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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07 묵상글 ( 부활 팔일 축제 화요일. - 부활 시기의 회개. 등 )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강론글 : 아직 / 07:27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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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07. 부활 팔일 축제 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04.07 05:20
- 부활 시기의 회개
오늘의 독서 사도행전에서 사람들이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마음이 꿰찔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묻자 “회개하십시오.”라는 말을 듣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이 부활 시기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어야 하고,
부활 시기에 해야 할 회개는 어떤 것인지 물어야 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성탄 시기의 회개가 아직 태어나지 않으신 주님이
내 안에 처음 또는 새롭게 태어나시게 되는 것이라면
부활 시기의 회개는 내 안에서 돌아가셨던 주님이 다시 살아나시어
잃었던 생기와 활기를 내 안에서 되찾는 것일 겁니다.
한 번 이렇게 생각해 보면 좋을 것입니다.
지금 다른 나무들은 꽃들을 활짝 피웠는데
나만 꽃을 피우고 있지 못하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우리도 우리 안에 생기와 활기가 없다면
왜 나만 꽃을 피우지 못할까? 성찰과 반성을 하고,
어찌해야 꽃 피울 수 있는지 방법을 찾아야겠지요.
우리는 이것을 사도들과 막달라 마리아의 차이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사도들도 막달라 마리아도 주님께 똑같이 사랑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부활하신 다음 막달라 마리아만 나타나셨는데
그것이 주님께서 편애하신 것이거나 차등을 두신 것이겠습니까?
주님은 그런 분이 아니시라고 우리가 믿는다면,
마리아는 주님을 만나고파 찾아 헤맨 끝에 만나게 된 것에 비해
사도들은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만나지 못한 것임을 알 수 있지요.
요한복음에서 막달라 마리아와 베드로와 요한 두 사도 모두 빈 무덤을 발견했지만
막달라 마리아는 찾아 헤맨 반면 사도들은 빈 무덤만 보고 찾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사도들처럼 주님께서 안 계신 빈 무덤인데도 찾지 않는 사람일 수 있고,
주님께서 안 계신 빈 무덤인데도 별 문제의식 없이 사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 부활 시기에 어떻게 해야 하고, 어떻게 회개해야 합니까?
주님께서 안 계셔 활기 없음을 깨닫고 주님을 찾아 활기를 되찾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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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07. 부활 팔일 축제 화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우리가 모두 부활의 은총 안에서 되살아나고 있습니다.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하느님께서 일으키시는 부활의 역사 안에 우리가 들어서고 있습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부활 이야기
우리가 모두 부활의 은총 안에서 되살아나고 있습니다.
2026년 4월 6일 월요일
CAC의 운영진 중 하나인 마크 롱허스트(Mark Longhurst)는 예수님의 부활을 드러낸 부활절 이야기를 전하며, 그 안에 담긴 우리 자신의 부활의 기쁜 소식을 증언합니다:
부활절은 매년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리스도의 되살아나심을 기념하는 축제이지만, 이 '되살아나심'은 단순히 한 분의 죽음을 이기신 신적 행위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더욱 넓고 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격으로서 부활하시며, 하느님의 부활 운동을 시작하시어 모든 사람과 만물을 그 안으로 이끌어 주십니다.
모든 것은 한 몸에서, 아니 오히려 그 몸의 부재(不在)에서 시작됩니다. 마리아 막달레나와 다른 여성들은 해 뜨기 전 예수님의 몸에 향료를 바르기 위해 무덤에 갑니다(루카 24,1). 이미 굴려진 돌은 그들이 쉽게 들어갈 수 있도록 열려 있었지만, 그 몸은 보이지 않습니다. 두 사람, 곧 천사들이 하늘의 번개처럼 눈부신 옷을 입고 그들 곁에 서서 분명한 사실을 일깨워 줍니다. ‘그분은 여기 계시지 않는다’는 놀라운 선언과 함께, 더 충격적인 말씀을 전합니다. "그분은 되살아나셨다."(루카 24,5).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부활절 아침에 먼저 여성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루카 복음서]에 따르면 곧 이어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24,13–35)와 예루살렘에 모여 있던 제자들(24,36–49)에게도 모습을 드러내시지만, 가장 먼저 빈 무덤을 보고 믿은 이들은 여성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렬한 제자인 마리아 막달레나,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 헤로데 궁정 관리의 아내로 루카 복음 8장에서 언급되는 요안나, 그리고 무덤에 함께 있던 다른 여성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24,10). 어쩌면 여성들이 예수님과 함께 부활하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빈 무덤을 처음 목격한 이들이며, 새로운 희망의 메시지를 처음 선포한 이들이고, 사랑이 죽음을 이기는 새 세상을 처음 엿본 이들이었습니다….
빈 무덤의 의미는 단순히 "무슨 일이 있었는가"를 따지는 목격자의 조사로는 드러나지 않습니다. 오직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지닌 이들만이 부활을 보고, 길 없는 곳에서 새로운 길을 꿈꿀 수 있습니다. 남자들은 이러한 의식을 갖추지 못했기에—루카 복음은 "그들은 믿지 않았다."라고 전합니다(24,10–11).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상처로 여전히 아픈 마음을 깨우며 무덤으로 달려갑니다. 어쩌면 그는 마지막으로 자신의 충실함을 드러내고자 했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절박한 갈망 속에서, 베드로 역시 부활의 은총 안에서 되살아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은 단지 시작일 뿐이며, 바오로 사도가 말한 "부활의 첫 열매"입니다(1코린 15,20).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부활 운동이 이미 시작되었고, 그 은총은 모든 사람과 만물을 휘감아 안아 올립니다. 죽음과 부활은 현실의 중심에 놓인 본질적 진리이자 패턴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을 말한다는 것은 곧 우주의 중심에서 죽음과 생명이 함께 진화하는 심오한 역설에 다가서는 것입니다. 마리아와 요안나, 그리고 다른 여성들이 부활하고 있고, 베드로가 부활하고 있으며, 저도 부활하고, 여러분도 부활하고, 우주 자체가 부활의 은총 안에서 되살아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공동체 이야기
어린 시절 저는 부활절 예배에 단 한 번도 빠지지 않았습니다. 나이가 들어서는 몇 차례 새벽 해돋이 예배에도 참여했습니다. 저는 하늘이 부활의 아침을 맞아 분홍빛으로 물드는 광경을 바라볼 때마다, 제 마음은 희망으로 가득 차고 영혼은 기쁨으로 충만했다는 사실을 기억합니다.
첫 부활절 아침을 상상하는 일은 언제나 제 마음을 희망으로 가득 채우고, 제 영혼을 기쁨으로 충만하게 합니다.
첫 부활절 아침에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은 제 삶 속에서도 수없이 반복되어 나타났고, 그 사랑은 지금도 제 눈에 눈물을 불러옵니다.
오늘 아침, 병상에 누워 창밖을 바라보며 저는 동쪽 하늘이 그분의 해(Son)-돋이로 물들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Ed W.
References
Mark Longhurst, The Holy Ordinary: A Way to God (Monkfish Book Publishing, 2024), 64–65, 67.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David Becker, untitled (detail), 2022, photo,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봄꽃이 황금빛 햇살 속으로 피어오르듯, 그리스도께서는 지금도 우리 세상 안에서 끊임없이 펼쳐지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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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영성 묵상글
진정한 믿음 혹은 신앙은 오히려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믿음을 의식하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요한 복음서에서 자주 쓰이는 문학적 기교는 "점진적 인식" 혹은 "오해로부터의 깨달음"입니다. 예수님께서 니코데모와 나누신 대화(3장),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4장), 그리고 부활 후 티베리아스 호수에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이야기(21장)에서도 이런 전개를 볼 수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에서도 마리아는 처음에 예수님을 동산지기로 착각합니다.
그러나 그분께서 막달레나의 이름을 부르시는 순간, 완전한 인식이 이루어집니다. 이는 성경 전체에 깊은 울림을 줍니다.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너를 이름까지도 안다."(탈출 33,17). 예수님께서도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들의 목자이다… 양들은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그리고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요한 10,2-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신앙이 인간 존재의 깊이에 닿지 못한다면 그것은 신앙이 아니라 단순한 이론일 뿐입니다. 신학조차도 신앙 자체는 아닙니다. 어떤 이는 종교에 큰 관심을 가지면서도 실제로는 신앙이 없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종교 지식은 많지 않아도 깊은 신앙을 지닐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있어 진정한 믿음 혹은 신앙은 오히려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믿음을 의식하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시편에는 이런 아름다운 구절이 있습니다. 시편 56장 9절의 말씀입니다. "주님, 제 눈물을 당신 부대에 담으소서!"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 얼마나 친밀하게 한 사람과 관계하시며, 얼마나 깊은 사랑으로 가까이 계시는지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은…
당신 백성이 고통과 슬픔 속에 있을 때 특별히 가까이 계셔 주시는 분이십니다.
당신 자녀가 환난과 시련을 겪을 때 더욱 친히 곁에 계셔 주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복음은 바로 이 하느님의 다정한 사랑과 따뜻한 배려를 증언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막달라 마리아에게 보여주신 그 사랑이고 또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시시각각으로 보여주시는 사랑입니다.
우리는 아직 주님의 무덤가에 머물러 있는지도 모릅니다. 주님을 깊이 사랑했던 마리아 막달레나가 여전히 무덤 곁을 떠나지 못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주님의 사랑을 크게 체험한 영혼이었습니다. 그 사랑으로 삶이 변모되었기에, 이제 그분이 더 이상 곁에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의 마음은 도저히 그분이 사라졌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기다리고 또 기다렸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언제나 찾습니다. 사랑은 장벽을 허물고, 장애물을 넘어, 모든 경계를 깨뜨리며 나아갑니다.
마침내 그는 주님을 만나게 되지만, 눈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막달레나를 알아보셨습니다. 주님은 이 여인의 육체적 고통만이 아니라, 마음의 아픔과 영혼의 갈망까지도 헤아리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물으십니다. "여인아, 왜 우느냐?" (요한 20,13)
마리아는 사랑하는 주님을 잃은 슬픔에 끊임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영혼의 연인을 잃은 아픔에 눈물을 쏟았습니다.
그러나 그 눈물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그 눈물은 허공에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 그 눈물을 하나하나 귀하게 담아 두셨습니다. 병에, 술부대에, 주님의 손길 안에…
그리고 그 눈물은 보상받았습니다. 주님께서 그녀의 이름을 불러 주셨습니다. "마리아야!"(요한 20,16) 하고요.
그 달콤한 음성이 마리아의 이름을 불러 주는 순간, 마리아의 모든 눈물이 씻겨 나갔습니다. 눈물이 미소로 바뀌고, 슬픔이 위로로 변하며, 깨어진 마음이 큰 기쁨으로 가득 찼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도 같은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서 많은 눈물을 흘릴 수 있습니다. 개인적인 위기, 가정의 아픔, 가까운 이들의 불행과 재난… 이 모든 것이 우리를 울게 합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눈물도 있지만, 대부분은 마음 깊은 곳에서 아무도 모르게 흘러내립니다.
그러나 우리를 가장 사랑하시는 주님께서는 그 모든 눈물을 귀하게 간직하십니다. 우리의 눈물 하나하나가 주님께는 소중하다는 말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처럼, 눈물 속에서도 주님을 향한 충실함과 사랑을 잃지 맙시다. 그 믿음은 반드시 보상을 받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이름을 불러 주시는 그날, 우리의 모든 눈물이 기쁨으로 바뀔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오 복음은 "그 여자들은 두려워하면서도 크게 기뻐하며 서둘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소식을 전하러 달려갔다."고 전합니다(28,8). 무덤은 본래 깊은 슬픔이나 체념 속에서 떠나는 곳이지, 기쁨으로 떠나는 곳이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에는 "종결"이 없었습니다. 과거가 닫히고 봉인된 것이 아니라, 열린 무덤을 통해 그 과거가 현재로 흘러들어옵니다. 과거는 더 이상 과거가 아니라, 영원한 현재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곧 시간의 파괴입니다. "그리스도는 어제도 오늘도, 영원히 같은 분이십니다."(히브 13,8).
부활하신 주님께서 여러분 모두에게 평화와 기쁨을 가득히 내려 주시길 빕니다.
다시 한번 주님의 부활을 축하드립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의 부활도 축하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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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07. 부활 팔일 축제 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어제 <복음>에 이어, 오늘 <복음>은 부활 예수님께 대한 막달레나 마리아의 사랑이야기 2탄입니다. 사랑의 장소는 ‘동산’입니다. 하느님의 계획이 처음 준비되고 이루어진 곳도 ‘동산’(에덴)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동산’에서 사랑으로 당신 모습으로 사람을 만드셨듯이, 또 다시 ‘동산’에서 사랑으로 부활의 새로운 공동체를 만드십니다. 그렇게 ‘에덴동산’을 회복시키십니다. 그리고 소명을 주십니다.
두 제자는 이미 돌아갔건만, 마리아 막달레나는 차마 무덤을 떠나지 못하고 “울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울다”의 원어의 뜻은 감정을 억제하지 못해 큰소리로 통곡하여 우는 것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곧 사랑이 그만큼 컸던 것입니다. 그 주채할 수 없는 사랑으로 무덤을 들여다봅니다.
“한 천사는 예수님의 시신이 놓였던 자리 머리맡에,
다른 천사는 발치에 있었습니다.”(요한 20,12)
성 그레고리우스는 천사가 있었던 “머리맡”은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요한 1,1)는 사실을, “발치”는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14)는 사실을 상징한다고 설명합니다. 곧 부활하시어 우리 가운데 살아계심을 말해줍니다.
그러나 뒤로 돌아선 마리아는 예수님이 서 계신 것을 보고도 “그분이 예수님인 줄은 몰랐습니다.”(요한 20,14). 또한 그녀는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요한 20,15)라는 음성을 듣고도 그분이 누구신지를 몰랐습니다. 사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들도 그랬고(루카 24,13-35), 티베리아스 호숫가에서의 일곱 제자들도 그랬습니다(요한 21,4).
그렇습니다. 오늘도 우리 주님은 ‘낯선 이’의 모습으로 오십니다. 곧 부활 체험은 ‘낯선 이’ 안에서 그분을 만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낯선 이’의 요청 안에서 그분의 음성을 들을 줄 알아야 할 일입니다. 그분을 알아보는 ‘눈이 열리어’(루카 24,31)야 할 일입니다. 그분이 나를 이집트에서 불러내듯, 동굴에서 불러내듯 나를 불러내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요한 20,17). 이는 당신이 더 이상 육신의 손으로 붙들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손으로가 아닌 믿음으로 만지라는 말씀입니다. 곧 자신이 아는 예수님을 떠나보내고, 자신이 모르는 낮선 예수님을 받아들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손보다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만지는 것이 더 좋은 일’이라고 하면서, ‘우리는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붙든다.’고 말합니다.
결국, ‘부활’은 다름 아닌 사랑의 승리이며, 동시에 사랑이 끝나지 않았음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러난 아버지의 사랑으로부터 결코 그 무엇도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는 일입니다. 따라서 부활을 선포하고 증거 하는 일은 마리아 막달레나처럼, ‘사랑하는 일을 멈추지 않는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요한 20,17)
주님!
제 사랑이 아니라
당신 사랑에 붙들리게 하소서.
보이는 당신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당신께 붙들리게 하소서.
모든 것을 통해, 사랑이신 당신께 붙들리게 하소서.
온통 사로잡히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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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07. 부활 팔일 축제 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부활의 기쁨이 여러분의 가정과 일상 안에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아침 산책을 하다 보면 자주 눈에 들어오는 풍경이 있습니다. 맑은 목소리로 노래하는 새입니다. 새는 날개가 있기에 하늘을 납니다. 날개가 있는데도 땅 위를 계속 걸어 다닌다면 어딘가 다쳤거나 나는 법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땅 위에만 머무는 새는 위험에 쉽게 노출됩니다. 또 다람쥐도 봅니다. 다람쥐는 날 수는 없지만 나무를 자유롭게 오릅니다. 나무 위를 곡예사처럼 달려갑니다. 하느님께서는 새에게는 날개를, 다람쥐에게는 발톱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사람에게는 ‘신앙’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날지 못하고 오르지 못하지만, 하늘을 나는 새를 보며 하느님을 찬양하고 나무를 오르는 다람쥐를 보며 하느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에게 주어진 영적 날개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하면 모든 것이 기쁨이 됩니다.
요즘 인공지능, AI에 관한 이야기를 자주 듣습니다. 정부에서도 ‘AI 정부’를 준비한다고 합니다. 전문가들은 공통으로 한 가지 원칙을 말합니다. 바로 ‘FAIR’입니다. 찾을 수 있어야 하고(Findable), 접근할 수 있어야 하며(Accessible), 서로 연결되고 소통할 수 있어야 하고(Interoperable), 다시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Reusable)는 것입니다. 아무리 데이터가 많고 기술이 뛰어나도, 그것이 투명하고 공정하게 열려 있지 않으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 말을 들으면서 저는 신앙생활을 떠올렸습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았습니다. 어떤 분은 수도자가 되었고 어떤 분은 사제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세례를 받았다고 자동으로 성숙한 신앙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제가 되었다고 저절로 거룩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신앙에도 ‘영적 FAIR’가 필요합니다.
첫째, 내 신앙은 하느님 앞에서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나는 지금 어떤 상태인지 스스로 알고 주님 앞에 설 수 있어야 합니다.
둘째, 은총에 접근할 수 있어야 합니다. 기도와 성사를 통해 언제든지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셋째, 하느님과 이웃과 연결되어 있어야 합니다. 신앙은 혼자만의 체험이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살아 움직입니다.
넷째, 넘어져도 다시 시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 신앙입니다.
이냐시오 로욜라 성인은 이를 위해 ‘의식성찰’을 강조하였습니다. 하루를 마치며 하느님 앞에 서는 시간입니다. 단순히 잘못을 찾는 시간이 아니라 하느님과 다시 연결되는 시간입니다. 의식성찰은 다섯 단계로 이루어집니다.
첫째는 감사입니다. “주님, 오늘도 저를 살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부활 신앙의 출발점은 감사입니다. 무덤이 비어 있다는 사실은 우리 삶 전체를 감사로 바꾸어 놓습니다. 감사하지 않는 신앙은 쉽게 불평으로 변합니다.
둘째는 하루의 점검입니다. 오늘 나는 무엇을 생각했고 무엇을 말했으며 누구를 만났는지 돌아보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무슨 생각 하고 있느냐?”라고 물으셨듯이, 주님은 오늘 우리의 마음을 묻고 계십니다.
셋째는 잘못을 성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넘어지고 상처를 주며 미워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마음은 점점 닫혀 버립니다. 겸손하게 인정하는 순간 은총이 스며듭니다.
넷째는 용서를 청하고 용서하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배신했던 제자들에게 첫마디로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고 하셨습니다. 용서가 부활의 첫 열매였습니다. 우리가 용서하지 못하면 여전히 성금요일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용서할 때 우리는 비로소 부활의 아침으로 나아갑니다.
다섯째는 기도입니다. “주님, 내일은 더 잘 살게 해 주십시오.” 의식성찰은 과거를 정리하는 시간이 아니라 미래를 여는 시간입니다. 부활은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오늘을 새롭게 시작하는 힘입니다.
저 역시 사제로 살아가면서 이 의식성찰이 얼마나 중요한지 절실히 느낍니다. 바쁜 일정 속에서 미사를 드리고 회의를 하고 사람들을 만나지만 정작 제 마음을 들여다보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겉으로는 사목이 돌아가지만 제 안은 메말라 있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하루를 마치며 조용히 주님 앞에 서면 이런 질문이 떠오릅니다. “나는 오늘 얼마나 부활을 살았는가?” 부활 팔일 축제는 단지 여덟 날의 기쁨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 전체가 부활이 되어야 합니다. 새에게 날개가 있는데도 날지 않는다면 안타까운 일입니다. 우리에게 신앙이 있는데도 감사하지 않고 용서하지 않고 성찰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여전히 성금요일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우리를 갈릴래아, 곧 우리의 일상으로 부르십니다. 거창한 일이 아니라 오늘 하루를 하느님께 투명하게 열어 놓는 삶으로 초대하십니다. 오늘 밤 하루를 마치며 이렇게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주님, 오늘 제 안에 부활이 있었습니까? 제가 감사했고 용서했고 사랑했습니까? 내일은 더 부활답게 살게 해 주십시오.” 부활은 먼 미래의 약속이 아니라 오늘 밤 나의 성찰 안에서 시작됩니다. 하루를 하느님께 열어 놓을 때 우리는 진정으로 부활을 사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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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07. 부활 팔일 축제 화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또 다른 현존 방식으로...
충분히 예방할 수 있었지만, 우리의 안일함과 나태함으로 인해 벌어진 초대형 참사가 참 많았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실종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생사의 향방을 알수 없어 실종 처리되고...
희생자 가족들 가운데서 가장 혹독한 고통을 겪는 분들이 있으니, 사랑하는 사람의 시신이 처참하게 훼손되거나 아예 찾지도 못하는 경우입니다. 어떤 분들의 간절한 바람은 오직 한가지 시신이라도 돌아왔으면! 입니다. 죽었지만 마지막으로 얼굴이라도 한번 봤으면, 그렇게만 된다면 몸을 흔들며 대성통곡이라도 할 텐데, 붙들고 울부짖기라도 할텐데...
그만큼 남아있는 사람들에게는 시신이라는 것이 정말 중요합니다. 추모하고 애도할 수 있는 공간이 그리도 소중한 것입니다. 그런데 신새벽에 예수님의 무덤으로 달려간 마리아 막달레나는 기절초풍할 일을 겪었습니다. 스승님의 시신이 사라진 것입니다. 누군가가 탈취해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억장이 무너지고 가슴이 내려앉은 마리아 막달레나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울고불고 난리가 났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을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오게 해주신 주님이었습니다. 죽은 목숨이나 다를바 없던 그녀에게 유일하게 손 내밀어 주셨던 분, 내 목숨보다 더 소중한 분의 시신이 사라졌다고 생각하니, 하늘이 무너져내리는 느낌이었을 것입니다.
은혜롭게도 세상 다 끝난 심정이던 마리아 막달레나 눈앞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이윽고 하시는 말씀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너무나 놀랍고도 당혹스러웠지만 다른 한편으로 뛸듯이 기뻤고 감사했던 마리아 막달레나는 ‘라뿌니!’ 하고 외치면서 예수님 발 앞에 무릎을 꿇고 그분의 두 발을 꼭 붙들었습니다. 더 이상 주님을 놓치지 않겠다는 표현이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던지신 말씀이 참으로 은혜롭습니다.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이제 종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우리 사이에 현존하시고 우리를 동반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또 다른 현존 방식으로 우리 각자의 내면 깊숙이, 우리 영혼의 성안로 들어오시겠다는 표현입니다. 때로 미풍 같은, 때로 태풍 같은 성령의 현존으로, 때로 우리를 영생과 구원으로 인도하는 성체 성혈의 형상 안에 영원히 살아계시겠다는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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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07. 부활 팔일 축제 화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요한 20,11–18
막달라 마리아는 무덤 밖에서 울고 있습니다.
무덤을 들여다보아도,
천사들의 말에도,
그녀의 슬픔은 쉽게 풀리지 않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곁에 서 계시지만
마리아는 그분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물으십니다.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마리아는 주님을 동산지기로 여기며 말합니다.
“당신이 그분을 옮겨 갔다면 어디에 모셨는지 알려 주십시오.”
그러나 예수님이 단 한 번 그녀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마리아!”
그 순간 마리아는 알아보고 외칩니다.
“라뿌니!”
부활은 논증으로 증명된 것이 아니라
이름을 불러 주시는 만남으로 열립니다.
대 바실리오는
성령의 역사는 대개
사람을 압도하는 소란이 아니라
한 존재의 내면을 정확히 건드리는
부르심으로 시작된다고 보게 합니다.
마리아가 주님을 알아본 것은
무덤의 정보 때문이 아니라
“나를 아시는 분”의 음성 때문입니다.
성령은 그 음성을
우리 안에서 다시 듣게 하십니다.
오늘 1주(성실/온유/절제)의 복음은
아주 구체적으로 우리를 가르칩니다.
• 성실: 눈물이 마르지 않아도 무덤 곁을 떠나지 않는 마음
• 온유: 상실 속에서도 폭력으로 반응하지 않고 찾는 마음
• 절제: ‘당장 확인’의 조급함 대신, 이름을 부르시는 순간을 기다리는 마음
예수님은 마리아에게 말씀하십니다.
“가서 내 형제들에게 전하여라.”
부활의 만남은
위로에서 끝나지 않고 파견으로 이어집니다.
오늘 주님은 우리에게도 묻습니다.
“너는 누구를 찾느냐?”
그리고 성령 안에서
우리 이름을 부르십니다.
그 부르심을 듣는 순간,
슬픔은 사명으로 바뀝니다.
부활하신 주님,
제가 상실 속에서도 당신을 찾는 성실을 잃지 않게 하소서.
제 눈물이 남아 있을 때에도
당신이 제 이름을 부르심을 믿게 하시고,
온유와 절제로
부활의 증인으로 파견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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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07. 부활 팔일 축제 화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강만연님
■ 교회의 성음악이 전례를 어떻게 풍성하게 해 주는가?
이번에는 성목요일 미사부터 성야미사까지 옆 본당에서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가려면 갈 수 있었지만 제가 영세를 받은 본당에 갈 수가 없었습니다. 마음은 정말 가고 싶었습니다. 여러 가지가 있지만 전례가 주는 은혜로움은 정말 말로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부활성야미사 때 옆 본당 주임신부님이 마지막 강복 전에 공지를 하시는 겁니다. 보통 보면 대축일에는 전례단이나 복사 전례 꽃꽃이하신 분들 다 호명하시며 치하를 해 주시지 않습니까? 성가대를 향해 "한강 이남에서 최고의 성가대"라고 하시던데 저는 속으로 신부님께" 동의 못 합니다"라고만 살짝 생각만 하고 말았습니다. 그냥 웃자고 하는 표현입니다. 어느 본당 신부님이 못해도 못한다고 할 신부님이 계시겠습니까? 누구나 자기 본당 전례가 우수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제가 영세 받은 본당의 성가대 팀은 정말 수준이 다릅니다. 사실 지금 지휘를 맡고 계신 지휘자님은 원래 소속은 제가 영세를 받은 본당이지만 제가 영세를 받았을 때도 그렇고 그 이후에도 주일에는 지휘를 옆 본당에서 하셨던 자매님이십니다. 그런 후에 몇 년 전에 본당으로 오신 것입니다.
처음 영세를 받았을 때 지휘자가 있었습니다. 처음엔 잘 몰랐는데 우연히 알게 됐습니다. 어떤 분의 혼배미사가 본당에 있어서 알게 된 사실입니다. 지금 기억으로써는 그렇습니다. 지휘자는 형제님인데 제 고등학교 선배님이었습니다. 예전에 경력을 봤는데 외국에서 성악을 유학했을 겁니다. 지금은 마산교구합창단 이런 걸 관리하고 있습니다. 교구에서 대대적인 행사를 하면 항상 있습니다. 아마 제 추측으로는 그 선배님이 계셔서 본당의 기본적인 틀을 잘 다져놓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성야 때는 교적을 옮긴 본당으로 가려고 했는데 그 본당에서 하는 전례도 보면 영 아니었습니다. 제가 영세를 받은 본당과 비교하면 말입니다. 저는 우열을 따지는 게 아닙니다. 이게 또 인원도 무시하지 못합니다. 옆 본당에는 예전에 제가 영세를 받기 4년 전에 이 본당에서 제가 교리를 받은 적도 있었습니다. 그럼 지금으로부터 19년 전 정도가 되겠습니다. 그때 교리를 받을 때 패션오브크라이스트를 이 본당에서 처음 봤습니다. 그때는 성전이 복층 구조로 돼 있었습니다. 아마 그때 그 구조라면 좀 더 다를 수도 있을 겁니다.
근데 지금은 리모델링을 해서 성전 뒤에 있고 이게 좀 낮은 위치에도 있는가 하면 원래 본당 규모 자체가 좀 작다 보니 건축적으로도 소리가 퍼져나가는 게 좀 맞지 않을 것 같습니다. 예전에도 제가 개신교 거제에 있는 교회를 언급한 적이 있었습니다. 고등학교 선배가 목사인데 그 선배랑 한번 간 적이 있었습니다. 애들 데리고 연수를 갔는데 그 교회는 서울 대형 교회랑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을 정도로 방송 시설은 거의 방송국 수준이라 음향을 고려해 건물을 설계했다고 들었습니다. 개신교는 전례라는 개념이 없는데도 그들은 말씀 위주이기 때문에 음향을 엄청 고려하는 게 사실입니다. 만약 크게 신축을 한다면 말입니다.
우리는 제가 전국 성당을 다 돌아다닌 건 아닌데 대체적으로 보면 음향은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일단 스피커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제가 한번 명동 성당 음향에 대해 실망해 올린 글이 있습니다. 그 이후에 요즘 인터넷에서 만나는 자매님이 계신데 그 자매님이 개인적인 일로 주기적으로 명동을 간다고 하셔서 한번 궁금해 문의를 했는데 그만 답변은 듣지 못했습니다. 아마 이런 구조적인 문제점도 있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습니다. 잠시 퇴장할 때 보니 인원 구성 자체가 또 보니 좋은 음량을 낼 그런 분위기도 아니었습니다. 연로한 분들이 많이 계신 것 같기도 했습니다. 아무튼 그렇습니다.
제가 서울에서도 유명 성가대를 보긴 했는데 서울도 기대했던 것만큼은 아니었습니다. 제가 남성동 본당이라는 곳에서 거의 교리를 다 받고 그 본당에서 영세를 받게 될 텐데 그 쪽에서도 제가 어떤 문제가 있어서 영세를 못 받은 게 아니고 아무튼 뭔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 본당에서 제가 성가대 음악을 듣고 엄청 감동을 했습니다. 개신교에서는 엄청 많은 인원과 우리와 비교하면 비교를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그리고 웅장한 음향시설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성당의 지금도 그당시 그때 감동은 잊을 수 없습니다. 지금은 그 본당은 완전 고령화로 인해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그때의 명성은 없긴 하지만 정말 가톨릭이 가진 매력 중 하나가 전례음악이 주는 웅장함이 될 것입니다.
이 웅장함은 단순 세속적인 음악이 주는 풍요로움과는 전혀 질적으로 다릅니다. 특히 장례미사 때 경우만 봐도 전통 오르간으로 연주하게 되면 그때 주는 은혜로움은 이루 말로 할 수 없습니다. 그건 절대 개신교가 따라올 수 없습니다. 특성상 오르간으로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르간은 피아노와 다른 음색을 가지고 있고 이건 사람의 감성을 파고들어 울릴 수 있는 그런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가톨릭 전례와 찰떡궁합이 될 수 있습니다. 결론입니다. 대축일 미사 같은 건 그 미사 특유의 의미가 있기 때문에 그 의미가 주는 은총도 우리가 전례에서 하는 성가대도 엄청난 힘을 발휘한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만약 이 글을 읽으시는 교우님들 중에 성가대원이 계신다면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셔도 좋을 듯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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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는 더 늦게 추가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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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07. 부활 팔일 축제 화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 09:00 추가.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다.
그렇게 울면서 무덤 쪽으로 몸을 굽혀 들여다보니 하얀 옷을 입은 두 천사가 앉아 있었다.
한 천사는 예수님의 시신이 놓였던 자리 머리맡에, 다른 천사는 발치에 있었다.
그들이 마리아에게 “여인아, 왜 우느냐?” 하고 묻자, 마리아가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누가 저의 주님을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나서 뒤로 돌아선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다.
그러나 예수님이신 줄은 몰랐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하고 물으셨다.
마리아는 그분을 정원지기로 생각하고, “선생님, 선생님께서 그분을 옮겨 가셨으면 어디에 모셨는지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모셔 가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야!” 하고 부르셨다.
마리아는 돌아서서 히브리말로 “라뿌니!” 하고 불렀다.
이는 ‘스승님!’이라는 뜻이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 하고 전하여라.”
마리아 막달레나는 제자들에게 가서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하면서,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하신 이 말씀을 전하였다(요한 20,11-18).>
1) 이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마리아 막달레나를
‘부활의 첫 증인’으로 삼으셨음을 전하는 이야기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본
첫 번째 신앙인이고,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사람들에게 전한 첫 번째 선포자로서 우리 교회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인물입니다.
<마리아가 처음에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것은
중요한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첫 번째로 알아보았다는 점이 중요하고,
알아보자마자 예수님의 부활을 믿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경우를 보면, 예수님과 긴 시간 동안 대화를 나누었으면서도 못 알아본 제자들도 있었고(루카 24,16), 예수님을 알아보았으면서도 부활하셨다는 것을 못 믿고 유령이라고 생각한 사도들도 있었습니다(루카 24,37).>
“예수님께서는 왜, 마리아 막달레나를 당신 부활의 ‘첫 증인’으로 삼으셨을까?”
다음 말씀을 답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요한 14,21).”
예수님께서 마리아 막달레나만 편애하신 것은 아닙니다.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하시는데,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사람에 따라 차이가 있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모든 신앙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앞서 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체포되실 때, 사도들은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달아났고(마르 14,50), 베드로 사도의 경우에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말했습니다(마르 14,66-71).
그러나 마리아 막달레나는 끝까지 예수님 곁을 지켰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실 때 십자가 곁에 있었고(요한 19,25), 예수님의 시신을 무덤에 모실 때 지켜보고 있었고(마르 15,47),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 아침에 남들보다 먼저 무덤으로 갔습니다(요한 20,1).
2) 요한복음에 있는 이야기에서, 예수님의 시신을 잃었다고 생각하면서 울고 있는 마리아를 그곳에 그대로 내버려두고, 두 사도가 그냥 가버렸다는 것은(요한 20,10), 이해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마리아를 위로하거나, 함께 예수님의 시신을 찾아보려고 노력하거나, 아니면 마리아를 데리고 갔어야 하지 않을까?
그냥 집으로 돌아가 버린 두 사도의 모습과 무덤에 혼자 남아서 울고 있는 마리아의 모습은,
예수님에 대한 사랑의 크기와 깊이에 분명히 큰 차이가 있었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입니다.
3) “이미 우리 곁에 계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아야 한다.” 라는 말은, 부활시기에 자주 듣는 말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라고 물을 수밖에 없습니다.
“어떻게?” 라는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면서 예수님을 알아보아야 한다는 말만 한다면, 그 말은 ‘빈말’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우리가 알아보고 만나는 ‘방법’을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1) 우리는 기도 중에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2) 성경을 읽고 묵상하면서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3) ‘이웃 사랑’을 통해서 예수님을 만나는 체험을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을 받든지, 사랑을 주든지 간에...
<좋은 예가 사도행전 8장에 기록되어 있는,
‘필리포스와 에티오피아 내시’ 이야기입니다.
그 이야기에는 예수님이 직접 등장하지 않지만,
에티오피아 내시는 기도와 성경 묵상 중에, 또 필리포스가 실천한 ‘이웃 사랑’을 통해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것과 같은 체험을 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4)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항상 우리와 함께, 또 우리 안에 살아계십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도 영적으로 살아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특별한 체험을 못했어도 주눅 들지 말아야 하고, 기가 죽을 필요도 없습니다.
꼭 무슨 체험을 해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누구에게나, 신앙생활을 하면서 느끼는 ‘기쁨’과 ‘평화’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함께 계신다는 표징입니다(필리 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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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07. 부활 팔일 축제 화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 16:45. 추가.
요한 20,11-18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누구보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지극했던 마리아는 비록 온기를 잃고 싸늘하게 변한 시신의 상태일지라도 사랑하는 예수님의 모습을 다시 한 번 보고자 하는 마음에 아침 일찍부터 그분의 무덤을 찾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이 자기 눈앞에 계시는데도 그분이 누구신지 알아보지 못하지요. 그 이유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답변을 내놓았지만, 이 문제는 ‘부활’이라는 개념에 대해 신학적 차원으로 접근하기보다는, 사랑이라는 감정의 본질이라는 차원으로 접근해야 마리아의 입장과 상황을 더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마리아는 다른 누구보다 예수님을 깊이 사랑했습니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보통 상대방에게 시선과 마음을 온통 빼앗기지요. 그런데 마리아가 사랑했던 예수님은 돌아가셨고, 자연스레 마리아의 사랑은 ‘돌아가신’ 예수님을 향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살아계신’ 예수님을 제대로 바라볼 마음의 여유가 없었고, 그런 이유로 그분을 눈앞에 두고도 알아보지 못했던 겁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다정하고 따뜻한 목소리로 “마리아야!”하고 부르시자 그녀는 비로소 그분이 예수님이심을 알아보고 반가운 마음에 그분을 붙잡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조금은 서운하게 들릴 수 있는 말씀을 하십니다.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마리아는 자신을 따뜻한 음성으로 부르시는 예수님의 모습에 순간 그분께서 돌아가시기 전의 관계, 즉 다정한 스승과 제자의 관계로 되돌아간 것처럼 느껴져서 평상시처럼 예수님을 붙잡으려 한 것입니다. 하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은 더 이상 마리아가 사랑했던 인간적인 ‘스승님’이 아니라, 온 세상을 구원하실 ‘주님’이시지요. 그렇기에 마리아는 이제 예수님과 인간적인 관계를 넘어서는 새롭고 완전한 관계를 맺어야 했습니다. 그것은 한 분이신 하느님을 같은 ‘아버지’로 모시는 영적 가족, 다시 말해 예수님의 ‘형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전까지는 스승님이 어디로 가시는지, 무엇을 하고자 하시는지 제대로 모르는 채로 그저 시키는대로 따르는 수준에 그쳤다면, 이제는 그분과 같은 곳을 바라보고 함께 나아가는 ‘형제’로서 주님께서 어디로 가고자 하시는지, 그분께서 바라시는 뜻이 무엇인지 적극적으로 헤아리며 내가 해야 할 일을 주도적으로 해나가야 하는 것이지요. 그런 의미로 부활하신 예수님은 당신 제자들을 ‘형제’라고 부르시는 겁니다.
그런 예수님의 의도를 헤아린 마리아는 즉시 인간적인 집착을 끊어 버리고, 주님의 형제로서 해야 할 일에 집중합니다. 즉시 예수님의 제자들을 찾아가 자신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고 증언하면서, 그분이 전한 메시지를 분명하게 선포한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해야할 일이기도 하지요. 우리는 주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 앞에서 말과 행동으로 그분의 가르침을 선포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를 통해 이 세상에 현존하시게 해야 합니다. 그것이 주님과 함께 부활하여 이 세상에서부터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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