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로 詩인 음악 ..... 영화 '일 포스티노(Il Postino)'의 테마곡이 주는 울림의 크기
여태까지 수많은 영화를 보아오면서
제가 감동을 받은 영화도 많습니다만,
마지막 장면에서 가슴이 "쿵!" 소리를 내며 먹먹해진 나머지
자리에 앉아 가슴을 추스리느라 얼마간 일어서지 못했던 영화가 두 편 있습니다.
하나는 『거미 여인의 키스』라는 영화였는데요,
주인공 윌리엄 허트가 마지막에 총을 맞는 장면이었고요,
나머지 하나는 오늘 이야기하고자 하는 영화 『일 포스티노』의 마지막에
네루다의 시가 자막으로 올라오면서
주인공인 마시모 트로이시의 얼굴이 겹치는 장면이었습니다.
눈물이 핑돌만큼, 먹먹한 가슴에 한동안 어쩔 줄 몰라했었던 영화들이었죠.
『일 포스티노』의 마지막 장면에 자막으로 올라온 네루다의 시 일부분을 옮겨봅니다.
Poem (詩)
파블로 네루다
그러니까 그 나이였어…
시가 나를 찾아온 건
나는 모르겠어
그게 어디서 왔는지
모르겠어, 겨울에서인지
아니면 강에서인지
언제 어떻게 왔는지 모르겠어
아니, 그건 목소리가 아니었고
말도 아니었고
침묵도 아니었어
그런데 어느 길거리에서 나를 부르더군
밤의 가지에서
갑자기 다른 것들로부터
아주 격렬한 불꽃 속에서 말이야
아니면 나 홀로 돌아오는 길에 그렇게
얼굴 없이 있는 나를 시가 건드리고 말았어
파블로 네루다는 칠레의 민중시인으로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작가죠.
그의 시집 《스무 사랑의 시와 하나 절망의 노래》는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는데요,
젊었을 때, 거기에 수록된 시들을 문예지나 신문의 문화면을 통해 만나는대로 하나씩 노트에 적어가며 음미했었고요.
영화 『일 포스티노』의 사운드 트랙에서
그의 시들을 헐리우드의 유명 배우들이 낭송할만큼,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흠모를 받는 시인이 바로 네루다이기도 하죠.
스팅, 글렌 크로스, 앤디 가르시아, 마돈나, 윌리엄 데포, 줄리아 로버츠,
에단 호크, 미란다 리처드슨, 사무엘 젝슨, 웨슬리 스나입스 등
그야말로 쟁쟁한 은막의 스타들이 참여한 그 동영상을 보지 않을 수는 없을 것 같네요.
함께 보겠습니다.
영화 『일 포스티노』는 이태리 나폴리의 한 작은 섬에
파블로 네루다가 망명해오면서 시작됩니다.
본국 칠레에서 추방당한 그를 위해 이태리 정부가 이 아름다운 마을에 거처를 마련해준 거였죠.
이 작은 섬의 우체국장은 네루다가 도착하면서 엄청나게 불어난 우편물량을 소화하기 위해
어부의 아들인 마리오 로폴로(마시모 트로이시 분)를 고용합니다.
마리오는 편지를 배달하며 시인과 친해지자 그에게 날마다 시를 배웁니다.
마을 여자들에게 관심을 끌기 위해서죠.
가끔 남의 시를 베끼기도 해서 네루다에게 혼이 나기도 합니다.
네루다와의 사이에서 싹튼 우정과 신뢰를 통해 마리오는 아름답고 무한한 시와 은유의 세계를 만나게 되죠.
그러면서 그는 아름다운 여인 베아트리체를 사랑하게 되고요.
놀라운 건, 마리오가 베아트리체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네루다의 도움을 찾던 중에
내면의 영혼이 눈뜨게 되고 그때까지 깨닫지 못했던 자신의 이성과 감성을 발견하게 된다는 점입니다.
비로소 시의 의미를 터득하게 된 거죠.
그러자 이젠 네루다에게 한 수 가르쳐주기도 하고, 급기야는 베아트리체의 마음을 얻어 결혼까지 하게 됩니다.
마리오와 친구 사이가 되어 돈독한 우정을 나누던 네루다는 얼마 후 고국으로 돌아가고요.
오랜 시간이 흐른 후, 섬을 다시 찾은 네루다는 이미 세상을 뜬 마리오 대신
그가 녹음한 음성을 듣습니다.
그가 낭송하는 시를 듣게 되죠.
줄거리는 대충 그런 내용인데요,
영화의 오프닝부터 장면 곳곳에 흐르는 음악이 그야말로 '백미'입니다.
음악을 진두 지휘한 루이스 바카로프의 솜씨가 제대로 드러나는 테마곡 <Il Postino>는
피아노, 바이올린, 아코디언, 밴도니언, 클라리넷 등이 함께 어우러져
영화의 장면 장면들에 다양하게 변주되면서
정감 있는 이태리 영화의 분위기를 제대로 전달하는 데 크게 기여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테마곡이 흐르는 영화의 오프닝부터 다양하게 변주되는 장면들을 보기로하죠.
지중해의 그 짙푸른 바다와 함께 아름다운 풍광도 한 몫을 하고 있는 영화인데요,
오프닝에서 흐르는 <The Postman(Il Postino)>은 헥토르 율리시즈가 지휘하는
로마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연주입니다.
이 곡은 바이올린, 피아노. 밴도니언 등이 어우러져 대시인과 우편배달부 사이의,
신분을 초월한 우정을 감동적으로 그려내고 있다는 평을 받고 있죠.
성가대원들이 합창할 때 주로 사용되는 탱고 아코디언의 한 종류인 밴도니언은
1860년대에 발명된 악기로, 아르헨티나 탱고 음악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 아코디언과 비슷하게 생긴 악기 밴도니언(Bandoneon)
이렇게 밴도니언을 사용해 매우 특색 있는 소리를 담고 있는 테마곡은
수줍어하는 처녀의 음색을 연상시키는 리듬이
지중해의 자연 풍경과 어우러져 듣는 이에게 청량감을 선사하기도 하죠.
아울러 50년대 유럽 음악계에서 널리 사용되었던 악기 클라리넷을 곁들인 건
시대 배경인 50년대를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하는 탁월한 편성이라는 찬사를 받기도 했고요.
이 영화 『일 포스티노』에서, 음악과 함게 빼놓을 수 없는 다른 한가지는
주인공 마리오 역을 맡았던 배우 마시모 트로이시입니다.
주인공 역을 맡은 마시모 트로이시는 영화에서 그랬듯이,
실제로 영화 촬영을 마친 직후에 지병인 심장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지병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만류했지만,
그는 이 영화가 '내 인생의 영화'라고 고집하며 촬영을 강행했죠.
총 10주의 촬영 기간 동안 점점 깊어가는 병세로
오래 걷는 장면 등은 대역을 써야만 했었습니다.
영화가 마지막으로 갈수록 주인공의 얼굴에 병색이 도는 건 분장의 힘이 아니었던 거죠.
90년대 중반, 이 영화를 보기 전에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그랬는지
영화 속에서 그의 얼굴을 보는 게 그토록 가슴이 아팠더랬죠.
그 사실로 인해 요절한 예술가들의 삶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기도 했고요.
죽음과 맞바꿀 수 있을 만큼의, 예술에 대한 그들의 열정을
그러나 저같은 평범한 관객은 도저히 실감할 수 없을 거라는 생각에
좀 우울해지기까지 했었던 기억 -
그리고 이 영화 『일 포스티노』에서, 마지막으로 언급할 만한 또 한가지는
줄거리가 갖는 이야기의 힘입니다.
맑은 영혼을 지닌 순박한 젊은이가
詩를 통해 자기 자신의 변화를 추동해내는 과정이 또한 눈물겨웠죠.
영화에서는 직접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주인공 마리오가 죽는 장소가 사회주의자들의 대중 집회장으로 설정된 데서 추측할 수 있듯이
그는 詩로 인해 '사회적 자아'까지 인식을 키워나간 것으로 보여진 것이고
그것이 마지막 장면에서 네루다의 詩구절과 함께 제 가슴을 두드렸던 겁니다.
아울러, 영화 미학적인 면에서 리얼리즘을 선호하는 제게,
당시나 지금이나, 자극적이고 폭력적인 영상이 난무하는 환경에서
시인과 우편배달부가 보여주는 우정은
'인간'이 갖는 지고지순한 관계로 보여졌던 거고
감동을 넘어 '충격'이라고 말할 수 있을만큼 큰 것이었습니다.
이런 사항들을 모두 담고서 다양한 악기로 변주하는 테마곡은
들을 때마다 잔잔하지만 묵직한 울림을 주는 명곡이 아닐 수 없죠.
2년 전이었던가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발차취가 서린 통영 앞바다에 갔을 때,
짙푸른 남해를 굽어보며 들었던 이 영화의 테마곡 <Il Postino>가
문득, 제 마음 속에 전해준 말이 있었습니다.
다른 존재를 위해, 다른 누군가를 위해
네 자신의 영토를 줄일 수 있겠느냐?
마시모 트로이시의 얼굴이 겹쳐지면서
루이스 바카로프의 이 음악이, 비현실적이라는 느낌을 동반할 정도로,
잔잔하지만 굽이치는, 겉은 조용하지만 속은 아우성치는 형태로
정말이지 불현듯, 제게 말을 걸어왔었죠.
그것은 감동을 넘어선, 말로 잘 설명할 수 없는 크기를 담고 있는 거였습니다.
이를테면, 저를 부끄럽게 만드는 음악이었던 거죠.
소리로 구성된 음악의 오묘한 세계의 일면을,
아주 색다른 방식으로 체험할 수 있었던 겁니다.
그 속에 희귀한 즐거움을 담은 음악으로서 말이죠.
제가 좋아하는 시인 황지우도 이 영화를 보았던 모양입니다.
영화를 보고 나서 "갈 데 없는 길을 한참 걸었다"는 싯구절에 제 마음도 흔들거렸던 적이 있었으니까요.
황지우의 시 '일 포스티노'를 옮겨 적으며 오늘의 포스트를 마감합니다.
일 포스티노
황지우
자전거 밀고 바깥 소식 가져와서는 이마를 닦는 너,
이런 허름한 헤르메스 봤나
이 섬의 아름다움에 대해 말해보라니까는
저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으로 답한 너,
내가 그 섬을 떠나 너를 까마득히 잊어먹었을 때
너는 밤하늘에 마이크를 대고
별을 녹음했지
태동하는 너의 사랑을 별에게 전하고 싶었던가,
네가 그 섬을 아예 떠나 버린 것은
그대가 번호 매긴 이 섬의 아름다운 것들, 맨 끝 번호에
그대 아버지의 슬픈 바다가 롱숏, 롱테이크되고
캐스팅 크레디트가 다 올라갈 때까지
나는 머리를 박고 의자에 앉아 있었다
어떤 회한에 대해 나도 가해자가 아닌가 하는 생각 때문에
영화관을 나와서도 갈 데 없는 길을 한참 걸었다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휘파람 불며
신촌역을 떠난 기차는 문산으로 가고
나도 한 바닷가에 오래오래 서 있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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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중순의 토요일 밤이 깊어가고 있습니다.
이 밤이 독자님에게 아직 어린 것이었으면 좋겠네요.
마음 속에 울림을 주는 음악을 듣는 밤으로서 말입니다.
편안한 주말 보내시구요.
그럼 또.
총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