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과 한국인
- 당시는 요즈음과는 달리 여권발급 자체가 극히 제한적이었고 또 나라가 가난하니 항상 달라가 부족해 암시장 시세가 은행 환율보다 훨씬 높았다. 하도 먹고살기가 힘든 세상이니 먹는 입이라도 줄이려고 그랬는지 국가에서는 이민을 적극 장려하고 있었다. 그런 이민의 경우에도 1인당 미화 200불 만 은행을 통해 환전하게 했으니 나머지 필요한 금액은 남대문 암 달러상을 통해서 조달하곤 했다.
- 필자가 외국 항공사와 미팅을 위해 출장 할 때도 숙식비 정도만 환전이 가능해 비상금을 암 달라상을 통해 마련했었다. 이렇게 여권을 얻기가 그야말로 하늘의 별따기에다 환전 또한 용이치 못한 시절이었으나 그렇다고 우리 국민의 해외여행 꿈 자체를 포기시킬 수는 없었다.
- 필자가 대한항공 암스테르담 지점에 근무할 때가 마침 국회위원이나 장차관, 국장급은 관련 업무 시찰이나 협의차, 대학교수들은 각종 학술회의 참석 명목으로, 재벌회사 회장/사장 및 중역 그리고 직원들은 시장 조사차, 운동선수들은 교환 경기를 하기 위하여 하다 못해 미용사들은 세계 미용기술경연대회 참석차 등등등 갖가지 명목으로 여권을 만들어 해외여행을 감행하고 돌아올 때는 홍콩을 들려, 한 보따리씩 쇼핑을 해오는 패턴이었는데 이게 유행처럼 번지던 시기였다. 해외여행 한번 했다는 자체가 지위와 재력이나 능력을 과시하는 척도 처럼 여겨질 때였다.
- 초기에는 일본, 동남아, 미주 이렇게 시작되더니 KAL 이 서울/파리 노선을 개설하고부터는 구주로의 여행객들이 가파르게 증가하기 시작했다. 필자가 암스테르담에 주재하고 보니 업무에 못지않게 M/A ( MEET & ASSISTANCE: 회사 또는 그룹 차원의 주요 인사 접대 )가 중요한 업무로 떠올랐다. 비록 암스테르담은 KAL의 취항노선 (ON-LINE ) 은 아니었으나 이왕 이렇게 어렵게 출국하였으니 불란서 파리를 거쳐 화란을 들러보고 스위스 츄리히를 거쳐 귀국하는 것이 정석처럼 자리 잡았다.
- 상황이 이렇다 보니 필자는 암스테르담 시절 3년 동안, 한국에서는 감히 범접을 할 수 없었던 많은 높은분들과 하루 또는 이틀( 경우에 따라서는 더 길게도) 을 함께지내는 영광을 누렸다. 필자는 이분들을 공항에서 영접하고 주어진 기간 중 암스테르담은 물론 화란의 유명 관광지를 가이드했다.
- 보통은 공항에서 마중 (P/U ) 후 호텔 체크인이 끝나면 시내의 서양식당 ( 한국식당이 없었던 시절임)에서 함께 저녁을 먹고 호텔로 바래다주고 다음날 아침에 호텔로 찾아가 식사 (또 서양식)를 하며 그날의 일정을 짜는데 회사 앞 국립박물관이나 화란이 낳은 세계적인 화가인 반 고흐 미술관을 추천해도 그런 곳을 가보자고 하는 사람은 드믈었다. 홀랜드 민속마을, 풍차마을, 알크마르나, 볼렌담 치즈 축제와 튤립 농원 구경 ( 봄 한철뿐임) 그리고 암스테르담 운하 투어와 안네 프랑크 하우스 등등을 주로 모시고 다녔다.
- 그러나 많은 사람의 지대한 관심사는 다른 곳에 있었다. 바로 암스테르담 중심가 댐광장과 이웃한 운하 지대에 포진한 유구 (?) 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홍등가다. 성미 급한 분은 도착 당일 저녁을 먹자마자 홍등가로 가자고 조르는데 그곳은 밤 9시가 되어야 영업을 시작한다고 해도 막무가내로 가보자고 한다. 이리저리 시간을 끌다 그곳에 갔는데 마침 일본 단체 관광객들을 만났다. 나의 빈약한 설명에 실망했는지 그는 자기가 일본말을 아니까 그 가이드 설명을 듣는 게 더 재미있겠다고 해서 우리는 부끄럽지만 일본 단체관광단 뒤를 따라다닌 적도 있었다.
- 다 낡아빠진 16밀리 필름을 통해 ( 그것도 숨어서) SEX 영화를 탐하던 한국 남성들이 그곳 홍등가에서 자유롭게 즐기는 SEX 영화, STRIP SHOW 와 LIVE SHOW는 그들에게는 그야말로 컬처쇼크 ( 문화충격)였으나 귀국 후에는 자랑스러운 이야기 소재가 되곤 하던 시절이었다.
- 업어 치던 메어 치던 ( 그곳이 홍등가이던 민속촌이던 ) 필자의 안내로 화란 관광을 마치고 귀국 비행기 시간에 맞춰 공항으로 모시고 가는 중 여러사람들이 내 머리카락을 하늘로 솟구치게 하는 소리를 불쑥불쑥 내 뱉는다. “ 에이!, 암스테르담, 볼 것 많은 줄 알고 왔는데 별거 없구먼. “ 완전히 김밥 옆구리 터지는 소리였다.
- 필자는 그래도 나름대로 그들에게 되도록 많은 것을 보여주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였건만 되돌아오는 것이 과연 요것이란 말인가? 혹시 내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나? 의문에 의문이 꼬리를 문다. 그리고 자괴감도 들곤 했었다.
- 그러다 3년 여의 암스테르담 근무가 거의 끝나갈 무렵 화란의 사법체계 연구차 법무부 사법연수원 원장님이 오셨다. 참으로 학식이 많고 젊잖은 분이었다. 그분을 모시고 국립미술관과 반 고흐 미술관을 구경하며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헤이그에 있는 국제사법재판소를 다녀올 때는 곁에 있는 이준 열사묘도 참배했다. 필자는 3년 여의 암스테르담 재직기간 중 높은 분을 많이 모셨지만 이준 열사묘 참배는 이 분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그분은 자기가 본 화란의 법관 선발과 교육과정에 대하여, 필자는 적어도 4개 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도록짜여진 화란의 언어교육과 구라파 대륙에서 로테르담 항구의 역할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 그는 100프로 성적순인 우리나라와 달리 화란의 법관 선발은 성적순이 아니라 차라리 인성 순이라고 보는 편이 올바르다고 했다. 초등학교부터 시작된 내신에서 어떠한 경우라도 성격이 난폭하거나 잔인하다던지 경솔하거나 고집이 세고 이기적이며 남과 잘 어울리지 못한다고 기록되어진 학생은 성적과는 관계없이 일단 법관 선발에서 제외한다고 한다.
- “ 공부만 파고들고 놀 줄 모르는 사람은 편협한 ( 인성이 부족한 ) 사람이 된고 만다. < All work and no play make Jack a narrow minded boy. >라는 서양 속담이 있다며 우리나라 사법부의 장래를 염려하셨는데 40여 년 이상이 지난 요즈음의 상황을 보니 그의 우려가 현실이 되었다.
- 불과 이틀 사이에 마음이 통한 그분을 그날 저녁 우리 동네 한인 잔치(?)에 초대했다. 잔치라야 주재원 3가구 그리고 우리보다 먼저 그곳에 정착한 교민 한 가구 이렇게 4가구가 한 달에 한번 모여 회식하는 자리였다. 실례가 될지 몰라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으나 원장님은 오히려 너무 고마워하셨다. 그날 저녁 우리는 참으로 유쾌한 시간을 가졌다.
- 다음날 공항으로 가면서도 전날 저녁 이야기를 계속했다. 어제 그렇게 한식으로 배를 채웠더니 그간의 피로가 싹 가시더란다. 그리고 덧붙여서양음식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역시 한국사람은 한식을 먹어야 힘이 난다고도 했다. 그리고 보니 앞서 이곳을 방문했던 분들이 공항으로 가는 차 안에서 나에게 불만에 차서 한마디 하던 “ 에이!, 암스테르담, 볼 것 많은 줄 알고 왔는데 별거 없그먼 “ 이라는 말의 근원을 뒤늦게나마 찾은듯했다.
- 한참 후 필자가 그들의 나이가 되고 보니, 음식이 맞지 않아 소화도 잘 안되고 속이 더부룩할 때는 아무리 좋은 경치라도 그 느낌은 별로였다. 배 골치 않고 여행 다닐만하니 이번에는 음식이 문제였다. 전 세계에 널린 현지의 어떤 산해진미 (?) 라도 한국음식을 능가할 수 없었다.
- 유행가 “신토불이“ 의 영향이 너무 컸던 게 아닐까?
첫댓글 - 저의 글 중 SEX, STRIP SHOW 그리고 LIVE SHOW 라는 영어 단어가 그대로 들어가 있습니다.
- 원래는 한글로 섹스, 스트립 쇼, 라이브 쇼라고 표기하려고 하였으나 비속어라고 스팸메일함으로 바로 들어가서 부득이 영어로 표기 하였슴을 양지 바랍니다.
이 글을 읽는 분들 중에 그런 단어에 민망해 한다면 이 글 읽지 않기를 권합니다.
ㅎㅎㅎ
그 사법연수원장님이 보고싶군요.
어른이네요.
요즘은 어른 만나기가 더 어려운 세상인데 좋은 경험을 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