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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22일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
마태오 16,13-19
교회의 수장으로 한 명만이 있어야만 하는 이유
오늘은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베드로 위에 교회를 세우십니다.
하지만 개신교에서는 크게 두 가지 이유를 들어 가톨릭과 다르게 이 성경을 해석합니다.
첫 번째는 예수님께서 “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셨을 때 베드로 위에 세우신 게 아니라 ‘반석’ 위에 세우셨다는 것입니다.
베드로(페트로스)는 남성이고 반석(페트라)는 여성 명사이기에 베드로라는 인간 위에 세우신 게 아니라 베드로의 반석과 같은 믿음 위에 세우신 것이란 주장입니다.
두 번째는 이 이야기 뒤에 곧바로 베드로가 예수님의 뜻에 반하여 “사탄아, 물러가라!”라는 말을 들었고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하는 불완전한 인간인데, 어떻게 그런 인간 위에 교회를 세우겠느냐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고 하시고 곧바로 “또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라고 하는 말은 페트라가 베드로의 믿음이거나 믿음을 가진 일반인을 가리킨다면 믿음이 있는 모든 이들은 인간의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받았다고 해석해야 합니다.
그러나 개신교는 사제가 죄를 용서하는 것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늘 나라의 열쇠는 결국 죄 때문에 쫓겨난 에덴동산에 다시 들어갈 수 있게 하는 권한, 곧 죄를 용서하는 권한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시며 이 지상에서 죄를 용서해주면 천상에서도
용서할 것이고 이 지상에서 용서하지 않으면 천상에서도 용서하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두 번째 베드로를 사탄이라고 불렀다고 베드로가 사탄이 된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를 회개시키기 위함이었고 베드로는 언제나 베드로였습니다.
성령강림 때 교회를 대표해 설교할 때 첫 번째 설교자는 베드로였고 그 설교로 첫 번째 개종자들 3천 명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도 당신이 누구이신지 잘 대답한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이 말씀은 베드로가 인간적으로 완전하여 교회의 수장이 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택과 은총의 능력으로 그렇게 된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실 때 여인들과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먼저 나타나시고 사도들에게는 늦게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에 따라 보상을 주십니다.
사도들은 믿음이 강해서 사도들이 아니라 주님께서 일치의 중심으로 뽑아주셨기에 사도들입니다.
그렇다면 왜 부족한 인간은 베드로를 교회의 수장으로 뽑으셔야 했을까요? 예수님의 이 기도에 해답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 라고 하십니다.
또 “저는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는 제 안에 계십니다. 이는 그들이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라고도 하십니다.
이는 삼위일체 원리로 사람들이 하나가 되는 것을 보면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파견하셨음을 세상 사람들이 알게 되리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삼위일체는 사랑으로 남편이 아내 안에 있고 아내가 남편 안에 있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남편은 아내에게 ‘모든 것’을 주고 아내도 남편에게 ‘모든 것’을 주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사랑의 선물이고 성령입니다.
그런데 자녀들에게 모든 것을 주는 대상은 엄마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교회 안에 머물게 되십니다. 교회는 예수님 때문에 모입니다.
어머니는 자녀를 모이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로 모였다고 하나가 되는 게 아닙니다.
아버지가 계셔야 합니다.
자신들이 하나의 원천으로부터 비롯되었음을 알아야지, 어머니에게서 나왔다면 각기 자기의 다른 특성을 주장하며 나뉠 것입니다.
교회 자체는 어머니입니다.
만약 교회에 아버지의 존재가 없다면 교회 자체는 어머니만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면 모이기는 하지만, 분열됩니다.
모두가 그리스도에게서 왔다고 믿지만, 그리스도는 눈에 보이지 않으십니다.
눈에 보이는 교회에는 눈에 보이는 그리스도의 대리자가 필요합니다.
만약 본당에서 사제가 아버지의 역할을 제대로 못 한다면 신자들이 미사에 나올지라도 분열될 것입니다.
가시적으로 아버지처럼 묶어주는 누군가가 공동체에 한 명만 있어야 합니다.
당연히 아버지가 둘이면 그리스도파, 베드로파, 바오로파, 아폴로파로 갈라졌던 것처럼 교회에 나오더라도 자녀들은 둘로 분열될 수밖에 없습니다.
한 공동체에는 한 어머니, 한 아버지만 계셔야 합니다.
이 때문에 가톨릭교회는 한 성당에 한 사제, 한 교구에 한 주교, 한 교회에 한 교황만이 계십니다.
금쪽같은 내 새끼 30회에 보면 두 금쪽이가 만날 때마다 싸웁니다.
그러나 이혼한 엄마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릅니다.
이 모든 게 자기 탓만 같습니다.
어머니는 모을 수 있지만, 일치시키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역할이 필요합니다.
엄마는 사랑하는 역할이 핵심입니다.
규율을 잡는 것은 아버지가 해야 합니다.
자기를 사랑해야 할 엄마가 규율을 강조하면 아이들은 혼란에 빠집니다.
사랑하는 엄마의 말엔 힘이 부족합니다.
엄마는 은총을 담당하고 아빠는 진리를 담당합니다.
은총은 자비고 진리는 정의입니다.
은총은 용서고 진리는 심판입니다.
이렇게 은총과 진리가 둘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하나이면서도 서로 대치되는 성향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축구에서 싸움이 일었습니다.
감독은 4강에서 진 게 두 선수 때문이라고 탓합니다.
그러나 가장 큰 탓은 감독에게 있습니다. 아버지의 역할을 해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일치시키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사랑이 없어서가 아니라 사랑은 은총과 진리,
두 갈래로 나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개는 아니지만, 주인이 하지 못해 싸우는 개들을 서열정리 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강영욱 훈련사가 필요했던 장면을 우리는 많이 봅니다.
일치를 위해 그들 모두가 순종할 한 아버지가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 교회가 하나가 되게 해 달라고 하시며 당신의 대리자를 보내지 않아 현 개신교처럼 여러 교파로 갈라지게 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각자가 성경을 각자의 주장대로 해석하지만, 개신교에서는 그것에 대해 명확하게 정해줄 권위가 없습니다.
그렇기에 수천 개의 종파로 갈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이것을 허락하셨을 리가 없고 그래서 우리는 베드로의 후계자인 교황의 권위에 순종해야 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2월22일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
마태오 16,13-19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 아시다시피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함께 사는 형제가 제 성격에 딱 맞다며 별명을 하나 지어줬는데 ‘조급’ 양신부랍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천하태평같고 여유만만해 보이지만, 같이 살아보니 엄청 급하답니다.
미사 입 퇴장 할 때도 광속이라 따라잡기가 너무 힘들답니다.
바깥 일도 천천히 같이 하면 좋을 텐데, 아무 말도 않고 그냥 혼자서 다 해버린답니다.
따지고 보니 그런 구석이 없지 않아 어쩔 수 없이 수긍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베드로 사도도 비슷하신 것 같습니다.
수제자답게 진중하게 생각도 해보고, 여유있게 움직이면 좋을텐데, 그렇지 않습니다.
스승님께서 질문을 던질 때면 다른 제자들에게 기회를 줘도 좋을텐데, 제일 먼저 나서서 대답하다가 늘 점수 왕창 깎아 먹기 일쑤입니다.
베드로 사도의 성격은 공으로 표현하자면 럭비공이었습니다.
축구공이나 농구공은 바닥에 튀면 대충 어느 방향으로 나아갈지 예측이 됩니다.
그러나 타원형인 럭비공은 어디로 튈지 모릅니다.
좌충우돌, 우왕좌왕, 천방지축, 티격 태격의 명수 베드로 사도였습니다.
수난 직전 적대자들과 대치 상태에서 예수님께서는 순순히 병사들에게 붙잡히십니다.
아버지의 때가 왔으니 가만히 있으라고 신신당부했음에도 불구하고 베드로 사도는 칼을 뽑아 대사제 종의 귀를 내리쳐 잘라버립니다.
피가 뚝뚝 흐르는 잘라진 귀 한 조각을 손에 들고 아프다고 울부짖는 대사제의 종의 모습을 상상해보셨습니까?
귀를 잘랐기 망정이지 목이라도 쳤으면 살인자가 될 뻔 했습니다.
이렇게 베드로 사도는 예측 불가능한 돌출행동으로 예수님을 비롯한 제자공동체 멤버들을 당혹스럽게 하는데 선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허물 이 너무 많아 부적격자로 보이는 베드로를 수제자요 반석으로 선택하셨습니다.
쉼 없이 흔들리던 그를 교회의 반석이 될 것이라고 명하셨습니다.
나약하기 그지없는 한 인간 존재, 그래서 언제나 좌충우돌, 흔들리던 시몬 베드로에게 수위권을 맡기시고, 천국의 열쇠까지 맡겨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묵상하면서, 얼마나 큰마음의 위로가 되었는지 모릅니다.
마치 오늘 우리들처럼 지상 생활 내내 쉼없이 흔들렸던 시몬 베드로였습니다.
그는 언제나 스승님으로부터 잦은 질타를 받던 ‘관심 사병’이었습니다.
그러나 시몬 베드로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이 정확했습니다.
그는 언제나 자신의 나약함, 죄, 인간적인 한계를 명확히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수시로 흔들렸지만 흔들릴 때 마다 겸손하게 외쳤습니다.
“주님 보시다시피 저는 보잘 것 없는 죄인 중의 죄인입니다. 저는 당신 제자로서 부당한 존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 아시다시피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이렇게 시몬 베드로는 정확한 자기 인식의 기반 위에 각고의 노력을 더해, 마침내 그 어떤 세찬 비바람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든든한 교회의 반석으로 거듭났습니다.
시몬 베드로는 존재 자체로 오늘 우리에게 큰 경종을 울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녀야할 가장 기본적인 덕목은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겸손함입니다.
그러한 겸손의 덕 위에 부단히 자신의 결핍, 나약함, 부족함이 무엇인지 알아가려는 솔직한 자기 인식을 위한 노력이 또한 필요합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2월22일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
복음: 마태 16,13-19: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준다
오늘 축일은 예수께서 베드로를 선택하셔서 모든 교회에 봉사할 권한을 주시고 당신의 대리자로 삼으신 것을 기념한다. 베드로 사도좌는 베드로 사도의 신앙 위에 세워진 교회의 일치를 상징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필립보의 카이사리아 지방으로 가셨다. 그곳은 갈릴래아 바다 동북쪽 40킬로 떨어진 곳으로 요르단강의 상류이며 이곳 주민들은 유대인들이 아니었다. 이 한적한 곳에서 예수님은 제자들과 조용히 대화하실 수 있었다. 또한, 예수께서는 이곳에서 유대인들이 그분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우리에게 알려주기 위해서이다.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13절) 물으신다. 제자들의 대답은 여러 가지가 나왔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예레미야나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14절) 이렇게 물으신 것은 유대인들의 생각과 제자들의 생각을 대비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제자들의 생각을 먼저 묻지 않으셨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15절) 물으신다. 그동안 주님과 함께 있었고, 기적을 보았으며 주님과 함께 기적을 행한 제자들의 답은 무엇이었을까? 베드로는 깊이 생각했다. 그리고는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16절) 대답하였다.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이라 부름으로써, 베드로는 그리스도께서 생명 자체이시므로 죽음은 그분에게 아무런 권한도 없음을 나타낸다. 그 육신은 나약하여 죽었지만, 곧 다시 살아났다. 그 안에 거하시는 말씀을 죽음은 가두어 둘 수 없었기 때문이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18절) 이 반석은 베드로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해 주어진 신앙이다. 주님께서는 이 반석이라는 신앙 위에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하셨다. 가장 먼저 이 신앙을 고백한 사람을 이 이름으로 부르시며, 장차 그의 것이 될 권한에 대해 말씀하셨다. 베드로의 고백은 바로 우리의 고백이며, 우리의 공통적인 이 고백을 베드로가 가장 중요시할 것이다. 그러기에 베드로가 갖는 열쇠는 바로 교회가 갖게 되리라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일원이 되는 사람은 하늘나라에 참여하는 사람이고 그 상속자이다. 여기에 들지 못한 사람은 거룩한 것들에 참여할 자격이 없다. 그리스도는 결코 흔들리지도 닳아 없어지지도 않는 바위이시다. 그래서 베드로는 흔들리지 않는 교회의 확고한 믿음을 나타내는 이 이름을 예수께로부터 받은 것이다.
이제 우리의 자세는 어떤가? 나는 예수님을 누구라고 고백할 수 있는가? 나에게 있어 그분은 무엇인가? 어떤 존재인가? 이 질문을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해야 하며, 그 답을 각자의 생활과 믿음에서 각자가 발견하고 고백해야 한다. 다른 사람이 알려준 지식으로서가 아니라 나 자신 안에서 우러나오는 답이어야 한다. “나는 너에게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답을 해야 한다. 다른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어떻게 보고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 나에게 그분은 어떤 분이신가를 생각하면서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베드로 사도좌 축일을 지내는 의미는 바로 당신 자신을 “종들의 종”이라고 부르면서 교회를 위하여 봉사하시는 교황을 중심으로 온 교회가 더욱 일치하고 그분이 더욱 많은 봉사를 잘하실 수 있도록 기도하는 데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베드로 사도가 당신의 신앙고백으로 이러한 직책을 가지셨고 하느님과 교회를 위하여 일생을 바치셨다면, 이제 우리도 올바른 신앙고백과 함께 삶을 이어가고, 언제나 하나인 교회를 위하여 기도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주님께서 세우신 교회의 으뜸, 교황님께서 하느님의 대리자로 교회를 올바르게 인도하도록 기도하며 주님의 도우심을 청해야 하겠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