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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이 점점 안 좋아질 때
참고말씀: 삼상15:29; 시73:13,14; 행16:10-34; 히10:38,39; 약5:13
읽을말씀: 행16:22-26
주제말씀: 행16:25
“한 밤 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첫째, 하나님의 뜻을 확인했어도 상황이 안 좋을 수 있습니다.
“무리가 일제히 일어나 고발하니 상관들이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치라 하여 많이 친 후에 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명하여 든든히 지키라 하니 그가 이러한 명령을 받아 그들을 깊은 옥에 가두고 그 발을 차꼬에 든든히 채웠더니.”(행16:22-24)
하나님의 뜻을 확인했어도 상황이 안 좋을 수 있습니까? 그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확인하고 진행했어도 상황이 점점 더 안 좋아질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경우처럼 말입니다.
바울은 드로아에서 무엇이 하나님의 뜻임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까? 마게도냐로 건너가서 그 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행16:10)
하지만 바울은 이후 탄탄대로만 걸었습니까? 아닙니다. 처음에는 자주장사 루디아 등을 만나서 순조로워 보였지만, “두아디라 시에 있는 자색 옷감 장사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말을 듣고 있을 때 주께서 그 마음을 여러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 그와 그의 집이 다 세례를 받고 우리에게 청하여 이르되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머물게 하니라.”(행16:14,15)
이내 귀신 들린 여종을 고친 사건으로 억울하게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히는 등 그의 상황이 급격하게 나빠졌습니다. “무리가 일제히 일어나 고발하니 상관들이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치라 하여 많이 친 후에 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명하여 든든히 지키라 하니 그가 이러한 명령을 받아 그들을 깊은 옥에 가두고 그 발을 차꼬에 든든히 채웠더니.”(행16:22-24)
하나님의 뜻을 확인했어도 감옥행이라니,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합니까? 하나님의 뜻대로 마게도냐로 건너갔는데도 상황이 더 안 좋아졌다면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합니까?
혹 우리의 경우도 이와 같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확인했어도 상황이 안 좋습니까? 순풍(順風)은커녕 오히려 역풍(逆風)을 만났습니까? 탄탄대로(坦坦大路)는커녕 돌발적인 상황들만 여기저기에서 펑펑 터지고 있습니까?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가 앞서 확인했던 하나님의 뜻을 의심해 보아야 합니까? ‘지금의 상황에’ 하나님의 뜻을 맞춰서 재해석해야 합니까? 그래선 안 됩니다. 지금의 상황에 하나님의 뜻을 맞출 게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비춰서’ 우리의 상황을 계속 들여다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왜 지금의 상황에 하나님의 뜻을 맞추려 해서는 안 됩니까? 하나님의 뜻을 왜곡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의 뜻은 상황에 따라서 수시로 변개(變改)되거나 달라지지 않으므로, “이스라엘의 지존자는 거짓이나 변개함이 없으시니 그는 사람이 아니시므로 결코 변개하지 않으심이니이다 하니.”(삼상15:29) 지금의 상황에 하나님의 뜻을 맞추려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런데도 자신의 상황에 하나님의 뜻을 억지로 맞추려든다면 어찌 되고 맙니까? 이를테면 ‘처음부터 이 길이 아니었던 게야!’, ‘점점 더 나빠지는 상황이 이를 증명하고 있어!’, ‘이보다 더 최악인 상황이 또 어디 있겠어?’ 등의 생각으로 자꾸 접근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깊은 좌절감이나 회의감에 빠진 채, 중도에 포기하거나 뒤로 물러서고 말 것입니다. “내가 내 마음을 깨끗하게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 나는 종일 재난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벌을 받았도다.”(시73:13,14) /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히10:38,39)
하지만 ‘하나님의 뜻에 비춰서’ 우리의 상황을 들여다보기 시작하면 어떻습니까? 믿음으로 인내하고 기다릴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은 변함이 없으시므로 그 변함없으신 계획을 기다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찌 해야 합니까? ‘지금의 상황에 맞춰서’ 하나님의 뜻을 재해석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뜻에 비춰서’ 지금의 상황을 계속 들여다보고 그 변함없으신 계획을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둘째, 상황이 안 좋을수록 기도와 찬송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한 밤 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행16:25)
하나님의 뜻을 확인했어도 상황이 안 좋아진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런 상황에서도 사도 바울이 어떻게 대처했는지를 살펴보고 배울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그는 어떻게 대처했습니까? 깊은 좌절감이나 회의감에 빠진 채, 중도에 포기하거나 뒤로 물러서고 말았습니까? 아닙니다. 자신의 상황에 하나님의 뜻을 맞추려고 이렇게 재보고 또 저렇게 재보았습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어떻게 했습니까? 상황이 좋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찬송했습니다. “한 밤 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행16:25 상) 자신의 상황과 관계없이 계속해서 기도와 찬송으로 나아갔던 것입니다.
왜 그런 것입니까? 기도하고 찬송하면 굳게 닫혔던 문도 활짝 열리고 매였던 것도 저절로 풀리기 때문이요, “이에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행16:26) 하나님의 숨은 뜻과 계획이 밝히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데리고 나가 이르되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하거늘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고 그 밤 그 시각에 간수가 그들을 데려다가 그 맞은 자리를 씻어 주고 자기와 그 온 가족이 다 세례를 받은 후 그들을 데리고 자기 집에 올라가서 음식을 차려주고 그와 온 집안이 하나님을 믿으므로 크게 기뻐하니라.”(행16:30-34)
사실 어떤 사람이 기도하고 찬양할 수 있습니까? 지금의 상황이 결과가 아니라 과정임을 아는 사람입니다. 즉 지금의 좋지 못한 상황들이 최종적인 결과가 아니라 오히려 과정의 일부분임을 아는 사람이 곧 하나님께 기도하고 찬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지금의 상황이 인생의 끝이 아니라고 믿는 사람이 하나님께 계속 구하고 또 찬양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우리도 어찌 해야 합니까? 지금 어딘 가에 갇혀 있어도 기도하고 찬송해야 하고, 지금 무엇인가에 매여 있어도 기도하고 찬송해야 하며, 우리의 앞에 있는 문들이 굳게 닫혀 있어도 기도하고 찬송해야 하며,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미처 알지 못해도 계속 기도하고 찬송해야 할 것입니다.
혹 우리의 상황이 점점 더 안 좋아지고 있습니까? 바울처럼, 고발당하고, 옷이 찢겨지고 벗겨지며, 매로 많이 맞은 후에 옥에 던져졌습니까? “무리가 일제히 일어나 고발하니 상관들이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치라 하여 많이 친 후에 옥에 가두고...”(행16:22,23) 그렇더라도 바울처럼 ‘그런 상황에서도’ 기도하고 찬송하기를 바라고, ‘그런 곳에서도’ 기도하고 찬송하기를 바라며, ‘그런 때에라도’ 기도하고 찬송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지금 우리의 상황이 감옥과도 같습니까? “...깊은 옥에 가두고...”(행16:24 중) 지금 우리의 처지가 칠흑 같이 어두운 밤중과도 같습니까? “한밤중에...”(행16:25 상) 그럴지라도 기도와 찬송을 다시 시작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이것이야말로 곧 모든 문제를 푸는 열쇠이자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출입증이기 때문입니다.
한편, 우리의 상황에 하나님의 뜻을 맞추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뜻에 우리의 상황을 비춰보려면 무엇이 필요합니까? 마찬가지로 기도와 찬송입니다. 사실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의 뜻에 맞춰질 수 있고, 찬송 부를 때 비로소 하나님의 뜻으로 우리의 상황을 비춰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그러니 우리는 더더욱 어찌 해야 합니까? 어떤 상황에서도 기도와 찬송을 멈추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한 밤 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행16:25) / “너희 중에 고난당한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약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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