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在日 광복군 “내 나라에서 죽고 싶었다”
오성규 애국지사가 오랜 일본 생활을 정리하고 그제 영구 환국했다. 마지막 재일(在日) 광복군이자 독립유공자인 그는 “일본에서 죽을 수는 없다. 자기 나라서 죽어야지”라며 조국행을 선택했다. 1923년생으로 올해 100세인 오 애국지사는 10대 후반에 중국에서 광복군 제3지대(支隊)에 입대했다. 1945년 미군의 도움으로 한미 특수훈련을 받고 국내 진격을 준비하다 광복을 맞았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고, 생존하는 독립유공자 9명 가운데 1명이다.
▷귀국 소망은 해방 후 조국 땅을 밟지 못했던 아픔에서 시작됐다. 그는 해방 후 중국에 남아 광복군 상하이 특파단원으로 활동했다. 그러다 일본에 정착해 재일 교포를 위해 일했다. 2018년 아내와 사별한 뒤에는 환국의 뜻을 더 세웠다고 한다. 그의 귀국 과정은 독립을 위해 헌신했던 어른에게 조국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확인시켜주는 기회였다.
▷그가 탄 귀국 항공기는 기내 방송으로 애국지사의 탑승 소식을 알리는 예를 갖췄다. 공항 입국장에서는 어린이 합창단이 “조국의 영예를 어깨에 메고…”로 시작하는 광복군 제3지대 노래를 불렀다. 청년 오성규가 중국 땅에서 배고픔 설움 두려움을 이겨내기 위해 부르고 또 불렀을 노래다. 오 애국지사는 80년 뒤 이런 순간이 올 줄 상상이나 했을까. 그는 “감개무량해 말이 나오지 않는다”고 했다.
▷오 애국지사는 제일 먼저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을 찾았다. 자신의 상관이었던 광복군 제3지대장 김학규 장군 묘소에서 감격 어린 거수경례를 했다. 그는 “그동안 찾아오지 못해 죄송합니다”라고 안부를 전했다. 오 애국지사는 1940년대 베이징에서 광복군 창설 소식을 듣고 충칭까지 2000km를 걸었던 기억이 아직도 새롭다. “짚신이 터져 발에서 피가 났다”는 회상도 했다. 그날 묘역에는 뜻깊은 태극기가 걸렸다. 통상의 태극기 옆에 광복군 제3지대 2구대에서 활동하던 병사가 1946년 이후 간직해 오던 태극기를 그대로 본뜬 것을 게양했다. 태극과 4괘 사이로 “피흘림 없는 독립은 값없는 독립이란 것을 자각하자” “백전백승” 등이 씌어 있다. 나라 없는 병사들의 피 끓는 다짐이 눈에 선하다.
▷오늘로 광복 78년을 맞았다. 힘없어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 온 국민이 힘을 모아 어려움을 딛고 나라를 일으킨 것이 자랑스러운 세월이다. 힘을 되찾았기에 오 애국지사처럼 자기를 버릴 각오를 세운 어른을 기억할 수 있게 됐다. 오 애국지사는 오늘 광복절 경축식에 귀빈으로 참석한다. 100세 나이에 조국의 품을 되찾은 그의 삶에는 우리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후대에게 알리고 기억하도록 해야 한다.
김승련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