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필라움*
정수아
책꽂이에는 수많은 고래가 살지만 읽을 수가 없어요 우리는 고전이라고 하죠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그림자는 유령처럼 튀어 올라와요 눈 깜박할 사이에 사라지죠
세계가 무심해지면 오렌지 냄새가 나는 쪽으로 고양이가 하품을 하듯이 고개를 들어요
풀어진 얼굴에 분을 두드리고 긴 머리를 반쯤 넘기면 푸른 수초가 귀에서 피어나지요
그것은 아주 견고하거나 혹은 우직한 일이 에요
이 방주인은 어둠을 싫어해요 그래서 태양이 들어오게 창문을 심어 두어요
태양과 눈 마주칠 때마다 수초가 되는 기도를 해요
이 방에 있는 풀들은 창쪽으로 어깨가 기울어져 있어요
아무렇지도 않게, 소음은 나를 지나가고 텔레비전에서는 웃음이 흘러나와요
당신은 늘 뱃고동 소리가 들린다고 했어요 그럴 때마다 매트리스 위에 푸른 바다가 물방울무늬를 그리고 고래가 춤을 추어요 파도가 출렁일 때마다 파란색으로 바뀌어요 고래는 미지근한 물에 손을 담그면 손은 무거워지고 주머니 안에 자갈들이 쏟아져요 바닥으로 뒹굴며 뒤꿈치가 닿았어요
손에 머물렀던 고래가 사라지고 뉴스 앵커는 폭우가 쏟아질 거라고 해요
오르골 태엽시계가 시간을 차근차근 밟으며 걸어가요
반쯤 열린 창문에 아라베스크무늬를 포개어 넣고 여름이라고 썼어요
고래가 사라질 때마다 부서지거나 까칠해지는
내 입술, 닫힌 방
*
슈필라움: 타인에게 방해받지 않고 휴식을 취하며 여유를 가질 수 있는 나만의 놀이공간. (출처-네이버 시사상식사전)
당신은 그 모래를 파랑이라고 했어요
카페 안은 모래로 가득해요
서걱거리는 모래를 밟을 때마다 구두코는 더욱 뾰족해요
유리잔에는 구름이 출렁이고 구름이 선인장을 키워요
꽃을 키울 때마다 선인장의 목은 부어 오르고
사방은 창백 해져요
명랑했던 의자는 모래위에서 말라가요 고딕체로 말을 걸어요
모래가 유리잔에 들어갔어요
유리잔이 갈라지고 모래가 사라져요
바닥에 다시 모래가 쌓여요
이런 일은 아주사소한 일이 에요
구름이 키운 선인장은 어디서나 잘 자라고요
우리는 가방에서 분을 꺼내어 얼굴에 모래를 발랐어요
두드리면 두들일수록 얼굴이 흘러내려요
당신은 그 모래를 파랑이라고 불렀어요
우리는 파랗게 앉아서 파랗게 부서지는 것들에 대하여 이야기했죠
먼 곳에서 반짝이는 뜨거운 사막, 그리고 별
그럴 때마다 찾아온 그 너머의 문장들이 흩어지고
모래를 움켜쥘 때마다 잃어버리는 모래들
서로에게 귓속말을 했어요 까마득해서
입술 위에 모래가 흘러내리면
중얼거리는 혀끝으로 나온 울렁거리는 것
파랑 파랑 파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