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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장달수의 한국학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낙민
계암일록 용어 설명
인동 장달수 편
외조부 : 김령의 외조부는 신민수申壽民이다.
백부 : 김령의 종형인 상주 형의 아버지 김부인金富仁을 지칭한다. 1584년에 작고했다.
어머니 : 김령의 어머니는 평산 신씨平山申氏이다.
모친 → 어머니
집사람 : 김령의 부인은 남양 홍씨南陽洪氏로, 홍문관 정자를 지낸 홍사제洪思濟의 딸이다.
장인 : 홍문관 정자를 지낸 홍사제洪思濟이다.
빙군聘君 → 장인
홍향오洪享五 : 홍리일洪履一이다. 그의 자가 향오이다. 김령의 장인 홍사제洪思濟의 종제 홍사효洪思斅의 둘째 아들이다.
향오享五 → 홍향오
전비前妣 : 계암 김령의 아버지 김부륜金富倫은 전비前妣가 밀양 박씨密陽朴氏이고, 후비後妣가 평산 신씨平山申氏이다. 김령은 후비의 소생이다.
내한內翰 형 : 김령의 재종형인 근시재近始齋 김해金垓이다. 1593년에 사망하였다.
본 자료 중에 붉은 색으로 표시한 인물은 계암 일록에 가장 많이 나오는 인물입니다.
계암일록을 읽고 이해하기 쉽게하기 위해 작성하였습니다. 장달수
인명
상주尙州 형 : 김령의 큰아버지 김부인金富仁의 아들 김호金壕를 가리킨다. 김호의 자는 경보景輔이며, 그의 배위配位가 상주 김씨尙州金氏이다.
좌수座首 형 : 계암일록에 자주 나오는 상주尙州 형 김호金壕의 이칭이다. → 상주 형
자개子開 : 금발琴撥의 자이다. 계암 김령의 아버지 김부륜金富倫의 고종姑從인 일휴당日休堂 금응협琴應夾의 아들이다.
금자개 → 자개
평보平甫 형 : 김령의 중부仲父 김부신金富信의 셋째 아들 김평金坪(1563~1617)이다. 자는 계평季平, 호는 극재克齋, 본관은 광산이다. 계암일록에 상사上舍라고도 불리었다. 1591년 식년시 생원에 입격하였다. 삼도 사림에서 오현의 문묘배향을 청하는 상소를 올릴 때 소수가 되어 활약하였다.
상사上舍 → 평보 형
생원 형 → 평보 형
서숙庶叔: 김령의 서숙부庶叔父인 김부생金富生을 가리킨다. 자는 경윤景潤이다. 계암일록에 ‘숙叔’으로 기록된 것이 있으나 이 당시 계암의 숙부 항렬은 모두 작고하고 서숙庶叔과 제천 표숙堤川表叔뿐이었다. 계암일록에는 주로 ‘서숙’으로 기록하고 가끔 ‘숙’으로 기록하기도 했다. 그리고 서숙에게는 김당金塘과 김참金墋 두 아들이 있다.
김당金塘 : 자는 자청子淸, 본관은 광산光山이다. 김령의 서숙부인 김부생金富生의 아들이다.
김참金墋 : 자는 숙징叔澄으로 안동 권씨安東權氏 벌橃의 손녀와 혼인하였다. 김령의 서숙庶叔 김부생金富生의 아들이며 김당金塘의 동생이다.
판사判事 형 : 김령의 중부仲父 김부신金富信의 맏아들 김지金址를 일컫는다. 김지의 자는 경건景建이다. 판사 형은 아들이 없고 딸만 셋이다.
김용金涌(1557~1620) : 자는 도원道源, 호號는 운천雲川, 본관은 의성義城이다. 1590년 증광시增廣試에 급제했고, 이조 정랑吏曹正郞, 병조 참의兵曹參議를 역임했다.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손자 이준李寯의 사위이다. 임란 때 의병을 일으켜 안동수성장安東守城將에 추대되었다. 김용은 1599년에서 1601년 사이에 선산 부사善山府使를 역임하여 계암일록에서 김 선산이라 불렸고, 또 홍주 목사를 역임하여 김 홍주라고도 불렸다. 저로서는 운천집雲川集ㆍ운천호종일기雲川扈從日記 등이 있다.
김 선산 → 김용
김 홍주金洪州 → 김용
이지以志 : 김광계金光繼(1580~1646)이다. 자가 이지以志, 호는 매원梅園, 본관은 광산光山이며, 아버지가 김령의 재종형인 김해金垓이다. 광산 김씨 예안파禮安派의 종손이다. 계암일록에 매우 자주 등장한다. 계암 친필본에는 이지以志를 백승伯承으로 기록해 놓기도 하였으나, 후손 전사본에는 모두 이지以志로 되어 있다. 안동 부사로 부임한 정구鄭逑에게 심경心經 등을 물어 학문을 크게 성취하였다. 학행으로 여러 번 천거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하였다. 저서로는 매원유고梅園遺稿가 전한다.
김광계金光繼 → 이지以志
백승伯承 → 이지以志
김광보金光輔(1587~1634) : 자는 이도以道, 호는 용문龍門, 본관은 광산이다. 아버지는 김령의 재종형인 근시재 김해金垓이며, 김광계金光繼의 아우이다. 권문해權文海의 사위이며, 생원시에 입격하였다. 사복시 정에 증직되었다.
광보光補 → 김광보
이도以道 → 김광보
김광악金光岳(1591~1648) : 자는 이직以直, 호는 야일재野逸齋, 본관은 광산光山이다. 아버지는 김해金垓, 형은 김광계金光繼, 정구ㆍ장흥효의 문인이다. 1618년 생원시에 입격하였다. 이이첨을 극형에 처할 것을 상소하였다. 병자호란 때 형 김광계와 함께 의병을 일으켰으나 삼전도 굴욕 소식을 듣고 청량산에 은거하였다. 계암일록에는 주로 이직以直으로 나온다.
이직以直 → 김광악
배 한림裴翰林 : 배용길裵龍吉(1556~1608)을 가리킨다. 배용길의 자는 명서明瑞, 호는 금역당琴易堂·장육당藏六堂, 본관은 흥해興海이다. 1602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고, 임진왜란 때 김령의 재종형 김해金垓의 휘하에서 부장副將으로 활약하였다. 한림翰林은 예문관藝文館의 봉교奉敎·대교待敎와 검열檢閱을 지칭하는 말인데, 1603년 당시 배용길은 예문관 검열이었다. 배용길은 김령의 종형인 상주 형 김호金壕의 사위이다.
배용길裵龍吉(1556~1608) : 자는 명서明瑞, 호는 금역당琴易堂·장육당藏六堂, 본관은 흥해興海이다. 1602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고, 임진왜란 때 김령의 재종형 김해金垓의 휘하에서 부장副將으로 활약하였다. 한림翰林은 예문관藝文館의 봉교奉敎·대교待敎와 검열檢閱을 지칭하는 말인데, 1603년 당시 배용길은 예문관 검열이었다. 배용길은 김령의 종형인 상주 형 김호金壕의 사위이다.
한림 → 배용길, 배 한림
배 도사 → 배용길
탁청정濯淸亭 : 계암 김령의 조부祖父 김유金綏의 정자이자 당호堂號이다. 당시는 사수士修 김광도金光道의 집으로, 김유의 사당이 있었다.
김순명金順命
북애北厓 형: 김령의 백부伯父 김부인金富仁의 넷째 아들 김기金圻이다. 자는 지숙止叔이며, 계암일록에는 북애北厓 형으로 자주 나오고, 참봉參奉 형이라고도 불린다.
북애 → 북애 형
참봉參奉 형 → 북애北厓, 북애北厓 형
찬중纉仲 : 김령의 종형 김전金㙉의 아들 김광찬金光纘(1564~1613)이다. 자가 찬중, 호는 만계灣溪, 본관은 광산, 생부는 김호金壕, 양부는 김전金㙉이다. → 이실
전全 형 : 김령의 자형姊兄 전경업全景業이다. 광산 김씨 예안파 족보에는 전경적全景迪으로 등재되어 있다.
이실而實 : 김확金確(1583~1665)이다. 이실而實은 그의 자이고, 호는 정지재定止齋이다. 김령의 종질從姪 김광찬金光纘(계암일록에는 찬중纘仲으로 자주 등장)의 아들이다. 1603년 식년시 생원에 입격하였다. 정온鄭蘊의 천거로 참봉을 제수받았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병자호란 때 김광계金光繼와 함께 의병을 일으켰으나, 이미 조정이 청나라와 화친을 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고향으로 돌아온 후, 어름산御凜山 아래에 정지재定止齋를 짓고 은거하였다.
확 군確君 → 김확
권자여權子與 : 권점權點(1568~?)이며, 자가 자여이다. 본관은 안동이며 1609년 진사시에 합격했다.
이여흡李汝翕
진상홍秦尙弘(1569~?) : 자는 의백이며, 본관은 풍기(豊基)이다. 1612년 증광시에 급제했다.
진의백秦毅伯 → 진상홍
민희안閔希顔(1578~?) : 자는 경우景愚, 본관은 여흥驪興이다. 1609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1629년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군수를 지냈다. 계암일록에 그의 벼슬이 삼례 찰방參禮察訪으로 나온다.
박율보朴栗甫 : 박경朴璥(1573∼1654)이다. 자는 율보, 호는 동천東川, 본관은 무안務安으로, 박선장朴善長의 아들이며 박한朴王旱의 형이다.
이준李埈(1560~1635) : 자는 숙평叔平, 호는 창석蒼石, 본관은 흥양興陽이다. 1591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단양 군수ㆍ예조 정랑ㆍ대사간ㆍ부제학 등을 역임했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이숙평李叔平 → 이준李埈
숙평 → 이준李埈
최崔 형 : 김령의 맏자형 최민수崔民秀이다.
홍 평산洪平山 : 홍사효洪思斅이다. 계암의 장인 홍사제洪思濟와는 종형제간이다. 1602년에 평산 부사가 되었다.
향제享諸 : 홍득일洪得一(1577~?)이다. 향제는 그의 자이다. 본관은 남양南陽, 호는 만회晩悔이다. 1613년 증광문과에 병과급제, 1628년 승지, 1638년 참찬관을 지냈고 1639년 예조 참의가 된 후 1643년 다시 좌승지를 역임했다.
홍향제洪享諸 → 향제
금개琴愷(1562~1629) : 자가 언강彦康, 호는 망월헌望月軒, 본관은 봉화奉化이다. 1601년 문과에 급제하여 금산 군수金山郡守, 여주 목사驪州牧使를 역임하였다. 금산 군수(경북 김천의 금산동)를 지냈기에 계암일록에서 금산金山이라고도 하였다.
금언강琴彦康 → 금개琴愷
금산金山 → 금개琴愷
언강彦康 → 금개
조정趙靖(1555~1636) : 자는 안중安中, 호는 검간黔澗, 본관은 풍양豊壤이다. 1605년 증광시增廣試에 급제하여 호조 좌랑, 봉상시 정奉常寺正, 김제 군수金堤郡守 등을 지냈다.
권정부權正夫
권중성權仲成
중성 → 권중성
권사엄權士嚴
정사경鄭思敬 : 문봉文峯 정유일鄭惟一의 서자庶子이다.
홍우형洪遇亨(1585~1655) : 계암 김령의 처질妻姪이다. 자는 회백會伯으로, 계암의 큰처남 황산 찰방黃山察訪 홍할洪劼의 아들이다.
우형 → 홍우형
회백會伯 → 홍우형
홍회백洪會伯 → 홍우형
용보用甫 : 계암의 셋째 처남 홍적洪勣의 자이다.
정보精甫 → 정보 계암의 둘째 처남 홍근洪勤의 자이다.
홍정보洪精甫 → 정보
홍계형洪啓亨 → 용보
류희서柳希緖
류일柳馹
조서모祖庶母 : 조부 김유金綏의 측실側室로 서숙庶叔 김부생金富生의 어머니인 것 같다.
여희汝熙 : 김령의 종형從兄 김호金壕의 둘째 아들 김광적金光績의 자이다.
김여희金汝熙 → 여희
김광적金光績 → 여희
사수士修 : 김령의 종형 김호金壕의 맏아들 김광도金光道의 자이다. 그는 탁청정濯淸亭 김유金綏의 적장손嫡長孫이다.
김광도金光道 → 사수
배 내한裴內翰 → 배 한림, 배용길
김광하金光夏 : 김령의 종형從兄 김강金堈의 둘째 아들이다. 자는 대이大而이다.
광하光夏 → 김광하
대이大而 → 김광하
이유以由 : 김령의 재종형再從兄 김해金垓의 아들이다. 광산 김씨 예안파禮安派의 종손인 김광계가 그의 형이다.
김이유金以由 → 이유
금업琴忄+業(1557~1638) : 자는 언신彦愼, 호는 만수재晩修齋, 본관은 봉화奉化이다. 성재惺齋 금난수琴蘭秀의 아들이다. 외조부가 월천月川 조목趙穆이고, 형이 금경琴憬, 동생은 금개琴愷이다. 1589년에 형 금경과 함께 나란히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1601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금업의 형 금경과 아우 금개도 계암일록에 종종 나온다.
금언신琴彦愼 → 금업
배숙전裵淑全 : 배용길裵龍吉의 아들로 자가 원선元善이다. 계암 김령의 종형인 상주 형 김호金壕의 외손자이다.
배원선裵元善 → 배숙전
숙전 → 배숙전
송응松鷹 형수 : 김령의 종형 김전金㙉의 후배後配인 안동 권씨安東權氏이다.
홍 찰방洪察訪 : 김령의 큰 처남 홍할洪劼(1563~?)을 지칭한다. 자는 면보勉甫이고 본관은 남양南陽이다. 황산 찰방黃山察訪을 역임했다. 계암일록에는 주로 면부장勉夫丈으로 나온다.
홍할洪劼(1563~?) : 자는 면보勉甫이고 본관은 남양南陽이다. 황산 찰방黃山察訪을 역임했다. 계암일록에는 주로 면부장勉夫丈으로 나온다.
면부장 → 홍할
홍면부 → 홍할
면보勉甫 → 홍할, 홍 찰방
윤의평尹倚平
금 제천琴堤川 : 김령의 아버지 김부륜金富倫의 고종姑從인 금응훈琴應壎(1540~1616)을 가리킨다. 제천 현감堤川縣監을 역임했다.
제천 댁 → 금 제천
제천 표숙 : 금 제천
이치원李致遠 → 이유도
이유도李有道(1565~1626) : 자는 치원致遠, 호는 백당栢堂이다. 퇴계 이황의 형인 이해李瀣의 손자이다.
김봉길金逢吉 : 백암栢巖 김륵金玏의 둘째 아들 김지선金止善(1573~1622)이다. 그의 자가 봉길逢吉, 호는 번계樊溪, 본관은 선성宣城이다. 영주에 거주였으며, 1601년 생원시에 합격하여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를 지냈다.
봉길 → 김봉길
김지선金止善 → 김봉길
이사첨李士瞻 : 이율李嵂(1583~1615)이다. 자가 사첨, 본관은 진성眞城이다. 안동 예안禮安에 거주하였다. 퇴계 이황의 증손으로, 아버지는 이황의 둘째 손자 이순도李純道이다. 16세에 숙부인 이영도李詠道를 따라 화왕의진火旺義陣에 출전하였으며, 1612년 음덕蔭德으로 사환이 내릴 때 퇴계의 증손으로 최장년이라고 하여 서수고 별좌西水庫別座를 제수받고 상의원尙衣院으로 이직하였으나 33세로 요절하였다.
사첨 → 이사첨
오경허吳景虛오여벌吳汝橃 : 경허는 오여벌吳汝橃(1579∼1635)의 자이다. 호는 경암敬菴·남악南岳, 본관은 고창高敞이다. 1603년 문과에 급제하여 정언·좌랑․수찬·교리, 영천 군수·대구 도호부사·청송 부사·창원 부사 등을 역임했다.
오경허吳景虛 → 오여벌
이립李苙(1571~1616) : 이덕홍李德弘의 둘째 아들로 자는 형원馨遠이다. 1615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세자시강원 설서世子侍講院說書를 역임했다.
형원馨遠 → 이립
이형원 → 이립
이사안李士安 : 이일도李逸道이다. 자가 사안, 본관은 진성眞城으로 이황의 후손이다. 김령의 종형인 상주 형 김호金壕의 사위이다. 생부는 이충李冲이며, 퇴계의 5촌 조카인 이빙李憑의 양자가 되었다. 송당종파松堂宗派의 파조이다.
사안 → 이사안
김득의金得礒 : 유일재惟一齋 김언기金彦璣의 둘째 아들이다. 유일재 집안도 광산 김씨로서 계암 집안과 그 뿌리가 같고 두 집안의 학맥도 퇴계학통이다. 김언기가 와룡면 가야리로 이주했기 때문에 두 집안은 지역적으로도 가까운 거리였다. 계암일록에서는 주로 김의정 또는 의정으로 지칭하였다.
김의정金義精 → 김득의
득의 → 김득의
의정 → 김의정
태지泰之 형 : 김령의 둘째 자형 전경업全景業의 자이다. → 전全 형
전태지 → 태지 형, 전全 형
조차석曺次石(1552∼1616) : 자는 일회(一會), 본관은 창녕(昌寧)이며, 남명 조식의 첫째 아들이다. 52세(1603년)에 예안 현감(禮安縣監)에 제수되었고, 신창 및 의령의 현감을 지냈다.
신형보申亨甫 : 신달도申達道(1576~1631)이다. 자는 형보亨甫, 호는 만오晩悟, 본관은 아주鵝州이다. 참의 신원록申元祿의 손자이고, 신흘申仡의 아들이다. 1623년 문과에 급제하고 사간원 정언, 사헌부 장령을 역임했다.
형보亨甫 → 신형보
이시발李時發(1569~1626) : 자는 양구養久, 호는 벽오碧梧 또는 후영어은後潁漁隱,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1589년 증광 문과에 급제하여 경상도 관찰사, 함경도 관찰사, 형조 판서 등을 역임했다.
박 정랑朴正郞 : 김령의 종형 김탄金坦의 사위 박수의朴守誼인 듯하다. 자는 경행景行이다.
이후경李厚慶(1558∼1630) : 자는 여무(汝懋), 호는 외재(畏齋), 본관은 벽진(碧珍)이다. 정구鄭逑에게 수학하였으며,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 강화도에 왕을 호종扈從하여 그 공으로 음성 현감에 제수되었다.
박수의朴守誼 : 김령의 백부 김부인金富仁의 셋째 아들 김탄金坦의 사위이다. 자는 경행景行이다.
권 사간權司諫 : 권춘란權春蘭(1539~1617)을 가리킨다. 권춘란은 1597년에 사간원 사간에 임명되었다.
금성원琴聲遠
금진달琴振達 → 금성원
중명仲明 형 : 이찬李燦(1575~1654)을 가리키며, 중명은 그의 자이다. 본관은 여주驪州, 호는 국창菊窓으로 용궁면 무이리 출신이며, 서애 류성룡의 생질이자 제자이다. 또한 계암 김령의 셋째 자형이다.
중명 → 중명 형
이李 형 → 중명 형
금 사평琴司評 : 금난수琴蘭秀(1530∼1604)를 지칭한다. 장예원 사평掌隸院司評을 역임하였다. 김령의 아버지와 함께 퇴계의 제자이다.
금 봉사琴奉事 → 금경
금경琴憬(553∼1634) : 자는 언각彦覺, 호는 월담月潭, 본관은 봉화奉化이다. 금난수琴蘭秀의 아들이며, 조목趙穆의 문인이다. 김령金坽, 이안도李安道 등과 교유하였다. 선조 때 생원시 합격하고, 학행으로 천거되어 봉사奉事를 제수받았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임해군臨海君(1574~1609) : 선조의 서자로 어머니는 사도시 첨정 김희철金希哲의 딸이다. 서자이지만 서열이 첫째이므로 세자가 되어야 하나 성질이 난폭하여 아우인 광해군에게 세자 자리를 빼앗겼다. 광해군이 즉위하자 대신들의 주청에 의하여 진도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강화의 교동으로 이배되었고, 이듬해 죽음을 당하였다.
김윤사金允思(1552∼1622) : 자는 이득而得, 호는 송음松陰, 본관은 순천順天이다. 1588년 진사시 합격하여 찰방을 지냈다.
전직공殿直公 : 계암 김령의 5대조로, 김숭지(金崇之)이다. 전직(殿直)을 역임했다.
음성공陰城公 : 계암 김령의 고조이며, 음성陰城 수령을 지낸 김회金淮이다.
권위權暐(1552~1630) : 자는 숙회叔晦, 호는 옥봉玉峯·옥산야옹玉山野翁,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1601년 문과에 급제하고, 해미 현감海美縣監을 역임했다.
권 해미 → 권위
경망景望
김백웅金伯熊 → 경망
김경망 → 경망
구坵
서고모庶姑母
권굉權宏(1575~1652) : 자는 인보仁甫, 호는 진봉震峯,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권우權宇의 아우로 권춘란權春蘭의 문인이다. 1603년 사마시 합격하고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상의원 별좌尙衣院別座에 제수되었다.
권인보權仁甫 → 권굉
인보 → 권인보
류계화柳
금 판사琴判事
季華 : 계화는 류진柳袗(1582∼1635)의 자이다. 호는 수암修巖, 본관은 풍산豊山이다. 영의정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의 넷째 아들이다. 1610년에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1627년 정묘호란으로 왕과 세자가 피난하는 상황이 되자 의병장에 추대되었다. 이조 참판에 증직되었고 병산서원에 제향되었다. 문집으로 수암집修巖集이 전한다.
계화 → 류계화
류진 → 류계화
권응순權應順
권계權棨
황성黃惺
황성黃珹(1538~?) : 차는 경휘景輝, 본관은 창원昌原이다. 선조 5년 별시別試에 합격하여 예조 좌랑을 역임하였다.
김백온金伯溫 : 백온은 김률金瑮(1568~?)의 자이다. 호는 천유옹天有翁, 본관은 의성義城이다. 조목趙穆의 문인으로 1627년에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백온 → 김백온
김득연金得硏(1555~1637) : 자는 여정汝精, 호는 갈봉葛峯, 본관은 광산光山이다. 유일재惟一齋 김언기金彦璣의 맏아들로서 1602년 생원ㆍ진사 양시兩試에 급제하였으나, 일생 동안 벼슬하지 않았다.
득연 → 김득연
변경회邊慶會(1549~1639) : 자는 군우君遇, 호는 백산栢山, 본관은 원주原州이다. 임진왜란 때 군량미를 제공한 군공으로 장악원 직장에 제수되었다.
박윤보朴潤甫 : 박한朴[王+旱](1576~1652)이다. 자가 윤보, 호는 회역당悔易堂, 본관은 무안務安이다. 1603년 식년시에 급제하여 호조 좌랑·예안 현감·풍기 군수를 거쳐 선산 도호부사善山都護府使를 역임하였다.
윤보 → 박윤보
김중청金中淸(1567~l629) : 자는 이화而和, 호는 만퇴헌晩退軒, 본관은 안동이다. 1610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정언, 신안 현감新安縣監 등을 지냈다. 1615년에 정언正言으로 폐모론을 반대하는 이원익李元翼을 탄핵하라는 대북파 정인홍鄭仁弘의 부탁을 거절하자 파면되었고, 1623년 인조반정 뒤에도 조정에 나가지 않았다.
김이화金而和 → 김중청
이화 → 김이화
회재晦齋 : 이언적李彦迪(1491~1553)이다. 자는 복고復古, 호는 회재晦齋·자계옹紫溪翁, 본관은 여주驪州이다. 초명은 적迪이었으나 중종의 명으로 언적彦迪으로 고쳤다. 경주에서 태어나 외숙인 손중돈孫仲暾에게 글을 배웠으며 1514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1545년 을사사화 때 좌찬성左贊成으로 있으면서 추관推官이 되어 선비들을 심문하는 일을 맡았다. 조선 유학에 큰 자취를 남겼다.
김백암金栢巖 : 김륵(金玏, 1540~1616)이다. 자는 희옥希玉, 호는 백암柏巖, 본관은 선성宣城이다. 1576년 식년문과에 급제했다. 1603년 10월에 대사성大司成이 되었고, 1604년 8월에 안동 부사로 내려온다.
백암 → 김백암
백암 영공 → 김백암
이강李茳(1573~1623) : 자는 형보馨甫, 호는 금학당琴鶴堂, 본관은 영천永川이다. 이덕홍李德弘의 셋째 아들로 1603년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1615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정언·교리를 역임했다. 이이첨李爾瞻 등과 어울려 인목대비의 폐모 주장을 방조하였다. 인조 즉위 뒤에 폐모론의 주창자로 지목되어 처형되었다.
이형보李馨甫 → 이강
형보馨甫 → 이형보
사성師聖 → 이점
이사성 → 사성
이점李蒧(1579~1627) : 자는 사성師聖으로, 이덕홍李德弘의 다섯째 아들이다. 1609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1616년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대교待敎·한림학사翰林學士를 역임했다.
이중립李中立 → 이시李蒔
이시李蒔 : 자는 중립中立, 호는 선오당善迂堂, 본관은 영천永川으로 정구鄭逑의 문인이다. 만년에 오계서당迂溪書堂을 짓고 후진 양성에 힘썼다. 이덕홍李德弘의 맏아들이다.
이중립李中立(1533∼1581) : 자는 강중强仲, 호는 귀계龜溪,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1558년 사마시 합격했다.
이건以健 : 김광실金光實(1585~1651)이다. 자는 이건, 호는 계애溪厓, 본관은 광산이다. 정구ㆍ장현광의 문인이다. 저서로는 계애유고溪厓遺稿가 전한다. 김령의 재종형 김해金垓의 둘째 아들이다.
김광실金光實 → 이건
김중원金仲元
김윤안金允安(1560~1622) : 자는 이정而靜, 호는 동리東籬, 본관은 순천順天이다. 1588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임란에 형 김윤명金允明과 함께 의병장 김해金垓 휘하에서 활약했다. 1612년 문과에 급제하여 대구 부사大邱府使ㆍ대사간을 역임하였다. 김령보다 17세 많다.
김이정金而靜 → 김윤안
이정而靜 → 김윤안
김시주金是柱(1575-1617) : 자는 이립而立, 호는 개호開湖, 본관은 의성義城이다. 운천雲川 김용金涌의 장자이다. 안동 천전川前에 거주하였다. 1613년 증광시 병과 7위로 급제한 후, 관직은 승정원 주서承政院注書, 병부 좌랑兵部佐郞을 지냈다. 국사편찬위원회의 계암일록 탈초본 원문에는 ‘립笠’으로 된 곳도 있으나 초간본 원문은 ‘이립以立’으로 되어 있다. 김시주의 자는 자료에 따라 ‘이립而立’으로 된 곳도 있고, ‘이립以立’으로 된 곳도 있다.
김이립金以立 → 김시주
박수서朴守緖(1567~1627) : 자는 경승景承, 호는 우계尤溪, 본관은 함양咸陽이다. 1588년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1609년 문과에 급제하여, 순무 어사를 거쳐 승지를 역임하고 병조 참의에 올랐다.
송원기宋遠器(1548∼1615) : 자는 학무學懋, 호는 아헌啞軒, 본관은 야로冶爐이다. 송사호宋師灝의 아들이다. 1603년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610년 별시別試에 급제하였다.
박중식朴仲植 : 박회무朴檜茂(1575~?)이다. 자는 중식, 호는 육우당六友堂·숭정야로崇禎野老, 본관은 나주羅州이다. 소고嘯皐 박승임朴承任의 아들이다. 1606년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다. 1627년 정묘호란 때, 의금부 도사로 왕을 호종하였고, 1636년 겨울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출정하였으나 이미 화의가 성립되어 통곡하며 되돌아와 두문불출하였다. 김령의 재종형인 김해金垓의 사위이다.
류성룡柳成龍(1542~1607) : 자는 이현而見, 호는 서애西厓 본관은 풍산豊山이다. 1564년 사마시를 거쳐, 1566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대사간·도승지·대사헌을 거쳐, 경상도 관찰사, 도체찰사都體察使, 영의정을 역임했다.
서애 → 류성룡
류 대감 → 류성룡
권책權策
청산靑山 : 김령의 집안 노비이다.
권화경權和卿
화경 → 권화경
국룡國龍 : 김령의 집안 노비이다.
가마공佳麻公
가마佳麻 → 가마공
권명보權明甫
명보 → 권명보
김질간金質幹(1564∼1621) : 자는 문오文吾, 호는 쌍매雙梅, 본관은 광산이다. 1588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1601년에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했다. 1612년부터 삼사三司의 관직을 번갈아 지내면서 대북정권이 추진한 정책의 관철에 앞장서다가 1621년 이조 참판이 되었으나 곧 죽었다.
정호선丁好善(1571~1633) : 자는 사우士優, 호는 동원東園, 본관은 나주羅州이다. 1601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이조 정랑, 사헌부 지평, 홍문관 전한, 안변 부사 등을 역임했다. 안변 부사로 있을 때 이괄李适의 역모를 알리는 고변서에 그 이름이 기재되었으나, 아우 호서好恕가 정주 목사로서 이괄의 사자를 베고 군사를 일으켜 임금을 보호함으로써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우담愚潭 정시한丁時翰의 조부이다.
이지李遲(1560∼1631) : 자는 기성器成, 본관은 고성固城이다. 김언기金彦璣의 문인으로 임진왜란 때의 행적이 조정에 알려져 공조 참의工曹參議에 제수되었다.
이기성李器成 → 이지李遲
박경행朴景行 → 박수의
박로朴竹+魯(1584∼1643) : 자는 노직魯直, 호는 대호大瓠,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이조 참판 박이서朴彝敍의 아들이다. 1609년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수찬ㆍ교리를 거쳐 사헌부지평ㆍ성균관직강을 역임하고 1618년 성균관 사예成均館司藝가 되었고, 1619년에 안동 부사를 지냈다.
월천月川 : 조목趙穆(1524~1606)을 지칭한다. 자는 사경士敬, 호는 월천月川ㆍ동고산인東皐散人ㆍ부용산인芙蓉山人, 본관은 횡성橫城이다. 1552년 생원시에 합격했으나 대과는 포기했다. 퇴계 이황과 동향인 예안에서 출생하고 성장하면서 일찍 이황의 문하생이 되어 평생을 종유했다. 조목은 합천 군수에 임명된 적이 있었으므로 합천 어른이라고도 하였다.
월천 어른 → 월천
합천 어른 → 월천
권상립權尙立 : 권방權昉에게 시집 간 종누이의 아들로 중부인 김부신金富信의 외손자이자 김령의 종형 평보 형 김평金坪의 생질이다.
상립 → 권상립
중부仲父 : 계암의 중부仲父는 김부신金富信으로, 평보 형과 판사 형의 아버지이다.
성박成鑮(1571~1618) : 자는 이선而善 또는 흡여翕如, 호는 매죽헌梅竹軒. 본관은 창녕昌寧이다. 부사浮査 성여신成汝信의 아들로, 1610년 식년시式年試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했다. 정온鄭蘊, 조임도趙任道, 임진부林眞怤 등과 교유하였다.
이선而善 형 → 성박
감사監司 종조부從祖父 : 김령의 종조부從祖父 김연金緣이다. 강원도 관찰사를 역임했다.
류숙정柳叔整 : 서애 류성룡의 셋째 아들 류단柳褍(1580~1612)이다. 그의 자가 숙정이다. 계암일록에 계화季華로 자주 나오는 류진柳袗(1582-1635)의 바로 그의 둘째 형이다. 세자익위사 세마를 지냈고 장령에 증직되었다.
박자상朴子常 : 박성범朴成範(1568~?)이다. 그의 자가 자상이며, 퇴계 이황의 손서孫壻이며, 영주에 거주하였다. 1616년 생원시에 합격하여 수직壽職으로 부호군副護軍을 제수받았고, 이괄李适의 난 때 의병을 일으켰다.
김류金瑬(1571∼1648) : 자는 관옥冠玉, 호는 북저北渚, 본관은 순천順天이다. 1596년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충청도 도사ㆍ전주 판관 등을 역임했다. 인조반정의 공로로 승평부원군昇平府院君에 봉해졌고, 병자호란 때에는 영의정으로서 최명길 등과 더불어 화의를 주장하였다. 계암의 조모祖母가 순천 김씨이다.
심집沈諿(1569∼1644) : 자는 자순子順, 호는 남애南崖, 본관은 청송靑松이다. 1596년 정시문과에 급제하였다.
홍서봉洪瑞鳳(1572~1645)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휘세輝世, 호는 학곡鶴谷이다. 1590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2년 후에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최명길과 함께 화의를 주장하였고 영의정, 좌의정을 지냈다.
김봉조金奉祖(1572~1630) : 자는 효백孝伯, 호는 학호鶴湖, 본관은 풍산豊山이다. 류성룡의 문인으로 1601년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1613년 증광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ㆍ사헌부 감찰 등을 역임하였다.
김효백金孝伯 → 김봉조
효백孝伯 → 김봉조
덕여德輿 : 김령의 북애北厓 형 김기金圻의 아들 김광재金光載이다. 덕여는 그의 자이다.
이색李穡(1328~1396) : 고려 말의 문신이자 학자이다. 자는 영숙穎叔, 호는 목은牧隱, 본관은 한산韓山이다. 원나라에 가서 1354년 제과制科의 회시會試에 1등, 전시殿試에 2등으로 합격했다. 1367년 대사성이 되었고 1373년 한산군韓山君에 봉해졌다.
모재 선생慕齋先生 : 김안국(金安國, 1478~1543)이다. 자는 국경國卿, 호가 모재, 본관은 의성義城이다. 참판參判 김정국金正國의 아우이며, 김굉필金宏弼의 문인이다. 1503년 별시 문과 을과에 급제하여 예조 판서ㆍ대사헌ㆍ좌참찬ㆍ대제학ㆍ찬성 등을 역임했다.
남이공南以恭(1565~1640) : 초명은 이경以敬, 자는 자안子安, 호는 설사雪蓑이며, 본관은 의령이다. 1590년 증광문과에 장원급제 한 뒤 대사간ㆍ대사헌ㆍ함경도 관찰사를 역임했다. 이후 이발李潑ㆍ정인홍鄭仁弘 등과 함께 북인北人의 우두머리가 되었다가 1599년 북인이 분열될 때는 류영경柳永慶과 함께 소북小北을 이끌면서 세자이던 광해군 대신 영창대군을 다음 왕으로 삼으려고 했다. 1614년 병조 참판이 된 후 이듬해 인목대비의 폐위에 반대하다가 파직되어 유배되었다.
강인姜絪(1555~1634) : 자는 인경仁卿, 호는 시암是庵, 본관은 진주이다. 우의정 강사상姜士尙의 아들로, 천거로 왕자사부에 제수되었고, 상주 목사, 한성부 우윤을 지냈다. 임진왜란 때 왕을 호위한 공으로 호성공신 3등에 책록되고 진창군에 봉해졌다.
진창군晉昌君 → 강인姜絪
진창부원군 → 강인
강인보姜仁寶 : 동복에 사는 사람으로 계암일록에 나온다. 동복은 김령의 아버지 김부륜이 현감을 지낸 곳이다.
안숭검安崇儉(1554~1619) : 자는 백공伯恭, 호는 오지五芝이다. 교유한 인물로는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소암疎庵 임숙영任叔英 등이 있다.
안 찰방 → 안숭검
권태일(權泰一, 1569~1631) : 자는 수지守之, 호는 장곡藏谷,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승문원 권지부정자, 형조 판서를 지냈다. 구봉령具鳳齡의 문인이다. 1599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요직을 지내다가 대사간大司諫, 형조 참판刑曹參判 등을 역임하였다. 1513년 경 경주 부윤이었기에 권 경주權慶州라고 호칭하기도 한다.
권수지權守之 → 권태일
권 참봉權參奉 : 가야佳野에 사는 권씨 어른이다. 가야는 안동시 와룡면 가야리이다. 이곳에 안동 권씨 집성촌이 있다.
홍유환洪有煥 : 자는 백회伯晦이다. 계암일록에 첨정으로 나온다.
이시언李時彦(1535~1628) : 자는 군미君美, 호는 추천秋泉,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평산 부사, 성균관 사예, 호조 참의, 여주 목사, 한성부 판윤, 형조 판서, 판중추부사 등을 지냈다.
조차석曺次石(1552∼1616) : 자는 일회一會, 본관은 창녕昌寧이며, 남명 조식의 첫째 아들이다. 52세(1603)에 예안 현감禮安縣監에 제수되었고, 신창 및 의령의 현감을 지냈다.
신지제申之悌(1562∼1624) : 자는 순보順甫, 호는 오봉梧峰, 본관은 아주鵝洲이다. 1589년 증광문과에 급제했다. 예안 현감 재직 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군대를 모집하여 적을 토벌하였다. 1601년 정언ㆍ예조 좌랑ㆍ지평ㆍ성균관 전적 등을 거쳐 1604년 세자시강원 문학ㆍ성균관 직강을 역임하였다.
류영경柳永慶(1550∼1608) : 자는 선여善餘, 호는 춘호春湖,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1572년(선조 5) 춘당대문과春塘臺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였고, 관직은 정언, 대사헌, 영의정 등을 지냈다. 같은 소북파인 남이공과의 불화로 탁북으로 분파되었고, 광해군 즉위 후에 대북파 이이첨李爾瞻ㆍ정인홍의 탄핵을 받고 경흥에 유배되었다가 사사賜死되었다.
황도광黃道光 : 황중윤黃中允(1577~1648)이다. 자는 도광道光, 호는 동명東溟, 본관은 평해平海로, 해월海月 황여일黃汝一의 맏아들이다. 1612년 증광문과에 급제하고 정언ㆍ헌납ㆍ사서 등을 역임하였다. 1623년 인조 즉위 후 광해군 추종 세력으로 몰려 해남으로 유배를 당하였고, 10여 년 뒤 유배에서 풀려나자 울진으로 낙향하여 수월당水月堂이라는 정자를 짓고 은둔하며 말년을 보냈다.
정인홍鄭仁弘(1535~1623) : 자는 덕원德遠, 호는 내암來庵, 본관은 서산瑞山이다. 조식曺植의 수제자로서 1573년 학행으로 천거되어 6품직에 오른 뒤 1589년 정여립鄭汝立 옥사獄事를 계기로 동인이 남북으로 분립될 때 북인에 가담하여 영수가 되었다. 1602년 대사헌에 승진, 동지중추부사ㆍ공조 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1612년 우의정이 되고, 1613년 이이첨과 계축옥사를 일으켜 영창대군을 제거하였으며, 1618년 인목대비 유폐사건에 가담하여 영의정에 올랐다. 문묘종사 문제를 둘러싸고 이언적李彦迪과 이황李滉을 비방하는 소를 올려 문묘종사를 저지시키려 하다가 팔도 유생들로부터 탄핵을 받았고, 성균관 유생들에 의하여 유적儒籍에서 삭제되는 등 큰 파문을 일으켰다.
윤조원尹調元(1572~1637) : 자는 정평正平, 본관은 칠원漆原이다. 1603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예조 좌랑ㆍ병조 정랑ㆍ익산 군수 등을 거쳐 1616년 황해 감사가 되었는데, 당시 이이첨李爾瞻‧류희분柳希奮‧한찬남韓纘男 등의 권력 암투로 빚어진 해주옥사에 연루되어 변방으로 귀양을 갔고, 인조반정 후에는 반정세력에 밀려나 충청도 제천에 은거하였다.
윤정평尹正平 → 윤조원
김계도金繼道(1543~?) : 자는 순원順元, 본관은 안동이다. 1595년 별시문과에 급제했다. 계암일록에는 ‘도道’로 되어 있으나 ‘도燾’의 오기인 것 같다.
사열士悅 어른
김사열 → 사열 어른
남현경南顯卿 : 남흥달南興達(1562~1610)이다. 자가 현경, 호는 모암慕菴, 본관 영양이며, 아버지는 남응원南應元이다. 김언기金彦璣의 문인이다. 저서로는 모암유고慕菴遺稿가 전한다. 김령의 상주 형 김호金壕의 사위이다.
남흥달南興達 → 남현경
권기權紀(1546~1624) : 자는 사립士立, 호는 용만龍巒, 권몽두權夢斗의 아들이다. 1568년 향시에 합격했으나 문과는 실패했다. 안동의 읍지인 영가지永嘉志 8권을 편찬했다. 권호문의 문인이며 처사로서 향촌 교화에 힘썼다.
김약金瀹
박수근朴守謹(1576~1622) : 자는 경정景靜, 호는 소천蘇川, 본관은 함양咸陽이다. 월천月川 조목趙穆 문인으로 1613년 생원시에 합격했다. 임진왜란 때에 선조를 용만龍灣으로 배종하여 훈신勳臣에 책록冊錄되었으나, 광해군의 폐륜으로 벼슬을 버리고 예천 북쪽 소천에 청학대를 짓고 여생을 보냈다.
권상중權尙中 : 김령의 종누이 아들로 권상립權尙立의 형이다. 망자인 평보 형 김평金坪의 생질이다.
이영도李詠道(1559∼1637) : 자는 성여聖與, 호는 동암東巖, 본관은 진보眞寶이다. 퇴계 이황의 손자로 음보蔭補로 군자감 참봉軍資監參奉을 거쳐 제용감 봉사濟用監奉事를 역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 때는 안동에 내려가 의병을 모집하고 전재민戰災民 구호와 군량미를 조달하여 명관으로 이름을 떨쳤다. 김제와 청송 군수를 하여 김제 형, 청송 형, 이 청송으로 불리기도 한다.
김제金堤 형 → 이영도
이 청송 → 이영도
청송 형 → 이영도
김시언金時言(1581~1643) : 자는 자중子中, 호는 하담荷潭,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계암일록에 김시언과 김시양金時讓은 같은 인물로 김시언이 초명이다. 1605년(선조 38) 정시문과 병과로 급제하여 예조 좌랑, 경상도 관찰사, 병조 판서 등을 지냈다. 저서로는 하담파적록荷潭破寂錄ㆍ하담집ㆍ부계기문涪溪記聞 등이 있다.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김자중金子中 → 김시언
김시양金時讓 → 김시언
금원琴援(1582~?) : 자는 도제道濟, 본관은 봉화奉化이다. 1613년 증광增廣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다.
금도제琴道濟 → 금원
홍공보洪恭甫
임여길任汝吉
류영순柳永詢(1552~1630) : 자는 순지詢之, 호는 졸암拙庵ㆍ북천北川, 본관은 전주이다. 1579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였다. 1606년에 경상도 관찰사, 이듬해 동지중추부사ㆍ한성 부윤에 이어서 호조 참판을 역임하였다.
영순 → 류영순
홍정보洪精甫 : 계암 김령의 둘째 처남이다.
홍용보洪用甫 : 계암 김령의 셋째 처남이다. ??
홍용보洪用甫 : 김령의 큰 처남 홍할洪劼의 자이다. 황산 찰방黃山察訪을 역임했다. 일기에 ‘홍 찰방’으로 자주 나온다. ??
용보 → 홍용보
광운光運 : 김령의 북애 형 김기金圻의 셋째 아들이다.
김뇌수金磊壽
뇌수 → 김뇌수
문장門長 (어른) : 유일재惟一齋 김언기金彦璣의 첫째 아들이다. 김의정金義精과는 형제간이다.
서성徐渻(1558~1631) : 자는 현기(玄紀), 호는 약봉(藥峯), 본관은 대구(大丘)로, 대제학 서거정徐居正의 현손이다. 이이李珥ㆍ송익필宋翼弼의 문인이다. 1586년(선조 19)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도승지ㆍ평안 감사ㆍ대사헌 등을 지냈다. 저서에 약봉집(藥峯集)이 있다.
조즙趙濈(1568~?) : 자는 덕화德和, 호는 화천花川, 본관은 풍양豊壤이다. 1591년에 증광문과에 급제하였다. 동부승지, 부교리를 역임했다.
정엽鄭曄(1563~1625) : 자는 시회時晦, 호는 수몽守夢, 본관은 초계草溪이다. 1583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대사간, 도승지, 대사성, 충청 감사 등을 역임했다.
이계지李繼祉(1554~?) : 자는 경수景綏, 본관은 부평富平이다. 1585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1603년 문과에 급제하여 참봉參奉ㆍ현감縣監을 지냈다.
박계직朴季直 : 박종무朴樅茂(1582~?)이며, 계직은 그의 자이다. 1609년 진사시에 합격했다.
김이방金以方 : 김시릉金是棱(1579~1622)이다. 이방은 그의 자이며, 본관은 의성이다. 운천 김용의 넷째 아들이다.
이지李遲(1560∼1631) : 자는 기성器成이며, 본관은 고성固城이다. 계암일록에는 단지 몇 차례 등장할 따름이다.
이기성李器成 → 이지李遲
이언영李彦英(1568~1639) : 자는 군현君顯, 호는 완정浣亭, 본관은 벽진碧珍으로 부친은 이등림李鄧林이다. 1603년(선조 36) 식년문과에 합격하였고, 1614년에 사간원 정언이 되어 정온鄭蘊을 변호하였다가 삼사의 탄핵으로 삭직되었다. 인조반정 후 좌부승지, 선산 부사 등을 지냈다. 저서에 완정문집浣亭文集이 있다.
김상용金尙容(1561~1637) : 자는 경택景擇, 호는 선원仙源ㆍ풍계楓溪ㆍ계옹溪翁,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1590년 증광 문과에 급제하여 도승지, 병조ㆍ예조ㆍ이조의 판서를 역임했으며,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 순절했다.
조직趙溭(1592~1645) : 자는 지원止源, 호는 지재止齋, 본관은 풍양이다. 조수륜趙守倫ㆍ문위文緯의 문인이다. 1613년 폐모론廢母論을 반대했다가 친국親鞫을 당하고 남해南海에 안치安置되었다. 1623년에 인조반정으로 기용되어 형조 정랑刑曹正郞ㆍ군수郡守 등을 역임했다.
정철鄭澈(1536~1593) : 자는 계함季涵, 호는 송강松江, 본관은 연일延日이다. 1562년 문과별시에 급제하여 강원도 관찰사, 좌의정, 우의정을 역임했다. 1589년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 때 우의정으로 발탁되어 서인西人의 영수로서 최영경崔永慶 등을 다스리고 철저히 동인東人들을 추방했다.
최영경崔永慶(1529~1590) : 자는 효원孝元, 호는 수우당守愚堂, 본관은 화순和順이다. 학행으로 사축서司畜署의 종6품 벼슬을 제수 받고 잠시 취임했다. 서울 출생이며 조식曺植의 문인으로 학문이 뛰어나서 명망이 높았으나, 1590년 정여립鄭汝立 역옥사건逆獄事件이 일어나자 유령의 인물인 삼봉三峯으로 무고되어 옥사하였다.
성영成泳(1547~1623) : 자는 사함士涵, 호는 태정苔庭, 본관은 창녕昌寧이다. 1573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대사헌ㆍ대사간, 호조 판서ㆍ병조 판서 등을 역임했다.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하자 정인홍鄭仁弘 등 대북 세력에 의해 류영경柳永慶의 당인으로 몰려 파직되었고, 1616년 연일로 유배당했으며, 1623년 유배지에서 사망하였다.
최 사축崔司畜 → 최영경
득복得福 : 계암 집안의 노비이다.
권균보權均甫
영천榮川 댁 : 전경업全景業에게 시집 간 계암의 둘째 누이를 지칭한다. 둘째 자형은 계암일록에 전全 형으로 등장한다.
운지運之 : 김광운金光運이다. 자는 덕휘德輝, 본관은 광산光山이다. 김령의 종형인 북애 형 김기金圻의 셋째 아들이고, 김광업金光業의 동생이다.
업지業之 : 김광업金光業(1584~?)이다. 김령의 종형인 북애 형 김기金圻의 둘째 아들로, 자는 덕우德優, 본관은 광산이다.
덕우德優 → 업지
김광업金光業 → 업지
김업지金業之 → 업지
김자첨金子瞻 : 김시추金是樞1580~1640)이다. 자는 자첨, 호 단곡端谷, 본관은 의성義城이다. 김집金潗의 아들로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의 손자이다. 류성룡柳成龍ㆍ정구鄭逑의 문인으로 1607년 진사에 합격하였다. 정묘호란 때 의병대장에 추대되어 활약했다.
양증조부養曾祖父 : 단성 현감을 지낸 김만균金萬鈞을 말한다. 김만균은 김령의 조부인 탁청정 김유의 고모부이자, 수양아버지이다. 이에 김령에게는 양증조부가 된다. 김만균이 자식 없이 죽자 김유가 재산과 함께 제사를 이어받았다. 계암일록에는 단성부군丹城府君이라 칭하기도 한다.
단성부군丹城府君 → 양증조부
단성군丹城君 → 양증조부
한강寒岡 : 정구鄭逑(1543~1620)이다. 자는 도가道可, 호는 한강寒岡, 본관은 청주淸州이다. 정곤수鄭崑壽의 아우로 1563년 향시鄕試에 합격했으나 이후 과거를 포기하고 학문 연구에 전념하였다. 창녕 현감昌寧縣監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하여 1584년 동복 현감同福縣監을 거쳐 안동 부사ㆍ강원도 관찰사ㆍ형조 참판 등을 지냈다. 1613년 계축옥사癸丑獄事 때 영창대군永昌大君을 구하려 했으며, 1617년 폐모론廢母論 때에도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서인庶人으로 쫓아내지 말 것을 주장하였다.
정한강鄭寒岡 → 한강
장인어른 : 김령의 장인은 홍사제洪思濟(1539~?)이다.
안담수安聃壽(1552∼1628) : 자는 군소君邵, 호는 정봉定峯, 본관은 순흥順興이다. 류성룡의 문인으로 1603년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 감찰, 성균관 사예, 예안 현감 등을 역임했다.
박자화朴子華 : 박문범朴文範(1574~?)이다. 자는 자화, 본관은 고령高靈, 영주榮州 출신이다. 수직으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제수받았다.
지사공池沙公
풍산공風山公
정사호鄭賜湖(1553~?) : 본관은 광주光州, 자는 몽여夢輿, 호는 화곡禾谷이다. 봉원부원군蓬原府院君 정창손鄭昌孫의 5대손으로 1577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안동 부사, 대사헌, 형조 판서 등을 역임했다.
윤탕신尹湯臣 : 최민수崔民壽에게 시집간 개령 누이의 사위이다. 김령의 생질서이다. 그의 아버지는 윤섭尹涉(1550~1624)이다.
윤尹 군 → 윤탕신
김충의金忠義
선친先親 : 김령의 아버지는 김부륜金富倫(1531~1598)이다. 자는 돈서惇敍, 호는 설월당雪月堂, 본관은 광산光山이다. 김부륜의 아버지는 생원 김유金綏, 어머니는 순천 김씨順天金氏로 김수홍金粹洪의 딸이다. 1555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1572년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전생서 참봉典牲署參奉, 돈령부 봉사敦寧府奉事, 내섬시 주부內贍寺主簿, 전라도 동복 현감同福縣監, 봉화 현감奉化縣監을 역임했다.
조부祖父 : 김령의 조부는 김유金綏(1491~1555)이다. 자는 유지綏之, 호는 탁청정濯淸亭이고, 부친는 광산 김씨 예안 입향조인 농수聾叟 김효로金孝盧(1454~1534)이다. 1525년 생원시에 합격했으며, 부인인 순천 김씨順天金氏 사이에 아들로 오천 칠군자烏川七君子로 불리는 김부인金富仁(1512~1584), 김부신金富信(1523~1566), 김부륜金富倫(1531~1598)을 두었다.
고조부高祖父 : 김령의 고조부는 김회金淮이다. 음성 현감을 지내 음성부군陰城府君이라고도 한다.
권시중權是中(1572~1644) : 자는 시정時正, 호는 야주자野舟子,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조목趙穆의 문인으로 효행으로 참봉에 천거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이기李岐(1591~1654) : 자는 사풍士夙, 호는 수졸당守拙堂, 본관은 진성眞城이다. 이황의 증손자이며 이영도李詠道의 아들이다.
성여벌成汝橃 : 1607년을 전후하여 봉화 현감으로 있었다.
이정회李庭檜(1542∼1612) : 자는 경직景直, 호는 송간松澗, 본관은 진성眞城이다. 1568년 정탁鄭琢ㆍ구봉령具鳳齡의 추천으로 수의부위修義副尉에 제수되고 임진왜란 때 횡성 현감橫城縣監을 역임했다. 저서에 송간집松澗集이 있다.
남명원南明遠
권성보權成甫 : 권성權宬(1577~?)이다. 자는 성보成甫, 호는 계원溪園,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1602년 생원시 합격했다.
성보成甫 → 권성보
정사신鄭士信(1558~1619) : 자는 자부子孚, 호는 매창梅窓 또는 신곡神谷, 본관은 청주淸州이다. 안동 와룡면臥龍面 마암촌馬巖村에서 출생하였다. 1582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1595년 선산 군수善山郡守에 등용되고, 1608년 문과중시에 급제하여, 장례원 판결사掌隸院判決事에 이르렀다. 예조 참판禮曹參判에 추증되었고, 서후西後 학암서원鶴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정 밀양鄭密陽 → 정사신
정 도사鄭都事 → 정사신
이기보李耆甫
서긍徐兢 → 서민보
서민보徐敏甫 → 서긍徐兢(1577~?)이다. 자는 민보敏甫이며, 본관은 달성達城이다. 영주榮州 사천沙川에 거주하였으며 1617년 진사에 합격하여 참봉參奉을 지냈다.
이항복李恒福(1556∼1618) : 자는 자상子常, 호는 필운弼雲ㆍ백사白沙ㆍ동강東岡,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1580년 알성 문과에 급제하여 병조 판서, 이조 판서, 대제학, 좌의정, 영의정을 역임했다. 1062년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에 봉해져 오성이라고도 칭한다.
윤승훈尹承勳(1549~1611) : 자는 자술子述, 호는 청봉晴峰, 본관은 해평海平이다. 1573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대사헌, 이조 판서, 함경도 관찰사, 좌의정, 영의정을 역임했다.
황섬黃暹(1544~1616) : 자는 경명景明, 호는 식암息庵ㆍ돈암遯庵, 본관은 창원昌原이다. 1570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안동 부사, 도승지, 예조 참판, 대사헌 등을 역임했다.
경섬慶暹(1562~1620) : 자는 퇴부退夫, 호는 삼휴자三休子ㆍ석촌石村, 본관은 청주淸州이다. 1590년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 지평, 남원 부사, 호조 참판 등을 역임했다. 1607년 홍문관 교리로서 통신사 여우길呂祐吉과 함께 통신 부사가 되어 임진왜란 후 첫 번째 사절로 일본에 건너가 임진왜란 때의 포로 1,340명을 데리고 돌아왔다.
김일지金一之
권상현權尙賢(1590~1630) : 자는 제보齊甫, 호는 북창北窓, 본관은 안동이다. 봉화 유곡 사람으로 충재冲齋 권벌權橃의 증손이자, 석정石亭 권동미權東美의 손자이고, 송암정松岩亭 권채權采의 장자이다. 관직은 장사랑將仕郞에 올랐다.
권제보權齊甫 → 권상현
이운李芸(1568∼1638) : 자는 여성汝盛, 호는 지산芝山, 본관은 영천永川이다.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의 후손이다.
김기후金基厚(1582~1633) : 자는 덕유德裕, 호는 만기당晩起堂, 본관은 순천順天이다. 1627년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저서로는 만기당유고晩起堂遺稿가 전한다.
덕유德裕 → 김기후
김덕유金德裕 → 김기후
임혁任奕 : 문음門蔭으로 벼슬하여 은진 현감恩津縣監, 영유 현령永柔縣令 등을 지냈다. 임금을 모시던 궁인 영생英生을 첩으로 삼은 것 때문에 1613년(광해군 5년)에 참수되었고, 영생은 사약을 받았다. 광해군일기 1613년 2월 8일 기사에 이 사건이 실려 있다.
김덕옥金德玉 : 김숙金琡이다. 그의 자가 덕옥이다. 조성당操省堂 김택룡金澤龍의 맏아들이다.
이발李潑(1544~1589) : 자는 경함景涵, 호는 동암東巖ㆍ북산北山, 본관은 광산光山이다. 1573년 알성문과에 급제하여 이조 정랑, 부제학, 대사간 등을 역임했다. 1589년 동인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을 계기로 서인들이 집권하자, 고문을 받고 장살杖殺되었다. 그의 노모와 어린 아들도 체포되어 국문을 받다가 사망하였다.
박경범朴景范(1577~?) : 자는 자앙子仰, 호는 동고東皐, 본관은 고령高靈이다. 1605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음보로 사헌부 장령을 지냈다.
기자헌奇自獻(1567~1624) : 본관은 행주幸州, 자는 사정士靖, 호는 만전晩全이다. 1590년 증광시增廣試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벼슬은 대사헌, 좌의정, 영의정 등을 지냈다. 1623년 인조반정 시 가담요청을 거절하였고, 인조 즉위 후에도 등용을 거절하였다가 1624년 이괄李适의 난 때 죽임을 당하였다.
이시명李時明(1590∼1674) : 자는 회숙晦叔, 호는 석계石溪,본관은 재령載寧이다. 현감 이함李涵의 아들이며, 이조 판서 이현일李玄逸의 아버지이다. 1612년(광해군 4)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광해군의 난정을 보고 과거를 보지 않았다. 근시재近始齋 김해金垓의 사위이고, 김령金坽과 교분이 깊었다.
이회숙李晦叔 → 이시명
권택지權擇之
권축權丑, 權築
이상신李尙信(1564~1610) : 자는 이립而立, 호는 청은淸隱, 본관은 여흥驪興, 아버지는 이우인李友仁이다. 1588년 식년시 진사에 입격하고, 1589년 증광시 을과에 급제하였다. 성균관 대사성ㆍ경상도 관찰사ㆍ한성부 좌윤ㆍ예조 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박동망朴東望(1566~1615) : 자는 자진子眞, 본관은 반남潘南이다. 대사헌 박응복朴應福의 아들이며 류조인柳祖訒의 문인이다. 1594년 정시문과에 급제하였다. 이덕형李德馨 등의 천거로 당상관堂上官에 올랐고, 길주 목사吉州牧使 때는 선정을 베풀었다.
김광주金光澍(1580~1633) : 자는 회지晦之, 본관은 광산, 부친은 김득연金得硏이다. 1616년 생원시에 입격하였으나 출사하지 않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권익창權益昌(1562~1645) : 자는 무경茂卿, 호는 호양湖陽,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조목趙穆ㆍ김성일金誠一의 문인이다.
권무경權茂卿 → 권익창
권규權圭 : 김령의 판사 형 김지金址의 맏사위이다.
이정원李挺元(1567~1623) : 자는 중인仲仁, 호는 후포後浦,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1603년 진사가 되고, 1610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원 정언, 사헌부 장령, 이조 참의를 역임했다. 충주에 살 때 진사로서 정인홍鄭仁弘을 부추기고 유영경柳永慶을 모함하는 소를 올린 바 있고, 이후로 대북파에 호응하여 이이첨李爾瞻의 심복으로 일하다가 인조반정으로 처형당했다.
이원익李元翼(1547~1634) : 자는 공려公勵, 호는 오리梧里,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1569년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대사헌, 예조 판서, 이조 판서, 영의정을 역임했다. 1604년 호성공신扈聖功臣에 녹훈되고 완평부원군完平府院君에 봉해졌다. 광해군의 형인 임해군(臨海君)의 처형을 반대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자 낙향하였고, 다시 대비 폐위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홍천으로 유배되었으나, 인조반정 이후 다시 영의정에 기용되었다. 김육金堉이 건의한 대동법大同法을 경기도 지방에 한해 실시했다.
완평完平 → 이원익
완평부원군完平府院君 → 이원익
허욱許頊(1548~1618) : 자는 공신公愼, 호는 부훤負暄, 본관은 양천陽川이다. 1572년 춘당대 문과春塘臺文科에 급제하여 한성부 판윤, 평안도 관찰사, 호조 판서, 우의정, 좌의정을 역임했다. 1608년에 류영경柳永慶의 일파로 몰려 파직되었고, 이어 능창군 전綾昌君佺의 추대사건에 관련되어 1616년 원주에 부처付處되었다가 1618년 유배지인 원주에서 죽었다.
한응인韓應寅(1554~1614) : 자는 춘경春卿, 호는 백졸재百拙齋ㆍ유촌柳村이며, 본관은 청주淸州이다. 1576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다음 해 알성문과에 급제하였다. 종계변무의 공으로 광국공신光國功臣 2등, 정여립 사건을 고변한 공로로 평난공신 1등에 각각 책록되었다. 유교7신遺敎七臣의 한 사람으로 선조로부터 영창대군의 보호를 부탁받았으며, 계축옥사에 연루되어 관작이 삭탈당하였다가 후에 신원되었다.
김대래金大來(1564~1608) : 자는 희태希泰, 초명은 대유大猷, 본관은 안동이다. 1590년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주서注書ㆍ병조 좌랑ㆍ장령掌令ㆍ직제학直提學 등을 역임했다. 1608년 광해군의 즉위로 정인홍鄭仁弘 등 대북파大北派가 득세하자, 소북파小北派 류영경柳永慶 등의 일파로 몰려 종성鐘城에 유배되어 사사賜死되었다.
이효원李効元(1549~1629) : 자는 성백誠伯, 호는 장포長浦, 본관은 함평咸平이다. 1584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병조 정랑ㆍ세자시강원 사서ㆍ승지ㆍ한성부 좌윤ㆍ대사간 등을 역임하였다. 광해군이 즉위하여 대북파가 집권하자 이듬해 거제도巨濟島에 유배되었다.
남복규南復圭(1559~?) : 자는 여용容容, 본관은 영양英陽이다. 1600년 별시문과에 급제했다.
이유홍李惟弘(1567~1619) : 자는 대중大仲, 호는 간정艮庭,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1596년 정시 문과에 급제하여 춘추관 검열, 예문관 봉교, 시강원 설서, 영천 군수 등을 역임했다. 광해군이 즉위하자 당시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적극 지지하며 정권을 잡던 소북파의 일당이라는 탄핵을 받아 관작을 삭탈당하고 강계로 유배되어 죽었다.
류정량柳廷亮(1591~1663) : 류영경의 손자로, 1604년 선조의 딸 정휘옹주貞徽翁主와 결혼하여 전창위全昌尉에 봉해졌다. 1612년에 류영경 일파가 대북파大北派의 탄핵으로 멸족의 화를 입을 때 고부古阜로 유배되었다.
최천건崔天健(1538~1617) : 자는 여이汝以, 호는 분음汾陰,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1588년 알성문과에 급제하여 도승지, 대사간, 형조 판서, 이조 판서 등을 역임했다. 소북파 영수 류영경柳永慶과 결탁하였다가 정인홍鄭仁弘 등의 탄핵으로 삭직되고, 1616년 김제남金悌男의 일파로 몰려 온양에 안치되었다가 이듬해 죽었다.
이호민李好閔(1553~1634) : 자는 효언孝彦, 호는 오봉五峯ㆍ남곽南郭ㆍ수와睡窩, 본관은 연안延安이다. 1584년에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예조 판서, 대제학, 좌찬성 등을 역임했다. 임진왜란 때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으로 연릉군延陵君에 봉해졌다. 1608년 선조가 죽자,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즉위를 반대하며 장자를 옹립해야 된다고 주장했다. 고부청시승습사告訃請諡承襲使로 명나라에 가서 장자를 세워야 한다는 주장을 내세웠다. 1612년 김직재金直哉의 무옥誣獄에 연루되어 문외출송門外黜送되었다가 1623년 인조반정으로 풀려났다.
연릉군延陵君 → 이호민
오억령吳億齡(1552~1618) : 자는 대년大年, 호는 만취晩翠, 본관은 동복同福이다. 1582년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병조 참판ㆍ대사헌ㆍ형조 판서ㆍ우참찬ㆍ개성 유수 등을 역임하였다. 1601년에는 부제학으로 청백리淸白吏에 뽑혔고, 1615년 폐모론廢母論에 반대하자 정인홍鄭仁弘 등의 탄핵을 받아 병을 핑계로 사직하고 낙향했다.
이이첨李爾瞻(1560~1623) : 자는 득여得輿, 호는 관송觀松 또는 쌍리雙里, 본관은 광주廣州이다. 좌찬성 이극돈李克墩의 후손이며, 1594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예조 판서, 대제학 등을 역임했다. 정인홍과 함께 대북의 세력을 강화하고, 임해군臨海君과 류영경을 사사되게 하여 소북 일파를 숙청하였다. 영창대군과 김제남金悌男을 사사시키고, 1617년에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서궁에 유폐시켰다. 1623년에 인조반정으로 아들 3형제와 함께 처형되었다.
이경전李慶全(1567~1644) : 자는 중집仲集, 호는 석루石樓, 영의정 이산해李山海의 아들이다. 1590년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전라도 관찰사, 좌참찬, 형조 판서를 역임했다. 정인홍鄭仁弘 등과 함께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옹립을 꾀하는 류영경柳永慶을 탄핵하다가 강계에 귀양 갔다.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서인들에게 아첨하여 생명을 보전하고 주청사奏請使로 명나라에 가서 인조의 책봉을 요청하였다.
김시헌金時獻(1560~1613) : 본관은 안동, 자는 자징子徵, 호는 애헌艾軒이다. 고려의 무장 김방경金方慶의 후손으로, 임진왜란 때 전사한 김제갑金悌甲의 아들이다. 1588년 문과에 급제, 1597년 동부승지ㆍ우부승지ㆍ충청도 관찰사를 거쳐 대사성에 올랐다.
성준구成俊耉(1574~1633) : 자는 덕보德甫, 호는 장곡藏谷, 본관은 창녕昌寧이다. 1599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병조 좌랑ㆍ홍문관 수찬ㆍ이조 정랑ㆍ안동 부사ㆍ황해도 관찰사 등을 역임했다. 광해군이 즉위하자 이이첨李爾瞻의 배척으로 16년간 귀양살이를 하였다.
심희수沈喜壽(1548~1622) : 자는 백구伯懼, 호는 일송一松, 본관은 청송靑松이다. 1572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대사헌ㆍ이조 판서ㆍ대제학ㆍ죄의정 등을 역임했다. 이이첨李爾瞻 등이 임해군臨海君을 극형에 처하려 하자 그 부당함을 주장하였다. 계축옥사 때 이이첨 등이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옥사의 주모자로 몰아 해치려 하자 이항복李恒福ㆍ이덕형李德馨 등과 그 부당성을 논했다.
이덕온李德溫(1562~1635) : 자는 사화士和, 호는 구촌龜村,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호남군湖南君 이뢰李雷의 아들이며, 1591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동래 부사, 우부승지를 지냈다.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하여 영창대군永昌大君을 박해하자 직간하여 대북파의 미움을 사 관작이 삭탈되었다가 1623년 인조반정 후 복귀되었다.
이계伊溪 (종장宗丈) 어른 : 유일재惟一齋 김언기金彦璣의 첫째 아들이다.
이귀李貴(1557~1633) : 자는 옥여玉汝, 호는 묵재默齋, 본관은 연안延安이다. 세조 때의 문신 이석형李石亨의 5대손으로 1603년 정시 문과에 급제하여 우참찬ㆍ대사헌ㆍ좌찬성 등을 역임했다. 인조반정에 성공해 정사공신靖社功臣 1등에 책록되고, 후에 연평부원군延平府院君에 봉해졌다.
성혼成渾(1535~1598) : 자는 호원浩原, 호는 묵암默庵ㆍ우계牛溪, 본관은 창녕昌寧이다. 1551년에 생원ㆍ진사의 양장兩場 초시에는 모두 합격했으나 복시에 응하지 않았다. 여러 번 관직을 주어 불렀으나 사양하다가 이이李珥의 추천으로 이조 참판에 특배되었다. 1589년에 기축옥사로 서인이 집권하면서 이조 판서에 복귀했는데, 동인인 최영경崔永慶이 억울하게 죽자 동인들의 화살이 그에게 집중되었다.
정창연(鄭昌衍, 1552~1636) : 자는 경진景眞, 호는 수죽水竹, 본관은 동래東萊이다. 1579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이조 좌랑ㆍ동부승지ㆍ우의정ㆍ좌의정 등을 역임했다. 광해군의 비 류씨柳氏는 그의 생질녀이다.
이성李惺(1562~1624) : 자는 자성子省,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1596년 정시문과에 급제하였다. 이산해ㆍ정인홍ㆍ이이첨과 함께 대북파의 당여黨與로서 선조말 광해군을 대신하여 영창대군을 옹립하려 했던 소북파의 영수 류영경柳永慶의 옥사에 깊이 관여하여 1613년에 정운공신定運功臣 3등에 책록되고 완계군完溪君에 봉해졌다.
이덕형李德馨(1561~1613) : 자는 명보明甫, 호는 한음漢陰ㆍ쌍송雙松, 본관은 광주廣州이다. 1580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참판, 대제학에 올랐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을 정주까지 호종하였고, 청원사請援使로 명나라에 파견되어, 원병을 요청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광해군 즉위 후에 영의정에 올랐다. 1613년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처형과 폐모론廢母論을 반대하다가 삭직되었다.
홍여순洪汝諄(1547~1609) : 자는 사신士信, 본관은 남양南陽이다. 1568년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호조 판서ㆍ병조 판서를 역임했다. 유영경柳永慶ㆍ정인홍鄭仁弘 등과 더불어 조정의 현신賢臣들을 공박하다가 탄핵을 받아 진도에 유배되어 배소에서 죽었다.
성영成泳(1547~1623) : 자는 사함士涵, 호는 태정苔庭, 본관은 창녕昌寧이다. 1573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충청 감사, 호조 판서, 병조 판서 등을 역임했다. 광해군이 즉위하자 정인홍鄭仁弘 등에 의해 류영경柳永慶의 당인으로 몰려 파직되었다.
송응순宋應洵(1547~1611) : 자는 공신公信, 호는 소옹簫翁ㆍ춘호春湖, 본관은 은진恩津이다. 1596년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원 사간, 동부승지, 이조 참의, 홍문관 부제학 등을 역임했다.
고경리高敬履(1559~1609) : 자는 이척而惕, 호는 창랑滄浪, 본관은 장흥長興이다. 1591년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대북세력이 서인 학통을 공격하자 정철鄭澈과 성혼成渾을 두둔하는 상소를 주도하였다. 이 상소에서 이언적李彦迪을 제외하였다는 이유로 종신금고에 처하여졌다.
임숙영任叔英(1576~1623) : 자는 무숙茂淑, 호는 소암疎庵, 본관은 풍천豊川이다. 1601년 진사시에 급제하여 성균관 유생成均館儒生이 되었다. 1611년 별시문과에 응시하여 척신들의 무도함을 공박하는 대책문對策文을 써서 급제하였으나, 이를 본 광해군이 크게 노하여 급제자 명단에서 삭제하도록 명하였다. 이를 두고 여러 달 동안 삼사三司가 간쟁하였고, 결국 영의정 이항복李恒福이 주장으로 다시 급제자가 되었다. 홍문관 정자ㆍ박사ㆍ부수찬, 지평 등을 역임했다.
이목李楘(1572~1646) : 자는 문백文伯, 호는 송교松郊,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1612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형조 참판, 대사헌, 대사간 등을 역임했다.
장유張維(1587∼1638) : 자는 지국持國, 호는 계곡谿谷, 본관은 덕수德水이다. 1609년 증광 문과에 급제하여 대사간ㆍ대사성ㆍ대사헌, 예조 판서ㆍ이조 판서ㆍ공조 판서 등을 역임했다.
박선장朴善長(1555~1616) : 자는 여인汝仁, 호는 수서水西, 본관은 무안務安이다. 1605년 50세의 늦은 나이에 증광별시增廣別試에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 예안 현감, 경상도 도사 등을 역임했다. 계암일록에 자주 나오는 율보栗甫, 윤보潤甫가 그의 아들들이다.
정홍익鄭弘翼(1571~1626) : 자는 익지翼之, 호는 휴옹休翁ㆍ휴헌休軒ㆍ휴암休菴, 본관은 동래東萊이다. 1589년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1597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형ㆍ예조 좌랑, 사헌부 지평 등을 지냈다. 1617년 인목대비仁穆大妃 폐모론이 일어나자 이를 극력 반대, 극간하다가 진도ㆍ종성ㆍ광양 등지로 유배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 후 풀려나와 부제학 등에 임명되었으나 귀양살이에서 얻은 병으로 부임하지 못하였다.
김숙金琡(1568~1646) : 자는 덕옥德玉이며, 1601년 생원에 합격하였다. 1611년 정인홍鄭仁弘이 차자를 올려 이언적李彦迪과 이황李滉을 모함하자, 영남 유생들이 도산서원에 모여 이를 해명하는 소를 올릴 때, 김령金坽과 함께 상소문을 작성하였다.
강응철康應哲(1562~1635) : 자는 명보明甫, 호는 남계南溪, 본관은 재령載寧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향병을 모집하여 상주를 지켰다. 그 뒤 정기룡鄭起龍이 이끄는 의병과 같이 여러 곳에서 왜적들과 싸웠다. 벼슬은 찰방을 지냈으며, 광해군의 폭정에 은퇴하여 고향에서 일생을 보냈다.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의 매부이다.
오여온吳汝穩(1561~1633) : 자는 융보隆甫, 호는 낙애洛厓, 본관은 고창高敞이다. 죽유竹牖 오운吳澐의 맏아들이며, 오여벌吳汝橃의 형으로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의 손서孫壻이다. 1613년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禮文館檢閱을 지냈는데, 유생 때부터 정인홍을 옹호하였다.
오운吳澐(1540~1617) : 자는 태원太源, 호는 죽유竹牖ㆍ죽계竹溪, 본관은 고창高敞이다. 1566년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상주 목사, 합천 군수, 장례원 판결사, 경주 부윤 등을 역임했다. 오여온과 오여벌의 아버지이다.
조정趙挺(1551~1629) : 자는 여호汝豪, 호는 한수漢叟, 본관은 양주楊州이다. 1583년 정시문과에 급제하였고,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보덕으로 세자를 호종扈從하였다. 형난공신亨難功臣 2등에 책록되었으며, 한천군漢川君에 봉해졌다. 1628년 해남에 유배되어 죽었다.
이전李㙉(1558~1648) : 자는 숙재叔載, 호는 월간月磵, 본관은 흥양興陽이다. 1603년 사마시에 합격하여 세마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이준李埈의 형이다.
이향李享(1568~?) : 자는 광중光仲, 본관은 진성眞城이다. 1601년 식년문과에 급제했다.
유학증兪學曾(1576~?) : 자는 노옹魯翁, 호는 용연龍淵, 본관은 기계杞溪이다. 1605년 증광시에 급제했다.
이정신李廷臣(1559~1627) : 자는 공보公輔,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1588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광주 목사, 전주 부윤, 동부승지, 경상도 관찰사 등을 역임했다.
최관崔瓘(1563~?) : 자는 형중瑩仲, 호는 미옹迷翁, 본관은 강화江華이다. 1590년 증광시 문과에 급제하였고, 벼슬은 호조 판서에 이르렀다.
심열沈悅(1569~1646) : 자는 학이學而, 호는 남파南坡, 본관 청송靑松이다. 1593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황해도 관찰사, 이조 판서, 영의정 등을 지냈다.
이필영李必榮(1573~?) : 자는 이빈而賓, 호는 만회晩晦, 본관은 광주廣州이다. 영의정 이준경李浚慶의 증손으로 1597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이조 정랑, 대사간, 황해도 관찰사, 예조 참판 등을 역임했다.
이민성李民宬(1570~1629) : 자는 관보寬甫, 호는 경정敬亭, 본관은 영천永川이다. 1597년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사성, 동부승지, 좌승지 등을 역임했다.
이홍로李弘老(1560∼1608) : 자는 유보裕甫, 호는 판교板橋, 본관은 연안延安이다. 1579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1583년 정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1608년 류영경柳永慶 등 소북의 일파로 몰려 제주에 유배되고 그곳에서 사사되었다. 1612년 부관참시되었다.
곽재우郭再祐(1552~1617) : 자는 계수季綏, 호는 망우당忘憂堂, 본관은 현풍玄風이다. 1585년에 별시別試에서 정시庭試 2등으로 뽑혔으나 지은 글이 왕의 뜻에 거슬린다는 이유로 발표한 지 몇 일만에 전방全榜을 파방해 무효가 되었다. 임진왜란 때 전공을 세워 형조 정랑, 성주 목사를 역임하고, 1599년에 경상좌도 병마절도사에 임명되었으나, 이듬해 봄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자,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영암靈巖으로 귀양 갔다가 2년 만에 풀려났다. 그 후 현풍의 비슬산琵瑟山에 들어가 곡식을 금하고 솔잎으로 끼니를 이어가면서 여러 차례 조정의 부름을 받았지만 사양했다.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이지형李之馨 : 김령의 종형인 상주 형 김호金壕의 사위이며, 이일도李逸道의 아들이다.
박수겸朴守謙(1576~1622) : 자는 경정景靜, 본관은 함안咸安이다. 1613년 사마시에 합격했다.
이문규李文奎(1513∼?) : 자는 경소景昭, 호는 문곡文谷, 본관은 진성眞城이다. 만년에 학행으로 천거되어 참봉을 역임했다.
송재松齋 : 이우李堣(1469~1517)이다. 본관은 진성眞城, 자는 명중明仲, 호는 송재松齋이다. 진사 이계양李繼陽의 아들이며, 이황李滉의 숙부이다. 1498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였다. 1506년 동부승지에 임명되어 마침 입직하던 날 중종반정이 일어났다.
황여일黃汝一(1556∼1622) : 본관은 평해平海, 자는 회원會元, 호는 해월헌海月軒ㆍ매월헌梅月軒이다. 1585년 개종계 별시문과改宗系別試文科에 급제하였다. 1606년에 영천 군수永川郡守가 되었다. 이해 9월에 모친상, 10월 부친상을 당했다.
정호서丁好恕(1572~1647) : 자는 사추士推, 본관은 압해押海이다. 1608년 별시문과에 급제한 뒤에 병조 좌랑, 정주 목사 등을 역임하였다.
배대유裵大維(1563~1632) : 본관은 김해金海, 자는 자장子張, 호는 모정慕亭이다. 1608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1612년 지평을 거쳐 정언正言ㆍ장령掌令등을 역임하였으나, 인목대비仁穆大妃 폐모론에 적극 참여하였기 때문에 1623년 인조반정으로 삭직되었다. 문장과 글씨에 능하였으며, 특히 초서ㆍ예서에 뛰어났다.
김치金緻(1577~1625) : 자는 사정士精, 호는 남봉南峰, 본관은 안동이다. 1597년 알성문과에 급제하여 이조 참의, 동부승지, 대사간, 경상도 관찰사 등을 역임했다. 광해군 때, 이이첨李爾瞻의 심복으로 이조에 있으면서 흉한 일을 벌였으며, 대사간이 되어서는 정온鄭蘊을 논박하기도 하였으나, 광해군의 학정이 날로 심해짐을 깨닫고 병을 핑계로 관직에서 물러나 두문불출하였다.
윤인尹認(1555~1623) : 자는 인지訒之, 본관은 파평坡平이다. 1601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형조 좌랑, 동부승지, 대사간 등을 역입했다. 판관이 되었다. 이이첨李爾瞻 등의 사주를 받아 인목대비의 유폐幽廢를 주장하였는데, 인조반정 때 이이첨 등과 함께 주살되었다.
강홍립姜弘立(1560~1627) : 자는 군신君信, 호는 내촌耐村, 본관은 진주晉州이다. 1597년 알성문과에 급제하여 설서說書ㆍ검열檢閱 등을 역임한 뒤, 후금後金과의 전투에서 조명朝 연합군의 조선 측 오도원수五道元帥가 되어 부원수인 김경서金景瑞와 함께 출병하였다. 1619년 후금과의 전투에서 패하여 후금에 투항했다가 억류 되었다가 1627년 정묘호란 때 후금군의 선도로서 입국해 강화江華에서 화의를 주선했다.
김기선金幾善(1568~1613) : 자는 원길元吉, 본관은 선성宣城이다. 김륵金玏의 아들로 영주에 살았으며, 1608년에 천거로 안기도 찰방安奇道察訪에 제수되었다.
김원길金元吉 → 김기선
권극명權克明(1587~?) : 자는 회보晦甫,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1612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을 지냈다.
이상의李尙毅(1560~1624) : 본관은 여주驪州, 자는 이원而遠, 호는 소릉少陵이다. 1586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1612년에 임진왜란 때 광해군을 호종한 공으로 위성공신衛聖功臣에 책록되고 여흥군驪興君에 봉해져 공조 판서가 되었다.
송순宋諄(1538~1616) : 자는 혼원渾元, 호는 망촌忘村, 본관은 진천鎭川이다. 1582년 식년문과에 합격하였다. 1615년 형조 판서, 호조 판서를 거쳐 이듬해 의령군義靈君에 봉해졌다. 죽은 후 인조반정이 일어나 관직을 박탈당했다.
한훤당寒暄堂 : 김굉필金宏弼(1454~1504)의 호이다. 자는 대유大猷, 호는 한훤당寒暄堂ㆍ사옹蓑翁, 본관은 서흥瑞興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으로 형조 좌랑刑曹佐郞이 되었으나, 무오사화戊午士禍 때 희천熙川에 유배되었다가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사사賜死되었다. 광해군 때 문묘文廟에 배향되었다.
일두一蠧 : 정여창鄭汝昌(1450~1504)이다. 자는 백욱伯勗, 호는 일두一蠹, 본관은 하동河東이다. 김굉필金宏弼과 함께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하였다. 1490년에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 시강원 설서, 안음 현감을 역임했다. 1498년 무오사화 때 종성鍾城으로 유배되었고, 1504년 죽은 뒤 갑자사화 때 부관참시되었다. 광해군 때 문묘文廟에 배향되었다.
김철金澈(1569~?) : 자는 심원心源, 호는 대박 본관은 의성義城이다. 약봉의 양자 1603년 진사시에 합격했다.
송영구宋英耉(1556~1620) : 자는 인수仁叟, 호는 표옹瓢翁ㆍ일표一瓢ㆍ백련거사白蓮居士, 본관은 진천鎭川이다. 성혼成渾의 문인으로 1584년 문과 급제, 1611년 경상도 관찰사를 지냈고 1616년 병조 참판을 역임했다.
윤휘尹暉(1571~1644) : 자는 정춘靜春, 호는 장주長洲ㆍ천상川上, 본관은 해평海平이다. 1594년 별시문과에 문과로 급제하여 경상도 관찰사, 형조 판서, 우찬성 등을 역임했다.
강첨姜籤(1559~1611) : 자는 공신公信, 호는 죽월헌竹月軒, 본관은 진주晉州이다. 1591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병조 좌랑, 이조 참의, 경상도 관찰사, 대사헌 등을 역임했다.
신경진申景禛(1575∼1643) : 자는 군수君受, 본관은 평산平山이다. 도순변사都巡邊使 신립申砬의 아들로, 무과에 급제하였다. 갑산 부사ㆍ경원 부사 등을 지내다 광해군이 즉위하여 대북파가 정권을 장악하자 관직에서 물러나 있던 중 1620년 김류金瑬‧이귀李貴‧최명길崔鳴吉‧구인후具仁垕 등과 모의하여 그와 인척관계에 있는 능양군綾陽君(인조)을 추대하기로 하였고, 거사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직접 거사에 참여하지는 못하고 인조반정후 반정공로를 세운 공으로 평성군平城君에 봉해졌다. 이후 형조 판서ㆍ병조 판서ㆍ우의정ㆍ좌의정ㆍ영의정 등을 역임하였다. 그는 김류와는 선대의 인연(김류의 아버지 김여물金汝岉은 신경진의 아버지 신립의 종사관으로 충주에서 같이 전사하였다.)으로 절친한 사이였다.
조명욱曺明勗(1572~1637) : 자는 여우汝偶, 호는 율촌栗村, 본관은 창녕昌寧이다. 1605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경상도 도사, 남양 부사, 영천 군수 등을 역임했다. 1613년 수찬이 되어 폐모론廢母論을 극력 반대하였다.
황근중黃謹中(1560∼1633) : 자는 일지一之, 호는 월담月潭, 본관은 창원昌原이다. 1589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1606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경상도 도사ㆍ안변 부사 등을 거치고, 동부승지ㆍ좌부승지를 거쳐 전라도 관찰사를 지냈다. 인조반정 이후 은거하며 벼슬하지 않았다.
이민구李敏求(1589~1670) : 자는 자시子時, 호는 동주東州ㆍ관해觀海,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이조 판서 이수광李晬光의 아들로 1609년 사마시에 수석으로 합격해 진사가 되고, 1612년 증광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부제학ㆍ대사성ㆍ도승지, 예조 참판 등을 지냈다.
이자시李子時 → 이민구
이수광李睟光(1563~1628) : 자는 윤경潤卿, 호는 지봉芝峯,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1585년에 승문원 부정자가 되었다. 1611년 왕세자의 관복冠服을 주청하는 사절의 부사로 세 번째 명나라를 다녀왔고, 정국이 혼란해지자 1616년 순천 부사로 나가 지방행정에 전념하였다.
이정구李廷龜(1564~1635) : 자는 성징聖徵, 호는 월사月沙, 본관은 연안延安이다. 1590년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병조 판서, 예조 판서, 우의정, 좌의정, 대제학 등을 역임했다. 1613년 계축옥사癸丑獄事 때 모함을 받아 사직하였으며, 1628년 좌의정에 올랐다.
월사月沙 → 이정구
성진선成晉善(1557~?) : 자는 칙행則行, 호는 연강烟江, 본관은 창녕이다. 1594년 정시庭試에 급제했다. 1615년 경상도 관찰사를 지냈고 대사간, 승정원 우승지를 역임하였다.
김시권金是權(1583∼1643) : 자는 자중子中, 호는 봉파鳳坡, 본관은 의성義城이다. 김집金潗의 아들이며, 김성일의 손자이다. 1630년 증광문과에 급제했다.
류희분柳希奮(1564~1623) : 자는 형백亨伯, 호는 화남華南, 본관은 문화文化이다. 광해군의 장인인 문양부원군文陽府院君 류자신柳自新의 아들로서, 음보蔭補로 관직에 올랐다. 광해군의 처남으로 그의 일문이 요직을 차지하였고, 이이첨 등과 함께 소북小北의 류영경 일파를 숙청한 뒤 정권을 장악하였다. 임해군ㆍ영창대군 등을 죽이는 데 가담하여 문창부원군文昌府院君에 봉하여졌으며, 인목대비를 폐위시키려고 하는 등 횡포를 자행했다. 1623년 인조반정 때 참형을 당하였다.
남이준南以俊(1566~?) : 자는 사수士秀, 본관은 의령宜寧이다. 1609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1614년 필선이 되어 아우 남이웅과 함께 홍문록弘文錄에 올랐다. 1617년 사간이 되어 폐모론廢母論에 반대하는 영의정 기자헌奇自獻 등을 탄핵하고 대비를 서궁西宮에 유폐하는 데 앞장섰다.
한효순韓孝純(1543~1621) : 자는 면숙勉叔, 호는 월탄月灘, 본관은 청주淸州이다. 1576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검열ㆍ수찬ㆍ영해 부사 등을 역임했다. 이조 판서 우찬성을 거쳐 1616년 우의정ㆍ좌의정에 올랐고 영창대군永昌大君과 국구 김제남金悌男을 살해한 데 이어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위할 것을 주장했으며, 이항복李恒福 등 남아있는 서인 세력을 탄핵하여 제거했다.
김개金闓(1582~1618) : 본관은 상주尙州이며 우의정 김귀영金貴榮의 아들이다. 무반으로 입사入仕하였으나 1610년에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하여 문반으로 전환하였다.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모론廢母論을 주도하였으나, 1618년 허균許筠이 역모 혐의로 처형될 때 그의 심복이라 하여 심문을 받다가 장살되었다.
김영남金潁男(1555∼1617) : 자는 중오仲悟, 호는 소설옹掃雪翁, 본관은 광산이다. 1572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익산 군수ㆍ경상우도 도사ㆍ진양 군수 등을 지냈다. 천추사로 중국에 다녀온 후에 형조 참의ㆍ공조 참의 등을 지냈다.
박승종朴承宗(1562~1623) : 자는 효백孝伯, 호는 퇴우당退憂堂,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1586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1610년 형조 판서를 거쳐 1619년 영의정에 올라 밀창부원군密昌府院君에 봉해졌다. 인조반정 후 관작이 삭탈되고 가산이 적몰되었으나, 뒤에 신원伸寃되었다. 시호는 숙민肅愍이다.
강 사재姜四宰 : 삼재三宰의 다음이라는 뜻으로 의정부議政府의 우참찬右參贊을 가리키던 말이다. 계암일록에서는 강신姜紳(1543~1629)을 가리킨다. 강신은 자는 원경遠卿, 호는 동고東皐, 본관은 진주이다. 1609년에 우참찬이 되었다. 강홍립과 강홍적의 아버지이다.
강홍적姜弘勣 : 본관은 진주晉州로 우의정을 지낸 강사상姜士尙의 손자이고, 강신姜紳의 아들이며, 진녕군晉寧君에 봉해진 강홍립姜弘立의 동생이다.
정온鄭蘊(1569~1641) : 자는 휘원輝遠, 호는 동계桐溪 또는 고고자鼓鼓子, 본관은 초계草溪이다. 1610년(광해군 2) 진사로서 문과에 급제하여 설서說書ㆍ사서ㆍ정언 등을 역임하고, 1614년 부사직副司直으로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처형이 부당함을 상소, 영창대군을 죽인 강화 부사 정항鄭沆의 참수斬首를 주장하다가 제주도 대정大靜에서 10년간 유배생활을 하였다. 인조반정으로 석방되어 헌납에 등용되었고, 이어 사간ㆍ이조 참의ㆍ대사간ㆍ경상도 관찰사ㆍ부제학 등을 역임했다.
송원기宋遠器(1548∼1615) : 자는 학무學懋, 호는 아헌啞軒, 본관은 야로冶爐이다. 1603년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610년 별시別試에 급제하였다.
이현李袨(1584~1637) : 자는 자장子章, 호는 탄옹灘翁, 본관은 연안延安이다. 눌옹訥翁 이광정李光庭(1552~1627)의 아들이며 류영경柳永慶의 사위이다. 1610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였다. 1612년 유영경을 추죄追罪할 때 삭직 당했다가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전적典籍에 등용되었다.
김옥金鋈(1596∼1660) : 자는 여정汝精, 호는 고산孤山, 본관은 예안禮安이다. 김늑金玏의 손자이자 김지선金止善의 아들이며, 김난金鑾과는 형제이다. 1625년(인조 3) 별시문과에 합격하였고 군수를 지냈다.
김택룡金澤龍(1547~1627) : 자는 시보施普, 호는 조성당操省堂ㆍ와운자臥雲子, 본관은 의성義城이다. 조목趙穆의 문인으로 1588년 식년시에 급제하였고, 1595년 병조 좌랑이 되었으며, 1600년 전적을 거쳐 강원도 도사江原道都事ㆍ전라도 도사 등을 역임하였다. 1606년 선무이등공신宣武二等功臣에 책록되었다. 도산서원 원장을 역임하였다. 현재 김택룡이 쓴 조성당일기(2010. 한국국학진흥원)가 번역되어 있다.
이광정李光庭(1552~1627) : 자는 덕휘德輝, 호는 해고海皐 또는 눌옹訥翁, 본관은 연안延安이다. 1573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1590년 교관敎官으로 있으면서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임진왜란 때 선조를 호종하고 심유경을 도와 일본과 협상하였으며,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이덕홍李德弘(1541~1596) : 자는 굉중宏仲, 호는 간재艮齋, 본관은 영천永川이다. 예안禮安 출생으로 퇴계의 고제이며, 특히 주역과 중용에 밝았다.
정여립鄭汝立(1546~1589) : 처음에는 서인이었으나 동인으로 전향하여 많은 비판을 받았고 기축년에 역모를 꾸민다는 모함을 받고 자결하였다. 정여립의 모반 사건은 많은 의문점을 지난 사건이었고, 서인에 의한 동인의 의도적인 탄압으로 억울하게 죽은 사람이 많았다.
김상헌金尙憲(1570~1652) : 자는 숙도叔度, 호는 청음淸陰 또는 석실산인石室山人, 본관은 안동이다. 1596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정묘호란이 일어났을 때 진주사로 명나라에 가서 구원병을 청하였고, 병자호란 때는 척화斥和를 강력히 주장하였다.
윤훤尹暄(1573~1627) : 자는 차야次野, 호는 백사白沙, 본관은 해평海平이다. 영의정 윤두수尹斗壽의 아들이다. 1597년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사관이 되었다. 1617년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고, 1624년에는 주청부사奏請副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부체찰사副體察使를 겸직하여 적과 싸웠으나, 전세를 불리하게 하였다는 죄로 체포되어 강화도에서 효수되었다.
박동량朴東亮(1569~1635) : 자는 자룡子龍, 호는 오창梧窓ㆍ기재寄齋ㆍ봉주鳳州, 본관은 반남潘南이다. 1590년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에 등용되어 검열檢閱되었으며, 그 후 형조 판서, 의금부 판사 등을 지냈다. 계축옥사 때 대북파가 조작한 유릉 저주사건을 시인, 폐모의 구실을 주었다. 유교 7신 가운데 한 사람으로 대북파大北派의 질시 대상이 되었고, 인조반정 때는 유배되었다.
이천봉李天封(1567~1634) : 자는 숙발叔發, 호는 백천白川, 본관은 경산京山이다. 경상북도 성주 사람으로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문인이다. 1601년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박자흥朴自興(1581~1623) : 자는 인길仁吉, 본관은 밀양이다. 1610년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이때 고시관이 아버지와 장인인 이이첨李爾瞻이어서 물의가 분분하였다. 부제학ㆍ형조 참판 등을 지냈고, 1621년 대사성이 되었다. 이이첨의 사위였으나 서로 반목하였고 인목대비仁穆大妃 폐비 때에는 형조 참판으로 폐비절목廢妃節目을 정하는 등 앞장섰고, 딸이 세자빈이 된 뒤 권세를 얻어 민전民田을 탈취하고 사치하여 백성들의 원망을 샀다. 경기 감사 재임 시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아버지와 함께 군사를 일으키려고 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자 부자가 함께 자결하였다.
이명李溟(1570~1648) : 자는 자연子淵, 호는 구촌龜村, 본관은 전주이다. 1606년 증광문과에 급제하였다. 광해군 초에 이이첨 등의 정책에 반대하여 사임하고, 1613년 응교로 있으면서 영창대군永昌大君에게 죄주는 것의 부당함을 주장하다가 파직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 후 전라도 관찰사에 특진되었으며, 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이호신李好信(1563∼?) :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사립士立, 호는 나진懶眞이다. 1603년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벼슬이 부제학에 이르렀다. 광해군 때는 경기도 포천에 물러나서 은거하였으며, 인조반정 후에는 다시 부제학에 임명되었다.
한찬남韓纘男(1560~1623) : 자는 경서景緖, 본관은 청주淸州이다. 1605년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1613년 부응교가 되어 훈련도감의 일을 전단하고 영창대군의 처벌을 주장하였다. 1616년 좌승지로 이이첨의 사주를 받아 해주옥사海州獄事를 일으켜 소북파 제거에 앞장섰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주살되었다.
권사공權士恭(1574~1619) : 본관은 안동, 자는 여안汝安이다. 1606년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1614년 예조 좌랑을 거쳐 예조 정랑을 지냈다. 1618년 광해군의 폐모론廢母論에 반대하였다가 흥해興海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류중룡柳仲龍(1558~1635) : 자는 여현汝見, 호는 어적산인漁適散人, 본관은 문화文化이다. 오건吳健의 문인으로 1582년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임진왜란 때는 의병을 일으켜 활약하였으며, 광해군 때는 벼슬을 버리고 은거하기도 하였다. 인조반정 후에 문과 중시에 급제하여 사성司成으로 치사하였다.
고상안高尙顔(1553~1623) : 자는 사물思勿. 호는 태촌泰村, 본관은 개성이다. 1576년 문과에 급제하여 함창 현감을 지냈고 감찰 정랑을 역임했다. 울산 판관과 풍기 군수를 거쳤으나 광해군이 즉위한 후 정국이 어지러워지자 벼슬을 버리고, 상주로 귀향하여 농사와 학문에 전념하였다.
안담安霮(1543~1622) : 자는 여숙汝淑, 본관은 순흥順興이다. 안수安琇의 둘째 아들로 첨정僉正, 부호군副護軍 등을 지냈고 예조 참판에 증직되었다. 안동의 와룡臥龍에 거주하였다.
안담 어른 → 안담
윤방尹昉(1568~1640) : 자는 가회可晦, 호는 치천稚川, 본관은 해평海平이다. 영의정 유두수尹斗壽의 아들로 이이李珥의 문인이다. 1588년 문과에 급제하였고 그 뒤 경상도 순안어사慶尙道巡按御史를 맡았다. 1618년(광해군 10) 인목대비를 폐위하자는 정청에 불참, 사직했다가 인조반정으로 예조판서에 등용되었다. 한성 판윤을 거쳐 영의정까지 올랐다.
엄황嚴愰(1580~1653) :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자는 명보明甫, 본관은 영월이다. 1603년 무과에 급제했다. 안동 판관으로 있을 때는 청량산 축성의 폐단을 보고 관찰사를 움직여 공사를 중지하게 하였다.
정경세鄭經世(1563~1633) :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경임景任, 호는 우복愚伏ㆍ일묵一默ㆍ하거荷渠이다. 경상북도 상주尙州에서 출생하였다. 류성룡柳成龍의 문인으로 1586년 알성문과에 급제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공을 세워 수찬이 되고 정언ㆍ교리ㆍ정랑ㆍ사간에 이어 1598년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다.
송방조宋邦祚(1567~1618) : 본관은 은진恩津, 호는 습정習靜, 자는 영숙永叔이다. 1590년에 진사가 되었다. 임진왜란 때는 의병을 일으켰고, 명나라가 후금을 치려고 조선의 호응을 요청하자 1617년 평안도 병마평사로 임명되었다.
조희보趙希輔(1553~1622) :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백익伯益이다. 1588년 식년무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1612년 성주 목사星州牧使가 되었으나 관내에 정인홍鄭仁弘의 세력을 믿고 횡포를 자행하는 토호를 엄벌했다가 파직당했다. 1617년 행사과行司果를 지낸 뒤, 대북파의 전횡이 심해지자 사직하고 원주原州에 은거했다.
한회韓懷(1550~1621) :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민망民望, 호는 태항苔巷이다. 교리를 지낸 한지원韓智源의 아들로, 1583년 알성문과에 급제하여, 공조 참의, 동부승지를 역임했다. 1594년 진주사陳奏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호성원종공신扈聖原從功臣에 책록되었다.
전식全湜(1563~1642) : 자는 정원淨遠, 호는 사서沙西, 본관은 옥천沃川이다. 류성룡ㆍ장현광張顯光의 문인으로 1603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였다. 임진왜란 때 의병을 모아 왜적을 토벌하였고, 대사간ㆍ대사헌을 거쳐 예조 참판ㆍ대사성을 지냈다. 광해군의 실정으로 벼슬을 포기하고 정경세鄭經世ㆍ이준李埈 등과 산수를 유람하여 ‘상사商社의 삼로三老’라고 불리었다.
강복성康復誠(1550~1643) : 자는 명지明之, 호는 죽간竹磵, 본관은 신천信川이다. 노사신盧思愼의 문인으로 1579년 사마시 입격하고 1595년 류성룡의 천거로 장수 현감이 되었으며 광해군 즉위 후에 동부승지 부총관을 역임했다. 정치가 문란해지자 벼슬을 사직하고 은거하였고, 인조반정 후에 다시 기용되어 동지중추부사까지 올랐다.
이평李坪(1572~1612) : 자는 여원汝遠이다. 경상북도 영주 출신이다.유학儒學으로 1612년 광해군의 즉위를 방해한 류영경柳永慶을 강경하게 탄핵하였다. 1612년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으나 관직에 발령되기 전에 병으로 사망하였다.
류경심柳景深(1516~1571) : 자는 태호太浩, 호는 구촌龜村, 본관은 풍산豊山이다. 류성룡柳成龍이 그의 족질이다. 1544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정주 목사, 대사헌, 병조 참판, 평안도 관찰사 등을 역임했다.
황상겸黃尙謙(1573~?) : 자는 자익子益, 본관은 평해平海로, 황준량黃俊良의 손자이다. 광해군 4년 식년시에 급제하였다.
변삼근卞三近(1579~1648) : 호는 오정梧亭, 자는 성지誠之,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1611년 별시문과에 합격하였다. 형조 참판 등을 역임하고 영국공신寧國功臣이 되었으며, 예조 판서로 추증되었다.
이잠李埁(1581~1655) : 자는 여첨汝瞻, 호는 창암蒼巖, 본관은 우계羽溪이다. 영주 출신으로 1606년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수찬弘文舘修撰, 풍기 군수豊基郡守 등을 지냈다. 대북의 이이첨李爾瞻과 친하여 그의 정치적 행위에 언관으로서 비호하는 역할을 하였다. 그의 동생이 이평李坪이다.
강임보姜任甫 : 강홍중姜弘重(1577~1642)이다. 자는 임보, 호는 도촌道村, 본관은 진주晋州이다. 1606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후 문사랑問事郞으로서 광해군 때 횡포를 자행하던 대북파를 다스렸다.
이경엄李景嚴(1579∼1652) : 자는 자릉子陵, 호는 현기玄磯, 본관은 연안이다. 연릉부원군(延陵府院君) 이호민(李好閔)의 아들이다. 1610년에 현감으로서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엄성嚴惺(1575~1628) : 자는 경보敬甫, 호는 동강桐江, 본관은 영월이다. 1612년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1613년 인목대비 폐모론이 일어나자, 폐모론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려 파직되었다. 인조반정 이후 사관에 기용되어 사간ㆍ전적ㆍ집의 등을 거쳐 부응교를 역임하였다.
조탁曺倬(1552~1621) : 자는 대이大而, 호는 이양당二養堂 또는 치재耻齋, 본관은 창녕昌寧이다. 1588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다. 우승지를 거쳐 형조 참판ㆍ경기도 관찰사에 올랐으며, 1618년 공조 참판으로 있으면서 이이첨 등과 폐모론廢母論을 주장하였다.
오정방吳定邦(1552∼1625) :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자는 영언英彦, 호는 퇴전당退全堂, 본관은 해주海州로 안성 출신이다. 1592년 임진왜란 때 도총부 도사로 왜적과 싸웠고, 광해군 때 인목대비의 폐위를 반대하다가 파직되었으나 인조반정 후 재등용 되어 포도대장ㆍ경상좌도 병마절도사 등을 역임하였다.
오 병사吳兵使 → 오정방
오숙吳䎘(1592~1634) : 자는 숙우肅羽, 호는 천파天坡, 본관은 해주海州이다. 1612년에 진사로서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병조 좌랑 등을 지냈으며, 인조반정 뒤에는 정언ㆍ교리를 지냈다. 이괄의 난 때 왕을 호종한 공으로 병조 참지가 되고 황해도 관찰사로 가도椵島의 분쟁을 수습하기도 하였다.
오숙우吳肅羽 → 오숙
홍호洪鎬(1586∼1646) : 자는 숙경叔京, 호는 무주無住ㆍ동락東洛, 본관은 부계缶溪이다. 대제학 홍귀달洪貴達의 후손이고, 정경세鄭經世의 문인이다. 1606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장령ㆍ공조 참의ㆍ흥해 군수 등을 거쳐 예조 참의ㆍ우부승지ㆍ대사간 등을 지냈다. 저서로는 무주일고無住逸稿가 있다.
홍숙경洪叔京 → 홍호
하윤구河潤九(1570~1646) : 자는 여옥汝沃, 호는 금사錦沙, 본관은 진양晋陽이다. 전라도 화순和順 출신으로 정구鄭逑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1610년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1615년 과거를 보러 갔다가 폐모론이 일어나는 것을 알고는 과거를 포기하였으며, 1633년에 식년문과에서 급제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 때는 의병을 일으켰다.
조정호(趙廷虎) : 1572∼1647. 자는 인보(仁甫)이며, 호는 남계(南溪), 본관은 배천(白川)이다. 1612년(광해군 4) 문과에 합격하였고, 병조 참의, 강원도 관찰사 등을 지냈다. 병자호란 때는 남한산성으로 출동하여 성을 방어하는 데 공을 세웠다.
박홍도朴弘道(1576∼1623) : 자는 자수子修, 본관은 죽산竹山이다. 1610년 문과에 급제하여 1615년에 이조 정랑을 역임하였다. 광해군 말기에 좌부승지로 재임하고 있었는데, 인조반정 때 이이첨 등 대북파와 연루된 혐의로 참형되었다.
정백창鄭百昌(1588∼1635) : 자는 덕여德餘, 호는 현곡玄谷ㆍ곡구谷口ㆍ대탄자大灘子ㆍ천용天容, 본관은 진양晉陽이다. 1606년 생원‧진사가 되고, 1611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오랫동안 사관史官으로 있었는데, 이이첨李爾瞻이 사국史局을 위협하여 방석芳碩의 처치전말處置顚末을 자세히 기록하게 하여 영창대군永昌大君을 관련시키려 하자 이를 거절하였고, 폐모론이 더욱 심해지자 이이첨 일당에게 몰려 파직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부수찬에 등용되었고, 이후 예조 참의ㆍ대사간ㆍ이조 참판 등을 지냈다. 저서로는 현곡집玄谷集이 있다.
정문익鄭文翼(1574~1639) : 자는 위도衛道, 호는 송죽당松竹堂, 본관은 초계草溪이다. 1606년 1611년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거쳐 홍문관 교리가 되었다. 한찬남의 상변 사건에 이름이 올라 절도에 안치되었으나 인조반정으로 풀려나와 재등용되었다.
이경직李景稷(1577∼1640) : 자는 상고尙古, 호는 석문石門, 본관은 전주이다. 이항복李恒福과 김장생金長生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문과 전시에 합격하였고, 1618년 폐모론이 일어났을 때 이에 반대하여 사직하였다.
정언굉鄭彦宏(1569~1640) : 자는 여확汝廓, 호는 서계西溪, 본관은 동래이다. 1606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였고, 1636년 병자호란 때 낙향하여 학문 연구에 전념하였다.
여확汝廓 → 정언굉
이식립李植立(1567∼?) : 자는 사고士固이며,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1605년(선조 38) 문과에 합격하였고, 예조 좌랑, 정언, 병조 정랑 등을 지냈다.
김효중金孝仲 : 김영조金榮祖(1577~1648)이다. 자가 효중, 호는 망와忘窩, 본관은 풍산豊山으로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의 사위이다. 1612년에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나, 당시 혼란한 정치를 보고 10여 년간 은거 생활을 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후 복관되었고, 1642년에 이조 참판에 이르렀다.
효중孝仲 → 김효중
류영문柳榮門 : 김령의 종형인 상주 형 김호金壕의 사위이다. 자는 화백華伯이다.
류화백柳華伯 → 류영문
화백華伯 → 류영문
김효길金孝吉 : 김경조金慶祖(1583~1645)이다. 그의 자는 효길, 호는 심곡深谷, 본관은 풍산豊山이다. 1609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의령宜寧과 이산 현감尼山縣監 등을 역임하였다. 청백리로 일관하여 현감을 지낸 두 고을에 거사비去思碑가 세워졌고, 병자호란 때는 근왕병勤王兵을 이끌었다.
김헌金憲(1566~1624) : 자는 회중晦仲, 호는 송만松灣, 본관은 상산商山으로 류성룡柳成龍의 문인이다. 임진왜란 때 정경세鄭經世, 이준李埈 등과 함께 창의하여 왜적을 토벌하였다. 1605년 문과에 급제하여 도사都事 등을 역임하였으나 광해군 때 벼슬을 버렸다. 인조반정 후 이조 좌랑吏曹佐郞, 풍기 군수豊基郡守를 역임했다.
김회중金晦仲 → 김헌
김헌 회중 → 김헌
정조鄭造(1559~1623) : 자는 시지始之, 본관은 해주海州이다. 1605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이첨李爾瞻의 사주로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죽이려 하였으나 박승종朴承宗의 방해로 실패하였다. 1617년 다시 폐모론을 제기하여 인목대비를 서궁西宮에 유폐시키는 데 적극 가담하였고, 다음해 부제학ㆍ대사성을 거쳐 1619년에는 대사간이 되었다. 1621년 형조 참판을 지내고 1622년 부제학ㆍ동지의금부사로 있다가 인조반정으로 정국이 역전되면서 원흉으로 지목되어 1623년 사형되었다.
정호관丁好寬(1568~1618) : 자는 희율希栗, 호는 금역琴易, 본관은 압해押海이다. 1602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군자감 정을 지냈다. 1607년 회답사 여우길呂祐吉 일행의 일본사행에 서장관으로 다녀왔다.
김제남金悌男(1562~1613) : 자는 공언恭彦, 본관은 연안延安으로 1597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였다. 1602년에 둘째딸이 선조의 계비繼妃인 인목왕후가 됨으로써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로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에 봉해졌다. 이로써 그는 선조의 장인이 되었다. 광해군이 왕위에 오른 뒤, 1613년 이이첨李爾瞻 등에 의해 인목왕후仁穆王后의 소생인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추대하려 했다는 공격을 받고 처형되었다. 1616년에 폐모론이 일어나면서 그 죄가 재론되어 부관참시剖棺斬屍되었다.
권반權盼(1564∼?) : 자는 중명仲明, 호는 폐호閉戶,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1595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1613년 경상도 관찰사로 지방 행정을 잘 다스려 길천군吉川君에 봉해졌다. 그 뒤 함경도ㆍ경기도ㆍ충청도의 관찰사 및 형조 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이위경李偉卿(1586~1623) : 자는 장이長而, 본관은 전의全義이다. 1605년에 진사進士가 되고, 1613년(광해군 5) 성균관 유생으로 계축옥사癸丑獄事가 일어나자 인목대비仁穆大妃 관련설을 주장하여 유폐하자고 상소했으나 대사헌 최유원崔有源의 반대로 실패했다. 이 해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하였다. 1622년 이이첨李爾瞻의 사주로 강원도 관찰사 백대형白大珩과 모의하여 경운궁慶運宮에 유폐된 인목대비를 시해하려고 했으나 박승종朴承宗이 급거 구원하여 실패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주살되었다.
오숙우吳肅羽 : 오숙吳䎘(1592~1634)이다. 그는 자가 숙우肅羽, 호는 천파天坡, 본관은 해주海州이다. 1612년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권지정자承文院權知正字가 되어 명나라에 보내는 진주문陳秦文을 초안했다. 김령과 동갑이다.
조여일趙汝一 : 조관趙貫(1573~?)이다. 그의 자는 여일汝一, 호는 회계檜溪, 본관은 한양漢陽이다. 1606년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병자호란 이후에는 산림에 은거하였다.
김주국金柱國(1586~1657) : 자는 임대任大,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1618년 생원시에 합격했다. 계암일록에 자주 등장하는 김중청金中淸, 즉 이화而和의 아들이다.
이안진李安眞(1576~1640) : 자는 보여葆汝, 본관은 덕수德水이다. 1606년 진사에 합격하고, 1613년 영창대군의 옥사와 폐모론이 일어나자 성균관유생 300여 명을 이끌고 궐문에 나아가 폐모론을 주동한 정조鄭造ㆍ윤인尹訒ㆍ이위경李偉卿 등의 참형을 요구하는 올렸다. 이 때문에 주동자들과 함께 유적에서 삭제되고 귀양 갔는데, 1623년 인조반정 이후 죄를 입었던 동학유생들과 함께 6품직에 발탁되었으며, 청양 현감이 되어 선정을 베풀었다. 공조 좌랑, 장악원 첨정, 한산 군수 등을 역임했다.
엄성嚴惺(1575~1628) : 자는 경보敬甫, 호는 동강桐江, 본관은 영월寧越이다. 1612년 사마시를 거쳐 이해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에 보직되었다. 1613년 폐모론이 일어나자, 그것을 주장한 이위경李偉卿 등을 성균관을 비롯한 사관四館에서 정거停擧시키는 처벌을 하도록 유생들을 주도하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서 파직당한 뒤 양산에 퇴거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다시 검열로 등용되었다.
한찬남韓纘男(1560∼1623) : 자는 경서景緖, 본관은 청주이다. 1613년 부응교가 되어 교리 이창준李昌俊과 함께 여러 차례 소를 올려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외할아버지인 김제남金悌男의 처벌을 적극 주장하였다. 이이첨李爾瞻의 사주를 받아 해주옥사를 일으켰다. 1617년 도승지로 승진하고, 1620년 대사헌을 거쳐 형조 판서에 이르렀으나, 1623년 인조반정으로 주살되었다.
금시조琴是調(1584~1658) : 자는 경평景平, 호는 신암新岩, 본관은 봉화奉化이다. 1612년에 생원이 되어 폐모론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고, 1624년 문과에 합격하였다.
박자응朴自凝(1589~1645) : 자는 정길正吉, 호는 읍백당挹白堂,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1613년 증광문과에 급제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후 제주로 유배되고, 그의 급제가 차술借述임이 밝혀지자 삭과削科되었다.
조정생曺挺生(1589~?) : 자는 이령以寧, 본관은 창녕昌寧이다. 1613년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예조 좌랑禮曹佐郞을 지냈다.
정광경鄭廣敬(1586~1644) : 자는 공직公直, 호는 추천秋川, 본관은 동래東萊이다. 1612년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수찬ㆍ정언을 지내고 1613년 인목대비 폐모론에 반대하였다.
이위보李衛甫 : 이익李釴(1575~1631)의 자이다. 본관은 전의全義로 1612년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류원지柳元之(1598∼1674) : 자는 장경長卿, 호는 졸재拙齋, 본관은 풍산이다. 류성룡柳成龍의 손자이며 정경세鄭經世의 문인으로 황간 현감ㆍ진암 현감 등을 지냈으며, 1636년 병자호란 때 이홍조李弘祚가 안동에서 의병을 일으키자 동참하였다. 경사經史와 성리性理와 역학易學에 뛰어났다.
류인길柳寅吉(1554~?) : 자는 경휴景休, 호는 규오葵塢, 본관은 문화文化이다, 1589년 별시문과 급제, 여러 관직을 거쳐 뒤에 대사헌大司憲ㆍ이조 참판吏曹參判을 역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 때에는 임금을 호종하였으며, 1599년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양관대제학을 역임하였다.
정장鄭樟(1569~1614) : 자는 직보直甫, 호는 사곡沙谷ㆍ만오晩悟, 본관은 청주淸州, 아버지는 정구鄭逑이다. 1612년 증광시 을과에 급제하였다. 연기 현감ㆍ신령 현감ㆍ충청도 도사ㆍ예조 좌랑 등을 역임하였다. 1614년에 전라도 도사가 되었으나 임기도 못 채우고 병을 이유로 사직한 뒤 고향으로 돌아와 죽었다.
이광윤李光胤(1564~1637) : 자는 극휴克休, 호는 양서瀼西이며, 본관은 경주慶州, 조목趙穆의 문인이다. 1594년 별시에 급제하여 1613년 7월에 초계 군수草溪郡守가 되었다.
최계승崔季昇 : 최현崔晛(1563~1640)이다. 그의 자는 계승季昇, 호는 인재認齋, 본관은 전주이다. 1588년 사마시에 합격했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도처에서 공을 세웠고, 1606년 증광시에 급제하였다. 예조 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정간定簡이다.
학봉鶴峰 : 김성일金誠一(1538~1593)이다. 자는 사순士純, 호는 학봉鶴峰, 본관은 의성義城으로 1567년에 급제하였다. 퇴계의 고제 가운데 한 사람이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초유사로 영남 각지를 순시하였고, 진주성에서 왜적과 싸우다가 병사하였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류실백柳實伯 : 류대화柳大華(1576~?)이다. 자가 실백實伯, 본관은 문화文化이다. 1605년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618년 증광시에 급제하였다.
변성지卞誠之 : 변삼근卞三近(1579~?)이다. 자는 성지誠之, 호는 오정梧亭, 본관은 밀양이다. 1611년에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1614년에 주서注書가 된 뒤 사관史官으로 활약하였다.
김몽호金夢虎(1557~1637) : 자는 숙무叔武, 호는 옥봉玉峰, 본관은 강릉江陵이다. 1609년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1613년 정언 등을 역임하였고, 1623년 공조 참의에 이르렀다.
강대진姜大進(1591~1658) : 자는 면재勉哉, 호는 한사寒沙, 본관은 진주이다. 대수大遂로 개명했다. 1612년 증광시 급제하여 1614년 광해군이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죽이자 정온鄭蘊이 간언하다가 유배되었는데, 정온을 구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평소에 반목하던 정인홍鄭仁弘의 모함으로 삭직당하고 회양에 유배되었다. 1651년 전주 부윤으로 1년을 지낸 뒤에 누대로 살던 합천에 은거하였다.
윤근尹根(1574~?) : 자는 회원晦遠, 본관은 파평坡平으로 1612년 식년시에 급제하였다.
윤전尹烇(1575~1636) : 자는 정숙靜叔, 호는 후촌後村, 본관은 파평坡平이다. 1610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에 들어갔으며, 이후 저작이 되었다. 1613년 유생 이위경李偉卿이 이이첨李爾瞻의 사주를 받아 폐모소를 올렸을 때, 한림 엄성嚴惺과 함께 이위경의 상소를 정지시키려다가 도리어 파면되었고, 1615년에는 사판仕版에서 삭제되었다. 시호는 충헌忠憲이다.
이진영李晉英(1580~?) : 자는 강후康侯, 본관은 전주全州로 1612년 증광시에 김령과 동방 급제하였다.
이강후李康侯 → 이진영
유백증兪伯曾(1587~1646) : 자는 자선子先, 호는 취헌翠軒, 본관은 기계杞溪이다. 1612년 진사로서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1621년 병조좌랑이 되었으나 이이첨李爾瞻 등 권신들에게 아부하지 않아 한직에 머물렀고, 인목대비仁穆大妃 폐모론에 반대하여 사직하고 낙향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때 공을 세워 정사공신 3등으로 기평군에 봉해졌고, 1636년에는 이조 참판이 되었다.
임효달任孝達(1584~1646) : 자는 술지述之, 본관은 풍천風川이다. 1610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에 등용되었고, 우부승지右副承旨에 이르렀다.
최래길崔來吉(1583~1649) : 자는 자대子大, 호는 이재頤齋,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1611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에 등용되었고, 1623년 인조반정에 공을 세워 정사공신靖社功臣 3등이 되고 예조 참의에 올랐다. 이듬해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공주公州로 왕을 호종扈從하고 완천군完川君에 봉해졌으며,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권확權鑊(1568~1638) : 자는 사중士重, 호는 석계石溪,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1611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에 등용되었으나 이이첨李爾瞻에 의해 기각당하였다. 이위경李偉卿 등이 폐모론을 제기하자 사관四館에 문서를 돌려 그들의 과거 응시권을 정지하게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관직을 박탈당했다가 승문원에 복직되었으나, 이이첨의 아들 이홍엽이 대리시험으로 급제하자 이 사실을 폭로하여 또 삭직되었고, 1618년 폐모론에 반대하여 체직되었다.
이유달李惟達(1579~1635) : 자는 겸선兼善,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1612년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시강원 설서를 거쳐 사헌부 집의에 천임되었다.
손척孫倜 : 자는 사검士儉, 본관은 밀양密陽으로 1602년 알성시에 급제하였다.
황치경黃致敬(1554~1627) : 자는 이직而直, 호는 몽죽夢竹, 본관은 창원昌原이다. 1580년 별시에 급제하여 1591년 성절사聖節使의 서장관이 되었다. 1608년에 문과중시에 급제하여 공조 참의를 지냈다.
김진金搢(1585~?) : 자는 기중記中, 호는 추담秋潭, 본관은 광산光山이다. 1610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였다. 1627년 정주 목사로 있을 때 정묘호란을 당하여 항전하다가 포로가 되었고, 1630년에 송환되어 예안 현감禮安縣監이 되었으나 적에게 항복하였다는 죄목으로 탄핵을 받고, 위원渭原에 충군充軍되었다가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가 학문에 힘썼다.
임취정任就正(1561~1628) : 자는 진화進和, 본관은 풍천豊川이다. 1589년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1613년 형조 참의를 지내고, 1617년에 대북파로서 폐모론을 주장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파직되었다가 1628년 광해군의 복위를 모의하다가 죽임을 당했다.
박경업朴慶業(1568∼?) : 자는 응휴應休, 호는 암수巖叟, 본관은 고령高靈이다. 1594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사헌부 지평ㆍ장령ㆍ사간원 정언을 지냈다. 동래 부사로 나갔는데 무고에 관련되어 지속적인 탄핵을 받았다.
류희량柳希亮(1575~1628) : 자는 용경龍卿, 호는 제교霽嶠, 본관은 문화文化이다. 광해군의 처남으로 1608년 별시에 급제하여 예조 참판禮曹參判에 이르렀다.
류용경柳龍卿 → 류희량
여우길呂祐吉(1567~1632) : 자는 상부(尙夫), 호는 치계(稚溪, 痴溪), 본관은 함양(咸陽)이다. 1591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였다. 1614년에 다시 진위사陳慰使로서 명나라에 다녀왔다. 탁월한 외교가로서 전란 이후의 처리를 담당하였을 뿐만 아니라 지방관으로서도 선정을 베풀었다.
민형남閔馨男(1564~1659) : 자는 윤부潤夫, 호는 지애芝崖, 본관은 여흥驪興이다. 1600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1613년에 익사翼社ㆍ형난亨難의 두 공신에 책록策錄되어 여주군驪州君으로 봉군되었으며, 지돈령부사知敦寧府事가 되었다. 1614년 진향사進香使가 되었고, 1615년 동지 겸 진주사冬至兼陳奏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658년 판중추 부사가 되어 기로소에 들어갔다. 시호는 장정莊貞이다.
윤의립尹毅立(1568~1643) : 자는 지중止中, 호는 월담月潭, 본관은 파평坡平이다. 1594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1626년 경주 부윤이 되었으며 좌참찬에 이르렀다.
류효립柳孝立(1579~1628) : 자는 행원行源, 본관은 문화文化로 류희분柳希奮의 조카이다. 1609년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1614년에 사헌부 정언이 되었고 1619년 우부승지에 올랐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숙부 류희분이 참형되고 북인이 쫓겨나자 제천으로 유배되었는데, 귀양살이하면서 몰래 다른 뜻을 품고, 항상 여인의 가마를 타고 서울에 있는 광해군 때의 옛 신하로서 새 조정을 원망하는 자들의 집을 내왕하면서 역모를 꾀하다가 1628년 1월 3일 거사 직전에 일이 탄로나 처형되었다.
전성지全性之 : 전이성全以性(1577~1646)이다. 자가 성지性之, 호는 운계雲溪, 본관은 용궁龍宮이며, 예천군 용궁 출신이다. 1606년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여섯 고을의 수령을 지내면서 목민관으로서의 명성이 자자하였다.
장만張晩(1566~1629) : 자는 호고好古, 호는 낙서洛西, 본관은 인동仁同이며, 시호는 충정忠定이다. 1591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1610년에 동지중추부사로 호지胡地의 산천 지도를 그려서 바쳤다. 1624년 이괄李适이 반란을 진압하여 진무공신1등에 책록되었고 옥성부원군玉城府院君에 봉해졌다. 문무를 겸비하고 재략이 뛰어났으며, 사후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박재朴榟(1564∼?) : 자는 자정子貞, 본관은 고령高靈이다. 1602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였으며, 1615년 홍문관부응교에 이어 사간이 되었으며, 김제남金悌男의 옥사獄事를 다스린 공이 있었고, 1618년 강릉 부사를 역임하였다.
류창문柳昌文(1581~?) : 자는 여홍汝弘, 본관은 진주晋州로 1612년 식년시에 급제하였다.
이홍망李弘望(1572~1637) : 자는 원로元老, 본관은 용인龍仁이다. 1605년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정언, 지평, 홍문관 수찬 등을 거쳐 세자시강원의 문학ㆍ필선, 동래 부사, 부승지를 역임하였다. 1627년 정묘호란 때 왕을 강화로 호종扈從하였고, 후금과의 화약이 성립된 뒤 원창군原昌君을 왕자로 가장하여 심양瀋陽에 보낼 때 부사로 따라가서 인질로 잡혀갔던 남녀 수백 명을 데리고 돌아왔다.
이대엽李大燁(1587~1623) : 자는 문보文甫, 본관은 광주廣州이다. 이이첨의 아들이며, 그의 아우로 이원엽李元燁ㆍ이홍엽李弘燁ㆍ이익엽李益燁이 있다. 1612년 증광문과에 급제하였으나, 겨우 글자를 알아보는 정도로서 전후의 과거 급제가 모두 남이 대신 지어준 것이라 하였다. 인조반정 뒤에 이를 소급해 과방科榜에서 삭제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 뒤에 옥중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정립鄭岦(1574~1629) : 자는 여수汝秀, 본관은 연일延日이다. 1600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1613년 승지가 되었다. 1624년 2월에 일본 덕천가광德川家光(도쿠가와 이에미쓰)의 습위식襲位式에 축하사로 건너가서 포로로 잡혀갔던 146명을 데리고 돌아왔다.
박래장朴來章(1590~?) : 자는 이경而慶, 본관은 죽산竹山으로 1612년 식년시에 급제하였다.
류경종柳慶宗(1565~1623) : 자는 선원善元, 본관은 진주晉州이다. 1595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 집의ㆍ대사간ㆍ대사헌ㆍ황해도 감사 등을 역임했다.
이익李瀷(1579~1624) : 자는 형여泂如, 호는 간옹艮翁ㆍ옥포玉浦,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1612년 문과 급제 1615년 전적에 승직되었다. 그 뒤 정언ㆍ지평을 거쳐 직강을 역임하였다. 1618년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하려는 논의가 일어나자, 이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심한 문초를 받았으나 끝내 그의 주장을 굽히지 않고, 제주에 안치安置되었다.
정대방鄭大方(1565~1613) : 자는 경도景道, 호는 동계東溪,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1592년 임진왜란 때 공을 세웠고, 정유재란 때는 화왕산성火旺山城을 방어하는데 공을 세웠다.
윤지경尹知敬(1584∼1634) : 자는 유일幼一, 호는 창주滄洲, 본관은 파평坡平이다. 1603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1609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1617년 사은사謝恩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폐모론에 적극 반대하였고, 정묘호란 때는 척화를 강력히 주장하여 윤황尹煌ㆍ윤형지尹衡志와 함께 삼윤三尹으로 당시 사람들로부터 높이 칭송받았다.
김치원金致遠(1572~?) : 자는 사의士毅, 호는 탁계濯溪, 본관은 부안扶安이다. 1603년 식년문과에 합격하여 1608년 정언正言이 되었으나 이듬해 대북파의 탄핵으로 삭직削職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부호군副護軍에 임명되고 1627년 서흥 부사瑞興府使를 지냈다.
조방직趙邦直(1574~?) : 자는 숙청叔淸, 호는 수죽脩竹, 본관은 풍양豊壤으로 1609년 증광시에 급제하였다. 1627년 이인거李仁居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소무공신昭武功臣이 되고, 다음해 류효립柳孝立ㆍ정심鄭沁의 치옥治獄에 공을 세워 영사공신寧社功臣이 되었다.
이홍주李弘胄(1562~1638) : 자는 백윤伯胤, 호는 이천梨川,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1594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안동 부사를 거쳐, 1619년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장만張晩의 뒤를 이어 도원수가 되어 큰 공을 세웠다. 병자호란이 일어나 적들이 서문西門 밖에까지 이르자 왕의 국서國書를 가지고 적진으로 들어가 국서를 전하고 화의의 교섭을 벌였으나 항복하는 데에는 끝까지 반대하였다. 1637년 영의정에 올랐으며, 법도에 따르고 검소한 생활로 이름이 높았다.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이안눌李安訥(1571~1637) : 자는 자민子敏, 호는 동악東岳, 본관은 덕수德水이다. 18세에 진사시에 수석 합격하였으나 동료들의 모함을 받자, 과거볼 생각을 버리고 문학에 열중하였고, 29세 때 다시 과거에 나아가 급제하였다. 1601년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1614년에 경주 부윤이 되었다.
심돈沈惇(1569~1646) : 자는 학이學而, 호는 남파南坡, 본관은 청송靑松이다. 1593년 계사 전주 별시문과癸巳全州別試文科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라 1614년에 안동 부사를 지냈으며, 영의정까지 올랐지만 일생동안 폐모정청廢母聽政에 참여했던 전력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이경함李慶涵(1553~1627) : 자는 양원養源, 호는 만사晩沙, 본관은 한산韓山이다. 1585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벼슬이 경상도 관찰사와 병조 참판에 이르렀으나 폐모론에 반대하다가 탄핵을 받고 사직하였다. 인조반정 후 한성부 우윤으로 총관摠管을 겸하다가 나이가 많다고 사직하였다.
황덕부黃德符(1582~1623) : 자는 신백信伯, 본관은 회덕懷德이다. 1613년 이이첨ㆍ정인홍의 사주를 받아 이위경李偉卿ㆍ한정국韓定國 등과 함께 사학四學의 유생을 창솔倡率하여 광해군의 폐모론을 앞장서서 주장하였고, 1615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주살당하였다.
김효수金孝修 : 김념조金念祖(1589~1652)이다. 그의 자가 효수, 호는 학음鶴陰, 본관은 풍산豊山이며, 김대현金大賢의 일곱째 아들이다. 1636년 생원시를 거쳐 과천 현감에 임명되어, 병자호란 때 현의 향리들과 함께 관악산 바위굴에서 청군과 대치하고 격문을 내어 의병을 일으켜 근왕하고 과천을 지킨 공으로 근왕원종공훈勤王原從功勳으로 경연 참찬관에 증직되었다.
장흥효張興孝(1564~1633) : 자는 행원行源, 호는 경당敬堂,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김성일金誠一과 류성룡柳成龍을 사사하고, 뒤에 정구鄭逑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아 문명이 높았다. 벼슬을 단념하고 후진을 양성하여 제자가 수백명에 달하였고, 특히 역학易學을 깊이 연구하였다. 그의 일기인 경당일기(한국국학진흥원, 2012)가 번역되어 있다.
남명우南溟羽(1592~?) : 자는 구만九萬, 호는 장주長洲, 본관은 의령宜寧이다. 1614년 별시에 급제하였다.
김집金潗(1558~?) : 자는 활원活源, 호는 애경당愛景堂, 본관은 의성이다. 학봉 김성일의 아들로 퇴계 이황의 문인이다. 1597년 익위사세마翊衛司洗馬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였다. 1627년 정묘호란에 고향에서 의병장으로 추대되었으나 노쇠한 몸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조찬한趙纘韓(1572~1631) : 자는 선술善述, 호는 현주玄洲, 본관은 한양漢陽이다. 1606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우승지ㆍ예조 참의를 거쳤다.
우치적禹致績(?~1628) : 본관은 단양丹陽이다. 일찍이 무과에 급제하고, 순천 부사ㆍ삼도수군 통제사ㆍ경상좌도 병마절도사ㆍ함경북도 병마절도사 등을 역임하였다. 1598년에 노량해전露梁海戰에서 왜군을 무찌르는 데 매우 공이 컸다. 1628년 함경북도 병마절도사로 재직하던 중 그곳에서 죽었다.
정준鄭遵(1580∼1623) : 자는 행지行之, 본관은 해주이다. 1610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지평ㆍ헌납 등을 역임하였다. 이이첨의 심복으로서 1613년 계축옥사 및 폐모론 등에 대북파의 일원으로 가담하여 반대파를 제거하는 데 주동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광해군의 총신이었던 죄로 의주에서 주살되었다.
이모李慕(1582~1639) : 자는 효사孝思, 호는 소백小白, 본관은 영천永川이다. 아버지가 한음 이덕형이다. 한강 정구 및 구전 김중청의 문인이다. 1615년 문과에 급제한 뒤 홍문관 수찬修撰을 지냈다.
박상지朴相之 : 박직朴稷(1571~1647)이다. 자는 상지相之, 호는 묵암默庵, 본관은 반남이다.
박건갑朴乾甲(1558~?) : 자는 응성應成, 호는 우졸재愚拙齋,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1605년 생원시에 합격했다. 그는 합천의 삼가면 토골(삼가면 외토리 토동) 옛 남명 조식의 외가 동네에서 태어나 성장하였고, 정인홍과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의 문인門人이다.
손우孫祐 : 손당孫禟의 아우이다. 진사로 관직은 도사를 역임했다. 광해군 때 대북으로 활동하였다. 인조반정이 일어난 후 위리안치 되었다.
조석붕趙錫朋(1585~1657) : 자는 자백子百, 호는 한사寒砂, 본관은 횡성橫城이다. 1615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봉상시 주부奉常寺主簿를 역임했다.
정택뢰鄭澤雷(1585~1619) : 자는 휴길休吉, 호는 화강花岡, 본관은 하동河東이다. 영의정을 지낸 정인지鄭麟趾의 7대손으로 1612년 진사시에 입격하였고, 1615년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모론의 부당성을 주장하던 이원익李元翼이 유배당하자 유생 홍무적洪茂績ㆍ김효성金孝誠 등과 더불어 논척조인論斥造訒의 상소를 올려 이원익을 변호하고 이이첨 일파를 치죄할 것을 극력 주장하였다. 이로 인하여 남해의 절도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김효성金孝誠(1585~1651) : 자는 행원行源, 본관은 광주光州이다. 1613년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1615년 이이첨李爾瞻의 사주를 받은 정조鄭造ㆍ윤인尹訒ㆍ이위경李偉卿 등이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하려 하자 고부천高傅川ㆍ김태우金太宇 등 24인과 함께 정조ㆍ윤인ㆍ이위경 등 3인의 목을 벨 것과 귀양 가 있는 이원익李元翼을 다시 부를 것을 주청하였다가 길주吉州로 유배당하고 뒤에 진도로 이배되었다.
지명
내성奈城 : 본래는 퇴관부곡退串部曲인데, 고려 충혜왕 때 내성현으로 승격하여 안동군에 예속시켰다. 안동대도호부安東大都護府의 북쪽 90리에 있었던 속현屬縣이다. 지금의 경상북도 봉화군 내성면이다. 계암일록에서는 내성柰城, 혹은 내성乃城으로도 썼다. 모두 동일한 지명이다. 계암 김령의 처가妻家가 있는 곳이다.
침류정枕流亭 : 선성현宣城縣 남쪽 5리 우암愚巖 위에 있던 정자이다. 계암의 조부祖父 김유金綏의 고모부인 현감 김만균金萬勻이 세웠으나, 세월이 오래되어 퇴락해 무너져 김유가 철거하고 새로 지었다.
일휴당日休堂 : 계암 김령의 아버지 김부륜의 고종인 금응협琴應夾의 당호堂號이며, 금응협이 예안면 오천동에 후진 양성을 위해 건립한 별당이다. 안동댐이 건설됨에 따라 1974년 11월에 영남대학교 민속원으로 이건, 복원하였다.
윗마을 : 계암 김령이 살았던 마을은 안동부 와룡면 오천리로, 속칭 ‘외내’라는 마을이다. 계암의 증조부 농수聾叟 김효로金孝盧 때부터 광산 김씨 예안파의 세거지가 되었고, 윗마을과 아랫마을로 구성되어 있었다. 1974년 안동댐의 건설로 수몰되었다.
지례知禮 : 김령의 증조부 김효로의 산소가 있는 곳으로 당시에 예안현에 속해 있었다. 지금의 안동시 녹전면이다.
반석盤石 : 오천반석烏川盤石이다. 선성읍지宣城邑誌의 기록에는 김부륜金富倫의 옛집 앞에 있으며 위로는 낭떠러지 절벽이 있고, 아래로는 시냇물에 임하였다고 했다. 돌의 모습이 균형을 이루어 네모나고 직각의 모양을 하고 있으며 위에는 평평하여 수십 인이 앉을 수 있다고 하였다. 김령金坽이 이 때문에 자신의 호를 계암溪巖으로 지었다고 하였다. 계암일록에 자주 등장하는 곳이다.
금계현金鷄峴
창락역昌樂驛 : 경상도 풍기군에 있던 역驛으로 현재 풍기읍 창락리昌樂里이다.
죽령竹嶺 :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과 충청북도 단양군 대강면 사이에 있는 고개이다.
장림역長林驛 : 경상도 상주목尙州牧 화령현化寧縣 동쪽에 있던 역이다.
북천北川
단양丹陽
이요루二樂樓 : 충청도 단양군 남천南川 가에 있던 정자이다.
장회역丈回驛
수산역水山驛 : 충청북도 청풍군의 연원역連原驛에 속해 있던 속역屬驛이다.
수산 → 수산역
황강黃江 : 충청도 제천시 한수면에 있는 강이다. 이곳에 황강역이 있다.
심항현心項峴
충주忠州
무극역無極驛 : 경기도京畿道 음죽현陰竹縣 남쪽 30리에 있었던 역이다.
죽산竹山 : 경기도京畿道 이천도호부利川都護府에 있었던 속읍이다.
용인현龍仁縣
주자동鑄字洞 : 서울특별시 중구에 있는 동이다. 조선시대에 활자를 만들던 주자소鑄字所가 있었던 데서 유래되었는데, 한성부 남부 훈도방에 속해 있었다. 계암 김령이 태어난 곳이다.
복천福川 : 전라남도 화순군 동복면同福面의 옛 이름으로, 김령의 아버지 김부륜金富倫이 동복 현감을 역임하였다.
동복 → 복천
압구정鴨鷗亭 : 조선 세조 때 한명회(韓明澮, 1415~1487)가 지금의 동호대교 근처에 지은 정자이다.
태평관太平館 : 조선시대에 명나라 사신들이 머물던 숙소이자, 왕 또는 왕자가 사신들을 대접하기 위해 다례와 하마연·익일연 등의 연희를 열던 곳이다. 지금의 서울특별시 중구 서소문동인 숭례문 안의 양생방에 있었다.
시어소時御所 : 임금이 임시로 거처하던 곳이다. 임진왜란 때 궁궐이 모두 불타 없어지고 월산대군의 집을 임시 행궁幸宮으로 삼았다.
아차산峨嵯山 : 서울시 광진구와 경기도 구리시에 걸쳐있는 산이다. 아단산阿旦山ㆍ아차산阿且山ㆍ아차산峩嵯山이라고도 표기한다. 또 북쪽에서 남쪽으로 와서 높이 솟아있는 데서 남행산이라고도 하였다.
달천獺川
영천榮川 : 영주의 옛 지명이다.
부석사浮石寺 : 지금의 경북 영주시 부석면 봉황산 중턱에 있는 사찰이다.
근시재近始齋 : 김령의 재종형再從兄 김해金垓의 당호堂號이다.
분천汾川 : 안동군 도산면에 있는 마을로 분강촌汾江村 혹은 부내라고도 하였다. 영천 이씨들의 집성촌으로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 선생의 종택과 애일당愛日堂이 있었다. 안동댐이 생겨 물에 잠기면서 농암종택과 애일당 및 분강서원은 상류 쪽인 가송리佳松里로 옮겨갔다.
방잠芳岑 : 지금의 안동시 와룡면 오천리에 있는 방잠마을 및 방잠산을 가리킨다. 김령의 조부와 선친 등의 산소가 있는 곳이다. 여기에 원래 재사가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재사는 없어졌다. 계암 김령의 묘소도 여기에 있다.
도목촌道木村 : 현재의 안동시 예안면 도목리이다. 지금은 안동댐으로 인한 수몰 지역이나 흥해 배씨興海裵氏의 세거지였다. 도목桃木으로도 쓴다.
도목촌桃木村 → 도목촌道木村
도목桃木, 道木 → 도목촌
명암사鳴巖寺
가구佳邱 : 현재의 안동시 와룡면 가구리이다. 안향의 8대손 안선손安善孫(1422~1497)이 안동 권씨安東權氏의 사위가 되면서 가구리에 정착한 이후 그의 증손 안제安霽가 마을 이름을 가구佳邱라고 지었다고 한다.
역동易東
청송靑松
지사촌池沙村
계상溪上 : 퇴계退溪 이황李滉이 살던 상계上溪 마을이다. 현재의 퇴계 종택 앞을 흐르는 작은 시내가 토계土溪이고, 토계의 상류를 상계上溪라 하고 하류를 하계下溪라 한다. 현재의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이다.
양장羊塲 : 예안현禮安縣 서쪽에 있는 산이름이다.
검제[金溪] : 지금의 안동시 서후면 금계리이다.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이 살던 곳이다.
온계溫溪 : 도산의 옛 지명이다. 안동부 예안현 온계리였고, 지금은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이다. 퇴계 이황이 태어난 곳이다.
후조당後凋堂 : 김령의 종백부從伯父 김부필金富弼의 당호堂號이다. 광산 김씨光山金氏 예안파禮安派 종택에 딸린 별당이다. 후조당後彫堂 김부필金富弼이 창건했다. 광산 김씨 예안파의 제일 맏집으로 계암일록에 자주 등장하는 이지以志 김광계金光繼의 집이다.
하양河陽 댁 : 자개子開의 집이다.
월천月川 : 퇴계의 고제 월천月川 조목趙穆(1524~1606)이 태어난 곳으로, 선성현宣城縣에 속했던 마을이었으나 안동댐 건설로 마을의 대부분이 수몰되었다. 이때 조목은 생존해 있었다.
주촌周村 : 지금의 안동시 와룡면 주하리의 두루마을[周村]이다. 진성 이씨 집성촌이다. 김령의 서고모庶姑母가 사는 곳이기도 하다.
도솔원兜率院 : 안동부 서쪽 20리 지점에 있었던 여관으로, 관원이나 공무여행자가 묵는 곳이었다. 이 때문에 이 원院이 있었던 마을이 지명으로 되었다. 지금의 안동시 서후면 명리이다. 계암의 선대 산소가 있는 곳이다.
봉정사鳳停寺 : 경북 안동시 서후면 천등산天燈山에 있는 절이다.
광산光山 : 광산은 전라남도 북서부에 위치한 지명으로 1995년 광주광역시 광산구로 개편되었다. 고려 태조가 신무왕神武王의 셋째 아들 김흥광金興光을 광산부원군光山府院君에 봉한 후,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삼고 광산을 본관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고 한다.
예천醴泉
삼계三溪 :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삼계리이다.
삼계서원三溪書院 : 경북 봉화읍 삼계리에 있는 서원으로 충재冲齋 권벌權橃을 제향한 곳이다. 1588년에 창건되어 권벌權橃의 위패를 봉안했다. 1660년에 사액을 받았고, 1868년 서원철폐령으로 없어졌다가 1951년에 복원되었다.
송암정松巖亭 : 안동부安東府 내성현奈城縣 유곡酉谷에 있는 정자이다. 충재冲齋 권벌權橃의 둘째 아들 석정石亭 권동미權東美가 지었다.
청암정靑岩亭 : 봉화奉化 유곡酉谷의 충재 고택 경내에 있는 정자로 충재 권벌이 1526년에 지었다.
오천烏川
오계서원迃溪書院 : 경북 영주시 평은면 천본리에 있는 서원으로 1570년에 퇴계의 제자 간재艮齋 이덕홍李德弘이 세운 오계정사迃溪精舍의 후신이다. 정사가 임진왜란으로 피폐해지자 1600년에 이덕홍의 장남인 이시李蒔가 쌍계마을로 이건하였다. 1665년에 이덕홍의 위패를 봉안했다.
하회河回
유곡酉谷
역동서원易東書院 : 1570년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발의로 우탁禹倬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인근의 사족과 수령들의 협조를 받아 건립되었다. 원래 낙동강 상류인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 예안면 부포리 오담鰲潭에 세워졌으나 대원군 때 훼철되었다가 1969년에 안동시 송천동 안동대학교 경내로 이건되었다.
양정당養正堂 : 계암 김령의 중부仲父 김부신金富信의 당호이다. 계암일록에 자주 등장하는 판사判事 형 김지金址의 집이다. 평보 형으로 자주 나오는 평坪은 판사 형의 둘째 아우이다.
선산善山
풍산豊山
홍정洪亭
부포浮浦 : 안동 예안 부포이다.
금계金溪
이계伊溪
화산花山 : 안동安東의 옛 이름이다.
창녕昌寧
현사사玄沙寺 : 안동부의 와룡산에 있었던 절이다.
일직현一直縣 : 안동부安東府 남쪽 31리에 있다. 현재의 경북 안동시 일직면이다.
군위현軍威縣
효령현孝靈縣 : 군위현軍威縣 서남쪽 35리에 있는 고개다. 현재의 경북 군위군軍威郡 효령면孝令面에 있는 고개이다.
영호루暎湖楼 : 경상북도 안동시 정하동 낙동강변에 있는 고려 시대의 누각이다. 정확한 건립 연대는 알 수 없으며 여러 차례의 홍수로 유실된 것을 복구하였다. 1970년에 원래의 자리에서 강 건너 맞은편인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였다. 진주의 촉석루矗石樓, 밀양의 영남루嶺南樓와 함께 영남의 삼대 누각으로 손꼽힌다.
문경聞慶
용궁龍宮 : 경북 용궁이다. 김령의 셋째 누이가 이찬李燦에게 시집가 사는 곳이다.
정곡井谷
가흥可興 : 가흥창可興倉이다. 충북 중원군 가금면 가흥리 남한강변에 있었던 조선 시대의 조창漕倉이다.
양근군楊根郡 : 경기도 양평군 양평읍 일대의 옛 행정 구역이다.
양근 → 양근군
삼전도三田渡 : 경기도 광주군 중대면 송파리에 있던 나루이다. 인조仁祖가 청 태종太宗에게 항복한 곳이다.
저자도楮子島 : 서울 강남구 삼성동 동쪽 한강 가운데 있던 섬으로, 옛날에 닥나무가 많이 있던 데서 이름이 유래되었다. 1970년대에 압구정동 일대에 고층아파트를 짓는데 이 섬의 흙을 파다 써서 섬은 사라지고 말았다.
정릉靖陵 :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위치해 있는 조선 제11대 왕 중종中宗의 무덤이다.
봉은사奉恩寺 : 서울 강남구 삼성동 수도산修道山에 있는 절이다.
남별궁南別宮 : 지금의 서울 중구 소공동 조선호텔 자리에 있었던 조선 시대의 별궁이다. 1593년에 명나라 장군 이여송이 주둔한 이래로 중국 사신의 여사旅舍로 썼다.
경안慶安 : 경기도 광주시 경안면이다.
음죽현陰竹縣 : 충청북도 음성군과 경기도 이천시의 일부 지역이다.
용수사龍壽寺 : 안동 예안에 있는 사찰로 고려 시대에 창건되어 의종이 용수사로 사액하고 최선에게 기문을 짓게 하여 절 안에 비석을 세우게 하였다. 퇴계 이황이 자주 머물렀던 곳이다.
여강서원廬江書院 : 안동시 월곡면月谷面 도곡동道谷洞 여산촌廬山村 오로봉五老峯 아래에 있었던 서원이다. 안동 지방의 대표적인 서원으로 1575년에 지방 사림들이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위패를 봉안하고 도학을 강론하였다. 1605년 대홍수로 인해 유실되자 중창하였는데, 계암일록에 1607년 10월 8일 새로 위판을 봉안했다는 기록이 있다. 1620년 이황의 제자인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과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을 추향하였다. 1676년에 사액을 받고 ‘호계虎溪’로 이름을 바꾸었다. 안동댐 건설로 수몰되어 1973년에 안동시 임하면 임하리로 옮겨 세웠다.
분천汾川 : 안동 도산면에 있는 마을로 분강촌汾江村 혹은 부내라고도 하였다. 영천 이씨의 집성촌으로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 선생의 종택과 애일당愛日堂이 있었다. 안동댐이 생겨 물에 잠기면서 농암종택과 애일당 및 분강서원은 상류 쪽인 가송리佳松里로 옮겨졌다.
의인冝仁 마을 :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 의촌리는 원래 조선 시대의 예안현 의동면宜東面 의인리와 섬촌을 합친 명칭이다. 지금은 대부분 수몰되고 20여 가구가 남아 있다.
의인冝仁 → 의인 마을
탁영담濯纓潭 : 도산서원의 천연대天淵臺 아래로 흐르는 낙동강의 물줄기가 호수를 이룬 곳을 말한다.
천연대天淵臺 : 도산서원 앞 낙동강 가에 두 개의 누대가 있는데, 동쪽이 천연대天淵臺이고 서쪽이 천광운영대天光雲影臺이다.
구담九潭 : 안동시 풍천면에 있는 마을인데 순천 김씨와 광산 김씨의 집성촌이다.
의흥義興 : 경상북도 군위군 의흥이다.
진보현眞寶縣 : 지금의 경북 청송군 진보면이다.
송생松生 : 지금의 경북 청송군 청송읍 송생리이다. 또한 청송을 송생이라고도 하였다.
토곡吐谷 :
석천정石泉亭 :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유곡리酉谷里에 있는 정자이다. 충재冲齋 권벌權橃의 아들인 권동보權東輔가 건립하였다.
성암정星巖亭 : 김륵의 둘째 아들인 김지선金止善이 건립한 정자로 일명 서벽정棲碧亭이라고도 한다. 김륵이 세운 귀학정龜鶴亭 아래에 위치한다고 한다.
귀학정龜鶴亭 : 경상북도 영주시 가흥리에 있었던 정자로 백암栢岩 김륵金玏이 1603년에 세운 정자이다. 가운데에 두고 양쪽으로 거북처럼 생긴 동구대와 서구대가 쌍으로 솟아 있는데, 구학정은 서구대에 있다. 경치가 매우 아름답고 류성룡柳成龍, 허성許筬, 이수광李睟光, 차천로車天輅, 이준李埈, 홍가신洪可臣, 이식李植 등이 이를 주제로 읊은 시가 남아있어서 더욱 유명하다.
구학정 → 귀학정
각화사覺華寺 : 경상북도 봉화군 춘양면 석현리 각화산 남쪽에 있는 절이다. 1777년에는 이곳에 태백산사고太白山史庫를 지어 왕조실록王朝實錄을 보관하였다. 정조 때에 이르러 정식으로 사고를 지어 실록을 보관했다고 하나, 계암일록을 보면 1606년 당시 이미 실록을 보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선몽대仙夢臺 : 경상북도 예천군 호명면 백송리에 있는 정자로 내성천乃城川 남쪽 암산에 있다. 퇴계 이황의 종손인 우암遇岩 이열도李閱道가 1563년에 창건했다.
개령開寧 : 최민수崔民壽에게 시집간 맏누이가 사는 곳이다. 지금의 경북 김천이다.
능동陵洞 : 경상북도 안동시 녹전면 죽송리 능동이다. 일명 능골이라고도 한다. 광산 김씨 오천 입향조인 농수聾叟 김효로金孝盧(1454~1534)의 묘소가 있다. 김효로의 묘소 바로 아래에는 고려 충렬공忠烈公 김방경金方慶(1212~1300)의 묘소가 있다. 묘소 아래에는 안동 김씨의 재사와 광산 김씨의 능동재사가 나란히 붙어 있다.
거인居仁 : 현재의 안동시 북후면 대현리이다. 광산 김씨 예안파 선대 묘소가 있다.
설월당雪月堂 : 계암 김령의 아버지 김부륜金富倫의 당호이다.
번천樊川
감원鑑源 : 안동부의 동쪽 가구촌佳丘村 서쪽 기슭에 있는 정자로 사간司諫 권춘란權春蘭이 지은 것이다.
감원정鑑源亭 → 감원
외천外川 : 현재 안동시 녹전면祿轉面 원천리元川里이다. 영천 이씨永川李氏 집성촌으로 간재 이덕홍을 제향하는 오계서원迃溪書院이 있다.
성천사聖泉寺 : 예안현 북쪽의 요성산邀聖山에 있었던 절이다.
이산서원伊山書院 : 영주에 세워진 첫 서원으로 1558년 군수 안상安瑺이 이산면伊山面 원리院里에 건립하였다. 처음에는 강학의 장소로만 이용되었으나, 1572년에 묘우를 세워 퇴계 이황을 제향하면서 제사의 기능을 겸하게 되었고 1574년에 사액되었다. 1614년에 이산면 석포리石浦里 임구林丘로 이건되었다.
청원정淸遠亭 : 경상북도 예천군 용궁면龍宮面 무이리武夷里에 있는 정자이다. 고려 공민왕 3년(1354)에 국파菊坡 전원발全元發이 지었다.
병산屛山 :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병산리이다. 하회 마을의 대척점에 있으며, 서애 류성룡과 수암 류진의 위패를 봉안한 병산서원이 있다.
병산서원屛山書院 :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병산리에 있는 서원이다. 1613년에 창건되었으며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1542~1607)의 위패를 봉안했다.
문수산文殊山 : 경상북도 봉화군 물야면 개단리, 춘양면 서벽리, 봉성면 우곡리에 걸쳐 있는 산으로 봉화의 진산鎭山이다.
한수정寒水亭 : 경상북도 봉화군 춘양면 의양리에 위치한 정자이다. 조선 중기의 문신인 권벌權橃이 1534년에 거연헌居然軒으로 창건하였지만 소실되고, 1608년에 권벌의 2대손 권래權來가 다시 짓고 한수정이라고 하였다.
고산정孤山亭 : 이황의 제자인 성재惺齋 금난수琴蘭秀가 세웠다. 청량산 아래 낙동강 가의 절벽 위에 자리하고 있는데 풍광이 뛰어나다.
금씨琴氏의 정자 → 고산정
분천서원汾川書院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분천리에 있었던 서원으로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를 제향한 서원이다. 후에 분강서원汾江書院으로 고쳤다. 안동댐의 건설로 지금은 옛날보다 상류인 고산리로 옮겼다.
쾌빈루快賓樓 : 예천 객관客館의 동쪽에 있었던 누각이다.
소라召羅 : 조선시대에 안동도호부에 속해 있었던 부곡部曲이다.
목릉穆陵 : 선조宣祖와 비妃 의인왕후懿仁王后 박씨朴氏 및 계비繼妃 인목왕후仁穆王后 김씨金氏의 능을 지칭한다.
남학동南學洞 : 서울특별시 중구에 있는 동네이다. 조선 태종 11년(1411)에 설치된 4부학당의 하나인 남부학당南部學堂, 즉 남학당南學堂이 있던 데서 동네 이름이 유래하였다.
신문新門 : 도성 4대문 중 하나였던 서대문을 가리키는 말이다. 서대문은 위치가 몇 번 변경되면서 새로 지어짐에 따라 속칭 ‘새문’이라 하던 것을 한자명으로 ‘신문新門’이라고 한 것이다.
모화관慕華舘 : 조선시대에 명나라와 청나라 사신을 영접하던 곳이다. 1407년에 송도松都의 영빈관迎賓館을 모방하여 돈의문敦義門(서대문) 밖 서북쪽에 건립하고 이름을 모화루慕華樓라고 하였다가, 1430년에 개수하고 모화관으로 개칭하였다.
서총대瑞蔥臺 : 창경궁 춘당지春塘池 가에 있었던 석대石臺이다. 후에 춘당대春塘臺로 이름을 고쳐서 지금도 춘당대라고 한다. 이곳에서 행해지던 정시를 서총대정시 혹은 춘당대시라고 하였다.
병사兵使 댁 : 계암의 백부인 산남山南 김부인金富仁(1512∼1584)의 집이다. 김부인은 무과에 급제하여 경상좌도 병마절도사를 지냈다. 김부인의 네 아들이 김령의 종형인 김호金壕ㆍ김전金㙉ㆍ김탄金坦ㆍ김기金圻이다. 김기는 일기에 ‘북애北厓 형’으로 자주 등장한다.
주왕산周王山 : 경상북도 청송군과 영덕군 지역에 걸쳐 있는 산이다.
청부靑鳧 : 지금의 경상북도 청송군 진보에 속하였던 옛 현의 이름이다.
귀래정歸來亭 : 경상북도 안동시 정상동에 있는 고성 이씨 문중의 정자이다. 이굉李浤(1414∼1516)이 1513년에 벼슬에서 물러나 안동으로 온 후 지은 것이다.
부동部洞 : 조선시대 한성부의 행정구획을 오부로 나눈 것 중의 하나인 남부의 청사가 있었던 곳으로 원래는 남붓골이라 하였으며 한자명으로 남부동이라 하였다. 이것을 줄여서 붓골, 또 한자명으로 부동이라고 하였으며, 또한 한자명으로 옮기면서 ‘붓’을 뜻으로 취해 필동筆洞이라고 하였다.
남부동 → 부동
임하臨河 : 지금의 경북 안동시 임하면이다.
하한정夏寒亭 : 경상북도 영주시 가흥동에 있는 정자로 박록朴漉이 건립한 것이다.
선성宣城 : 안동시 예안禮安의 이칭이다.
협선루挾仙樓 :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1538~1593)이 1586년에 지은 「유적벽기遊赤壁記」에 “동복同福은 호남湖南에서 풍광이 아름다운 곳으로 손꼽히는데, 경내에서 으뜸가는 명승지는 적벽赤壁이고, 이곳에 협선루挾仙樓가 있는데 바로 동복 수령 김부륜金富倫(1531~1598)이 지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오미동五美洞 :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오미동이다.
영숭전永崇殿 : 조선 초 이 태조李太祖의 어진御眞을 봉안하기 위해서 여섯 군데에 전각을 설치하였는데, 영숭전은 평양에 있었다.
영릉英陵 : 세종대왕과 왕비 소헌왕후 심씨沈氏의 능으로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왕대리에 있다.
교하交河 : 경기도 파주군 교하면이다.
벽제역碧蹄驛 : 경기 고양시 덕양구 고양동에 있는 역원驛院으로, 중국의 사신들은 서울로 들어오기 전에 반드시 이곳에서 하룻밤을 묵고, 이튿날 예의를 갖춰 입성하는 것이 정례定例였다.
개천開川 : 청계천이다.
산양山陽 : 경북 문경시 남동부에 있는 면으로 면소재지는 불암리佛巖里이다.
누암樓岩 : 충북 충주시 가금면可金面 누암리로 이곳에 고분군이 있다.
평은平恩 : 영주 남동부에 위치한 평은면이다.
성암정星巖亭 : 김륵의 둘째 아들인 김지선金止善이 건립한 정자로 일명 서벽정棲碧亭이라고도 한다. 김륵이 세운 귀학정龜鶴亭 아래에 위치한다고 한다.
침락정枕洛亭 : 김해金垓의 아들 김광계金光繼(1580∼1646)가 세운 누정으로 일명 운암정사라고도 한다. 집 이름은 ‘정亭’이지만 일종의 강당 건물로, 학문을 강론하고 시詩를 짓기 위한 모임을 열기도 하였다. 원래 예안면 오천동에 있었으나 1974년 안동댐 건설로 자리로 옮겼다.
용어
정거停擧 : 유생儒生에게 일정 기간 동안 과거를 못 보게 하던 벌이다.
시지試紙 : 과거科擧에 답안지로 쓰던 종이이다.
회시會試 : 문무과文武科 과거나 소과小科의 초시初試 급제자가 서울에 모여 제2차로 보는 시험이다. 복시覆試라고도 한다.
논계論啓 : 신하(대간臺諫)가 임금에게 신료들의 잘못을 논박하여 보고하는 일을 말한다.
천례薦禮 : 새로운 곡물이나 음식을 사당에 모신 조상에게 올리는 일이다.
준례餕禮 : 제사 후 진설했던 음식을 나누어 먹는 예이다.
참례參禮 : 음력 초하루와 보름에 간단히 제사를 올리는 것을 말한다. 다례茶禮 혹은 삭망례朔望禮라고도 하고 전례奠禮라고도 한다.
전례奠禮 → 참례
성복成服 : 초상이 나서 사흘이나 닷새 뒤에 처음으로 상복喪服으로 옷을 갈아입는 것을 말한다.
공복功服 : 대공大功과 소공小功을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대공은 종형제從兄弟·자매姉妹·중자부衆子婦·중손衆孫·중손녀衆孫女·질부姪婦와 남편의 조부모祖父母, 남편의 백숙부모伯叔父母, 남편의 질부姪婦의 상사喪事에 아홉 달 동안 입는 복제服制이고, 소공은 종조부모從祖父母·재종형제再從兄弟·종질從姪·종손從孫의 상사에 다섯 달 동안 입는 복제이다.
구나驅儺 : 세모歲暮에 역귀疫鬼를 몰아내는 의식이다.
나례儺禮 → 구나
망전望奠 : 매달 음력 보름날 아침에 제사 때와 같이 차리어 지내는 제사이다.
배소陪疏 : 소수疏首를 배행하여 대궐까지 동행하는 수행 인원을 말한다.
정시廷試
제복除服 : 상기喪期가 다 되어 상복을 벗는 것을 말한다.
예사禰祀 : 예제禰祭이다. 음력 9월 중에 길일을 택하여 돌아가신 부모를 위해 올리는 계절 제사이다.
예제禰祭 → 예사
감시監試 : 조선 시기 생원生員과 진사進士를 뽑던 소과小科 사마시司馬試의 별칭이다.
종가宗家 : 김령의 맏집인 후조당後凋堂을 지칭한다. 계암일록에 자주 나오는 이지以志의 집이다.
망전望奠 : 매월 초하루와 보름날에 올리는 간단한 제사를 말한다.
동당시東堂試 : 문과文科 또는 대과大科의 속칭이다.
회시會試 : 초시에 급제한 자가 서울에 모여 다시 보는 시험이 복시覆試이다.
월과月課 : 문무 관원에 다달이 보이는 일종의 자격시험이다. 한 달에 한 번씩 시문詩文을 지어 바치게 되어 있는데, 월과를 세 차례 연거푸 지어내지 않는 자는 파직되었다.
절사節祀 : 절기나 명절에 지내는 제사이다. 조선 시대에는 정조正朝ㆍ한식寒食ㆍ단오端午ㆍ추석秋夕ㆍ동지冬至ㆍ납일臘日 등의 속절俗節에 사당이나 선영先塋에 제사지냈다.
부계府啓 : 사헌부에서 임금에게 의견을 올리는 것을 말한다.
도목都目 : 매년 음력 유월과 섣달에 관리의 성적을 평가하여 벼슬을 없애거나 올리던 일이다.
경신일庚申日 : 60일마다 되돌아오는 10간12지의 57번째 날이다. 이날에 사람 몸 속의 삼시충三尸蟲이 사람의 수면 중에 천상으로 올라가 사명도인司命道人에게 인간의 죄과罪過를 고다고 한다. 삼시충이 상제에게 인간의 죄를 고하는 것을 방해하기 위해 밤새도록 음악이나 염불을 하는 풍습이 중국과 한국, 그리고 일본 등지에서 행해졌다. 이런 모임을 경신회庚申會라 하고, 이날을 지키는 일을 수경신守庚申이라 한다.
배자[牌子] : 지위가 높은 사람이 낮은 사람에게 권한을 위임하던 공식 문서이다. 패지牌旨라고도 한다.
재소齋素 : 재계하면서 육식이나 향이 강한 양념류가 많은 음식을 멀리하는 것을 말한다.
칭념稱念 : 관리가 지방 수령으로 임명되어 부임할 때, 서울에 거주하는 고관들이 부임자의 다스림 아래 있을 자기네들의 노비나 토지를 잘 보호하여 달라고 부탁하면서 베푸는 잔치이다.
작례酌禮 : 원래는 문묘文廟에 임금이 몸소 술을 올리는 예禮를 말하나, 계암일록에서는 생일을 맞은 어른 등에게 술을 올리는 것을 말한다.
시사時祀 : 음력 2월, 5월, 8월, 11월에 가묘에 지내는 제사이다.
회문回文 : 여러 사람들이 돌려 보도록 쓴 글을 말한다.
호주戶主 : 호수戶首와 같은 말이다. 농토 8결結을 단위로 선발한 농부의 대표자이다. 조세를 거두어 바치는 일을 맡아 보았다.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 : 90권으로 편찬된 중국 명明나라의 지지地誌로서, 이현李賢 등이 임금의 명을 받들어 1461년에 완성하였다. 대원일통지大元一統志를 본떠 명나라의 중국 전역과 조공국朝貢國의 지리를 기술한 총지總志이며, 각종 지도를 실은 다음, 풍속ㆍ산천 등 20항목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1456년의 환우통지寰宇通志(119권)를 요약한 것이라는 말을 입증하듯이 기술이 간략하고 정확하지 않으나, 당시의 얼마 안 되는 지지로서 중요하다. 청淸나라에서는 천하일통지天下一統志라 하여 간행하였는데, 천순본天順本을 고쳐 실은 부분이 있다.
방계防啓 : 다른 관서나 다른 사람이 어떤 일에 대하여 임금에게 아뢰었을 때, 또는 임금이 어떤 일에 대하여 신하에게 의견을 물었을 때, 그리고 임금이 시킨 일에 대하여 그렇게 하지 말도록 아뢰는 것을 말한다.
담제禫祭 : 대상大祥을 치른 두 달 뒤 하순下旬 정일丁日이나 해일亥日에 지내는 제사이다.
불통不通 : 강경講經으로 시험을 볼 때, 다섯 등급 중 최하위 성적이다.
강경시講經試 : 명경과明經科의 과거 시험을 말한다. 칠경七經 혹은 구경九經의 경문을 암송하는 것으로 시험 과목을 삼았다. 여기에 합격하면 생원生員이라고 불렀다.
알성시謁聖試 : 조선시대에 실시된 비정규 문과와 무과 시험이다. 국왕이 문묘에 가서 제례를 올릴 때 성균관 유생에게 시험을 보여 성적이 우수한 몇 사람을 선발하는 것으로서, 1414년에 처음 실시하였다.
소두疏頭 : 여러 사람이 연명으로 상소할 때에 맨 앞 자리에 이름을 써서 상소의 주동이 되는 사람을 이르는 말이다.
합계合啓 : 조선시대에 사간원司諫院ㆍ사헌부司憲府ㆍ홍문관弘文館의 관원 중에서 두 사람 또는 세 사람이 연명連名으로 올리던 계사啓辭이다. 계사는 논죄論罪에 관하여 임금에게 올리는 글이다.
비답批答 : 임금이 상소문의 말미에 적는 가부可否의 답변을 말한다.
조보朝報 : 조선시대에 승정원承政院에서 처리한 사항을 매일 아침 서리書吏가 베껴서 소속 군사軍士로 하여금 조정의 관원들에게 배포하게 하는 통보通報이다. 난보爛報라고도 한다. 각 군현의 경주인京主人들이 이를 다시 베껴서 수령에게 보냈는데, 이를 기별奇別이라고 일컬었다. 지금의 관보官報이다.
양사兩司 : 사헌부와 사간원이다.
경차관敬差官 : 조선시대 수시로 특수임무를 띠고 각 도에 파견된 특명관이다. 건국 초기부터 파견하였으나, 태종 때에 정승 하륜河崙의 건의에 따라 그 이름을 지었고, 3품에서 5품관 중에서 선발하였다. 임무도 왜구 대책 등 군사적인 것에서부터 전곡田穀의 손실 조사 등 경제적 임무, 구황 등 재민災民 구제 업무, 옥사獄事ㆍ추쇄推刷ㆍ추국推鞫 등 사법적 임무 등으로 크게 늘었다.
오현五賢 : 조선시대 유림에서 받들어 모신 어질고 학덕이 높은 다섯 사람이다. 처음에 이황李滉이 김굉필金宏弼ㆍ정여창鄭汝昌ㆍ조광조趙光祖ㆍ이언적李彦迪을 높여 동방의 4현이라고 하였다. 나중에 유림이 이황을 더하여 오현이라고 하였다.
오현종사五賢從祀 : 김굉필金宏弼ㆍ정여창鄭汝昌ㆍ이언적李彦迪ㆍ조광조趙光祖ㆍ이황李滉의 다섯 사람을 문묘文廟에 배향하는 것으로, 우여곡절 끝에 1610년 9월 4일에 성균관에서 거행하였다.
정시庭試 :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임시로 대궐 뜰에서 보이던 과거이다. 임금이 시험장에 친림하였다.
전시殿試 : 조선시대 과거에서 왕이 친림親臨하여 시행하던 3단계의 최종 시험이다. 향시鄕試, 회시會試를 거친 사람이 대궐의 뜰에 들어가서 치던 시험이다.
파방罷榜 : 과거 시험 과정에서 잘못이 있는 경우 과거 합격자의 발표를 취소하는 것을 말한다.
기축옥사己丑獄事 : 조선 선조 때에 일어난 옥사로, 1589년 10월에 정여립이 모반을 꾸민다는 고변으로부터 시작되어 3년여 간 진행된 동인과 서인과의 정쟁이다. 이때 서인인 정철이 위관이 되어 무고한 많은 동인들이 변을 당하였다.
관백貫白 : 4월에 관백貫白이 된다는 말은 중궁이 백白(8백)이 되었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정월에 2흑이 중궁에 들어오는 인寅ㆍ신申ㆍ사巳ㆍ해亥년 중의 하나라는 뜻이 된다. (아래 도표 참조) 따라서 1617년은 정사丁巳이고 이해의 4월 구성도는 도표와 같이 관백이 이루어진다.
상위 |
7赤 |
3碧 |
5黃 |
중위 |
6白 |
8白 |
1白 |
하위 |
2黑 |
4綠 |
9紫 |
인ㆍ신ㆍ사ㆍ해 년 4월 |
1행 |
2행 |
3행 |
김직재(金直哉, 1554~1612)의 옥사 : 김직재는 본관은 안동, 자는 경어景魚이다. 1573년 생원시에 급제하여 진사가 되었고, 1585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무원 박사에 이르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왜적에게 팽살烹殺당한 아버지의 원수를 갚는다고 하여 기복종군起復從軍하였다. 그러나 왜적을 토벌하는 데 마음을 쓰지 않고 상중의 선비가 고기와 술을 마음대로 먹고 마셔 양반의 체통을 잃었다고 하여 직첩職牒이 환수되었다. 1612년에 김경립金景立이 김직재가 아들 김백함과 함께 왕을 제거하고 선조의 여섯 째 아들이자 광해군의 형인 순화군順和君의 양자 진릉군晉陵君을 추대하려는 역모를 꾸민다고 발설하여 투옥되었다. 결국 김직재ㆍ김백함 부자와 사위 황보신 등이 능지처참되었고 가산은 적몰되었다. 이른바 ‘김직재의 옥사’인데, 이는 소북파를 제거하기 위한 대북파의 조작극으로 밝혀져 무옥이라고 한다.
전시殿試 : 임금이 친시親試하는 문과의 마지막 시험이다. 복시(覆試)의 최종합격자 33인과 성균관의 성적 우수자 등이 참여하였다. 초ㆍ중ㆍ종장의 구분 없이 단 한 번만 시험하며 합격ㆍ불합격 없이 석차만 정하였다.
괴원槐院 : 승문원承文院의 별칭으로 사대교린事大交隣에 관한 문서를 맡았던 관청이다. 성균관ㆍ교서관과 함께 3관三館이라고 불렸다.
침희侵戱:침희신진侵戱新進의 줄임말로 과거에 새로 급제한 신진新進을 희롱하는 신참례를 말한다. 신래희新來戱, 허참례許參禮, 면신례免新禮라고도 한다.
신래희 → 침희, 면신례
신래新來 : 문과에 급제하여 새로 부임한 관원이다.
면신례免新禮 : 출사出仕하는 관원이 구관舊官을 초청하여 음식을 접대하는 예법으로, 허참례許參禮라고도 한다.
증광시增廣試 : 증광增廣은 나라의 큰 경사가 있을 때 보이는 과거이다.
경시관京試官 : 조선시대 3년마다 각 도에서 과거를 보일 때에 서울에서 보낸 시험관이다.사마회司馬會 :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한 사람들의 모임이다.
계달啓達 : 신하가 글로 임금에게 아뢰던 일이다. 계품啓稟이라고도 한다.
동상례東床禮 : 혼례를 치른 뒤에 신랑이 신부 집에서 마을 사람이나 친구들에게 음식을 대접하는 일이다.
사관四館 : 성균관成均館ㆍ예문관藝文館ㆍ승문원承文院ㆍ교서관校書館을 통틀어 일컫는 말이다.
사대査對 : 중국에 보내는 표表와 자문咨文을 살펴 그 내용이 틀림없는 것인지 확인하던 일이다.
피혐避嫌 : 혐의를 피하는 일이다.
간통簡通 : 사헌부나 사간원의 벼슬아치가 글로써 서로의 의견을 주고받는 것을 말한다.
분관分館 : 새로 문과에 급제한 사람을 승문원, 성균관, 교서관의 삼관三館에 나누어 배치하여 권지權知라는 이름으로 실무를 익히게 하던 일이다. 급제한 사람을 박사博士 세 사람이 매긴 점수에 따라 배속하는데, 한 점은 교서관, 두 점은 성균관, 세 점은 승문원으로 보내고, 이 점수를 얻지 못하면 미분관인未分館人이 된다.
분발分發 : 분발分撥이라고도 한다. 조보朝報에 주의 사항이 있을 때, 조보를 발행하기 전에 먼저 베껴서 관계되는 기관이나 관리에게 돌리던 일이다.
신래간택新來揀擇 : 신래(초임 관리) 중에서 승문원으로 분관할 후보를 선택하는 것을 말한다.
포폄褒貶 : 관리들의 성적과 근무 태도를 살펴보는 일이다.
계하啓下 : 임금의 재가를 받는다는 뜻이며, 또 상소에 대해 주무관서의 의견을 묻는 것을 말한다.
계사啓辭 : 특정 사안의 처리에 관하여 임금에게 올리던 글이다.
요객繞客 : 신랑이 초례를 치르러 신부 집에 갈 때 신랑을 데리고 가는 사람이다. 상객이라고 하기도 한다.
유생 품관儒生品官 : 향직鄕職의 품계品階를 받은 벼슬아치를 통틀어 일컫는 말이다. 고을에 사는 유력한 자를 좌수座首ㆍ별감別監ㆍ유사有司 등에 임명하여 수령을 보좌하고, 풍속을 바로잡고 향리鄕吏를 규찰하며, 민정民情을 대표하게 하던 유향품관留鄕品官을 말한다.
품관品官 → 유생 품관
재계齋戒 : 제사 지내기 전 3일을 제사 일에만 마음을 쓰는 것이다. 이틀은 집밖을 나가지 않고 마음을 정갈히 하며, 당일은 제사 드리는 장소에서 지낸다.
차자箚子 : 조선시대 신하가 왕에게 올리는 간단한 서식書式의 상소문上疏文을 말한다.
장의掌議 : 조선시대 성균관ㆍ향교에 머물러 공부하던 유생의 임원 가운데 으뜸 자리를 이르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