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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당신이 과학자라면 어떤 물질의 내적인 구조를 밝히기 위해, 그 물질을 극단적 실험의 상황 속에 두려고 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극단적 억압 속에 놓인 사람이라면 우리가 진정 누구인가를 알려줄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바로 그 내적인 본질에 대한 직관을 부여해 줄 것이다” – 베르너 헤어조크
세계영화계에 독일영화의 중흥을 알린 <뉴저먼시네마>.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로 대표되는 이 경향은 1962년 2월 "아버지의 영화는 죽었고, 우리는 새로운 영화를 믿고 새롭게 나아갈 것이다." 라는 <오버하우젠 선언>을 통해 시작되었다. 이들은 2차 대전을 거치며 이전의 고유 전통과 단절된 기존의 독일영화에 대한 대안으로 출발하였다. 그 당시 베르너 헤어조크는 뮌헨에서 자신의 공식적인 첫 (단편)영화인 <헤라클레스 Herakles>를 만들기 위해 철강소에서 일하며 돈을 모으고 있었다. 1942년 생인 헤어조크는 학교를 싫어했고, 18세에 모든 것을 뒤로 하고 아프리카 수단으로여행길에 올랐다. 이 여행 중에 쥐에 물려 5일 동안 창고에서 고생을 하기도 했다. 세계 각지를 방황하던 그는 뮌헨으로 돌아와 단편 <헤라클레스>를 만든 뒤, 미국 피츠버그로 유학을 떠났다. 그는 이곳에서 학비를 조달하기 위해 멕시코 국경 근처에서 총기밀수에 관여하기도 했으며, TV 방송국에서도 일했다. 하지만 헤어조크는 영화학교를 다닌 적도 없으며, 공식적인 교육을 받지도 않았다. 68년에 만든 헤어조크의 첫 장편 <생명의 징후 Lebenszeichen>가 베를린 국제영화제에서 은곰상을 수상하면서, 그는 주목받는 감독이 되었다. 71년 <난쟁이도 작아지기 시작했다 Auch Zwerge Haben Klein Angefangen>와 <파타 모르가나 Fata Morgana>를 거쳐 72년작 <아귀레, 신의 분노 Aguirre, Der Zorn Gottes>로 헤어조크는 뉴 저먼 시네마의 기수 중 하나로 당당히 자리잡게 된다. 이 작품은 국내에 공식적으로 소개된 바가 없지만 국내 팬들에게는 그의 대표작으로 인지되고 있을 만큼 잘 알려져 있으며, 헤어조크의 페르소나라고 할 수 있는 배우 클라우스 킨스키와 처음 만나 찍은 작품으로도 유명하다. 그러나 정작 <아귀레, 신의 분노>가 유명한 이유는 이 작품이 이후에도 계속 반복되는 헤어조크의 극영화 스타일을 집약적으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헤어조크 영화의 주된 테마는 극한적인 상황에서 극단적인 목표를 추구해 가는, 그 고통 속에서 결코 희망적이라고 할 수 없는 현실과 직면하는 우리들의 또 다른 모습이다. 그리고 그 모습은 우리들 자신의 존재에 대해, 우리를 존재케하는 그 현실에 대해 사유하게 하는 힘을 발한다. 이러한 테마는 결코 쉽지만은 않은 촬영과 로케이션을 고집해 나가며 영화를 완성하려는 헤어조크, 그 자신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페루 산악지대에서 벌인, 전투를 방불케 한 극단적인 로케이션과 그런 촬영에 넌더리를 내던 클라우스 킨스키에게 총을 겨누고 "영화를 찍을 것인가? 아니면 여기서 죽을 것인가?"를 물었다는 <아귀레, 신의 분노>의 에피소드는, 헤어조크라는 사람과 그가 만들려고 했던 영화가 어떤 것인지를 알게 해주는 사실들이다. 해외에서 헤어조크의 대표작으로 평가받는 75년 칸영화제 심사위원대상 수상작 <카스퍼 하우저의 신비>에서도, 그리고 국내에 비디오로 출시되었지만 희귀 비디오 중의 하나가 되어버린 82년작 <피츠카랄도 Fitzcarraldo>와 헤어조크와 킨스키가 마지막으로 작업한 <코브라 베르데Cobra Verde>까지 헤어조크의 영화는 계속 반복되고 변주된다. 광기어리고, 신비하고, 시적이면서 극히 영화적인…
베르너 헤어조크 | Werner Herzog
세계영화계에 독일영화의 중흥을 알린 <뉴저먼시네마>.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로 대표되는 이 경향은 1962년 2월 "아버지의 영화는 죽었고, 우리는 새로운 영화를 믿고 새롭게 나아갈 것이다." 라는 <오버하우젠 선언>을 통해 시작되었다. 이들은 2차 대전을 거치며 이전의 고유 전통과 단절된 기존의 독일영화에 대한 대안으로 출발하였다. 그 당시 베르너 헤어조크는 뮌헨에서 자신의 공식적인 첫 (단편)영화인 <헤라클레스 Herakles>를 만들기 위해 철강소에서 일하며 돈을 모으고 있었다. 1942년 생인 헤어조크는 학교를 싫어했고, 18세에 모든 것을 뒤로 하고 아프리카 수단으로여행길에 올랐다. 이 여행 중에 쥐에 물려 5일 동안 창고에서 고생을 하기도 했다. 세계 각지를 방황하던 그는 뮌헨으로 돌아와 단편 <헤라클레스>를 만든 뒤, 미국 피츠버그로 유학을 떠났다. 그는 이곳에서 학비를 조달하기 위해 멕시코 국경 근처에서 총기밀수에 관여하기도 했으며, TV 방송국에서도 일했다. 하지만 헤어조크는 영화학교를 다닌 적도 없으며, 공식적인 교육을 받지도 않았다.
이번 <독일 되돌아보기>에 소개되는 3편의 영화를 통해, 이들은 아우슈비츠라는 역사의 상흔, 패전 후 독일인이 겪은 내면의 상처, 그리고 독일 통일을 통한 유럽의 비극을 영화로 표현하며, 독일의 바깥에서 독일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을 보여주었습니다.
<독일 되돌아보기>는 독일에 관한 세 편의 영화를 통해 20세기의 역사를 되돌아보는 기획이며, 20세기의 영화가 보여준 성과를 기억하고자 하는 기획이기도 하다.
빔 벤더스Wim Wenders(1945∼ )는 파스빈더와 더불어 전후 독일을 대표하는 감독이자 영화의 아들입니다. 로큰롤과 할리우드 영화 등 미국문화에 심취하여 성장기를 보냈던 그는 파리의 시네마테크에서 오즈 야스지로, 로베르 브레송, 니콜라스 레이 등의 영화에 매혹당해 영화감독이 되기로 결심합니다. 벤더스는 마치 여행처럼 영화를 만들어낸 사람으로, 세계로의 여행을 떠나면서 풍경이나 지평선을 발견하고자 하는 욕망으로 영화를 창조해낸 사람입니다. 종종 이러한 여행은 <사물의 상태>나 <리스본 스토리>처럼 완결된 이야기라기보다는 과정 중의 이야기이며, <파리, 텍사스>와 같은 영화에서처럼 바깥 세계로의 여행만이 아니라 인물 내부로의 탐색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때로 그는 <물 위의 번개>나 <도쿄 가>에서처럼 자신의 영화 경험의 원류를 찾아 여행을 떠나기도 하며, <베를린 천사의 시>에서는 과거와 현재 사이의 여행을 시도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의 모든 영화들은 도시를 가로지르는 길 위에 서 있습니다
뉴 저먼 시네마(신 독일 영화 / New German Cinema / Das Neue Kino)는 1960년대 부터 70년대에 거친 새로운 영화운동. 뉴 저먼 시네마를 시기적으로 정확하게 얘기한다면 1962년의 오버하우젠 선언 부터 1979년 함부르크 공표까지이다.
독일영화는 1920년대의 독일 표현주의 영화의 쇠퇴와 나치즘의 대두로 활기를 잃게 되었고, 전후에는 전범국가에 대한 연합국의 통제에 의해 이러한 현상은 더욱 가속되었다. 독일 영화의 기반이 약해진 이러한 상태에서 무차별적으로 수입된 헐리우드 영화는 독일 영화의 쇠퇴를 더욱 가속화 시켰다.
이러한 상황에서 1962년 오버하우젠 영화제(Oberhausen Film Festival)라는 단편 영화제에 참여하였던 독일의 26명의 젊은 영화 작가들은 그 중 알렉산더 클루게(Alexander Kluge)를 중심으로 기존의 관습적인 영화 산업 구조로부터 탈피하며, 시대와 사회에 대한 깊은 관심을 표명하고, 기존 영화에 대한 파산선고를 내리는 "오버하우젠 선언"을 채택한다. 아래는 그 선언문 중 일부이다.
뉴 저먼 시네마의 철학이나 스타일은 감독들의 수 만큼이나 다양해서 한 마디로 정의 내리기는 어려우나, 그들은 공통적으로 사회 정치적인 문제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영화속에서 그에 대한발언을 하고 있다.
이탈리아의 네오 리얼리즘, 프랑스의 누벨 바그 운동으로 이어져 온 예술영화 운동을 계승하고 있는 뉴 저먼 시네마 운동은 작가 영화가 산업적으로 독립할 수 있는 대안을 모색했다는 점에서도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프로이며, 우리의 영화를 보건말건, 심지어는 우리 영화와 전혀 다른 영화를 꿈꾸는 관객일지라도 우리의 동조자다. 우리는 계속 나아갈 것이다"라고 한 79년 함부르크 선언은, 관객이 그들의 의도대로 따라주지 않았기 때문에, 현실을 극복하지 못한채 사라져갔다.
* 감독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Rainer Werner Fassbinder)
이 감독만큼 열정적인 삶을 살다간 감독이 또 누가 있을까싶네요... 엽기적(?) 포악한 성격과 양성애, 가죽바(leather bar)를 수시로 드나들고 항상 스캔들과 가십을 몰고다닌 감독이었죠.
그는 1969년 영화계에 입문하고 약 십여년간 20편이 넘는 작품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평소 미국의 존포드보다 많은 작품을 만들어 내겠다고 호언장담했지만 결국 그 뜻을 이루진 못했죠. 82년 37살의 나이로 요절했기 때문. 그가 우상처럼 숭배하던 프랑스의 여배우 로미슈나이더가 사망하자 시름에 빠져지내다가 그 후 열흘뒤, 결국 약물과다로 그녀의 뒤를 따르고 말았죠.
대표작으로 <사계절의 상인(Der Handler Der Vier Jahreszeiten)>, <마리아 브라운의 결혼(Die Ehe Der Maria Braun)>, <베로니카 포스의 갈망(Die Sehnsucht Der Veronika Voss)>,< 폭스와 그의 친구들(Faustrecht Der Freiheit)>등이 있습니다
독일 영화
개요: 1) 독일 영화사
2) 표현주의
3) 뉴 저먼 시네마
4) 베를린 영화제
Ⅰ. 독일 영화사
독일 영화사는 크게 나누어 보면 무성 영화 시대와 영상과 동시에 음성· 음악 등이 나오는 이른바 토키 영화에서 제2차 세계 대전,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로 구분할 수 있다.
독일에서 영화는 19세기 말부터 제작되기 시작하여 한때 프랑스 영화에 압도되기도 했지만, 1910년대에 들어서면서 크게 발전하였다. 특히 M.라인하르트에 의해서 질적으로 향상되었으며, 제1차 세계대전 후에는 독점적인 우파(UFA)영화사가 설립됨으로써 제작 편수도 크게 증가되었다. 그 중 《칼리가리 박사》(1919)로 대표되는 표현주의 영화로 세계적인 명성을 떨쳤으며, 그 후 《아침부터 밤까지》(1920) 《지크프리트》(1924) 등의 걸작을 계속 내놓아 독일영화의 황금시대를 가져왔다. 토키 시대가 되자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우선 음악영화가 많이 제작되면서 뛰어난 작품들이 속출하였으며, 한편으로는 사회적인 문제를 주제로 한 작품들도 제작되기 시작하였다. 나치스 시대에는 기록영화 이외에 별로 내세울 만한 것이 없고, 제2차 세계대전 후에도 여전히 독일영화의 옛 황금시대가 부활될 조짐은 나타나지 않았다.
(1) 무성영화 시대
1895년 영화의 기본형이라 할 스크린에 영사되는 "움직이는 사진" 이 미국에서는 에디슨에 의해, 프랑스에서는 뤼미에르 형제에 의해 잇따라 선을 보이자, 같은 해 독일에서도 독일영화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막스 스클라다노프스키가 "비오스코프"라는 영화의 기본형을 베를린에서 공개하였다. 그 이전까지의 영화일이란 그저 지금의 슬라이드 영사기와 비슷한 환등기로 구경거리를 제공하는 정도였는데, 막스 스클라다노프스키가 셀룰로이드 필름에 연속사진을 찍는데 성공했고,3년만에 비오스코프를 만들어 낸 것이다. 비오스코프가 베를린의 빈터가르텐에서 첫선을 보인 것은 프랑스의 뤼미에르 형제보다 정확히 56일이나 앞선데다가 프로그램의 내용이나 구성이 매우 독창적이고 풍부했는데 1986년 스클라다노프스키가 비오스코프를 들고 유럽을 순방할때는 이미 유럽 각지에 뤼미에르 형제와 에디슨이 개발한 영사기들이 퍼져나가고 있던 터라 "최초의 상연"이라는 명예는 얻기 어려웠다.
1896년 오스카 로메스터에 의해 "비오폰"이라는 필름의 영사와 축음기를 결합시킨 원시적인 토키가 만들어지고, 독일영화 최초의 스타라 할 수 있는 H.포르텐 주연의 무용영화와 가요영화(歌謠映畵)가 제작되었다. 그 후 얼마 동안은 프랑스의 활발한 영화 제작에 밀리는 듯했지만 1910년대에 들어와서는 저명한 문예작품이 잇달아 영화화되어 활기를 띠었다. 그 중에서도 S.라이 감독의 《프라하의 대학생》(1913)은 호평을 받았고, 이 영화에서 주연한 파울 베게너는 독일영화의 대표적인 스타가 되었다. 이는 악마에게 그림자를 판 《파우스트》와 비슷한 이야기인데 그 후에도 여러 번 영화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환상적인 괴기취미(怪奇趣味) ·신비주의는 그 후에 독일영화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영화의 선전력을 중시한 군부(軍部)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영화제작은 오히려 왕성해졌다. 1918년 메스터 ·우니온 등 당시 유력한 영화제작사가 합동해서 우파영화사(UFA:Universum Film Aktiengesellschaft)를 창립, 영화의 기업적인 기반이 비약적으로 호전되었다. 패전 후 연극이나 미술을 지배한 표현주의는 영화에도 파급되어 R.비네의 《칼리가리 박사》(1919) 《죄와 벌》(1923), C.H.마르틴의 《아침부터 밤까지》(1920) 등 대표적인 표현주의 영화가 잇달아 제작되었다. 표현주의 영화는 20/30년대 전성기를 맞이하는데 대표적인 감독으로는 프리츠 랑 , 루비취, 무르나우 등이 있다. 그 중에서도 프리츠 랑의 업적이 두드러진다.
한편, E.루비치는 《파숀》(1919) 《디셉션》 《총희 즈믈른》(1920) 《파라오의 사랑》(1922) 등 왕조나 귀족 사회를 배경으로 하는 애정영화에 재능을 발휘했고, F.랑은 웅대한 민족적 서사시라 할 수 있는 《니벨룽겐》, 2부작인 《지크프리트》 《크림힐트의 복수(復讐)》(24)를 발표했다. K.그뤼네의 《고혹의 거리》(1923), 루프 픽의 《제야의 비극》(1923)에 의해 열린 무자막영화(無字幕映畵)의 시도는 F.W.무르나우의 걸작 《최후의 사람》(1925)을 내놓게 했고, E.A.뒤퐁은 《바리람》(1925)을 내놓았다. 또한 뒤퐁은 《바리에테》(1925)에서 대담한 애정묘사로 이름을 떨치는 등 독일영화는 세계에 자랑할 만한 황금시대를 구가했다. 이러한 업적은 우파영화사의 제작 실권자인 엘리히 포머에 의한 것인데, 당시의 대표적인 스타로는 에밀 야닝스, 베르너 크라우스, 콘라트 화이트, 폴라 네그리 등을 꼽을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이 헐리우드에 스카웃되는 바람에 사태는 일변해서 게르하르트 람프레히트의 《제5계단(第五階段)》(1925), G.W.파프스트의 《기쁨이 없는 거리》(1925) 등 당시 사회의 어두운 현실을 묘사한 작품들이 이에 대치되었다. 파프스트는 또 《그리운 파리》 《마음의 불가사의》 《판도라의 상자》 《윤락녀의 일기》 등 특이한 분석적 작품으로 주목을 끌었고, W.루트만은 《베를린-대도시교향악》(1927)에서 전위영화(前衛映畵)의 새 국면을 열었다.
(2) 토키에서 2차 세계대전까지...
전기공업의 유력회사 지멘스와 AEG를 배경으로 한 토비스사(社)의 녹음방식에 의해 토키화의 길을 연 독일영화는 29년 루트만의 《세계의 멜로디》, H.슈발츠의 《엘레지》를 시발로 하여 이듬해 무성영화를 완전히 몰아냈다. 독일의 음악전통(音樂傳統)은 오페레타영화라 일컬어지는 뮤지컬에 독특한 경지를 열었고, 대표작으로는 W.틸레의 《가솔린보이 3인조》(1930), E.샤렐의 《회의는 춤춘다》(1931), H.슈발츠의 《광란의 몬테카를로》 《여왕님의 명령》(1931) 등이 나왔다. 베르너 하이만이 작곡을 전담한 이들 작품의 주제가는 세계를 풍미했고 빌리 프리치, 리리안 하베이, 한스 알바스가 인기스타로 이름을 떨쳤다. 파프스트는 《서부전선 1918년》(1930) 《삼류 오페라》 《탄갱(炭坑)》(1931) 등에서 예리한 사회비판을 시도한 외에, J.V.슈테른바르크 감독이 미국에서 돌아와 M.디트리히 주연 《탄식의 천사》(1930), 여류감독 레온티느자강의 여자들만의 이색작 《제복의 처녀》(1931), P.츠인너가 명여우 E.베르크너 주연으로 만든 《꿈꾸는 입술》(1932) 등이 이 시기의 중요한 작품이다.
그러나 33년 히틀러 내각이 성립되고부터는 유대계나 외국 출신 영화인은 모두 추방되어 우파영화사는 나치스 지배하의 독점적(獨占的)인 국책회사(國策會社)로서의 색채를 차차 드러내었다. W.포르스트가 빈에서 만든 《미완성 교향악》(33) 《부르크극장》(37)과 같은 예술적 향기에 찬 오스트리아 영화에 반해, 독일에서는 레니 리펜슈탈에 의한 나치스 당대회 기록영화 《의지의 승리》(1935), K.리터의 제1차 세계대전 비화 《최후의 한 병사까지》(1937) 등 나치스의 국책영화가 주류를 이루었고, 후세에 남을 만한 걸작으로는 K.리터의 《맹세의 휴가》(1937), 레니 리펜슈탈의 베를린올림픽 기록영화 2부작인 《민족의 제전》 《미의 제전》(1938)을 들 수 있다.
(3)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 영화는 전후에도 경제의 피폐로 인해 제대로 발전을 하지 못했다. 또 미국의 헐리우드 영화가 세계를 지배하는 상황 속에서 유럽의 영화는 상대적으로 위축 될 수밖에 없었다. 인적 물적인 면에서 헐리우드 영화는 전후 세계의 영화 시장을 지배한다. 제작과 배급, 극장이라는 영화의 세가지 루트를 헐리우드가 장악했기 때문이다. 50년대 독일 영화는 정치성을 배제한 통속적인 코미디 영화나 가정의 이야기를 다룬 홈 드라마 수준에 만족해야 했다. 독일의 영화가 그나마 세계 무대에 진출한 것은 60년대부터이다. 1962년 프랑스의 누벨 바그와 함께 독일에서도 새로운 독일영화 운동이 일어났다. 단편영화 축제때 오버하우젠 선언을 채택하자, 히틀러의 국가 사회주의 시절 체제에 야합하며 쇠퇴의 길을 걸었던 독일 영화가 새로운 노선을 설정하는 계기가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의 패전과 함께 국책회사인 우파영화사는 해체되고 나치스에 협력한 영화인은 일선에서 모두 추방되었다. 이로 인해 통일 전 서독에서는 군소(群小) 프로덕션이 뮌헨·함부르크·서(西)베를린 등으로 갈라져서 영화를 만들었다. 세계적으로 화제가 된 작품으로서는 포르스트의 《죄있는 여인》(1951), H.코이트너의 《최후의 다리》(1954), 《악마의 장군》(1955), B.위키의 《다리》(1959) 등이 있었지만 그후로 점차 부진해졌다. 1958년에는 구 우파영화사의 시설을 계승한 신(新)우파사(社)가 부흥을 외치면서 제작에 열을 올렸지만, 3년만에 파산상태가 되었고, 텔레비전의 영향으로 제작편수도 반감되는 등, 영화에 관한 한 독일은 지난날의 일류국에서 삼류국으로 전락해버렸다. 그런 중에도 오베르하우젠단편영화제에서 각광받은 신예(新銳) 윌리히 샤모니의 《저것》(1965), V.슈렌도르프의 《젊은 퇴를레스》(1966), 《양철북》(1979), W.벤더스의 《도시의 아리스》, R.W.파스빈더의 《여우와 그의 친구》(1975), W.헤르초흐의 《신의 분노》(1971) 등이 새로운 독일영화를 대표하는 것으로 주목되었다.
한편 동독영화는 국영인 데파(DEFA)에 일원화되어 전후 초기에는 W.슈타우테의 《살인자는 우리들 중에 있다》(1946), 람프레히트의 《베를린의 어디엔가에》(1946), K.메츠이히의 《그늘진 결혼》(1947), 《신들의 회의》(1950) 등 지난날의 나치스를 비판한 작품들이 나왔지만, 동구권(東歐圈)에서 가장 특색이 없는 영화국이 되었다. 그후 독일 전통으로부터의 단절과 뉴욕·파리에 정신적 기반을 두다가 독일의 현상황에 기초한 다양한 시점의 영화를 제작하여 국제적으로 새롭게 평가받았다. 즉 R.하우프의 《머릿속의 나이프》(1978), H.글로우너의 《무법자의 거리》(1981), 특히 여성감독 M.톨로타의 《납[鉛]의 시대》(1981) 등이 진출, 각광을 받았다.
전후 독일은 연합군에 의해 각종 생산체제의 규제를 받았다. 이는 영화에도 영향을 끼쳐 대다수의 영화 배급망은 미국이 장악하게 되었다. 이러한 독일 영화의 부재 속에 상업영화 범주에서 동떨어져 작업을 펄쳤던 독일의 젊은 영화인들은 1960년대 활발하게 일어난 프랑스의 누벨 바그를 접하면서 진지한 독일영화를 성찰, 모색했고 새로운 독일영화를 주창하기에 이르렀다. 1960년대말부터 시작, 1980년대 초까지 활발했던 이들의 활동을 뉴 저먼 시네마 라고 하며 이의 시작은 1962년대 오버하우젠 영화제에서 파격적인 선언문을 발표하면서부터다. 선언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제 새로운 영화가 도래할 기회가 왔다. 국제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독일 단편영화들이 토대가 되어 새로운 독일의 장편 영화들을 만들 게 될 것이다. 이 영화들은 새로운 자유를 원한다. 기존의 산업적 관심으로부터 자유,상업적 고려에서의 자유, 특정 그룹의 지배로부터의 자유를. 이제 아버지 세대의 영화는 죽었다.우리는 새로움을 신봉한다."
이들은 TV방송국과 '청년 독일 영화 관리국 Kuratorium Junger Deutscher Film'이라는 비영리 단체로부터 재정지원을 받았고, 이의 재정이 바닥난 후에는 '작가 영화 제작사 '를 설립하여 TV방송국과 공동으로 제작비를 부담했다. 뉴 저먼 시네마의 대표주자들로는 알렉산더 크루게, 폴커 쉴렌도르프,베르너 헤어조크, 빔 벤더스,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등이다. 크루게는 뉴 저먼 시네마를 이끌었던 주동자였으며 ,슐렌도르프는 잘 짜여진 상업적 영화들을 만들었던 것으로 평가받으며 그의 대표작 [양철북]에서는 파시즘의 실체를 우화적으로 영상화해 웃음을 던지고 있다. 헤오조크는 현대인의 욕망과 감정 표출을 잘 이끌어 냈으며 대표작으로는 [아귀레,신의 분노]기 있다. 또한 걸출한 천재 파스빈더는 멜로드라마 형식에 억압받는 사람들, 독일의 왜곡된 현실 등 진중한 무게를 실어 가장 짧은 기간에 기장 많은 ,또한 작품성에 있어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 영화들이 만들어냈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사계절의 상인] [마리아 브라운의 결혼]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등이 있다. 또한 최근까지도 젊은 영화인들이 귀감으로 활발히 활동을 벌이고 있는 벤더스는 로드 무비 3부작 [도시의 앨리스] [빗나간 동작] [시간의 향해]를 통해 독일 전통에 대한 거부와 젊은이들을 표현했다. 열광적이며 활발했던 이들의 활동은 1970년대 후반으로 갈수록 일반관객들과 유리돼 쇠퇴했다.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에서 인종차별과 나치즘에 대한 강도 높은 비판을 하였다.
신독일영화가 퇴조를 보이는 시기는 80년대가 접어들면서이다. 이들 작가군 역시 누벨바그 작가처럼 미국영화계의 진출등으로 와해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신독일영화은 파스빈더가 죽은 82년을 기점으로 삼는 것이 일반적이다. 파스빈더의 죽음은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는 신독일영화의 얼굴이며 가장 왕성한 활동을 한 작가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죽음은 신독일영화의 죽음을 의미했고, 그후 독일영화에서는 70년대 영화의 새로움을 더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4) 현재..
현재 독일을 대표하는 감독은 빔 벤더스이다. 1945년 생인 벤더스 1971년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 으로 영화를 시작, 1983년 "파리텍사스"로 1984년 칸느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는다. 그의 작품에는 새로는 경험을 얻기 위해 일상을 탈출하려는 인간의 모습이 운명적으로 그려져 있다. 그리고 통상 있을 수 있는 사건들이 꼼꼼하게 다루어진다. 그는 1986/87년 "베를린 천사의 시"를 만들었다. 이 작품은 87년 칸느영화제 감독상을 받아 더 유명해 졌는데 철학, 문학, 음악, 미술이 영화예술 속에 절묘하게 녹아들어간 종합예술이다. 베를린 하늘의 천사 다니 엘과 서커스단에서 그네를 타는 여자 마리온의 사랑을 축으로 하는 이 영화는 상징을 통해 삶과 역사의 의미를 추구해간다. 베를린 천사의 시는 여러 가지문제를 예술적으로 승화 시켰다. 그러나 이 영화는 한마디로 어렵다. 킬링타임용이 아닌 진정한 영화팬을 위한 감상용이기 때문이다. 독일영화가 가지는 특성이 바로 이 상징성과 난해성 그리고 철학성이다 이러한 독일영화의 맥을 이으면서도 재미와 시사성을 보여주는 감독이 80년대 중반에 나타난 퍼시 아들론이다. 그는 1984년에 데뷔하여 1987년 "바그다드카페"를 통해 미국에 진출했고, 그 작품 을 통해 유명해졌다. 바그다드 카레는 밴더스의 파리텍사스처럼 로드무비적인 성격을 보여 주면서 도 웃음과 사랑을 담고 있다. 라스베가스로 가는 길 황량한 사막에 위치한 바그다드 카페가 독일여성 야스민에 의해 절서와 활기, 그리고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내용이다. 야스민과 브렌다라는 아주 다른 두 여성이 국가와 인종, 지식과 사고방식의 차이를 극복하고 서로를 이해하게 되는 어쩌면 상당히 이상적인 경향의 영화이다. 이 영화는 1980년대 불어닥친 페미니즘의 경향을 반영하고 있다. 아들론은 91년 "연어알"을 내놓았다. 이 영화 역시 우연히 만남 두 여성이 동고동락의 과정에서 정신적으로 가까워지는 보습을 보여준다. 다만 그 배경이 알래스카의 설원과 서 베를린이다. 그러나 93년에 나온 "영거 앤 영거"는 전편들과 상당히 다르다. 중년 남자가 사별한 아내의 환영을 통해 삶과 죽음 그리고 사랑의 의미를 깨닫게 되는 내용이다. 아들론은 환상적이 면서도 마적인 화면을 통해 독일영화의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Ⅱ. 독일 표현주의 ( German Expressionism )
1. 표현주의의 배경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자 더 이상 군국주의적인 선전 영화를 만들 필요가 없어진 독일 영화계는 세 가지 유형의 영화 제작에 집중하였다. 하나는 1910년대 초에나타나 국제적 인기를 모은 장르로서 스파이와 탐정, 이국적 배경을 담은 일련의 모험물들이었고 두번째는 동성애나 매춘 등을 ‘교육적’으로 다룬 영화들, 마지막으로 전쟁 전에 만들어졌던 통속적인 이탈리아 역사 서사물들을 모방한 영화들이었다. 이 마지막 유형의 영화들이 UFA(Universum Film A.G : 1917년에 참전 지지 영화를 후원하기 위해 만든 거대 영화사) 에 재정적인 성공을 가져다 주었는데, 1919년 에른스트 루비치의 <도바리 부인>은 독일 영화를 세계 영화 시장에 재등장하게 시키는 계기가되었다.
이러한 시기에 독립적으로 활동하던 일부 소규모 영화사들 중 에리히 폼머가 이끄는<데클라 비오스코프(Decla-Bioscop)>사는 두 젊은 작가 칼 마이어와 한스 노비츠가 가져온 독특한 시나리오를 영화화 하는데, 당시 전위 운동의 하나로 처음 미술에서부터 나타난 ‘표현주의’ 사조를 영화에 도입한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1919)>이 그것이다. 이 작품은 색다르게 양식화된 세트, 연극적인 방식의 캔버스 배경과 바닥에 그려진 뒤틀린 건물들을 사용했다. 배우들은 사실적으로 연기하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경련하는 듯한, 또는 춤추는 듯한 움직임을 보인다. 비평가들은 대부분의 다른 예술 형식들에서 적절하게 형성된 표현주의 양식이 영화로 진입했다고 선언했다. 소액으로 제작된 이 영화는 미국과 프랑스, 그 밖의 나라에서 대대적인 선풍을 일으키면서, 표현주의 양식을 모방한 영화들이 대거 만들어지게 한 표현주의 영화의 효시였다.
표현주의 영화의 성공은 독일의 전위적 작업이 주로 상업 영화계 내에서 이루어지게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소규모 영화사들 뿐만 아니라 UFA와 같은 대회사도 표현주의영화 제작에 참여했던 것은 이 영화들이 미국 영화들과 경쟁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1920년대 중반에 이르면 독일 영화는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영화들로 폭넓게 인정받았다.
2. 표현주의의 경향
로베르트 비네의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은 실제로 ‘살아 움직이는 표현주의회화’라고 할 수 있었다. 주로 촬영과 편집에 기반하는 프랑스 인상주의 양식과는 대조적으로 독일 표현주의는 미장센에 크게 의존했다. 표현적 의도에 따라 형태는 비현실적으로 왜곡되고 과장되었으며, 배우는 자주 진한 분장을 하고 갑작스럽게 느리게또는 불규칙하게 동작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미장센을 이루는 모든 요소들이전체 구성을 위하여 회화적으로 상호 작용한다는 것이었다. 인물은 단지 세팅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와 함께 시각적 요소를 이룬다.
프랑스 인상주의처럼 독일 표현주의는 독특한 방법으로 영화매체의 다양한 기법들 - 장면화, 편집, 카메라 움직임 -을 사용한다.
(1) 장면화
프랑스 인상주의의 주요한 특징이 카메라 움직임의 영역인 반면 독일 표현주의는 먼저 장면화의 사용으로 구분된다. 1926년 세트 디자이너 헤르만 바름은 "영화 영상은 조형적 예술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신념으로서 인용했다고 했다. 실제로 독일 표현주의 영화들은 개별적인 쇼트의 구도를 특별히 강조한다. 물론 영화에서 어떤 쇼트든지 시작적인 구도를 창조하지만 대부분의 영화는 쇼트의 종합적인 디자인 보다는 특별한 요소에 주목하도록 한다. 표현주의 영화에서 인물과 관련된 표현능력은 장면화의 모든 측면으로 확장된다. 1920년대 내내 표현주의 영화에 대한 묘사는 자주 "연기 ( acting )" 하는 세트 또는 배우의 움직임과 조화되는 세트를 언급했다. 영화속의 세팅은 거의 살아있는 요소로 기능할 뿐 아니라 배우의 몸 또한 시작적인 요소가 되었던 것이다.
서사영화는 회화나 조각같은 전통적인 조형예술과 다르다. 플롯은 진전되어야 하고 구도는 배우가 움직이면 깨진다. 그래서 표현주의 영화의 연기는 종종 발작적으로 진행되고 서사는 장면화 요소들이 눈길을 끄는 구도로 정렬되는 순간을 위해 잠시 멈추거나 느려진다.
양식화된 표면은 장면화 내의 이질적인 요소들이 비슷하게 보이도록 만들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 칼리가리 >에서 제인의 의상에는 세트와 똑같이 들쭉날쭉한 선들이 그려졌다. <지그프리트>에서 많은 쇼트들은 장식적인 패턴의 다채로움으로 가득찼다. < 진흙인형>에서 왜곡된 게토( 유태인 강제 거주지구 ) 의 세트와 진흙인형을 연결하는 것은 질감인데 세트와 진흙인형은 모두 부드러운 진흙으로 만들어진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또한 전체적인 구도를 강조하도록 배우, 의상, 세트를 조화시키기 위해 대칭을 이용했는데 <일골>에서 찾아볼 수 있다.
아마도 가장 명백하고 널리 퍼진 표현주의의 특징은 왜곡과 과장의 사용일 것이다. 표현주의 영화에서 집들은 종종 뾰족하고 뒤틀려져 있으며 의자들은 길고 계단들은 구부러져 있고 울퉁불퉁 하다. 하지만 표현주의 연기는 전체적인 장면화의 양식과 조화하기 위해 일부로 강화하거나 과장했다. 일반적으로 표현주의 배우들은 자연스런 동작의 효과와는 반대로, 즉 경련적으로 움직이거나 잠시 멈추었다가 움직이는 식으로 행동한다. 그런 연기는 사실주의의 기준이 아니라 배우의 동작이 전체적인 장면화에 얼마나 어울리는가라는 기준으로 판단되어야만 한다. 마지막으로 표현주의 장면화의 중요한 특징은 구도안에 비슷한 형상들을 병치시키는 것인데 표현주의 영화에서 흔히 사용되는 책략은 비슷한 형태를 만들기 위해 왜곡된 나무 곁에 인물을 두는 것이다.
(2) 편집
편집은 대개 단순한데 정사/역사 그리고 교차편집 (crosscutting) 같은 연속성의 장치에 의존하는 식이다. 게다가 독일영화는 이 시기의 다른 영화들보다 좀더 느린 속도를 가지고 있었다. 확실하게 1920년대 초반 표현주의 영화에서는 프랑스 인상주의의 빠른 운율적인 편집에 비견될만한 것이 전혀 없다. 이렇게 느린 속도 때문에 표현주의의 시각적 양식이 만들어낸 특색있는 구도를 유심히 볼 수 있다.
(3) 카메라 움직임
독일 표현주의 영화인들의 가장 뛰어난 공헌 중에 하나는 보다 본격적으로 카메라 움직임을 이용할 수 있게 했다는 것이다. 그동안 연극적인 동작을 기록하는 객관적수준에 머물러 있던 카메라는 주관적인 관점에서 세계를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달리거나 비틀거리고 환각에 의해 어지러워하거나 고통스러워 할 수 있게 해방되었다. 이는 대상을 취급하는 방법에 영향을 끼쳤을 뿐 아니라 전에는 결코 다룰 수 없었던 주제나 인물에의 접근을 가능하게 했다.
3. 표현주의의 종말
독일 표현주의가 사라지게 되는 데는 여러가지 상황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였다. 1920년
대 초의 천정부지 인플레로 독일 영화사들은 자국의 영화를 값싸게 다른 나라로 수출함으로서 국외에 표현주의 제작에 실제적인 이득을 가져왔다. 반면 마르크 환율의 폭락은 독일 영화사들로는 외국 상품을 구입하는데 감당하기 어려웠고 자연 수입을 감소시켰다. 그러나 1924년 미국의 다우스 플랜은 독일 경제를 안정시키는 데 기여했고 외국 영화도 빈번하게 들어오게 됨으로서 거의 10년간 독일이 피할 수 있었던 외국 영화와의 경쟁을 불러왔다. 또한 표현주의 영화의 제작비 또한 치솟고 었었는데, 프리츠랑의 <메트로폴리스>는 엄청난 비용이 든 서사물로서 UFA를 한층 더 재정적인 곤궁에 빠뜨리게 된다. 이렇게 후기 영화가 과도한 제작비를 들이게 되면서 영화계가 힘들어지게 되었는데 이러한 상황은 초기의 표현주의 영화가 그러했듯 저예산의 표현주의 영화를 만들게 할 수도 있었을 것이지만 1927년에 이르러 표현주의 영화 제작인들- 감독, 배우, 세트 디자이너까지-이 할리우드로 이탈하면서 표현주의는 쇠퇴하게 된다.
표현주의가 쇠퇴한 더 튼 이유는 독일의 문화적 분위기가 변했다는 데 있다. 표현주의 양식은 거의 15년 동안 유행했고 점점 대중적인 예술과 디자인으로 스며들었지만 그것이 전의 운동 양식으로 영향력을 유지하기에는 너무나도 통속적이 되었고 예술가들은 더 생생한 방향으로 바귀었다.
많은 예술가들은 표현주의의 일그러진 감정 흐름으로부터 사실주의와 냉철한 사회 비평으로 옮겨갔다. 그런 특성이 통합된 운동을 형성할 만큼 차별화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경향은 신즉물주의 또는 새로운 객관성으로 요약되었다. 예를 들어 게오르그 그로즈와 오토 딕스의 신랄한 정치 풍자만화는 새로운 객관성에서 중심에 위치한다. 그들의 회화와 그림은 표현주의만큼 양식화되었지만 그로즈와 딕스는 동시대 독일의 사회현실에 대한 태도 때문에 그 운동과 거리를 두고 있다.
Ⅲ. 뉴 저먼 시네마 ( 독일 영화의 르네상스 )
1. 뉴 저먼 시네마의 배경
나치 정부는 1933년에 권력을 잡은 후 영화산업을 장악했다. 나치가 패배하자 그와 함께 영화산업도 붕괴되었다. 점령국들은 어떠한 유형의 영화가 만들어져야 하는가를 지시하였다. 서방 점령구에서는 미국이 주도권을 발휘하였다. 엄격한 검열이 독일 영화에 대해 시행되고 미국인들은 이러한 상황을 커다란 독일 시장을 장악하는 기회로 이용했다. 1949년 독일이 공식적으로 동독과 서독으로 나뉘고 난 후 서독 정부는 신용융자를 제공함으로써 영화제작에 다시 활력을 불어넣고자 하였다. 1950년에서 1956년 사이에 훨씬 더 많은 영화가 만들어졌지만 그들은 여전히 비슷비슷한 것들이었다. 1957년 이후 텔레비젼과의 경쟁이 증대되자 이 작은 성장 기간 마저도 끝이 났다. 영화산업은 1961년에 최저점에 떨어졌다. 그해 정부가 해마다 베를린 영화제에서 상영된 최우수 독일 영화에 수여하는 상은 해당작이 없었다.
이 당시 많은 젊은 영화감독들이 단편 영화를 만들고 있었다. 원래 그들은 장편영화를 만들고자 하였으나 기존영화계에서 일을 얻기에는 그들의 방식이 너무도 비전통적이었다. 그들의 단편영화들은 오버하우젠의 특별 영화제에서 상영되었다. 1962년 오버하우젠 영화제에서 26명의 감독들이 "이제 아버지의 영화는 죽었다"라고 선언하며 기성감독들이 사용한 제작비의 절반으로도 더 좋은 영화를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이 뉴 저먼 시네마의 시작을 알리는 오버하우젠 선언이다. 그 선두에는 알렉산더 클루게가 있었다.
오버하우젠 선언 후, 1964년 젊고 경험없는 감독들에게 무상융자를 제공하기 위해 '청년독일영화위원회'가 설립되었다. 이러한 조치는 뉴 저먼 시네마를 위한 돌파구가 되었고, 마침내 클루게의 첫 장편 <옛 소녀>, 폴커 슐뢴도르프의 <젊은 퇴를레스>, 그리고 장 마리 스트라우브와 다니엘 윌레의 <불만>과 같은 많은 중요한 영화들이 개봉된 1966년은 뉴 저먼 시네마의 기점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들의 많은 영화들이 주요 영화제에서 수상하였고, 다른 나라들도 갑자기 독일에서 무엇인가 흥미로운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깨닫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독일의 상업영화계는 독립 영화감독들에 대한 지원을 자유 경쟁을 저해하는 정부의 특혜로 보아 로비활동을 통해 위원회의 예산을 삭감시키고 이미 한 편의 성공적인 영화를 제작한 감독들에게 재정지원을 제한시키는 법안을 통과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 결과 정부의 기금은 젊은 감독들에게서 보다 전통적인 상업영화 쪽으로 옮아갔다. 게다가 젊은 영화감독은 제작기금을 받았다 하더라도, 그들은 훨씬 더 수지가 맞는 할리우드 영화를 포기하지 않고 알려지지 않은 감독들의 다소 실험적인 영화에 모험을 하고자하는 배급업자나 극장주를 찾기 어려웠다.
이러한 문제에 대한 두 가지 해결 방안의 등장으로 이들 영화감독들은 작업을 계속 할 수 있었는데, 첫째는 1971년에 열세 명의 감독들이 모여 작가영화사를 결성한 것이 그것이다. 이것은 클루게와 빔 벤더스를 포함한 주요 감독들이 공동 출자한 독립배급회사였으며,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도 나중에 동참하였다. 이 회사는 잘 운영되었으며, 지금가지 독일내 신독일영화의 주요 배급사 역할을 해오고 있다. 두 번째는 텔레비젼과 관련되는데, 텔레비젼은 일반적으로 영화산업과 경쟁적인 관계에 있다. 당시 독일도 마찬가지만, 독일 텔레비젼은 국가가 경영하고 재정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시청률을 의식하지 않고 대중적이지 않은 영화라도 내보낼 수 있었다. 이들 영화들은 텔레비젼으로 방영되기 전에 극장에서 상영되기도 하였다. 따라서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의 젊은 감독들은 오직 한두 극장에서나 상영될 만한 영화를 텔레비젼의 지원을 받아 제작할 수 있었다.
다시 말해서 배급에 대한 통제와 국영 텔레비젼의 재정지원이라는 배합은 뉴 저먼 시네마에 굳건한 재정근거를 제공해주었다. 이를 통해 많은 주요 감독들의 영화가 예술적인 면과 아울러 재정적인 면에서 성공을 거둘 수가 있었던 것이며, 뉴 저먼 시네마가 활발히 전개될 수 있었던 것이다.
2. 뉴 저먼 시네마의 특징
(1) 프랑스 누벨바그와의 연계성
뉴 저먼 시네마 감독들과 프랑스의 누벨바그와의 연계성은 주목할 만한데, 이들이 단편 영화 제작을 시발로 해서 운동의 토대를 만들어가고 있었다는 점, 감독들의 개인적인 비전이나 개성을 중시하는 작가주의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특히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 스스로가 자신의 영화를 작가의 영화로 인식하고 있었고 프랑스의 작가(auteur)와 독일의 작가(author)는 부분적으로 다른 개념이지만 감독을 영화의 장초자로, 영화를 장조자의 개성이 표현된 것으로 파악하고 있었다는 점에서는 서로 일치한다.
그러나 뉴 저먼 시네마와 누벨바그 감독들간에는 주요한 차이점이 있다. 누벨바그와는 달리 독일의 감독들은 영화형식에 대해 서로 유사한 접근방식을 취하게끔 이끄는 중심적인 이론이나 비판적 입장을 갖고 있지 않았다. 또한 브레송이나 작끄 따띠, 르누아르, 오퓔스로 이러지는 자국의 영화 전통에 대해 신뢰를 갖고 있었던 누벨바그와는 달리 독일이 경우에는 내세울만한 작가가 없었다. 1920년대의 위대한 독일 감독들은 해외로 망명하였고, 나치시대이 영화들은 상여되지 않았으며, 소위 하이마트 영화를 비롯한 당시의 영화들에서는 주목하거나 얻어낼 이점을 찾아낼 수 없었다. 대신 독일인들은 미국영화들과 함께 성장하였으며, 프랑스의 <카이에 뒤 시네마>가 칭송했던 여러 미국 감독들을 숭배하였다.
(2) 실험성
뉴 저먼 시네마의 일련의 감독들은 극소수의 관객을 위해 극히 실험적인 작품을 창작했다. 이를테면 베르너 쉬뢰터의 <마리아 말리브란의 죽음>을 유명한 가수의 삶에 대해 오페라풍의 명상을 부여했다. 양식화된 세트, 의상, 그리고 주위 환경은 표현주의적 전통을 상기시키는 반면에, 캠프 주변의 분위기는 미국의 독립 영화작가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더 폭넓게 접근할 수 있으면서도 웅대한 작품으로는 한스 위르겐 지버베르크의 <히틀러:한 편의 독일영화>나 <파르시팔>을 들 수 있다. 지버베르크는 독일의 역사를 화려하고 장대하며 신비스러운 영상들로 수식하기 위해서 바그너와 브레히트 모두를 원용했다. 그처럼 풍성한 시작적 영상이 아니면서도 관객에게 만만치 않은 작품으로는 장 마리 스트라우브와 다니엘 윌레의 영화를 들 수 있다. <안나 막달레나 바흐의 일생>(1968), <오톤>(1969), 그리고 <레슨의 역사>(1972)는 관객으로 하여금 스토리에 대한 정서적 흡인력에 의존하지 않고 역사적 사실들을 반추하도록 한다는 점에서 브레히트의 영향을 받은 미니멀리스트 작품들이다.
(3) 대중적 영화양식의 차용
뉴 저먼 시네마의 실험성과 비교하여 대중적인 영화양식을 적극 차용하려는 경향이 있었는데, 이는 할리우드의 양식을 차용하고 동시에 수정하는 방법이 그것인데 그 대표적인 예가 파스빈더이다. 파스빈더는 브레히트적인 문제의식을 기반으로 삼으면서 현대사회를 비판하기 위한 전략적인 방법으로, 할리우드의 고전적인 멜로드라마 형식과 양식을 수정한 새로운 양식을 취한다. 그의 영화인 <공포는 영혼을 잠식한다>와 <페트라 폰 칸트의 쓰디쓴 눈물>, 그리고 <폭스와 그의 친구들>은 현란한 화명구성, 색채전략, 비틀리고 비꼬인 플롯과 함께 나오는 카메라의 움직임을 보여준다. 멜로드라마 스타일과 치열한 사실주의를 혼합하고 이것들을 독특하게 양식화한 영화인 셈이다. 이런 양식들을 통해 파스빈더는 양식화와 사실주의의 혼합이 가져오는 것은 어떻게 때때로 권력의 미시정치학에 의해 인간관계들이 결정되는가에 대해 관개그로 하여금 반추하도록 강요한다고 믿었다고 보여진다.
(4) 감각파
뉴 저먼 시네마에는 감각파라고 불리어지는 경향이 있었는데, 이들은 현대적이거나 치열한 비판의식과는 동떨어진 것인데, 우울하고 시적이며 심지어는 신비스럽기까지한 영상들을 추구했다. 대표적인 작가들로는 베르너 헤어조크와 빔 벤더스가 있는데 이들은 유사하지만 상이한 점들을 보였다. 우선 베르너 헤어조크는 감각파의 핵심적인 인물로 알려져 있으며, 그의 영화들은 독일 낭만주의와 신비스럽고도 압도적인 자연관으로 복귀한다. 반면에 빔 벤더스는 미국 유학의 영향이라고도 볼 수 있는 작품들을 만드는데, 그는 유독 미국화된 독일을 집요하게 추구하면서 미국에 의해 잠재의식을 식민화당한 독일의 현재를 들춰내는 감독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이 이루어지는 것은 서사구조에 의해서라기 보다는 전혀 설명적이지 않는 영상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현대에서의 의사 소통 상태를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소도구를 이용하고, 도회지 풍경이나 세속적인 사물들을 강력하게 환기시키는 영상을 계속하여 보여주는 방식을 이용한 것이었다. 이러한 것들은 할리우드식 이야기 전달 관습보다는 벤더스 자신이 존경한다고 말한 바 있는 오즈 야스지로 식의 영상 전달에 더 접근해있는 것이다.
3. 뉴 저먼 시네마의 작가와 작품들
뉴 저먼 시네마는 오버하우젠 그룹의 1기와 그 이후 등장한 2기로 나누어진다고 볼 수 있다.
(1) 뉴 저먼 시네마 1기 감독들
뉴 저먼 시네마는 오버하우젠 그룹의 감독들이 해외영화제에서 큰 주목을 받으면서 시작되었다. 1966년 알렉산더 클루게는 <어제의 소녀>로 베니스영화제에서 은사자상을 수상했고, 1974년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감독의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는 칸영화제에서 비평가상을 수상했다. 이들 오버하우젠 그룹의 감독들을 뉴 저먼 시네마의 1기 감독들로 볼 수 있는데, 대표적인 인물로는 폴커 슐뢴도르프,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한스 위르겐 지버베르크 등이 있다.
1) 폴커 슐뢴도르프
뉴 저먼 시네마의 독일 영화인들 가운데 해외에서 가장 대중적으로 알려진 감독은 폴커 슐뢴도르프일 것이다. 폴커 슐뢴도르프는 1966년 그의 최초의 장편영화 <젊은 퇴를레스>를 만들었고, 그 이후 적극적인 활동을 펼쳤다.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1975)는 그의 아내 마가레테 폰 트로타와 공동으로 각색, 연출한 것으로서 도피중인 한 정치 활동가와 함께 밤을 보내고, 그 결과 당국과 인기있는 언론기관에 의해 추적을 당함으로써 굴욕감을 맛보아야 하는 한 젊은 여자의 얘기이다. 슐뢴도르프의 국제적 성공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바로 나치즘의 폐해를 우화적으로 표현한 <양철북>(1979)이다. 양철북은 슐뢴도르프와 제작자인 에버하르트 융커도르프가 1970년에 함께 설립한 '비모스코프'영화사에서 만든 대표작이다. 1966년에 첫 영화를 발표한 슐뢴도르프는 이후 2편의 영화를 더 만든 후 융커도르프를 만나고 1970년에 <갑자기 부유해진 콤바흐의 빈민들>을 함께 만든 후 지금까지 비모스코프의 동지가 되어왔다.
2)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슐뢴도르프는 스타를 기용하는 대신 무명의 연극배우들을 많이 기용했는데, 그중 대표적 인물이 바로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이다. 파스빈더는 슐뢴도르프이 1969년 영화<바알>에서 조연으로 등장한 것 외에도 함께 활동하던 다른 감독들의 영화와 자신의 영화를 포함해 수십 편에 출연한 배우 겸 감독이다. 그는 1946년 독일 남서부 바바리아 출생으로 1969년부터 본격적인 영화작업을 시작해 장편영화 <사랑은 죽음보다 차갑다>로 데뷔하여 <사계절의 상인>(1971)으로 전후 독일 최고의 영화라는 격찬을 듣는다. 41편의 장편영화와 TV시리즈물을 만든 파스빈더 감독은 38세의 나이로 뮌헨의 아파트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그는 하층계급뿐만 아니라 상층계급의 사람들에게도 분명하게 자신의 얘기를 전달하는 독일 영화감독이다. 1982년 죽기 전까지 파스빈더는 그의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불행한 처지에 폭넓은 정치적인 의미를 불어넣으면서, 정도에서 약간 벗어난 멜로드라마의 특성을 보이는 영화를 제작하였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1973년 영화들인 <노라 헬머>, <마르타>,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에피 브리스트 분수>(1974) 등 결혼한 여자 4부작과 <마리아 브라운의 결혼>(1978), <롤라>, <베로니카 포스의 갈망>의 3부작 등을 연출했다.
이러한 활동에 의해 파스빈더라는 이름은 새로운 독일영화 전체를 대표했고, 세계의 영화애호가들에게는 지금도 '파스빈더=뉴 저먼시네마'라는 공식이 유효하다. 이것은 아마도 같이 활동하던 감독들 가운데에서 가장 독일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유학파와는 달리 독일 안에서만 영화를 공부하고 만들었던 그는 멜로드라마 형식을 빌려 일반인들이 영화에 쉽게 접근할 수 있게 했다. 그러면서도 사회적인 문제를 진지하게 이야기해 독일영화인들의 높은 지지를 받았다. 1982년 그의 죽음에 독일 영화인들은 뉴 저먼 시네마가 끝났다고까지 말할 정도였다.
(2) 뉴 저먼 시네마 2기 감독들
뉴 저먼 시네마 2기는 오버하우젠 그룹의 1기 이후 등장한 감독들로 빔 벤더스와 베르너 헤어조크가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1) 빔 벤더스
뉴 저먼 시네마 2기 그룹 가운데 가장 유명한 빔 벤더스는 미국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로드 무비를 제작한 것이 그 특징이다. 그가 독일태생임에도 불구하고 미국을 찾은 것은 홍수처럼 넘쳐나던 미국 문화를 접하며 성장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연출한 대부분의 로드무비는 미국화된 독일문화를 지적하고, 관객들에게 독일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확인하게 만든다. 빔 벤더스의 초기 작품 중에는 미국의 재즈 음악가인 존 콜트레인의 곡을 제목으로 한 <은빛도시>(1968)와 미국 록그룹 러빈 스푼풀의 곡을 제목으로 한 <도시의 여름>(1970)등이 있다. 이런 영화들은 미국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헐리우드의 스타일과는 닮은 구석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벤더스만의 스타일을 고집하고 있다.또한 벤더스는 <패널티 킥에 대한 골키퍼의 불안>(1972), <도시의 앨리스>(1974), <그릇된 운동>(1975), <거리의 왕>(1976), <미국인 친구>(1977) 등의 작품을 만들었는데, 이러한 작품들은 어느 정도 사회로부터의 개인의 소외, 목적 없는 방황, 도시들, 그리고 미국에 대한 매혹을 담고 있다.
미국을 방랑하며 미국 문화의 역기능을 발견해나가던 빔 벤더스는 1987년 고향 베를린으로 돌아오고 마치 독일의 통일을 예언이라도 하듯이 <베를린 천사의 시>를 만들었다. <베를린 천사의 시>에서 벤더스는 천사와 인간의 삶을 흑백과 컬러로 대비하면서, 베를린 사람들의 이야기를 천사 다니엘을 통해 전하고 있다. 이 영화는 마치 낡은 흑백사진을 들여다보듯 전쟁과 분단 그리고 통일에 이르기까지 굴곡 많은 역사를 가진 베를린을 응시하고 있다. 질곡의 역사는 베를린을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하나로 뒤엉킨 것처럼 보이게 한다. 그렇게 뒤엉켜버린 베를린의 인상은 누런 콘크리트 건물만이 서 있는 길에서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래서 흑백화면으로 시작된 <베를린 천사의 시>는 천사가 인가의 땅에 내려와 인간이 되면서 컬러로 변하고, 베를린에 대한 빔 벤더스의 애정으로 끝을 맺는다. 대게 세상을 좀더 냉정하게 바라보았던 빔 벤더스였지만. 이 영화를 찍을 당시 여주인공이었던 솔베이그와 사랑하는 사이였다는 사실은 다니엘의 이야기가 결국 감독 자신의 것임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이 영화는 빔 벤더스의 독특한 걸작으로 평가받으며 아주 새로운 문제를 영화에서 제시하고 그것을 훌륭하게 표현한 드문 영화 중의 하나라고 평가된다.
2) 베르너 헤어조크
베르너 헤어조크는 <난장이들도 작아지기 시작했다>(1970)를 통해 최초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그 작품에서 헤어조크는 정치적 메타포로서 우스꽝스러울 정도도 무력한 죄수들의 반란을 그리고 있는데, 죄수역은 모두 난쟁이들이 연기를 맡았다. 그의 또 다른 작품<아귀레, 신의 분노>(1973)는 엘도라도를 찾아서 아마존 정글로 탐험대를 이끌어 가다가 과대망상적인 공상에 빠져 종말을 맞게 되는 피자로의 정복자들 중 유일한 생존자인 한사람에 대한 사극물이다. 또한 <카스파 하우저의 신비>(1974)에서 그는 어린 시절부터 계속 어두운 다락안에 홀로 감금된 한 젊은 남자에 대한 19세기의 실제 사건을 극화하였다. 이 작품들을 본 관객들은 역사적인 인물을 소재로 한 역사극을 보았다는 느낌보다는 하나의 환상 세계를 본 듯한 느낌을 받는다. 인물과 사건이 기괴할 뿐만 아니라 관객을 압도하는 영화의 풍경 또한 지극히 환상적이기 때문이다. 뉴 저먼 시네마 감독들 중에서 헤어조크는 가장 독창적이고 상상력이 풍부한 인물로 평가된다. 또한 그는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와 마찬가지로 하층계급뿐만 아니라 상층계급의 사람들에게도 매우 분명하게 자신의 얘기를 전달하는 감독으로 알려져 있다.
4. 뉴 저먼 시네마 이후
82년 파스빈더의 갑작스런 죽음은 여러 가지 의미에서 뉴 저먼 시네마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우선 파스빈더 본인이 왕성한 창작욕으로 문제작을 끊임없이 발표하였고 기이한 언행으로 매스컴을 통해 대중들에게도 뉴 저먼 시네마의 존재를 알린 “뉴 저먼 시네마의 심장”이었는데, 그의 죽음은 바로 견인차의 상실을 의미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82년 독일에서는 중도 좌파에서 우파로의 정권 교체가 일어났다. 국가의 후견 속에서 예술가들의 자유로운 활동과 작업을 보장해 주었던 중도 좌파 정권과는 달리 우파 정권은 유권자와 납세자의 권리가 영화진흥 제도에도 반영되어야 한다는 취지를 표명했다. 그 결과 지금까지 국가의 제도적 지원을 통해서 관객에 대한 고려라는 압력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이 자신의 영화세계를 펼칠 수 있었던 감독들은 더 이상 국가의 재정지원을 받을 수가 없게 되었다. 또한 뉴 저먼 시네마의 대표자들의 끊임없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정권이 보수화 되어 버린 결과는 이들에게 현실 정치에 있어서 커다란 좌절감을 안겨 주었다. 결국 뉴 저먼 시네마의 본질적 특성 중 하나인 현실에 대한 끊임없는 발언! 에 대한 확신이 점점 사그러들기 시작하면서 뉴 저먼 시네마 역시 중심을 잃고 와해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변화의 조짐을 극단적으로 보여 준 영화가 바로 당시 신예 여류감독이었던 도리스 되리의 데뷔작 <남자들…(Manner…)>(1985)이었다. 바람 난 아내를 되찾기 위해서 아내의 애인 집에 신분을 숨기고 입주한 남편이 보헤미안 같은 애인을 회유해서 말쑥한 회사원으로 만듦으로써 아내를 되찾게 된다는 줄거리의 이 영화는 기존의 성 역할을 전도시킨 독특한 이야기와 코믹한 분위기를 통해 당시 5백 10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면서 그 동안 극장을 떠난 관객들을 되찾아 오는 계기가 되었다. 동시에 사회적 신분상승과 물질만능주의를 전면적으로 거부하는 삶을 살던 아내의 애인이 남편의 회유와 설득을 통해서 결국에는 기성 사회제도 속으로 편입된다는 영화의 설정은 뉴 저먼 시네마를 이끌어 온 68세대의 마지막 환상과의 결별을 선언하는 것이기도 했다.
오버하우젠 선언을 계기로 설립된 영화학교에서 전문적인 지식과 기술을 습득하고 라인강의 기적의 달콤한 열매만을 향유하며 독일 역사에 대한 죄의식도 없이 성장한 새로운 세대는 이제 더 이상 영화를 통해서 현실에 직접 개입하려 하지 않았다. 나아가서 이들은 뉴 저먼 시네마의 모토와 그 대표자들의 경제적, 미학적 죽음을 선언하면서 할리우드와 뉴 아메리칸 시네마에 근거한 관객 중심의 영화를 지향하고 나섰다. 낡은 영화의 죽음을 선언하고 등장했던 뉴 저먼 시네마가 이들의 눈에는 이제 자신들의 성향에는 맞지 않는 낡은 영화로 비친 것이다. 이들은 감독 중심의 작가주의를 거부하고 집단 작업의 원리에 근거한 영화를 표방하면서 현실에서의 무거운 문제들 대신 사적이고 개인적인 경험에 근거한 재미있는 이야기를 영화 속에 담고자 했다.
90년대에 들어와 두각을 나타낸 이들 젊은 감독들은 경쾌한 로맨틱 코미디를 통해 같은 또래의 젊은 관객층을 주로 공략함으로써 연이은 대중적 성공을 거두었다. 1990년대에 들어서서 10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한 독일영화의 편수가 지속적으로 증가하였고, 특히 1996년에는 무려 6편의 영화가 10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하면서 독일 영화의 붐을 조성하였다. 국제적 명성과는 달리 자국 관객들을 영화로부터 멀어지게 했던 뉴 저먼 시네마와는 달리 철저하게 관객의 취향에 부응했던 이들 영화를 통해서 스크린 쿼터와 같은 자국영화 보호장치의 부재로 할리우드 영화의 독무대였던 독일 영화시장에서 독일 영화의 비율이 점차 상승하게 되었다.
이러한 로맨틱 코미디의 붐에 대해 많은 관계자들은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기도 했다. 모든 잠재적 갈등을 철저하게 제거한 이 영화들은 향토영화 이래로 독일 영화 장르 중 가장 끔찍한 것이라는 혹평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반대 의견도 제시되었다. 즉 당시 통일에 따른 여파로 어려웠던 현실 상황에서 이 영화들은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었고, 연이은 흥행성공으로 제작비 수급이 원활해짐으로써 점차 다양한 주제의 영화들이 모색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실제로 그 이후 로맨틱 코미디와 더불어서 다양한 주제와 소재의 영화들이 제작되었다. 청각장애인 부모 밑에서 점점 음악을 통해 자신의 독자적 삶을 찾아가는 소녀의 이야기를 그린 카롤리네 링크의 <침묵의 저편 (Jenseits der Stille)(국내 출시명: 비욘드 사일런스)>(1996)이나 연쇄살인범의 내면을 끈질기게 파헤친 로무알트 카르마카의 <죽음의 사자 (Der Todmacher)>(1998), 젊은 해커를 둘러 싼 음모를 다룬 한스 크리스치안-슈미트의 <23>
(1999) 등 다양한 장르와 주제의 영화들이 실험적으로 제작되기도 했다. 특히 게임에서 차용한 이야기의 틀과 테크노 음악을 절묘하게 결합시킨 톰 티크베어의 <롤라 런(Lola rennt)>(1998)은 국제적으로 비평과 관객들의 고른 지지를 얻어 뉴 저먼 시네마 이후 변모된 독일 영화의 모습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게 해주었다.
2001년 현재 독일 영화는 관객수의 중가와 극장 스크린 수의 증가 그리고 자국 영화 비율의 증가라는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커다란 변화는 바로 지금까지 기형적 형태를 가지고 있던 독일의 영화산업계가 제대로 된 산업구조를 확보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독일 영화의 붐을 통해서 독일 영화계는 제작과 배급에 이르는 전 과정을 혁신할 수 있었고, 이를 통해 공적 자금의 지원 없이도 지속적인 제작과 공급이 가능한 자기순환 시스템을 확보하였다. 심지어 최근에는 할리우드 스튜디오가 독일 영화의 제작자 혹은 배급자로 나서는 경우가 빈번해지고 있다. 물론 이러한 변화는 독일영화에서 느낄 수 있던 “독일적인 것”의 상실을 의미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다양성의 상실이라는 대가를 치르지 않는 한, 결코 나쁜 것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Ⅳ. 베를린 영화제
< 베를린 영화제의 어제와 오늘 >
깐느와 베니스와 함께 세대 3대 국제영화제로 꼽히는 베를린 국제 영화제는 세 개의 영화제 중 가장 늦은 1951년에 시작되었다. 세계2차대전이 끝난 후인 당시의 베를린은 고립된 셈이나 마찬가지였고 독일은 전후 복구사업에 정신이 없던 시기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1951년 6월 처음 개최된 베를린 영화제는 동구권 영화들을 다수 초청하는 등 동서화합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당시 분단되었던 독일의 통일을 기원하는 영화제로 시작되었다.
베를린 영화제는 공식경쟁 부문, 파노라마 부문, 포럼 부문, 회고전, 아동영화제 등의 프로그램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이들 외에 그때 그때마다 시의적절한 프로그램이 덧붙여진다. 이들 다양한 프로그램에 관객 모두가 참여하여 영화축제를 벌인다. 이러한 영화제의 성격 때문에 베를린 영화제의 그랑프리는 처음부터 '금곰상'으로 불리워졌으며 심사위원이 아닌 일반 관객들이 투표를 해서 결정하는 파격적인 형식이었다. 당초 베를린 영화제는 베를린 중심가에서 멀리 떨어진 슈테글리츠 지역의 티타니아 팔라스트 극장에서 처음 시작되었다. 그러나 영화제의 규모가 커지면서 관객들의 투표로 결정되던 금곰상이 이제 국제 심사위원단에 의해 결정되기 시작했고 영화제 주건물은 쿠어퓌르스텐담으로 옮겨졌다. 이시기 베를린 영화제는 알프레드 바우어 집행위원장이 이끌어나갔다.
60년 들어오면서부터 영화제에서 선보이는 '낡은 영화'에 대한 저항이 시작되었다. 특히 영화제를 이끌던 알프레드 바우어의 영화 선택이나, 교회의 커다란 영향력, 그리고 동유럽 감독들에 대한 무시 등이 비판되었다. 70년에는 경쟁부문에 출품된 독일 영화 <OK>가 반미적 성향을 보여 심사위원이 사퇴하고 경쟁부문 심사가 중단되는 커다란 스캔들을 겪기도 했다. 이로 인해 그 다음해인 1971년 '영 포럼' 부문(공식 명칭 : 새로운 영화의 국제 포럼 The International Forum of New Cinema)이 새로운 영화들을 받아들이기 위한 부문으로 설치되었다. 경쟁부문과 독립적으로 운영되는 영 포럼은 당시 정치적, 미학적 격변을 주도하면서 학생운동의 중심이 되던 작은 소극장들에서 열렸다. 초기에는 소규모 자본으로 만든 진보적인 영화들을 주로 소개하다가 점차 새롭고 혁신적이며 실험정신이 깃든 영화들을 소개하는 경향으로 바뀌고 있다. 전세계의 유명 영화감독 가운데 초기시절 이 '영 포럼' 부문에 작품이 소개되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이 부문의 권위를 인정받고 있다.
78년 알프레드 바우어의 후임으로 집행위원장을 맡게 된 볼프 돈너는 침체에 빠져있던 베를린 영화제를 깐느와 베니스 수준으로 이끌러올리기 위해 노력하면서 깐느 영화제와의 경쟁을 피하기 위해 개최시기를 2월로 앞당기게 된다. 이후 80년부터는 모리츠 데 하델른이 집행위원장을 맡아 베를린 영화제를 책임지게 된다. 모리츠 데 하델른은 영화제를 경쟁부문과 그외 5개 부문 및 회고전으로 구성하면서 영화제를 새롭게 정비하고 이후 2001년까지 22년동안 성공적으로 베를린 영화제를 이끌어 와 영 포럼을 30년간 이끌고 있는 울리히 그레고르와 함께 베를린 영화제를 대표하는 인물로 자리잡게 된다. 이시기에 베를린 영화제의 메인 극장은 조 팔라스트(Zoo Palast) 극장이었다. 동물원 성이라는 별명이 붙은 까닭은 이 극장 바로 옆에 넓은 동물원이 있기 때문이다. 조 팔라스트는 현대 설비를 갖춘 대형 극장으로 동시통역 시설까지 완비했고 경쟁부문 참가작들이 바로 이 극장에서 선을 보였다. 50주년을 맞이하는 2000년부터는 포츠담 광장으로 옮겨 영화제가 진행되고 있다.
베를린 영화제는 영화제를 주관하는 기구가 회사형태를 띄고 있는 독특한 조직으로 되어있다. 명칭은 '베를린 축제 유한회사(Berliner Fest-Spiele Gmbh). 이 유한회사의 총예산중 50%는 연방정부가 지원하고 나머지는 주정부 보조금과 기타 수입으로 채워진다. 베를린 영화제의 1년 예산이 최근에는 40억원을 상회하므로 아무리 여유가 있는 독일이라 할지라도 만만치 않은 금액인 것은 사실. 80년대 초반, 재정적 어려움으로 영화제 존폐위기에까지 몰렸던 베를린 영화제는 헐리우드의 재정적 지원으로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이후부터 영화제 고유의 색깔을 잃어버린 채 지나치게 헐리우드 영화들 위주라는 비판을 받게 되고 경쟁부문 영화 선정을 둘러싸고 심심찮게 로비설이 오가게 되었다. 80년 이후 <레인맨>, <뮤직박스>, <그랜드 캐년>, <센스 앤 센서빌리티>, <래리 플린트>, <씬 레드 라인> 등 헐리우드 메이저 영화들이 대거 금곰상을 수상하는가 하면, 영화제에 참석한 할리우드 스타들에게만 스포트라이트가 집중되는 등 이후 베를린 영화제는 실험적이고 진보적인 영화들을 선호한다는 명성이 퇴색되기 시작했다. 2002년부터 모리츠 데 하델른의 뒤를 이어받은 디이터 코슬릭 집행위원장은 "나의 목적은 베를린영화제를 독일영화산업이 일체감을 갖는 영화제로 만드는 것"이라면서 베를린 영화제의 촛점을 독일영화 살리기에 맞추며 침체에 빠진 베를린 영화제에 활력을 넣기 위해 힘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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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기 영화
새와 같이 하늘을 날고 싶은 욕망처럼 인간은 오랜 세월 동안 현실에서의 움직임을 그대로 재현하고픈 욕망을 꿈꾸어 왔다. 이성과 합리성을 발판으로 발전한 서구의 자연과학과 기술은 19세기 말 드디어 기계의 힘을 빌어 그러한 오랜 욕망들을 실현하였다. 영화는 말하자면 1895년에 발명된 것이기 이전에 수천, 수만 년에 걸친 인간의 오랜 소망이 실현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기술의 발전이 가져다 준 또 다른 결실인 산업혁명의 지각생인 독일에서도 영화는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바리에떼와 장터의 진기한 눈요기거리에서 출발하였다. 그러나 1900년을 전후로 급성장한 대도시를 중심으로 상설극장이 빠르게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러한 영화의 정착은 제작과 배급, 상영에 있어서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왔을 뿐 아니라, 영화 자체에도 근본적인 변화를 강요했다. 그때까지 이른바 “프롤레타리아의 오락거리”로 치부되었던 영화는 이제 빈 극장을 꽉 채울 관객이 무엇보다도 필요했다. 이를 위해 영화는 자신의 “땀냄새”를 가려 당시의 교양시민 계층의 관심을 끌기 위한 수단으로 이들의 주요 문화적 향유 대상이었던 문학과 연극을 모방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영화는 대중적 영향력을 성공적으로 확산하였고, 이에 위기를 느낀 기성 문화계는 비로소 영화를 진지한 성찰의 대상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특히 이 과정에서 독일 영화는 역사를 관류하는 특유의 관념적, 환상적 특징을 갖게 되었다. 당시 영화를 이론화하는 과정에서 영화의 본질에 대한 숙고와 논쟁이 벌어졌다. 이 논쟁은 두 가지 서로 상반된 입장에 의해서 주도되었는데, 어떤 이들은 영화의 본질이 인간의 지각능력을 능가하는, 사실의 객관적인 재현에 있다고 본 반면, 어떤 이들은 현실에서 불가능한 환상을 시각적으로 구현해 내는 것이 영화의 본질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원론적 논쟁에서 관념적 이상주의와 낭만주의의 오랜 전통을 갖고 있던 독일의 경우, 자연 후자의 입장이 득세를 하게 된 것이다. 즉 현실에서 불가능한 꿈과 환상을 시각적으로 재현하는 것이 영화의 본질이고 따라서 영화는 그러한 꿈과 환상이 가득한 이야기를 그려야 한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가령 당시 영화를 예술의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한 목적으로 저명한 작가들이 집필한 창작 시나리오 모음집이었던 “영화책(Das Kinobuch)”(1914)은 기괴하고 환상적인 이야기 일색이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사랑을 획득하기 위해 악마에게 그림자를 판다는 <프라하의 대학생>(1913)이나 진흙 인형이 살아나 살인 행각을 벌인다는 <골렘>(1914)과 같은 영화들이 제작되게 된 것이다. 말하자면 이 영화들은 영화에 대한 독일적 입장을 반영한 것일 뿐 아니라 주제적인 측면에서도 이미 표현주의 영화를 예고하는 것이기도 했다.
1900년대 초 이미 독일 영화계는 제작과 배급, 상영으로 이루어진 산업적 시스템을 갖추기 시작해 베를린을 중심으로 많은 스튜디오와 영화사들, 그리고 1천 석 이상의 초대형 호화판 “극장궁전”들이 세워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시장의 주도권은 할리우드를 필두로 한 프랑스, 이탈리아, 북구 유럽과 같은 외국 영화들이 쥐고 있었다. 1914년에 발발한 1차 대전은 이러한 독일 영화계를 재편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당시 교전국이었던 외국의 영화가 수입금지 됨에 따라 반대로 독일 국산 영화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게 되었다. 동시에 전쟁을 수행하던 위정자들은 영화의 막대한 선전선동적 파급력에 주목을 하고, 이를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국가주도의 거대 시스템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그 결과 그때까지 우후죽순 식으로 난립하던 군소 영화사들은 국가의 주도 아래 하나의 거대한 영화사로 통합되기에 이르는데, 이것이 바로 이후 할리우드와 필적하면서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의 독일 영화의 명성과 전설의 산실이 되었던 UFA(Universum Film Aktiengesellschaft)가 된 것이다.
■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
1차 대전의 패망과 함께 갑작스럽게 주어진 민주주의 제도는 전쟁의 후유증과 함께 사회정치적 혼란과 불안을 가중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하지만 외국영화 수입금지를 계기로 급성장했던 독일 영화계는 값 싼 노동력과 고급 인력을 토대로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게 되었다. 1919년 한 해 동안 200여 개의 제작사에서 500여 편의 영화가 제작되어 3,000여 개의 극장에서 상영되었고, UFA는 평균 1,500석 규모의 극장 11개를 포함해서 모두 2,500명의 직원을 거느린 초대형 영화사가 되어 할리우드의 스튜디오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물론 이 시대를 대표하는 영화는 뭐니뭐니 해도 세계 영화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던 표현주의 영화이다. 하지만 표현주의 영화가 이 시대 영화의 전부인 것은 아니었고, 다양한 장르 영화들과 실험적 영화들 또한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했다.
표현주의란 세기말 독일에서 음악과 회화, 문학, 연극 등 문화예술 전반에 걸쳐서 일어난 진보적 예술 운동이었다. 이는 기존의 모든 예술적 수단들을 거부하고 현대 사회의 복잡하고 분열적인 인간의 본질을 드러낼 수 있는 진정으로 새로운 표현방식을 탐구하였다. 이를 위해 대상 자체에 대한 관심보다는 그것을 인지하고 느끼는 인간의 내면을 “표현”해내기 위해 끊임없이 새로운 시도들을 했다. 그러나 1920년대에 접어들면서 표현주의는 애초의 진보적이고 혁명적인 색깔이 바랜 상태에서 당시의 시대정신을 담고 있는 문화적 유행으로서 대중적인 향유의 대상이 되었다. 이러한 맥락이 표현주의 영화의 탄생 배경이라 할 수 있다. 즉 영화계는 한편으로는 아직까지도 논란이 되고 있던 영화의 예술적 가능성을 입증하기 위해서,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표현주의의 대중적 파급력을 영화를 통해 확대 재생산하기 위해서 이를 영화에 도입한 것이다. 최초의, 또 심지어는 유일한 표현주의 영화로도 일컬어지는 로베르트 비네의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1919/20)은 이렇게 현실적인 동기에서 만들어지긴 했지만 영화적 표현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는 위대한 공로를 세웠다. 뭉크의 “절규”를 연상시키는 굵고 단순한 윤곽선으로 과장되고 왜곡되게 묘사된 무대배경은 이를 담당했던 바름의 “영화 영상은 조형적 예술이 되어야 한다”는 말처럼 지극히 평면적이고 회화적이다. 또한 “영화는 빛과 그림자의 예술”이라는 말처럼 이들의 강렬한 대비를 낳는 극단적 조명방식과 마치 춤을 추듯 과장된 배우의 연기 등, 이 영화를 통해서 제시된 표현주의 영화의 특징은 그 이후 사실의 재현에 연연해 하지 않는 무수한 영화들의 원형이 되었다. 정신병원장인 칼리가리 박사가 몽유병환자에게 최면을 걸어 살인 행각을 벌이게 함으로써 마을을 공포에 빠뜨린다는 이야기 또한 현실세계의 논리와 이성을 떠난 비현실적 꿈과 환상의 세계를 동경하는 독일 특유의 전통적 맥락에 닿아 있다. 특히 이 시기 독일 영화들 속에 등장하는 흡혈귀(무르나우의 <노스페라투>), 연쇄 살인범(프리츠 랑의 <엠>)과 같은 초현실적, 초자연적 존재로 인한 공포는 당시 독일의 총체적인 혼란으로 인해 불안에 빠진 군중들의 욕망과 심리가 왜곡된 형태로 투사된 일종의 “현실의 전이”(크라카우어)이기도 했다.
비단 표현주의 영화가 아니더라도 이 시기 독일에서 제작된 영화는 그 자체로서 하나의 신기원이 되었다. 무르나우의 <노스페라투>(1922)는 흡혈귀 영화의 원조로서 이후 30년대 미국의 공포영화와 60년대 영국에서 제작된 드라큘라 시리즈 등으로 대표되는 호러 장르의 출발점이 되었다. 프리츠 랑의 <메트로폴리스>(1927)는 비록 초연 당시에는 흥행실패와 혹평의 표적이 되었지만, 미래세계의 비전을 시각적으로 재현한 최초이자 최고의 SF영화로서 세계 영화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였다.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 있는 미래 도시의 모습과 그 위를 날고 있는 비행기, 자동차의 모습 등은 <블레이드 러너>를 필두로 무수한 영화들 속에서 다시 등장하곤 한다. 그가 1931년에 연출한 <엠> 역시 심리 스릴러라는 장르를 개척한 최초의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한편 1940년대 미국에서 양산된 “필름 느와르” 장르의 어둡고도 암울한 분위기가 표현주의 영화의 조명기법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라는 사실은 이제 상식이 되었다.
표현주의 영화 외에도 당시에 많이 제작된 대표적 장르로서는 실내극영화
(Kammerspielfilm)를 들 수 있다. 이 명칭은 연극에서 차용한 것으로 실내의 제한된 공간 속에서 제한된 인물들이 등장하여 이야기의 진행보다는 인물의 내면을 탐구하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영화는 연극의 이러한 전통을 이어받아서 장소를 제한하고 인물의 심리적 갈등을 천착하였다. 이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것이 바로 무르나우의 <마지막 웃음>(1924)이다. 특히 이 영화는 호텔 도어맨에서 하루아침에 화장실 청소부로 전락한 소시민적 남자의 내면을 당시 경량화된 카메라 장비를 최대한 활용하여 중간 자막의 사용 없이 “해방된 카메라”의 기치 아래 시각적으로 구현함으로써 지금까지도 “가장 영화다운 영화”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1929년 세계 경제 공황의 여파로 그 동안 잠시 안정되었던 독일의 경제가 다시 침체의 늪에 빠지자 예술을 통해 현실 사회의 문제에 개입하려는 경향이 두드러지게 된다. 그 결과 낙태 문제나 전쟁 문제 등 동시대의 주요 사안들을 직접적으로 다룬 영화들이 제작되었다. 이 외에도 당시의 혼란스런 이념 투쟁의 와중에서 영화를 보다 적극적인 이념전파의 수단으로 활용하고자 하는 시도들이 존재했다. 특히 당시 소련에서 수입된 에이젠슈테인의 <전함 포템킨>(1925)은 좌절한 혁명으로 낙담하고 있던 독일의 사회주의자들에게 영화의 예술적 가능성과 이념적 활용이 별개의 문제가 아닐 수 있다는 믿음을 주었다. 그래서 이들은 공산주의 노선의 영화를 제작하고 배급하는 영화사를 새로 설립하여 선전선동 영화의 제작을 시도했다. 그 중에서도 불가리아 출신인 두도프 감독이 브레히트와 함께 작업했던 <쿨레 밤페>(1932)는 당시 분명하게 공산주의 노선을 표명한 유일한 영화로서 당국의 검열과 탄압의 표적이 되기도 했다. 일자리를 얻기 위해 온 도시를 자전거로 누비지만 결국 일자리를 얻지 못하고 자살하는 젊은이의 비극으로 시작되는 영화는 체념과 무기력에 빠진 기성세대와는 달리 서로 합심해서 건전한 정신과 건강한 육체를 단련하는 젊은 세대의 모습을 보여 주면서 모순된 세상을 바꿀 “세상의 주인은 과연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관객에게 던진다. 이 영화의 검열과 상영 철폐를 둘러싼 스캔들을 계기로 영화의 이념도구적 가능성에 주목을 한 새로운 정치집단이 등장했는데, 이들이 바로 히틀러를 중심으로 한 국가사회주의당, 즉 나치당이었다.
■ 나치 시대의 영화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의 혼란과 불안을 틈타 정권을 잡은 국가사회주의당은 대중매체, 특히 영화의 대중적 파급력에 주목하여 집권과 동시에 이를 모두 장악하였다. 영화산업은 모두 국유화되었으며 정부의 규제를 받게 되었고, 표현과 비판은 엄격한 통제와 검열을 받아야 했다. 그리고 예술적으로나 사상적으로 나치에 동조하지 않은 많은 영화인들은 강제로 추방되거나 수용소 행을 피하기 위해 해외 망명의 길에 올라야 했다.
나치 영화의 대외적 이미지와 영화의 정치도구적 가능성은 바로 레니 리펜슈탈에게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전직 무희 출신으로서 산악영화의 여주인공으로 스타가 되었던 리펜슈탈은 히틀러의 총애를 받고 그의 특명으로 나치 전당대회에 관한 기록영화를 제작한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의지의 승리>(1935)는 기록영화의 새 장을 열었다는 평가와 함께 영화의 이념적 도구화의 한 전범을 보여준 가장 매혹적인 선전선동 영화가 되었다. 국제올림픽위원회의 위임을 받아 제작된 올림픽 공식 기록영화인 <올림피아 2부작>(1936) 또한 스포츠 기록영화의 신기원을 이룩함과 동시에 나치의 예술관과 세계관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역사적 기록이 되었다. 나치 선동영화의 또 다른 축을 형성하는 것은 이른바 “반유태인 영화”라 할 수 있다. 주로 이상적 독일인과 이기적 유태인으로 이루어지는 인물구도는 일반적인 장르 영화 속에서도 빈번하게 등장하지만, 유태인 체포, 압송 전날의 준비용으로 상영되었던 <영원한 유태인 DER EWIGE JUDE>(1937)과 <유태인 쥐스 JUD SUSS>(1940)는 노골적으로 유태인을 사악한 암적 존재로 부각시킴으로써 유태인 말살정책을 묵인하는 사회분위기를 유도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나치 시대의 영화들이 모두 선전선동 영화였던 것은 아니다. 히틀러가 권력을 잡은 1933년부터 45년 패전까지의 시기에 제작된 약 1,100여 편의 영화 중 선동영화가 차지하는 비중은 15% 내외였다. 오히려 코미디(48%), 멜로(27%)와 같은 전형적인 장르 영화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나치 시대 영화에 대한 제왕적 전권을 갖고 있던 선전선동부 장관 괴벨스-최근 국내에 소개된 <꿈 속의 여인>(1988)에서 미성숙한 마마보이로 희화화되기도 했다-는 영화를 통한 메시지의 전달이 전면에 나서지 말아야 하고, 영화적 기술과 예술성을 통해 전달되어야 효과적이라 강조했다. 따라서 이들은 노골적인 선전선동보다는 장르 영화의 대중성을 통해 은연 중에 자신들의 이념을 전파하고자 했다.
2차 대전이 일어난 39년까지 나치 영화는 미국 영화와 치열한 경쟁을 해야 했다. 당시 독일은 한편으로는 미국의 자본주의와 대중문화를 거부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코카콜라를 마시며 할리우드 영화를 즐겼다. 그래서 당시 독일 영화계는 할리우드 영화를 모범으로 삼아 이를 독일화하는 시도를 하게 되었다. 그 결과 <대지진>을 흉내 낸 <아나톨 시>(1936)와 같은 재난영화나 프랭크 카프라의 <어느날 밤에 생긴 일>(1934)을 독일화 한 <행운아>(1936)같은 스크루볼 코미디가 만들어졌고, 일찍 미국으로 진출해 나치에 등을 돌렸던 마를레네 디트리히에 대항할 짜라 레안더와 같은 스타를 키우기도 했다. 이 시대의 이러한 “분열된 의식”은 전쟁이 발발하면서 민족주의적 복고주의로 변화한다. 이는 무엇보다도 전시에 국민들을 단결시키고 한 민족으로서의 공동체 의식과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독일이 낳은 위인들의 일대기를 다룬 전기영화와 시대극이 양산되었고, 전쟁으로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는 연인들의 숭고한 사랑을 경쾌하게 그린 멜로드라마나 뮤지컬이 관객몰이를 했다. 이런 경쾌한 분위기는 그러나 패전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던 40년대 말에 와서는 감상적인 분위기로 반전되었다. 영화 속에서 현실을 망각하고 외면하고자 했던 독일 국민들은 이제 자신들의 암울한 현실에 대한 불안과 슬픔을 표출할 출구로서 영화를 보았던 것이다. 이러한 장르 영화들 속에서 특히 여성들은 나치의 이중적인 여성관의 희생양이 되었다. 여자 주인공들은 대개 처음에는 매우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모습을 표방하면서도 궁극적으로는 가정과 살림을 꾸려나가는 존재로 그려지곤 한다. 그래서 많은 멜로드라마와 코미디의 여자 주인공들은 결국 자신의 사회적 경력과 발전을 포기하고 가정에 안주하거나 일편단심으로 전선에 나가 있는 남편을 기다리는 순정파 여인으로 길들여진다.
해군이 전리품으로 노획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독일에서도 컬러영화를 제작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래서 거짓말을 일삼으며 진기한 모험 행각을 벌이는 귀족을 주인공으로 한 <뮌히하우젠>(1942/43)이 최초의 컬러영화로 제작되었다. 이 영화는 <브라질>로 유명한 영국 출신의 테리 길리엄에 의해서 리메이크되기도 했다. 패전을 눈앞에 둔 독일인들에게 최후의 총력전을 독려하기 위해 만들어진 <콜베르그>
(1943-45)는 나폴레옹 치하에서 그에 반기를 든 인물과 마을 사람들의 독립 투쟁을 대규모 전투 장면을 통해 보여준다. 엄청난 물량과 인원, 장비를 동원한 초대작 컬러영화였던 이 영화는 파멸을 눈앞에 둔 나치의 영화를 통한 최후의 발악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너무나도 시대착오적이었다. 또한 이 영화는 관객을 직접 접할 수 없었다. 개봉을 바로 앞두고 독일이 연합군에게 무조건 항복을 했기 때문이었다.
나치 시대는 독일 역사에 있어서 세월의 흐름과 망각으로도 가릴 수 없는 커다란 오점으로 남아 있다. 동시에 이는 역사의 중대한 단절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는 영화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표현주의 영화를 필두로 만개했던 독일 영화는 나치 시대를 관통하면서 모든 인적, 산업적, 예술적 역량을 상실해 버리고 남은 것은 폭격으로 인한 폐허와 사람들의 마음 속 깊숙이 자리잡은 지울 수 없는 상처뿐이었다.
2차 대전 종전 시기부터 뉴 저먼 시네마의 등장까지의 기간은 최근까지도 독일 영화사에서 일종의 암흑기로 치부되었다. 특히 라인강의 기적이라 일컬어지는 초고속 경제 성장의 와중이었던 50년대는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아데나워 수상의 모토처럼 “아무런 실험도, 아무런 위험감수도, 아무런 움직임도 없던” 시대의 분위기에 상응하는 그저 평균적인 장르영화들이 양산되던 시기였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이 당시의 영화를 보기엔 인생이 너무 짧다”고 비아냥거리기까지 했다. 하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이 시기는 상업적인 측면에서 독일 영화의 전무후무한 전성기이기도 했다.
패전의 여파로 독일 영화산업은 말 그대로 폐허와 잿더미 위에 서 있었다. 나치 시절까지 국제적 수준을 자랑하던 영화산업의 인프라는 전쟁의 와중에 와해되었다. 독일 영화를 이끌던 수많은 영화인들이 나치의 탄압을 피해 외국으로 망명했고, 영화산업 역시 연합군의 융단폭격을 피할 수 없었다. 특히 패전 직후 진주한 연합군은 나치 시대의 영화가 선전선동 수단으로 악용된 점을 주시하여, 영화를 포함 모든 대중매체를 금지시켰고 허가제를 도입했다. 이를 통해서 비전문가가 영화제작에 참여하고 배급업자들이 영화계를 장악하는 기현상이 벌어졌다. 특히 할리우드의 영화는 독일 국민의 “탈나치화”와 “재교육”이라는 명분 아래 아무런 저항 없이 시장을 장악하게 되었다(독일에 자국 영화를 보호할 수 있는 스크린 쿼터와 같은 제도가 없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하지만 일부 영화인들은 이렇게 열악한 여건 속에서도 새로운 영화를 시도하고자 했다. 볼프강 슈타우테의 <살인자는 우리들 중에(Die Mo rder sind unter uns)>(1946)와 헬무트 코이트너의 <그 때 그 시절(In jenen Tagen)>(1947) 등은 폐허 위에서의 삶의 모습들, 전쟁의 후유증, 죄의식을 진솔하게 그림으로써 독일에서 네오 리얼리즘의 가능성을 개척했다. 하지만 곧 이은 경제재건의 바람과 정치적 보수화는 “폐허 영화”가 들이민 괴로운 현실의 자화상을 애써 외면하고자 했다.
급격한 경제 성장으로 삶의 여유를 회복한 독일인들은 고된 노동에 대한 위안을 영화관에서 찾기 시작했다. 영화관으로 몰려드는 관객들에게 영화계는 대중들의 취향에 눈 높이를 맞춘 상업적 장르영화들로 화답했다. 탐정물, 모험물 외에 이 시기를 대표하는 장르영화는 단연 향토영화(Heimatfilm)였다. 한스 데페 감독의 <슈바르츠발트의 소녀(Schwarzwaldmadl)>(1950)는 산업화의 물결 속에서 점차 사라져가는 전원에서의 목가적인 삶을 그림으로써 무려 1천 6백만의 관객을 동원하는 독일 영화사상 최고의 흥행기록을 거두었다. 관객들의 이러한 폭발적인 호응의 원인은 현실 도피와 향수로 요약될 수 있다. 당시 독일인들은 경제 재건을 빌미로 전쟁의 아픈 기억으로부터 탈출하고자 했다. 현실을 잊고자 했던 이들에게 어린 시절 시골 고향의 모습은 이들의 과거에 대한 쓰라린 기억을 대체하기에 아주 좋은 것이었다. 또한 대다수 독일인들은 급격한 현대화와 도시화 속에서 사라져 가는 고향에 대해 향수를 느끼고 있었으며, 2차 대전 패전과 함께 동구권의 구 독일 영토에서 추방된 실향민들 역시 잃어버린 고향을 못내 그리워했다. 갈등보다는 전원에서의 조화로운 생활에 초점을 맞춘 이 독일 특유의 장르영화는 50년대를 관통하면서 무수한 아류작들을 양산하였으며, 오늘날까지도 TV시리즈의 형태로 끈질기게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종종 향토영화의 변형으로 등장하는 또 다른 대표적인 장르영화로는 “의사영화”가 있었다. <홀 박사(Dr. Holl)>(1951), <시골 여의사(Die Landa- rztin)>(1955)와 같은 영화들은 시골에 은둔하면서 박애정신을 몸소 실천하는 인간애 넘치는 의사들을 주인공으로 하고 있다. 이렇게 의사영화가 인기를 끈 배경에는 전쟁의 상처를 치유 받고 싶은 독일인들의 무의식적인 소망이 반영되어 있었다. 생활의 안정이 복고주의와 교양에 대한 욕구를 낳는다고 할 때, 이의 영화적 대응물은 바로 시대극(Kostumfilm)이 된다. 옛 독일의 영광을 되새기게 해주는 시대를 배경으로 전설과도 같은 왕족과 귀족들의 삶과 사랑, 모험과 희로애락을 그린 이 시대극은 교양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켜 줌과 동시에 일상을 벗어난 화려한 세계에 대한 동경의 욕구를 충족시켜 줄 수 있었다. 특히 독일 시골 귀족의 딸로 일약 당시 유럽을 제패하고 있던 합스부르크 왕가의 황태자비가 된 신데렐라의 이야기를 다룬 마리쉬카의 <씨시(Sissi)> 삼부작(1955∼57)은 로미 슈나이더와 칼하인즈 뵘이라는 청춘 스타를 배출하면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였다.
복고적이고 탈정치적인 당시의 시대분위기는 영화가 사회문제를 다루는 방식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그래서 사회 문제를 다룬 일련의 영화들이 제작되었지만 이들은 문제를 진지하게 다루기보다 단순화하고 미화하여 정치의식이 실종된 흥미거리로 전락시키기도 했다. 주위환경 때문에 타락해 가는 한 여인의 운명을 그린 빌리 포르스트의 <타락한 여자(Die Sunderin)>(1951)는 전후의 열악한 사회상황에 대한 고발보다는 여배우의 전나 장면으로 물의를 빚는데 그쳤고, 인신매매 문제를 부각시켰던 로베르트 지오드막의 <들쥐(Die Ratten)>(1955), 청소년들의 방황을 그린 게오르그 트레슬러의 <애송이들(Die Halbstarken)>(1956), 정치인들의 섹스 스캔들을 다룬 롤프 틸레의 <로제마리(Das Madchen Rosemarie)>(1958) 등은 문제에 대한 피상적 접근으로 대중들의 취향에 부합하는 데 머물렀다.
장르 영화들과 많은 관객으로 전성기를 구가하던 영화산업은 50년대 중반에 이르러 커다란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그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던 것이 바로 54년에 시작된 TV 방송이었다. TV 수상기의 예상과는 다른 빠른 보급으로 극장을 찾던 관객들은 집에 머무르게 되고, 이는 극장 수의 격감과 이에 따른 배급 및 제작사의 연이은 도산으로 이어졌다. 56년에 818개관이었던 극장은 3년 후인 59년에는 259개관으로 줄어들었다. 같은 상황에서 TV와의 차별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와이드 스크린의 도입, 초대작 영화의 제작 등 공격적인 대응을 구사했던 미국 영화계와는 달리, 독일 영화계는 미온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먼저 관객의 격감에 대한 대응으로 제작 규모를 축소하였는데, 이를 통해서 영화는 그나마 갖고 있던 TV방송과의 차별성을 더욱 상실하였다. 또한 미국과 프랑스 영화계는 제임스 딘, 말론 브랜도, 장 폴 벨몽도, 알랑 들롱 등의 청소년 스타들을 내세워 새로이 자라나는 청소년 세대를 공략한데 반해서 독일 영화계는 노인 세대를 주 대상으로 한 영화들을 제작하였다. 그런데 바로 이들이 가장 먼저 TV로 전향한 세대가 되었다.
뉴 저먼 시네마
영화산업의 총체적인 위기는 영화 속에서 성장해 이제 자신의 재능을 펼쳐 보고자 했던 젊은 세대가 일할 수 있는 기회를 모두 박탈해 갔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불만에 가득 찬 젊은 영화인들은 1962년 매년 개최되는 오버하우젠 단편 영화제에서 기습적으로 선언문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낡은 영화는 죽었다. 우리는 새로운 영화의 가능성을 믿는다”라는 모토를 내세운 이들 젊은 영화인들은 기존의 무사안일에 빠진 영화계를 정면으로 비판하면서, 자신들의 영화적 비전을 펼칠 수 있는 법적, 제도적 장치를 정부에서 마련해 줄 것을 호소하였다. 이 “오버하우젠 선언”을 통해 기성 영화계와 젊은 영화인들 간의 골은 더 깊어졌지만 정부는 이제 위기상황을 인식하고 구체적인 제도의 개선에 나서게 되었다. 영화진흥제도의 설립, 영화법의 개정, 영화학교 및 영화 아카이브의 설립 등, 이제까지 시장의 논리에 내맡겨졌던 영화를 보호하고 육성해야 하는 문화영역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수년 간의 씨름 끝에 젊은 영화인들은 자신의 시나리오를 담보로 정부로부터 제작비 지원을 받을 수 있게 되었고 그 결과 많은 신예 감독들이 영화를 제작할 수 있게 되었다. “오버하우젠 선언”의 산파이기도 했으며, 법학박사로서 영화진흥법과 제도의 정비에서도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알렉산더 클루게는 바로 이러한 제작비 지원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데뷔작인 <어제와의 이별(Abschied von gestern)>(1966)을 완성할 수 있었다. 이 영화는 그 해 베니스 영화제에 출품되어 은사자 상을 수상함으로써 그 동안 국제적으로 망각의 대상이었던 독일 영화의 존재를 다시 인식시키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이후 프랑스에서 누벨 바그의 물결을 헤엄치다 돌아온 폴커 슐렌도르프를 위시해서 베르너 헤어쪽, 파스빈더, 빔 벤더스 등의 젊은 감독들이 연이어 등장하여 국제 영화계의 주목을 받게 되면서 이른바 “뉴 저먼 시네마”라는 호칭을 얻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탄생 배경에서 추측할 수 있는 것처럼 “뉴 저먼 시네마”는 어떤 뚜렷한 공통점을 갖고 있는 사조나 운동이라기보다는 서로 이질적인 성향을 지닌 감독과 작품에 대한 통칭이라 할 수 있다. 고다르와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계보를 이어 반서사적 영화를 추구한 알렉산더 클루게나 장 마리 슈트라웁, 사회비판적 메시지보다는 한계상황에 처한 개인의 운명에 관심을 갖고 오지를 헤매며 신비로운 영상을 선보인 괴짜 베르너 헤어쪽, 할리우드의 멜로드라마에 브레히트적 비판의식을 접목하여 동시대 독일사회의 자화상을 그려 낸 파스빈더, 전통적인 서사영화의 토대 위에서 수준과 완성도가 높은 영화를 추구한 장인정신의 소유자 폴커 슐렌도르프 등, 개별 감독들의 관심과 성향은 하나의 통일성을 획득하기에는 너무나도 이질적인 것이었다. 이들을 아우르는 단 하나의 공통점은 영화를 통한 끊임없는 현실문제에 대한 발언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뉴 저먼 시네마”의 등장은 표현주의 영화 이후 다시금 독일 영화가 국제적인 명성과 주목을 획득한, 독일 영화사에 있어서 중요한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작가주의” 영화를 표방한 이들의 작업을 통해서 영화의 표현가능성과 영화를 통한 현실에 대한 발언의 중요성이 더욱 부각될 수 있었다. 하지만 “스타 감독”의 이름에 대한 의존도가 지나치게 높음으로 해서 건전한 시스템으로 발전하는 데에는 많은 한계를 갖고 있기도 했다.
뉴 저먼 시네마 이후
82년 파스빈더의 갑작스런 죽음은 여러 가지 의미에서 뉴 저먼 시네마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우선 파스빈더 본인이 왕성한 창작욕으로 문제작을 끊임없이 발표하였고 기이한 언행으로 매스컴을 통해 대중들에게도 뉴 저먼 시네마의 존재를 알린 “뉴 저먼 시네마의 심장”이었는데, 그의 죽음은 바로 견인차의 상실을 의미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82년 독일에서는 중도 좌파에서 우파로의 정권 교체가 일어났다. 국가의 후견 속에서 예술가들의 자유로운 활동과 작업을 보장해 주었던 중도 좌파 정권과는 달리 우파 정권은 유권자와 납세자의 권리가 영화진흥 제도에도 반영되어야 한다는 취지를 표명했다. 그 결과 지금까지 국가의 제도적 지원을 통해서 관객에 대한 고려라는 압력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이 자신의 영화세계를 펼칠 수 있었던 감독들은 더 이상 국가의 재정지원을 받을 수가 없게 되었다. 또한 뉴 저먼 시네마의 대표자들의 끊임없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정권이 보수화되어 버린 결과는 이들에게 현실 정치에 있어서 커다란 좌절감을 안겨 주었다. 결국 뉴 저먼 시네마의 본질적 특성 중 하나인 현실에 대한 끊임없는 발언에 대한 확신이 점점 사그러들기 시작하면서 뉴 저먼 시네마 역시 중심을 잃고 와해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변화의 조짐을 극단적으로 보여 준 영화가 바로 당시 신예 여류감독이었던 도리스 되리의 데뷔작 <남자들…(Manner…)>(1985)이었다. 바람 난 아내를 되찾기 위해서 아내의 애인 집에 신분을 숨기고 입주한 남편이 보헤미안 같은 애인을 회유해서 말쑥한 회사원으로 만듦으로써 아내를 되찾게 된다는 줄거리의 이 영화는 기존의 성 역할을 전도시킨 독특한 이야기와 코믹한 분위기를 통해 당시 5백 10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면서 그 동안 극장을 떠난 관객들을 되찾아 오는 계기가 되었다. 동시에 사회적 신분상승과 물질만능주의를 전면적으로 거부하는 삶을 살던 아내의 애인이 남편의 회유와 설득을 통해서 결국에는 기성 사회제도 속으로 편입된다는 영화의 설정은 뉴 저먼 시네마를 이끌어 온 68세대의 마지막 환상과의 결별을 선언하는 것이기도 했다.
오버하우젠 선언을 계기로 설립된 영화학교에서 전문적인 지식과 기술을 습득하고 라인강의 기적의 달콤한 열매만을 향유하며 독일 역사에 대한 죄의식도 없이 성장한 새로운 세대는 이제 더 이상 영화를 통해서 현실에 직접 개입하려 하지 않았다. 나아가서 이들은 뉴 저먼 시네마의 모토와 그 대표자들의 경제적, 미학적 죽음을 선언하면서 할리우드와 뉴 아메리칸 시네마에 근거한 관객 중심의 영화를 지향하고 나섰다. 낡은 영화의 죽음을 선언하고 등장했던 뉴 저먼 시네마가 이들의 눈에는 이제 자신들의 성향에는 맞지 않는 낡은 영화로 비친 것이다. 이들은 감독 중심의 작가주의를 거부하고 집단 작업의 원리에 근거한 영화를 표방하면서 현실에서의 무거운 문제들 대신 사적이고 개인적인 경험에 근거한 재미있는 이야기를 영화 속에 담고자 했다.
90년대에 들어와 두각을 나타낸 이들 젊은 감독들은 경쾌한 로맨틱 코미디를 통해 같은 또래의 젊은 관객층을 주로 공략함으로써 연이은 대중적 성공을 거두었다. 1990년대에 들어서서 10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한 독일영화의 편수가 지속적으로 증가하였고, 특히 1996년에는 무려 6편의 영화가 10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하면서 독일 영화의 붐을 조성하였다. 국제적 명성과는 달리 자국 관객들을 영화로부터 멀어지게 했던 뉴 저먼 시네마와는 달리 철저하게 관객의 취향에 부응했던 이들 영화를 통해서 스크린 쿼터와 같은 자국영화 보호장치의 부재로 할리우드 영화의 독무대였던 독일 영화시장에서 독일 영화의 비율이 점차 상승하게 되었다.
이러한 로맨틱 코미디의 붐에 대해 많은 관계자들은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기도 했다. 모든 잠재적 갈등을 철저하게 제거한 이 영화들은 향토영화 이래로 독일 영화 장르 중 가장 끔찍한 것이라는 혹평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반대 의견도 제시되었다. 즉 당시 통일에 따른 여파로 어려웠던 현실 상황에서 이 영화들은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었고, 연이은 흥행성공으로 제작비 수급이 원활해짐으로써 점차 다양한 주제의 영화들이 모색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실제로 그 이후 로맨틱 코미디와 더불어서 다양한 주제와 소재의 영화들이 제작되었다. 청각장애인 부모 밑에서 점점 음악을 통해 자신의 독자적 삶을 찾아가는 소녀의 이야기를 그린 카롤리네 링크의 <침묵의 저편 (Jenseits der Stille)(국내 출시명: 비욘드 사일런스)>(1996)이나 연쇄살인범의 내면을 끈질기게 파헤친 로무알트 카르마카의 <죽음의 사자 (Der Todmacher)>(1998), 젊은 해커를 둘러 싼 음모를 다룬 한스 크리스치안-슈미트의 <23>
(1999) 등 다양한 장르와 주제의 영화들이 실험적으로 제작되기도 했다. 특히 게임에서 차용한 이야기의 틀과 테크노 음악을 절묘하게 결합시킨 톰 티크베어의 <롤라 런(Lola rennt)>(1998)은 국제적으로 비평과 관객들의 고른 지지를 얻어 뉴 저먼 시네마 이후 변모된 독일 영화의 모습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게 해주었다.
2001년 현재 독일 영화는 관객수의 중가와 극장 스크린 수의 증가 그리고 자국 영화 비율의 증가라는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커다란 변화는 바로 지금까지 기형적 형태를 가지고 있던 독일의 영화산업계가 제대로 된 산업구조를 확보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독일 영화의 붐을 통해서 독일 영화계는 제작과 배급에 이르는 전 과정을 혁신할 수 있었고, 이를 통해 공적 자금의 지원 없이도 지속적인 제작과 공급이 가능한 자기순환 시스템을 확보하였다. 심지어 최근에는 할리우드 스튜디오가 독일 영화의 제작자 혹은 배급자로 나서는 경우가 빈번해지고 있다. 물론 이러한 변화는 독일영화에서 느낄 수 있던 “독일적인 것”의 상실을 의미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다양성의 상실이라는 대가를 치르지 않는 한, 결코 나쁜 것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