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
황동규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 진다.
자전거 유모차 리어카의 바퀴
마차의 바퀴
굴러가는 바퀴도 굴리고 싶어진다.
가쁜 언덕길을 오를 때
자동차 바퀴도 굴리고 싶어진다.
길 속에 모든 것이 안 보이고
보인다. 망가뜨리고 싶은 어린 날도 안 보이고
보이고, 서로 다른 새떼 지저귀던 앞뒷숲이
보이고 안 보인다. 숨찬 공화국이 안 보이고
보인다. 굴리고 싶어진다. 노점에 쌓여 있는 귤,
옹기점에 옆어져 있는 항아리, 둥그렇게 누워 있는 사람들
모든 것 떨어지기 전에 한 번 나는 길 위로
(시집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 1978)
[작품해설]
이 시는 1970년대 중반, 긴급조치가 발동되었던 유신체제의 억압적 상황에 대한 시인의 지적 고뇌를 굴러가지 못하는 바퀴로 설정하여 상징적으로 변용시킨 작품이다. ‘바퀴’는 둥글다. 그리고 ‘둥근 것’은 정지해 있지 않고 끊임없이 구르겨 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구르는 것은 곧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요, 끊임없이 자신을 변화시켜 발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퀴가 구르지 않고 제 자리에 머물러 있기만 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바퀴가 아니다. 정지 상태는 발전이 아닌 정체와 퇴보이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이다. 물론 국가와 민족, 사회와 역사의 변화 발전도 이와 관련지어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런데 바퀴 앞에 많은 장애물이 놓이듯이 우리 앞에도 많은 시련과 난간이 놓이게 마련이다. 때에 따라 그 시련과 난관은 개인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거대한 사회적 조류와 민족적 고난이 되어 도도한 역사의 흐름을 가로막기도 한다. 이런 경우 우리는 시대적 아픔에 공감하며 자신의 삶과 역사가 정체되어 있는 것에 대해 깊은 회의와 좌절감을 갖게 된다. 따라서 시인은, 자신은 물론 국가와 민족도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가야만 하며, 이는 바로 시대적 당위성이자 역사적 진실임을 인식한다. 이 시는 바로 이러한 시인의 현실 인식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를 위해 화자는 1연에서 어떤 바퀴든 굴리고 싶어하는 인간의 보편적인 심리를 열거하여 보여 준다. 바퀴는 둥글기에 굴리고 싶어지는 것이요, 그러기에 굴려야 한다는 당위성을 덧붙임으로써 2연에서의 ‘안 보이는 것’까지도 굴리고 싶은 화자의 소망과 의지에 시상을 연결시킨다. ‘숨찬 공화국이 안 보이고’라는 구절은 시대 상황에 대한 시인의 현실 인식을 드러낸 것으로, 당시의 상황이 시인의 기대와는 달리 어긋난 방향으로 점점 퇴보하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다. 따라서 1연의 ‘굴러가는 바퀴도 굴리고 싶어진다’는 표현은 2연의 ‘망가뜨리고 싶은 어린 날’과 결합되며 정상적으로 굴러가지 못하는 당시의 역사적 흐름의 왜곡을 우회적으로 비판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마지막 시행인 ‘모든 것 떨어지기 전에 한 번 나는 길 위로’는 그 뒤에 ‘나는 퀴를 굴리고 싶어진다’가 생략되어 있음에 유의해야 한다. ‘모든 것 떨어지기 전에’는 ‘늦기 전에’의 의미로, 한번 지나간 것은 되돌아오지 않는다는 역사적의 엄숙성을 함축하고 있다. 또한 ‘날으는 길 위로’는 우주적 질서의식이 반영된 구절로, ‘우주 질서에 합당한 정정당당한 길 위로 바퀴를 굴리고 싶어진다.’는 뜻을 드러낸다. 이렇게 이 시는 굴러가야 할 바퀴처럼 역사적 진실을 향한 시인의 의지는 멈출 수 없다는 시대적 고통을 형상화하고 있다.
[작가소개]
황동규(黃東奎)
1938년 서울 출생
서울대학교 영문과 및 동 대학원 졸업
1958년 『현대문학』에 시 「시월」, 「즐거운 편지」 등이 추천되어 등단
1968년 제13회 현대문학상 수상
1980년 한국문학상 수상
1990년 제1회 김종삼문학상 수상
1995년 대산문학상
2001년 제1회 미당문학상 수상
서울대학교 영문과 교수 역임
시집 : 『어떤 개인 날』(1961), 『비가(悲歌)』(1965), 『평균율 1』(공저, 1968), 『평균율 2』(공저, 1972), 『삼남(三南)에 내리는 눈』(1975),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1978), 『열하일기』(1982), 『풍장(風葬)』(1984), 『악어를 조심하라고?』(1986), 『견딜 수 없이 가벼운 존재들』(1989), 『몰운대 행(行)』(1991), 『K에게』(1991), 『미시령 큰 바람』(1993), 『외계인』(1997), 『어떤 개인날 악어를 조심하라고』(1998), 『황동규시전집』(1998), 『버클리풍의 사랑 노래』(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