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24일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
요한 1,45-51
아이 때 이것만 하지 못하게 한다면 크면서 냉담하는 일은 절대 없습니다
오늘은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입니다.
바르톨로메오는 예수님께 이런 칭찬을 들은 사람입니다.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말씀은 하느님 나라 백성이란 뜻도 됩니다.
하느님 나라에는 믿음이 없으면 들어가지 못합니다.
오늘 예수님은 거짓이 없는 사람만이 쉽게 믿을 수 있다고 이렇게 예언하십니다.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해서 나를 믿느냐?
앞으로 그보다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다.”
우리가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없는 이유는 믿음의 에너지를 거짓말에 소비해버리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믿지 못하게 만드는 거짓말은 바로 내 안의 뱀이 합니다.
에덴동산에서 뱀은 하와를 하느님처럼 만들어서 하느님을 믿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 방식은 하와 자신이 주님이 되고 창조자가 되고 심판관이 되게 하는 데 있었습니다.
뱀은 자신이 하느님이라 믿게 만들어서 하느님을 대체합니다. 믿을 필요가 없게 합니다.
피노키오를 생각해봅시다.
피노키오에게 늑대가 다가와 서커스에서 공연할 것을 제안합니다.
그는 사실 구경거리가 되어 남에게 이용당하면서도 자신의 힘으로 무엇이 되었다고 착각합니다.
서커스를 무대에 오르지만, 실제로는 스스로 제페토 아버지를 대체하는 것입니다.
그가 필요 없게 만드는 것입니다.
여기에 늑대의 역할이 우리 안의 자아입니다.
늑대는 또한 피노키오를 어른 놀이하는 섬으로 데려갑니다.
그곳에서는 어른들처럼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고 파티를 즐깁니다.
스스로 어른이 될 수 있다고 믿게 하는 늑대에 속아서 아버지가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아버지처럼 되어가지 못하고 당나귀가 되어갑니다.
우리 안에서 자아는 우리 스스로 하느님처럼 될 수 있다고 여기게 만들어 정작 우리를 당신처럼 만들려는 하느님을 필요 없는 존재로 만드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뱀은 선악과를 바치지 않고 자신이 따먹어 주인님이 되고 육체적 욕망으로 행복을 추구하려 하며 스스로 창조자가 되게 했고 하느님과 이웃을 판단하며 스스로 심판관이 되도록 부추겼습니다.
그러니 이미 창조자나 주님, 심판관이 있음을 믿을 에너지를 다 써버린 것입니다.
자아에게 속으면 그래서 하느님을 믿게 어렵게 되는 것입니다.
뱀은 이 거짓말들에 지속적으로 속게 만들기 위해 거짓말이라는 도구를 사용하게 하였습니다.
무화과 잎으로 자기 몸을 가리게 한 것입니다.
그 껍데기가 벗겨지지 않는 한 자신 스스로 주님이 되고 창조자가 되고 심판자가 되려고 했던 잘못을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솔직해지면 어떨까요? 금방 자신이 주님일 수 없고 창조자일 수 없으며 심판관일 수 없음을 알게 됩니다.
아무리 나의 것이라 우겨도 죽으면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합니다.
내 사람이라고 해도 헤어짐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결혼을 해도 그 사람의 마음을 잃을까 두렵습니다.
결국 우리는 나의 것은 아무것도 가질 수 없는 존재입니다.
또한 솔직해지면 자녀도 내 창조물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눈도 다시 넣어줄 수 없고 생명도 다시 넣어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솔직해지면 누구도 나에게 재판관의 권위를 부여하지 않았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판단을 참 심판관이신 주님께 맡길 수밖에 없게 됩니다.
이렇듯 참믿음은 거짓말을 하지 않으면 저절로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왜 믿어지지 않느냐고 하기 전에 먼저 내가 뱀을 보호하기 위해 거짓말을 하지 않는가부터 생각해야 합니다.
거짓말을 하면 마치 복권을 사지 않고 당첨만 되려고 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공부를 하지 않고 시험만 잘 보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아이에게 거짓말을 절대로 하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면 아이가 자라며 냉담하게 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르톨로메오 사도가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교훈인 것 같습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8월24일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
요한 1,45-51
호감도와 존경심이 바닥으로 뚝뚝 떨어지는 우리 교회를 바라보며...
세례자 요한과 배턴 터치를 하신 예수님께서 구세사의 전면에 등장하신 후, 당신 사업에 함께 하실 동역자이자 제자 모집이 한창인 때였습니다.
어제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의 두 제자에게 “와서 보아라.”며 당신 거처로 초대하신 데 이어,
오늘은 필립보가 나타나엘을 향해 “와서 보시오.”라고 초대합니다.
어제 두말없이 흔쾌히 초대에 응한 두 제자와 달리, 나타나엘은 반응이 꽤나 회의적이고 부정적입니다.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요한 복음 1장 46절)
나자렛은 로마의 속주(屬州)였던 갈릴래아의 남부 지방에 위치한 아주 작은 마을이었습니다.
주변은 산이나 언덕으로 둘러싸여 하나의 분지 형태를 이루고 있었으며, 주요 도로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특히 당대 잘 나가던 도시 예루살렘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변방 중의 변방이었습니다.
정치나 경제, 학문이나 종교적 삶 등 전반적인 분야에서 소외되고 낙후된 지역이었기에, 나타나엘의 시큰둥한 태도는 어찌보면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개무시’한지 불과 몇 시간 지나지 않았는데, 나타나엘의 태도는 순식간에 돌변합니다.
예수님을 직접 대면하자마자, 그간 품고 있었던 회의감은 기대감으로, 무시는 존경심으로, 냉랭함은 호감으로 바뀐 것입니다.
그리고 ‘이거, 너무 앞서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즉각적인 신앙고백을 하기에 도달합니다.
“스승님,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요한 복음 1장 49절)
나타나엘 태도의 급반전 사건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께서 얼마나 매력적이고 호감가는 존재였는지,
존재 자체로 얼마나 강렬한 카리스마와 광채를 발산하고 있었는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직접 대면하고, 그분께서 발산하시는 강렬한 사랑의 빛을 인지한 사람들은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즉시 무릎을 꿇었으며, 그 자리에서의 회심과 사랑 고백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 홀딱 반한 사람들은 놀랍게도 지금까지 목숨 걸고 해오던 그 모든 일, 그토록 소중히 여기던 인연들도 미련 없이 내팽개치고, 그 자리에서 예수님을 선택하고 따라나섰습니다.
오늘 우리 교회와 공동체는 어떠합니까? 때로 종교인들이 사회를 걱정해야 하는데, 사회가 종교인들을 걱정하고 있습니다.
한때 그토록 우리 한국 가톨릭교회와 주교, 사제, 수도자들에 대해 호감과 존경을 표시하던 사람들이 많았는데, 이제는 가뭄에 콩 나듯합니다.
언제나 단골로 등장하는 반성거리들이 여전히 반복되고 있습니다.
독선과 권위주의, 비전과 리더십의 부족, 미성숙한 언행, 기도와 영성생활의 결핍...
보다 따뜻하고 열린 교회, 너그럽고 관대한 수도 공동체, 성숙하고 다정다감한 본당, 그래서 세파에 지친 사람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앞다투어 달려올 수 있는, 그런 가톨릭교회로 거듭나기 위해, 구성원 모두 함께 노력해야겠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 강론>
(2023. 8. 24. 목)(요한 1,45-51)
<앞으로 그보다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다.>
“필립보가 나타나엘을 만나 말하였다.
‘우리는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고 예언자들도 기록한 분을 만났소.
나자렛 출신으로 요셉의 아들 예수라는 분이시오.’ 나타나엘은 필립보에게,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 하였다.
그러자 필립보가 나타나엘에게 ‘와서 보시오.’ 하고 말하였다(요한 1,45-46).”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은 감추어질 수 없다.
등불은 켜서 함지 속이 아니라 등경 위에 놓는다. 그렇게 하여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비춘다(마태 5,14-15).” 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세상 사람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등불이 되라는 명령입니다.
신앙인은 자기 혼자 믿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사람들에게 믿음을 증언하고, 사람들을 예수님에게로 인도하는 사람입니다.
<‘증언’과 ‘초대’는 신앙인의 본분입니다.>
필립보 사도가 나타나엘에게 예수님을 소개하고, 나타나엘을 예수님에게로 데리고 간 일은, 신앙인으로서 ‘등불의 사명’을 충실하게 수행한 일입니다.
<우리 교회는 ‘나타나엘’을 ‘바르톨로메오 사도’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고 예언자들도 기록한 분”이라는 말은 ‘메시아’를 뜻하는 말입니다.
“나자렛 출신으로 요셉의 아들 예수라는 분이시오.” 라는 말은 “사람들은 그분을 나자렛 출신이며 요셉의 아들로만 생각하지만, 그분은 메시아다.” 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나는 나자렛 예수님이 메시아라고 믿는다.” 라는 증언이기도 하고, “당신도 예수님을 믿으시오.” 라는 권고, 또는 초대이기도 합니다.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 라는 말은, 예수님에 대한 편견이 아니라, 나자렛이라는 마을에 대한 편견을 나타낸 말입니다.
이 말은 “메시아가 나자렛에서 나온다는 예언은 없다.” 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와서 보시오.” 라는 말은, “그런 편견에 사로잡히지 말고 일단 한 번 예수님을 만나 보시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타나엘이 당신 쪽으로 오는 것을 보시고 그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 나타나엘이 예수님께 ‘저를 어떻게 아십니까?’
하고 물으니, 예수님께서 그에게 ‘필립보가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 하고 대답하셨다.
그러자 나타나엘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요한 1,47-49)”
여기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라는 말씀은,
“참된 신앙인이다.” 라는 뜻입니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 라는 말씀은, “다른 율법학자들과는 다르게, 저 사람은 위선자가 아니다.
저 사람은 진실한 사람이다.” 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나타나엘에게만 하신 말씀으로 생각할 때가 많은데, 이 말씀은 사도들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을 뽑으실 때 참된 신앙인들을 뽑으셨고, 위선자가 아닌 사람들을, 즉 진실한 사람들을 뽑으셨습니다.
배반자 유다도 처음에는 그런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필립보가 너를 부르기 전에” 라는 말씀은, “필립보가 너를 부르기 전에 내가 먼저 너를 불렀다.” 라는 뜻입니다.
<인간적인 눈으로만 보면, 나타나엘이 예수님에게로 간 것은 필립보 사도가 초대하고 권고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처음부터 주님의 ‘부르심’이 작용한 일이었습니다.>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 라는 말씀은, 당시의 율법학자들이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성경과 율법을 공부하던 관행에서 온 말씀인데, 여기서는 “메시아를 갈망하고 기다리고 있는 너의 심정과 신앙생활을 내가 잘 알고 있다.” 라는 뜻입니다.
나타나엘은 사람의 속을 꿰뚫어보시는 예수님의 권능에 압도당해서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 라는 말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는다는 신앙고백입니다.
“예수님께서 나타나엘에게 이르셨다.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해서 나를 믿느냐?
앞으로 그보다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다.’ 이어서 그에게 또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요한 1,50-51)”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해서”는 “너의 심정과 마음속과 생활을 내가 꿰뚫어보았다고 해서”입니다.
“그보다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다.”는, 예수님은 하느님과 같으신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메시아이신 분이면서 동시에 하느님이신 분입니다.>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이라는 말씀은, 표현으로는 창세기에 있는 ‘야곱의 꿈 이야기’에 연결되는데(창세 28,12),
뜻으로는 이사야서에 있는 ‘이사야의 증언’에 연결됩니다(이사 6,2).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예수님) 위에서 오르내린다는(날아다닌다는) 말은, 천사들이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섬긴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 말은 ‘예수님은 곧 하느님’이라는 것을 뜻합니다.
이 이야기는 겉으로는 나타나엘을 부르신 이야기이지만, 실제로는 예수님께서 당신의 신성을 암시, 또는 계시하신 이야기입니다.
<‘너’ 라는 표현이 갑자기 ‘너희’로 바뀌었는데,
이 계시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계시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보게 될 것이다.’ 라는 표현은 보고 믿는 사람들도 있고, 직접 보면서도 안 믿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