한 예수의 대답은 너무나 뜻밖이었다. "왜 나를 찾으셨습니까?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모르셨습니까?"란 응답을 듣고, 성질 급한 한국 아버지였다면 부모에게 말대꾸한다고 주먹으로 한 대 때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더하여 예수님의 공생활 시절 예수님에 대한 부정적인 소식, 우리나라식으로 표현하자면 술주정뱅이요, 악령 들린 사람, 죄인들하고 어울리는 미친놈이라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아들이 걱정되어 찾아간 어머니에게 예수님의 말씀은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냐?", "바로 이 사람들이 내 어머니이며 형제들"이라는 너무나 매몰차고 어미의 가슴에 상처를 주기에 충분했을 것입니다.
네 번째로, 이 가정은 고통이 있는 가정이었습니다. 인간에게 가장 많은 고통을 주고 스트레스를 주는 사건은 서양인들에게는 배우자의 죽음이고, 동양인에게 있어서는 자식의 죽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성가정은 이 두 가지 사건을 동시에 겪은 가정이었습니다. 남편을 일찍 여의었을 뿐만 아니라 외아들마저도 자신의 눈앞에서 처절히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모습을 바라보는 고통을 감수해야만 했던 가정이 바로 이 가정이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모든 불행의 요소를 가지고 있던 가정이 바로 성가정이었던 것입니다. 가족 사이라고 해서 언제나 무조건적인 사랑을 줄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체험합니다. 특별히 가족 가운데서도 언제나 다른 가족의 도움이 필요한 가족에게 한결같이 사랑하기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나자렛 성가정은 평탄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복음에는 요셉은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라는 말이 무려 네 번이나 반복됩니다. 의로운 요셉이 평생 되뇌며 살았던 말인지도 모릅니다. 누군가를 데리고 산다는 것은 함께 동행하고, 동행하면서 다가오는 낯선 환경에서 오는 모든 어려움에서 보호해 주며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자세가 오늘 복음을 통해서 우리가 살아야 할 의로움 곧 하느님 안에서 부족하고 상처받고 힘든 가족들을 우선 배려하고 사랑하며 살아야 할 우리가 마음속에 품고 살아가야 하는 태도이며 자세가 아닌가 싶습니다.
이처럼 성가정은 여느 가정과 다를 바 없는 가정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가정을 성가정의 모델로 여깁니다. 그 가정의 중심에 하느님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볼 수 있는 눈, 불행의 요소마저도 하느님과 연결시켜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 그리고 이 모든 일들을 신앙으로 받아들이고 순명했다, 는 사실 때문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성가정 축일을 지내는 우리의 삶은 분명해집니다. 그것은 가족과 우리 가정의 일을 하느님과 연결하라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불평하는 아내와 사사건건 비판하는 남편, 부모의 속을 끓이는 자식과 자식을 이해 못하는 부모, 그리고 우리 삶을 힘들게 하는 모든 요소와 상황들. 그것을 그 자체로 바라보고 거기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것이 아니라 가족을 데리고 함께 하느님께로 나가고 하느님과 연결해서 가족을 바라보고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이는 삶. 바로 이 삶이 성가정 축일을 지내면서 우리가 묵상해야 할 성가정의 교훈이 아니겠는가 생각해 봅니다. 성가정을 이루길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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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신부님]
<모두가 원하지 않는 불행한 요소의 집합체>
+ 찬미예수님
재작년 이맘 때 즈음 저는 알프스 남부의 꼬모 호수가 있는 지역에서 고해성사 전담 사제로 성탄을 보냈습니다. 한 주간 동안 하루 종일 고해소에 앉아 수 없이 많은 신자분들의 고해를 듣는 일정이었는데, 그 당시 만난 주임신부님이 참으로 인상 깊었습니다.
나이가 너무나도 많이 들어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어머니를 모시고 있었던 신부님은 성탄절 가족들과 함께하는 식사 자리에 저를 초대하시며, 그날 특별히 하느님이 우리 가족들에게 주신 빛나는 존재가 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성탄절이 다가왔고 가족들이 모이기 시작했는데, 저는 신부님이 말씀하신 그 소중한 존재가 누구인지 대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습니다. 커다란 돋보기 안경을 쓴 다섯 살배기 어린아이가 성큼성큼 집안으로 들어선 것이었습니다. 다운증후군을 앓고 있는 어린 아이였습니다.
거동이 힘들고 치매에 걸린 어머니와 다운증후군으로 산만하게 돌아다니는 어린 아이. 아마 이 이야기를 듣는 대부분의 분들은, 얼핏 생각만 해도 여러 가지 수고로움이 필요하겠다며 고개를 저으실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 식사자리는 제가 초대받은 어떤 곳보다도 밝고 아름다운 식사자리였습니다. 아이를 위해 온 가족이 함께 노래로 식사 전 기도를 바치는 모습, 만날 때와 헤어질 때 어머니의 볼에 입을 맞추는 자녀들과 손주들의 모습, 기타를 들고 캐롤을 부르기 시작하자 가운데에서 신나게 춤을 추던 다운증후군 아이의 모습, 그 아이를 지켜보는 가족들의 웃음 소리. 그 모습들 하나하나가 눈부실 만큼 아름다웠습니다.
일정을 마치고 로마로 돌아오며 왜 그렇게 그들이 아름다워 보였을까 곱씹어 보았습니다. 외국에서 생활하며 수많은 가정에 초대를 받았지만 왜 그들의 가정이 특별하게 보였을까에 대해서 말입니다. 제가 내린 결론은 객관적으로 봤을 때 평범하지 않은 요소들, 즉 우리가 불행이라 생각할 수 있는 가족 구성원 때문이었습니다.
세속의 눈으로는 불행이라 여길 수 있는 구성원들을 그들은 장애물이라 생각하지 않고 너무나도 당연한 듯 기쁘게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남들은 불행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인다는 것. 그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느님께서 맡기신 것이리라고 받아들이는 순간, 그에 대한 수고는 당연한 것이 되고 자칫 짐처럼 여겨지기 쉬운 상대는 소중한 존재가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일이 가정 안에서 일어나는 순간, 비로소 성가정이 이루어집니다.
자,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원하는 성가정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성가정이라고 했을 때 떠올리는 이미지는 거룩하고 평안하며 행복이 넘치는 가정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과 성모님, 요셉이 이룬 가정은 과연 어떠했을지요.
사실 이 가정은 우리가 원하는 가정의 모습과 매우 다릅니다. 세속적인 눈으로 바라보면 모두가 원하지 않는 불행한 요소의 집합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 이유를 정리해 보자면, 첫째로 이 가정은 경제적으로 가난한 집안이었습니다. 요셉의 직업은 목수였는데 당시 목수란 막일을 하던 사람들에 속하는 계급이었습니다. 이는 곧 농사지을 땅이 없음을 의미했으므로 이 가정은 재산이 없는 노동자 계층의 가정이었던 것입니다.
두 번째로 이 가정은 불신과 오해가 있었습니다. 마리아가 처녀의 몸으로 임신을 했으므로 요셉은 마리아를 오해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의롭게 살아온 요셉이 남몰래 파혼하기로 결심을 했으니 그의 불신과 상심이 얼마나 컸을지 우리는 쉽게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세 번째로 이 가정의 자녀는 그야말로 부모의 속을 뒤집어놓는 자녀였습니다. 그는 자신을 잃어버렸다가 겨우 찾아내 안도의 한숨을 내 쉬는 부모에게 “왜 나를 찾으셨습니까?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모르셨습니까?” 라고 이야기 합니다.
사람들은 이 아들을 두고, 먹보요 술꾼이며 죄인들하고만 어울린다고 수근댑니다. 아들을 찾아간 어머니에게는,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냐”라는 말로 마치 어머니를 부정하는 듯한 이야기마저 합니다.
마지막으로 이 가정은 처절한 고통이 있는 가정이었습니다. 요셉은 아들의 공생활 전에 죽음을 맞이하여 마리아는 일찍 과부가 되고 그 와중에 하나밖에 없는 아들은 눈앞에서 처절히 죽어갑니다. 우발적인 사고도 재해도 아닌 사람들의 질투로 인해 억울한 죽음을 맞이합니다.
바로 이러한 모든 불행의 요소를 가지고 있는 가정을 우리는 성가정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왜 이 가정이 성가정이라 불리는지에 대해 생각을 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사실 간단합니다. 이 모든 불행의 요소를 하느님의 이름 안에서 받아들였으며 이에 따르는 주님의 섭리를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경제적인 가난이 그들의 신앙을 꺾을 수 없었고, 불신과 오해는 천사의 도움을 통해 말끔히 씻겨집니다. 아들의 모든 언행이 하느님을 위한 일이었음을 부모는 정확히 알고 있었으며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느님의 사업을 위한 영광스러운 과정이었음을 마리아는 이미 순명으로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어렵고 힘든 일이 닥칠 때, 그 모두를 하느님의 뜻이라 여기며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인다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극복하는 과정에 하느님의 섭리와 도우심이 있음을 우리는 반드시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바로 그 순간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은 하느님을 위한 일이 되며 실제로 주님께서는 당신만의 방식으로 우리를 도와주시기 때문입니다.
추운 겨울, 코로나로 인하여 모두가 힘든 시기, 이 안에도 우리가 배워야할 하느님의 섭리가 있을 것입니다. 이 시기를 모두가 힘을 합쳐 잘 이겨 냈으면 좋겠습니다.
인간의 욕심으로 일어난 이 바이러스가 하루빨리 사라지길 오늘도 내일도 함께 기도하면서 이를 받아들이고 최선을 다해 사회에 협조하며 주님께 도움을 청해야 하겠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지금 이 순간, 세상 안에서 서로의 건강을 지키고 바이러스를 몰아내는 일이 하느님의 사업을 위한 영광스러운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지금 우리 모두가 이 일을 해야 할 때입니다.
“예수님의 부모는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쳤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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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우연히 텔레비전을 보다가 육아 전문가가 나오는 방송을 보게 되었습니다. 문제 행동을 보이는 아이의 일상을 관찰하고, 육아 전문가가 아이의 기질과 부모의 양육 태도를 분석하여 처방을 내리는 것입니다. 이를 보면서, 또 이 프로그램이 엄청난 인기를 얻고 있다는 말에 ‘더 아이를 낳기 힘들겠구나’ 싶었습니다. 부모의 부족함으로 자기 아이가 비뚤어져서 실패자, 낙오자, 소시오패스, 우울증 환자 심지어 범죄자가 되어버릴까 두려울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책임지지 못할 거면 무자식이 상팔자’라는 말도 나오는가 봅니다.
물론 “그냥 대충대충 키우세요.”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부모 탓만이 아니라, 빠르게 변화되는 이 세상 탓이 더 크지 않을까요? 특히 육아는 어떤 대가나 특정한 결과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즉, 세상의 ‘기브 앤 테이크’라는 확실한 인과관계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부모와 자녀는 사랑의 관계만이 있을 뿐입니다. 자녀는 부모의 소유가 아니고, 또 부모는 자녀가 원하는 대로 다 해 주는 ‘종’도 아닙니다. 상대방을 사랑의 대상으로 여기고, 사랑 때문에 모든 것을 주는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이 안에 다른 감정들이 들어가게 되면, 사랑의 관계가 깨어지곤 합니다. 물론 사랑의 실천은 너무나 어렵습니다. 가족 안에서도 그 사랑이 얼마나 힘듭니까? 그래서 주님께 맡기는 우리의 모습이 필요합니다. 나의 부족함을 주님께서 채워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학교에 처음 들어갔을 때, 16명이 한방에서 잤습니다. 그런데 한 친구가 불을 끄면 묵주기도를 바칩니다. 문제는 성호경을 긋고 사도신경을 하기 전에 잠들어 버립니다. 아침이 되면 항상 이 친구의 묵주는 아침에 바닥에 떨어져 있습니다. 이 친구에게 “그냥 잠들어 버리는데, 왜 묵주기도를 하려는 거야?”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이렇게 대답합니다.
“묵주기도 하다 잠들면, 나머지는 주님께서 해 주신대. 내가 하는 것보다는 주님께서 하시는 것이 더 효과가 있잖아.”
예수님, 성모님, 그리고 요셉 성인이 이룬 가정을 성가정이라고 합니다. 그냥 고상하고 평온한 이상적인 가정이었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살해 위협을 피해 밤중에 국경을 넘어야 했던 ‘난민’이었습니다. 즉, 아무런 ‘문제없음’으로 성가정이 아니라, 서로를 믿고 사랑하면서 하느님의 뜻을 따름으로써 성가정이 된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서는 부모 공경과 자녀 존중을 동시에 말하고 있습니다. 부모는 자녀를 소유물이 아닌 하느님의 선물로 대하고, 자녀는 부모를 통해 생명의 근원이신 하느님을 공경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사랑을 통해 하느님께 나아가는 가정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힘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하느님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곧바로 따랐던 요셉 성인의 모습이 모범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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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전교수도회 김종오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오늘의 말씀(2025.12.28. 일.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 가정 성화 주간)
“꿈에 주님의 천사의 지시를 받은 요셉은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가서 피신하였다가 헤로대가 죽자 갈릴래아 지방으로 떠나, 나자렛이라고 하는 고을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 (마태오. 2,13 이하참조)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은 생명을 잉태하고 보호하며 기르는 곳입니다. 우주 만물의 주인이신 주님의 미래와 꿈이 자라는 곳이기에 거룩한 가정입니다.
성가정은 우리의 미완성과 불완전성이 사랑으로 받아들여지는 곳입니다. 우리가 잘나거나 성숙해서 사랑받는 곳이 아니라 생명을 간직하고 있기에 사랑을 받는 곳입니다. 있는 그대로 우리 자신의 모습이 받아들여지는 곳입니다. 그래서 성가정입니다.
성가정은 기도와 대화의 장소입니다. 온 가족이 함께 주님께 기도로 대화하는 곳입니다. 주님께 드리는 기도처럼 온 가족이 서로 따뜻한 대화를 하는 곳입니다. 기도처럼 하는 대화를 통해 친밀한 일치를 이루는 곳이 성가정입니다.
성가정은 공감하는 곳입니다. 기쁨과 슬픔, 분노와 두려움을 함께 공감하는 곳입니다. 무감동과 무관심과 냉혹한 현실을 헤쳐가면서 겪는 고통과 영광을 나누며 공감하는 곳입니다. 공감하시는 주님이 계시기에 성가정입니다.
성가정은 서로에게 힘을 부여하는 동반관계를 가지는 곳입니다. 세상이 주는 위협과 걱정거리를 공유하며 서로에게 힘을 실어주는 곳입니다. 각자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지는 못하더라도 서로에게 힘을 부여하는 주님의 영을 받는 곳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두 세 사람이 모인 성가정은 작은 교회입니다. 우리 집의 행복만을 위한 꿈을 키우는 곳이 아니라, 사람과 세상의 평화와 정의와 사랑을 심는 주님의 꿈을 키우는 곳이 바로 성가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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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고통을 함께 나누고 고통 속에서도 말씀이 이루어지는 장소요 자리가 되는 가정>
오늘은 예수, 마리아, 요셉 성가정 축일입니다. 그런데 성가정이란 대체 어떤 가정을 말하는 것일까?
이에 대한 답을 바오로 사도는 제2독서를 통해 이렇게 들려줍니다. 그는 ‘하느님께 선택된 사람, 거룩한 사람, 사랑받는 사람답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동정과 호의와 겸손과 온유와 인내를 입은 사람으로 사는 것’이며, ‘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서로 참아주고 용서해주고, 그 모든 것 위에 사랑을 입는 것’이다.(콜로 3,12-14 참조)
또한 ‘평화를 누리도록 부르심을 받은 사람으로서 평화가 마음을 다스리게 하고, 감사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며(콜로 3,15 참조), ‘그리스도의 말씀이 풍성히 머무르게 하며, 무엇이나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면서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것’이고(콜로 3,16-17 참조), 서로 ‘순종하고 사랑하는 것’이다.(콜로 3,18-20 참조)
한편, 이를 구체적으로 오늘 복음에서 찾는다면, ‘성가정’이란 ‘말씀’에 따라 살아가는 가정이요, ‘말씀’에 순명하는 가정이요, ‘말씀’이 성취되는 가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말씀이신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그분이 주인되게 하는 가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두 가지 말씀의 성취를 전해줍니다. 곧 “내가 내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었다.”(마태 2,15), “그는 나자렛 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마태 2,23)라는 말씀의 성취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들의 성취 안에는 모진 고통들이 함께 자리 잡고 있습니다. 곧 이 가정은 이집트에서 불려나오기까지, 또 나자렛 사람으로 불리기까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쫓겨다녀야했고, 변방의 거류민으로 살아야 했고, 숨어 살아야만 했습니다. 그러니 고통이 없는 가정이 ‘성가정’이라는 말은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아니 어쩌면, ‘성가정’에는 고통이 필수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말씀의 성취에는 고통이 따르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가 있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성가정’이란 고통이 없고 편안하고 안정된 단란한 가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함께 나누고 고통 속에서도 말씀이 이루어지는 장소요 자리가 되는 가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말씀을 이루는 사람이기에 앞서, ‘말씀이 이루어지는 장소요 공간’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말씀이 활동하고 성취되는 모습은 참으로 신기합니다. 무엇보다도 신비로운 것은 ‘말씀이신 분’께서 말을 하지도 못하는 ‘아기’ 모습으로 우리 가정과 우리 공동체 안에 들어와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묘하게도 그 ‘아기’는 말을 할 줄 모르면서도 우리를 이끄십니다. 참으로 묘한 신비입니다. ‘말씀이시면서 말을 못하는’ 이 아기는 때로는 침묵으로, 때로는 고통으로, 때로는 무력하기 짝이 없는 모습으로, 때로는 보이지도 않는 빈자리가 되어 우리네 가정, 우리네 공동체를 이끄십니다. 이렇게 ‘아기 예수님’은 우리 가정과 공동체의 주인이면서도 우리 모두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빈자리’로 계십니다.
마치 ‘가나안의 혼인잔치’에서 주인공이면서도 보이지 않는 ‘빈자리’로 있는 신부처럼, 우리 가정 안에서도 ‘빈자리’로 계시면서 우리 모두를 품으시고 끌어안으십니다. 그러면서도 성취를 이루십니다.
그러니, ‘공동체의 빈자리’, 그곳이 바로 중심임을 보아야 할 일입니다. 곧 ‘자기 자신이 중심이 아님’을 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의 가정, 우리의 공동체 안에 말씀이 살아있는지 들여다보아야 할 일입니다. 곧 ‘말씀이신 분’이 우리 안에 작고 낮고 무력하게 말 못하는 아기의 모습으로 살아계심을 볼 일입니다.
‘말씀’은 사랑하는 이 앞에서 항상 작고 낮은 이로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 앞에서는 결코 자신을 높이거나 교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와 함께 계시는 예수님을 관상하는 것은 언제나 우리보다 작고 나약한 예수님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보다 작고 무력한 예수님을 만났는가?
나를 사랑하기에 언제나 나보다 작은 모습으로 내 앞에 무력하게 낮아져 있는 그분을 말입니다. 심지어는 ‘없는 자’, ‘빈자리’가 되어 있는 그분을 말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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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 · 샘 기도>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거라.”(마태 2,20)
주님!
말씀에 귀 기울이며 들은 말씀에 따라 살아가는 가정이 되게 하소서.
말씀이 주인이요 중심이 되는 순명하는 가정이 되게 하소서.
말씀이 살아있고 존중되는 활기찬 가정이 되게 하소서.
우리 가정이 서로의 고통을 끌어안고 십자가를 함께 지는 말씀이 이루어지는 장소가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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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 중심의 사랑의 공동체>
“행복하여라.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 그분의 길을 걷는 모든 사람!“(시편 126,1)
위 화답송 시편을 요약한 “주님의 집에 사는 자, 얼마나 행복되리.” 방금 부른 화답송 후렴이 참 흥겨워 오늘 종일 노래 기도로 바치려 합니다. 주님 성탄 8일 축제내 네 번째 날인 오늘 12월28일은 주일이자 참 아름다운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입니다.
2025년 말부터 2026년 새해까지 계속 이어지는 주님 성탄 축제가 우리를 기쁨과 평화로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또 오늘 2025년 12월28일부터 2026년1월3일 까지는 제25회 가정성화주간이기도 합니다.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담당 문창우 주교도 담화문에서 가정교회의 중요성을 상기시킵니다.
“가정은 단순한 외적생활의 공간만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생명이 흘러넘치는 가장 작은 교회 곧 ‘가정교회’입니다. 이러한 가정교회는 생명을 환대하고, 서로의 존엄을 지켜주고 보호하며, 사랑으로 서로를 일으켜 세우는 하느님의 첫 번째 선물입니다.”
바로 이런 가정교회는 물론 시공을 초월하여 모든 공동체의 빛나는 원형이 바로 주님 성탄과 더불어 성전 제대앞에 상징적으로 꾸며진 아름답고 소박한, 신비로운 사랑의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공동체>입니다. 양부 요셉과 어머니 마리아는 관상적 침묵중에 중심에 자리잡은 구유안의 아기 예수님을 사랑이 가득 담긴 눈길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은혜로운 아침 찬미가 1절만 소개합니다.
“나자렛 오막살이 순박한 예배 얼마나 감미로운 추억일는가 나자렛 예수님의 고요한 생활 그생활 기억하며 노래들하세.”
누구나의 성장 과정에서 따뜻한 보금자리 가정 공동체의 영향은 절대적입니다. 아니 아이들뿐 아니라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평생 가정 공동체의 따뜻한 보금자리 품은 절대적입니다. 이런 공동체 없이 혼자서는 살 수 없습니다. 그런데 1인가구 36%에 800만명이 이에 속한다 하니 이제 <고독사>나 <고립사>가 빈번한 현실이 되고 말았습니다.
바야흐로 성가정 교회 공동체가 <하느님의 품>이 되어 이런 모든 이를 받아들여할 시대가 된 것 같습니다. 넓고 깊이보면 인류 모두가 <하느님의 한가족, 한식구>이기 때문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도 “하느님은 아버지이시고, 교회는 어머니이시니, 우리는 형제입니다.” 말씀하시며 이를 암시합니다.
바로 이런 성가정 교회 공동체의 모범이 여기 <요셉 수도원 성가정 교회 공동체>요, 참 넓고 깊은 하느님의 품이 되어 참 많은 이들의 성가정이 되고 있음을 봅니다. 가정공동체는 물론 다양하고 많은 공동체가 무너지고 파괴되는 개인주의, 생존경쟁, 적자생존, 물질만능, AI 만능의 작금의 위기시대에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주님의 성가정 공동체의 건설이겠습니다.
혈연만으로는 부족합니다. 혈연의 가정 공동체 역시 끊임없이 주님의 거룩한 성가정 교회 공동체로 업그레이드 되어야 함을 배웁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바 이상적 성가정 교회 공동체는 무엇일까요?
첫째, 성가정 교회 공동체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 중심>의 공동체입니다.
함께 산다고 성가정 공동체가 아닙니다. 모두가 공동체의 중심인 주님을 바라보고 살아야 자유롭고 행복한 다양성의 일치의 공동체가 됩니다. 오늘 복음의 성가정을 인도하는 성 요셉은 하느님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니 말그대로 하느님 중심의 삶의 모범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에 하느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하느님과 끝없이 사랑과 생명을 나누는 소통의 기도가 얼마나 절대적인지 배웁니다. 마음이 맞아서, 성격이나 취향이, 고향이 같아서, 일치가 아니라, 바라보는 중심의 방향이 같기에, 모두 공동체의 중심인 주님을 바라보기에 말그대로 자유롭고 평화로운 다양성의 일치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하느님 안에서 그리스도 중심의 공동체임을 명확히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을 다스리게 하십시오. 여러분은 한 몸 안에서 이 평화를 누리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감사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리스도의 말씀이 여러분 가운데 풍성히 머무르게 하십시오. 지혜를 다하여 서로 가르치고 타이르십시오.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느님께 시편과 찬미가와 영가를 불러 드리십시오. 말이든 행동이든 무엇이나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면서, 그분을 통하여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십시오.”
끊임없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공동체의 중심이신 아버지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 삶이 온전한 성가정 공동체를 만들어 줍니다. 영원한 현재진행형중에 성장, 성숙되어 하느님을 닮아가는 성가정 공동체요 이에 함께 바치는 공동기도는 절대적입니다. 비단 수도자뿐 아니라 성가정 공동체를 지향한다면 시편성무일도와 미사라는 두 공동기도의 실천을 간곡히 권합니다.
둘째, 성가정 교회 공동체는 <온실같은 공동체>가 아닙니다.
세상에 문제없는 유토피아 공동체는 없습니다. 고통이나 병이 어려움이 없어 성가정 공동체가 아니라 고통과 어려움중에도 사랑이, 기쁨과 평화가 있어 성가정 공동체입니다. 예수님의 성가정 공동체나 우리 각자 공동체를 보십시오. 정말 답이 없어 보입니다. 도대체 끝이 보이지 않는 절망적 상황은 얼마나 많은지요. 보십시오! 오늘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을 인도하는 성 요셉! 얼마나 위태하고 아슬아슬한지요. 이집트로 피신하는 과정이나 이집트에서 돌아오는 과정에서 어려움은 또 계속되는 삶의 여정에서 고통과 시련은 끝이 없음을 봅니다. 놀라운 것은 이런 시련과 고난의 여정중에도 결코 무너지지 않고 내적기쁨과 평화, 그리고 주님 안에서 단단한 일치를 이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옛 현자의 가르침도 좋은 깨우침이 됩니다.
“봄과 겨울이 모두 계절이듯, 살아가며 겪었던 고통과 고난 또한 나를 이루는 것이다.”<다산>
“근심과 고난이 나를 살게 하고, 편안함과 즐거움이 나를 죽음으로 이끈다.”<맹자>
시련과 고난을 겪어가며 내적 성장과 성숙이요, 깊이 익어가는 성화의 인생 여정임은 <영혼의 나이테>가 입증할 것입니다.
셋째, 성가정 교회 공동체는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사랑이 답입니다. 집착없는 사랑, 자유롭게 하는 사랑, 생명을 주는 사랑, 바로 무사하고 순수한 아가페 사랑이 답입니다. 제2독서 콜로새서에서 바오로가 주님 사랑을 참 대변합니다.
“하느님께 선택된 사람, 거룩한 사람, 사랑받는 사람답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동정과 호의와 겸손과 온유와 인내를 입으십시오. 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서로 참아주고 서로 용서해 주십시오. 주님께서 여러분을 용서한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입으십시오. 사랑은 완전하게 묶어주는 끈입니다.”
늘 입고 살아야 할 <사랑의 옷>이요, 내 삶을 추슬러 묶어주어야 할 <사랑의 끈>입니다. 사랑의 의무와 책임은 전방위적으로 펼쳐집니다. 사랑은 구체적 실행의 동사입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하고,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십시오. 아내를 모질게 대하지 마십시오. 자녀들을 들볶아 기를 꺽지 마십시오. 저녀들은 무슨 일에나 부모에게 순종하십시오.”
집회서 저자는 노부모를 비롯한 노인들에 대한 각별한 사랑을 실천할 것을 명하십니다. 이 모든 부모의 사랑은 어린 자녀들은 그대로 보고 배웁니다. 노령화의 시대, 무수한 이웃 노인들을 대할 때 늘 염두에 둬야 할 금과옥조의 가르침입니다.
“아버지를 공경하는 이는 죄를 용서받고 어머니를 영광스럽게 하는 이는 보물을 쌓는 이와 같다.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는 이는 장수하고, 아버지를 공경하는 이는 자녀들에게 기쁨을 얻고, 그가 기도하는 날 받아들여진다. 얘야, 네 아버지가 나이 들었을 때 잘 보살피고, 그가 살아 있을 때 슬프게 하지 마라. 그가 지각을 잃더라도 인내심을 가지고, 그를 업신여기지 않도록 네 힘을 다하여라. 아버지에 대한 효행은 잊혀지지 않으니, 네 죄를 상쇄할 여지를 마련해 주리라.”
평생과제가 사랑의 실천입니다. 눈만 열리면 곳곳에 필요로 하는 사랑의 눈길, 사랑의 손길, 사랑의 발길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온갖 시련과 고난중에도 하느님 중심의 사랑의 공동체로 성장, 성숙시켜 주십니다.
아침 성무일도시 즈카르야 후렴으로 강론을 마칩니다.
"주님, 당신 성가정의 모범으로 우리를 비추어 주시고, 우리의 걸음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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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기도로 힘을 얻고 덕들로 중무장하고>
1인 가구도 가정이라고 할 수 있을까? 제 생각에 1인 가구는 엄밀한 의미에서 가정일 수 없습니다.
왜냐면 가정에 대한 사전의 정의를 보면 부부를 중심으로 그 부모나 자녀를 포함한 집단이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이에 비해 가구는 집안에 살면서 끼니를 함께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합니다. 그러니 5인 가구는 다섯이 한집에 살아도 가정이라고 할 수 없고, 1인 가구는 더더욱 가정이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현재 우리나라 1인 가구 비율이 36%나 되는데 왜 1인 가구가 이렇게 늘어날까요?
제 생각에 같이 사는 것이 싫기 때문이고, 같이 살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같이 살기 싫고 같이 살 능력이 없는 이유는 우리 안에 사랑이 없고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참 이상합니다. 인간은 그렇게 사랑하고 싶고 사랑받고 싶은데 어찌 사랑이 없고 사랑할 수 없게 된 것입니까?
집단/공동체 안에서 서로의 자유를 존중하던 건강한 개인주의가 차츰 쾌락주의적이고 이기주의적인 개인주의로 병이 들고, 완전한 나의 자유 공간 곧 자기의 사적 영역(Privacy)을 고집하게 되면서 이웃을 침범자 또는 간섭자로 여기게 되고 관계 맺기도 두려워하게 된 것입니다.
요즘 실로 많은 사람이 관계 두려움을 갖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맹수가 두려움의 대상이었다면 지금은 인간이 두렵고 그래서 대인 관계에 있어서 두려움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이렇게 관계 두려움이 큰 사람은 1인 가구를 이루거나 그래도 사랑하고 싶은 사람은 반려동물과 대체 가정을 꾸립니다.
관계 두려움-대체 가정, 이것이 오늘날 우리 자화상이거나 우리를 둘러싼 환경인데 우리 신앙인들과 공동체는 성가정에서 뭘 배우면 좋을까요?
역설적이게도 인간이 두렵기에 하느님을 찾는 것입니다. 인간이 두려워 인간을 피해 자기 안으로 숨어드는 것이 보통 인간들이라면 우리 신앙인은 인간이 두려울 때 하느님께로 피해 가서 숨는 존재들입니다.
물론 숨기만 하는 것이 아니지요. 이세벨이 두려워 하느님의 산 호렙으로 도망치는 엘리야가 천사의 음식으로 힘을 얻고 동굴에서 하느님을 체험하였듯,
두려운 형과의 만남을 앞두고 야곱이 하느님과 밤새 씨름하여 힘을 얻듯 기도를 통해 하느님께 힘을 얻고 하느님의 덕들로 중무장을 하는 겁니다.
이 중무장에 대해 사도 바오로는 오늘 이렇게 묘사하며 권고합니다. “형제 여러분, 하느님께 선택된 사람, 거룩한 사람, 사랑받는 사람답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동정과 호의와 겸손과 온유와 인내를 입으십시오. 누가 누구에게 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서로 참아 주고 용서해 주십시오. 주님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입으십시오.”
1단계: 관계가 두려울수록 하느님께로 갈 것입니다.
2단계: 기도로 힘을 얻고 사랑으로 중무장하고서 사람들을 만날 것입니다.
3단계: 만난 사람들과 힘을 합쳐 사랑의 가정과 사랑의 군대를 이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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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12.28) -가정성화주간-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라."(마태2,13)
<예수님이 가장인 성가정!>
오늘 복음(마태 2,13-15.19-23)은 '아기 예수님께서 이집트로 피신하셨다가 돌아오시는 말씀'입니다.
오늘은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입니다.
'나자렛의 성가정을 기억하며 이를 본받자는 축일'입니다. 오늘부터 시작되는 한 주간은 '가정성화주간'입니다. 가정 공동체의 소중함을 깨닫고,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는 성가정을 이룰 것을 다짐하는 주간입니다.
그리스도인 가정에는 집집마다 십자고상이 걸려 있습니다. 그것도 가장 중심이 되는 곳에. 십자고상은 장식품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우리 가정의 주인이심을 드러내는 표지입니다.
가정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인격 형성과 참성공 여부'가 가정에 달려 있습니다.
한 사람의 인격은 부부 사랑과 엄마 뱃속에서부터 시작된 사랑을 먹고 자라납니다. 가정에서 사랑을 충만히 먹고 자란 사람들은 훗날 아름다운 모습으로 우뚝 서 있습니다.
때문에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 너무나도 중요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 방식대로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세 번째 권고문인 '사랑의 기쁨(Amoris Laetitia)'을 통해 가정의 위기를 언급하시면서 무너져 가는 가정 공동체를 살리자고 호소하셨습니다. 이를 위해 '부부 사랑과 자녀들의 신앙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셨습니다.
오늘 독서(집회 3,2-6.12-14; 콜로 3,12-21)는 '가족 사랑의 실천에 대한 말씀'입니다. 한마디로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는 가정, 예수님을 참주인으로, 참가장으로 모시고 있는 가정'이 성가정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내어줌의 사랑이 넘쳐나는 가정'이 성가정입니다.
이런 성가정을 이루기 위해 함께 노력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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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라."(마태 2,13)
성가정은
하느님의 뜻을
살아내는
가정입니다.
예수님의
성가정은
불안정한 삶,
낯선 땅, 힘겨운
가난을 겪습니다.
그럼에도
그 가정은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완벽해서가 아니라
서로를 끝까지
품었기 때문입니다.
서로를 소유하지 않고
모두를 하느님께
봉헌하는
가정입니다.
성가정의 신앙은
계산이 아니라,
말씀을 믿고
움직이는
기도입니다.
가정을 거룩하게
만드는 것은
조건과 상황이
아니라 진실한
사랑입니다.
흔들리되
중심을 잃지 않는
믿음의
가정입니다.
높아지려 하지 않고
생명이 숨 쉴 수 있는
낮은 자리를 택합니다.
그리고
현실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가정은 신앙의
가장 중요한
자리입니다.
대화와 이해를 통해
서로의 존재 방식을
열어 주는 자리가
바로 가정입니다.
성가정의 안전은
구조가 아니라
관계의 신뢰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옳음의
기준은 형식이 아니라
고통을 줄이고
존엄을 지키는 데
있습니다.
성가정이란
이상적 모델을
흉내 내는
가정이 아니라,
매 순간의 선택에서
가치를 생명으로
살아가는 공동체입니다.
매 순간의
위기 속에서도
사랑을 살리는
삶의 자리,
성가정이
되기를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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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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