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친 소? 아픈 소랍니다!
[셋째 날, 6월 7일 오후 3;30 ~ 4;30]
난장(亂場)이 따로 없어요. 촛불을 켜는 시각까지 광장 이곳저곳에서 토론, 퍼포먼스, 음악 공연이 열리고, 자유발언, 모금운동, 서명운동, 각종 홍보 활동이 쉴 사이 없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무슨 새로운 명물이라도 생긴 양 나이 지긋하신 어르신들이 구경삼아 들르기도 하시고, 사흘째 거리에서 밤샘을 하는 이들은 아예 텐트를 가져다 광장 한 켠에 치고 틈틈이 쪽잠을 청합니다.

▲ 촛불소녀들의 부스. 한 달여 가까이 촛불시위의 주체가 되었던 10대 중.고생 소녀들이 모금운동과 홍보활동을 하는 곳이다.
촛불집회는 처음 UCC·블로그 등 웹으로 무장한 10대들이 댓글과 지식 검색을 통해 스스로 논리를 개발하고, 정부 대책의 허구성을 주장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정부 정책대로 미국산 쇠고기 수입이 이루어질 경우 값싼 재료의 급식을 먹는 자신들이 누구보다 가장 많은 피해를 입게 된다고 판단한 것이죠. 여기에 안전한 먹거리에 대해 민감할 수밖에 없는 어린 자녀를 둔 주부, 직장인 그룹이 가세하며 공감대를 넓혀 왔습니다.
요즘 아이들 정말 이기적이고 버릇없다는 말을 참 많이 듣습니다. 그런데 아이들과 자주 만나다 보면, 이기적이라기보다 개인지향성이 강하다는 표현이 적당할 때가 더 많고, 버릇없다는 것 또한 불합리한 것을 참고 지나간다거나 자신이 누려야 할 권리를 쉽게 포기하려 하지 않는 데서 비롯된 경우가 훨씬 더 많습니다. 당장 내가 피해의 당사자가 된다는 것, 그런데 마땅히 보호 받아야 할 자신들을 사회의 누구도 보호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 바로 여기에 기인한 위기의식, 기성세대에 대한 회의와 불신이 아이들로 하여금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오게 한 것이죠.
물론 10대들의 의식이 그렇게 확장되기까지 단순히 광우병에 대한 두려움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광우병 파동이 있기 전부터 10대들 사이에서 이명박정부는 ‘개념 없는’ 몹쓸 존재, 자신들의 생명을 갉아먹는 악의 축이었습니다.
4월 어느 날이었던가요, 올해 중학교에 입학한 예쁜 조카아이 입에서 “매일같이 학원에다 학습지에다, 그것도 한 두 가지야? 일요일에도 제대로 못 쉬고, 내 인생이 왜 이런가 싶은데, 사람을 아주 피를 말려요, 피를 말려! 뭐 어륀지? 쥐박이 꼬랑지는 아니고 어륀지냐! 아주 쌩쇼를 해요, 쇼를 해! 개념이 집 나갔어? 우리도 잠 좀 자자고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지더러 딱 일주일만 우리처럼 살아보라 그래! ...이모도 명박이 찍었어?”
또래에 비해 어른 같고 상냥하던 아이가 거의 숨도 쉬지 않고 속사포처럼 내뱉는 말을 들으며 머리가 한 동안 띵 하니 어지러웠던 기억이 납니다. - 오마이뉴스에 올려진 '누가 내 아이에게 걸레를 물렸을까?'라는 글이 생각나는 기억입니다. 나라의 최고 행정수반인 대통령이 초등생, 중등생들에게 이렇게 직접적으로 분노의 대상이 되고, 조롱거리로 전락한 예가 또 있었던가 싶습니다.
반 석차, 학년 석차, 과목별 점수가 낱낱이 공개되고, 현실을 무시한 채 모든 것을 획일화시키면서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제도교육 속에 성장한 아이들이 사회를 어떻게 바라보고 어떤 삶을 꾸려갈 것인지... 굳이 주절주절 늘어놓지 않아도 짐작하시리라 여깁니다. 그 경쟁지옥을 살아내야 한다는 것 자체가 아이들에겐 공포요, 풀기 어려운 시험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 이제 겨우 열세살 조카아이는 밤 10시가 다 되어 가는 시각에야 파김치가 된 몸으로 집에 돌아옵니다.

▲ 녹색쉼터
유모차에 아기를 태우고 집회에 나오는 엄마들이 많다 보니 때가 되면 수유할 곳이 마땅치 않습니다. 아기 엄마들에겐 수유 공간으로, 그 외 지치고 피로한 분들을 위해 잠깐 동안이나마 쉴 수 있도록 제공된 공간이랍니다.

▲ 서울시장 시절, “서울시를 하나님께 봉헌한다”고 했던 말을 패러디 한 펼침막.


▲ “삽질하고 가세요!”^^* 운하백지화 서명도 받는다.

▲ “새로 나왔습니다!”

▲ 한국여성민우회 부스. 벽면과 바닥이 온통 낙서들로 도배가 되어 있다.

▲ 참여연대가 마련한 낙서마당

▲ 육두문자도 상관없어요! - 진보신당 부스 앞 낙서판
광장은 커다란 낙서판입니다. 이래도 될까 싶은, 읽기에 민망할 정도의 육두문자에서부터 준엄한 꾸짖음과 조롱, 유머, 풍자가 뒤섞인 말(言)의 해방구! 일종의 배설창구 같습니다. 주로 조롱과 힐난이 대세를 이루지만 반짝반짝 빛나는 재치와 유머, 생각할 여지를 남기는 글도 적지 않아요. 낙서를 읽다 보면 촛불을 든 이들의 마음이 읽혀집니다. “육두문자도 상관없어요!” - 그렇기 때문에 시원하게 풀고 가는 게 아닐는지...
몇 가지만 소개해 봅니다.

미친 소가 아니고, 아픈 소예요! 우리가 아프게 만든 거예요!
2MB, 니네 별로 돌아가! 우리 생각 좀 하고 살자! 운하는 개뿔 -!-
국민소환제로 소통 좀 해보자! 이리 오시오, 냉큼 오시오!
방빼라~~
중고등학생들한테 배후조정 당해 이 자리에 나온 기성세대입니다.
이명박씨, 그러고도 하나님의 자녀라고 외치고 다니실 겁니까?
개념 좀 되찾아 와라!!
명박아, 하나님이 부르신다!
우리 아이들에게 정말 좋은 먹거리를 주고 싶습니다.
개념을 국말아 먹었니?
자, 뇌 열어! 개념이야!
소.탐.대.실 - 미친 소를 탐하다 대통령 자리 잃는다!
물대포가 안전하다고? 그럼, 청와대 비데로 써라! 강추다!
값싸고 질 좋은 소고기 인도에서 수입하면 개방하자!
명박아 나 너 싫어, 어청수 데리고 사라져! 한승수는 덤으로 끼워 줄게.
(소 그림 옆에) 먹지 마세요. MB에게 양보하세요^^*
2MB 포맷 고고싱!!!
너 해고야!!
촛불시위 하는 이유 - 혼자는 주장해도 들어주지 않기 때문에!!!!
야구 좀 보자! 너 때문에 이게 뭐니 -!-
정치 공부 좀 하고 와! 고딩도 배우는 걸
개념원리나 더 풀고 와라~~
명박이 욕 많이 드시고 올해 돼지 되세요~~~
소고기 업자는 이익을 위해 100% 사기를 쳐 팔게 되어 있슴. 법으로 정해지지 않으면 광우병 차단은 없다.
2BM가 대통령이면 파리가 새다!
조중동이 신문이면 내가 똥 닦은 휴지는 팔만대장경이다!
(*. 가감 없이 그대로^^...)
고기 양보 하기는 처음이다!

‘진보신다방’으로 신장개업(?)한 진보신당 부스에서 커피와 차, 간식거리를 제공합니다. “3분만 기다려 주세요. 물을 이제 올려놓아서...” “3분 후에 오지요.^^*” 일어서려는데, 붉은 깃발에 ‘선영아, 모여라’ 오래 전에 본 광고 카피가 눈에 들어오고, 광장 출구 쪽이 갑자기 복잡해집니다.

순식간이었어요. 100여명의 사람들이 신호대기 중인 차량들을 뒤로 하고 도로 한복판으로 쏜살같이 빠져나갑니다. “기습시위다!” 위험할 텐데... 카메라를 들고 뛰었어요.

유모차에 아이를 태운 엄마, 하이힐에 가방을 맨 어여쁜 아가씨, 교복 입은 여학생, 중년의 아저씨, 열혈청년...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2개 차선을 점거하고 “이명박은 물러나라!” 구호를 외치며 빠른 속도로 나아갑니다. 광장에서 취재 중이던 언론사 기자들도 그제야 감을 잡고 정신없이 뛰기 시작.

신호가 바뀌고 12차선 도로 위로 차량들이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어느 차에서도 경적소리가 나지 않아요. 애써 행렬을 피해 조심스럽게 달립니다. 이 쪽 도로변에 서 있던 경찰은 기가 막히다는 듯 망연자실 바라볼 뿐이고... 갑자기 웃음이 터져 나오더군요. 다시 광장으로 돌아와 시켜 놓은 커피를 얻어 마셨습니다. 더운 날씨에 막 탐방을 마치고 온 터라 몸이 물 먹은 솜처럼 지치고 무거웠습니다. 시위대를 따라잡을 엄두도 나지 않았지만, 왠지 그들이 안전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커피를 마시고 있을 동안 절도 있게 뚜벅 뚜벅 걸어온 총각, 패션이 범상치 않다. 그가 매직펜으로 굵직하게 쓴 낙서(키득키득 혼자서 한참을 웃었습니다.^^) - 이건 데스노트다 이명박!


종합 멀티플랙스(multiplex),라는 말이 실감납니다. 단체, 동호회, 개인 등 다양한 그룹의 퍼포먼스와 공연이 수시로 열리고, 자유롭고 솔직한 의견표출이 가능하며, 출출한 속을 달래주는 먹거리 서비스와 쉴 수 있는 공간이 제공됩니다.
유쾌하게, 가볍게, 비틀고 꼬는 풍자와 유연한 개방 구조, 다양한 시위방법의 창출을 통해 축제처럼 즐기는 시위문화가 제 가치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어떤 조건 없이 지적 . 물적 자산이 공유되고, 재치와 창의가 넘쳐나며, 끊임없이 생산되는 유머, 거미줄 같은 정보망을 배경으로 하는 쌍방향 소통, 비폭력이란 쐐깃돌이 날선 구호와 무거운 시위 주제를 지치지 않고 끌고 갈 수 있도록 해줍니다.

▲ 구례의 한 농민이 촛불집회 참가자들을 위해 한 트럭 분량의 유기농 오이를 무상으로 제공했다. 풀어 놓은 자리에서 먹을 수 있도록 미리 깨끗이 씻어 내놓은 오이는 갈증을 확 풀어줄 만큼 시원하고 맛이 좋았습니다.

광장은 사흘 만에 시민들 품으로 돌아왔습니다. 함께 공연을 즐기며 환호하기도 하고, 가족끼리, 동료끼리 혹은 연인끼리 삼삼오오 둘러 앉아 여유로움을 만끽합니다. 이제 어스름이 내리기 시작하면 모두 일어나 다시 촛불을 들 것입니다.
[뱀 다 리]
☞ 과거와는 확연히 다른 21세기형 시위문화 속에 시대를 읽는 코드가 들어 있습니다. 불교계가 현실 사회에서 존재감을 가지고 제 몫을 해내려면 단지 사회 문제나 이슈에 동참하는 데서 만족할 것이 아니라, 보다 적극적으로 시대 코드를 읽어내려는 노력을 해야 되리라고 봅니다. 사회 변혁을 이끌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가슴으로 느끼고 자각하지 않는다면, ‘부처님의 가르침이 백만 촛불의 아우성과 다르지 않음을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란 호의적 표현은(*. 불교포커스 6월 11일자 기사 참조) 끝내 자기 위안으로 그치고 말 것입니다.
*. 지난 6월 5일~7일, 사흘 동안 있었던 '72시간 릴레이 촛불문화제' 에 짬짬이 참가한 후 올린
3편의 게시물 가운데 마지막 글입니다.
첫댓글 고위급 공무원님과 한나라당 인사들 이글을 봤을까? 봤으면 먼 생각을 했을까? 미친소리로 치부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