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를 향해 우뚝 솟아오른 김해 신어산(神魚山). 한 눈에 보아도 예사롭지 않은 기운을 가진 기암괴석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다.
누군가 금강산에 비견해 소금강 의미를 부여하고 싶었던 것일까? 이 산을 소금강산이라 했고 그 산자락에 자리한 산사를 금강사라 한 적이 있다. 산자락에 해무라도 드리워지면 기암괴석은 밤하늘의 별처럼 무더기로 빛났다. 그래서 은하산(銀河山)이라 하고 절을 은하사라 했다.
대웅전 수미단에 조각된 쌍어(雙魚)가 무언의 메시지를 보내는 듯하다. 쌍어문(雙魚文)은 재미있는 상징이다. 바빌로니아인에게 물고기는 신특한 존재. 물고기가 인간을 보호해 준다고 믿었을 정도다. 그 물고기가 인도로 흘러들어갔다는 설이 있다.
그 옛날, 아유타국의 허황옥은 가야국 시조인 김수로왕의 부인이 되었고, 오빠인 허보옥은 출가해 장유화상이 되었는데, 그 장유화상이 지은 사찰이 지금의 은하사다. 임란 때 허물어진 절을 다시 중수한 건 조선 인조 때. 대중들은 은하사 대웅전 대들보를 올리며 기록했다. ‘수로왕 42년’에 창건됐다고 말이다. 그리고 그 대들보에 머리는 용이고 몸통은 물고기인 신어(神魚)를 새겼다.
인도의 허황옥, 장유화상 설화, 그리고 쌍어(雙魚), 신어(神魚)에 담긴 상징이 대들보 기록에서 풀리는 듯하다. 우리나라에 불교가 전파된 건 고구려 소수림왕 때인 372년이다. 은하사를 중심으로 한 가야불교가 재조명되면 역사는 좀 더 거슬러 올라간다. 최초 불교 전래는 북방이 아닌 남방불교이며, 최초의 절은 김해 은하사가 되는 것이다. 수미단에 새겨진 쌍어문이 가야와 인도, 남북방 민족의 만남을 의미할 것이라는 전문가들의 일설은 그래서 설득력 있다. 은하사의 전 이름 서림사(西林寺)! 여느 사찰과 달리 은하사 대웅전은 서쪽을 향하고 있다. 아유타국을 그리워했을 장유 화상의 마음이 담겨 있는 듯하다.
▲아유타의 장유 화상 얼이 가득 담긴 은하사 전경.
은하사 회주 대성 스님은 가야불교의 재조명 필요성을 누구보다 역설하고 있다. 역사와 설화의 차이를 몰라서가 아니다. 대웅전 대들보 기록 하나로 불교역사가 바뀔 것이라는 기대 때문만도 아니다. 김해를 중심으로 한 주변지역에 서려 있는 ‘가야불교’가 좀 더 조명되기를 바라기 마음이 크기 때문이다. ‘설화일 뿐’이라 치부하고 마는 게 못내 안타까운 것이리라.
녹차 한 잔 우려 낸 스님은 “가야불교 역사보다 한국불교가 더 큰 문제 아닌가!”라며 침통해 했다. 승가의 불미스런 일들이 언론에 보도되며 세인들의 입방아에까지 오르니 “고개 들고 다닐 면목이 없다”고 한다.
“누구 탓 할게 없지. 내가 공부 안 한 탓이지! 공업(共業)이야 공업.”
스님은 이내 의미심장한 한마디를 푸념처럼 되뇌었다. “원력이 있어야 해. 범어사 낭백 스님처럼 말야….”
조선 중기, 부산 동래 범어사에 주석했던 낭백 스님을 말함이다. 숭유억불 정책에 따른 스님들의 고초는 전국 사찰에 미쳤는데 범어사도 예외는 아니었다. 동래를 다스리는 부사(府使)는 특히나 불교를 싫어하여 관권을 이용해 270여종이나 되는 잡역을 부과했다. 수행은 물론 새벽예불도 제대로 올릴 수 없는 지경으로 만든 것이다.
낭백 스님은 부처님 앞에서 서원했다. ‘이 생을 마치고 내생에는 높은 벼슬에 오르겠습니다. 관권의 구속과 혹사 없이 스님들이 도를 닦을 수 있도록 제가 보살피게 해 주시옵소서.’
무주상보시를 실천하겠다는 의지를 다진 낭백 스님은 일주문 밖으로 나갔다. 샘을 파서 행인들에게 식수를 제공하고, 동구 밖 산비탈을 개간해 오이와 감자를 수확해 주린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촛불 켜고 밤늦도록 삼은 짚신을 다음날 아침 일찍 길가 나뭇가지에 걸어 놓았다. 길을 가던 나그네 누구든 필요하면 쓰라는 뜻이다. 어느 날, 한 행자를 불러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제 갈 때가 되었다. 앞으로 25년 뒤 절의 잡역을 없애고 불사를 하는 관리가 있거든 그 사람이 바로 나라고 알아라. 내가 쓰던 방은 잠그고 열지 말라.”그로부터 25년이 다 된 어느 날이었다. 동래 부사로 약관의 젊은 관리 조엄이 내려왔다.
25년 동안 굳게 닫힌 낭백 스님의 문 앞에 섰다. “저 문을 열라!” 부사의 명을 거역할 수 없었던 스님들은 어쩔 수 없이 방을 열었다. 조엄은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한마디 했다. “너무도 편안하다. 내 방 같다!” 이를 지켜본 노 스님이 물었다. “부사는 올해 몇 살이오?” “25살이오.” “오늘이 낭백 스님 재일이오!” 조엄은 그 자리에서 범어사에 부여된 사역을 거뒀다.
영조 임금 곁에서 대사헌, 대사간, 이조판사를 지내며 영조 임금 곁에서 국가 시책을 보좌했던 인물, 조선통신사로 일본에 다녀올 때 고구마를 들여와 구황(救荒) 작물로 보급했던 바로 그 조엄이다.
“이석기 의원 문제로 나라가 좀 어수선하지요? 다른 것 다 떠나서 난, 애국가 문제만큼은 한 번쯤 짚어봐야 한다고 봅니다.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부르면 뭐합니까? 감동이 없잖아요! 애국심이 없어 감동이 없는 것일까요? 멜로디가 우리 정서에 딱 와 닿지 않으니 감동이 없는 겁니다. 일례로, ‘아리랑’ 선율에 흐르는 애국가! 남북팔도에서 불려지고, 지금도 부르는 그 아리랑을 음악가분들이 지혜를 모아 새롭게 작곡한다면 참으로 멋진 애국가가 나오리라 확신합니다.”
‘애국가’에 대한 국민적이고도 총체적인 재검토를 해 보자는 의미다. 아직 국화(國花)로 지정된 것은 아니지만 ‘무궁화’에 대한 인식은 어떤지 궁금했다.
“우리나라 꽃 무궁화? 우리 땅에 자생하지도 않은 꽃을 왜 국화로 인식해야 합니까? 꽃에도 우리 정서가 배어 있어야 해요. 그래야 국민들이 국화를 가슴에 담아 두지 않겠습니까? 대국민 설문조사로 하지 허구한 날 엉뚱한 설문만….” 동산 스님의 제자다운 풍모다. 1952년 6월, 범어사에서 전몰장병합동위령제가 봉행되던 날, 이승만 대통령은 중절모자를 쓴 채 법당 안에 들어와 부처님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유엔군사령관에게 뭐라고 설명하고 있었다. 이 모습을 본 동산 스님의 일갈이 떨어졌다.
“일국의 대통령이라는 분이 어찌 부처님께 손가락질을 하고 있단 말씀이시오!” 이승만 대통령은 그 자리서 사과했다. 동산 스님의 호통은 이어졌다. “법당 안에 들어오셨으면 누구나 모자를 벗어야 합니다.” 대통령 앞에서도 위엄을 잃지 않는 금정산 호랑이의 위풍당당에 사람들은 감복했다.
“동산 큰스님은 엄함과 자비의 두 마음을 자유자재로 활용했던 분입니다. 학인들이 해야 할 일을 제대로 못하면 호통 치셨지요.”
▲은하사에서 기도 정진하며 익힌 대성 스님의 붓글씨는 일품이다.
100여명의 대중이 새벽예불을 올릴 때 일이라고 한다. 예불이 장엄하게 봉행되려면 목소리의 높이나 크기도 일정해야 한다. 그런데 갓 출가한 스님들의 목소리가 튀어 나오기 일쑤였다. 이를 지켜 본 동산 스님은 “예불 하나도 마음을 다해 못하는 네 놈들이 인천(人天)의 사표가 될 수 있겠느냐!”며 목탁을 집어 던졌다.
동산 스님의 일화를 전하는 대성 스님은 만면에 미소를 머금는다.
“하지만 자비로운 분이셨습니다. 국수 한 그릇을 나누더라도 행자와 스님을 구분하지 않고, 부목으로 일하는 거사까지 직접 챙기셨습니다.”
대성 스님은 동산 스님의 호탕함이 묻어나는 일화 한 토막도 전했다.
어느 날, 선방 스님들이 동산 스님을 졸랐다. 영화 한 편 보자고 말이다. 제자들의 성화(?)에 동산 스님도 길을 나서 극장에 들어갔다. 영화가 시작 되자 스님은 이내 잠에 들었다. 영화가 끝났다. “큰 스님, 영화 끝났습니다!” 잠에서 깬 동산 스님이 한마디 하신다. “아, 이 영화 재밌다!”
대통령은 고사하고 정부예산 하나 얻어 내려 국회의원에게도 허리를 굽히는 스님들이 있는 시대에 범어사 호랑이는 그립기만 하다. 교계가 목소리를 제대로 내려면 승가부터 정신을 차려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렇다면 계율부터 철저히 지키려는 노력이 선행되어야 하지 않을까?
“고기 한 점 먹었느냐 안 먹었느냐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말을 하고 실천하면 계를 지킨 것이고, 말을 하고 실천하지 않으면 계를 어긴 것입니다. 교계와 사회 전 대중을 위한 언행을 하면 계를 지킨 것이고, 대중을 해하는 언행을 하면 계를 어긴 것입니다.”
율장에 새겨진 계율이 새롭게 숨을 쉬는 듯하다.
대성 스님은 전강 스님도 그립다고 했다. 몸을 제대로 돌보지 못하고 정진만 하다 폐병을 걸려 생사를 장담할 수 없던 스님은 몸을 추스르기 위해 은하사로 갔다. 하지만 그 전까지만 해도 범어사, 동화사, 용화사 선원 등에서 화두를 잡았던 대성 스님이다. 스님은 용화사 법보선원에서 정진할 때의 일을 떠올렸다. 모두 잠들어 있던 밤, 홀로 방을 나와 바윗돌에 앉아 달을 보고 있었다. 그 때 전강 스님이 다가왔다.
“대성 스님, 시심마 들고 있지? 자. 내가 ‘시’ 할 테니 다음 말 어디 해보시게?”
용맹정진을 해도 아직 증득함이 없어 노심초사 하는 납자의 긴장을 한 순간이나마 풀어주고 싶었던 것이다.
“큰 스님의 덕화는 그래서 크고 귀중합니다. 그저 지켜봐 주시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됩니다. 그 날 밤 이르셨던 말씀이 지금도 귀에 생생합니다. ‘원각산도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어야 오를 수 있다네!’ 생사를 내걸고 한다 해도 너무 조급해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대성 스님이 처음 이곳을 찾을 당시 은하사는 쇠잔해 있었다. 요사채는 물론 대웅전도 비가 새고 있었다고 한다. 부처님 전에 기도를 하면서 폐병은 깨끗하게 사라졌다. 이후 은하사를 다시 일으켜 세우겠다는 원력을 세워 오늘에 이르게 했다. 기도 가피를 체험한 스님은 은하사를 찾는 대중에게 48시간 내 1만배를 하라고 권한다. 단순히 성취욕을 자극시켜 불자로 귀의케 하기 위한 게 아니다.
▲대성 스님은 지금도 텃밭을 일구며 백장 선사의 가르침을 실천하고 있다.
“일정 시간 내 1만배를 해보겠다는 의지가 훗날 정진의 길로 들어서는 원력으로 재탄생 될 수 있습니다. 부처님 앞에서 무릎 꿇는 순간 하심을 얻을 수도 있고, 1만배 회향 직후 밀려오는 환희심에 자신을 돌이켜 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습니다. 혹자는 그 때 뿐이라 합니다만, 저는 그 한 번도 대단히 소중합니다. 이 세상 그 무엇도, 단 한 번의 생각과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동성 스님은 출·재가를 막론하고 불자라면 누구나 가슴에 ‘무진장(無盡藏)’이란 세 글자를 새겨주기 바란다고 했다. “직역하면 ‘다 함이 없는 창고’ 정도입니다. 하지만 좀 더 깊이 들어가야 합니다. 불교에서 ‘무진’이란 덕이 넓어 끝이 없음을 뜻하고, 닦고 닦아도 다함이 없는 법의(法義)를 이릅니다. 또한 ‘무진’이란 잘 융화되어 서로 방해함이 없는 상태 즉 원융무애의 뜻도 함축하고 있습니다. 누구나 갖고 있는 대 자비심, 이 세상 가장 큰 보물입니다. 쓰고 또 써도 다함이 없는 보물 중의 보물입니다. 그 마음을 내야 세상이 변합니다.”
그래서일까? 스님은 부산 지역에 대규모의 ‘국제선센터’가 들어서기를 희망하고 있다. 해당 지자체와의 협의도 진행중이다. 포교를 위한 게 아니다. 선을 통해 전 세계인이 ‘이기심’이라는 마음의 빗장을 풀고 무진장 쓸 수 있는 ‘상생심’을 찾아주기 위해서다. 대성 스님의 바람이 이뤄지기를 희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