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밀 졸라(Émile François Zola, 1840년~1902년)

에밀 프랑수아 졸라(프랑스어: Émile François Zola, 1840년 4월 2일 ~ 1902년 9월 29일)는 프랑스의 소설가이자 비평가 겸 저술가이다.
프랑스 현대 미술의 신기원을 구축한 선구자라 일컬어지는 인상파 화가 폴 세잔의 죽마고우로도 잘 알려진 그는 드레퓌스 사건 때 드레퓌스를 옹호한 것, 동료 작가, 동세대 화가들과 달리 압생트를 반대한 것으로 유명하다.
생애
파리에서 출생했으며, 처음에는 법률학에 뜻을 두었으나, 집안이 가난하여 공부를 그만두고 출판사에 입사한 후 소설을 썼다. 1867년 첫 작품 《테레즈 라캥》으로 자연주의 작가로 인정을 받았으며, 이때부터 클로드 베르나르의 실험 의학을 문학에 적용하였다. 이러한 방법을 작품에다 적용한 것이 《루공 마카르 총서》전 20권이다. 이 속에는 〈나나〉,〈목로주점〉, 〈대지〉등의 걸작이 들어 있다. 1894년 《3도시 총서》, 《4복음서》등을 발표하였고, 1898년 〈나는 고발한다…!〉라는 논문으로 드레퓌스 사건을 공격하고 금고형을 받았다. 저서로 《자연주의 소설가》, 《실험 소설론》 등이 있다.
드레퓌스 사건
"가톨릭 군중들에 둘러싸인 에밀 졸라, 앙리 드 그루작"
드레퓌스 사건 때 유태인 드레퓌스를 옹호하여 죽는 날까지 프랑스 군부와 가톨릭 신자들에게 살해 협박과 야유, 비난을 받았다.
졸라는 1898년 1월 13일을 기하여 《로로르지》에〈나는 고발한다…!〉를 발표하기 전에 이미 40여권의 책을 수백만권씩 유럽에 판매한 베스트셀러 작가였다.
그는 이 글에서 자신이 쌓아올린 모든 문학적 성과와 명예와 목숨을 걸고 드레퓌스의 무죄를 주장했다. 이 글 때문에 드레퓌스의 유죄를 주장하는 보수주의자들에게 살해 위협에 시달리고 집은 경매에 붙여지고 벌금이 물리고 명예훼손 소송에 시달리며 결국 영국으로 망명을 떠나야만 했다. 훗날 드레퓌스 사건은 졸라의 노력과 드레퓌스파의 힘겨운 싸움으로 무죄가 밝혀지지만 드레퓌스의 유죄를 주장했던 가톨릭 교회와 군부는 끝까지 졸라를 괴롭혔다.
졸라는 생전에 이렇게 한탄했다.
“진실이 전진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늪지대를 지나가야 하는 것일까”
의문의 죽음
1902년 방에 피워둔 난로 가스에 중독되어 사망했는데, 가톨릭 예수회에 의한 타살 의혹도 있다. 드레퓌스의 무죄가 밝혀지자 런던의 망명에서 돌아온 졸라는 마지막 편지 《공화국 대통령 무슈 루베에게 보내는 편지》를 통해 드레퓌스 사건을 조작한 예수회와 가톨릭 교회에 대한 공격을 피력했다. 그 후 그는 자택에서 일산화탄소 중독으로 사망한다. 훗날 암살자가 붙잡히는데 그는 굴뚝 청소부였고 누군가의 지시로 굴뚝을 막아 놓았다고 자백했다.
졸라에 대한 경의
졸라의 장례식에는 수만명의 군중들이 몰렸다. 특히 광부 대표단이 세 시간 넘게 졸라의 묘혈 앞을 돌면서 “제르미날!”(졸라의 소설 제목)을 연호한 것은 노동자들이 이 위대한 리얼리스트에게 품고 있던 경의를 반증한다.
미국의 소설가 마크 트웨인은 졸라를 이렇게 평가했다.
“나는 졸라를 향한 존경과 가없는 찬사에 사무쳐 있다. 군인과 성직자 같은 겁쟁이 위선자 아첨꾼들은 한 해에도 백만 명씩 태어난다. 그러나 잔 다르크나 졸라 같은 인물이 태어나는 데는 5세기가 걸린다.”
베를린 분서
가톨릭 중앙당의 도움으로 집권하게된 히틀러의 나치당은 베를린 분서때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의 책과 유태인들의 서적들과 함께 에밀 졸라의 책들을 모두 불태웠다. 그는 생전 유럽에서 수십권의 수십만권의 책을 발표했지만 이 분서 사건과 가톨릭 교회의 졸라에 대한 폄하의 영향으로 지금 남아 있는 책은 몇권 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