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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대구서머나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위드
본문 : 로마서 8:1-17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4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5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8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10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것이니라
11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12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16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17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4절과 6절을 보면
4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이 같은 말씀이 반복되어 나옵니다.
12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고, 그렇게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캠프 첫날 인간론에 대해서 공부를 할 때 인간의 육이란 선악열매를 따먹고 하나님을 떠난 상태, 그러니까 죄와 사망의 권세 아래 있기 때문에 무엇을 해도 선한 것이 없이 죄만 나온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어떤 인간도 자기만 위하고 자기의 영광만을 위해서 살아가지 하나님을 아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자도 없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자기 영광과 자기 증명, 자기 역사 만들기에 열중하는 일에 사용되는 것이 바로 육신입니다. 어느 누구도 거기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자기를 위해서 살지 않을 수 인간은 없단 말입니다. 바울이 말한 육신의 일이란 이것입니다. 그러니까 육신대로 행하는 그 일에는 세상이 정한 윤리도덕이나 각종 학문, 문화와 문명, 심지어는 율법행위와 종교까지도 모두 포함된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열심히 교회에 봉사하고, 열심히 성경공부 하고, 열심히 기도하고, 열심히 선교하고, 열심히 이웃을 사랑하는 것까지도 육신의 일이 될 수 있는 거에요. 그 대표적인 사람들이 하나님의 선민이라고 했던 이스라엘이었습니다. 열심으로 율법 지키면서 하나님을 섬긴다고 섬겼는데, 그 결국이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을 살해한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던 것이죠.
그래서 로마서에서 말한 육신의 일이란 그런 인간들의 본질적인 죄성을 이야기합니다. 물론 자기 정욕대로 방탕하게 사는 것도 육신의 일입니다. 그러나 로마서 8장은 그런 수준이 아니에요. 흔히들 말하길 우리 육신대로 살면 안 되니까 욕심을 절제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서 살아가는 것이 성도의 본분이라고 이야기를 하잖아요. 그런데 바울이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그것과 정반대의 개념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의 바울은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였습니다. 그런 바울이 그 삶, 그러니까 예수님을 만나기 전의 자기의 삶을 육신대로 산 삶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심지어 자신이 하나님에 대해 알았던 지식이나 경건한 삶까지도 배설물이라고 한단 말입니다. 로마서 7장의 이야기가 모두 그것입니다. 자기 딴에는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을 정도로 자기를 통제하고 절제하고 자기를 쳐서 말씀에 복종시키기까지 살았는데, 알고 보니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오해했더라는 것입니다. 율법은 우리더러 지키라고 주신 게 아니라 우리를 죽이는 율법이었다는 겁니다. 내가 율법의 진의를 깨닫고 나니, 즉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로마서 7:9)...
무슨 뜻인지 아시겠어요? 그렇게 열심히 살았는데 율법 하나도 지킨 게 없더라는 말이에요. 내가 열심히 지킨다고 했는데, 알고 보니 그게 율법을 지킨 것이 아니고, 그 율법에 의해 죽어 마땅한 사망의 몸으로 드러나더라는 것입니다. 자신은 율법까지도 이용해서 내 탐심만 채우려는 사망의 몸에 꽁꽁 묶여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8장에서 말하는 “육신대로 살면 정녕 죽으려니와”.. 라는 말은 보편적 모든 아담들은 아무도 거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죽음입니다. 세상이 말하는 윤리도덕적인 인간되기, 착하게 살기, 세상에 도움 되는 홍익인간이 되기 같은 모든 종교에 다 있는 그런 것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육이며 죽음이에요.
바울이 말한 육신의 일이란 인간들끼리 합의해서 규정해놓은 그런 인간답게 살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망의 몸에서 자연스럽게 나올 수밖에 없는 그런 죄의 증상으로서의 모든 행위, 선악과 범죄로 하나님을 떠난 아담에게서 난 우리 존재 자체를 육이라고 합니다.
어제 말씀드린 대로 성경 번역의 문제가 있다 보니 영과 육, 몸, 소마, 사륵스, 네페쉬 등이 혼용되어서 육신에 대한 오해가 심각합니다. 세상에서 말하듯 잘 가르치고 훈련해서 고쳐질 그런 육이 아니라 로마서에서 말하는 육은 무엇을 해도 죄만 나올 수밖에 없는 우리 몸을 말합니다.
어떤 인간에게도 나 여기 있음보다 더 진리는 없지요. 이것만이 틀림없는 진리입니다. ‘나 여기 있음’... 맞죠? 데카르트가 말했잖아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그러니까 모든 인간에게 나 여기 있음에서 자유할 인간은 없습니다. 그런 내가 성령의 도움으로 좀 더 개선된 내가 되고, 좀 더 깨끗하고 윤리적인 인간이 되는 것을 두고 성경은 몸의 행실을 죽이는 것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럼 우리 육의 행실을 죽이는 것이 무엇입니까? 오늘날 기독교가 잘못 가고 있는 문제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십자가는 눈에 보이지 않는 곳으로 치워버리고 다시 유대교로 다 돌아가 버린 거에요. 인간의 가능성입니다. 은혜 더하기 희생제사 은혜 더하기 착하게 살기, 은혜 더하기 기도하기, 은혜 더하기 십일조 하기, 은혜 더하기 안식일 지키기... 이게 유대교잖아요, 바울이 말한 육신대로 사는 것은 그런 율법행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율법의 몸에서 자연스럽게 발산되는 탐심, 앞에 나오는 은혜는 그냥 수식어일 뿐이에요. 그들과 하나도 다르지 않는 오늘날의 대한 유대교 장로회...
로마서는 그런 유대인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런 육이 영이 되는 방법은 죽었다 깨어나도 인간에게는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지식이나 어떤 종교행위로도 율법의 저주를 벗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로마서 7장에서부터 사도가 계속 전개하고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에 관한 설명입니다. 로마서 8장에 나오는 생명의 성령의 법을 설명하기 위해서 그전에 반드시 로마서 7장이 설명되어야 하니까.
(로마서 7장)
7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여기에서 탐심은 앞서 말씀드린대로 생명나무 열매에 손을 뻗치는 것입니다. 율법을 지키든, 하나님을 섬기든, 십일조를 하든, 희생 제사를 드리던 나만은 구원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탐심이라고 합니다. 다른 사람은 모두 구원받지 못하더라도 나는 구원받아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의 바울의 모습이 이랬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죄인에게는 구원받을 어떤 길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천사와 화염검으로 막아놓으셨다니까요.
8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온갖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율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라
율법이 도리어 내 안에서 탐심=죄를 발생시키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말인가 하면 내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분의 뜻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지키지 못할 법을 절대 주셨을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 죽기 살기로 율법에 매달린 것이 사울이었잖아요. 바로 그 탐심, 율법이 나로 하여금 그 탐심을 불러일으키더라는 것입니다.
9 전에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신나게 종교생활 했다는 말입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 조금의 흠이 없는 훌륭한 바리새인이 맞구나 하면서...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계명이 이르렀다는 것은 율법의 진의가 깨달아졌다는 것입니다. 예수 만나고 나서, 계시의영으로 말미암아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에 다름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율법을 통해 그리스도께로 가지 못하면 율법은 우리를 죽이는 율법외에 아무것도 아닙니다. 율법을 열심히 지키려 하면 할수록 율법의 정죄 아래에서 죽는단 말입니다.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 있는 인간은 하나도 없으니까
10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11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
12 이로 보건대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도다
18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바울이 이제 그것을 안 겁니다. 내가 선을 행하고 싶은 마음은 있는데 이 육신으로는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없더라는 것이에요. 나는 내 안에 갇혀있기 때문입니다. 뭘 해도 나를 위한 것밖에 할 수 없음을 바울이 드디어 알았습니다. 그래서 율법은 지키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죄를 깨달으라고 주신 것이구나... 율법을 지키실 분은 따로 있구나
19 내가 원하는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바 악을 행하는도다
20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이것이 성령을 받은 사람과 성령을 받지 못한 세상과의 차이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모든 책임을 내가 지려고 하잖아요. 내가 선을 행한 것의 결과물도 내가 가지려고 하고 내가 잘못한 것에 대한 책임도 내가 지려고 합니다. 바로 가롯유다입니다. 인간은 자기가 책임질 수 있는 게 없어요 우리의 죄는 내가 책임질 수 있는 죄가 아니에요
성령 받은 성도는 ‘아니야, 나에게는 어차피 죄 밖에 나올 것이 없어. 그럼에도 주께서 나를 아시기 때문에, 나는 이미 주의 것이기 때문에 내가 만약 악을 행한다면 그것은 내 안에 있는 죄가 범하는 것일 뿐이야. 나는 이제 예수 안에서 죄와 상관없는 사람이야.’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게 믿음이에요 주의 은혜를 아는 사람입니다.
어찌 보면 참 뻔뻔한 것 같죠? 다윗이 그랬어요. 밧세바를 간음하고 우리야를 죽인 후에 뭐라고 했습니까? “내가 주께만 범죄하였나이다”... 그러니까 의도 죄도 모두 주님과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거란 말입니다.
우리는 죄도 우리 마음대로 지을 수가 없어요. 우리가 죄를 짓고 안 짓고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죄의 권세 아래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죄와 의를 선택할 자격도 능력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구원이란 영역의 문제입니다. 죄의 권세 아래 있던지 그리스도의 은혜 아래 있던지 그 차이입니다.
이렇게 주체적으로 육이 영이 되는 방법이 우리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너희의 능력으로는 죄의 법 사망의 법에서 해방될 어떤 방법도 없다.. 오직 그 일은 그리스도의 영으로 오시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오시는 성령만이 하시는 성령의 법이라는 말이에요. 그것이 로마서 8장입니다.
그러면 지금부터는 성령의 법이 무엇이고 그 법이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되고 실행되었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여러분 안에 계신 성령께서 어떻게 여러분을 오늘 이 자리까지 오게 하시고 또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자라나게 하셨는지를 확인하는 시간이에요. 뭘 새로운 걸 배우는 게 아니에요 여러분 안에 성령이 계시다면 제가 이렇게 증거 하는 말에 대해서 마음속으로 ‘맞아, 그거야. 그게 맞아. 주께서 다 하셨네요’하고 박수를 치면 되는 겁니다.
먼저 우리가 늘 착각하기 쉬운 게 뭔가 하면 성령을 받으면 every day 거룩한 생각만 하고, 홀리홀리하게 살고, 기도와 말씀에 열중하고, 교회 섬기는 일에 열심하게 되는 줄로 생각합니다. 우리도 예전에는 다 그랬잖아요. 그런데 그런 것들은 성령 받지 않은 종교인들도 종교라는 아편에 중독되면 다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것이 훨씬 재미도 있고 쉬운 겁니다. 심지어는 동기부여만 하면 자기 몸까지도 불사를 수 있어요. 자기를 증명하는 일에는 목숨까지 버릴 수 있는 게 죄인들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로마서 7장에서 성령 받은 사도가 자신에 대해서 뭐라고 합디까? 나에겐 선한 것이 전혀 없다!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다, 이게 성경을 13권이나 쓴 사도가 할 말입니까? 그래서 신학자들은 로마서 7장을 두고 바울이 성령 받기 전에 있었던 것을 쓴 것이라고 하는데 그거 아닙니다. 만약 그렇다면 사도바울은 그의 인생 마지막에 로마감옥에서 그런 말을 하면 안 되잖아요. 나는 죄인의 괴수일 뿐이고 다만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과 긍휼하심으로 구원받았다고 했던 그 고백 말입니다.
이런 사도바울의 세계, 그리스도 안이라는 영의 영역을 성령 안 받은 신학자들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보니 사도바울을 집중적으로 공격하는 새로운 학파들도 생겨났습니다. ‘새 관점 학파’, ‘신 율법주의’ 그런 것들입니다. 이들에 의해 사도바울의 서신들이 왜곡되는데 그걸 옳다고 가르치는 게 오늘날 신학교들이에요. 아닙니다. 바울은 시종일관 하나님의 의로 주어진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만 이야기를 하고 간 거예요. 바울서신의 어떤 부분도 그 십자가에서 벗어남이 없습니다.
그런 바울이 육과 영을 대비하면서 하나님께서 인간이 있기도 전인 창세전에 정하신 ‘아들의 피’라는 그 하나님의 의와 거룩, 그 은혜의 영광을 증거 하고 있는 거에요 바울은 마지막까지 죄인의 괴수 위에 덮으신 그 은혜의 영광 그 긍휼을 감사하면서 생을 마쳤습니다.(딤전 1:15)
그런 그가 성령을 받지 않았을 때는 죄만 나오는 육신으로 살다가 성령 받은 후에는 육으로부터 자유로운 성인으로 살았다? 그런 이야기가 아닌 거예요. 오히려 그 반대의 이야기가 로마서 8장이에요.
이런 문제 때문에 어떤 목사들은 자기는 죄를 짓고 싶어도 못 짓는다는 헛소리를 하기도 하던데, 그런 생각자체가 육이에요. 죄를 짓고 안 짓고에 매달려있는 상태.. 자기 안에 갇혀서 선악행위에 전혀 자유함이 없는 그것을 육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아까 말씀드린 대로 죄는 우리가 짓고 안 짓고 하는 것이 아니에요. 엄밀히 말하면 우리는 우리 마음대로 죄를 짓지도 못하는 죄인이에요. 이것 참 명언인데 우리는 우리 마음대로 죄를 짓지도 못하는 죄인이에요. 아예 태어날 때부터 죄인으로 태어난단 말이에요. 다윗이 그랬잖아요. 자기는 모태 죄인이라고... 그래서 무엇을 해도 우리 육에서는 죄만 나와요. 자기밖에 모르는 자기중심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는 그 죄, 이것이 로마서 8장에서 말하는 육이에요. 그래서 그 육이 행하는 모든 것이 육신의 생각이고 육신의 행실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긴다고 한 것입니다. 우리 몸 자체가 자기중심의 선악체계가 장착된 율법의 몸이라는 뜻이에요.
십자가라는 복음, 그 하나님의 의를 아는 바울도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 믿음의 법을 섬기지만, 육신으로는 선악의 법에서 자유롭지를 못하다고 합니다. 그도 아담에게서 난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선악의 법 아래에 있는 육신으로 말미암아 결코 정죄함이 없는 그리스도 안이라는 영의 세계를 알게 되었기 때문에 그 육도 더 이상 심판 아래에 있는 육이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이게 반전이에요 바울은 율법의 몸이 없었으면 자신이 어떻게 하나님의 의를 알았겠느냐고 그 이야기를 하고 있단 말입니다. 이게 복음의 진수입니다. 이게 성령 안에 있는 성도예요.
한 마디로 성령 받은 교회인 너희들은 이제 육신에 있지 않고 영에 있다는 겁니다. 너희들이 그리스도의 사람이라면 너희들의 육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으므로 더 이상 율법에 빚진 것이 없으니까, 그 빚은 주께서 다 갚으셨으니까 더 이상 네가 네 자신을 정죄하려고 하지 말고 너 자신을 판단하고 관리하려고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너에게는 주가 계시니까!
이거 아는 거 우리에게서 너올 수 있는 게 아니에요 말은 쉽지만 주께서 그런 말씀의 사건들을 성도들의 삶에 계속 일으키실 때 비로소 알게 되는 거예요.(고후4:7-12) 우리는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되어서 살려고 하는데 그게 육신대로 죽는 일이고 본의 아니게 예수의 죽음에 넘기우는 사건이 반복적으로 일어날 때 그때에야 마침내 영에 대해 눈이 열리는 거란 말입니다.
(로마서 8장)(개역개정)
12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빚을 누구에게 졌다는 말입니까? 우리가 갚을 수도 없는 율법의 빚 그런데도 그 빚 갚아보겠다고 얼마나 열심히 착한 척을 하면서 살았냐고요. 하나님은 그런 육에서 나오는 것 더럽다고 거들떠보지도 않으시는데 말입니다. 그런데도 말씀 지켜서 하나님 앞에 당당해지려고 우리 나름대로 맨날 시체 화장놀이를 하고 살았죠. 바른데 또 바르고 지워지면 또 바르고 화장을 고치지 마세요 왜 나 같은 여자를 사랑하셨는지 그거 알면 되는 거에요 왁스 노래 유행가도 잘 들으면 복음적인 노래 많지요
하나님은 처음부터 우리에게 아예 선을 기대를 하지 않으셨다니까요. 우리의 행함과 상관없이 일방적으로 자기사람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창조하시는 거에요 창세전부터 성도는 하나님 안에 있었던 거에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를 아시는 겁니다. 우리가 예수 잘 믿어서 아시는 게 아니라 그분이 언약의 하나님이에요 여호와
나는 니들에게 섬김을 받는 하나님이 아니라 너희들을 섬기는 하나님이야 니들은 나의 섬김으로만 존재가 되는 거란다 나는 너희들 안에 있는 아들의 피만 볼거야...
이 하나님을 알게 될 때까지 우리는 굳이 죄 있는 육신을 살아내야 되는 거예요. 비루한 인생, 그렇게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고 도한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이기에 그 은혜의 영광과 함께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주님과의 동행 가운데 우리는 가끔씩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유와 평안을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없는 자유와 평안입니다. 주님의 죽음 같은 사랑이 우리에게 쳐들어왔을 때 잠깐 누리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너희들은 그리스도의 사람이니까 너희들의 육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으니까 너희를 정죄할 법에 대해 죽은 자니까 더 이상 율법에 빚진 것이 없으니까, 주께서 다 갚으셨으니까 더 이상 네가 네 자신을 챙길 필요가 없다 빚 갚으려고 하지 마.. 너희들의 그 율법의 몸도 나쁜 것이 아니야.. 그 몸으로 주께 영광을 돌리면 되는 거야
성령이 오신 것은 우리들에게 주께서 마련하신 새로운 공간, 새로운 처소인 그리스도 안이 무엇이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의와 거룩과 영원한 생명에 대해 알게 하시고, 누리게 하시고, 찬송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다른 거 없어요. 성령이 하시는 일은 바로 그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성령 하나님’ 옆에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오신 하나님의 영’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 여러분입니다. 그리스도 밖에 있는 것들은 진노의 그릇 하나님이 원수일 뿐이에요.
그래서 성령께서는 주께서 하신 일, 십자가의 다 이루심의 은혜와 사랑을 우리에게 계속 확인시키는 일을 하십니다. 그 일을 위해서 우리 육에서 나오는 육의 행실, 육의 정욕들을 예수님의 십자가에 못 박는 일을 하고 계십니다. 그 안에서 예수님의 진리의 죽음이 우리에게 나누어지게 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왜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인가를, 왜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이 아니면 안 되는가를 우리로 하여금 반복해서 깨닫게 하시고, 그 십자가 은혜가 아니면 나는 영원한 심판에 들어가도 할 말이 없는 죄인 맞습니다를 고백하게 하십니다. 이것이 최고의 성화입니다. 끊임없이 채워지는 하나님의 긍휼로 완성하신 새 피조물입니다.
(디모데전서 1장)(개역개정)
14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16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에게 본이 되게 하시려고.. 어떤 본?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심에 있음을 알게 하시는 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이 싫은 거에요 왜? 우리 속에 있는 죄성 때문에... 선악과 먹은 죄성 때문입니다. 왜 우리가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심으로만 구원을 받아야 하느냐라는 우리 안에 꽁꽁 숨겨진 죄성입니다. 선악과 따먹은 아담의 자존심이에요.
성령께서는 이런 우리 안에 감춰진 그 교만을 하나하나 들추어내십니다. 이 들추어내시는 사건이 우리의 일생 동안 고난 가운데 주어지게 됩니다. 그게 돈, 사업일 수도 있고 자식일 수도 있고 건강일 수도 있고 각자에게 알맞은 맞춤 고난으로 나타납니다. 종합선물세트예요. 그것들을 통해서 바울과 똑같은 항복을 받아 내시는 거에요
예수가 누구신지 알게 하시는 고난입니다. 그렇게 예수는 오직 죄인들의 구주이십니다. 예수께서 직접 그러셨죠? 병자가 아닌 자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고 죄인 아닌 자에게는 죄인의 구주로 오신 예수가 필요 없단 말입니다. 그렇게 예수가 필요 없는 사람에게는 십자가가 그냥 하나님의 저주로만 보이게 됩니다. 십자가가 어떻게 은혜의 영광입니까? 예수께서 요한복음에서 그러십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들에게도 나누어준다고..(요 17:22) 이 말의 뜻은 저들도 나와 같이 세상에 대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는 인생을 살게 될 것이라는 것이에요. 이것이 은혜의 영광입니다. 마음에 안 드세요? 마음에 안 들어도 할 수 없어요.
그렇게 전적 불가능한 죄인으로서의 자인식이 있는 성도들만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의 절대성과 필연성을 고백하게 됩니다. ‘저 십자가만이 영광이었구나. 저 십자가의 승리가 없었다면 우리에게는 어떤 소망도 없구나.’ 그렇게 십자가의 사랑만 끝까지 꼭 붙들게 하시는 것이 성령이 하시는 일입니다.
(에베소서 4장)(개역개정)
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하나님이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룬다.. 먼저 말씀드리는데요 여기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세상 교회가 자꾸 가능성을 이야기하면서 열심이 있어야 자라남도 있다고 종교생활을 독려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아담에게서 난자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것 어느 것 한 가지도 제대로 할 수가 없어요. 육이기 때문입니다.
주가 되신 분을 안다는 것의 성경적인 의미는 주님과 하나 됨의 연합을 이야기합니다. 히브리어의 ‘야다’입니다. 부부간에 한 몸이 되어 아는 그 앎입니다. 열심히 성경공부하면 예수를 안다고요? 요즘은 원어 공부까지 하던데 그런 것은 불교에서 하는 말입니다. 누구나 깨달으면 부처가 되는 것, 모든 사람에게 신의 가능성이 있는데 다만 깨닫지 못할 뿐이다...그러나 주님과의 하나 됨, 즉 주님의 죽음에 연합되고 주님의 다시 사심에 연합되게 하는 일은 성령이 하시는데 (롬6:5) 그 성령이 없으면 우리는 주님을 절대 알 수도 없고 믿을 수도 없어요 죽었다 깨어나도 육은 영의 일을 알수가 없는 것입니다.
주님을 믿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이란 주가 되신 분과의 관계인데 그 관계를 우리가 만들 수가 없는 거에요. 우리에게는 본래 믿음이 없습니다. 심지어 한 이불 덮고 사는 부부간에도 믿음이 없습니다.
ㅎㅎㅎ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잖아요. 아담과 하와가 같이 살았는데, 아담이 자꾸 밤늦게 들어오고 새벽에 들어오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하와가 물었대요. 당신 요즈음 바람났지? 여자 생겼지? 그랬더니 아담이 말하길 세상에 여자라고는 너밖에 없는데 어떻게 바람이 나냐?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자. 그랬어요. 그런데 한참 자다 보니 자꾸 옆구리가 이상해서 봤더니 하와가 와서 옆구리를 자꾸 만지고 있더래요. 왜 만졌을까요? 갈빗대 세느라고... 갈빗대가 다 제 자리에 있나 하고...
믿음은 원래 우리에게 없는 거예요. 믿음은 고린도전서에서 말하는 성령의 은사입니다. 그래서 로마서에서도 믿음으로 믿음에 이른다고 하는 거예요. 앞의 믿음은 하나님의 믿음인데, 그 믿음으로 우리에게 주관적인 믿음이 있게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아는 것이나 믿는 것 어느 하나도 우리가 할 수 없음을 시인해야 합니다. 그러나 열심히 공부도 하시고 믿어보세요. 요즈음 복음 듣고 복음을 안다는 젊은 사람들에 대해서 답답한 게 율법 생활이 뭔지 종교 생활이 뭔지를 해보지고 않고 그런 거는 다 나쁜 거고 자기는 원어도 알고 진리도 알았으니까 세상교회 비판이나 하는 사람들 정말 예수를 아는 건지 걱정됩니다. 심지어 어떤 카페는 “여기는 김성수 목사 복음으로만 소통하는 곳입니다 다른 거 올리지 마세요...” "여기서 이러시면 안됩니다..." 이런 사람들은 스스로 예수 안 믿습니다 라고 고백하는 거에요 복음은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이지 김성수 복음 같은 거 없단 말입니다. 바울도 그랬잖아요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갈1:11-12) 주 예수와의 사귐이 없이 지식만 챙겨 가지면 그 지식이 독이 되는 거란 말입니다.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믿는 믿음 안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지키시는 이 일을 성령께서 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신부로 부족함이 없는 교회, 한 몸의 교회로 지어져 가는 일을 성령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 한 몸 된 교회들만 예수 그리스도라는 진리, 하나님의 의와 거룩을 입혀주시는 거에요 진리의 사랑을 받아 진리를 마음으로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령이 우리 성도들에게 하시는 일은 창세 전에 정하신 아들의 죽음이 무엇인지, 언약의 피가 무엇인지를 우리 마음에 사랑으로 새기고, 또 그 복음을 우리로 살아내게 하시는 일, 그래서 육이 죽어서 영으로 살아난 성도들과 영원토록 함께 하시는 성령입니다. 우리의 선택이나 열심이 아닌 하나님의 약속이 작동되는 성도의 삶에 성령께서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이것이 우리의 영적현실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 믿고 성령 받아서 착한 사람 되어서 천국 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영원 전에 하나님의 아들의 피로 거룩하고 흠이 없는 아들들이 된 여러분이 이 세상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의 은혜의 영광을 잘 배우고 돌아갈 수 있도록 하나님의 성령이 지금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드러내신 하나님의 의와 거룩과 은혜와 사랑이 우리의 육(겉 사람, 옛사람)의 죽음과 속사람의 새로워짐이라는 새 피조물의 창조를 통해서 어떻게 우리에게 주어지고, 어떻게 우리에게 입혀지고, 또 우리가 지어져 가는지를, 성령의 모든 은사와 모든 선물로 주어진 것을 우리가 날마다 맛을 보고 누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영으로 육을 죽인다는 말은 예수님의 십자가가 우리의 삶, 우리의 현실이 되게 하는 새 언약의 성취입니다. 좀 더 현실감 있게 그 십자가를 살아낼 수 있도록 우리의 모든 환경과 사건과 인간관계와 세상 역사까지도 우리 인생에 발생되는 모든 일들을 주관하시는 것을 성령의 다스림과 인도라고 합니다. 모든 성령의 인도는 그 십자가의 영광으로 집중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상속자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해서 그 십자가도 살아내야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것을 ‘아들 만들기’라고 합니다.
그런데 영으로 육을 죽인다는 말씀을 오해한 종교인들이 만든 것이 자기 몸을 학대하는 종교행위들이에요 기독교로 말하면 중세 수도원 운동입니다. 나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육, 내 마음에서 늘 발생되는 정욕까지도 어떻게 하면 죽일 수 있을까 해서 머리 밀고 수도원으로 올라간 겁니다. 종무일과표대로 살면서 등을 채찍으로 때리면서 살았는데, 이것이 전형적인 자기다듬기라는 종교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그거 아세요? 그렇게 경건을 추구하던 수도원 사람들이 만든 것이 삼페인입니다. 성찬을 한다고 포도주 담가서 몰래 마시고는 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마개가 뿅 하고 터져 올라가길래 마셨더니 맛이 희한하더랍니다. 그게 샴페인이에요. 그래서 지금도 유명 샴페인은 수도원 표시가 있습니다. 돔페리뇽
자기를 다듬어서 하나님 앞에서까지 당당해지려는 종교인들의 모습입니다. 분장하고 위장해서라도 하나님 앞에서 당당해지고 싶은 죄인들이라는 말입니다.
이런 우리들을 하나님 앞에서 발가벗기시는 사건이 성령이 일으키시는 사건입니다. 우리가 젤 마주하기 싫은 사건들입니다. 자기부정의 사건들 이것은 우연히 발생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라는 씨를 가졌기 때문에, 예수라는 보배를 가졌기 때문에 우리로 하여금 예수만 자랑하고 예수만 드러내게 하는 사건들로 우리 일생동안 계속 반복됩니다. 질그릇이 깨어지는 사건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개역개정)
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을 알게 하심이에요. 그러니까 자꾸 그 일에 니들 숟가락 얹으려고 하지 말라는 겁니다.
8 우리가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9 박해를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10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이런 일을 좀 당하지 않고 예수 믿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박해 안받고 거꾸러뜨림 안당하면서 예수 믿으면 안 될까요? 그러나 이것이 없으면 우린 절대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지 않는 몸을 가졌습니다. 제가 장담할게요. 우리는 돈으로 내 힘으로 살려고 하지 은혜로 살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 자존심이 오직 은혜를 허락하지 않아요. 내 땀 한 방울이라도 들어간 내 돈으로 세상에서 당당하게 살기를 원합니다. 나도 세상에서 살 만한 인간이 맞구나 하는 것을 늘 확인하면서 살고 싶은 거지요
그러나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게 그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람들은 은혜로 살도록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생명으로만 사는 게 피조물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인도하심은 십자가의 은혜의 영광 앞에서 무릎 꿇는 그 자리로 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의 죽음에 넘기우는 그 현실이 방금 읽은 말씀의 내용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것들이 없으면 더 이상한 겁니다. 사도의 말대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우리 육체에 채우시는 그 일을 성령께서는 지금도 성실하게 빈틈없이 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을 앎이로라...이것이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의 탄식이며 기다림입니다. 이렇게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일에는 모든 것이 유익이며 모든 것이 선이에요.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을 이루게 하기 위해서 성도의 인생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성령의 간구하심이고 성령의 도움이시고 성령의 권능입니다.
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우리가 하는 기도는 언제나 나를 위한 기도잖아요. 나를 위하고 내 자식을 위하고 내가 바라는 것을 위해서 기도하죠? 좀 더 행복한 내일을 위해서...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여러분이 지금 이 자리에 와 있는 것도 성령의 탄식과 간구하심이란 말입니다.
27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우리가 무슨 짓을 하든, 어떤 기도를 하던 성령의 간구하심 때문에 내 인생을 내 마음대로 살지 못합니다.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이 여러분의 기도를 다 들어주셨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끔찍하지 않아요?
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여기의 선은 하나님의 선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셨던 처음 자리,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은혜와 생명력으로만 있음이 되는 그 자리가 하나님의 선입니다. 그 하나님의 착한 일을 하나님이 시작하셨고 또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하나님이 이루신단 말입니다.
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창세기에 보면 우리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었다고 하죠? 그런데 여기에는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위하여 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처음에 자기 형상대로 지었다고 하신 그 인간은 결국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완성되는 형상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개역개정)
4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하나님의 형상은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완성되는 사람을 아들들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그리스도와 연합해서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고 그들을 아들의 소망으로 이 세상에서 별세시키는 것까지가 교회에 오신 성령의 일하심입니다.
자 이제 로마서에서 살펴본 성령과 세상 교회가 오해하는 성령, 즉 다른 영, 세상 종교인들이 부려 먹는 시다바리 예수가 어떻게 다른지를 아시겠죠? 이렇게 우리가 모인 것도 말할 수 없는 성령의 탄식과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는 성령의 열심이라는 것을 안다면 그 성령 안에서 지금도 한 몸 된 교회를 위해서 어디선가 해산의 수고를 하고 있는 지체들이 있다는 사실에 우리는 감사해야 합니다. 아담으로부터 오늘 우리들까지 하나님은 때에 따라서 이 세상 속에 자기 말씀의 종들을 보내어서 자기 사람들을 한 명도 빠지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집으로 지어지는 일을 지금도 실수 없이 하고 계십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잠잠히 그분의 일하심에 감사하고 십자가의 그 죽음 잘 죽으시면 됩니다. 예수님이 그러셨죠? 나를 믿는 자는 죽어서 살겠고 그렇게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성도가 세상을 산다는 것은 그렇게 잘 죽는 거예요. 세상은 성도들의 무덤이니까
마지막으로 갈라디아서 4장을 보겠습니다.
(갈라디아서 4장)(개역개정)
19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바울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성령이 우리에게 들려주시려는 말씀입니다.
20 내가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어 내 언성을 높이려 함은 너희에 대하여 의혹이 있음이라
성령은 늘 우리를 토닥이고 위로해주고 도와주시는 분이 아니라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우리를 수시로 꾸짖으시는 성령입니다. 신자는 그 꾸짖음이 들려야 합니다. 우리는 정상이 아닌 몸을 아직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꾸짖음이 들리거든 예수 이름 앞에 무릎을 꿇으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앞으로 대전 모임에서 성령이 하시는 일에 대해 계속 할 거니까 후속편을 기대하시고, 이번 여름 캠프는 여기에서 마치겠습니다. 내일 아침 10시에 예배가 있으니까 빠지지 말고 모이시고 ...
기도하겠습니다.
우리에게 진리의 말씀을 넘겨주시고 진리의 영으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약속 안에 있는 성도가 한 사람이라도 빠지면 하나님의 집이 완성되지 못한다고, 또 하나님께서 스스로 충만치 않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셔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님의 심장으로 죽음 같은 사랑을 알게 하시고 나누게 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도 한 성령 안에서 주의 몸 된 교회를 섬기는 일에 게으르지 않게 하시고 우리의 남은 날들이 주님의 사랑으로 채워지고 주님의 흔적으로 새겨지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첫댓글 감사합니다.
설교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