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직한테 ‘생산직으로 옮길래’라고 물으면, 70%는 ‘당장 간다’고 할걸요?”
지난 2일 현대자동차 기술직(구 생산직) 공개 채용이 시작되자 현대자동차 채용 포털사이트는 순식간에 마비 상태에 빠졌다. 수만 명의 지원자가 한 번에 몰리면서 ‘무한 접속 대기’가 이어졌다. “400명 뽑는데 10만명이 넘게 몰려들었다”는 이른바 ‘10만 지원설’이 퍼졌다. 지난해 기아차 기술직 채용 경쟁률이 약 500대1인 걸 감안하면, 지원자가 20만명에 이를 수 있다는 예측도 나온 상황. 현대차 내부에서도 “지원자가 몰릴 거라 예상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는 반응이 나왔다.
한때 대졸자들에게 기피 대상이었던 생산직이 이제는 ‘킹산직’으로 불리는 시대가 됐다. 10년 만에 이뤄진 현대차 기술직 공개 채용에는 명문대를 졸업한 대기업 사무직 직원부터 한때 ‘신의 직장’으로 불린 공기업 직원, 7~9급 공무원까지 줄줄이 “지원하겠다”고 나서 더 화제다. 이들은 하나같이 “매일 회의하며 스트레스 받고 야근하느니 대기업 생산직이 훨씬 낫다”고 입을 모았다.
◇ “승진·출세보다 연봉·워라밸이 최고”
현대차 생산직에 지원이 폭주하는 건 국내 최대 기업이 제공하는 파격적인 고용 조건 덕분이다. 2021년 기준 현대차 직원의 평균 연봉은 약 9600만원. 작년에 이미 1억원을 넘었다는 관측이 나온다. 50대에 들어서면서 서서히 퇴사 압박에 놓이는 대기업 사무직 입장에서는 60세까지 정년이 확실히 보장되는 점도 매력이다.
중소·중견기업 직원은 꿈도 꿀 수 없는 엄청난 복지 혜택도 기다린다. 근속 연수에 따라 2년에 한 번 현대차를 구매할 경우 최대 30%까지 할인을 받고, 장기 근속자는 퇴직 후에도 평생 신차 구입 시 25%의 할인을 받는다. 이번 공채에 합격하는 이들도 ‘신입사원 첫차 할인’ 혜택으로 20% 할인가에 신차를 구매할 수 있다. 각종 병원비를 비롯해 셋째 자녀까지 대학교 등록금을 지원받는다.
직장인 커뮤니티 등에서는 “사무직보다 대기업 생산직의 삶이 훨씬 만족스럽다”는 고백이 적지 않다. 공무원을 관두고 기아차 생산직으로 이직했다는 한 직장인은 “하루 4끼를 회사에서 무료로 제공하고 사내 복지시설에는 편의점, 카페, 은행, 헬스장, 여행사, 축구장, 수영장 등 없는 게 없다”며 “자기 할 일만 하면 되고 대인관계 스트레스가 없는 데다 업무도 단순해 나이 들수록 편한 직업”이라고 했다. 한 현대차 직원은 “국내 정유회사 생산직은 업무 강도도 더 낮은데 연봉은 2억에 가깝다는 얘기를 들었다”며 “유독 ‘현대차 킹산직’이라고 부각되는 건 조금 억울한 면이 있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무엇보다 젊은 세대의 직업관과 삶의 가치관이 기성세대와 확연히 달라진 게 드러났다”고 입을 모았다. 현대차 관계자들은 “최근 젊은 직원들은 승진·출세하는 것보다는 스트레스를 적게 받고 일과 가정의 균형을 중시하는 경향이 뚜렷하다”며 “그런 면에서 사내 정치나 야근 압박 없이 주어진 업무를 소화하고 정시 퇴근이 보장된 생산직을 더 선망하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현대차에 다니는 대졸 사무직 중에서도 ‘기회가 되면 생산직으로 가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이 적지 않단다. 한 관계자는 “과거에는 대졸 사무직들이 생산직보다 더 우수하다는 우월 의식이 있었지만 지금은 완전히 깨졌다. 도리어 ‘대졸 사무직이 고졸 생산직보다 더 천대받는다’는 말이 나오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성공 모델 된 블루칼라 VS 노동 양극화 상징
대기업 사무직으로 일하는 직장인들 사이에선 “이미 오래전 ‘현타’를 느꼈다”는 반응도 적지 않았다. 한 30대 대기업 사무직 직원은 “입시 경쟁 뚫고 좋은 대학 나와서 회사에 들어와 보니 정작 고등학교 졸업하고 곧장 입사한 생산직이 연봉이나 ‘워라밸’이 월등히 좋은 걸 보고 허탈감이 들었다”고 했다. 또 다른 40대 대기업 직장인은 “이미 아내와 아이들에게 ‘공부로 너무 스트레스 받지 말라’고 얘기한다. 기술 배워서 대기업 생산직에 취업하면 충분히 잘 살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했다.
젊은 세대 사이에선 “열악한 중소기업에서 격무에 시달릴 바에야 기술을 배우는 게 낫다”며 생산직이나 기술직을 택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유튜브에는 도배나 배관, 인테리어 시공·철거 기술 등을 익혀 월 500만~1000만원 이상의 고수익을 인증하는 2030 기술자들이 적지 않다. 기술·기능 인력을 양성하는 한국 폴리텍대학은 “취업난이 장기화되면서 구직을 못 한 대졸자나 중소기업 사무직에 취업했다 근로 조건에 만족하지 못한 청년층이 폴리텍대학을 찾는 경향이 점점 더 뚜렷해지고 있다”며 “과거엔 기술·생산직이 3D라며 기피하는 분위기가 있었지만, 지금은 ‘대우가 좋고 전망만 좋으면 기술을 제대로 배우겠다’는 인식이 커졌다”고 설명했다. 폴리텍대학에 따르면 작년 기준 자동차 및 전기차 관련 기술 인력, 특수용접 등 산업설비와 발전설비 분야에서 취업률이 높게 나타났다.
전문가들은 “생산직이 천대받던 과거와 달리 좋은 고용·복지 조건을 누리는 생산직·기술직이 늘어나는 것은 긍정적인 성공 모델이 될 수 있다”면서도 “다만 현재 대기업 생산직이 누리는 우수한 고용·복지 조건이 정말 생산성에 비례한 것인지 따져봐야 한다”고 말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노동 전문가는 “우리나라는 산별노조가 아닌 기업노조 중심으로 발전하다 보니 자금력과 조직력, 파업력을 갖춘 대기업 노조는 고용 안정성과 임금 등을 계속해서 끌어올릴 수 있었던 반면 중소기업들은 현재 노조를 꾸리기조차 힘든 실정”이라며 “그 격차가 생산직에 그대로 반영된 결과라는 점에서 대기업 생산직 중심의 기업 노조에 대해 ‘귀족 노조’라는 비판이 계속해서 제기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또 다른 전문가는 “최근 젊은 세대가 대기업 생산직을 선호하는 건 직무보다 근무시간이 길고 휴가 사용이나 칼퇴근 등에 제약이 많은 한국의 근로 여건에 대한 반작용으로도 볼 수 있다”고 말했다.
◇ AI로 사무직 더 빨리 사라지고 블루칼라는 양극화될 것”
그럼에도 현대차 생산직에 대한 폭발적 관심은 장기적으로 화이트칼라가 저물고 블루칼라가 떠오르는 시대의 서막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특히 ‘챗GPT’ 등 혁신적인 AI(인공지능)가 등장하자 국내외 전문가들은 “AI가 블루칼라보다 저숙련 화이트칼라를 대체하게 될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쉽게 말해 ‘어정쩡한’ 사무직은 AI로, 단순 노동직은 로봇이나 기계로 점차 대체되는 반면, AI나 로봇이 대체하기 어려운 미세한 육체 노동을 수행하는 고급 블루칼라와 AI를 활용할 수 있는 고급 화이트 칼라 직종이 살아남는 시대가 온다는 것. 아누 마드가브카르 맥킨지 글로벌연구소 노동 시장 연구 책임자는 외신을 통해 “과거 자동화 기술이 블루칼라 근로자에게 타격을 줬다면, 이제는 AI가 화이트칼라 직종 근로자에게 타격을 줄 것”이라고 전망했다.
현재 기업 규모에 따라 갈린 블루칼라의 양극화도 앞으로는 노동자 각자가 가진 기술에 따라 더 커질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당장 현대차 내부에서도 “기술직의 고도화는 필연적”이라는 얘기가 나온다. 현대차의 한 고위 관계자는 “EU 등에서 내연기관 차량 판매가 중단되는 2035년에 맞춰 현대차도 생산 공정이 고도화될 것이기 때문에 신기술, 자격증을 가진 숙련된 기술직을 더 채용하고 우대하는 방향으로 가게 될 것”이라며 “현대차를 비롯해 여러 대기업들이 하청을 줄이는 방향으로 가고 있어 이른바 1·2·3차 협력업체에서 근무하는 블루칼라의 여건은 상대적으로 점점 더 나빠질 수 있다는 생각도 든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학부모의 마인드와 정부의 교육 시스템도 이에 맞게 달라져야 한다”고 했다. 노민선 중소벤처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사무직은 AI와 기계로 대체되는 과정이 가장 활발하게 벌어질 것이기 때문에 사무직 선호는 갈수록 줄어들 것”이라며 “반대로 AI와 자동화로 대체할 수 없는 블루칼라, 전문 기술자에 대한 수요가 늘고 이들이 전문가로서 인정받는 사회가 될 것이므로 블루칼라를 원한다면 그에 맞는 준비와 교육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노 위원은 또, “정부가 마이스터고등학교를 고급 기술자를 키우는 방향으로 전환하고, 이들이 먼저 현장 경험을 한 뒤 대학에 진학하는 ‘선취업 후진학’ 모델도 활성화시켜야 한다”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