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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전 정약용, 현재는 정세균 인물 배출 |
김진우의 족보이야기 -( 21) 나주 정씨 (羅州丁氏. 압해정씨) |
뿌리공원에 조성된 나주정씨 조형물.전면/대전 중구청 |
<뿌리공원에 새겨진 나주정씨 유래>
나주정씨의 본관은 처음에는 압해(押解)였다. 압해현은 지금의 전라남도 신안군 압해면으로,고려초에는 나주에 속한 현이였으나 고려말에 왜구의 침입으로 모두 나주로 철수하여 한때 무인도가 되자 조선조 태종 9년(1409년)에 이르러서는 폐현이 되었다. 이러한 연유로 나주정씨는 한동안 관적을 나주압해정씨로 쓰다가 영조 연간에 이르러서는 마침내 나주로 본관을 고쳐 오늘날까지 사용해오고 있다. 고려검교대장군 윤종(允宗)을 시조로 모신 우리 정씨는 그로부터 6세 이르기까지 압해현의 토성(土姓) 호족으로 거주하다가 7세손원보(元甫)에 이르러 비로소 개경(開京)으로 이주하였다. 이후 조선조에 이르러 수강(壽崗)은 성종때 병조참판으로 문장이 뛰어나 후세에 월헌집(月軒集)을 남겼고, 아들 옥형(玉亨)은 명종때 좌찬성(의정부 종1품)에 올라 금천군으로 봉군되고, 시호는 공안(恭安)이다. 그의 아들 응두(應斗)역시 좌찬성으로 시문에도 뛰어난 선비였고 금계군으로 습봉(襲封)되고, 영의정을 추증받았으며, 시호는 충정(忠靖)이다. 그의 윤조(胤祚),윤희(胤禧),윤우(允祐),윤복(胤福) 네아들 또한 모두 지방관찰사, 대사헌(大司憲:백관을 규찰하던 사헌부의 으뜸 종2품 벼슬.검찰총장) 등 고관을 지냄으로써 당시 수도 한양에서 명망 높은 가문으로 성장하였다. 숙종때의 시한(時翰)은 일체의 관직을 사양하고 성리학을 깊이 닦아 큰 학자가 되어서 우담집(愚潭集)을 남겼고, 영조때 형조판서를 지낸 범조(範祖)는 문학에도 뛰어난 해좌집(海佐集)을 남기고, 문헌(文憲)이란 시호를 받았으며, 세인이 익히 아는 정조때의 다산 정약용(若鏞)은 형조 참의까지 지냈으나 백서사건으로 인해 강진에서 17년간의 유배생활을 하면서도, 목민심서(牧民心書), 경세유표(經世遺表)등 500여권의 권위있는 저술을 남겼으며, 문도(文度)라는 시호를 받았다. 이렇듯 나주정씨 문중에서는 훌륭한 인물이 많이 나왔고, 조선왕조에서 무려 49명의 문과 급제자를 배출하였으며 9대 옥당(玉堂)의 가계를 이루었음은 참으로 가문의 자랑이 아닐 수 없다.
1997년 7월 31일
羅州丁氏 宗親會
뿌리공원에 조성된 나주정씨 조형물.후면/대전 중구청 |
<김진우 작가의 해설>
<현대인물>
정세균(산업자원부 장관.국회의원.현 민주당 대표).정일권(육군참모총장.육군대장 예편.1991년까지 자유총연맹총재.국무총리.국회의장).정래혁(육군중장예편.국방부장관.9.10대 국회의원.국보위 입법회의 부의장.제 11대 국회의장.민정당 대표위원).정시채( 전남부지사.전 농림부 장관.전 국회의원.현 사회복지법인 에데원 이사장).정내정. 정규복(국문학자.1958년 논문 <한국 고대 군담소설 연구> 등 다수의 논문을 발표.고려대학교 명예교수).정광진. 정춘동.압해정씨 대종회 회장 정규수(삼우 EMC 회장)
정문갑(丁文甲) : 전 도의회 의장 참의원 의원.정종삼(丁鍾三) : 전 경기도 병무청장
정재석(丁渽錫) : 전 상공부장관.경제기획원 차관.대학교수.정세현(丁世鉉) : 전 통일부장관
정우성(丁宇聲) : 전 청와대 외교안보수석, EU본부대사.정장현(丁璋鉉) : 전 국회의원.현 뉴코리아CC사장
정명섭(丁明燮) : 전 국회의원.정대천(丁大天) : 전 국회의원.정규상(丁奎祥) : 전 국회의원
정해남(丁海男) : 전 국회의원.정해걸(丁海杰) :국회의원. 정영희(丁英姬) : 국회의원
정해식(丁海植) : 전 충북지사
정영식(丁榮植) : 전 무안군수.목포시장.행자부 차관
정채륭(丁采隆) : 전 충무시장.전 경남부지사.행자부 공무원교육원장.전행자부 차관
정보성(丁普聲) : 전 판사.변호사
정태선(丁泰先) : 전 판사.변호사
정창남(丁昌男) : 전 고법판사.지원장
정문수(丁文秀) : 국제 변호사
정계성(丁啓聲) : 국제 변호사
정춘식(丁春植) : 변호사
정정환(丁정桓) : 국제 변호사
정병욱(丁炳旭) : 전 서울고검부장.변호사
정강찬(丁康讚) : 변호사
정종희(丁鍾熙) : 변호사
정병준(丁炳俊) : 변호사
정만진(丁滿鎭) : 서울지검 서부지청 검사
정해덕(丁海德) : 변호사
정운섭(丁雲燮) : 변호사
정해원(丁海元) : 변호사
정인진(丁仁鎭) : 울산지법 판사
정용해(丁龍海) : 변호사(창원)
정진영(丁震榮) : 변호사(국제)
정우정(丁宇政) : 서울지법 판사
정재봉(丁在封) : 의정부지검 판사
정지수(丁芝秀) : 전 주택공사 지사장
정만길(丁萬吉) : 예비역 중장.광업진흥공사 사장
정규성(丁奎成) : 전 정씨종친회 중앙회장.코스모스 회장
정달용(丁達龍) : 전 대구은행장
정흥진(丁興鎭) : 신한은행 지점장
정규봉(丁奎鳳) : 전 서부사료 대표이사
정동섭(丁東燮) : 대림포장 대표이사
정병린(丁炳麟) : 전 삼풍직물 회장
정해수(丁海洙) : 반도맨하탄 대표이사
정병립(丁炳立) : 신흥산업 대표이사
정득규(丁得圭) : 전 전남대 총장
정명현(丁明鉉) : 전 조대 약대학장
정병원(丁炳元) : 동경제대 졸, 전 한국전력공사 전기기계연구소장
정성계(丁性桂) : 일본제대 졸, 전 서울공대교수, 전 공군사관학교 교수부장
정병휴(丁炳烋) : 전 서울대교수.조선대 총장
정중환(丁仲煥) : 전 부산대 교수 박물관장 문학박사
정윤하(丁潤夏) : 포항공대 교수 공학박사.부총장
정정섭(丁正燮) : 전 광주교대 교수 전남사대부중 교장
정형진(丁亨鎭) : 예비역 소장.단국대 교수
정중수(丁重秀) : 전 중앙일보 문예중앙 주간
정규영(丁奎英) : 전 한국통신 기획실 송무부장
정동진(丁凍鎭) : 전 공업신문사 편집국장
정홍석(丁泓碩) : 전 한국 신문인협회 사무국장
정규석(丁奎錫) : 한국이동통신 연구소장
정영수(丁永水) : 동양화가
정대원(丁大元) : 동양화가
정광진(丁光鎭) : 서예가
정동석(丁東錫) : 작가
정옥근(丁玉根) : 해군참모총장 대장
정영진(丁永鎭) : 예비역 육군 중장
정만길(丁萬吉) : 예비역 육군 중장
정세섭(丁世燮) : 예비역 육군 소장
정일섭(丁一燮) : 예비역 육군 소장
정신진(丁信鎭) : 예비역 육군 소장
정형진(丁亨鎭) : 예비역 육군 소장
정채하(丁采夏) : 예비역 육군 소장
정선호(丁善鎬) : 예비역 육군 준장
정희성(丁熙聲) : 예비역 육군 준장
정권진(丁權鎭) : 예비역 육군 준장
정병을(丁炳乙) : 예비역 육군 대령
정해우(丁優根) : 해군 헌병감 대령
정철수(丁喆秀) : 대전 경찰청 차장 경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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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정씨(羅州丁氏:압해정씨)
옥당(玉堂)은 정씨의 세전물
최초의 가사(歌辭) 작가 정극인(丁克仁)
최고의 <어류학서>편찬,고등어의 회유를 밝힌 정약전과 다산 정약용
우리나라의 정 씨(丁氏)는 나주정씨.창원정씨.영광정씨.의성정씨의 4본이 있으나 모두 도시조(都始祖)인 정덕성(丁德盛)의 후손이다.
정씨(丁氏)의 도시조(都始祖) 정덕성(丁德盛.대양군)은 당나라 사람으로 당나라 문종(文宗) 때 대승상(大丞相)을 지내고 무종(武宗) 때 대양군(大陽君)에 봉해졌는데 서기 853년(당나라 선종 대중 7년, 신라 문성왕 15년) 직간(直諫:바른말)을 하다가 압해도(押海島)에 유배되어 정착해 우리나라 정씨(丁氏)의 시초라고 한다.
대양군 정덕성(丁德盛)은 서기 800년에 당나라 등주(鄧州) 남양(南陽) 대천리 (大川里: 중국 하남성 남양시 당하현 대하둔) 정 영(丁營)마을에서 태어나 최연소의 나이로 진사과(進士科), 명경과(明經科:장상(將相)의 재목을 뽑는 과거이며 조선.고려때는 명경과 합격자에게는 등과전(登科田)을 주어 과거 응시를 장려함 ) 30명중 19번째로 급제하여 태자궁 설서(說書:태자시강원의 정7품 벼슬로 태자에게 도의와 경서를 가르침)를 지냈다. 이후 회서(淮西) 오원제(吳元濟)의 반란을 태자궁 첨사(詹事:고려때는 동궁의 서무를 관장하던 종3품 벼슬 ) 이 소와 더불어 평정한 공으로 현백(縣伯)의 작위와 식읍(食邑) 700호를 받아 승상(丞相)벼슬에 이르렀다고 한다.
당나라 선종때 국가의 중대사에 바른 말로 직언 상소한 것이 당시 조정의 노여움을 사서 서기 853년 찬 류(竄流), 아들 열 도(烈道) 응 도(應道) 손자 필 랑(必琅) 필 진(必珍)등 온 가족을 황하강에서 배에 싣고 황해바다를 건너 압해도에 도착, 이곳에 정착하자 당시 신라 조정에서 신라 서울에 들어와 살기를 권하였으나 본국의 죄인이라 자처하며 굳이 사양하였고,
중국에서도 입조(入朝) 권고의 칙서가 왔으나 "노약한 몸으로 배를 탈 수 없고 이 나라도 예의 바른 나라이니 이곳에 그대로 머무르게 하소서"라며 우리나라에 정착했다.그는 서기 893년 94세의 천수(天壽)를 누리고 생을 마쳐 압해도 정승동에 안장되었다.
도시조 정덕성 등과기(진사과에 합격한 명단) 등과기 편록자(編錄者): 조 삼(趙參)-당나라 덕종 때의 교서랑(校書郞) 송대(宋代) 초록(抄錄): 송대(宋代) 조언위(趙彦衛)가 다시 정리함 ( 출처: 중국 북경 국가도서관 분관 고서 보관실 소장, 북경문진 가7호 작성연대: 서기 822년) |
결국 압해(押海) 정승동은 우리나라 정씨(丁氏)의 발상지가 되며 정씨(丁氏)의 4본은 모두 같은 뿌리이고 그 중에서 나주정씨(羅州丁氏)가 전체 정씨(丁氏)의 절대 다수를 차지한다.
나주정씨(羅州丁氏)의 시조는 정윤종(丁允宗)이다.시조 정윤종은 고려시대에 검교대장군(檢校大將軍:종3품 무관 벼슬 검교는 벼슬앞에 붙이는 명예직으로 관원의 승진이 누적되어 관직만 줄때 검교를 붙임)을 지냈다.
나주정씨 족보인 경오보(庚午譜) 서문에는 나주정씨(羅州鄭氏)는 고려조에 검교대장군(檢校大將軍:종3품 벼슬.명예직)을 지낸 정윤종(丁允宗)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하며 시조의 상계(上系)에 관한 언급은 없다.
그런데 만성대동보(萬姓大同譜).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청구영언(靑丘氏譜) 등 옛 문헌에도 정씨(丁氏)의 대조(大祖)는 대양군(大陽君) 정덕성(丁德盛)으로 나오며
당나라 사람으로 대상(大相)의 자리에 있다가 당나라 선종7년(신라 문성왕15년)에 우리나라 압해도(押海島)로 귀양 온 후 사면되었으나 돌아가지 않고 신라에 귀화하여 그 자손들이 압해도에 세거하게 되어 우리나라 정씨(丁氏)의 연원을 이루게 되었다고 기록되어있다.
나주정씨(羅州丁氏)는 조선 숙종과 경종 연간까지 관향을 압해정씨(押海丁氏)로 써오다가 영조때에 압해(押海)가 폐현되어 나주(羅州)에 부속하게 되자 관향도 나주(羅州)로 고치게 되었다고 한다.
숙종때의 신사보(辛巳譜)와 고종때의 경오보(庚午譜)에 나주압해정씨족보(羅州押海丁氏族譜)라고 이름을 붙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한다.
나주정씨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정자급(丁子伋)이 교리(校理:홍문관,승문원의 정5품 벼슬)를 지냈고 그의 아들인 정수강(丁壽崗)은 중종때 형조판서(刑曹判書:정2품 벼슬.법무부장관)와 병조판서(兵曹判書:정2품 벼슬.국방부장관).예조판서(禮曹判書:정2품 벼슬.장관)를 거쳐 좌참찬(左參贊:의정부의 정2품 벼슬)에 올라조선시대에 정씨가문의 중흥이 일기 시작했다.
정응두(丁應斗)는 정수강(丁壽崗)의 손자로 명종때 8도의 관찰사(觀察使:종2품 외관직.감사)를 지냈고, 병조판서(兵曹判書:정2품 벼슬.국방부장관)를 거쳐 좌참찬(左參贊:의정부 정2품)을 역임했다.
정응두(丁應斗)의 아들인 정윤희(丁胤禧)는 퇴계 이황에게 글을 배웠으며 명종때 알성문과(謁聖文科:왕이 성균관에 알성한 후 보던 과거시험)와 문과중시(文科重試:과거에 급제한 사람이 또 보던 과거로 이 시험에 급제하면 성적에 따라 관직의 품계를 특진시켜 당상관까지 주었음)에 장원으로 급제한 수재였다고 한다.
그는 당대의 명문장(名文章)으로 이름을 떨쳤고 사륙문(四六文:고문의 한 문체로 시적요소를 강조한다)에 뛰어나 한때 도성(都城)안의 관각(官閣)에 그의 글이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정윤희(丁胤禧)의 동생 정윤복(丁胤福)은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여러벼슬을 거쳐 대사성(大司成:성균관의 정3품으뜸벼슬)에 올랐으며 이어 도승지(都承旨:승정원의 정3품 벼슬로 왕의 비서실장).병조참판(兵曹參判:종2품 벼슬) 등을 지냈으며 여섯 아들이 있었는데 넷째 정호관(丁好寬)과 다섯째 정호선(丁好善)이 뛰어났다.
숙종때 병조참의(兵曹參議:정3품 벼슬.차관보 급)를 지낸 정시윤(丁時潤)은 정호선(丁好善)의 손자이며
정언황(丁彦璜)은 인조때 삼사(三司:조선시대에 사헌부.사간원.홍문관의 벼슬을 통틀어 이르던 말)의 벼슬을 거쳐 서장관(書狀官:조선시대에 중국에 보내는 사신을 수행하여 기록을 맡던 임시벼슬)으로 심양(瀋陽)에 다녀왔으며 지방수령으로 나가 선정(善政)을 베풀어 많은 송덕비(頌德碑)가 세워졌다.
성리학자로 명성이 높았던 정시한(丁時翰)의 증손 정범조(丁範祖)는 영조때 문과(文科)에 장원급제 하고 호당(湖堂:재덕을 갖춘 젊은 문신을 뽑아 사가독서하여 오로지 공부만 하게 하던곳.독서당)에 뽑혀 사가독서(賜暇讀事:재덕을 갖춘 젊은 문신을 연구시설(장의사)에서 오로지 공부만 하도록 한것)하여 가문을 크게 빛냈다.
그는 벼슬이 홍문관 제학(弘文館 提學:종2품 벼슬)에 이르렀고 탁월한 문장(文章)으로 해좌집(海左集)을 집필하여 이름을 떨쳤다.
<안경낀 다산 정약용 영정> 새롭게 제작한 다산 정약용 영정.한국전통문화학교 김호석 교수가 치밀한 고증을 거쳐 가로 가로 96㎝, 세로 178㎝의 크기로 제작했다. <2009년4월17일 전남 강진군> |
나주정씨(羅州丁氏)가 자랑하는 실학의 거두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1762~1836,시호 문도 자는 미용.귀농 이고 호는 삼미자(三眉子).자하도인.문암일인.다산)은 가문의 대표적 인물이다.
정약용(丁若鏞)은 서기1762년(영조38) 6월 16일,현재의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당시는 광주군 초부면 마현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진주목사(牧使:관찰사 아래의 목(牧)을 다스리던 정3품 외관직 벼슬)를 지낸 정재원(丁載遠:1730~1792)이며 어머니는 해남윤씨로 고산 윤선도(孤山 尹善道:1587~1671)의 후손으로 조선조 유명한 서화가인 공제 윤두서의 손녀이다.
넷째 아들로 태어난 정약용은 아버지에게 경사(經史)를 배우고 일곱 살 때 시(詩)를 지어 주변을 놀라게 했다. 4세부터 천자문을 배우기 시작하여 주위에 신동으로 알려졌으며
7세때 지은 '산'이라는 시(詩)가 이를 입증한다.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렸으니 멀고 가까움이 다르기 때문이네(소산폐대산 원근지부동:小山蔽大山 遠近地不同)"
아버지가 이를 기특하게 여겨 "분수에 밝으니 장차 크면 틀림없이 역법과 산수에 능통하게 될것이다."고 하였다. 15세에 풍산홍씨와 결혼하였고
16세에 실학의 선구자 성호 이익(星湖 李瀷:1681~1763)의 저서를 접하고 실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28세에 대과(大科:문과)에 급제한 정약용은 검열(檢閱:예문관에서 사초를 맡아보던 정9품 벼슬)로 벼슬길에 나가 여러 관직을 거쳐 정조때 형조참의(刑曹參議:정3품 벼슬)를 지내고 규장각의 편찬사업에 참여했으며 뒤에 황사영(黃嗣永)의 백서사건(帛書事件)으로 1801년(순조 1)에 세번째로 강진에 유배되어 18년간의 귀양살이를 하였다.
정약용은 귀양지에서 울분의 세월을 '학문과 저술'로 불살랐고 서기1818년(순조18) 귀양에서 풀려나와 만년에는 고향에서 저술을 계속하여 학문의 체계를 완성했다.
특히 그는 훈고(訓誥:경서의 고증과 주석.해명 등을 통틀어 이르는 말).사회정책(社會政策).서학(西學:천주교.서양의 학문).국학(國學)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큰 업적을 남겼다.목민심서(牧民心書).경세유표(經世遺表).흠흠신서(欽欽新書) 를 비롯하여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는 불후의 명저(名著)이다.
정약용은 이 익(李瀷)의 유고(遺稿:죽은사람이 남긴 원고)를 보고 민생을 위한 경세(經世:세상을 다스림)의 학문에 뜻을 두었다고 하며 이 얼(李蘖)에게 서학(西學)을 배웠다고 한다.
그는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관직을 두루 거쳤으나 주문모(周文謨)사건에 연관되어 좌천되었고 신유박해 황사영백서사건(黃嗣永帛書事件)으로 강진으로 유배되었으며 이때 학문적인 체계를 완성하고 5백여 권의 많은 저서를 남겼다.
그의 학문은 유형원(柳馨遠)과 이 익(李瀷)을 계승하여 유학의 정신체계에 기반을 두고 있으나 양명학(陽明學:명나라 왕양명이 주창한 유학의 한갈래로 지식과 실천의 일치를 부르짖었음.지행합일설)적인 요소도 있으면서 이 이(李珥)의 주자학(朱子學)적인 실천윤리와 북학파(北學派)의 사상을 흡수하였고 이기론(理氣論)에서는 이황(李滉)과 이이(李珥)의 학설을 집대성하였다. 다산은 1910년에 규장각 제학(提學:규장각 제학은 종1품 또는 종2품)에 추증되었다.
일성루(一星樓) 정약전(丁若銓)은 왕명으로 영남인물고(嶺南人物考)를 편찬하였으며 벼슬을 버리고 천주교(天主敎)에 입교하여 전교(傳敎)에 힘을 기울였으나 신유박해(辛酉迫害) 때 유배되었다.
유배지에서 자산어보(玆山魚譜), 논어탄(論語灘),송정사의(松政私議)등을 저술했다.
정약종(丁若鍾) 역시 천주교(天主敎)에 입교하여 우리나 최초의 천주교회장(天主敎會長)으로 전교(傳敎)에 힘쓰다가 신유박해(辛酉迫害) 때 옥사(獄死)하였다.
정약종의 아들 정하상(丁夏祥)은 9차례나 북경에 오가며 신부(神父)의 파견과 조선대리감목구(朝鮮代理監牧區) 설치를 요청하여 여러번 서양의 신부를 맞아들이는 등 전교에 활약하였고 신학(神學)교육을 받았으며 기해박해(己亥迫害) 때 순교하여 뒤에 복자(福者:카톨릭에서 모든 신도의 모범으로 공경할 만하다고 지정하여 공표한 사람.성자(聖者)의 다음 품계에 해당함)의 위(位)에 올랐다.
그가 체포되기 전에 집필하였다는 상재상서(上宰相書)는 우리나라 유일의 호교론(護敎論)으로 중국에서 널리 전도에 활용되었다.
향수(香壽) 정학교(丁學敎)는 글씨.그림에 특히 뛰어났으며 국사(菊史) 정이섭(丁理燮)은 고종22년 문과에 급제하여 호조정랑(戶曹正郞:정5품 벼슬).이천부사(利川府使;정3품 외관직) 등을 역임했다.
해초(海樵) 정관섭(丁觀燮)은 흥양현감(縣監:종6품 벼슬)을 거쳐 예조참의(禮曹參議;정3품벼슬),거창부사(居昌府使;정3품 벼슬),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성균관의 정3품 으뜸벼슬)에 올랐다.
정의배(丁義培)는 기해박해(己亥迫害) 때 순교자들의 의연한 태도에 감동되어 46세에 입교 천주교서울지구회장(地區會長)에 임명되어 전도(傳道)에 노력하였으나 병인박해(丙寅迫害:1866년(고종3)에 일어났던 대원군에 의한 천주교 박해사건.병인교난) 때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
현대의 인물로 우향(又香) 정대유(丁大有)는 서예(書藝)의 대가(大家)로 조선미술전람회(朝鮮美術展覽會) 심사위원을 지냈는데 그림에도 능하여 매화(梅花)를 특히 잘 그렸다.
석인(石人) 정태진(丁泰鎭)은 신문학(新文學)에 뜻을 두어 연희전문학교 미국의 컬럼비아 대학원을 마친 뒤 함흥영생여고(咸興永生女高)에서 교편을 잡았고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2년간 옥고를 치렀다. 해방 후 <우리말 큰사전>을 편찬하다가 타계했다.
한편 창원파(昌原派)에서는 정 환(丁煥)과 정 황(丁璜) 형제가 중종때 정암 조광조(趙光祖) 문하에서 글을 배워 학문으로 이름이 높았다.
특히 정 황은 중중때 친시문과(親試文科:왕이 직접 과거시험을 관장하던 것)에 급제하고 병조(兵曹).형조(刑曹)의 정랑(正郞:정5품 벼슬,특히 병조와 이조의 정랑은 전랑(銓郞)이라 했음)을 지내 유명했으며 정춘(丁春)은 임진왜란때 한산.거제.옥포해전에서 공을 세워 나주정씨 가문을 빛냈다.
영광파(靈光派)에서는 국학문학사상 최초의 가사(歌辭) 작가인 정극인(丁克仁)이 유명했다.
정극인(丁克仁:1401~1481.태인 고현동 출생.호는 불우헌)는 문신겸 학자로 1453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태학진사(太學進士)를 거쳐 전주부 교수(全州府敎授)를 지내고 사간원 정언(司諫院 正言:사간원은 왕의 잘못을 간언하던 관청.정언은 정6품 벼슬)에 이르렀으나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하자 벼슬을 사직하고 고향인 태인(泰仁)으로 돌아와 후진양성에 전념하였다. 정극인은 절의가 높고 문학에도 특출한 재능을 보여 조선시대 최초의 가사작품인 <상춘곡>을 지었으며 예조판서에 추증되었다.
불우헌 정극인의 묘역 |
의성군파(義城君派)에서는 정자위(丁子威)가 판예빈시사(判禮賓寺事: 예빈시는 조선때 빈객의 연향과 재신의 음식 공궤를 관장한 관청.이곳의 정3품 으뜸벼슬)를 역임했고 정맹위(丁孟威)는 봉승낭장(奉承郎將:6품벼슬)을 정숙위(丁淑威)는 부사(府使:정3품벼슬)를 지냈으며 정 현(丁炫)은 판서(判書:6조의 정2품 벼슬.장관)를 역임하여 가문을 빛냈다.
순조때 문과(文科)에 급제한 정재영(丁載榮)은 통정대부(通政大夫:정3품 당상관 품계)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왕명을 출납하던 중추부의 정3품 벼슬.무관)를 지냈으며 사간원(司諫院)의 대사간(大司諫:왕의 잘못을 간하여 바로잡던 사간원의 정3품 으뜸벼슬)을 거쳐 가선대부(嘉善大夫:종2품 품계)에 올라 공조참판(工曹參判:종2품벼슬.차관)을 역임하였다.
나주정씨(羅州丁氏)는 조선시대에 문과(文科:대과)에 23명,무과(武科:무관을 뽑던 과거로 시험은 무예와 병서로 3년마다 실시되었으며 초시.복시.전시의 3단계였음)에 19명,사마시(司馬試:생원.진사를 뽑던과거)에 137명,역과(譯科:중국어.몽고어.일본어.여진어에 능통한 사람을 역관으로 뽑기 위한 과거) 3명,의과 1명 등 모두183명의 과거 급제자를 배출하였다.
옥당(玉堂)이란 홍문관의 별칭으로 나주정씨(羅州丁氏) 가문은 <9대 옥당>으로 유명한데 옥당은 삼사(三司:사간원.사헌부.홍문관)의 벼슬 중에서도 문장과 도덕이 뛰어나고 유능한 젊은 문신들만 들어갈 수 있었으며 옥당벼슬인 수찬(修撰;서책을 편집.찬술하던 정6품 벼슬),교리(校理:홍문관의 정4품 벼슬),응교(應敎:정4품),제학(提學:홍문관의 종2품 벼슬)은 선비로서 가장 선망하는 자리며 영예로운 자리였다.
그러기에 <9대옥당>은 자랑할 만한 영예로운 자리로 정조임금도 "옥당은 정씨의 세전물(世傳物)"이라며 찬탄했다고 한다.
인구조사에 의하면 나주정씨는
1985년에는 15,221가구에 인구는 62,554명이었고
2000년에는 25,786가구에 인구는 82,863명으로 조사되었다
나주(羅州)는 전라남도 나주시(羅州市) 지역으로 757년(경덕왕 16) 이후로는 금산군(錦山郡) 또는 금성군(錦城郡)으로 부르며 무주(武州:광주)의 관할로 두었고 회진현(會津縣)·여황현(艅艎縣)·철야현(鐵冶縣) 등이 부속으로 영입되었다.
940년(고려 태조 23)에 나주로 지명이 바뀌고 983년(성종 2)에 나주목이 설치되었다. 995년(성종 14)에는 나주진해군절도사(羅州鎭海軍節度使)가 되었다. 1018년(현종 9) 다시 나주목으로 고쳐 5개의 속군(무안·담양·곡성·낙안·남평)과 11개의 속현(철야·반남·안노·복룡·원율·여황·창평·장산·회진·진원·화순)을 거느렸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나주부로서 나주군 등을 관할하였고 1981년 나주읍과 영산포읍이 통합하여 금성시로 승격하여 나주군에서 분리되었고 금성시는 1985년 나주시로 개칭되었다. 1995년 나주시와 나주군이 통합되어 나주시로 개편되었다.
<인물탐구> 정약전(丁若銓,1758~1816년)
정약전은 조선후기의 천주교 선교사로 남인(南人)계의 학자이다.벼슬에서 물러나 선교활동에만 전념하였다.
정약전은 본관은 나주(羅州)이고 자는 천전(天全), 호는 일성루(一星樓).매심재(每心齋).손암(巽庵)이며 다산 정약용(丁若鏞)의 형이다.
1790년(정조 14) 증광문과(增廣文科:나라에 경사가 있을때 기념으로 보던 과거)에 병과로 급제하고 부정자(副正字:종9품 벼슬)에 이어 1797년 병조좌랑(左郞:무관의 천거권을 갖은 특유의 권한이 부여된 정6품 벼슬로 전랑이라 함)이 되었다.
이듬해 왕명으로 영남인물고(嶺南人物考)를 편찬하였다.
그는 남인계(南人系)의 학자로 서학(西學)에 뜻을 두고 천주교에 입교한 후 벼슬에서 물러나 선교활동에만 전념했다.
서기1801년(순조1)신유박해때 흑산도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었으며 자산어보(玆山魚譜)와 논어난(論語難).역간(易柬).송정사의(松政私議)등의 저서가 있다.
특히 그가 지은 자산어보(玆山魚譜) 한국 최고(最古)의 <어류학서(魚類學書)>로 평가받고 있다.자산어보는 1814년(순조 15)에 정약전이 지은 것으로 흑산도 근해의 수산생물을 실지로 조사하고 채집한 기록으로 수산동식물 155종에 대한 각 종류의 명칭.분포.형태.습성 및 이용 등에 관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최고의 어류학서 <자산어보> |
권1에는 인류(鱗類) 73종,권2에는 무린류(無鱗類) 43종,권3에는 잡류(雜類)로서 해충(海蟲) 4종, 해금수(海禽獸) 1종,해초(海草) 35종 등 비교적 세밀히 분류·기재되어 있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첫째로 청어(靑魚)와 고등어의 회유와 분포에 관한 기록으로 현재와 비교할 수 있는 유일한 자료이며 둘째로는 각종 수산식물을 조사하여 기록한 것이며 셋째는 의약(醫藥) 계열의 탐구를 했다는 점에서 의미를 갖는다.<출처-한국인의 역사.백과 사전.역사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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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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