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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모는 못생겼었다고 전해진다. 때문에 외모지상주의 풍조가 있던 당시 아테네에서 꽤 고생을 했다고 한다.[5][6] 실제로 소크라테스가 아테네 시민들 사이에서 알려진 것도, 그의 미남 제자가 아고라에서 소크라테스를 찬양하는 연설을 하면서부터였다 하니,[7] 아테네의 외모지상주의나 소크라테스의 추모(醜貌)가 얼마나 심각했는지 대략 짐작해 볼 만하다.[8] 플라톤의 저작 『메논』에서 메논은 소크라테스와 논쟁 중에 그를 '전기가오리 같다'고 비하하기도 했다.[9]
그러나 외모를 불문에 부치고도 그의 풍모는 상당히 비범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신발을 신지 않고, 누더기가 되기 직전의 옷을 걸치고 다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소크라테스는 이에 대해서 난 이렇게 다녀도 익숙해서 편하고 정신력도 단련될 뿐만 아니라, 오히려 다른 사람들이야말로 옷이나 신발에 길들여져서 불편한 거 아니냐고 했다고 한다.[10] 이런 초연한 풍모를 과시하고 다닐 뿐만 아니라, 석공 출신이라 그런지 상당히 튼튼한 몸을 타고난 것으로 여겨진다. 잔치 자리에서 술을 가장 많이 들이키고도 가장 말짱한 정신으로 가장 늦게까지 토론을 하다가 유유히 떠날 수 있는 체력과 정신력 그리고 알콜 분해력의 소유자로 여겨진다. 또한 전투에 참전했을 당시에도 배고픔이나 목마름, 추위, 더움, 잠자리, 적군 등에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평상심을 유지하던 강철멘탈의 소유자였다고 한다. 게다가 사색을 즐겨 하여, 어떤 문제가 떠오르면 해답이 떠오를 때까지 밤낮을 가리지 않고 가만히 서서 몇 시간이고 길게 생각에 잠기다가 해답을 찾고 자리를 떠나는 일이 종종 있어서 다른 아테네 사람들이 구경하였다고 한다. 여러 모로 기인의 풍모를 지니고 있었음에는 틀림이 없다.
그의 아내였던 크산티페는 못생긴 악처(惡妻)였다고 전해지는데,[11] 사실 앞뒤 정황을 따져보면, 소크라테스의 아내는 오히려 현처(賢妻)였을 가능성도 있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에서 유명한 철학자였지만, 사실 아내 입장에서 소크라테스는 돈도 없는 주제에 맨날 돈 많은 사람(대표적으로 플라톤)과 사색한답시고 수다나 떨러 다니는 남편으로, 집안 살림은 크산티페가 다 책임졌다. 소크라테스가 물려받았으나 운영 등에 무관심하여 거의 내팽개치다시피 했던 석공소도 크산티페가 직접 운영했다.
그러나 이런 크산티페가 소크라테스를 내쳤다는 기록은 없으며, 외려 소크라테스가 독배(毒杯)를 마시고 사망할 때 그의 죽음을 슬퍼하며 울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물론 다혈질기가 있었고 잔소리에 자주 티격태격하긴 했지만 부부관계가 파탄날정도로 심각한 건 아니었다. 아내의 잔소리에, 소크라테스는 이런 부인이 참을성을 길러준다고 했다나 어쨌다나. 하여튼 이런 점들을 종합해 볼 때, 크산티페가 악처라고 전해지는 것은 다툼이 많은 친구를 악우라고 하는 것처럼, 단어 그대로의 의미가 아닌 것으로 보이며, '효자보다 악처가 낫다'는 이야기와도 통한다. 소크라테스가 말했다고 전해지는, "젊은이여, 결혼하라. 좋은 처를 얻으면 행복할 것이고, 악처를 얻으면 철학자가 될 것이다" 라는 농담도 그 행간(行間)을 읽을 필요가 있다.[12]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대결한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30대 후반에서 40대의 나이에 중보병으로 종군하기도 했다. 당대 아테네 시민은 신체 및 정신에 장애가 있거나 만 50세를 넘지 않았다면 군복무 의무가 있었으므로, 소크라테스도 군인으로 참여한 것. 대표적인 참전 전투로는 델리온 전투가 있는데, 이때 아테네군이 패배했지만, 소크라테스는 침착하게 후퇴하는 담대함을 보여주었으며, 그가 소속된 부대도 소크라테스의 침착한 대처 덕분에 무질서하게 패주하지 않고 무사히 전장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고 한다.[13][14] 무려 세 번이나 참전했다고.
《아테네의 변명》과 《소크라테스의 재판》이라는 책에서, 소크라테스의 삶과 당시 세계관이 잘 드러난다.
소크라테스는 평생 동안, 위에 서술된 것처럼 세 번 참전했던 것과, 딱 한 번 이스트모스에서 포세이돈을 위해 열리는 대축제였던 이스트미아 제전을 구경하러 간 것을 합쳐, 단 네 번밖에 아테네를 벗어난 적이 없었다고 한다. 플라톤의 《크리톤》에서 아테네의 법이 소크라테스에게 묻는 형식으로 자문자답한 《소크라테스의 독백》에 의하면, '우리(아테네의 법)와 우리의 도시(아테네)만으로도' 소크라테스에겐 충분했기 때문이라고.
3. 삶과 철학[편집]
소크라테스는 윤리학을 철학에 도입한 사람이다.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 [15]
우선 소크라테스의 삶은 가난했다. 일을 한다는 것 자체가 철학자의 삶에 어긋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돈을 벌어오라는 아내의 구박을 많이 받았고, 이 때문에 상술했듯 티격태격 싸우는게 일상다반사가 된 것. 이에 영향을 받았는지, 하루는 제자들 중 한 명이 "스승님, 결혼은 해야 합니까, 말아야 합니까?" 라는 질문에, "해도 후회하고 안 해도 후회한다" 라고 답했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드는 의문이, 이렇게 가난했던 소크라테스가 일개 수병도 아니고 최소 중산층 이상은 돼야 군장(軍裝)을 마련할 수 있었던 중장보병으로 어떻게 참전할 수 있었느냐다.[16][17] 이에 역사가들이 제시하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석공소 주인이었던 소크라테스의 아버지가 페리클레스의 아테네 재개발 사업으로 단단히 한몫 잡았을 거라는 설, 소크라테스 대신 석공소를 운영했던 크산티페가 의외로 수완이 탁월한 경영자였을지도 모른다는 설, 알키비아데스 같은 부유한 제자들이 스승님을 위해 대신 군장을 마련해 드렸을 것이라는 설 등. 아니면 그냥 대대로 군장을 물려받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아직 확실한 사실은 밝혀지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고향인 아테네를 지극히 사랑했던 철학자로서, 소피스트들의 궤변에 아테네가 놀아나고 상대주의에 빠지는 모습을 보며, 이에 반발하여 보편적 지식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주장하며 등장했다.
보통 사람들의 시선에서 보면 지극히 기이한 인물로, 하는 일도 없이 시장이나 광장을 돌면서 사람들을 붙잡고 묘한 철학적 질문을 해댄 것으로 유명하다.[18]
또한 아테네에서는 공적인 자리에서 정치적인 의사를 피력하는 것이 높이 평가되었으나, 소크라테스는 그러한 공적인 모임에도 그다지 참여하지 않았다. 《소크라테스의 변명》이라는 책에서는, 그가 정치에 관여하는 것을 다이몬이 금지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19]
좀 더 와 닿게 설명하자면, 돈도 안 벌어오면서 딱히 정치적인 활동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시장바닥이나 광장에서 지나가는 사람 붙잡아다 얘기를 나누다가 '당신은 아무것도 모른다'고 하는 인물이었다. 다만 그가 비록 공적인 모임에 참여하지 않았다 해도,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은 공적인 삶과 사적인 삶이 현대인들보다 대단히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개중에서도 아테네와 같이 가장 번성하고 개방적인 도시국가는, 외국인이나 시민권을 얻지 못한 채 오래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도 많았기 때문에, 시민권자들은 상당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시민권자들이 시장바닥이나 광장에서 국가정책이나 도덕에 대해 토의를 하는 것은 현대보다는 상당히 긍정적이고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현대로 치면 명사나 학자들이 TV나 유튜브 교양 방송에 나와서 토의하는 것과 같은 역할이었다.
저술보다는 대화를 통해 철학활동을 하였고, 특히 상대방에게 계속 질문을 해서 자신의 무지를 깨닫게 하는 방법을 썼다. 이런 질문을 중심으로 하는 교수법을 소크라테스식 문답법, 혹은 산파법(산파술)[20]이라고 부른다. 확고한 주장을 가지고 있던 피질문자가, 질문자의 문답법에 의하여 결국 자신의 주장을 스스로 부정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유도심문과도 비슷해 보이지만 그것과는 다르다.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은 논쟁의 상대방에게 접근하는 자세는 상대를 함정에 빠뜨리거나 혹은 심문하려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경우 자신이 상대보다 더 모른다는 것을 전제하고, 기본적인 것부터 검토해 나아가는 것이다. 때문에 이를 형사가 사용하는 유도심문과 같은 것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어쨌든 이렇게 소크라테스와 대화를 나누면서, 상대방은 이내 자신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 개념이 사실은 오류가 있는 개념임을 깨닫게 되고, 당황하거나 화내거나 부끄러워하게 된다. 이를 아포리아(Aporia, ἀπορία)라고 한다.
이런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이 '해답을 제시해주지 않는' 단점을 지녔다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21] 소크라테스는 산파술을 통해 어떤 새로운 개념을 제시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도덕 철학을 위해 기존에 있는 개념(가령 '경건함', '선함', '좋음' 등)을 명료하게 만드는 것에 주목했으므로, 이러한 지적은 핵심을 완전히 잘못 짚고 있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에서 계속 산파술을 시전하고 다닌 끝에, 결국 자기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을 정말로 아는 사람은 없다는 걸 깨닫게 되고, "나는 내가 아무 것도 모른다는 걸 안다"는 말을 남겼다.[22]
전해져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당시 델포이 신전에 어떤 사람[23]이 '아테네에서 소크라테스보다 더 현명한 자가 있습니까?' 라고 묻자, 무녀는 평소에 늘 쓰던 은유나 수사들을 생략[24]하고 단 한 마디로 '아니'[25] 라는 신탁을 주었다고 한다. 이에 소크라테스는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여, 똑똑해 보이는 사람(정치인, 작가, 장인 등)들을 닥치는 대로 만나고 다니며 그들의 지혜를 시험해 봤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 '똑똑해 보였던' 사람들은 자신의 무지(혹은 편견)조차 몰랐다는 사실이 드러나게 되고, 그제야 소크라테스는 '자기가 무지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자신이 아테네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이었다고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다.
비슷한 시기에 중국에서 공자가 '아는 것을 안다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 하는 것이 진정한 앎이다' 라는 말을 남겼던 것과 비교해본다면 흥미로운 대목(그러나 공자도 모르는 것을 안다는 식으로 말하지 말라는, 경계의 의미에서 저 발언을 했기에, 의미상으로는 소크라테스의 말과 통한다고 볼 수도 있다.). 참고로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은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 입구에 새겨져 있는 말이기도 하지만, 소크라테스가 살아생전 중요하게 여긴 말이라고도 알려져 있다.[26] 청년 알키비아데스와 소크라테스의 대화에서 소크라테스가 이 말을 인용한 것을 볼 수 있다.
소크라테스의 죄명.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평의회 배심원들이 두가지 죄목으로 사형을 언도한다.
죄목은 神에 대한 불경이다.
소크라테스는 나라가 인정하는 神은 인정하지않고, 새로운 다른 신령들 들여온다는 허무맹랑한 가짜뉴스로 사형을 언도했다.
둘째 죄목은 청년들을 궤변으로 현혹시키고 사회 질서를 문란케하여 청년들을 타락시켰다는 유언비어와 가짜뉴스를 퍼뜨려 소크라테스를 내란선동죄로 감옥에 가두고 사형을 언도했다
첫댓글 소크라테스죄 마리앙뚜아네트죄
박근혜대통령죄는 모두 가짜뉴스로 만든 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