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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편에서 쓴 조선왕조실록 왕을 참하라(98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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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혁과 침략의 시대에 서 있던 임금, 고종(高宗)
개혁의 대명사 김옥균(金玉均, 1851~1894) 후세사람들로 부터 친일파라는 낙인(烙印)을 뒤집어 쓴 채 역사속에서 살아가는 김옥균!
'대한제국의 풍운아' 또는 '비운의 주인공'이라고도 평가를 받는 김옥균(金玉均)은 갑신정변
(甲申政變)의 주인공이다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명문가에서 태어나 탄탄대로의 출세길이 보장되어 있었던 그는 왜 조선의 개화(開化)에 목숨을 건 도박을 감행했던 것일까?
김옥균(金玉均)이 꿈꾸던 세상은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
그리고 아무나 스스로 갑신정변과 같은 용단을 내릴 수 있는것일까?
갑신정변(甲申政變)이 '3일천하'로 막을 내린 후, 연좌제로 인한 김옥균(金玉均) 일가의 비참한 가족사를 통해 그가 단순히 출세를 위해서 친일을 했다는 설명이 논리가 부족해 보이지는 않는지,
그가 겪었을 가혹한 인간적인 고뇌와 비통함으로 먼저 서두를 열어본다
김옥균(金玉均)의 동생 김각균(金珏均)은 천안에서 살다가 한강을 건너 서울로 들어오다가 형이 정변을 일으켜 실패하고 도망쳤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날로 경북 칠곡으로 도망쳐 숨어 살다가 어사 조병로에게 붙잡혀 감옥에서 옥사했다.
김옥균(金玉均)의 아버지는 당시 눈병을 얻어 장님이 되었는데, 천안 감옥에서 6~7년간 옥고를 치르다가 효수되었고,
어머니 송씨 부인은 누이와 함께 음독자살을 하였다.
김옥균의 처 유씨와 젖먹이 딸은 양가파연 의 처분으로 죽음은 모면하였지만 대명률에 따라 옥천의 관비가 되어 온갖 고생을 하다가 죽었다.
(아~ 연좌제... 빌어먹을!)
단 한 사람 죽임을 당하지 않은 예외가 있었다.
김옥균의 누이동생 김균이다.
그녀는 위계결혼(僞計結婚)으로 관리의 눈을 속여 타고난 수명을 다하였다.
갑신정변(甲申政變) 당시 기계국의 주사였던 남편 송병의와 함께 서울에서 살던 김균은 남편과 함께 충청도 옥천군 청산면으로 몸을 피하였다.
궐석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김균은 포승(捕繩)의 치욕을 받느니 차라리 죽는게 나을 것이라 생각하여 비상을 마셨다.
그녀가 독약을 마시고 죽었다는 소문이 인근에 파다하게 퍼질 무렵, 균은 죽지 않고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남편은 아내가 죽었다는 소문이 퍼진 것을 다행으로 여기고 송장없는 초상을 치른 후 곧바로 영천의 신녕(新寧)으로 몸을 숨겼다.
1년이 지난 뒤 송씨는 새장가를 들었다.
혼례날 신부는 유난히도 짙은 화장을 하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결혼식이 끝난뒤 송씨는 천안으로 이사를 갔는데 그 누구도 송씨가 새장가를 든 여인이 김옥균(金玉均)의 누이인 김균이라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는 충남 서천군 판교리에서 60여 년간을 더 살다가 죽었는데,
그것은 당시의 혼인풍습이 여자는 시집을 가면 대문 밖을 나서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1918년 박영효가 일본에서 김옥균(金玉均)의 머리카락 몇올을 가지고 돌아와 김옥균의 무덤을 쓸 때의 일이다.
박영효가 제문을 읽다가 목이 메어 주저앉아 통곡을 하고 있는데 머리가 하얀 할머니가 무덤을 부여잡고 울기 시작했다.
바로 김옥균(金玉均)의 누이인 김균이었다
자는 백온(伯溫), 호는 고균(古筠) 또는 고우(古愚)라고 불렸던 김옥균은 1851년 충남 공주에서 안동 김씨 후손으로 서당 훈장을 하던 김병태와 부인 송씨 사이에서 출생했다.
어렸을 때부터 총명했던 그는 6세 때 벌써 시를 쓰기 시작하여 '달은 비록 작으나 천하를 비춘다'고 읊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하튼 좀 똑똑하다 싶으면 어렸을 때부터 시를 쓴다고 하네요 ㅋㅋ)
그의 직계 조상은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자결한 문충공 김상용이며, 김옥균(金玉均)은 서울에 사는 숙부 김병기의 양자로 들어가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
김옥균(金玉均)은 22세 때 알성시에서 장원급제한 후 여러 청요직을 거친 청년 엘리트로서 가난한 집 출신의 홍종우
(洪鍾宇)의 성장과정과는 전혀 달랐다
그는 박규수(朴珪壽)를 스승으로 모셔 개화사상을 배웠고, 박규수가 사망하자 백의 정승으로 불리던 실천적 지식인이었던 유홍기(유대치)로 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이즈음 김옥균은 를 저술하여 명성을 널리 떨쳤으나 아쉽게도 그 책은 지금 전해지지 않고 있다.
1882년 김옥균(金玉均)은 서광범과 함계 직접 일본 시찰을 떠나 일본의 메이지 유신의 진전 과정을 돌아보고 당시 일본 재야 정객들과의 면담을 통해 그들의 정치적 동향 등을 상세히 파악하고 돌아왔다.
김옥균(金玉均)은 일본이 동양의 영국처럼 되어가는 것을 보고, 조선은 동양의 프랑스와 같이 자주부강한 근대국가를 만들어야 나라의 완전 독립을 성취할 수 있음을 강조했고,
같은 해 임오군란 후 맺어진 제물포조약에 따라 일본에 파견되는 수신사 박영효의 고문 자격으로 다시 일본에 가서 신문물을 접했다.
1883년 6월, 김옥균(金玉均)은 파탄 상태에 이른 국가 재정을 해결하기 위한 방안이 논의될 때 묄렌도르프의 당오전 주조에 반대해 일본에서 외채를 빌려 오겠다고 나섰다.
고종의 위임장을 가지고 3차로 일본에 건너가 국채(國債)를 모집하려 했던 김옥균의 노력은 묄렌도르프와 민씨들의 사주를 받은 주조선 일본공사 다케조에에 의해 수포로 돌아갔다.
김옥균(金玉均)이 휴대한 고종의 국채위임장은 위조된 것이라고 다케조에가 본국에 허위보고를 하는 바람에 국채(國債)모집은 실패로 돌아간 채 1884년 4월에 김옥균은 일본에서 귀국하였고, 이로써 개화파의 입지는 더욱 좁아졌다.
김옥균(金玉均)은 세 차례에 걸친 도일과정에서 닥쳐올 나라의 위기를 급박하게 느껴 더욱 초조해졌다.
김옥균(金玉均)이 개화정책을 서두르면 서두를수록 청나라와 왕비 명성왕후, 민씨 일파들과의 정치적 갈등은 더욱 첨예해졌다.
이에 김옥균은 정변(政變)의 방법으로 먼저 정권을 장악하여 나라를 구하기 위한 '위로부터의 대개혁'을 단행할 것을 모색하게 되었다
문벌을 타파하한 인민 평등권,
신분에 구애받지 않은 인재의 등용, 입헌군주제로의 변화,
국가재정의 개혁,
근대공업의 발달,
선진 과학기술의 도입,
화폐의 개혁,
철도의 부설과 기선 해운의 도입,
전신에 의거한 통신의 발전,
인구조사 실시,
종교와 신앙의 자유 허용 등이 김옥균(金玉均)이 내세운 개혁 조건이었다
김옥균(金玉均)은 거사 5일 전 고종과 독대하며 "국가의 명운이 위급할 때 모든 조처를 경의 지모(智謨)에 맡기겠다."는 밀지까지 받았다.
고종의 동의를 얻었다고 판단한 김옥균의 행보에는 거칠 것이 없었다.
그러나 "어떻게 하면 구(舊)조선을 파괴하고 신(新)조선을 건설할꼬?"라며 늘 고민하던 김옥균(金玉均)의 혁명적 시도는 좌절되었다.
백성들의 지지 없이 일본의 침략적 본질을 보지 못한 채 일본군의 힘에 의존했다는 치명적인 약점으로 인해 그는 처절하게 무너지고 말았던 것이다.
갑신정변(甲申政變)에 실패한 후 선창 밑에 숨어 3일만에 나가사키에 도착한 김옥균일행은 고단한 망명생활을 시작했다.
조선 정부는 끊임없이 그들을 죽이려고 했고, 이용가치가 없다고 판단한 일본도 그들을 홀대해 오카사와라 섬에 강제 연금을 시키기도 했다.
1886년 고종에게 올린 편지에서 김옥균(金玉均)은 청나라와 일본은 모두 믿을 수 없는 나라로 결코 그들에게 조선이 의지하면 안 된다고 주장하고,
밖으로는 구미와 교제에 힘쓰면서 안으로 내정을 개혁하는 것이 급선무라는 점을 강조했지만,
이미 조선 정부에게 있어서 그는 외국 군대를 이끌고 나라를 혼란에 빠뜨린 대역죄인일 뿐이었다
이와다 슈사쿠로 개명한 김옥균(金玉均)은 일본에 체류하면서 자신을 돌봐준 일본 극우파의 원조인 도야마 미치루의 지원으로 재기를 모색하고 있었다.
김옥균(金玉均)은 일인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바둑을 두며 글씨를 써 주면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일본에 거주하는 동안 김옥균
(金玉均)은 일인학자 후쿠자와 유키치의 '탈아입구론'에 크게 영향을 받아 조선과 일본, 중국이 합세하여 유럽과 미국, 러시아에 대항해야 한다는 '삼화주의
(三和主義)'를 주장했다.
이 주장은 나중에 일본이 주장하는 대동아공영권 논리와 같아 친일파들이 단골로 이용하는 메뉴가 되었다.
(그러니 친일파로 오해를 받지.ㅉㅉ.)
김옥균(金玉均)이란 위험한 인물이 일본에 있는 동안 고종은 밤에 잠을 편히 잘 수 없었다.
조선 조정에서는 여러 번 자객을 보내 김옥균(金玉均)을 죽이려 했으나, 김옥균 주변에는 언제나 사람이 있어 성공하지 못했다.
1894년 김옥균(金玉均)은 마지막 승부수로 당시 청나라를 이끌고 있던 이홍장과의 담판을 위해 청으로 건너갔다가 조선에서 보낸 자객 홍종우
(洪鍾宇)에게 암살되었다.
조선에 넘겨진 김옥균의 시체는 양화진에서 능지처참 되어 목은 효수되고 신체는 모조리 절단되어 팔도에 돌려졌다.
이듬해 김옥균은 반역죄가 사면되었고, 1910년 규장각 대제학에 추증되었다
김옥균(金玉均)이 홍종우에 의해 피살당하자 김옥균을 냉대했던 일제는 김옥균의 죽음을 교묘히 이용했다.
생전의 대우와 달리 김옥균의 죽음에 애도하고, 그가 조선의 개화와 독립을 위해 애쓰다 희생되었다고 칭송했다.
또한 암살의 배후에 청이 개입되어 있다고 주장하며 청에 대한 침략전쟁을 유도하기도 했다
일본 도쿄의 아오야마 공원에는 김옥균(金玉均)의 묘가 있다.
김옥균의 시신은 옻이 칠해진 다음 조선으로 보내져 일본에 있는 묘에는 김옥균(金玉均)의 머리카락만 매장되어 있다.
김옥균(金玉均)은 죽은 다음에야 일본에서 영웅으로 추모되었다
김옥균(金玉均)이 일본의 신문물을 배우고 일본을 업고 쿠데타를 일으켰기 때문에 일본으로서는 앞으로 조선을 병탄할 때 김옥균(金玉均)이 자신들의 침략을 정당화시켜 줄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일까?
이러니 김옥균(金玉均)의 일생을 윤색하여 소설과 희곡 등을 만드느라 돈을 질렀고, 신문마다 애도사를 싣느라 지면이 모자랄 지경이었다.
(하여튼 쪽발이라는 욕을 벌어요~~~)
실제로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화한 후 김옥균(金玉均)은 아시아 연대론의 선구자 등으로 추앙받았고, 김옥균(金玉均)을 죽인 홍종우는 역적이 되었다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한 후 한일병합에 앞장섰던 친일파들은 더욱더 김옥균을 왜곡했다.
이들은 김옥균(金玉均)의 행적을 과장하거나 친일로 몰아서 자기합리화의 단초(端初)를 마련했다.
오늘날 김옥균(金玉均)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고 있다.
한편에서는 조선의 근대화를 위해 노력한 선각자이자 혁명가로 추앙받고 있고,
다른 한편에서는 친일 반민족 행위자로 매도되고 있다.
유길준이 쓴 김옥균의 묘비명이다.
비상(非常)한 재주를 가졌으나, 비상한 시대를 만나, 비상한 공(功)을 세우지 못하고 비상한 죽음을 맞이 하였도다'
김옥균(金玉均)의 일생을 너무나 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이 묘비명은 일본 아오야마에 있다
뛰어난 능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김옥균(金玉均) 그는 시대를 잘못 만난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대는 한 사람의 천재를 원하는 것이 아니다.
한 사람의 천재가 시대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시대를 바꿀 수 있는 사람이 천재인 것이다.
뼈속까지 깊이 병들어 죽어가는 조선이라는 나라를 살리기 위해서 백성의 마음을 먼저 움직였다면 갑신정변(甲申政變)으로 조선은 회생되었을까?
다음편은 친일의 거두 박영효편 입니다
*백성편에서 쓴 조선왕조실록 왕을 참하라(99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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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혁과 침략의 시대에 서 있던 임금, 고종(高宗)
친일의 거두 박영효
(朴泳孝,1861~1939)
갑신정변이 실패한 이후 쿠데타 주모자 5명 중 홍영식은 맞아 죽었고,
김옥균은 상해로 갔다가 홍종우에게 암살 당했다.
서재필은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의학공부를 했으며, 박영효
(朴泳孝)는 친일파의 거물로 변신했다
박영효(朴泳孝)는 한일병합이 되던 1910년, 후작의 작위를 받고 다음 해 조선귀족회 회장이 되었으며, 1926년 중추원 부의장이 되었다.
화려하기 그지없는 출세길이었다.
김옥균과 함께 19세기 말 개화운동의 대명사이기도 했던 그는 짧지 않은 인생의 부침(浮沈)을 통해 인간의 권력욕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인물이기도 하다.
젊은 시절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는 의욕적이고 패기에 찬 애국 청년이었지만,
시대의 혼돈 속에서 권력에 대한 야심으로 인해 변절한 친일파로 생을 마감한 박영효!
개화사상에 매료되었던 왕실의 사위가 친일파의 거두(巨頭)로 자리잡게 된 씁쓸한 과정을 살펴보자.
(실은 박영효(朴泳孝)에 대해서는 쓰고 싶지 않았어요..왜냐구요?
콱! 욕부터 나와서리.. 하지만 미워도 알아야겠기에 ㅠㅠ)
박영효(朴泳孝)는 조선 후기 누대에 걸쳐 명문가로 노론의 핵심계열이었던 반남 박씨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일족으로는 박지원의 손자로 개화파의 스승이 된 박규수(朴珪壽)를 비롯하여 개화의 뜻을 품었던 박정양
(朴定陽) 등이 있다.
(이런 좋은 가문에서? 개천에서 용이 아니라 용천에서 🐕가 나왔구먼요~ㅉㅉ)
박영효(朴泳孝)는 1872년 12살 나이에 우의정 박규수(朴珪壽)의 추천으로 철종의 고명딸인 영혜옹주(永惠翁主)의 남편이 되었다.
당시는 이미 고종의 재위기간이었지만 왕실의 사위가 되는 일은 영광스러운 일임에 틀림이 없었다.
그러나 어린 나이에 부마가 된 박영효(朴泳孝)의 행운은 석달을 가지 못했다.
영혜옹주(永惠翁主)가 요절하여 박영효(朴泳孝)는 12살의 나이에 아내를 잃은 홀아비가 되었다.
남자의 축첩에 대해 엄격하지 않은 조선 사회였지만 부마(駙馬)의 재혼에 대해서는 까다로왔다.
왕실의 여인과 결혼한 남자는 다시는 정식으로 재혼하지 못하는 것이 조선의 법도였다
박영효(朴泳孝)는 12살의 나이에 영혜옹주(永惠翁主)와의 결혼으로 평생 정식 부인을 맞을 기회를 잃었고, 첩실만 거느릴 수 있어서 그의 자녀들은 모두 서출(庶出)이 되었다
어딘가 비정상적인 가정생활을 평생 해야만 했던 박영효를 측은하게 여긴 왕실과 고종(高宗)은 그에게 많은 혜택을 주었다고 한다.
(봐줘도 너무 봐준것 아녀?)
그는 18세의 나이에 오위도총부 도총관이 되었고, 19세인 1879년에는 혜민서제조, 1880년에는 판의금부사에 임명되었다.
부마(駙馬)가 되어 얻은 일그러진 가정생활과 승승장구하는 관직 생활 속에서 박영효(朴泳孝)는 당시 개화사상의 산실이었던 박규수의 사랑방을 드나들면서
서세동점(西勢東漸)의 국제 정세에 대한 식견을 기르게 되었다.
박영효(朴泳孝)는 김옥균 등과 함께 유대치, 오경석 등에게서 선진 사상을 배우면서 급진개화파를 형성했다.
당시 개화파는 청국의 양무운동 을 모델로 하는 친청 경향의 김윤식, 어윤중 등이 이끄는 온건개화파와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모델로 하는 친일 경향의 김옥균, 박영효 등이 이끄는 급진개화파로 나뉘어져 있었다
임오군란(壬午軍亂)이 진압되고 조선은 일본과 제물포조약을 맺은 후 박영효(朴泳孝)는 조약 이행을 위한 특명 전권대신 겸 수신사로 일본에 파견되었으며, 이때 김옥균도 동행했다.
박영효(朴泳孝)는 일본으로 가면서 고종의 명으로 태극팔괘의 도안을 기초로 하여 우리나라 최초로 국기를 제작하였고, 이때 만든 국기가 태극기의 바탕이 되었다.
일본에 머물면서 박영효
(朴泳孝)는 일본의 근대화 시설을 돌아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애벌레로 있다가 나비로 변신하면서 드넓은 세계를 처음 접한 것과 같은 엄청난 발전상을 보고 그냥 한방에 뿅 가 버린 것이었다
그는 개국 후 단시간에 재무, 산업 분야에서 근대화를 이루어낸 일본의 방법을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여러 분야의 일본 근대 유명인사와 접촉하였는데, 그중에는 일본 근대화의 핵심인물이었던 후쿠자와 유키치 등도 있었다.
이외에도 박영효(朴泳孝)는 유럽과 미국의 외교사절을 만나 국제정세 등을 파악하려 하였고,
그 과정에서 얻은 결론은 조선의 자주와 부국강병은 개화(開化)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확신이었다.
개화에 대한 의지를 굳히고 돌아온 박영효(朴泳孝)는 한성부 판윤이 되어 치도(도로정비), 경순(치안관련), 박문(출판 관련)의 3국은 설치했으나,
보수파들의 반대로 폐지되었고, 광주부 유수 겸 수어사로 좌천되어 그곳에서 신식군대를 신설하여 훈련을 시작했지만, 이마저 보수세력들의 강력한 비판으로 인해 좌절되었다.
(우짤스까요? 보수세력 한대 쳐줄까요?)
그 와중에 그의 노력으로 한국 최초의 신문인 한성순보가 발행되기도 했지만, 20대 초반의 젊은이 박영효(朴泳孝)의 꿈을 만족시키지는 못하였다
자신의 뜻이 보수세력에 의해 번번이 꺾이는 시련을 감당할 수 없었던 박영효(朴泳孝)는 한방에 보수세력들을 제거하고 정권을 정복하는 방법을 생각하게 되었다.
결국 친청파인 명성왕후와 민씨 척족들을 몰아내기 위해 박영효(朴泳孝)는 김옥균과 함께 쿠데타를 일으켰다
갑신정변(甲申政變)이 실패로 돌아가자 박영효(朴泳孝)는 일본으로 망명해 이름도 야마자키로 개명하였다.
청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면서 청나라가 조선에서 물러나자 김옥균(朴泳孝)은 10년의 망명생활을 청산하고 조선으로 돌아와 김홍집 내각의 내무대신이 되었다.
당시 조선 정부는 일본의 노골적인 침략의도를 외교관계를 통해 저지하려 하였고, 그 활로(活路)로 손을 잡은 것이 러시아였다.
조선 정부내의 일본의 세력이 점차 줄어들고 삼국간섭으로 러시아의 입김이 강해지자 위기를 느낀 박영효(朴泳孝)는 김홍집(金弘集)을 몰아내고 스스로 총리대신 서리가 되어 독자적으로 개혁을 추진했다.
1895년 박영효(朴泳孝)는 을미개혁을 단행하여 각 방면에서 자신이 생각하는 개혁을 추진하였지만,
명성왕후(明成王后)의 암살음모를 꾸몄다는 누명을 쓰고, 신응희, 우범선(요요 요사람 우장춘의 아버지이네), 이규완 등 일행 20여 명과 함께 일본으로 2차 망명길에 올랐다.
이후 1905년 을사늑약
(乙巳勒約)이 체결되어 조선이 일본의 실질적인 지배를 받게 되자
박영효(朴泳孝)는 을사오적 중 한 사람인 박제순(朴薺純)이 다리를 놓아주어 귀국하여 이완용(李完用) 내각의 궁내부 대신으로 임명되었다.
(아! 을사오적들.. 비오는날 먼지 나도록 팍팍 패주고 싶으다~)
1910년 일본에 의해 국권이 피탈되는 한일병합(강제병탄조약)이 이루어지자 박영효(朴泳孝)는 그야말로 친일파로의 완전한 변절 모습을 보여주었다
한일병합(韓日倂合)의 논공행상으로 그는 후작(侯爵)의 작위와 매국공채 28만원을 받았다.
후작(侯爵)은 작위 중 공작 다음으로 높은 품계였고 상금도 아주 많은 액수였는데,
당시 50만원 이상의 재산을 가졌으면 갑부에 속했으니, 28만 원이 얼마나 큰 돈인지 알 수 있겠다.
일제로서는 개화파 지도자의 한 사람이었던 박영효(朴泳孝)가 가지는 상징성이 조선을 통치하는데 꽤 많은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일제의 문화통치에 순응하여 여러 친일단체의 회장을 맡은 박영효(朴泳孝)는 유민회, 동광회, 조선구락부, 민우회 등 단체와 관계를 맺고 1920년에는 창간된 의 사장에 취임하기도 했다.
1925년에는 조선사 편수회 고문을 지냈으며,
1926년에는 이완용(李完用) 의 뒤를 이어 중추원 부의장이 되어 1939년 죽을 때까지 그 직위를 유지하면서 일제에 협력했다
이글을 쓰면서 난 깊은 상념에 젖었다.
박영효! 그의 무엇이 친일파로 변절하는 단초(端初)가 된 것일까?
시대의 흐름에 유연하게 자기의 이름을 드높여 부귀와 영화를 선택했던 그는 과연 인사유명(人死留名) 호사유피(虎死留皮)의 고사를 생각이나 했을까?
죽어서 이름이 길이 남을 명예를 말이다.
다음~ 동학농민운동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