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장
황동규
내 세상 뜨면 풍장시켜 다오
섭섭하지 않게
옷은 입은 채로 전자시계는 가는 채로
손목에 달아 놓고
아주 춥지는 않게
가죽 가방에 넣어 전세 택시에 싣고
군산(群山)에 가서
검색이 심하면
곰소쯤에 가서
통통배에 옮겨 실어 다오
가방 속에서 다리 오그리고
그러나 편안히 누워 있다가
선유도 지나 무인도 지나 통통 소리 지나
배가 육지에 허리 대는 기척에
잠시 정신을 잃고
가방 벗기우고 옷 벗기우고
무인도의 늦가을 차가운 햇빛 속에
구두와 양말도 벗기우고
손못시계 부서질 때
남 몰래 시간을 떨어뜨리고
바람 속에 익은 붉은 열매에서 툭툭 튕기는 씨들을
무연히 안 보이듯 바라보며
살을 말리게 해 다오
어금니에 박혀 녹스는 백금(白金) 조각도
바람 속에 빛나게 해 다오
바람 이불처럼 덮고
화장(化粧)도 해탈(解脫)도 없이
이불 여미듯 바람을 여미고
마지막으로 몸의 피가 다 마를 때까지
바람과 놀게 해 다오
(시집 『풍장』, 1984)
[작품해설]
‘풍장’이란 시신을 한데에 내버려 두어 비바람에 없어지게 하는 장례(葬禮) 풍속의 하나이다.이 시는 풍장을 시적 상황으로 설정하여 자신이 죽을 경우 풍장시켜 줄 것을 부탁하고, 아울러 시간의 경과에 따른 풍장의 과정을 담담하면서도 비장한 어조로 읊고 있는 작품이다. 시인은 ‘풍장’이라는 제목의 연작시를 많이 발표하였는데, 이 ‘풍장’ 시리즈는 죽음에 관한 시이면서 동시에 삶에 관한 시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죽음에 대한 투철한 인식 없이는 삶의 황홀에 대한 감각도 없시 때문이다.
화자는 먼저 ‘내 세상 뜨면 풍장 시켜 다오’라는 요약된 진술을 통해 ‘바람’이 상징하는 자유로움과 자연스러움을 ‘죽음’의 그것과 병치시키고 있ㄷ,. 죽음이 삶의 가장 자연스러운 형태라면, 바람의 장송(葬送)이야말로 거기에 가장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루기 때문이다. ‘옷은 입은 채로 전자시계는 가는 채로 / 손목에 매어 달고’라는 구절이 그것을 뒷받침해 준다. ‘입은 채로’ ⸱ ‘가는 채로’와 같이 생시의 모습 그대로 자연스럽게 현실 세계로부터의 격리를 소망하는 화자의 마음이 나타나 있으며, ‘전자시계’는 현대의 물질문명을 상징한다.
그러나 현실의 고통은 그러한 죽음마져도 그를 자유롭게 해 주지 않는다. ‘가죽 가방에 낳어 전세 택시에 싣고 / 군산에 가서 / 검색이 심하면 / 곰소쯤에 가서 / 통통배에 옮겨 실어 다오’라는 구절에는 죽어서까지도 자유로울 수 없는 현실적 구속에 대한 풍자와 비판을 담고 있다. 특히 ‘가죽 가방’과 ‘전세 택시’는 고단한 일상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비극적 모습을 대변하고 있다. 또한 ‘검색’은 군사 독재로 지칭되는 시대적 상황을 의미하며, ‘곰소’는 이러한 시대적 상황의 물리적 상황이 미치지 않는 곳, 즉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는 가장 자연스러운 곳을 뜻한다. 그러므로 화자는 ‘통통배에 옮겨 실어’ 달라며 현실을 벗어나 바다로 나가는 것이다.
2연에서는 육지에서 바다로 전환된 시적 배경에 따라 육신의 고통으로부터 해탈을 보여 준다. 물론 이 바다는 화자가 육신의 진정한 자유를 획득할 수 있는 지향점, 즉 무인도로 가기 위한 하나의 과정일뿐이다. 결국 바다는 ‘가방 벗기우고 옷 벗기우고 / 구두와 양말도 벗기우’는 ‘늦가울 차가운 햇빛’이 있는 ‘무인도’[이상 세계]와 ‘가죽 가방’⸱ ‘전세 택시’ ⸱ ‘검색’으로 점철된 육지[현실 세계]를 분히시키는 공간이자 만남의 장소로서의 이중적 기능을 갖는다. 일페의 구속을 벗어 던진 완전 자유의 상태에서 무이도의 햇빛 속에 누워 바람으로 피와 살을 마르게 해 달라는 풍자에의 염원은 바로 육신의 모든 질곡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하는 화자의 소망을 뜻하는 것으로, 정신의 투명성과 자유를 성취하고자 하는 갈망을 표상한다. 그러므로 ‘햇빛’과 ‘바람’이 그 같은 투명함, 자유로움을 상징하는 핵심적인 이미지가 된다. 또한 ‘손목시계 부서질 때 / 남 몰래 시간을 떨어뜨’린 다는 것을 시간과의 단절, 즉 세상과의 단절을 의미하는 동시에, 영겁의 시간 속으로 소멸되는 육신의 모습을 암시한다. ‘백금’은 ‘돈’으로 표상되는 인간의 세속적 욕망을 의미하며, ‘백금’마져 녹스는 풍장의 과정은 그 어떠한 것도 대자연 앞에서는 무화될 수밖에 없는 무가치한 것임을 알려준다.
3연에서는 자유로움을 성취하는 모습을 다시금 확인시켜 주고 있다. 5행으로 진술된 화자의 염원은 실상 1연의 첫 행 ‘내 세상 뜨면 풍장 시켜 다오’를 자세히 설명해 놓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풍장’의 핵심인 ‘바람’이 중심이 되어 시상이 전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바람은 살과 피를 말리우듯 일체의 사물을 소멸시켜 자연의 일부로 되돌려 주는 생명 순환(生命循環)의 원리를 상징한다. ‘화장도 해탈도 없이’는 자신의 죽음이 그 어떤 세속적 가식으로도, 신성한 의미로도 받아들여지는 것을 거부하는 화자의 태도를 반영하는 것이며, ‘마지막으로 몸의 피가 다 마를 때까지’는 바람에 풍화되어 가는 육신의 모습ㅇ르 묘사한 것이다.
결국 이 시는 ‘바람’과 ‘죽음’이라는 두 소멸의 이미지를 ‘풍장’으로 결합시켜 일상적 삶의 고통과 세속적 욕망에서부터 벗어나 정신의 투명성과 자유로움을 성취함으로써 무한한 자연에로 귀의하고자 하는 화자의 소망을 그려낸 작품이다. 풍장은 가장 원시적이면서도 가장 자연적인 장례 의식이다. 그러므로 화자가 자신이 죽을 경우 ‘풍장’을 시켜 달라고 하는 것은 생의 마지막을 가장 자연적인 장례 의식으로 마감하고자 하는 의지의 표현이다. 시인은 이러한 화자의 선택을 통하여, 현대 문명사회에서 그 가치를 잃고 점점 왜소해지거나 세속적 욕망으로 인해 반자연적인 삶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 인간 존재를 극복하고자 노력하는 것이다.
[작가소개]
황동규(黃東奎)
1938년 서울 출생
서울대학교 영문과 및 동 대학원 졸업
1958년 『현대문학』에 시 「시월」, 「즐거운 편지」 등이 추천되어 등단
1968년 제13회 현대문학상 수상
1980년 한국문학상 수상
1990년 제1회 김종삼문학상 수상
1995년 대산문학상
2001년 제1회 미당문학상 수상
서울대학교 영문과 교수 역임
시집 : 『어떤 개인 날』(1961), 『비가(悲歌)』(1965), 『평균율 1』(공저, 1968), 『평균율 2』(공저, 1972), 『삼남(三南)에 내리는 눈』(1975),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1978), 『열하일기』(1982), 『풍장(風葬)』(1984), 『악어를 조심하라고?』(1986), 『견딜 수 없이 가벼운 존재들』(1989), 『몰운대 행(行)』(1991), 『K에게』(1991), 『미시령 큰 바람』(1993), 『외계인』(1997), 『어떤 개인날 악어를 조심하라고』(1998), 『황동규시전집』(1998), 『버클리풍의 사랑 노래』(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