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로메 [ Salome ]
살로메 [ Salome ]
세례자 요한의 죽음
아름다운 살로메의 모습에 넋이 나간 안티파스는 살로메가 요구한 대로 세례자 요한의 목을 잘라 보냈다. 더운 피가 흐르는 쟁반을 통해 세례자 요한의 죽음을 생생하게 표현한 그림.
솔라리오, 〈살로메와 세례자 요한의 목〉, 1506년 무렵,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비극은 손님보다 법적 아버지인 안티파스가 넋이 나간 것이었으니 그는 딸을 불러 이렇게 말했다. “네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다 주겠다. 말만 하거라.” 결국 그날 세례자 요한의 목은 잘리고, 그의 머리는 쟁반에 담겨 생일잔치에 들여왔다. |
요한(Saint John the Baptist)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세례를 준 것으로, 그리고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워졌나니.” 하는 설교와 함께 사람들에게 처음 자기 손으로 세례를 준 것으로 유명하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이라고 불리는 것쯤은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 까닭에 그를 그리스도교의 선구자로 인정하기도 하는데, 본래 그는 광야에서 엄격한 금욕 생활을 유지하던 은둔적 집단에 속해 있던 인물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그 곳에서 독립하여 스스로 세례를 주면서 예언자로 활동했다.
이때부터 그를 따르는 무리가 급속히 늘었고, 예수 또한 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사실 세례자 요한에 관한 내용은 기독교인들에게는 너무 낯익은 것이라 부연하기가 겸연쩍기도 하다. 그렇다고 세상에 기독교인들만이 있는 것도 아니고, 또한 세례자 요한이 아닌 살로메란 인물은 종교적인 의미 외에 신화적·문학적 의미를 담고 있는 인물이기에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요한은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급속히 늘어감에 따라 발언의 수위도 점차 높였다.
그는 갈릴리와 페레아의 영주인 헤롯 안티파스(Herod Antipas, 4~39) 앞에 나아가 회개하라고 외쳤다.
물론 정치가도 아니고, 철학자도 아닌 세례자 요한이 회개를 요구한 것은 단지 종교적 이유에서였다.
그 무렵 안티파스는 나바테아 왕국의 공주와 혼인했다가 헤어진 후, 자신의 이복동생과 이혼한 헤로디아(Herodias)와 재혼했다.
그런데 헤로디아는 안티파스의 부친인 헤롯왕의 후비(后妃) 마리아므네의 아들 아리스토부로스의 딸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촌수로 보면 헤로디아와 안티파스는 부녀지간이나 다름없었다.
이는 유대 율법에 따르면 불법이었고, 따라서 세례자 요한은 이를 지적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일이 어디 한두 번이었을까?
안티파스는 요한의 충고를 듣는 대신 그를 체포하여 요새에 가두었다.
그런데 이 정도 징벌에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안티파스의 왕비 헤로디아였다. 자신의 결혼에 대해 공공연히 비판을 일삼는 요한을 못마땅하게 여긴 헤로디아는 그를 처치하기 위해 여러 모로 애를 썼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안티파스의 생일을 맞아 수많은 고관대작이 궁으로 모여들었다.
이런 상황이 되면 주인은 손님들을 위해 멋진 여성의 춤을 대접하는 것이 관례였는데, 물론 노예 정도가 아니라 왕비나 왕녀에 버금가는 수준이어야 했다.
그 무렵 요염하기 그지없던 헤로디아에게는 그녀를 능가하는 딸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안티파스와 결혼하기 전에 낳은 살로메(Salome)였다.
안티파스는 살로메를 불러 손님들 앞에서 춤을 출 것을 청하였고,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알몸이 그대로 드러나는 망사 천만 걸친 채 우아하면서도 요염한 자태를 뽐냈다.
그런데 비극은 손님보다 법적 아버지인 안티파스가 넋이 나간 것이었으니 그는 딸을 불러 이렇게 말했다.
“네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다 주겠다. 말만 하거라.”
살로메는 즉시 어머니에게 달려갔고, 어머니는 눈엣가시인 세례자 요한의 목을 청하라고 말했다.
남아일언 중천금인데 하물며 왕이 나라의 고위 관리들 앞에서 한 약속을 어찌 어길 수 있겠는가?
결국 그날 세례자 요한의 목은 잘리고, 그의 머리는 쟁반에 담겨 생일잔치에 들여왔다.
이 비극적이면서도 신화적인 이야기는 기독교 초기부터 다양한 주제로 예술가들에 의해 다루어졌으며 문학적인 소재로도 자주 쓰였다.
아일랜드 출신의 시인이자 극작가인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 1854~1900)는 이를 소재로 희곡〈살로메〉를 썼고 독일의 작곡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Richard Strauss, 1864~1949)는 1905년 같은 이름의 오페라를 발표하기도 했다.
그 외에 영화화된 것은 수십 번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이는 ‘살로메’란 제목 외에 그녀의 이야기를 영화화한 것을 포함한다.
요한 [ John the Baptist ] ?~?
신약성서에 나오는 흔히 ‘세례 요한’으로 불리는 인물.
“죄를 회개하라”고 외치며 유대인들을 일깨우고 많은 사람들에게 요르단 강물에서 세례를 주는 세례운동을 펼쳤는데, 이때 예수도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
우마이야 모스크 세례요한의 무덤
세례 요한의 이야기는 성서 외에 유대의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에도 나온다.
AD 28년경부터 그는 다음에 올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준비하기 위하여 유대 요르단 계곡에 나타나 예언활동을 하였다.
그는 광야에 살며 낙타가죽 옷차림에 가죽 허리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石淸)을 먹고 살았다.
“죄를 회개하라”고 외치며 유대인들을 일깨우고 많은 사람들에게 요르단 강물에서 세례를 주는 세례운동을 펼쳤는데, 이때 예수도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
뒤에 헤로데왕이 형 필립보의 아내 헤로디아와 결혼한 것을 비난하다가 체포, 투옥되었는데, 헤로디아의 꾐을 받은 살로메의 청으로 목이 잘려 죽었다.
이 이야기는 극 ·회화 등으로 많이 다루어졌다.
헤로데 안티파스
.
헤로데 안티파스 또는 헤롯 안디바(기원전 20년 - 39년)는 1세기, 예수가 활동하던 시대의 갈릴리와 페레아의 통치자였다.
헤로데 안티파스는 기원전 20년 유대의 왕인 헤로데 대왕과 사마리아출신의 말타체의 아들로 태어났다.
형제로는 헤로데 아르켈라오스와 헤로데 빌립보 2세를 비롯한 다수의 이복형제가 있다.
그는 로마제국이 세운 지방권력자인 아버지 헤로데 대왕과 아우구스투스의 동맹을 유지하는 상징으로, 일종의 인질로서 로마에서 자랐고 교육받았다.
기원전 4년 헤로데 대왕이 죽자 그의 형제들과 함께 왕국을 분할하여 물려받았는데 안티파스에게 분할된 지역은 갈릴리와 페레아였다.
안티파스가 처음으로 한일은 아버지의 죽음을 틈타 이 지역에서 발생한 오순절 반란을 제압하고 질서를 회복하는 일이었다.
이후 그는 아버지의 전철을 따라 영토내에 수많은 도시를 건축했는데 가장 유명한 것은 갈릴리 호수 서쪽 해변에 세운 티베리아스로 갈릴리의 수도였다.
이 도시의 이름은 안티파스의 보호자였던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를 기리기 위해 그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는데 무덤자리에 세워졌기 때문에 처음에는 유대인들이 살기를 거부하기도 하였다.
안티파스는 이웃나라인 나바테아의 공주 파샬리스와 결혼 했으나 이혼하고 그의 이복동생인 헤로데 빌립보 2세의 아내이자 또 다른 이복동생 아리스토부루스 4세의 딸인 헤로디아와 결혼했다.
이 결혼으로 결국 그는 파멸하게 되는데 나중에 파샬리스의 아버지인 나바테아의 왕 아레타스 4세가 쳐들어 왔기 때문이다.
세례자 요한은 이 부도덕한 결혼을 강하게 비판했고 결국 안티파스에 의해 투옥되고 처형되었다.
36년 헤로데 안티파스는 로마와 파르티아사이의 협상의 중재역을 맡아 성공적으로 임무를 완수했지만 당시 시리아의 총독이던 비텔리우스와 사이가 나빠졌다. 37년경 안티파스의 첫 번째 부인의 아버지인 나바테아 왕 아레타스 4세가 침입하였고 이에 로마에 구원을 요청하자 황제는 비텔리우스를 파견했으나, 일부러 느리게 이동했다고 한다.
칼리굴라가 로마의 황제가 되자 안티파스의 아내 헤로디아는 오빠 헤로데 아그리파 1세의 성공을 시기하여 제거하려고 했으나, 오히려 아그리파 1세의 역공을 받아 칼리굴라 황제는 안티파스와 헤로디아를 갈리아로 추방했고 두사람은 그 곳에서 죽었다.
성서와 헤로데 안티파스
세례자 요한과 헤로데 안티파스
신약성서의 마르코 복음서 6:14-29에 따르면 안티파스의 아내 헤로디아가 그를 부추겨 세례자 요한을 잡아 가두게 했으며 자신의 딸을 시켜 안티파스에게 세례자 요한의 목을 가져오도록 하게 했다고 한다.
이 딸의 이름은 성서에는 나오지 않으나 전통적으로 살로메로 알려져 있다.
(이 사건은 수많은 예술작품의 모티브가 되었다.)
안티파스가 세례자 요한을 죽인 이유에 대해, 마르코 복음서에는 간단하게 예언자인 세례자 요한이 헤로데 안티파스와 헤로디아간의 불륜
(헤로디아는 안티파스 동생의 아내이다.)을 비판했기 때문이라고만 나와 있다.
하지만 역사가 플라비우스 요세푸스에 의하면, 헤로데 안티파스가 세례자 요한을 죽인 진짜 이유는 세례자 요한의 민중들에 대한 영향력이 자신에 대한 반란으로 이어질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요한 복음서에 의하면, 세례자 요한은 예루살렘의 대사제들과 레위인들이 사람을 보내어 그리스도를 사칭하는 자가 아닌지 확인할 정도로 유대 민중들에게 존경받는 예언자(預言者)였으니, 헤로데 안티파스의 입장에서는 그를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예수와 헤로데 안티파스
안티파스는 루가 복음서에 다시 등장하는데 예수의 수난과 재판에 관여한 것으로 되어있다.
예수가 붙잡혀 수난을 받을 당시 안티파스는 과월절을 지키러 예루살렘에 머물고 있었다.
폰티우스 필라투스는 체포되어 자기 앞에 끌려온 예수가 갈릴래아 사람이라는 것을 알자 그를 관할인 안티파스에게 보내어 재판을 받게 했다.
안티파스는 예수가 기적을 일으킨다는 소식을 전부터 듣고 있어서 예수를 만나자 기적을 일으켜보라고 요구했다.
예수가 침묵으로 일관하고 아무 일도 하지 않자, 안티파스는 그를 조롱하며 다시 필라투스에게 보냈다고 한다.
이러한 내용은 다른 복음서에는 나오지 않고 루가 복음서에만 거론되고 있다. 외경인 베드로의 복음서에는 예수의 십자가 처형의 명령을 내린 것은 필라투스가 아닌 헤로데라고 말한다.
베드로 복음서에는 필라투스와는 달리 '손을 씻기'를 거부한 것은 분명히 헤로데 안티파스와 "유대인들" 이라고 되어있다.
살로메 [ Salome ] 14?~62? (48)
살로메의 춤
헤로데스(헤롯)의 의붓딸이자 헤로디아의 딸이다.
신약성서에 나오는 인물로 헤롯의 생일축하연에서 헤롯에게 세례자 요한의 목을 달라고 해서 얻어내었다. 이 일화는 매우 흥미를 끌어 많은 예술작품의 소재가 되어 왔다.
성서에는 이름은 밝혀져 있지는 않으나, 유대의 역사학자 요제프스(37?∼100?)의 《유대 고사기(古事記)》에서 살로메라 적고 있다.
헤롯의 생일축하연에서 춤을 추었는데, 헤롯이 "네가 바라는 것은 무엇이든지 주겠다"고 하자 어미의 사주(使嗾)를 받은 살로메는 세례자 요한의 목을 달라고 하여 이를 얻어낸다.
이는 세례자 요한이 헤롯과 그 형수 헤로디아와의 결혼을 평소 나쁘게 생각하여 그 행위를 나무랐기 때문이다.
이 일화는 매우 흥미를 끌어 많은 회화(繪畵)가 탄생했고, O.와일드의 희곡, R.슈트라우스의 오페라(1905) 등 많은 예술작품의 소재가 되어 왔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