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8년 나해 5월27일 주일.
[(백)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 (청소년 주일)]
제1독서
"주님께서 위로는 하늘에서, 아래로는 땅에서 하느님이시다. 다른
하느님은 없다."
○ 신명기의 말씀입니다. 4,32-34.39-40
제2독서
"여러분은 여러분을 자녀로 삼도록 해 주시는 영을 받았습니다. 이
성령의 힘으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 하고 외치는 것입니다."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입니다. 8,14-17
복음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어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8,16-20
◈ [서울] 삼위일체 대축일
2018년 나해 5월27일 삼이일체 대축일
지하철 3호선 안국역에는 다른 역에는 없는 것이 있습니다. 안전문에
독립운동을 하였던 분들의 사진과 그분들의 말이 있었습니다.
안국(安國)이라는 말은 나라를 위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풍요와 발전은 나라를 위해서 헌신한 사람들의
피와 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안국역은 그 이름이 의미하는 것처럼
나라를 위해서 헌신한 사람들의 희생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기회가
되시면 안국역에 한 번 내려보시면 좋겠습니다.
교회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신앙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신학과 이성의 문제로 접근할 수도 있지만 초대 교회 신자들의 체험과
신앙입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은 한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내어주시는 분입니다.
성부이신 하느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약속의 땅을 주셨습니다.
약속의 땅에서 살아갈 수 있는 십계명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느님께서 주신 십계명을 충실하게 지키면 우리가 머무는 곳은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이 될 것입니다. 성부이신 하느님은
자비하신 분입니다. 비록 우리가 잘못을 했어도 뉘우치면 언제나
용서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그릇된 길을 갈 때면 예언자를
보내 주시어 바른길로 갈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시는 분입니다.
성자이신 하느님은 제자들에게 하느님 나라와 기쁜 소식을
주셨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나라입니다.
하느님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거룩한 사람들이 머무는 나라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누구나 갈 수 있지만 아무나 갈 수 없는 나라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기쁜 소식을 온전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갈 수 있는 나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새로운 계명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온 마음을
다하고, 온 정성을 다해서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지만,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우리 또한 주님께서 가신 길을 충실하게 따라가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성령이신 하느님은 은사를 주셨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살고
그것에 맛 들일 수 있는 슬기로움을 주는 은사, 교리의 어려운 점을
잘 알아들을 수 있는 은사, 어떤 일이 옳고 그른 일인지 더욱 분명하게
구별할 수 있게 해 주는 은사, 하느님을 열렬히 섬기게 하며, 죄악과
악마를 거슬러 용감히 싸울 수 있는 능력이며 순교까지 하면서 신앙을
증거 할 수 있는 은사,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믿어야 할 것과
믿어서는 안 될 것을 분별케 하는 은사, 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자녀다운 사랑과 하느님의 자녀인 모든 사람을 예수님 안에서
형제자매로 사랑하게 해 주는 은사. 하느님을 하느님으로 섬기게
하며 하느님 앞에 겸손한 자세를 취하게 하며, 죄를 피하게 하며
영생에 대한 희망을 주는 은사입니다.
오늘은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성부, 성자 그리고 성령의
하느님께서는 어떤 관계일까요? 끊임없이 서로에게 내어주는
관계입니다. 성부는 성자에게 모든 권한과 능력을 주셨습니다.
성자는 성부에게 모든 영광과 기쁨을 드렸습니다. 성자는 성령에게
십자가와 죽음으로 세운 교회를 맡겨 드렸습니다. 성령은 모든
은사를 교회에 주셨습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은 신학적으로
교리적으로 이해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삼위일체의 신비는
내어줌의 눈으로, 겸손의 눈으로 보면 이해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삼위이신 하느님께서 한 몸을 이룬다고 생각하지만, 하느님께서는
만위일체, 억위일체이신 분이십니다.
우리의 몸에는 많은 지체가 있으며 그 지체들은 한 몸을 이루고
있습니다. 우리의 몸에는 수조 개의 세포들이 있습니다. 그런 모든
세포가 각자의 자리에서 고유한 역할을 하면서 한 몸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몸의 많은 지체는 서로를 위해서 내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가끔 돌연변이로 이기적인 지체들이 생기곤 합니다.
그래서 탐욕스럽게 오직 받아들이기만 합니다. 그런 지체들은 결국
몸 전체를 병들게 하고 결국은 자신도 죽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암세포입니다. 욕심과 이기심으로 자신만을 아는 사람들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내어주는데
익숙한 사람들은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행복하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쉽게 이해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의 하느님, 위로의 하느님, 용서의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서로 사랑하십시오. 서로 위로하십시오, 서로
용서하십시오.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삼위일체 증후군
2018년 나해 5월27일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
<삼위일체 증후군>
복음: 마태오 26,16-20
오래 전 시외버스 안에서 벌어진 일로 그것은 불과 10여 분 안팎의
일이었습니다. 만원버스도 아니었고 정류장마다 멈추는 시간이 그리
철저히 지켜지던 때도 아니었습니다. 버스 기사가 엔진 시동을 걸고
막 출발하려는데 승객 중 한 사람이 버스를 타려는 사람을 발견하고
말 했습니다
“저기 웬 할머니가 오십니다.”
버스 기사가 바라보니 제법 떨어진 거리에서 한 할머니가 무언가
머리에 인 채 버스를 향해 종종걸음으로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어서 출발합시다!” “언제까지 기다릴 거요?”
“다음 버스 타라고 하세요.”
버스에 타고 있던 어떤 승객이 바쁘다면서 서둘러 떠나기를
재촉했습니다.
그러자 버스 기사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저기, 우리 어머니가 오십니다. 조금 기다렸다가 같이 가시지요?”
승객은 할 말을 잃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창가에 앉았던 한 청년이 벌떡 일어나 버스에서 내려 할머니를
향해 달려갔습니다. 승객들의 시선은 자연스레 버스 밖으로
모아졌습니다. 머리 위의 짐을 받아든 청년은 할머니의 손을
부축하여 잰걸음으로 버스로 돌아왔습니다. 할머니와 청년이 버스에
오르는 순간 승객 중 누군가가 박수를 치자 마치 전염된 듯 너나없이
박수가 이어졌습니다.
물론 그 할머니는 버스 기사의 어머니도 청년의 어머니도
아니었습니다. 어떤 병에 걸리면 같은 증상이 나타납니다.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은 둘을 하나로 묶어줍니다. 그리고 그런 사랑을
받아본 사람은 같은 증상에 시달립니다. 바로 삼위일체 증후군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로부터 사랑을 받으셨습니다. 그 사랑은 워낙 커서
생명을 바치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그 아버지의 사랑을 위해
무언가 해 드리고 싶지만 방법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이미
성령이 되시어 아드님 안에 사시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아드님께
주시는 생명의 피가 곧 성령이시고 그 성령을 받으신 예수님 안에
아버지가 사시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어머니가 생명을 바쳐
키워주셨지만 더 이상 이 세상에 계시지 않는 어머니를 위해 해 드릴
수 있는 것은 없는 상태와 같습니다.
이렇게 되면 자신을 위해 생명을 바쳐 가난해지고 늙고 병들고
힘없어진 모든 이들이 어머니께 보답해드리기 위한 또 다른 어머니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예수님도 당신 아버지가 당신을 위해 모든 것을
내어놓으셔서 가진 것이 없이 되었기 때문에 정말 가진 것이 없는
우리 인간들을 당신 아버지께 보답해 드리기 위한 대상으로
보셨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께 당신 성령인 피를 되돌려드리는 대신
인간을 위해 피를 흘리셨습니다. 그것이 곧 아버지께 당신 성령을
되돌려드리는 일이었습니다. 삼위일체 사랑을 받으면 그 주신 분께
보답하기 위해 가장 보잘 것 없는 이에게 그 받은 사랑을 내어주게
되는데 이것이 삼위일체 증후군입니다. 가장 보잘 것 없는 이들이
그리스도처럼 보이지 않는다면 그래서 혼자만 잘 먹고 잘 산다면 그
사람은 삼위일체 사랑의 병에 걸린 것이 아닙니다.
뽀빠이 이상용 씨가 진행했던 방송은 우정의 무대. 그리고 시간은
흘러 하이라이트인 그리운 어머니 시간이 되면
“엄마가 보고플 때....” 하는 음악이 흘러나옵니다. 무대의 중앙에서
뽀빠이 아저씨가 무대 뒤의 어머니와 이야기를 나눕니다.
“어머니 어디에서 오셨어요.”
“예, 저는 아들 보러 강원도에서 왔어요.”
특유의 이북발음이 섞인 강원도 사투리가 구수합니다.
뽀빠이 아저씨는 연병장의 장병들을 향해 큰 소리로 말합니다.
“저 무대 뒤의 분이 자신의 어머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무대 위로
빨리 올라오세요.” 그러자 수많은 장병들이 무대 위로 뛰어오릅니다.
그러면 한쪽으로 물러있던 뽀빠이 아저씨는 장병들의 곁으로 와서
이야기를 나눕니다.
“뒤에 있는 분이 어머니 맞습니까?”
“예! 저의 어머니가 확실합니다. 어찌 자식이 어머님의 음성을 듣고
모르겠습니까? 저의 어머님이 확실합니다.”
“고향이 어디예요?”
“예, 저는 서울입니다.”
“예끼, 이 사람아! 어머니는 강원도에서 오셨는데, 떽!”
그러며 내려 보냅니다. 그 장병은 쭈뼛쭈뼛하며 무대 아래로 내려서고
장병들의 웃음소리가 들립니다.
여러 사람이 다 이런 식입니다. 뽀빠이 아저씨는 “아이고 이거 큰일
났네, 어머니는 한분인데 서로 자식이라니...”
뽀빠이 아저씨는 가슴의 이름을 보고 “그래 김 일병도 뒤의 분이
어머니가 확실합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김 일병이 대답합니다.
“아닙니다. 뒤에 계신 분은 저의 어머니가 확실히 아니십니다.”
“아닌데 왜 올라왔어요?”
“저의 어머니는 제가 군에 오기 일주일전에 돌아가셨습니다. 저는
하늘나라에 계신 저희 어머님께 드릴 말씀이 있어서 올라왔습니다.
어머님, 이 막내아들은 형님들이 잘 보살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막내 군 생활...(눈물) 열심히 하고 있으니 아무 걱정 마시고 편안히
계십시오. 충성!”
그러자 약속한 듯이 모든 장병들이 모두 일어나 함께 하늘을 향하여
인사를 합니다.
“충성!”
이것이 삼위일체 증후군입니다. 어머니에게 사랑을 받았다면 모든
어머니가 다 내 어머니가 됩니다. 이 병에 걸리면 심각해집니다.
어머니가 자신을 위해 그렇게 손발이 부르트셨던 것처럼 나는 또
다른 어머니들을 위해 손발이 부르트기 때문입니다.
성녀 마더 데레사는 역에 누워있던 한 걸인이 “목마르다!”라고 한
신음소리를 듣고 가난한 이들을 모두 예수님으로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삼위일체는 아드님께서 아버지와 성령을 통하여 한 몸을
이루어 당신도 하느님이 되시는 신비입니다. 이 신비가 성령을
통하여 우리가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룸으로써 완성됩니다. 그런데
아드님은 아버지께 대한 사랑을 우리를 당신 아버지처럼
대하심으로써 삼위일체를 이루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처럼 대함으로써 그분과 삼위일체를 이루게 됩니다.
삼위일체가 구원이라면 그리스도와의 삼위일체를 위해 이웃을
그리스도처럼 사랑하는 방법 외에는 구원의 길이 없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이 삼위일체 증후군으로 살아간다면 그 곳이 곧 하늘나라가
될 것입니다.
- 수원 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 [수도회] 내밀(內密)하며 지고(地高)한 사랑의 신비, 삼위일체
2018년 나해 5월27일 삼위 일체 대축일
내밀(內密)하며 지고(地高)한 사랑의 신비, 삼위일체
수도회 입회전 교리교사로 활동할 때나, 젊은 수사 시절, 아이들에게
삼위일체 교리를 가르칠 때, 모르면 모른다고 솔직히 이야기했었으면
좋았을텐데...나름 쉽게 설명해보겠다고 머리를 짜낸 비유들이 나중에
확인해보니, 오류요 이단이라는 것을 알고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모릅니다.
삼위일체 교리는 가톨릭 교리의 가장 기본이요 기초, 핵심이요
본질인 교리이지만, 너무 심오하기에 가장 모호하고 애매한
교리이기도 합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234항에서는 삼위일체
교리에 대해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지극히 거룩한 삼위일체의 신비는 바로 그리스도인의 믿음과 삶의
핵심적인 신비이다. 이는 모든 신앙의 신비의 원천이며, 다른 신비를
비추는 빛이다. 이는 ‘신앙 진리들의 서열’에서 가장 근본적으로
본질적인 교리이다.”
많은 교리 교사들과 사목자들께서 올해도 삼위일체 교리를 설명하기
위해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시겠지요. 설명을 하고 있지만, 나도
확신이 가지 않는, 뭔가 가르치고 있지만, 나도 알쏭달쏭한...
언젠가 특별한 한 이미지를 봤습니다. 시각장애우 여러 명이 큰
코끼리의 신체부위 여기 저기를 만지면서, 각자 설명을 하고 있는
이미지였습니다. 코를 만지고 있는 분은 굵은 고무 호스라고
말합니다. 꼬리를 잡고 있는 분은 로프라고 말합니다. 다리를 만지고
있는 분은 기둥이라고 말합니다.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우리의 가르침도 그럴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제한된 우리 인간의 사고와 지혜로 크고 오묘하신 하느님의 실체를
설명하기란 그만큼 어려운 것입니다.
다행스런 사실 한 가지, 우리 뿐만 아니라 당대 내놓으라 하던
교부들과 대신학자들 역시 삼위일체 교리 앞에서 고민과 갈등을
거듭했다는 것입니다. 각기 독창적인 방식으로 이 교리를 설명하려고
했지만, 그 누구도 완벽한 설명을 하지 못했습니다.
삼위일체 교리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어떤 분들은 큰 과오를 저질렀고,
어떤 분들은 경고를 받았으며, 어떤 분들은 이단으로 낙인 찍히기도
했습니다. 그로 인해 교회 분열의 단초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만큼 이
교리에 대한 설명은 어려운 것입니다.
한 가지 우리가 유념할 것은 삼위일체 교리와 관련된 그 어떤
적절하다고 여겨지는 비유라 할지라도, 근본적인 한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무한하신 신비 앞에 인간의
무지와 한계를 솔직히 인정하는 겸손의 덕이 삼위일체의 신비 앞에
필요한 것입니다.
그 숱한 갈등과 시련, 고민과 기도 끝에 정립된 삼위일체 교리의
핵심은 오늘 미사 중 ‘감사송’ 안에 잘 요약되어 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아드님과 성령과 함께 한 하느님이시며 한
주님이시나, 한 위격이 아니라 한 본체로 삼위일체 하느님이시옵니다.
주님의 계시로 저희가 믿는 주님의 영광은, 아드님께도 성령께도
다름이 없나이다. 그러므로 위격으로는 각각이시요 본성으로는 한
분이시며, 위엄으로는 같으심을 흠숭하오며, 영원하신 참하느님을
믿어 고백하나이다.”
삼위일체 교리에 대해 너무나 잘 설명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직도 뭔가 알쏭달쏭하며 감이 잡히지 않으실 것입니다.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다행스럽게도 삼위일체 교리와 관련된 이런 우리의 답답함을 일거에
해결해줄 명쾌한 가이드 북이 있습니다. 존경하는 박준양 신부님께서
쓰신 소책자 ‘삼위일체론, 그 사랑의 신비에 관하여’(생활성서사)
입니다.
볼륨이 작은 소책자이지만, 삼위일체 교리 전반을 아주 쉬운 언어로,
동시에 명쾌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한권이면 삼위일체대축일
몇년을 편안히 넘기실수 있을 것입니다.
신부님께서는 삼위일체 교리를 신비적 차원에서 접근해야 함을
강조하십니다. 특히 제 마음에 와닿은 부분들이 있었습니다.
“결국 삼위일체 신비는 인간에게 당신 자신을 건네주시는 하느님의
지극한 사랑의 신비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미천한 인간에게
당신에 관한 가장 내밀(內密)하며 지고(地高)한 신비인 삼위일체를
드러내시는 것은 바로 인간에 대한 지극한 사랑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가 그 신비를 온전히 깨닫지는 못하지만, 사랑의 관계
안에서 삼위일체 신비를 몸으로 살아 나갈 수는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듯이 우리도 서로 사랑하기 위하여 노력할 때,
성삼이신 하느님께서 우리의 마음 안에 함께 하시어 내주(內住)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를 우리는 ‘삼위일체적 삶’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특별히 어느 한 위격에게 드리는 기도가 더 효과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저 지금 내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우리 삶의 자리와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더 마음이 이끌리는 대로 기도드리면 됩니다.
한 위격만을 명시적으로 언급하며 바치는 기도라 할지라도 이는 곧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 바치는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SDB)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수도회] 아버지와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어라.
(마태 28, 19) 한상우 바오로 신부|오늘의 강론 묵상
2018년 나해 5월27일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
아버지와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어라.(마태 28, 19)
하느님의 무한한 은총에 감사드리는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우리의 마음과 생각과 의지를 움직이시는 분은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구약과 신약에서
인격적인 하느님으로 드러나십니다.
대화하시고 부르시고 머물게 하십니다.
이와같이 하느님의 은총은 당신자신을
내어주시는 사랑의 방식으로 한결같이 드러납니다.
내어주시는 역동적인 사랑으로 통합을 이루십니다.
삼위일체 하느님 안에서 삼위일체의 여정을
걸어가고 있는 우리의 여정입니다.
삼위일체는 하느님 현존의 방식입니다.
사랑의 현존방식이 바로 삼위일체 현존의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삼위일체는 또한 관계맺음의 방식입니다.
관계맺음을 통해 하느님 안에서 우리가 누군지를 알게됩니다.
우리가 누군지를 알게될 때 영원한 사랑인 삼위일체적 삶에
더욱 뜨겁게 더 깊이 참여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현존과 공존 연합을 통해 삼위일체적 삶은 더욱 풍요로울 것입니다.
하느님의 정체성은 삼위일체의 조건없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또한 창조와 은총 구원의 이 여정에 적극적으로 동참합시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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