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병에 대한 가장 큰 벌은 '전투참여금지령'. 장교들은 '돌격' 명령이 없다. '나를 따르라'는 명령만 있다. |
20세기 세계史의 2大 MVP 나중에 역사학자들은 20세기의 세계사를 놓고 국가별 성적표를 매길 때 MVP(최우수 선수상)를 어느 나라에 줄 것이냐로 상당히 고민하게 될 것이다. 대한민국인가, 이스라엘인가. 20세기 100년 사이에 국가건설-경제발전-민주화를 동시에 이룩한 唯二한 국가. 그 3관왕을 이 두 나라는 전쟁과 테러의 나날들 속에서 성취했으니 국민들은 모두가 영웅이다. 유태인과 한국인은 원래 군사적인 전통에서 매우 취약한 민족이었다. 유태인은 나라를 잃고 2000년 동안 세계를 떠돌면서 별로 반항도 해보지 못하고 순한 양떼처럼 숱한 학살을 당했다. 한국도 文官중심의 문약한 정치문화에 안주하다가 통일신라 이후 1300여 년간 군대가 단 한 번도 外侵(외침)에 당면하여 국민들을 지켜내지 못한 기록을 남겼다. 그러나 지금 두 나라 국민들은 세계가 부러워하는 强軍을 가지고 국가를 지켜내고 있다. 머리 좋은 민족이 국가생존을 위해 死生결단으로 세계를 향해 증언하고 있다. 다만 한 가지, 한국은 이스라엘에 20세기의 MVP를 넘겨주게 될지도 모른다는 약점을 갖고 있다. 경제력이 북한을 수십대 1로 압도하면서도 국방을 외국군대의 주둔에 의존하고 있는 국가지도부가 그것의 문제점조차 제대로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 그것이다. 기자가 自主국방의 나라 이스라엘을 찾기로 한 것도 바로 그 점 때문이었다. 12시간 직항로로 텔아비브에 도착 이슬람 테러조직의 고정표적이 되고 있는 이스라엘로 들어가는 길은 김포공항에서부터 살벌했다. 1995년 5월23일 오전 대한항공은 처음으로 텔아비브행 직항 전세기 편을 띄우려 하고 있었다. 공항에서 체크 인 카운터로 접근하기 전에 벌써 짐 검사가 한 번 있었다. 짐과 기자의 양복엔 빨간 딱지가 붙여졌다. 수용소행 유태인임을 알리는 다윗별의 표시가 연상되었다. 출국장으로 들어갈 때도 빨간 딱지 승객은 별도의 검색과정을 거치도록 하여 엄격한 짐·몸수색을 했다. 탑승구에서도 한 번 더. “지금 들고 있는 짐은 본인 것입니까. 누가 맡긴 겁니까.” 보안요원의 이런 질문은 앞으로도 여러 번 되풀이해 들어야 할 말이었다. 승객도 모르는 사이에 폭발물이 짐 속에 들어가는 상황을 우려하는 것이었다. 이런 검색 끝에 점보기에 올라 창가 자리에 앉으니 오히려 안심이 되었다. 오전 10시에 이륙한 점보기는 ‘몽골의 길’을 떠나 서쪽으로 날아갔다. 점보기는 서울-상해-고비사막-천산산맥-카자흐스탄-카스피海 횡단-터키 북부 횡단-지중해-텔아비브 코스로 날았다. 창가에 앉아 내려다 본 地上의 경치는 황토색과 적갈색, 그리고 白雪이 주류였다. 사막과 황무지, 그리고 엄청난 산맥으로 연결된 이 길은 한때 몽골 기마군단이 西進하면서 문명과 도시국가를 쓸어버린 진격로였다. 옛 소련 붕괴 이후 힘의 공백지대가 되어 통행의 자유가 확대되고 있는 지역이다. 중국과 인도대륙을 북쪽에서 활처럼 싸고 있는 형태의 유목민의 길 주변엔 지금도 몽골 문화의 자취가 깔려 있다. 이 활대의 손잡이 부분에 해당하는 것이 한반도이다. 일본을 빼면 최대의 몽골인종 국가인 한국이 이 몽골의 길, 그 시발점에 서서 이 동서양의 교통로를 민족 에너지의 분출구, 또는 활동무대로 잘 이용한다면, 중국까지도 견제할 수 있는 지정학적인 정치·경제·군사력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는 즐거운 상상에 젖어 보았다. 지금도 계속되는 아시아 역사의 주요한 흐름은 이 몽골 길 주변의 북방 유목민족과 중국·인도 등 내륙 농경민족 사이에 썰물과 밀물처럼 되풀이되었던 투쟁이었던 것이다. 한국인의 피 속을 흐르는 유목민족의 野性을 이 황무지의 대륙이 부르고 있는 것이다. 12시간 만에 텔아비브 벤 구리온 공항에 도착, 바닷가의 단 파노라마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서울에서 오전 10시에 출발했으나 텔아비브에 도착하니 현지시간이 오후 5시. 시차(時差)에 의한 피로를 별로 느끼지 않게 하는 대낮 비행이었다. ‘개판 5분 전’인 IDF 기자가 취대대상으로 삼고 찾아온 막강 이스라엘 군대(IDF)는 그러나 ‘개판 5분 전’이었다. 텔아비브나 예루살렘 거리 등 이스라엘 어디를 가나 자주 눈에 띄는 사람들은 M-16소총을 거꾸로 메고 다니는 군인들이다. 인구 550만 명 중에 17만 명이 현역이고 1년에 한 달쯤 現役 복무를 하는 동원예비군까지 포함하면 60만 명이 군인인 나라이다. 가장 사회활동이 왕성한 연령층에 속하는 이들 60만 명 때문에 이스라엘 사회 전체가 군사文化의 색채를 띨 수밖에 없다.. 거리를 돌아다니는 군인들의 겉모양은 좀 과장하면 정규군이 아니라 산적떼 같다. 모자는 어깨에 꿰차고 다니고 바지는 줄이 안 서 있으며 여자 사병은 선글라스를 끼고 초소근무 중에도 담배를 피운다. 예루살렘 통곡의 벽 입구에서 순찰 중이던 사병에게 사진을 같이 찍자고 했더니 동료 병사들까지 다 불러모아 함께 찍는데 꼭 소풍 나온 유쾌한 청소년 같았다. 死海 입구의 도로 검문소를 지나는데 한 초병은 긴 벤치에다가 온갖 음식물을 늘어놓고 라면 비슷한 것을 끓여서 먹고 있다가 어서 가라고 손짓만 하고 있었다. 텔아비브 근교의 탱크박물관에 찾아간 날 마침 그곳 연병장에선 기갑부대 소속 신병훈련 수료식의 예행연습이 이뤄지고 있었다. 남녀 혼성이었다. 쉬는 시간이 되자 아이스크림을 사들고 돌아다니는 친구가 없나, 아무데서나 쉬하는 친구가 없나…. 나를 안내해 준 오프라 여사(기갑사단 교관 출신의 40세 여행가이드)는 소변 보는 군인을 가리키며“사진을 찍어라”고 부추겼다. 내가 셔터를 누르자 오프라 여사는 “앞에서 안 찍는 것만 해도 봐주는 거지 뭐”라고 중얼거렸다. 이스라엘 군대는 週末이면 외박을 많이 보내 준다. 군인들은 소총과 실탄을 갖고 집으로 간다. ‘개판 5분 전’으로 보이는 군대이니 총기사고가 당연히 많이 날 것으로 기대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오발 사고나 총기에 의한 범죄는 거의 없다고 한다. 이들은 휴가 중에라도 테리리스트들의 현장범행을 발견하면 스스로의 판단에 의해 정당방위적인 사격을 할 수 있도록 허가를 받고 있다. 이런 권한 위임은 군인 한 사람 한 사람의 사격술과 판단력, 그리고 도덕성에 대한 확신이 없을 때는 당치도 않은 일이다. 형식주의 배격, 철저한 훈련 駐이스라엘 한국대사관 朴東淳(박동순·60) 대사를 만났더니 첫 마디가 “이스라엘 군인들의 복장 보고 놀랐지요”였다. 朴대사는 “바로 그런 점이 이스라엘 군대의 강점이다”고 했다. 형식주의를 배격한 바탕 위에서 철저한 훈련을 시키니 전투력이 더 뛰어나다는 것이다. 훈련의 强度는 한국군보다도 더 세다는 견해였다. 기자의 이스라엘 체재 중에 취재 스케줄을 짜주고 안내를 맡아 주었던 알론 기보니氏(이스라엘 방위산업체 RAFAEL 한국지사장)는 공군 소령 출신으로서 1973년 10월 전쟁 때는 스카이호크 전투기 조종사로 참전, 주로 골란고원에서 시리아 탱크를 공격했다는 사람이다. 그는 “이스라엘 장교들은 전투개시 때 ‘돌격!’이라고 호령하지 않는다”고 했다. “우리 지휘관들은 ‘알하라이!’라고 외칩니다.” ‘알하라이!’는 ‘나를 따르라’(Follow me!)라는 뜻이다. 실제로 이스라엘 장교들은 대대장까지도 전투에서 앞장을 서 死傷率이 유달리 높다고 한다. 1973년 4차 중동전쟁에서 戰死者의 24%가 장교였다. 이스라엘 군대에는 사관학교가 없다. 모든 장교들은 사병에서 선발된다. 實戰 경험이 없으면 아무리 상급자라도 부하통솔이 어렵다는 게 이들의 확신이다. 장교와 사병 사이의 인간적 차별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먹는 것과 자는 곳의 시설은 똑 같도록 규정된다. 장교식당 같은 것은 없다. 18~20세의 소년병 같은 군대 기자는 이스라엘 군인들이 너무 어리고 앳돼 보이는 데 놀랐다. 꼭 천진난만한 소년병 같았다. 외국인을 대하는 태도에서 경계심은 전혀 보이지 않고 구김살이 없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 군대는 18세에 징집되기 때문이다. 高校 졸업 즉시 군대에 들어간다. 남자는 의무복무기간이 3년, 여자는 2년이다. 여자는 결혼하면 軍 면제다. 여자군인의 근무부서는 非전투부서로 제한된다. 기자는 소아마비에 걸렸던 것 같은 여자士兵이 다리를 절며 가는 것을 보고 내 눈을 의심했다. 나중에 확인해 보았더니 신체장애자라도 지원하면 행정부문에서 근무하도록 한다고 한다. 이런 지원자 중에는 가족 중에 戰死者가 있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이런 분위기이니 군대 기피는 사회적 자살행위다. 박동순 대사는 “사병으로 복무 중인 아들이 장교시험에서 탈락한 것을, 우리의 자녀들이 대학시험에서 떨어진 것처럼 낙담하는가 하면 징집 탈락자들이 왜 군대 가지 못하게 하느냐고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는 일들이 가끔 있다”고 전했다. 사람이 가장 순수한 용기에 불탈 때인 18~20세의 연령층을 군대에 집어넣어 2~3년간 조국이란 용광로에서 한 덩어리로 녹아들게 만드는 IDF(Israel Defense Forces)를 이스라엘 사람들은 ‘People’s Army’라고 즐겨 부른다. 직역하면 人民軍(인민군)이다. 용병도 직업군인도 아닌 국민 속에서 나와서 국민으로 돌아가는 군대란 의미의 인민군이다. 총리 라빈은 1967년 6일전쟁 때 참모총장이었다(이스라엘은 육·해·공군은 있지만 통합군制여서 3軍을 통괄하는 참모총장은 한 명, 각 군엔 사령관이 있다). 그는 6일전쟁 뒤 이렇게 말했다. <우리 병사들은 무기가 우세해서 이긴 것이 아니다. 사명감, 임무에 대한 정당성의 확신, 조국을 향한 깊은 애정, 자기 목숨을 버려서라도 유태인들이 이 나라에서 자유롭게 독립하여 평화롭게 살 수 있도록 만들겠다는 결의에 의해서 승리를 거둔 것이다. 이 군대는 인민으로부터 왔고 늘 인민으로 돌아간다> IDF의 정예부대로 유명한 골라니(Golani) 보병여단의 기록에는 6일전쟁 때 규정위반을 한 사병에게 ‘전투참여 금지’란 벌을 내렸다고 적혀 있다. 이 사병은 대대장 앞에서 눈물로 호소하여 겨우 그 치욕적인 벌을 면제받았다고 한다. 이스라엘의 저명한 언론인 이도 조셉 디센트쉭氏(56)는 유력 일간지 마리브(MAARIV)紙의 주필로 있다가 최근엔 언론상담회사를 설립한 사람이다. 그는 내년에 이스라엘에서 열리는 국제언론 단체 IPI연례총회의 조직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 지난 5월 서울에서 열렸던 IPI총회에도 참석했던 이도氏는 50代의 나이에도 예비군으로서 매년 現業 부서에 소집돼 간다고 한다. 동원예비군으로서의 의무복무기한은 40代에 다 채웠으나 예비군으로 계속 남아 있기를 자원했다는 것이다. 그의 근무 부서는 국방부 홍보실이다. 이 고참 언론인은 아마도 새파란 젊은 장교의 지시를 받으며 일할 것이다. 이스라엘은 적은 人口로써 自主국방을 담당하는 방법으로 거의 현역수준에 육박하는 43만 명의 동원예비군을 유지하고 있다. 1년에 30~45일간 동원되는데 우리나라처럼 훈련을 받는 것이 아니라 현역과 똑같이 복무를 한다. 父子 사이처럼 보일 정도로 나이 차이가 많은 사병들이 함께 초소를 지키는 경우를 더러 보았다. 1973년 10월 전쟁 때 골란고원을 기습한 시리아의 5개사단을 막아낸 主力은 1100명의 18세 초년병으로 구성된 골라니 보병여단과 2개 기갑여단, 그리고 하루 늦게 전선에 도착한 아버지뻘 되는 동원예비군이었다. 그야말로 父子군대였던 것이다. 동원예비군은 평생 같은 부대에서 근무하게 되므로 부대원들은 한 가족 같다고 한다. 이들은 사회생활에서도 서로 협조, 교류함으로써 기자가 느낀 이스라엘 사회의 독특한 분위기-격식이 없어 모두가 형님 동생 사이 같은-를 연출하며 계층 간의 융합에도 一助를 한다고 한다. 유태인들은 인종적으로는 아랍인과 비슷하여 유태인 여자들도 아랍 여인 못지 않게 미인들이다. 몸집은 크지 않고 날렵한데다가 거의가 군대 경험자들이라 걸음걸이와 자세는 활달하다. 그것이 거리풍경을 한결 활기차게 만들고 있었다. 물론 취업률도 높다. |
파나마 2010-12-03 오후 4:49 | 이스라엘에 대한 단편적인 글들을 읽어왔고-또 강연등을 이따금 들었을때 마다 느끼는것이 " 참 부러운 나라다"라는 것이다. 그들의 국민정신과 의식구조를 우리는 본받아야 한다. 지도자의 정신자세-이것이 문제다. |
| 自主국방의 나라 이스라엘 紀行(2) |
남자답고 여자다운 이스라엘 女軍 이스라엘에서 갖게 된 두 가지 여성像은 女軍과 ‘주이시 마더’(Jewish mother)이다. 뭔가 줄 것이 없나 해서 안달인 유태인 어머니들. 그들 중의 한 여성 오프라 여사는 이번 취재여행 중 기자가 만난 유태인 중 가장 인상 깊은 사람이었다. 외국인 상대의 관광가이드 자격증을 가진 기갑사단 교관 출신의 오프라 여사는 네 자녀를 둔 어머니이다. 이틀간 그녀가 모는 밴(Van)을 타고 예루살렘, 나사렛, 갈릴리 호수와 골란高原을 돌아다녔다. 운전을 하면서 창 밖으로 펼쳐지는 이스라엘의 풍요로운 자연과 피비린내 나는 역사에 대해 웅변에 가까운 해설을 쉴새없이 쏟아내는데 그 고급영어의 교양과 재치뿐 아니라 그 해설에 담겨 있는 이스라엘 사람과 국토와 역사에 대한 긍지와 사랑이 나에게까지 전염되어 오는 것이었다. “저 병원은 제가 태어난 곳이에요….” “여기서 남쪽으로 가면 제가 자란 키부츠가 있답니다.” “저희 할아버지가 창립하셨지요.” “저 언덕에선 세계사적인 의미를 지닌 전투가 벌어졌지요. 살라딘이 이끄는 이슬람 군대가 사자왕 리처드의 십자군을 격파함으로써 중동이 그 뒤 1000년간 이슬람의 지배를 받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저기에 아직 불타버린 채 버려져 있는 차량들은 독립전쟁 때 고립된 예루살렘을 구출하기 위해 活路(활로)를 개척하려고 했던 우리 부대가 아랍군의 매복에 걸려 전멸되었던 것을 기념하기 위해 그 자리에 둔 것이에요.” “저 水路는 요르단江 물을 남쪽으로 나르는 것인데 시리아 軍은 골란고원에 대포를 갖다 놓고 수시로 수도파이프를 때렸답니다.” 그의 운전솜씨는 하나의 예술이었다. 예수의 성장도시 나사렛의 그 좁고 붐비는 뒷골목을 요리조리 빠져나가는 데 감탄을 연발하자 오프라 여사는 즐거운 奇聲(기성)을 질렀다. “아이 필 마이 카!”(I feel my car!) ‘나는 내 차를 내 몸처럼 느낀답니다’란 뜻이겠는데 그녀의 악수하는 손은 억세고 성격은 급하며 행동은 빨랐다. 남자다움과 여자다움을 묘하게 조화시킨 이스라엘 여성, 오프라 자신이 바로 新生국가 이스라엘 역사의 한 具現者(구현자)란 느낌이 들었다. 이스라엘 취재를 끝내고 김포공항에 돌아와 모범택시를 탔을 때 처음 느낀 감정은 안도감이었다. 고속도로를 시나이 사막 탱크戰場으로 착각한 듯 무섭게 달리고 빵빵거리며 추월하는 이스라엘의 군사문화적 교통문화에서 벗어났기 때문이었다. 서울에서도 운전을 하는 기보니氏는 “이스라엘에서 운전하기가 더 겁난다. 한국 운전자들은 양보심이 있는데 우리는 그게 없다. 그러나 운전기술은 우리가 좀 낫다”고 했다. 이스라엘은 여섯 번의 전쟁을 치렀다. 독립전쟁, 1956년 수에즈 전쟁, 1967년 6일전쟁, 1967∼1970년의 지구전(War of Attrition), 1973년 10월전쟁, 1982년 레바논 전쟁. 이 전쟁 사이사이의 局地戰과 지금도 계속되는 테러로 사망한 사람까지 합쳐서 약 2만 명이 戰死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많은 사람이 교통사고로 죽었다고 한다(이스라엘의 자동차 보유대수는 약 150만 대, 1994년의 교통사고 사망자는 528명·부상자는 3만5500여 명). 유태인들은 천성적으로 한국인들처럼 조급한 편인데 전쟁과 더불어 살면서 兵營化된 사회 분위기에 적응하려다 보니 더욱 조급해져 난폭운전으로 흐른 게 아닐지 모르겠다. 강한 空軍과 早期경보 능력이 핵심 이스라엘의 육군·공군은 고도로 무장돼 있다. 主力 무기의 수는 현역군 규모에서 4배쯤 많은 한국군과 맞먹을 정도이다. 이는 기동성의 확보가 승패의 결정적 요인이란 인식을 바탕으로 조직한 군대이기 때문이다. 1994년 레바논 국경지대나 가자지역 등에서 작전 중 피살된 이스라엘 군인 수는 37명이었다. 일반시민 희생자까지 포함하면 66명이다. 이스라엘 군대(경찰군 포함)가 죽인 팔레스타인 사람은 114명, 이스라엘 민간인 손에 죽은 팔레스타인 사람은 38명이다. 한편 이스라엘 군대 내에서 사고로 죽은 군인은 1994년 한 해에 25명, 자살자는 43명이었다. 합계 68명. 약 네 배 규모의 현역군을 가진 한국군에서 매년 사고로 죽는 군인들이 300여 명, 세계 최고의 군대라는 이스라엘 군대의 사고율과 비슷한 수준이니 우리 군대사고에 대해서 너무 과민할 필요가 없겠다. 지난 50년간 이러한 '전쟁의 생활화' 속에서 이스라엘을 지켜온 이스라엘 국방군, 즉 IDF는 앞에 잠깐 소개했듯이 그 구조나 전략개념, 무기체계가 독창적이다. 소련식도, 미국식도 아닌 이스라엘式이다. 압도적인 人力과 武器를 가진 사방의 敵과 맞서 살아남기 위해서 어떤 군대를 만들 것인가 하고 머리 좋은 민족이 IQ를 총집결한 결과물이 IDF이므로 여기엔 분명 배울 점과 참고점이 있을 것이다. 좁은 국토를 戰場으로 내주지 않기 위해서는 戰場을 敵國 영토 내에 펼쳐야 한다. 早期경보에 따른 先制공격이 필수적이다. 이스라엘의 國力으로 볼 때 장기전은 불리하다. 따라서 뛰어난 정보수집능력, 강력한 공군과 기갑부대 그리고 신속한 동원예비군이 등장하게 된다. 이란 물리학의 공식은 이스라엘 전략의 기본이다. 전투력(F)은 무장력(M)이 가진 속도(V)의 제곱에 비례한다. 즉 속도가 전쟁승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라는 얘기다. 군사조직에서 속도란 무엇인가. 그것은 사단·편대·함대의 이동 속도일 뿐 아니라 국가의 대응속도가 더 핵심이다. 敵의 전쟁企圖를 빨리 파악한 뒤 국가를 총동원 체제로 신속히 전환할 수 있도록 하는 정보수집·판단능력이 속도성을 보장해 주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가장 머리 좋은 사람들은 군대로 갔고, 그들 중에서도 최고의 人材가 공군과 정보조직에 들어갔다고 한다. 이스라엘 국민들이 가장 존경하는 2大조직이 있다면 공군과 모사드(해외담당 정보기관)일 것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空軍을 ‘또 다른 군대’라고 했다. 空軍에 대한 특별대우를 모두가 양해하고 있었다. 공군과 정보능력의 강화는 人名손실을 줄이는 결과를 낳는다. 6일전쟁(1967년)과 걸프戰(1991년)은 본질적으로 空軍이 결정적 역할을 한 전쟁이었다. 勝者 쪽의 死傷率이 가장 낮은 전쟁이기도 했다. 한국과 이스라엘은 거의 비슷한 전략 환경 하에 있다. 수도권이 군사분계선에서 가깝다는 점, 국토가 좁다는 점, 특히 소련식 무기체제와 군대(시리아와 북한)를 상대하고 있다는 점, 人名 손실의 최소화를 목표로 한 전쟁개념의 필요성, 조기 경보체제의 死活的 중요성이 그것들이다. 최근 한국정부의 지도부에선 이스라엘과 한국이 처한 安保환경상의 이러한 유사성에 착안하여 이스라엘 자주국방의 노하우를 연구·참고·도입하려는 움직임을 구체화하고 있다. ‘이란-북한 커넥션’ 저지가 이스라엘의 제1國政목표 1994년 12월 라빈 총리의 訪韓 이후 金泳三 대통령은 이스라엘의 군사·무기 체제에 대한 특별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고 한다. 올해 들어 安企部와 모사드의 최고 책임자가 상호방문하여 정보협력을 비롯한 여러 가지 교류 방안을 의논했음이 이스라엘에서 확인되었다. 한국군의 고위층 인사들이 이스라엘을 찾는 횟수도 늘고 있다. 한국의 국방과학연구소는 이미 이스라엘의 기술지원을 받아 無人정찰기를 개발하기로 했다. 한국-이스라엘의 安保 협력을 촉진하고 있는 것은 북한-이란의 장거리 미사일 개발 계획 때문이다. 북한은 노동1호와 대포동1호(이들 명칭은 韓·美 측에서 붙인 것이지 북한이 그렇게 부르는 것은 아니다)를 이란의 자금지원에 의하여 개발하고 있다. 동해에서 발사실험을 한 적도 있는 노동1호는 설계 사정거리가 1400km. 대포동1호는 다단계 로켓과 고체 연료를 쓰는 대륙간 탄도미사일로서 사정거리가 4000km를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둘 다 아직 實戰배치 단계엔 이르지 못하고 있다. 노동1호, 대포동1호의 개발에 대해서는 안기부와 모사드뿐 아니라 미국과 러시아 정보기관도 예의 주시하면서 정보를 교환하고 있다. 1992년 러시아 정보기관은 북한에 들어가려던 러시아 미사일 과학자의 입국을 금지시키고 북한에서 활동 중인 러시아 기술자들을 철수시켰다. 이들에 대한 조사에 의해 북한이 러시아 과학자들에게 4000km 사정거리의 미사일 개발을 의뢰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고 그 정보는 관련국에 의해 공유되었다. 이즈음 모사드는 安企部(現 국정원)에 노동1호의 설계도 정보를 제공했는데, 이 미사일이 核탄두 운반용일 가능성을 높여 주는 정보였다고 한다. 이스라엘은 지금 이집트, PLO, 요르단과 잇따라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시리아와는 협상단계에 들어간 상태이다. 국경을 맞대고 있는 인접국가와는 급속히 화해 분위기로 가는 마당에 이란이 잠재적 敵國 제1호로 등장하고 있다고 그들은 보고 있다. 이란이 추진하고 있는 핵무기 개발과 북한이 개발하여 이란에 팔기로 한 核폭탄 운반용 장거리 미사일이 결합되면 이스라엘에 대하여 엄청난 위협이 된다는 판단이다. 이란은 인구 6000만 명, 면적이 한반도의 8배인데다가 찬란한 문화적 전통을 갖고 있다. 현재는 이슬람 원리주의자가 정권을 장악, 對이스라엘 테러를 조종하고 있으며 이스라엘의 파괴를 국가목표로 설정하고 있다는 것이 이스라엘 측의 시각이다. 국가 잠재력에 있어서 중동 제1인 이란, 그것도 과격한 원리주의자의 손에 핵무기와 장거리 미사일이 들어가는 것을 국가의 존망을 걸고서라도 막겠다는 결의를, 기자는 이스라엘 安保관계자들과의 연속 인터뷰에서 실감할 수 있었다. 한국의 한 정보관계자는 “현재로선 이스라엘이 우리에게 매달리는 형편이다. 對北정보를 아무래도 우리가 많이 갖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한국정부는 1994년 12월 텔아비브에 대사관을 개설했고, 이스라엘은 1992년 서울의 테헤란로에 그들의 대사관을 재개했다. 1973년 제1차 오일쇼크 직후 한국정부가 아랍 산유국가들로부터 석유를 안정적으로 사들이기 위해 부득이 이스라엘과의 외교관계를 냉각시킨 이래(그 뒤 이스라엘은 駐韓대사관을 철수, 日本대사관이 한국 관련 업무를 代行해 왔다) 20년 만에 두 나라는 다시 밀월단계로 접어들고 있다. 現단계에서 한국과 이스라엘은 對北정보 부문에선 이미 협력체제를 가동시키고 있다. 그 다음으로 협력 가능성이 큰 분야로 꼽히는 것은 이스라엘의 독창적인 무기체제의 수입 및 기술이전 부문이다. 특히 군사 대치상황이 한국과 비슷한 이스라엘의 군사정보수집체계에 대해 한국 측은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이스라엘의 국영 放産업체 라파엘社도 이스라엘 정보시스템을 한국에 수출하기 위한 계획을 세우고 담당부서를 조직하는 등 의욕을 보이고 있다. 문제는 미국의 태도이다. 武器체제에서 한국과 이스라엘이 협력하는 것을 한국군이 미국에 대한 의존에서 탈피하여 독자성을 확보하려는 움직임으로 해석하여 견제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연간 30억 달러의 미국원조(그중 18억 달러는 군사원조)를 받으면서도 군사부문에선 自主노선을 걷는 데 성공한 나라다. 이스라엘이 그런 노하우를 한국에 전하여 바람나게 할지도 모른다는 경계심을 미국이 갖게 된다면 복잡하게 될 것이다. 그 반대로 이스라엘의 협력을 발판으로 삼아 미국內 유태인 세력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기 때문에 결국은 한국정부가 하기 나름일 것이다. |
| 自主국방의 나라 이스라엘 紀行(3) |
이집트 외무장관 암리 무사가 1994년 8월에 이스라엘 예루살렘을 방문했을 때 유태인 학살 박물관(야드 바셈) 참배를 일정에서 빼달라고 요구하여 문제가 생긴 적이 있었다. 주요 방문객들은 한국에서 국립묘지를 참배하는 것과 같은 격으로 야드 바셈을 방문, 조의를 표하는 것이 관례다. 무사 외무장관은 페레스 이스라엘 외무장관과 이스라엘 의회에 진출한 아랍계(이스라엘 국적) 국회의원의 간청을 받아들여 결국 참배를 하긴 했으나 추모의 방에 꽃다발을 바치는 의식은 따르지 않아 이스라엘 국민들의 비난을 받기도 했었다. 기자는 일부러 그 방에 들어가 보았다. ‘추모의 방’ 입구에서는 경비원이 半圓球型(반원구형)의 종이 모자를 나눠준다. 머리 뒤꼭지에 눌러 쓰고 앞을 보니 ‘영원의 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바닥에는 22개 나치수용소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영원의 불’ 앞에는 나치 수용소에서 모아서 가져온 학살자 유골들의 재가 들어 있는 곽이 놓여 있었다. 넥타이 안 맨 국회 국방위원장 대학살 박물관은 유태인 예술혼의 최고 수준을 집중시킨 장소이기도 하다. 단순과 절제가 박물관의 설계와 여러 조각품의 공통점이다. 깔끔한 美的(미적) 감수성이 만들어낸 공간과 여유는 관람자들의 몫이다. 강요되거나 선동되는 감정이 아니라 깊은 자기성찰을 자연스럽게 유도한다. 어린이 추모관에 들어가면 캄캄하다. 유리벽과 촛불, 그리고 수용소에서 죽어간 150만 어린이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呼名(호명)해가는 소리…. 이 추모관은 아우슈비츠에서 아들을 잃은 미국계 유태인 에디타 슈피겔의 獻金에 의해 지어졌다. 야드 바셈 박물관은 500만 점 이상의 자료를 가진 문서보관소와 유태인 대학살에 관하여 쓰인 세계의 모든 간행물을 모은 도서관, 그리고 이스라엘 학교에서 이 대학살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에 대해서 교사들을 교육하는 홀로코스트 세계 교육센터도 운영하고 있다. 이 센터는 매일 세미나와 강연회를 가지는 常時운영 기관인데 매년 3만 명이 참여한다. 야드 바셈 박물관은 또 ‘세계 각국의 정의로운 사람들을 발굴하는 課’를 운영하고 있다. 「쉰들러 리스트」의 쉰들러처럼 유태인들을 살리기 위해 위험을 무릅썼던 외국인들에 대해서 조사하여 ‘정의로운 사람’이란 증서와 메달을 주는데 지금까지 8600여 명이 지명되었다. 이분들이 기념식수한 나무가 야드 바셈을 둘러싸고 있다. 야드 바셈은 국민교육장이다. 기자가 들른 날에도 여러 그룹의 국민학생들이 박물관內 여기저기서 설명을 듣고 있었다. 야드 바셈의 메시지는 분명했다. ‘우리가 나라를 잃는 순간 대학살은 되풀이되게 마련이다’라는 강박관념의 注入이다. 1995년 6월9일 콜 독일 총리는 야드 바셈을 방문한 자리에서 다시 한 번 사죄했다. “독일의 이름으로 행해진 이 惡行에 대해서 오직 부끄러워할 뿐이다.” 콜 총리는 이스라엘 국민에게 충고도 했다. “과거만 기억하고 미래를 잊어버리는 것도 나쁜 일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독일 사람들에 대하여는 특별히 나쁜 감정을 갖고 있지 않다고 한다. 유태인 대학살은 나치 집단의 소행이지 일반 독일인에게 그 책임을 묻기는 어렵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관용이 가능하게 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후 서독 정부가 철저하게 과거를 반성하는 자세를 취하고 희생된 유태인 가족들에게 많은 물질적 보상을 하는 등 행동으로써 반성의 뜻을 실천했기 때문이다. 일본이 戰後(전후)에 똑같은 태도를 취했더라면 지금쯤 한국인들은 “식민통치는 일본군국주의자들의 소행이었지 대다수 일본인들에게까지 책임을 묻기는 어렵다”는 식으로 너그럽게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 아닌가. 야드 바셈 바로 옆에 있는 언덕 꼭대기엔 국립묘지가 있다. 시온주의의 창설자 시어도어 헬젤의 무덤을 비롯하여 에쉬콜 총리, 골다 메이어 총리, 슈프린차크 초대 국회의장 등 역대 국가지도자들의 아주 조촐한 무덤들이 있었다. 봉분은 없고 석판 한 장이 무덤 하나인데 크기는 싱글 베드 정도였다. 비석도 없고 다른 장식물도 없다. 오히려 軍人묘역의 戰死者 무덤이 총리 무덤보다 더 크고(그래도 별것 아니지만) 꾸밈이 있었다. 기자가 이스라엘에서 처음 만난 사람은 이스라엘 국회(The KNESSET)의 외교·국방위원장 오리 올氏(56)였다. 역대 외교·국방위원장 출신 중에는 라빈 現 총리 등 다섯 명의 총리가 배출되었다. 집권 노동당 소속인 오리 올氏는 육군 소장 출신. 골란 전선 사령관, 중부전선·북부전선 사령관 등 요직을 거친 유명한 장군이다(이스라엘 군대의 최고계급은 중장). 그는 넥타이도 매지 않고 외투도 벗은 채 기자를 맞았다. 이스라엘에서는 여간한 공식행사가 아니면 넥타이를 매지 않는다. 격식과 형식에는 최소한의 신경을 쓰고 문제의 본질과 핵심에 정력을 집중한다는 것이 유태인들의 살아가는 방식인 듯했다. 오리 올 위원장은 기자가 앉자마자 그대로 본론으로 들어가 직설적인 語法으로 대답해 나갔다. 이런 단도직입적인 對話法(대화법)도 이스라엘 사람들의 공통점이다. ―귀하가 위원장으로 있는 외교국방위원회는 지난해 아그라나트(Agranat: 당시 대법원장) 위원회의 보고서를 공개하도록 결의한 바 있습니다. 이 보고서는 1973년 제4차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왜 적절하게 대비하지 못했는가를 조사한 것이었습니다. 이 보고서는 이스라엘군의 정보부대가 전쟁발발의 가능성을 과소평가하는 실수를 저질렀다고 지적하고 당시 참모총장 엘라자르 장군과 육군 정보부대장 등의 해임을 건의하기도 했었지요. “우리는 그 전쟁에서 많은 교훈을 얻었고 정보 수집능력을 그 뒤에 크게 개선시켰습니다. 당시 우리의 오판은 주로 분석과 판단의 문제였습니다. 우리는 아주 신뢰할 만한 정확한 정보를 수집했지만 고위층에서 무시했습니다. 나도 그 전쟁에서 골란고원 전선의 기갑부대장으로 고생했습니다만 이스라엘 軍의 정보능력은 많이 좋아졌습니다. 이집트 대통령 사다트가 우리와 평화협정을 맺게 된 것도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수에즈 운하를 渡河하여 기습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며칠 전 이스라엘을 방문한 우리 정보기관 간부를 만난 적이 있습니까. “없어요. 우리 정보기관과 貴國(귀국)의 정보기관은 서로 협조를 잘 하고 있다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군요.” ―이스라엘과 한국의 공동 敵이 되고 있는 북한에 대한 정보의 교환 말씀입니까. “북한뿐이 아니지요.” ―전투에서 부상당한 적이 있습니까. “이집트와의 소모전(War of Attrition) 때 시나이 반도에서 당했지요.” "존경받는 게 군인의 즐거움" ―이스라엘이 계속되는 안보위기 상황 속에서도 민주주의 정치제도를 유지해왔다는 것은 상당히 교훈적입니다. 위기 때는 강한 지도자를 요구하게 되는데 그런 유혹을 어떻게 뿌리쳤습니까. “우리는 군사혁명을 할 필요가 없어요(웃음). 대통령 에즈라 와이즈만, 총리 라빈, 그리고 나도 다 장군 출신이니 우리는 이미 권력을 잡고 있는 겁니다(웃음). 이스라엘 군대는 市民軍입니다. 공군과 정보부대만은 주로 장기복무 직업군인으로 조직돼 있지요. 군인과 민간인의 구별이 불가능합니다. 군대는 人民으로부터 나왔고 人民으로 돌아갑니다. 군인이 市民이고 시민이 軍人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군대는 항상 리버럴하고 개방적이지요.” ―최근에 총리를 국민이 직접 선출하도록 법률을 개정한 것은 강한 지도자를 바라서 한 것이 아닙니까. “한국에는 정당이 몇 개 있지요. 세 개? 우리는 열 개나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총리에게 더 강한 권력을 주어야겠다는 판단을 한 것이지요. 우리의 국가건설 역사는 47∼48년밖에 안 됩니다. 아직도 생존을 위해 싸우면서 나라를 만들어가고 있는 과정에 있기 때문에 문제가 있으면 그때그때 고쳐야지요.” ―이스라엘은 GNP의 10%를 군사비로 쓰고 있는데 경제가 이런 지출을 계속적으로 지탱할 수 있다고 보십니까. “지난 20년간 군사비의 비중은 계속 줄어들고 있어요.” ―예방공격(Pre-emptive strike)과 보복, 이것은 이스라엘의 전쟁수행 원칙입니까. “우리같이 작은 나라에서는 신속하게 戰場을 敵國 영토로 전개해야만 승리합니다. 그래서 강력한 공군을 발전시킨 것이지요.” ―작년에 이스라엘 군의 참모총장으로 임명된 암논 샤하크 장군은 만 50세에 頂上(정상)에 올랐습니다. 굉장히 젊은데요… 한국군에 비교하면. “젊다니요. 샤하크 장군은 우리 역사상 50세에 참모총장이 된 최초의 인물입니다. 나는 41세에 소장이 됐어요. 47세 때 은퇴했어요. 몇 년 전보다는 장성들의 평균연령이 4∼5세나 많아졌어요.” ―한국에서는 민주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군이 많은 진통을 겪고 있고 사회의 영향을 받아 사고가 나기도 합니다. 이스라엘에선 이런 문제를 어떻게 극복했습니까. “국민이 군대와 지휘관을 믿고 아이들을 軍에 보내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개방적인 사회와 개방적인 군대에 적응할 수 있는 개방적인 지휘관의 존재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이스라엘 군대에서는 어떻게 부하를 통솔합니까. “오픈 마인드(open mind)! 상하관계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이 無知와 무관심입니다. 개방적인 자세 없이는 無知, 무관심이 없어질 수 없지요. 지휘관은 세상의 변화에 적응해가야 합니다. 오픈 마인드로써만 그렇게 할 수 있어요. 또 하나 덧붙인다면 리더는 他人(타인)들을 리드하는 사람입니다. 모범을 보여야만 리드할 수 있지요. 육군사관학교를 나와서 지휘관이 되어도 전투경험이 없으면 어떻게 리드를 합니까. 우리는 웨스트포인트가 없습니다. 모든 장교들은 사병에서 출발하여 올라갑니다. 그러니 모범을 보일 수 있지요.” ―군인된 사람으로서의 즐거움이 뭡니까. “남으로부터 존경받고 인정받는 것이지요. 이스라엘에서는 처음 만나는 사람일 때 습관처럼 ‘당신은 군대에서 무엇을 했었느냐’고 물어요. 군인생활, 그리고 군대가 사회로부터 평가받고 감사를 받고 있다는 것, 그게 이스라엘 군인의 즐거움이지요.” 국민적 合意가 軍 士氣의 기초 지브 쉬프氏는 텔 아비브市에서 발행되는 일간지 하레츠(HAARETZ)의 국방부장으로서 이스라엘에서 제일 가는 安保분야의 전문기자이다. 61세의 老기자인 그는 이스라엘이 치른 여섯 번의 전쟁과 캄보디아 월남전쟁 등 지금까지 여덟 번 전장을 누볐다고 한다. 이스라엘 상류층에서는 “라빈 총리도 쉬프 기자에게 보고한다더라”는 우스개가 있을 정도로 그는 고급정보를 많이 접하면서도 신뢰받고 있는 大記者이다. 크지 않은 체구에 조용한 분위기를 가진 쉬프氏는 텔 아비브의 한 카페에서 한 시간 반쯤 자신의 소견을 이야기해 주었다. 그는 “요사이 젊은 기자들이 國益을 해치는 국방 관련 기사도 마구 쓰고 지나친 상업주의가 또한 부작용이 되고 있다”라고 했다. 그는 “우리의 敵이 알면 유리하게 되는 군사상의 기밀은 보도하지 않는 것이 언론계의 자율적인 관례이다”고 했다. 그는 “국방당국자와 언론인들이 비공식적인 접촉을 항상적으로 유지하면서 상호이해를 도모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쉬프氏는 “自主국방을 위해서 중요한 것은 방위산업의 기초이다”고 했다. 그는 “美製 무기를 사더라도 그것을 한국식으로 개조, 독자적으로 운영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고 말했다. “방위산업의 독자적 운용이 있어야 武器수입이 금지되는 상황에서도 버틸 수 있기 때문에 그 국가는 외교적으로 여유를 갖게 된다”고 충고했다. 쉬프氏는 “국가의 전략과 관계된 주요 이슈에 대해서는 全국민적 合意가 있어야 국가의 단결이 유지될 수 있고 젊은 세대에게 무엇을 위해 싸울 것인가를 설명하기가 쉽다”고 덧붙였다. 그는 이스라엘의 경우 지난 1년간 시리아, PLO(팔레스타인해방기구) 등과의 평화협상을 둘러싸고 어떤 점령지를 어떻게 포기할 것인가 하는 문제로 國論이 분열됨으로써 ‘국민적 합의’가 다소 약화돼가고 있다고 걱정했다. 그는 이스라엘의 國論이 영토문제라는 매우 민감한 주제를 선택하여 갑론을박하도록 만든 것이 실수였다면서 ‘국민적 합의’라는 목표를 너무 깊게 추구하다 보면 오히려 국민적 합의가 약화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유태인의 역사를 살펴보면 군사적 天才性(천재성)은 발견되지 않는데 어떻게 이처럼 독창적인 군사조직과 전술을 개발하여 나라를 지켜내는 데 성공했습니까. “유태인은 군사 면에선 아주 형편없는 전통밖에 가지고 있지를 못했지요. 우리는 군대를 조직할 때(영국식민지시대) 다른 나라와 아주 다른 방법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때는 이스라엘 사람들 모두가 비밀전투요원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전통 속에서 이스라엘 군대가 탄생했으므로 우리는 IDF(Israel Defense Force)를 인민군(People’s Army)이라고 부릅니다. 우리의 建國 주역들은 농업을 일으키는 데 注力했고 그 뒤에 군대를 만들었습니다. 당시엔 무역이나 산업처럼 人力수요 면에서 다른 경쟁부문이 없어서 가장 뛰어난 人材가 군대로 몰려들었습니다. 이스라엘 군대는 유태인들 중에서도 가장 머리 좋은 사람들이 그 기초를 놓은 조직이란 점에 유의해야 합니다. 또 하나 이스라엘 군대를 强軍(강군)으로 만든 요인은 싸우지 않으면 국가와 국민의 생존이 불가능했기 때문입니다. 생존이냐 멸망이냐, 여기서 살 것인가 다시 쫓겨날 것인가, 예속이냐 독립이냐의 상황에서 우리는 다른 선택이 없었습니다.” ‘노 아더 초이스’(No other choice)-이 말을 기자는 이스라엘 취재 중에 수십 번은 더 들어야 했다. 용감하게 싸우는 수밖에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벼랑에 선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강박관념이 맹렬한 투지로 전환된 곳에 이스라엘 군대가 있다는 얘기다. 쉬프 기자는 “이스라엘이 주변 아랍 국가와 평화를 이룬 다음에는 이스라엘 군대나 안보의식도 달라질 것이다”면서 “그때는 국민적 합의를 도모하기가 더 어렵게 될 것이다”라고 했다. “평화협정이 완결된 이후에도 이스라엘이 강한 군대를 유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이스라엘과 아랍국가 사이의 관계가 아니라 아랍국가들끼리의 수많은 충돌과 전쟁의 역사를 보면 自明(자명)해집니다. 중동은 1990년대에 들어서만도 두 개의 나라가 지도상에서 지워져버린 경험을 가진 지구상의 유일한 지역입니다. 쿠웨이트는 국제연합군의 도움으로 국가를 회복했으나 南예멘은 멸망했습니다. 이런 환경에서 생존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북한+이란 커넥션’은 폭발의 임계량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란·북한이 협력하여 각각 장거리 미사일과 핵무기를 개발하고 있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이란을 잠재적인 敵國 제1호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한국과 이스라엘은 공동의 敵國을 상대하고 있는 것 같지만 이란은 한국의 敵이 아니고 북한은 이스라엘의 敵이 아니라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누가 누구의 적이냐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이란과 북한은 국제적인 위협이란 점이 중요합니다. 이란과 북한은 예측 불가능한 정권으로서 그들이 손에 들어가는 미사일과 핵은 통제불가능한 파괴력(Uncontrolled destructive power)이 됩니다. 이란은 이스라엘과 국경을 맞대고 있지는 않지만 이스라엘의 파괴를 국가목표로 公言하고 있습니다. 이 두 개의 통제불가능한 파괴력이 하나로 합친다면 폭발의 임계량(Critical mass)에 도달하게 된다는 점이 문제의 본질인 것입니다. 북한의 장거리 미사일 사정권 안에 일본이 들어가고 걸프 연안의 산유국들이 이란의 위협에 직면한다면 이것은 局地的인 문제가 아니라 지구촌의 문제가 되는 것이지요.” 쉬프 기자는 이란과 북한이란 공통의 위협에 대처하는 방법으로서 몇 가지 방안을 제시하였다. 첫째, 국제적인 압력. 둘째, 한국과 미국, 이스라엘과 미국의 전통적인 협력관계를 활용하여 이 세 나라가 긴밀하게 협조하는 방안. 셋째, 북한과 이란의 위협이 노골화될 경우 북한과 이란에 대해서 이 세 나라를 주축으로 한 국제적 연합전선을 형성하는 것. 쉬프 기자는 “며칠 전에 美國의 군축국장이 처음으로 북한의 또 다른(노동1호 이외의 다른 미사일, 아마도 대포동 1호를 지칭하는 듯) 장거리 미사일의 사정거리가 수천 마일이라고 지적한 자료를 보았다”면서 “북한은 일본을 사정권 안에 넣음으로써 일본과 미국과의 협상을 유리하게 끌고 가려는 목적과 지역강국을 지향하면서 동시에 미사일을 팔아 먹겠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밖에 볼 수 없다”고 주장했다. “외국군대 장기 주둔하면 국민의 정신무장이 둔해진다” 쉬프 기자는 “이란은 현재 核무기 개발에 필요한 기반시설과 人力을 확보하고 있는 중이다”라고 분석한 뒤 “러시아로부터의 核 물자 밀수 가능성을 배제해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는 특히 “이란과 북한은 러시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으므로 밀수는 어렵지 않을 것이다”라고 분석했다. 쉬프 기자는 “舊(구)소련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덧붙였다. 그는 “한국은 북한에 비해서 엄청난 경제력을 갖고 있는데 왜 그것을 對러시아, 對北관계에서 잘 활용하지 못하느냐”고 반문하기도 했다. 1993년에 이스라엘이 북한과의 비밀교섭을 통해서 北에 경제원조를 해주는 조건으로 그들의 對 中東 미사일 수출을 중단시키려고 했다가 미국의 개입으로 좌절된 사건에 이야기가 미치자 쉬프 기자는 “타이밍이 아주 나빴다”고 했다. “핵확산금지조약(NPT)의 연장을 추진하고 있는 시점에서 이스라엘의 그런 시도는 핵무장을 기도하는 나라에 대해 나쁜 암시를 줄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공갈에 대해서 뇌물로 대응해서는 안 됩니다.” 쉬프 기자는 한국이 북한에 대한 압도적인 경제력을 보유하고 있어 自主국방을 감당할 힘이 충분한데도 불구하고 주한미군이 주둔하고 있고 거기에 국방의 상당 부분을 의존하고 있는 데 대해 이렇게 충고했다. “우리는 수십 배의 國力과 兵力을 가진 아랍의 敵들에 의해 포위돼 있었지만 우리의 영토에 외국군이 장기 주둔한다는 것은 국가의 단합성과 정신무장에 아주 나쁜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일찍부터 깨달았습니다. 걸프 전쟁 때 미군 패트리어트 미사일 대대가 잠시 주둔했지만 임무가 끝나자 즉각 철수했으며 1956년 수에즈 전쟁 때 프랑스의 2개 비행대대가 잠시 주둔했다가 즉시 철수한 것밖에는 없습니다. 한국에 주둔하는 미군의 병력을 줄여야 한국인의 自主국방 의지가 살아납니다. 그래도 미군의 우산, 특히 공군의 지원은 계속 받을 수 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하는 것이 장기적으로는 미국과 한국의 관계를 위해서도 좋은 일이라고 생각�爛求�.” 쉬프 기자는 여기서 특종이 될 만한 정보를 하나 흘렸다. “제가 두 달 전 미국에서 들은 이야기가 있어요. 美 측이 러시아와 비밀협상을 하면서 제의를 하나 했답니다. 러시아가 굳이 이란에 경수로를 팔아야 하겠다는 것이 돈 때문이라면 좋다, 우리가 그 경수로를 북한에 팔도록 해주겠다고 제의했으나 거절당했답니다.” 한반도 주변정세가 급박하게 돌아가는데도 대한민국 국회는 北核문제나 安保문제를 정치의 제1주제는커녕 해외토픽 기사를 읽듯이 구경만 한다고 하자 쉬프氏는 “그것이 바로 외국 군대에 국방을 의탁하고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아주 나쁜 심리현상이다”라고 꼬집었다. 이스라엘에 전쟁을 기념하는 박물관·기념관·기념탑·기념물들이 전국 도처에 깔려 있는 데 대해 쉬프 기자는 “젊은 세대를 위한 교육장이다”라고 했다. 그는 “요사이 젊은이들은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이 안정과 풍요가 원래부터 있었던 것,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고 했다. 기자는 “한국에서도 전쟁기념관이 세워졌는데 왜 하필 전쟁을 기념하느냐 해서 명칭에 대한 시비가 있었다”고 했더니 그는 “전쟁이란 단어를 빼버리자는 것은 역사를 생략하자는 것과 같다. 전쟁 없는 역사가 언제 있었느냐”고 반문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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