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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08 묵상글 ( 부활 팔일 축제 수요일. - 없으면 줄 수 없고 가진 것을 주기에.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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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08. 부활 팔일 축제 수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04.08 04:05
- 없으면 줄 수 없고 가진 것을 주기에
"나는 은도 금도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진 것을 당신에게 주겠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일어나 걸으시오."
오늘 베드로 사도는 자기가 가진 것을 주겠다고 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불구자를 치유해줍니다.
그러니 그는 은이나 금은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보며 자연스럽게 베드로 사도와 저를 비교하며 나도 베드로 사도처럼,
곧 나도 주님만 가지고 있다고 자신 있게 얘기할 수 있을까 돌아보게 됩니다.
전에는 그렇다고 자신 있게 말하지 못했지만
이제는 어느 정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물질적으로 제가 가진 것이 없는 것은 아니고
프란치스칸답지 않게 너무 많이 소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주님만 가지고 있다거나
주님밖에는 가진 것이 없다고 어느 정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가진 것이 없지 않고 많아도 그것은 점차 제게 그리 가치 있지 않고,
주님께서 제게 더욱 그리고 점점 가치 있는 분이 되어가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제가 가진 것,
재물,
육체적인 힘,
인간적인 능력,
이런 것들은 점차 제게서 빠져나가고 없고,
그에 따라 자신감도 용기도 점차 사라지고 없습니다.
사랑은 어떨까요?
사랑은 제가 가지고 있을까요?
전과 비교할 때 더 많이 가지고 있을까요?
제 사랑이라고 말해도 될지 모르지만 제 사랑은 없어지고
하느님에게서 오는 사랑은 점차 커지고 많아집니다.
물론 이 하느님 사랑이 성인들만큼 특히 프란치스코만큼
대단하지 않고 아주 미미해도 제가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렇게 되어가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금가락지로 치면 전엔 큰 것을 가지고 있었어도 불순물이 많은 것이었다면
이제는 불순물이 점차 줄어들어 순금이 되어가고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제 사랑 그릇이 작아 하느님 사랑이 제 안에서 많고 크지 않을지라도,
하느님 사랑은 작아도 크기에 이웃을 사랑하는 데에 그리 부족함이 없습니다.
실로 우리는 없는 것을 줄 수 없고,
가진 것을 줄 수 있습니다.
가진 것이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줄 수 없습니다.
사랑이 있어도
하느님 사랑이 없으면 줄 수 없습니다.
내 사랑이 비록 작을지라도 하느님 사랑이 되게 하고,
내 사랑은 점점 작아지고 하느님 사랑은 점점 커지게 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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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08. 부활 팔일 축제 수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부활의 기쁨은 우리의 슬픔을 지워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슬픔을 품을 공간을 만들어 줍니다.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하느님께서 일으키시는 부활의 역사 안에 우리가 들어서고 있습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부활 이야기
부활의 기쁨은 우리의 슬픔을 지워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슬픔을 품을 공간을 만들어 줍니다.
2026년 4월 7일 화요일
신학자이자 팟캐스터인 케이트 보울러(Kate Bowler)는 부활절을, 이전의 고통을 지워버리지 않는 기쁨의 잔치로 설명합니다:
부활은 기쁨의 시기입니다. 알렐루야가 다시 울려 퍼지고, 이야기는 전환점을 맞습니다. 죽음은 마지막 말을 얻지 못합니다.
부활은 우리가 온 마음으로 믿는 구원의 찬미가의 아름답고 달콤한 마침음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이기셨고, 언젠가 우리는 영원히 하느님과 함께할 것입니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기쁨은 우리에게 놀랍고 짧지만 영혼을 가득 채우는 순간을 줍니다. 그때 우리는 하느님의 압도적인 사랑과 이 세상 속에서 우리의 자리를 느낍니다. 우리의 영혼은 외칩니다: “예, 감사합니다. 살아 있음이 참 좋습니다.”
기쁨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이자, 영혼이 머무는 곳에서 솟아오르는 감정입니다. (아마도 이런 느낌은 제가 본능적으로 느끼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이는 제가 Old Dutch 케첩 감자칩을 그 무엇보다 사랑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세운 제 이론입니다.)
기쁨은 우리에게 놀랍고 짧지만 영혼을 가득 채우는 순간을 줍니다. 그때 우리는 하느님의 압도적인 사랑과 이 세상 속에서 우리의 자리를 느낍니다. 우리의 영혼은 외칩니다: "예. 감사합니다. 살아 있음이 참 좋습니다."
성경은 이에 대해 솔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자로의 무덤 앞에서 부활을 아시면서도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슬퍼하는 자 같아 보이지만 실은 늘 기뻐합니다."(2코린 6,10)고 말했습니다. 요한 묵시록(21,4)은 하느님께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미래를 약속하지만, 그 약속은 지금 우리가 울고 있지 않은 척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바로 여기에 부활의 기쁨이 있습니다.
하지만 기쁨이 나타나는 방식은 그것만이 아닙니다.
부활절 즈음에 우리가 종종 놓치는 기쁨의 한 측면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부활절이 지나가고도 삶이 여전히 … 미완성으로 남아 있을 때 드러납니다. 우리는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 여전히 같은 슬픔, 같은 응답 없는 기도, 사순 시기 내내 안고 온 같은 아픔을 지니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이것은 혼란스럽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더 나아져야 하지 않을까요? 부활절이면 충분하지 않았던 걸까요?
그러나 부활의 기쁨은 모든 것이 이미 고쳐졌다는 느낌이 아닙니다. 그것은 행복이나 해결, 혹은 감정적 마무리가 아닙니다. 부활의 기쁨은 우리가 여전히 이 긴 중간에 머물러 있으면서도, 인내하며 불완전하게, 그리스도인의 기대와 신뢰 안에서 살아갈 수 있는 능력입니다.
기쁨은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체험 가운데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의 실제 삶과 함께 존재할 수 있는 감정이기 때문입니다. 행복과는 달리, 기쁨은 슬픔, 지루함, 두려움, 절망과도 나란히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것은 동시에 모순된 진실들을 담을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을 넓혀 줍니다. 그리고 우리가 기쁨을 알기에, 삶이 아플 때에도 여전히 사랑할 가치가 있다는 이상하고도 안정된 확신을 회복합니다.
성경은 이에 대해 솔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이 올 것을 아시면서도 나자로의 무덤 앞에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슬퍼하는 자 같아 보이지만 실은 늘 기뻐합니다."(2코린토 6,10)라고 말합니다. 요한 묵시록(21,4)은 하느님께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미래를 약속하지만, 그 약속은 지금 우리가 울고 있지 않은 척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바로 여기에 부활의 기쁨이 머무릅니다!
그것은 슬픔 대신의 기쁨이 아닙니다. 그것은 슬픔과 함께하는 기쁨입니다. 우리를 성급히 앞으로 몰아가는 기쁨이 아니라, 그 사이에 인간으로 머물 수 있게 하는 기쁨입니다.… 이 기쁨은 단순한 낙관보다 더 깊고, 단순한 행복보다 더 진실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삶이 고통스럽게 미완성처럼 느껴질 때에도 이야기가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확신하게 하는 깊은 보증입니다.
부활의 기쁨은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은총입니다: 이것은 어렵습니다. 나는 여전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여전히 선하십니다.
그것은 모든 것이 이미 바뀌었기 때문이 아니라—언젠가, 갑자기—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바꾸실 것을 약속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공동체 이야기
오늘의 묵상에서 발견한 깊은 말씀을 되새기며, 제 마음과 영혼, 몸과 정신 전체가 그 의미를 더 가까이 느끼게 되었음을 깨닫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어디에나 계십니다. 제가 밖을 걸을 때에도 그것을 봅니다. 저를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제임스 핀리!
—Christine H.
References
Kate Bowler, “A Different Kind of Joy,” for Richard Rohr’s Daily Meditations (CAC Publishing, 2026). Kate Bowler, PhD, is a four-time New York Times bestselling author, Duke University professor, and the host of Everything Happens. Her latest book, Joyful, Anyway is a meditation on disappointment, hope, and the surprising ways joy meets us in the life we actually have.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David Becker, untitled (detail), 2022, photo,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봄꽃이 황금빛 햇살 속으로 피어오르듯, 그리스도께서는 지금도 우리 세상 속에서 계속 펼쳐지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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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영성 묵상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분의 현존을 알아차리고 그분을 모셔 드리는 일입니다!
다음은 아일랜드의 예술가요 조각가인 체리쓰 맥킨스트리(Cherith McKinstry:1928-2004)의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 대한 묵상]을 요약한 내용입니다:
패배한 두 제자의 마음은 온통 과거와 그에 대한 후회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끝난 듯 보였고, "우리는 희망을 가졌었는데…"라고 하는 그들의 말에는 이제 그들이 그 희망조차 잃은 상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신원을 바로 드러내지 않으시고, 그들의 대화 속으로 들어오셨습니다. 그들의 과거 속으로 들어가 함께 걸으시며, 그것을 새롭게 해석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들의 희망은 정치적이었습니다.
"우리는 그분이 이스라엘을 해방하실 분이라고 기대했었는데…"라는 말에서 드러나듯, 그들은 마음 깊은 곳에서 실망한 정치인이었지 참된 제자가 아니었습니다. 사실 놀랄 일도 아닙니다. 제자가 되는 것보다 정치인처럼 사는 것이 훨씬 더 쉽기 때문입니다. 정치인은 다른 사람을 바꾸려 하지만, 제자는 자신이 변화되기를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그들의 태도에도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이야기를 끝까지 인내하며 들어주셨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중간에 그들의 이야기를 끊으셨다면, 그들의 의문과 반발은 억눌린 채 더욱 강하게 남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말을 다 들으신 뒤, 모세와 모든 예언자들로부터 시작하여 성경 전체를 통해 당신에 관한 것을 새롭게 풀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과거에 대한 당신의 이해를 강요하지 않으셨습니다. 미래에 대한 이해도 강요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그들이 당신을 자유롭게 초대하기를 기다리셨습니다. 마을에 가까워졌을 때 그들이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라고 청했을 때에야 비로소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머무르시게 됩니다.
신앙은 강압이 아니라 초대입니다. "고을 어귀로 가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 오너라."(마태 22,9). 강제는 언제나 반발을 낳습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그 반발심 속에서 그리스도의 초대에 귀를 닫아버리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강제로 끌어들이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초대하십니다. 그러나 우리 또한 그분을 초대해야 합니다. 신앙은 상호적인 초대이며, 곧 우정으로의 초대입니다.…
예, 주님은 매일 매 순간 우리 삶의 여정에 함께해 주시면서 우리를 당신과의 함께함으로 초대해 주십니다. 그분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홀로 힘겨운 여정을 하도록 내버려 두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 곁에서 우리와 함께 이 여정을 걸어가 주시며 우리 삶의 의미를 나누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사랑이신 하느님의 현존을 깨달을 수 있도록 초대해 주시면서 말입니다. 이 초대는 우리 마음이 어떤 상태에 있든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가 절망에 빠져 있더라도 그분은 우리의 여정에 함께해 주십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당신의 현존을 우리에게 드러내 주십니다. 그러고는 자연스럽게 당신을 우리 삶의 자리로 초대하게끔 우리의 마음을 자극해 주십니다.
여기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분의 현존을 알아차리고 그분을 모셔 드리는 일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나타나 그들의 여정에 함께해 주시는 이야기의 핵심입니다.
사실 엠마오는 지금도 어디에 있는 마을인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곳이 "예루살렘에서 예순 스타디온 떨어진 마을"이라고 루카 복음은 전하지만 그곳이 어느 방향에 있는 곳인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이 엠마오라는 마을은 우리가 정처 없이 헤매는 우리의 희망 없는 상태를 표현해 주는 어떤 곳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런 우리의 상황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홀로 헤매도록 내버려 두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런 주님의 현존이 우리 눈에 띄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분은 우리 주변의 사람들을 통해 현존하시고 그들을 통해 우리 삶의 의미를 풀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단순히 미사성제나 성체성사, 그리고 성경 말씀 안에서만 현존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대화 속에, 우리 서로의 관계성 속에서도 현존하시며 우리에게 대화를 건네오시는 분이십니다.
요즘 봄이 되니 주변이 벗꽃과 개나리꽃 진달래꽃들이 흐드러져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꽃들이 피었을 때에야 비로소 꽃이 핀 것을 보고 감탄하지만 사실 이 꽃들은 이미 그 가능성으로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존재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 가능성이 없었다면 그것이 절대 드러나지 않겠지요?!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주님은 어떤 특별한 사건을 통해서만 현존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평범하다고 생각하는 그곳에, 모든 곳에, 우리의 정신을 일깨우시면서 언제나 현존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 부활 시기에 더 깊이 묵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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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08. 부활 팔일 축제 수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아마 우리 모두는 실망과 절망에 빠져 본 적이 있을 것 입니다. 가던 길을 중단해버릴 만큼, 희망이 꺾인 적도 있을 것 입니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버릴 만큼, 믿었던 바가 의혹과 불신으로 바뀌어버린 적도 있을 겁니다. 오늘 <복음>의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들이 그러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가까이 가시어 그들과 함께 걸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눈이 가리어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루카 24,16). 그들의 희망과 믿음은 변화되고 깊어지고 정화 받아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먼저 말을 건네십니다.
“걸어가면서 무슨 말을 서로 주고받느냐?”(루카 24,17) “무슨 일이냐?”(루카 24,19)
그들은 먼저 그분에게서 일어난 일이 무슨 일인지를 깨달아야 했습니다. 사실, 실망과 절망에 빠질 때가 가장 ‘위기의 순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가장 ‘기회의 순간’이기도 합니다.
실망하고 절망에 빠지고 슬퍼질 때, 바로 그때가 우리의 희망을 내려놓아야 하고, 우리의 믿음을 내려놓아야 할 때일 수 있습니다. 우리의 희망과 믿음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희망과 믿음이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때가 우리의 뜻과 생각이 변해야 할 때입니다. 우리의 눈이 가려져 있음을 깨달아야 할 때요, 믿음의 눈이 열려야 할 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아, 어리석은 자들아!
예언자들이 말한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요한 20,25)
그렇습니다. 알아야 할 바를 제대로 알아야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믿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모세와 모든 예언자들로부터 시작하여 성경전체에 걸쳐 당신에 관한 기록들’을 설명해주시고,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나누어주십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빵을 떼실 때에”(루카 24,35) 그분을 알아보게 됩니다. ‘떼어내다’는 ‘분리하다’, ‘파괴하다’, 글자 그대로는 ‘으스러뜨리다’라는 의미의 동사이다. 그렇습니다. ‘신앙의 눈’, 곧 ‘신비를 보는 눈’은 ‘떼어냄’, ‘부수어짐’, ‘으스러뜨림’에서 옵니다. 우리는 우리의 생명을 부술 때 우리 안에 숨겨져 있는 하느님의 생명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루카 24,31)
그것은 바오로 사도가 말한 것처럼, 그분 안에 숨겨져 있는 우리의 생명을 보는 일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여러분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콜로 3,1-3)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그들은 눈이 가리어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루카 24,16)
주님!
곁에 함께 걸으시건만,
당신을 알아 뵙지 못한 저를 용서하소서!
길동무가 되어 주시건만,
곁에 없는 것처럼 무시하였음을 용서하소서!
뼈 속 깊이 계시고 심장에 살아계시며,
발등에 등불이신 당신을 알게 하소서.
제 안에서 숨 쉬시며, 함께 걸으시는 당신을 알아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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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08. 부활 팔일 축제 수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직책을 맡아서 참석하는 모임이 있습니다. 북미주 사목 사제 협의회 대표를 맡아서 5월에는 샌프란시스코로 가야 합니다. 올해는 북미주 사목 사제 협의회 설립 60주년이 되는 뜻깊은 해입니다. 서울 대교구 사제 모임 대표를 맡아서 6월에는 콜롬비아 보고타에 가야 합니다. 미국을 떠나서 하는 첫 번째 사제 모임입니다. 주님께서 이끌어 주시고, 보고타에 있는 신부님이 열정과 헌신을 다해 준비하니 잘될 겁니다. 10월에는 중남부 사제 모임이 있어서 피닉스로 가야 합니다. 중남부는 텍사스, 콜로라도, 애리조나, 캔자스, 미주리, 멕시코 시티까지 아우르는 지역입니다. 먼 길을 기쁜 마음으로 참석하는 것은 이 모임이 좋기 때문입니다. 형제 사제들이 모여서 정을 나누기 때문입니다. 강의 부탁을 받아서 가는 모임도 있습니다. 지난 대림에는 멤피스 한인 성당엘 다녀왔습니다. 이번 사순에는 타코마 한인 성당엘 다녀왔습니다. 저를 필요로 하는 공동체가 있으니 감사하는 마음으로 다녀왔습니다.
올해는 ‘특별한 만남’도 있었습니다. 지난 2월 23일에 엘파소엘 다녀왔습니다. 작년까지는 서울 대교구 신부님이 있었는데 사정이 생겨서 한국으로 가야 했습니다. 평균 연령이 76세인 공동체는 한국말 미사와 고백성사를 원했습니다. 서울 대교구 신부님이 있을 때 저는 두 번 방문했었습니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서 제게 미사와 고백성사를 부탁했습니다. 어르신들은 저를 반갑게 맞이해 주었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길에 제자들이 주님을 모시고 맛있는 식사를 했던 것처럼 저도 어르신들이 정성껏 준비해 주신 음식을 맛있게 먹었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걷지 못하는 사람에게 ‘나는 금도 없고, 은도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일어나 걸으십시오.’라고 말했을 때 걷지 못하던 사람은 걸을 수 있었습니다. 저도 큰 능력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어르신들을 위해서 고백성사와 성체성사를 할 수 있어서 감사했고, 행복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5월에도 찾아뵙기로 했습니다.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했던 그 마음처럼 저도 기쁜 마음으로 방문하려고 합니다.
지난 3월 9일에는 오스틴엘 다녀왔습니다. 한국인 사제가 없는 성당입니다. 그동안 한국인 부제님이 있어서 강론을 해 주었다고 합니다. 부제님이 사정이 생겨서 다른 곳으로 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번 사순 시기를 지내면서 제게 고백성사, 특강, 미사를 부탁했습니다. 저와 특별한 인연이 있는 공동체는 아니었습니다. 공동체에 있는 한 자매님이 예전에 한국에서 저를 보았다고 합니다. 당시 제가 복음화 학교 담당 사제였을 때 학생으로 보았다고 합니다. 자매님은 제가 달라스에 있는 걸 알았고, 이렇게 부탁하였습니다. 오스틴은 자동차로 3시간만 가면 되는 비교적 가까운 거리여서 기쁜 마음으로 가겠다고 했습니다. 오스틴 공동체도 저를 따뜻하게 맞이해 주었습니다. 1986년에 시작된 오스틴 공동체는 올해로 40년이 되었습니다. 복음을 전하시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부족하구나, 일꾼을 청하여라. 다른 마을에도 복음을 전하러 가야 한다.’ 직책 때문에 모임을 다녀오기도 했고, 성지순례를 다녀오기도 했습니다. 엘파소와 오스틴의 모임은 특별히 저를 필요로 했던 모임이기에 더욱 감사했고, 보람 있었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길은 우리가 하느님 나라를 향해 가는 길과 비슷합니다.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에게 엠마오는 더 이상 의미도 가치도 없어졌습니다. 그들에게는 이제 예수님께서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함께라면 그곳이 언제 어디서이든지 엠마오가 되는 것입니다. 본당 신부로 있어도, 학교 교수 신부로 있어도, 교구청에 있어도, 병원의 원목으로 있어도, 교포 사목을 해도, 선교 사제로 있어도 예수님과 함께하지 않는다면 그곳은 엠마오가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을 듣고 변화된 삶을 살아간다면 그곳은 바로 엠마오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모두 추구하는 하느님 나라도 어쩌면 그와 같을 것입니다. 돈으로, 명예로, 권력으로 가는 곳이 아닙니다. 오늘 내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변화된 삶을 산다면 내가 있는 이곳이 바로 하느님 나라입니다.
“나는 은도, 금도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진 것을 당신에게 주겠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일어나 걸으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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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08. 부활 팔일 축제 수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말씀과 성체를 통해 우리 안에 머무시는 부활하신 주님!
참으로 은혜롭고 감동적인 성삼일과 부활절 축제를 만끽했습니다. 주님 부활은 연중 가장 큰 축제이므로 한 번 만 경축하지 않습니다. 8일간 축제를 이어갑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우리 교회 전례는 장장 한 달 이상 부활의 기쁨과 환희를 즐깁니다.
어제는 공동체 엠마오 소풍을 다녀왔습니다. 호젓한 산책로를 걷는데, 때맞춘 바람에 꽃비가 내렸습니다. 그렇게 꽃길을 걸으면서 이천 년 전 엠마오를 향해 길을 가던 두 제자가 만난 예수님의 얼굴을 떠올렸습니다.
스승님의 부재로 인해 실망과 낙담에 빠진 두 제자에게 친절하고 자상하게 말씀을 나눠주신 주님을 기억합니다. 계속되는 부활 시기, 말씀 안에 살아 숨 쉬고 계시는 주님을 만나기 위해 거듭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날이 저물자 어느 집에 들어가신 예수님께서는 식탁에 앉으셔서, 제자들에게 빵을 들어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나누어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최후의 만찬에 이어 다시 한번 성찬례를 거행하신 것입니다. 기쁨 충만한 부활 시기, 성체 안에 살아계시며, 성체를 통해 매일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을 만나 뵈야 하겠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우리의 부활하신 주님은 아니 계신 곳이 없는 분이십니다. 파릇파릇 피어오르는 여린 새싹과 초목의 부드러움 안에 생명의 주님께서 현존하십니다. 우리가 매일 마주치는 동료 인간들 안에서 굳건히 현존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엠마오 길의 제자들과 오늘 우리에게는 성경과 성찬례! 두 가지가 다 필요합니다. 성경은 그들의 무뎌진 마음에 불을 지폈으며, 성찬례는 그들의 이해하지 못하는 무능력을 없애 주었습니다.
성경 말씀들이 부활 사건에 비추어 풀이되고, 성찬의 식사가 거행될 때, 오늘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의 현존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활활 불타오르게 될 때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게 될 것입니다.
이 특별한 장면은 이천 년 세월이 흐른 지금도 지구촌 방방곡곡에서 매일의 성체성사 안에서 쉼 없이 재현되고 있습니다. 놀랍게도 예수님의 고귀한 몸인 성체는 오늘도 나눠지고 쪼개어져 우리 손으로 전해지는 것입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그 옛날 엠마오 길의 제자들에게 하신 똑같은 모습으로 친히 빵을 떼어 나눠주신다 생각하고, 지극히 정성스러운 몸과 마음으로 영성체에 임해야겠습니다.
무관심하고 심드렁한 표정으로, 다양한 분심이나 불신 속에 성체를 영한다면, 지극히 거룩하신 성체는 그야말로 돼지 발의 진주로 전락할 것입니다. 그저 한 조각 밋밋하고 영양가없는 빵 한조각뿐일 것입니다.
굳센 신앙으로, 확고한 믿음의 마음으로, 이 성체가 그분 현존의 표지이자 그분 자체임을 굳게 믿으며, 이 성체가 나를 거룩한 영적 존재로 변화시키고 성장시켜줄 영약으로 여기며, 정성껏 영성체에 임할 때, 2천년전 엠마오 길의 제자들이 체험했던, 그 뜨거움이 오늘 우리의 것이 될 것입니다.
그때 우리 눈이 활짝 열려 우리 인생 여정 가까이 항상 현존하시고 동반하시는 주님의 존재를 알아보게 될 것입니다. 동료 이웃들 안에 항상 숨쉬고 살아계시는 주님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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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08. 부활 팔일 축제 수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루카 24,13–35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는
예수님의 죽음 이후
상실과 혼란 속에 걸어갑니다.
그들의 발걸음은 ‘순례’가 아니라
희망이 무너진 후의 후퇴였습니다.
“우리는 그분이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분이라 기대했는데…”
그 말 속에는
믿음이 무너질 때의 공허가 담겨 있습니다.
그때 부활하신 예수님이 가까이 와 함께 걸으시지만
그들은 알아보지 못합니다.
주님은 묻고, 듣고, 풀어 주십니다.
성경을 해석해 주시며
그들의 상처 난 기억을 다시 연결하십니다.
그리고 빵을 떼실 때
그들은 마침내 알아봅니다.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는
하느님의 신비는
인간의 완전한 이해로 소유될 수 없고,
오히려 인간의 마음을 변형시키는 방식으로 다가온다고 봅니다.
엠마오의 제자들이 부활을 ‘증명’해서 믿은 것이 아니라,
길 위에서 마음이 변화되고
빵을 떼는 자리에서 눈이 열리며
그 신비 안으로 들어간 것처럼 말입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부활은 “한 번의 깨달음”이 아니라
주님이 동행하시며
말씀으로 마음을 데우고,
성체로 눈을 여시는
과정의 은총입니다.
1주 성실/온유/절제의 렌즈로 보면
엠마오의 길은 이렇게 읽힙니다.
• 성실: 도망치는 길에서도 주님은 함께 걸으신다. 그러니 끝까지 걷되, 주님께 마음을 열라.
• 온유: 주님은 책망보다 질문으로 다가오신다. 우리도 상처 난 이를 판단보다 동행으로 맞이하라.
• 절제: 단번의 결론을 내려 하지 말고, 말씀과 성체 안에서 천천히 눈이 열리기를 기다리라.
오늘 우리도 엠마오의 제자처럼 묻습니다.
“주님, 제 길이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그리고 주님은 대답하십니다.
“내가 네 길 한가운데에 있다.”
부활은 멀리 있는 사건이 아니라
지금 내 걸음에 함께하시는 주님입니다.
부활하신 주님,
제가 실망과 상실의 길을 걸을 때에도
당신이 함께 계심을 믿게 하소서.
말씀으로 제 마음을 데우시고
성체로 제 눈을 열어
다시 기쁨의 길로 돌아서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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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08. 부활 팔일 축제 수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 08:25 추가.
<“그들은 침통한 표정을 한 채 멈추어 섰다.”>
<바로 그날 제자들 가운데 두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순 스타디온 떨어진 엠마오라는 마을로 가고 있었다.
그들은 그동안 일어난 모든 일에 관하여 서로 이야기하였다.
그렇게 이야기하고 토론하는데, 바로 예수님께서 가까이 가시어 그들과 함께 걸으셨다.
그들은 눈이 가리어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걸어가면서 무슨 말을 서로
주고받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은 침통한 표정을 한 채 멈추어 섰다(루카 24,13-17).>
<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그들에게서 사라지셨다. 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 그들이 곧바로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와 동료들이 모여, “정녕 주님께서
되살아나시어 시몬에게 나타나셨다.” 하고 말하고 있었다.
그들도 길에서 겪은 일과 빵을 떼실 때에 그분을 알아보게 된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루카 24,30-35).>
1) 이 이야기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신앙인들과 함께 계신다는 증언이기도 하고, 또 예수님께서 함께 계신다는 것을 믿는다면 그것을 사람들에게 증언하라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이 이야기의 결말을 생각하면, 예수님께서 두 제자와 함께 걸으신 일은, 단순한 동행이 아니라
그들의 발걸음을 되돌리신 일이고, 그들을
예루살렘으로 다시 데리고 가신 일입니다.
‘엠마오로 가는 길’은 예수님과 함께 지내는 삶을 버리고 떠나는 길이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길’은 예수님과 함께 살기 위해서 가는 길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예루살렘은 복음 선포를 상징하기도 합니다(루카 24,47).
예루살렘을 떠나서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예수님을 만나는 체험을 하자마자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간 것은,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고 선포하기 위해서입니다.
<체험에서 기쁨을 얻고, 기쁨에서 증언이 이루어집니다.
만일에 체험과 기쁨을 다른 사람들에게 증언하지 않고 자기 혼자만의 은밀한 기쁨으로 간직한다면,
그것은 등불을 감추는 것과 같고, 그러면 그 기쁨은 희미해지다가 결국 사라질 것입니다.
복음의 기쁨은 나눌수록 커지고, 믿음은 증언함으로써 더욱 강해집니다.>
2) 21절의 “기대하였습니다.” 라는 말은,
두 제자의 ‘실망감’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 ‘큰 기대’를 걸었다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서 허망하게 돌아가시는 것을 보고 크게 실망했고, 그래서 예루살렘을 떠났습니다.
그들은 “메시아이신 분이 왜 그렇게 돌아가셔야만
했는가?”를 이해할 수 없었고, 그것이 실망감이 되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다가 ‘실망감’에 빠지는 것은
누구에게나 흔히 있는 일입니다.
간절하게 기도해도 아무 응답이 없는 주님에게
실망하기도 하고, 영적으로 진보하지 못하고 늘 제자리에 있는 것 같은 자기 자신에게 실망하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의 신앙생활을 보면서 실망하기도 합니다.
<그런 실망은 성인 성녀들도 흔히 겪는 일입니다.>
실망감을 극복하는 방법으로는, 기도, 성경 묵상,
고해성사, 영성 상담 등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의 경우에는, 예수님의 설명을 통해서 메시아의 수난을 이해함으로써
실망감에서 벗어난 것으로 보입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메시아께서 당신 목숨을 속죄 제물로 내주신 일”이라고 설명하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께서 빵을 떼어 주실 때
예수님을 알아보았고, 알아보자마자 예수님의 부활을 믿었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늘 함께
계신다는 것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 믿음에 도달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갑자기
사라지셨어도 놀라거나 슬퍼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함께 계신다는 것을 믿는다면, 예수님이 눈에 보이든지 안 보이든지 상관없는 단계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실망감’의 반대는 ‘기쁨’입니다.
32절의 ‘마음이 타오르다.’ 라는 말은, ‘마음이 기쁨으로 가득 찼다.’ 라는 뜻입니다.
<신앙생활은 믿음과 의심이, 기쁨과 실망감이,
빛과 어둠이 계속 찾아오는 생활입니다.
거의 대부분의 신앙인들이 평생 그렇게 살아갑니다.
성인 성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그런 상황 자체에 대해서 낙담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두운 밤이 지나가면 밝은 아침이 찾아옵니다.>
3) 두 제자가 예루살렘에 가서, 주님께서 시몬에게 나타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것은,
자신들이 만난 예수님이 틀림없이 부활하신 예수님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확신하게 되었음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겪은 일을 이야기했다는 것은,
부활을 증언하고 복음을 선포하는 ‘교회의 사명’ 수행에 합류했음을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 두 제자에게 나타나신 일은, 다른 곳에 계시다가 그들에게 가신 일이 아니라,
처음부터 함께 계시다가 모습을 드러내신 일로 생각됩니다.
우리 눈에 안 보여도, 예수님은 지금 여기에 계시는 분, 언제나 항상 ‘나’와 함께 계시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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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08. 부활 팔일 축제 수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 18:25. 추가.
루카 24,13-35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두 제자는 주님께서 죽으신 후 깊은 실의에 빠져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었습니다. 어느 순간 주님께서 나타나셔서 그들과 함께 걸으시며 대화를 나누십니다. 그런데 어제 복음에서 마리아가 그랬듯, 오늘 복음 속 두 제자도 그분이 누구신지 알아보지 못하지요. 그 이유에 대해 루카 복음사가는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 있었기’ 때문이라고 지적합니다. 눈이 나빠 제대로 안보여서 주님을 못알아본 게 아니라, 세속적인 뭔가가 그들의 눈을 가려서 ‘보고도 보지 못하는’ 상태로 만들어 버렸다는 겁니다. 그러면 대체 무엇이 그들의 눈을 가린 것일까요?
그들이 예수님께 했던 이 말에서 그 힌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해방하실 분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 그 두 제자는 예수님께서 가장 경계하셨던 잘못된 인식과 기대, 즉 ‘왜곡된 메시아관’을 갖고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예루살렘 주민들이 그랬듯 ‘메시아’를, 강력한 카리스마와 능력으로 자기들을 이끌어 로마를 물리치고, 독립과 번영을 가져다 줄 ‘정치적 군주’라고 생각했던 겁니다. 그런데 자기들이 ‘메시아’라고 기대했던 예수님이 반대자들의 손에 붙잡혀 너무나 무력하게 수난당하고 죽으셨으니 실망과 충격이 컸겠지요. 그렇게 모든 희망을 잃고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고향을 향해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습니다. 말 그대로 ‘낙향’하는 길이었지요.
루카 복음사가는 예수님께 대한 그런 오해와 편견이 그들의 눈을 가리어 자기들 앞에 계시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게 만들었다고 지적합니다. 그들이 그런 오해와 편견을 가진 것은 ‘탐욕’ 때문입니다. 즉 그들은 예수님을, 그분의 능력과 힘을 이용하여 자기들이 원하는 것을 얻고 이룰 생각만 하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과한 욕심이 마음에 들어차면 말 그대로 ‘눈에 뵈는 게 없는’ 상태가 되지요.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자기가 보고 싶은대로만 봅니다. 그랬기에 그 모든 기대와 바람이 무너지고 예수님께서 바라셨던 대로, 다시 말해 하느님 아버지의 뜻대로 이루어지자 그들은 ‘눈 뜬 장님’이 되고 맙니다. 눈을 뜨고는 있는데 어디를 봐야할 지, 무엇을 봐야할 지 모르는 채 무지와 절망의 어둠 속을 헤매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님이 그들 곁으로 다가가십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그런 고난을 겪고서 자기의 영광 속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라는 참된 진리를 알려주십니다. 또한 ‘모세와 모든 예언자로부터 시작하여 성경 전체에 걸쳐 당신에 관한 기록들’을 그들에게 설명해주시면서, 당신의 수난과 죽음이 힘과 능력이 부족해서 당한 ‘사고’가 아니라, 온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시려는 하느님 아버지의 큰 뜻을 이루기 위한 ‘순명’이었음을, 결국 모든 것이 하느님의 섭리 안에서 그분께서 바라시는대로 다 이루어졌음을 분명하게 깨닫게 하십니다. 그 깨달음이 두 제자에게는 ‘구원의 진리’가 되어, 그들의 마음을 주님의 뜻을 따르고자 하는 열망으로 뜨겁게 타오르게 만들었지요. 그 덕에 두 제자는 예수님께서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자기들에게 나누어 주시는 모습을 보고 그분께서 ‘주님’이심을 알아보게 됩니다. 그런데 지금 미사에 참여하는 우리 모습은 어떻습니까? 성경에 담긴 주님 말씀이 내 마음을 희망으로 뜨겁게 타오르게 하는 ‘구원의 진리’가 되고 있습니까? 성체성사 안에서 분명히 현존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알아보고, 그분께서 내 안에 들어오심에 감사하고 있습니까? 그래야 주님의 부활이 나에게 참으로 기쁜 일이 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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