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은 전년 2022년과 비교 더욱 가치관의 충돌이 벌어진 한 해로 기억될 것입니다. 2022년 2월24일 옛 땅 수복과 러시안 민족들의 안녕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시작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전쟁은 그 명분이 자국민 보호라는 휴머니즘의 탈을 쓴 흉악한 전쟁입니다. 그 결과, 현재까지 양측 군, 민간인 사망자가 12만여명에서 최대 65만명, 더하여 우크라이나 피난민이 6백만명 이상의 피해가 발생하였습니다.
2023년 10월 7일엔 국토회복이란 명분으로 하마스에 의해 이스라엘과의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현재까지 이스라엘의 무차별 포격으로 팔레스타인 민간인 약 20,000여명의 사망자가 발생되고 있습니다. 이 또한 휴머니즘으로 포장된 전쟁이며, 양측 모두 종교이념을 앞세워 ‘원수 죽이기에 의한 종족말살’을 최종 목표로 걸고 있습니다. 주지하는바 이 전쟁은 국제무기밀매 조직들의 교묘한 상행위와 미국을 필두로 한 기독교 및 민주주의 국가진영과 이란/러시아를 필두로 한 회교 및 공산사회주의 국가들간의 대리전쟁이 번지고 있습니다.
고 신영복 선생께선 더불어 숲 (2)권 잉카제국의 수도 쿠스코를 방문하면서 쓴 글, ‘문명은 대체가 불가능한 거대한 숲입니다’란 글을 남겼습니다. 님은 그 글에서 잉카유적의 파괴에 심히 가슴 아파하시면서 ‘우리는 더 큰 악이 흔히 패배한 작은 악을 제물로 삼고 있는 사례를 얼마든지 불 수 있습니다. 오늘날 타국의 인권문제에 관여하는 방식이 전쟁수단을 동원하는 경우마저 드물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전쟁수단이 평화와 휴머니즘으로 포장하고 있다’ 는 예리한 분석을 내어 놓았습니다. 위의 두 전쟁사태에도 저는 선생님의 지적에 공감하면서 이 지적을 옮겨 실었습니다.
근 세기에 발생한 제 전쟁들; 특히 2차대전에서의 유대인 6백만 포함, 주변 폴란드인, 독일 정치/종교인, 체코/헝거리 정치인, 거리 노숙인 들 약 1,100만 인을 처형한 히틀러와 그와 함께 한 파시즘 집단은 아리안 족의 우수성을 대내외에 드높인다는 명분으로 그들을 그렇게 잔인하게 처형하였지요. 아프카니스탄 사태는 러시아와 미국에 의한 내정간섭으로 그 나라는 거의 쑥대 밭이; 시리아/예멘 사태는 러시아와 주변 회교권 국가들의 종교이념에 의한 전쟁을 나라가 초토화되었습니다. 아프리카에서도 말이 ‘부족들간의 이권/영토분쟁’이지 내용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강대국들의 이익다툼의 대리전쟁이죠. 그러함에도 이들 강대국들은 해당 주민들의 인권보호 및 삶의 질 향상이란 달콤한 명분으로 이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이제 시각을 우리나라로 돌립니다. 작금 여당, 특히 윤석렬 대통령은 왜 그리 ‘자유’란 미명아래 국방강화에 그리 열을 올리는가요? 마치 ‘까불면 재미없어!”를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처럼 외쳐대던 태극기 부대 전광훈 목사(?)가 연상되듯, ‘북한이 미사일 등으로 까불면 즉각 엄청난 화력을 대응’할 것을 군에게 주문; 그의 바지(?) 국방부 장관은 한 술 더 떠서 몇 배의 강력한 불화력으로 응징하라고 지시합니다. 이와 괘를 같이 하면서, 자유 및 자유진영의 보호라는 미명아래 미국 일본 한국 안보라인을 전략적 수준으로 강화하기도 하였지요. 바이든 대통령은 차기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의 트럼프나 헤일리 후보자에게 3-5% 밀리고 있고, 일본 기사다 총리는 역대급 지지율 10% 중후반; 그리고 윤 대통령은 30% 초 중반에서 왔다 갔다!… 이들 3국의 국민들이 보는 각국의 리더들의 통치방법에 대한 시각은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웃 국가 및 글로벌 정치경제 그리고 사회적 평화는 전쟁이 아닌 대화, 이해, 화합 그리고 협력에서 이끌어져야 한다는 것이죠. 그 대표적인 예가 비폭력 저항운동을 실현한 슈바이쳐, 톨스토이, 간디, 만데라, 마틴 루터 킹 목사를 들 수 있습니다. 지금도 전쟁터에서 이를 묵묵히 실천하는 수 많은 민중의 끈들이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아무 죄도 없이 오직 하나님과 죄 많은 인간들과의 화해 및 연결 끈을 끊어지지 않게 하시려고 나무 십자가에서 대못 3개를 아무 저항 없이 받았습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은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눅23:34). 그러시고 십자가에 달린 다른 하나가 “.. 나를 기억해 달라”는 요청에 부응하셔서 “..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이 있을 것이다” 란 말씀 후, 하나님께 그 영혼을 맡기면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이후 지성소를 감싸고 있던 크나큰 휘장에 위에서 아래로 찢어지는 등 하나님께서 일찍부터 준비하신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주지하다시피, 주님의 십자가에서의 죽으심은 인간의 수 많은 죄가 한 순간에 영원히 도말되었고 비로서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가 회복됩니다. 이후 인간에 부여된 사명은 끝없는 구속의 행위 요청으로 우리의 매일 매일의 죄와 악을 그 십자가 아래 놓아야 하는 사명이 인간에게 부여되었습니다. 이에 참 그리스도인은 매일 매일 자신의 자신의 화냄, 실수, 잘못, 염려 및 죄를 기도 등의 형식을 빌어서 그 십자가 아래 내려놓고 주님과의 동행을 즐거워 하며 이 땅에서 평화를 누립니다. 반면 성경을 끼고 교회에서 예배는 드리고 있으나 그 화남과 염려로 전혀 주님의 얼굴을 보지 못하는 사이비 그리스도인은 주님이 계신 십자가를 오늘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주님, 어서 오셔서 우리나라 정치지도자들, 특히 여권 지도자들에게 저들이 하는 자유와 국민복리를 위한다는 짓이 얼마나 사악한 짓거리인지 알게 하여 주십시오. 평화는 총알과 포가 아닌 대화, 협조로 상호이익을 위한 공동선을 추구할 때 찾아오며 누릴 수 있는 것임을 올바르고 명확히 알고, 주님의 원하시는 사랑의 실천의 길로 나아가길 바랍니다. 그 길에 저의 쓰임이 필요한 곳에 아무 때가 저를 가져다 쓰시길 바랍니다. 아멘! 2023년을 보내면서! 2023년 12월 2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