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터 유럽 칼하인츠 루메니게는 유로 84에서 득점이 없었고, 루디 풸러의 2득점 외에는 아무도 득점을 못했고, 3경기에서 1승 1무 1패 2득 2실로 3위를 기록한 채 조별리그에서 탈락했다.
1999년 올해의 선수상을 최고령으로 탄 로타 마테우스는 대표팀에서도 13경기 전경기 출전하였는데, 컨페더레이션스컵 대회는 칸, 비어호프, 바벨, 예레미스, 하만 등이 모두 빠진 채로 2군들 위주로 출전했고 3경기 1승 2패 2득 6실로 탈락했다. 차출 인원 제한으로 인해 바이에른은 링케, 마테우스, 숄 3명이 출전하였다. 이 경기 이후 베켄바우어는 대표팀을 평가하길 룸펠푸스발(덜컹축구)로 혹평하였다. 마테우스에게 이 시즌은 챔스 우승과 포칼컵 우승이 날아갔다는 점에서 매우 아쉬운 시즌이었다. 분명 그의 99년은 월클의 모습 그것이었다.
비어호프는 98년 9월부터 대표팀 주장직을 맡게 되었고, 2001년 10월까지 그 직을 수행하였는데, 컨페더레이션스컵을 불참하고, 유로는 1경기만 뛰면서 사실상 주장으로서의 실권은 많이 약했다. 주장직을 수행하면서 한번도 조별리그를 통과해보지 못했기 떄문이다. 2000년 5월 30일 토마스 헤슬라의 생일 기념 및 마테우스의 결장으로 변환 시스템에 희생되면서 본선 전 2경기를 후보 출장으로 시작하면서 입지가 약화되었고, 유로 2000 이후 월드컵 예선에서 무득점을 하면서 2001년 10월부로 칸에게 주장 완장을 넘겨주고 말았다. 컨페더레이션스 컵의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1군이 오면 달라질거다란 리벸의 호언장담과는 달리 조별리그에서 1무 2패 1득 5실로 처참하게 패하면서 룸펠푸스발 시대의 연장(?)을 막지 못했다. 유로 2000에서 하만은 "대표팀 내 의사소통이 전혀 없었다"고 그 당시를 회고하기도 하였다.
분데스리가의 경쟁력 약화와 유망주 발굴 및 세대교체 실패 등도 있었지만 주장이었던 칸 역시 사생활 문제로 경기력이 급격히 저하되었고, 유로 1차전 네덜란드전에 풸러가 선수 교체 미스로 무승부캔게 최악의 수였다 에른스트가 투입되자마자 수비가 느슨해졌고, 판니스텔루이가 득점하면서 1승이 날아갔다. 체코전은 포르투갈전처럼 2군 위주로 내보내줬음에도 역전패를 당했고, 칸은 사생활 문제와 군기문란 등으로 선배 비어호프에 이어 대표팀 주장을 은퇴 전에 내려놓고 말았고, 이후 클린스만과 비어호프의 절친 퀘프케를 데려오기 위한 일환으로 레만이 마이어를 도발함으로써 내쫓아버리고 결국 칸은 주장완장과 마이어의 후원 모두 없는 상태에서 레만에게 밀리며 자국월드컵을 후보로 보내게 되었다. 이 대회에서 심각한 득점력 저하로 2득 3실로 2무 1패 탈락하였다.
장기간 부상에서 무사히 돌아왔지만, 오래 재활하다가 복귀하다보니 리더십 발휘에 장애가 있었고, 기량도 슈퍼맨 시절이 아니다보니 결국 팀의 탈락을 막지 못했고 한국전 토니 크로스의 백패스 실점은 어쩔 수 없었지만, 2-0상황에서의 실점은 그에게 평생 굴욕의 순간이었다. 디만샤프트는 역사상 최고의 아시아 깡패의 위용을 과시해왔지만, 그게 최초로 무너진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이 대회에서 1승 2패 2득 4실을 기록하며 탈락하였다. 유로도 뤠브 체제에서 밍숭맹숭했고, 그가 루메니게, 발랔, 칸 수준의 주장으로서의 면모를 보이려면 월드컵 4강까지는 보내야 된다. 동갑내기 팬으로서 그가 다음대회 유로 우승 후 은퇴하길 바라지만 쉽지는 않을 것 같다.
탈락한 5대회의 공통점 : 토나오는 득점력(경기당 평균 1점 미만)
이번 대회 조별리그 통과 과제 : 1경기 평득 1득점 이상 할 것
첫댓글 유로84는 그래도 본선 8강에서 조별 탈락이라 다른 조별탈락과 비교해서 그렇게 못한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82월드컵 챔피언 이태리조차 본선에 못 나왔으니까요. 스페인전 종료직전 통한의 결승골만 안먹었다면 4강에 갈 수도 있었을텐데요.
99 컨페드컵은 당시 기준 베스트11중 7~8명이나 불참해 고전이 예상되긴 했지만 그래도 4강은 충분히 갈 것 같았는데.. 미국에게 너무 처참하게 완패해서 망신 제대로 당했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