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8장 11- 13절
11. ○바리새인들이 나와서 예수를 힐난하며 그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거늘
12. 예수께서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시며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세대에 표적을 주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13. 그들을 떠나 다시 배에 올라 건너편으로 가시니라
예수님은 항상 진리만을 말씀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서 논리적으로 반박하는 것은 불가능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이 선택한 방법은 “힐난하는 것”이었습니다. 힐난은 논리적 반박이 아니라 감정적인 비난을 말할 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특히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가식적인 종교적 우월성을 가지고 백성들에게 존경을 받으면서 살다가 예수님 때문에 그 자리가 흔들리게 되자 감정이 심히 상할 수밖에 없었고 불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감정적인 비난에 초점을 맞춰서 예수님을 어떻게 하든 깎아 내리려고 했던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아무 흠 없는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처형시키기 위해서 거짓 증인을 내세운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일어난 것이기 때문에 바리새인들의 치졸함은 극에 달한 상황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악한 감정을 가지고 예수님께 요구했던 것이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이 곳곳에서 나타나자 사람들은 이 사람이 엘리야나 엘리사 같은 선지자이거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토록 기다리던 메시야일지 모른다는 소문이 무성했습니다. ‘지금 이스라엘 이곳저곳에서 그런 소문이 무성한데 이 소문이 사실이라는 것을 증명해 줄 수 있는 표적을 보여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동안 예수님께서 보여 주셨던 표적이 엄청나게 많고 그 표적을 두 눈으로 확인한 수많은 증인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 이런 요구를 했던 것은 어떻게 하든 고소할 거리를 찾아서 예수님을 억압하려는 의도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이런 능력들이 귀신의 힘을 빌어서 하는 것이라고 매도하려는 의도가 다분히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11절에 보면 “그를 시험하여”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 번 말씀을 드렸지만 한글 성경에 나타나고 있는 시험은 크게 두 종류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시험이고 또 다른 하나는 마귀로부터 오는 시험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시험을 우리는 테스트(Test)라고 말을 합니다. 테스트는 그 사람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함이고, 실력을 더 높이기 위해서 치러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학창 시절에 봤던 시험이 그런 종류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학교에서 봤던 시험이 우리를 망가뜨리고 우리를 타락시키기 위한 것이 아닌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시험은 바로 이런 의도를 가진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시험을 주신다는 것은 우리가 그 시험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믿기 때문에 이런 시험을 우리에게 허락해 주시는 것이고 결국 그 시험을 통해 우리에게 믿음의 복을 풍성하게 하시고 영적 승리를 주시기 위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귀로부터 오는 시험은 어떻게 하든 우리를 무너뜨리려는 속셈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런 시험은 템프테이션(Temptation) 유혹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40일 동안 금식하시고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셨는데 그 시험이 바로 템프테이션이었습니다. 그때에 당했던 시험을 보면 이렇습니다. 금식을 통해 배고프신 예수님께 돌을 떡으로 만들어서 먹으라는 것이었고, 사탄에게 절을 하면 만물을 주겠다는 유혹과 함께 성전 꼭대기에서 떨어지면 떨어지기 전에 천사가 와서 받아 줄 것이고 그렇게 되면 영웅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유혹이었습니다. 이 모든 시험이 예수님을 넘어뜨리고 무너뜨리기 위한 수작이었는데 예수님은 말씀으로 그 모든 시험을 이기셨던 것입니다.
지금 바리새인들의 시험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이 지금 예수님을 시험하는 것은 오로지 예수님을 넘어뜨리고 무너뜨리기 위함입니다. 그 표적을 보고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더욱 굳건히 하고 더 뜨겁게 믿기를 원해서 이런 요구를 하는 것이 절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중에는 이런 시험을 여전히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출세와 넉넉함을 위해서 예수님을 이용해 보려는 마음으로 사는 사람들이 바로 이런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적 갈급함이나 구원의 믿음을 더욱 확실하게 하려는 의도에서 예수님의 표적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욕심을 채우고 성취의 만족을 누리기 위해서 예수님의 표적을 구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데 바리새인들의 요구와 크게 다르지 않은 불신앙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잘못된 의도를 가지고 기도하게 되면 예수님의 반응은 바리새인들에게 보여 주셨던 반응과 똑같을 수밖에 없습니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세대에 표적을 주지 아니하리라” 잘못된 의도와 목적을 가지고 표적을 구하는 사람들에게는 절대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보여주시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응답을 해서 표적을 보여주시는 이유는 우리의 영혼이 믿음 위에 굳건히 서는 것을 보기 위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기복신앙에 젖어 사는 사람들은 오로지 표적만 구하면서 살기 때문에 표적이 나타나지 않으면 하나님을 등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보여 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단호합니다. 13절에 보면 “그들을 떠나 다시 배에 올라 건너편으로 가시니라” 예수님은 절대 그런 사람들과 함께 하시지 않습니다. 그들을 떠나실 수밖에 없습니다. 어떻게 하든 예수님과 가까워지려고 다가가도 시원치 않은 판에 예수님께서 우리를 떠나 다른 곳으로 가는 상황이 벌어진다면 우리는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않으려면 믿음의 순수성을 가지고 표적을 구해야 하고,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위해서 표적을 구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똑같은 내용의 기도여도 마음의 중심에 따라 하나님은 응답하실 수도 있고 오히려 더 멀어질 수도 있습니다. 기복적인 신앙을 가지고 표적만 구하는 기도라면 우리도 실패한 기도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을 위해,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 구하는 표적이라면 능치 못함이 없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표적을 보여 주실 것이기 때문에 이런 믿음으로 기도할 수 있는 귀한 성도님들이 되시고 하나님께서 보여 주신 표적을 통해 오늘 하루도 기쁨 충만한 가운데 살아갈 수 있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