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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 산에서 모세를 부르신 하나님(1)
출 19:1-6
1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을 떠난 지 삼 개월이 되던 날 그들이 시내 광야에 이르니라
2 그들이 르비딤을 떠나 시내 광야에 이르러 그 광야에 장막을 치되 이스라엘이 거기 산 앞에 장막을 치니라
3 모세가 하나님 앞에 올라가니 여호와께서 산에서 그를 불러 말씀하시되 너는 이같이 야곱의 집에 말하고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말하라
4 내가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5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6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
출 19:1-6 / [여호와와 계약을 맺을 준비] 이스라엘 사람들이 애굽 땅에서 나온지 석 달이 되었을 때 그들은 시내 광야에 이르렀다. 2) 그들은 르비딤을 떠나 시내 광야에 이르러 시내산 부근에 진을 쳤다. 3) 모세가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 올라가자 여호와께서 산에서 모세를 불러 말씀하셨다. `너는 야곱의 자손들에게 이렇게 말하여라.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일러라. 4) `내가 애굽 사람들을 어떻게 다루었는지 또 내가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어떻게 내게로 데리고 왔는지 너희는 다 보았다. 5) 온 누리가 다 나의 것이 아니냐?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가 세워 준 계약을 잘 지키면 너희는 뭇 민족 가운데에서 나의 소유가 되리라. 6) 너희야말로 나를 섬기는 제사장 나라가 되고 거룩한 민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반드시 일러주어라.'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내 광야에 도착하여 시내 산 앞에 장막을 칩니다. 여기서 기다리고 계신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왕과 백성의 관계를 맺으십니다. 이른바 시내 산 계약(언약)입니다.
산 앞에 장막을 치니라(1-2) 출애굽한지 3달이 되었을 때 이스라엘은 그들이 하나의 국가 공동체로서 시작하는 지점인 시내광야에 도착합니다. 약 10일이면 왔을 거리를 오는 데 60일이 걸렸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인도 속에 느리게 이동했다는 것은, 지금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땅이 아니라 약속의 땅에 걸맞은 존재로 변화되는 일이란 사실이 암시됩니다. 이스라엘은 모세가 하나님을 만났던 그 산 앞에 장막을 치고(출 3:1-12), 시내 산 앞에서 11개월 20일이라는 긴 시간 동안 야영하면서 율법을 받게 됩니다(민 10:11).
여호와께서 산에서 그를 불러 말씀하시되(3) 하나님이 먼저 이스라엘에게 계약을 체결하자고 하십니다. 시내 산 계약은 인간이 아닌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 계약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계약의 당사자인 이스라엘을 야곱의 집이라고 표현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과거 야곱에게 하셨던 약속을 수백 년이 지난 지금 현실로 만들어내고 계십니다(창 28:14, 35:11).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4-6) 하나님은 비유를 써서(19:4)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초월적인 능력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자신을 설명하십니다. 이 말은 이스라엘이 완전한 안전 가운데 있다는 뜻이며, 하나님의 소유라는 의미입니다. 구약에서 소유란 단어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긴밀한 관계를 나타내는 말로 쓰일 때는 ‘특별한 보물’이란 뜻을 갖습니다(대상 29:3; 전 2:8).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당신의 특별한 소유로 부른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으로서 벌어진 하나님과 세상 사이를 중재하는 존재로 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복 있는 부름에 응답하여 그들은 제사장 나라요, 거룩한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 거룩한 요청은 의무 강요가 아닙니다. 무조건적인 은총 속에 구원을 베푸신 하나님에 대한 이스라엘의 자발적인 순종과 응답이어야 합니다.
적용: 당신은 거룩한 제사장 나라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복 있는 부름에 응답하고 있습니까?
퇴직을 앞둔 두 사람이 있습니다. 한 사람은 불투명하고 보이지 않는 미래가 앞에 놓여 있는 것이 두렵다고 했고, 다른 한 사람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최초의 시간을 맞이하는 설렘을 느낀다고 합니다. 아이의 미래를 알 수 없어서 불안하다는 엄마가 있는가 하면, 미래를 알 수 없기 때문에 아이가 무언가를 해낼 때마다 기쁘다는 엄마도 있습니다. 우리는 같은 사건을 두고 불평을 선택할 수도 있고, 감사한 마음을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 설 교 >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출애굽기 19:1-6 / 손재호 목사
출애굽기 19:1-24:18까지 말씀은 시내산 언약과 관련된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는 믿음의 조상들에게 언약하신 대로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키셔서 시내산까지 인도하여 주셨습니다. 애굽의 모든 장자가 죽어가는 상황 가운데서도 이스라엘은 전혀 해를 받지 않았습니다. 구름 기둥 불 기둥으로 그들을 인도하셨습니다. 홍해바다를 마른 땅 같이 건너게 하시고 애굽의 모든 군대를 수장시켜 버리심으로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은혜를 감사하지 못하고 조금만 힘들고 어려움이 생겨도 모세를 원망하고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출애굽 한 후 지난 2개월의 광야생활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시험하는 기간이었습니다. 이들이 과연 거룩한 백성이 될 수 있는지를 시험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시험에 실패하였습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이런 이스라엘 백성들과 언약을 맺어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을 자신의 소유로 삼아 주시고, 제사장 나라요,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여 주셨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19-24장까지 말씀을 살펴보는 가운데 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덧입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시내산 언약을 맺으시는 사건입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출애굽기 저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신 목적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의 노예 상태에서 구원하여 내신 것은 이제부터 자기들 마음대로 살라고 불러내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자기의 소유로 삼으시고 온 세상의 제사장 나라요, 그의 거룩한 백성으로 살도록 불러내신 것입니다. 이 사실을 언약으로 체결하여 주시는 것이 바로 오늘 본문 말씀의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시키셔서 시내산 언약을 맺으신 것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그 언약을 이루어내시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언약을 맺어주심은 여호와께서 스스로 이 언약에 매이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1-2절을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올 때부터 제 삼월 곧 그 때에 그들이 시내 광야에 이르니라. 그들이 르비딤을 떠나 시내 광야에 이르러 그 광야에 장막을 치되 산 앞에 장막을 치니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이 르비딤을 떠나 시내 광야에 도착하여 그 산 앞에 장막을 친 때가 애굽에서 나올 때부터 제 삼월이었다고 합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과 언약을 맺으시는 때와 장소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제 삼월’이라는 말은 이스라엘이 애굽으로부터 출발한 때부터 3개월이 지났다는 말인지, 그들이 시내산에 도착한 때가 3월 1일이었다는 말인지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학자들과 번역본에 따라 입장이 나뉘어집니다. 70인 역은 ‘제 삼월’을 ‘3월 1일’로 번역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 한 때가 1월 15일 이었습니다(참조. 출 12:2, 18). 그러므로 70인 역에 의하면 이스라엘이 애굽을 떠난지 45일이 되는 날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은 날을 유월절 후 50일째인 날로 계산을 합니다. 사실 정상적으로 오면 애굽에서 시내산까지는 삼일이면 올 수 있는 길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오십일 만에 시내산에 이르러 하나님과 언약을 맺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서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으시는 그 오십일 동안 그들이 무엇을 보게 되는 것입니까? 자신들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오순절의 기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신 후 성령이 오시기까지가 오십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후에 사십일 동안 이 땅에 계시며 제자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자신의 죽으심과 부활의 의미와 성령의 임하심을 다시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승천 후 십일만인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유월절 어린 양의 피로 구속함을 받은 이스라엘이 오십일이 지나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체결 하는 것과 같은 형식입니다.
3절을 보면 모세가 하나님 앞에 올라가니 여호와께서 산에서 그를 불러 말씀하시기를 “너는 이같이 야곱 족속에게 이르고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야곱 족속과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라고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4절을 보면 “나의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과 시내산 언약을 맺으시기 전에 지난 1년 동안 진행되었던 일 곧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행하신 일과 이스라엘을 출애굽시키신 일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충성해야 할 의무가 있음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또한 이스라엘이 출애굽의 그 은혜에 기초해서 자신들의 미래를 온전히 하나님께 맡기고 의지하는 것이 당연함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저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어떻게 인도하여 내셨는지를 독수리가 새끼를 보호하는 것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곧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다고 하십니다. 독수리는 새끼를 날개로 업어서 인도한다고 합니다. 신명기 32:10-12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의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 마치 독수리가 그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그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 같이 여호와께서 홀로 그들을 인도하셨고 함께한 다른 신이 없었도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어떻게 보호하시고 인도하셨는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독수리가 새끼를 공중에서 떨어 뜨렸다가 날개로 받고 업어 인도하듯이 인도하셨다고 합니다. 독수리는 새끼들을 공중에서 일부러 떨어뜨렸다가 다시 그 날개로 받아 올린다고 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새끼들을 강하게 키우기 위한 훈련이라고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광야에서 훈련하심으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맛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께서 애굽에 내리신 열 가지 재앙과 유월절 밤의 사건과 홍해바다의 그 놀라운 기적과 그리고 광야에서의 인도하심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가를 보았습니다. 과연 세계가 누구 손에 달려있는가를 보게 하십니다. 광야에서 먹고 마시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친히 목격하게 하십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의 삶을 보면 조금만 힘들고 어려운 문제만 생겨도 모세를 원망하고 하나님을 원망하였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시내산까지 신실하게 인도하여 오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과 언약을 체결하여 주셨습니다. 출애굽기 3장에서 본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가시나무 떨기 불꽃 가운데 모세를 부르셨습니다(1). 그리고 그때 하나님께는 “네가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12). 하나님께서는 이 말씀대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셔서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으심으로 이제 공식적으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을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배은망덕한 행동을 일삼았던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참으로 놀라운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맺으신 언약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5-6절을 보면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찌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가 열국 중에서 하나님의 소유가 되고, 제사장 나라요,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고 말씀합니다.
출애굽기 저자는 먼저 세계가 다 주님께 속하였다고 합니다. 온 세상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아니하는 세계가 모두다 주님께 속한 것입니다. 곧 주님이 주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면 주인의 말을 듣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형벌을 받게 됩니다. 사단은 우리가 다 자신이 주인이 되어 살도록 합니다. 자기 자신의 성공과 행복을 위해 살도록 합니다. 우리 인생은 이런 사단의 속임을 받아 다 자기가 주인이 되어 살고 있습니다. 이것은 세상의 진짜 주인이 누구인지를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미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리하신 주님께 있습니다. 물론 십자가 이전에는 공중권세 잡은 자의 손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단지 불순종의 아들들 안에서만 역사하고 있을 뿐입니다. 결국 이들 사단도 영원한 무저갱에 들어갈 날만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온 세상이 그리스도로 통일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님을 우리가 알고 믿을진대 무엇이 그렇게 두렵습니까? 무엇이 그렇게 염려가 되십니까? 온 세상이 누구 손에 있습니까? 주님 손에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자기들이 주인인양 살고 있습니다. 그러한 인간들을 주님께서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심판받을 땅의 것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위엣 것을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당당함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시내산에서 맺은 언약의 내용을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소유가 되는 것입니다.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여기서 ‘소유’(hL;gUs 쎄구라)라는 말은 보석 곧 귀중한 재산을 나타내는 말로 물건의 소유주만이 누릴 수 있는 매우 귀중하고 가치 있는 소유물을 뜻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특별히 소유하신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매우 특별한 언약으로 하나가 되었음을 강조하는 것입니다(신 7:6; 14:2; 6:18-19). 또한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가 되었다는 것은 곧 그 분의 거룩한 백성이 되어 성결을 배우고 추구하는 것과 직접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구원받은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가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세상의 종이 아닙니다. 죄의 종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
오늘날 새 언약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우리는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된 백성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큰 축복이요,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이 은혜와 축복을 모르고 자꾸만 자기소유를 고집하고 주장하는 것은 아직도 참된 복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믿음의 사람이란 어떻게 사는 것입니까? 고린도전서 3:18-23절을 보면 “아무도 자기를 속이지 말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미련한 자가 되어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미련한 것이니. 기록된바 지혜 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 궤휼에 빠지게 하시는 이라 하였고, 또 주께서 지혜 있는 자들의 생각을 헛것으로 아신다 하셨느니라.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세상에서 미련하게 사는 자입니다. 곧 그리스도의 것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런 자가 지혜로운 자입니다. 성도란 세상에서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라고 바울은 고린도후서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6:8-10절을 보면 “영광과 욕됨으로 말미암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말미암으며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 했습니다. 이런 자세를 가지고 사는 자가 온 세계가 나에게 속했다는 주님의 말씀을 믿고 사는 자입니다.
둘째, 제사장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제사장 나라가 된다는 것은 이스라엘과 열방의 관계를 정의하는 것입니다. 곧 이스라엘의 사명 선언문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열방 가운데 제사장 역할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키신 것은 자신들만 구원받아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온 세계 가운데 제사장의 나라로 세운 것입니다. 제사장이란 죄를 속하기 위하여 세워진 사람입니다. 이스라엘이 바로 이러한 나라로 세움을 받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제사장 나라의 직분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대로 감당을 하지 못했습니다. 성전이 있어도, 제사장이 있어도, 날마다 짐승의 피를 흘렸어도, 제사장의 나라가 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전하고 영원한 대제사장으로 오셔서 이 언약을 완성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거룩한 민족, 거룩한 백성이 되는 것도 결국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결코 우리가 스스로 언약을 지켜서 이루어내지 못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십시오.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언약을 이루겠다고 맹세를 하였지만 그러나 그들은 늘 언약을 파기하기만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언약을 파기하여도 하나님의 언약은 파기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여호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실 때 쪼개진 짐승사이로 타는 횃불이 지나간 것처럼 하나님께서 희생이 되심으로 그 언약을 이루어내신 것입니다. 언약을 배반한 자가 죽임을 당해야 하는데 오히려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신 하나님께서 희생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백성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베드로전서 2:9-10절을 보면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 앞부분을 보면 버림받은 모퉁이 돌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이 돌을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지만 순종치 앉는 자는 걸림돌이 된다고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무엇으로 부름을 받아 나왔습니까?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요, 그의 소유된 백성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고 합니다.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면 이렇게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기 위함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된 자리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왕 같은 제사장으로 부름을 받은 것은 오직 모퉁이 머릿돌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신 버림 받으심으로 인함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사는 것은 그 분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으로 그 분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시겠습니까? 땅의 것이 아니라 위엣 것을 찾는 모습으로, 소유를 늘리는 것이 아니라 나눔으로, 자기 의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의만을 드러냄으로, 긍휼을 받았기에 긍휼의 마음으로 그 분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모퉁이 머릿돌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함을 받은 참된 성도의 복인 것입니다.
셋째, 거룩한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대체로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지칭할 때 사용하는 히브리어 단어는 ‘!['’(암)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y/G’(고이)라는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단어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큰 민족’(l/dG: y/G, 가돌 고이)을 이루어 주겠다고 약속하셨을 때 사용한 단어와 같은 것입니다(창 12:2). 아마도 모세는 이 순간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을 회상하며 이 단어를 사용한 것 같습니다. 곧 시내산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언약을 맺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그 약속의 성취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거룩’이라는 개념의 가장 기본적인 핵심은 구별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제사장 나라로 살려면 다른 민족처럼 살 수 없으며, 그들의 삶의 방식과 다른 삶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이 말씀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열방과의 관계를 형성하고 유지하려면 자신의 삶의 방식을 개혁해 나가며,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추구함으로써 자신의 삶도 거룩하게 지켜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사장의 삶이 거룩해야 백성들의 필요와 요구에 따라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의 백성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거룩을 추구하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고 고백하는 것이 단지 지식이나 이론으로 멈추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룩한 백성으로 부르셨을 때는 분명 거룩하게 살아야 하는 책임과 사명도 함께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세상 만민 중에서 구별하여서 당신의 백성을 삼아 주셨습니다. 이를 통해서 제사장 나라로서의 소명을 감당하게 하셨습니다. 이 하나님께서 오늘날 우리를 세상 가운데서 구별하여 당신의 백성 삼아 주셨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구별되어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구별하여 당신의 백성 삼으신 하나님의 뜻을 따라 거룩함을 추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우리로 새 언약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알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늘 하나님을 배반하며, 원수로 행하던 자들과 언약을 맺어주신 그 은혜를 감사하며,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백성으로 삼아 주신 우리 주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는 삶을 살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아멘!
제사장 나라가 되리라
출 19:1-6 / 이수영 목사
출애굽기 19:1~6)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나온 지 삼 개월이 되던 때 시내 광야에 이르렀습니다(본문 1절). 시내 광야는 시내 산을 둘러싼 광범위한 지역을 가리킵니다. 거기서 이스라엘 백성은 시내 산 기슭에 장막을 쳤습니다(본문 2절). 그리고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시내 산으로 올라갔고 하나님께서는 그를 부르셔서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이같이 야곱의 집에 말하고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말하라. 내가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본문 3-6절)
본문 3절에서 “너는 이같이 야곱의 집에 말하고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말하라.” 하신 것이나 본문 6절 하반절에서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 하신 것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해야 할 말씀이 하나님 자신의 말씀이고, 대단히 중요한 말씀이며, 이스라엘 백성이 경청하고 마음에 잘 새겨야 할 말씀임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말씀이 무슨 말씀입니까?
첫째는 본문 4절에서 보는 대로 “내가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하시기 위하여 하신 일과 그 일을 이루시기 위하여 이집트에서 행하신 일들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상기시키신 것입니다. 여기서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다”는 말씀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모세가 그의 말년에 이스라엘 총회 앞에서 읽은 노래(신32:1-43) 속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의 긴 노래의 일부분인 신32:9-14를 읽어보면 모세는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야곱은 그가 택하신 기업이로다.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이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의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 마치 독수리가 자기의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자기의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의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의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 같이 여호와께서 홀로 그를 인도하셨고 그와 함께 한 다른 신이 없었도다. 여호와께서 그가 땅의 높은 곳을 타고 다니게 하시며 밭의 소산을 먹게 하시며 반석에서 꿀을, 굳은 반석에서 기름을 빨게 하시며 소의 엉긴 젖과 양의 젖과 어린 양의 기름과 바산에서 난 숫양과 염소와 지극히 아름다운 밀을 먹이시며 또 포도즙의 붉은 술을 마시게 하셨도다.”
이 노래의 11절 상반절에서 “마치 독수리가 자기의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한 말의 뜻은 설명이 조금 필요할 것입니다. “어지럽게 한다”는 것은 휘젓는 것을 말합니다. 독수리는 새끼를 낳으면 처음에는 새둥지 안에서 먹이를 날라다 먹여주며 기르지만 때가 되면 새둥지를 휘저어서 새끼들을 밖으로 쫓아냅니다. 스스로 날 수 있도록 훈련을 시키기 위해서입니다. 무정하리만큼 새끼독수리들을 공중으로 내몬 어미독수리는 그러나 그 새끼들 밑에서 날면서 처음 제 힘으로 날개 짓을 하는 새끼들을 보호합니다.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다”는 말씀은 이집트 땅에서 큰 민족을 이루기는 했으나 하나의 독립국가를 이루어본 적이 없는 이스라엘이 자주독립을 하도록 이집트에서 내보내시고는 마치 어미독수리가 자기 새끼들보다 아래에서 날면서 새끼들을 보호하듯이 이스라엘 백성을 지키시고 인도하셨음을 상기시키신 말씀입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출발하여 시내산 기슭까지 이른 것은 그야말로 “독수리 날개로 업어 인도”한 것과 다름없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의 역사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출애굽은 쉽게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으며 이스라엘 백성들 스스로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집트의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을 놓아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의 땅에 내린 여러 가지 재앙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완강하게 버텼습니까? 그는 이집트의 온 땅에서 자기 자신의 아들을 포함하여 모든 장자들이 죽는 열 번째 재앙을 당하고서야 비로소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집트에서 놓아주었습니다. 출애굽 후에도 이스라엘이 간 길은 험난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놓아주고는 마음이 바뀐 바로의 군대가 맹렬히 추격해옴으로써 이스라엘은 앞에는 홍해 뒤에는 성난 바로의 군대 사이에서 절대절명의 위기에 처하기도 했습니다. 그 위기에서 벗어난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끊임없이 이동하는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마실 물이 없을 때가 많았습니다. 식량이 떨어지기도 했습니다. 아말렉 군대의 습격을 받아 힘든 전투를 해야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출애굽으로부터 시내산에 도착하기까지의 여정에서 온갖 사건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보여주신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스라엘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존되어 있는 민족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는 민족이라는 것입니다.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란 아무 것도 없다는 것, 그러나 아무 것도 없는 곳에서도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다 공급하시며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 사실을 요약한 것이 “내가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하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께서 독수리 날개로 업어 인도하시듯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이끌어내신 데는 하나님께서 뜻하신 목적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목적을 이렇게 밝히셨습니다. 본문 5절 하반절과 6절 상반절을 다시 봅니다: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하나님께서는 이 말씀을 하시기에 앞서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라고 하신 사실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세계와 모든 민족이 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지만 그 가운데서 특별히 이스라엘 백성을 당신의 소유로, 당신을 위한 제사장 나라로, 당신의 구별된 백성으로 삼으시겠다는 것입니다.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것은 바로 이러한 뜻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소유”가 될 것이라 한 것은 하나님께 특별히 보배로운 민족이 되고 하나님께서 특별히 아끼시는 나라가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된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제사장이란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서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가도록 도와주고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진리와 사랑과 정의와 은혜와 보호와 복주심을 누리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역할을 하도록 이스라엘을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일찍이 아브라함에게 처음으로 하셨던 언약의 성취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란에 거류하고 있던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시기를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창12:1-3) 하셨던 것입니다.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는 말씀이 바로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리라”는 말씀의 핵심적 의미인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 안에서 하나님을 잘 받들어 섬기며 다른 모든 민족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역의 도구로 쓰임 받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사용하시는 나라가 된다는 것입니다.
시내산에서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셨던 이 언약은 그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 이스라엘이 된 모든 주의 백성들에게 다 해당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벧전2:9-10의 말씀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우리 민족에게도 꼭 들어맞는 말씀입니다. 아니 우리 민족이야말로 이 시대에 하나님의 소유가 되고 제사장 나라가 되라고 특별히 선택받은 백성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 민족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어두운 데서 불러내시고 당신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백성입니다. 우리가 전에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입니다. 우리가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민족입니다. 굴욕과 설움과 가난으로 점철된 역사가 있었지만 오늘날과 같이 발전하고 상대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누리게 된 것은 독수리 날개로 업어 나르듯이 우리를 인도하신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것이었다고 우리는 고백합니다. 그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지 않을 수 없는 우리입니다. 그 사명을 감당하라고 택하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잠시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옛 이스라엘은 수많은 민족 가운데 하나님에 의해 유일하게 택하심을 받고 말로 다할 수 없는 놀라운 은혜를 입은 민족이었지만 하나님께 불충하여 나라가 망하고 이방 땅에 끌려가 살아야 했습니다. 예수님 이후로부터 이천 년 동안 전 세계에 흩어져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종교인 유대교를 온 세계에 전파하는 일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우리 민족은 어떻습니까? 우리 민족도 일본제국의 강점과 억압 때문에 많은 사람이 주변 나라로 이주해 살아야 했던 역사가 있습니다. 6.26전쟁도 경제적 빈곤도 우리 민족을 사방 다른 나라로 나아가게 만드는 요인이었습니다. 지금 북미주에만 적어도 이백만 명의 한인들이 살고 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칠백십만 명의 한인들이 외국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인들에게는 특이한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가는 곳마다 교회를 세운다는 것입니다. 현재 전 세계에 한인들이 없는 나라가 거의 없습니다. 한인교회가 없는 데도 거의 없습니다. 미국에 가보면 한인들이 처음에는 미국교회 예배당을 빌려서 예배를 드립니다. 그러다가 예배당을 빌려준 미국교회보다 교인이 더 많아집니다. 그래서 때가 되면 미국교회 건물을 아예 사버립니다. 그리고 미국교회에 세를 받고 예배당을 빌려줍니다. 그러다가 자꾸만 쇠약해지는 미국교회가 불쌍해서 선교 차원에서 아예 세도 안 받고 예배당을 쓰게 해주기도 합니다. 한인들 상대의 전도와 목회가 미국의 원주민 선교로 나아가고 더 나아가서는 미국인 자체를 향한 선교로 발전합니다. 이것을 디아스포라선교라고 부릅니다. 한국인의 디아스포라선교는 지금 많은 선교학자와 외국교회들의 주목과 연구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미국뿐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도 이루어지고 있는 일입니다. 이런 나라, 이런 민족은 지구상에 거의 유일합니다. 이것 하나만 가지고도 우리는 하나님의 소유이고 하나님의 나라 확장을 위한 제사장 나라로 택하심과 부르심을 받았음이 분명한 것입니다.
디아스포라선교의 또 다른 유형이 있습니다. 그것은 외국에 가 있는 자국민 선교가 아니라 우리나라에 와있는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선교입니다. 이 유형의 디아스포라선교는 지금 대단히 중요한 선교의 영역으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와 있는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선교하는 일은 그들 나라에 선교사를 파송해서 선교하는 것보다 훨씬 더 수월하고 효과적인 것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지금 우리 주변의 외국인들을 교회에 오게 해서 정성껏 도와주고 복음을 전해주며 신앙생활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들이 귀국해서도 계속해서 신앙생활을 해나갈 수 있도록 지속적인 관심과 기도와 연락과 도움의 손길을 모아주는 것입니다. 그 열매는 이미 베트남 같은 데서 확인되고 있습니다.
이제는 우리의 선교의 장을 보는 시각을 넓혀야 할 때입니다. 외국에 있는 한인교회들이 바른 믿음 위에 튼튼히 서게 하는 일에도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더 나아가 한인교회들이 그 나라 사람들을 선교하도록 격려하고 돕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 들어와 있는 외국인들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정성껏 돌보며 그들에게 믿음이 생기게 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귀국해서 모두 자기 나라의 선교사들이 되도록 용기를 주고 후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사장 나라로 부르심을 받은 우리가 해야 할 일들입니다. 이 일에 많은 관심과 기도의 성원을 보내는 우리 새문안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놀라우신 하나님의 약속
출 19:1-6 / 김영수 목사
하나님께서는 양치는 모세를 시내산에서 부르셔서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출3:10)는 사명과 함께 "네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출3:12)는 약속의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모세는 이 귀한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애굽에 들어가서 바로 왕 앞에서 열가지 재앙의 이적과 함께 홍해를 육지처럼 건너며 반석에서 샘물을 솟게 하며 아말렉 전투에서의 대 승리를 거두고 드디어 약속의 장소 시내산에 모세를 다시 세우며 나는 너희와 약속한 것은 무엇이든지 간에 반드시 그 약속을 지키는 하나님, 언약의 하나님이심을 증거해 보이고 있습니다.
1. 호렙산(시내산)에서의 약속이 이루어지다.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의 약속을 받는 장면이 출애굽기 19장 3절부터 6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같은 약속은 이미 출애굽기 3장에서 예언한 바입니다. 출애굽기 3장에 보면은 하나님은 호렙산(시내산) 가시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모세를 부르셔서 사명을 주실 때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10절) 하셨습니다. 이 때에 모세가 대답하기를 "내가 누구관데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11절)하며 불가능 한 것처럼 대답하였습니다.
모세는 애굽 궁궐에서 바로의 양자로서 40세가 되기까지 애굽의 모든 문화와 지식과 무예와 도덕을 배우며 자랐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세는 누구보다 애굽 나라에 대해 바로 왕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못 간다고 한사코 손을 내민 것입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는 말로 위로 하셨습니다. 이 말은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해 낼 때에 너 혼자 가도록 내버려두지 않겠다.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네가 무엇을 하든지 승리할 수 있도록 도울 테니 너는 아무 걱정하지 말아라.」는 것입니다. 그런 후에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네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출3:12절)고 약속하셨습니다.
모세는 이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애굽 땅에 들어가 바로 왕으로부터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시키고 홍해를 육지같이 건넜을 뿐 아니라 뒤따라오던 애굽의 군대들을 홍해바다에 수장시키고, 마라의 쓴 물을 단물로 바꾸었을 뿐만 아니라, 시내 광야에서는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이시며, 미디안 광야 근처 르비딤에서는 반석을 쳐 생수를 솟게 하고, 또 뜻하진 않은 아말렉군대의 침략을 기도함으로 물리친 대 역사의 기적을 경험하고 이제 처음 모세가 부름을 받았던 바로 그 호렙산, 시내산에 돌아와 장막을 치고 여호와의 부름을 받고 산 위에 올라선 것입니다.
"네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12절)고 말씀하신 후 정확히 3개월이 되어 이스라엘 백성들과 모세는 하나님의 산 호렙산(시내산) 앞에 이르러 "여호와 닛시" 하나님을 찬양하며 경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감격적이고 흥분에 넘친 기쁨의 날이었겠습니까?
이 같은 장면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은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이루시는 축복의 하나님, 약속의 하나님"이신 것을 마음속 깊이 인식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계획을 사람들의 형편이나, 세상 환경과 관계없이 약속하신 말씀 그대로 반드시 이루시는 능력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할 때에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5장7절에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우리가 이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기도할 때 모세의 기도를 응답해 주셨듯이 저와 여러분의 기도도 응답해 주시는 능력의 하나님이 되어주십니다.
Ⅱ. 선포된 축복의 말씀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감격스런 재회를 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세 가지 축복된 언약의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으로 삼겠다는 약속입니다.(5절)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출 19:5)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가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저와 여러분을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으로 삼으시기 위해 세상에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소유」 이게 무슨 뜻일까요? 일 주일 전에 박경미 집사님이 제게 전화를 걸어서 아파트를 매매 하려고 하니 집의 근저당 권을 풀어달라는 부탁을 하였습니다. 이렇게 부탁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아파트의 소유권이 박경미 집사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 부탁을 따라 근저당권을 풀지 아니하면 안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소유」가 된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나는 하나님에 나라의 소유된 백성으로 등기를 해놨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외에는 아무도 그 소유권을 주장할 수가 없습니다. 사단이 다가와서, 귀신이 다가와서, 악한 질병이 물질의 염려가 다가와서 나를 죄악과 멸망으로 장악하려고 할 때에 우리 하나님께서 다가오셔서 "저는 내 소유이니라." "너 악한 질병 원수 마귀야! 저에게서 나오고 두 번 다시 들어가지 말아라!"며 소유권을 주장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소유권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있고, 그 소유권을 가지고 자기의 것을 주장하듯 하나님께서도 "나를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으로 삼으시고" 악한 것이 나를 장악하지 못하도록 날마다 눈동자 같이 나를 지키시며 돌보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주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소유된 백성으로 하늘나라 등기부에 기록되어 하나님의 특별한 관심과 보호와 사랑을 받는 존재가 되어집니다. 그리고 그 어떤 원수라도「하나님의 소유」에 손 못 대도록 우리를 안전하게 지키시고 보호해주시는 사랑의 하나님이 되어주십니다.
이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순간 영원히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으로 하나님의 귀한 은혜와 축복 속에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께 대한 제사장 나라로 삼아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6절)
6절 말씀입니다.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 제사장 나라가 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우리를 제사장 나라로 삼으시기 위함입니다. 제사장 나라 뜻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기 위하여 대표로 택하신 나라. 그것이 제사장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구원. 하나님의 위대하심, 하나님의 전능하심, 하나님의 그 크신 구원을 만방에 선포하기 위해서 택하신 나라 그게 제사장 나라입니다.
셋째: 구별된 거룩한 백성으로 삼아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6절)
".....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거룩하다는 뜻이 무엇입니까? 걸음도 천천히 걷고, 말도 천천히 하고, 목에 힘 주고, 인사도 정중하게 하는 것이 거룩입니까?
하나님 입장에서 거룩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거룩한 백성으로 삼았다 그 말은 하나님의 것으로 하나님이 구별하고, 분별된 것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았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어깨에 깁스하고 성경 찬송을 끼고 거룩한 폼 잡고 팔자 걸음 걷는 게 거룩한 게 아닙니다. 그건 거룩한 척 폼 잡는 것입니다.
거룩한 백성, 이 말은 구별되었다, 성별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별된 백성 삼으셨습니다. 성별 시켜 하나님의 자녀 삼으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제사장을 삼기 위함입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벧전 2:9-10)
벧전 2:9-10은 출 19:5 이하의 말씀과 똑같은 말씀입니다.
이렇게 우리를 택하신 족속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그의 소유된 백성으로 만드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우리를 구원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의 기이한 빛에 거하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즉 하나님의 구원의 복,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은혜를 만방에 선전하기 위해서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부탁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마 28:18-20에 "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의 이름으로 침(세)례를 주고 내가 네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는 복음전파의 사명입니다. 이 복음전파의 사명을 이루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Ⅲ. 약속의 하나님을 기억하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약속된 하나님 말씀을 따라 움직였습니다. 그리하여 출애굽 한지 3개월만에 약속의 땅 시내산 광야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신실하신 하나님,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이루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시내산에 서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두 가지를 기억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 말씀이 3,4절에 있는 말씀입니다.
"모세가 하나님 앞에 올라가니 여호와께서 산에서 그를 불러 가라사대 너는 이같이 야곱 족속에게 이르고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라 나의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출 19:3-4)
① 구원하신 하나님을 기억하기를 원하십니다.
모세가 나아가니 여호와께서 산에서 그를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야곱 족속에게 이르고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라.'(3절)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르고 고하라.' 같은 말을 두 번이나 반복하셨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심은 우리가 구원받은 것이 우리가 잘나고 똑똑해서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나께서 구원사역을 주도적으로 이루셨다는 것입니다.
② 구원하신 방법을 알기를 원하십니다.
4절에 "나의 애굽 사람들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의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이 말씀은 내가 너희를 어떻게 구원해 내었는가를 알라는 것입니다.
애굽 사람들을 어떻게 저주했습니까? 그리고 그들을 어떻게 건져내었습니까? 흑암의 재앙과 장자의 재앙에서 하나님은 분명하게 이스라엘 백성들과 애굽백성들을 구별하여 심판을 행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내가 독수리의 날개로 너희를 업어서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다."(4절)고 설명하고 계십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구원을 분명히 보고 체험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와 돌보심의 은혜를 분명하게 체험했습니다. 하나님은 이 은혜를 너희가 잊지 말고 분명하게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성도들은 누가 우리를 죄에서 죽음에서 구원하셨는가?를 분명하게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구원사역을 후세들이 잊지 말도록 '이르고 고하라'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구원받은 사실에 대해서 우리가 기억하기를 원하십니다. 죄악의 자리에 있던 우리를, 사단의 종 되었던 우리를, 저주받아 마땅한 멸망의 자리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할렐루야.
우리가 잘 나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 만날 계획을 세워서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제사장 나라가 되어, 거룩한 백성이 되어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선포하도록 하기 위하여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구원의 사실을 우리가 늘 기억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이 구원의 감격 속에 살기를 원하십니다. 정말로 진실로 우리가 참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면 날마다 시간마다 날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의 감격에 젖어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아도 아무런 감동이 없고 구원의 기쁨이 없고, 보혈의 찬송을 불러도 가슴에 아픔과 감사의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면 우리의 영적 상태는 심각한 위기상태에 놓여있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신앙이 병든 사람이거나 죽은 사람입니다.
진짜 구원의 감격을 아는 사람들은 예수 소리만 들어도 십자가만 바라보아도 눈물이 납니다.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주시기까지 사랑하신 하나님의 그 큰 구원의 소식을 들을 때마다 감사와 감격의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습니다.
신약 에베소서 2장 8절과 9절에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너희가 그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나서 똑똑해서, 학문을 많이 연구하고, 도를 닦고 공을 많이 세워서 구원받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값없이 구원받았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네가 기억하라고 하셨습니다.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자랑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구원의 확신 속에서 살기를 원하십니다.
Ⅲ.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시내산 가시떨기 불꽃 가운데에서 모세를 부르셔서 말씀하셨던 것처럼 제사장의 직분을 가지고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축복의 말씀, 언약의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마태복음 16장18절과 19절에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왕처럼 통치할 권세를 주신 것입니다. 천국 제사장으로서 하늘의 천국 열쇠를 가지고 이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며 충만케하는 축복의 권세를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IMF가 무섭고 위용이 강해도 늘찬양교회와 저와 여러분의 믿음을 넘어뜨리지 는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절대로 낙심하거나 구원 사역을 중단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뿐만 아니라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 되시는 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예비하시고 하늘로부터 내려 오셔서 이기는 자들에게 유업으로 얻게 하리니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벧후3:13-14 계21:1-8)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더 이상 사망이나 고통이나 죄악이 존재하지 않는 영원한 나라 새 하늘과 새 땅을 마련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들을 그곳에 두고자 마지막 날에 다시 오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약속을 믿고 지혜로운 다섯 처녀처럼 등과 기름을 준비하고 신랑을 맞이해야 합니다.(마25:1-13)
아울러 우리 주님으로부터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마 25: 23)는 축복을 받기까지 믿음의 여정을 쉬지 않고 주님의 은혜가운데 행하시기를 바랍니다.
결론으로 말씀드립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바가 있습니다. 단지 모양만 예배드리고 입술로만 신앙고백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명하신 모든 것을 믿음 안에서 순종하며 제사장으로서, 복음 증거 자로서 은혜 안에 살아갈 때에 모세를 시내 산에서 다시 만나주신 약속의 하나님께서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저와 여러분을 다시 만나 주시사 지금까지 약속하신 그 모든 것을 선물로 부어 주실 것입니다. 그때까지 우리 모두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믿음과 은혜가운데 승리하며 살아가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독수리 날개 같은 은혜
출 19:1-6 / 이동휘 목사
1. 어떤 아이들은 좋은 환경에서 엄마 아빠, 그리고 할머니 할아버지의 사랑을 많이 받고 자라가는데,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며 자라가는 아이들을 생각하면 그 아이들이 한없이 불쌍하게 느껴집니다. 다 같이 귀한 아이인데, 사랑을 많이 받고 자라는 아이라서 그 존재 의미와 가치가 더 한 것도 아니고,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라는 아이라고 그 존재 의미와 가치가 덜한 것도 아닌데 왠지 안타까워 보이는 것입니다. < 사랑과 수명과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과학자들이 세 개의 쥐장에다 쥐를 넣어서 길렀습니다. 첫 번째 쥐장에는 한 마리의 쥐를 넣었고, 두 번째 쥐장에는 다섯 마리를 함께 넣고 쥐끼리만 살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쥐장에는 다섯 마리를 넣되 사람과 사귀면서 살도록 했습니다. 모든 쥐장에는 같은 시간에 음식을 넣어주었습니다. 말하자면 먹고 자는 조건은 똑같은데 교제 환경을 달리한 것입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첫 번째 쥐장에 혼자 있는 쥐의 성격이 날카로워지기 시작했습니다. 많이 먹지도 않고 다른 쥐를 집어 넣으면 즉시 공격을 해서 물거나 죽여 버렸습니다. 또 별로 움직이지 않은 것으로 보아 우울하게 지내는 것 같았습니다. 두 번째 쥐장에 있는 쥐들은 흔히 쥐들이 보이는 보통의 성격을 그대로 유지했습니다. 싸우기도 하고 활발하게 움직이기도 하고 함께 붙어서 자기도 했습니다. 세 번째 쥐장의 쥐들은 저희들끼리도 있지만 음식을 주는 사람이 말도 걸고 장난도 치고 하면서 애정으로 대하자 두 번째 쥐장의 쥐들보다 좀 더 활발했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나타나면 반기는 기색을 보였고, 더욱이 사람이 쓰다듬어 주는 것을 즐겼습니다. 결과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분리해서 키운 쥐들의 수명이 각각 달랐습니다. 첫 번째 쥐장의 쥐는 600일을 살았고 두 번째 쥐장의 다섯 마리 쥐는 700일 정도 살았습니다. 그리고 사람과 사귀면서 살았던 세 번째 쥐장의 쥐들은 950일 정도 살았습니다. 학자들은 쥐가 사람이라는, 다시 말해 쥐에게는 초월적인 존재와 사귀는 것이 쥐의 수명에 굉장히 큰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 연구가 발표된 후에야 사람들은 개의 평균 수명이 10년 내지 12년인데 미국 가정의 개들은 16년 이상 사는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쥐의 평균 수명이 700이라든가 개의 평균 수명이 10년이라는 것은 원래의 수명이 아니고, 어쩌면 쥐는 950일을 살아야 하고 개는 16년 이상을 살아야 정상 수명을 누리는 것이라는 말이 나오고 있습니다. 세 부류의 쥐들이 왜 각기 수명이 다른 것일까? 그 원인을 면밀히 검토하던 중에 세 번째 쥐장에 있던 쥐, 즉 사람한테 사랑을 받은 쥐의 체중이 제일 무겁다는 사실이 나중에 밝혀졌습니다. 체중이 무거운 이유는 뇌의 무게가 다른 쥐들에 비해 더 무겁기 때문이라는 사실도 알아냈습니다. 학자들이 쥐들의 뇌를 해부해 보았더니 세 번째 쥐장에 있던 쥐들의 뇌신경 세포가 다른 쥐와는 달랐습니다. 혼자 있던 쥐의 뇌신경 세포는 작고 고독해 보였습니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세포와 세포끼리의 관계가 원만치 못했습니다. 그것은 세포의 모양과 세포 간에 얽혀 있는 현상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사람한테 사랑을 듬뿍 받은 쥐는 뇌신경 세포들의 가지가 많이 뻗어 나와 섬세하게 얽혀 있었습니다. 학자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자기보다 초월적인 존재로부터 이웃과 사랑을 나누는 생활이, 그 생명 현상에 얼마나 커다란 영향을 미치지는 지를 보여 주는 좋은 실험이었습니다. 사람은 물론이거니와 다른 동물들도 음식만 있으면 살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돼지의 엔돌핀 1mg 을 추출하여 해산하는 여인에게 주사하면 고통도 없다고 합니다. 그 값은 한 때 2천만원이나 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사랑하고 사랑받을 때, 우리 몸 자체내에서 생산되는 엔돌핀은 얼마나 될까? 돼지 엔돌핀과 비교할 수 있을까? 비과학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우리 몸은 사랑이라는 대원칙에 의해 지어졌고 그 원칙에 의해 오늘도 작동하고 있습니다. 한 번 사랑을 표현하고 사랑을 받는 것이 우리 몸에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수천만원의 치료제와 비할 수 없는 치유역할을 한다는 것을 빨리 깨달을수록 희망이 있습니다.)<어느 카페에서 퍼온 글>
사람은 사랑을 받을 때, 그리고 사랑할 때 자기의 존재 의미를 느낄 수 있고 자기 존재의 가치를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독생자를 아낌없이 십자가에 희생시킬 만큼 사람들을 진실로 사랑하십니다.
(요3:16-17)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께서 우리의 죄값을 지불하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불해야 할 죄값이 어느 정도이겠습니까? 거룩하신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희생시키실 만큼 사랑하시는데 그 사랑의 값이 어느 정도이겠습니까? 자신의 존재 가치, 존재 값은 나를 위해 지불하신 값으로 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 나를 위하여 죽으실 만큼의 값이 내 자신의 존재 가치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죄값을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희생시키셨다는데, 내 삶의 존재의 의미가 있고 내 삶의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존재 의미와 존재 가치를 깨닫는 사람이 바로 예수 믿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의 십자가 사랑을 깨닫고 받아들이는 사람이 행복한 것이고, 존재 가치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최고의 영광스러운 존재로 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2.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의 노예생활에서 해방된지 석달째 되어 시내산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모세를 불러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라 명령하셨는데 그 말씀이 곧 오늘 본문 4-6절입니다. 4절 “나의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을...너희가 보았느니라” 이 말씀은 애굽의 종살이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애굽에 내린 10가지 재앙들과 홍해를 가르고 육지같이 건너게 하시며, 애굽 군대를 홍해에 몰사시킨 사건 등을 너희가 생생히 목격하였음을 확인시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어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는 말씀은,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크신 능력과 그 크신 사랑을 반드시 기억하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능력을 항상 기억하고, 앞으로 하나님 말씀을 잘 듣고 순종하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는 언약의 축복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라는 말씀은, 세상 모든 나라 백성 중 가장 귀중히 여기는 백성이 될 것이라는 뜻이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라는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세상에서 고통받고 있는 모든 나라 백성들을 구원하는 제사장 민족으로 삼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구원하신 이스라엘 백성을 자기 소유, 자기 백성을 삼으시고 거룩한 제사장이 되게 한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의 존재 가치와 존재 목적과 의미가 무엇인가를 확실하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독수리 날개로 품은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므로 결국 제사장 나라가 되는 특권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 특권이 영적 이스라엘이 되는 오늘날 기독교인들에게 주어졌는데, 이들도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면 마찬가지로 찍히는바 되리라는 것입니다. 이를 로마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롬11:20-22) 옳도다 저희는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우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를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바 되리라
이같은 말씀을 통해 예수 믿는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독수리 날개로 품듯이 죄의 종노릇하는데서 자신을 구원하신 그 크신 사랑과 능력을 항상 기억하고, 하나님 말씀에 철저히 순종하므로, 이 시대에 거룩한 제사장 나라 백성의 사명을 다 해야 할 것입니다. 제사장 나라가 된다는 뜻이 무엇입니까? 제사장이 하는 일은 첫째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알게 하는 것이며, 둘째는, 백성들의 죄와 허물을 하나님 앞에 들고 나아가 예배를 통해 죄사함을 받도록 중보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제사장은 하나님과 백성 사이의 중보자입니다. 백성들은 제사장 없이는 결코 하나님께 나아가 죄사함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한 마디로 제사장 나라는 온 인류 구원을 위해 복음을 전하며 그들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며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는 나라 백성을 말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신을 가리켜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이라고 하였습니다.(롬 15:16) 또 사도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는 “왕같은 제사장”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주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는 목자의 직분이 바로 복음의 제사장이요 왕같은 제사장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여러분과 이 나라 백성을 이 시대의 제사장 나라로 삼으셨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세계에서 가장 뜨겁게 기도하고 열심히 복음을 전도하며 세계 선교를 위해 힘쓰는 이 나라 백성이 바로 제사장 나라입니다. 우리를 제사장 나라 백성으로 삼으신 것은 전혀 하나님의 은혜이며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구원받은 것이 그들의 노력이나 능력으로 된 것이 아니며, 또한 그들이 월등히 뛰어난 민족이라서 독수리 날개로 품은 것이 결코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이 예수 믿고 구원받게 된 것은 전혀 하나님의 은혜요 사랑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하시고 거룩한 제사장 나라 삼으셨습니다.
어디를 보나 나무랄 데가 없는 한 여자가 있었습니다. 한 가지 숨겨진 큰 컴플렉스가 있다면 그것은 눈썹이 정말 하나도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항상 짙은 화장으로 눈썹을 그리고 다녔지만 마음은 편치 않았습니다. 그러던 이 여자에게도 사랑하는 남자가 생겼습니다. 정말로 사랑했습니다. 남자도 여자에게 다정하고 따스하게 대해 주었고 둘은 결혼을 했습니다. 그러나 여자는 그 놈의 눈썹 때문에 항상 불안했습니다.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도 여자는 자기만의 비밀을 지키면서 행여나 들키면 어쩌나... 그래서 남편이 자기를 싫어하게 되면 어쩌나. 따뜻하기만 한 남편의 눈길이 경멸의 눈초리로 바뀌는 건 정말 상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3년이란 세월이 무사히 지나갔습니다. 그러다가 이들 부부에게 예상치 않던 불행이 닥쳐왔습니다. 상승일로를 달리던 남편의 사업이 일순간 망하게 된 것입니다. 둘은 길거리고 내몰리고 밑바닥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습니다. 제일 먼저 시작한 것이 연탄배달이었습니다. 남편은 앞에서 끌고 여자는 뒤에서 밀며 열심히 연탄을 배달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오던 오후였습니다. 언덕에서 불어오는 바람 때문에 리어카의 연탄재가 날아와 여자의 얼굴은 온통 검댕 투성이가 되었습니다. 눈물이 나고 답답했지만 여자는 얼굴을 닦을 수 없었습니다. 혹시나 자기의 비밀이 들켜 버릴까 걱정이었습니다. 그때 남편이 걸음을 멈추고 아내에게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수건을 꺼내어 얼굴을 닦아주기 시작했습니다. 남편은 아내의 눈썹부분만은 건드리지 않고 얼굴의 다른 부분을 모두 닦아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눈물까지 다 닦아준 후 다정하게 웃으며 남편은 다시 수레를 끌기 시작했습니다. 남편은 결혼하기 이전부터 아내의 약점을 모두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약점들을 덮어두고 사랑해왔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우리의 모든 약점과 단점들을 다 아시면서도 예수 믿기만 하면 독수리 날개로 품어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이같은 하나님의 지극하신 사랑을 항상 기억하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생활로 거룩한 제사장 나라 백성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 다음으로 하나님께서 독수리 날개로 품어 이스라엘 백성을 내려놓은 곳은 “광야”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로 인도하신 목적은 신명기 8장 1-4절에 분명히 명시되어 있습니다.
(신8:1-4) 내가 오늘날 명하는 모든 명령을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고 번성하고 여호와께서 너희의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얻으리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사십년 동안에 네 의복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릍지 아니하였느니라
첫째는 “너를 낮추시며”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장차 온 세계를 구원하는 제사장 나라가 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섬기는 생활이라는 것입니다. 위로 하나님을 섬기고 아래로 이웃을 사랑으로 섬기게 될 때 제사장 나라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로키 산맥 해발 3천 미터 높이에 수목 한계선인 지대가 있습니다. 이 지대의 나무들은 매서운 바람으로 인해 곧게 자라지 못하고 ‘무릎 꿇고 있는 모습’을 한 채 있어야 합니다. 우리나라 제주도 한라산 정상에서도 이같은 현상들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나무들은 열악한 조건이지만 생존을 위해 무서운 인내를 발휘하며 바싹 자세를 낮추어 지냅니다. 그런데 세계적으로 가장 공명이 잘 되는 명품 바이올린은 바로 이 ‘무릎 꿇고 있는 나무’로 만든다고 합니다. 아름다운 영혼을 갖고 인생의 절묘한 선율을 내는 사람은 아무런 고난 없이 좋은 조건에서 살아온 사람이 아니라 온갖 역경과 아픔을 겪어 온 사람입니다. 광야의 악조건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위해 무릎을 꿇는 법을 배워야만 제사장 나라, 복음을 전하여 세상을 구원하는 나라 백성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독수리 날개로 품어 광야에 내려 놓으신 둘째 목적은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는 것입니다. 광야생활의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과연 하나님 말씀을 제대로 지키는 지, 아니 지키는 지 그 마음이 어떠한지 알고자 하심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생활이 힘들고 어려울 때, 그리고 삶이 풍요로울 때, 여러분의 마음이 어떠한지 알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신명기8:13-18입니다.
(신8:13-18) (13) 또 네 소와 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14)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 여호와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이끌어 내시고 (15) 너를 인도하여 그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 곧 불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간조한 땅을 지나게 하셨으며 또 너를 위하여 단단한 반석에서 물을 내셨으며 (16)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17) 그러나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말할 것이라 (18)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 이같이 하심은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오늘과 같이 이루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은혜로 구원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 있을 때나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안식하게 될 때나, 변함없는 믿음으로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지를 보시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독수리 날개로 품어 광야에 내려놓으신 뜻은 이스라엘을 연단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광야는 독수리 새끼를 연단하는 곳입니다. 이와같은 하나님의 목적을 분명히 밝혀주는 성경이 신명기 32장 10-12절에 있는 모세의 마지막 기도입니다.
(신32:10-12)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의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 눈동자같이 지키셨도다 마치 독수리가 그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그 새끼 위에 너풀 거리며 그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것 같이 여호와께서 홀로 그들을 인도하셨고 함께 한 다른 신이 없었도다
독수리는 하늘을 나는 새들의 왕입니다. 독수리는 그 둥지를 아무도 감히 침범할 수 없는 아주 높은 바위산 벼랑에다 짓습니다. 그 둥지의 직경은 무려 2.7m 나 되고 둥지 무게는 2톤이나 된다고 합니다. 이렇게 엄청나게 크고 넓은 둥지를 짓고 거기서 새끼를 낳고 기릅니다. 독수리가 먹이를 향해서 급강하할 때는 그 속도가 무려 시속180km나 됩니다. 게다가 독수리는 반경 90km 나 되는 넓은 곳을 자기 영역으로 하여 왕노릇합니다. 이러한 독수리의 자기 새끼들에 대한 사랑은 유별납니다. 그래서 애굽인들은 독수리를 모성애의 상징으로 숭배하기까지 했습니다. 독수리는 새끼가 연약하고 소심한 새가 되기를 원치 않고 새의 왕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이 때문에 강훈련을 시킵니다. 새들의 왕자가 되기 위해서는 새끼 시절부터 매우 어렵고 힘든 훈련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어미는 높은 절벽에 있는 둥지에서 나오지 않고 계속 머물기를 원하는 새끼들이 귀찮을 정도로 그 앞에서 날개 짓을 하며 보금자리를 어지럽힙니다. 그러면 새끼들이 어쩔 수 없이 둥지에서 나와 어미 날개 위에 올라 탑니다. 어미는 새끼들을 태우고 스릴 넘치게 한참 높이 비상하다가 갑자기 새끼들을 떨어뜨립니다. 그러면 새끼들은 필사적으로 젖먹은 힘을 다하여 날개 짓을 해 봅니다. 그것이 익숙치않아 잘 되지 않으면 그냥 떨어져 죽을 위험에 처하기도 합니다. 땅에 떨어지기 일보 직전 어미는 날쌔게 와서 그 새끼를 자기 날개 위에 업어 구출합니다. 그리고 한참 신나게 오르다가는 또 내려 뜨립니다. 새끼는 다시 스스로 날고자 필사적인 노력을 합니다. 이런 과정을 반복하면서 독수리는 자기 새끼들을 강하고 날쌘 하늘의 왕자들로 키우는 것입니다. 독수리의 자기 새끼에 대한 사랑은 이렇게 훈련시키는 사랑입니다. 만일 독수리 새끼가 훈련을 받지 못한다면 모양은 독수리지만 병든 독수리가 되어 아무 쓸모 없게 될 것입니다. 어린 새끼 독수리에게 어미 독수리의 강훈련은 아픔이 따르지만 새끼를 훈련하는 어미 독수리의 사랑이야말로 최고의 사랑입니다. 이것은 보호만 하지 않고 고난과 시련도 감당함으로 자립적인 힘과 지혜를 지닌 독수리가 되도록 훈련도 겸하여 하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이와 같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훈련하기 위해 광야로 인도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애굽의 육신적이고 물질적인 생활에 젖어, 출애굽 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할 수만 있으면 출애굽하지 않고 노예 생활을 하더라도 애굽에서 편히 살기를 원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그들의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애굽에서 무사 안일하게 소시민적으로 사는 것을 원치 아니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노예근성에 찌들려 조금만 힘들고 어려워도 원망하고 불평하기 잘하는 백성들을 버리지 않으시고 끝까지 사랑하사 독수리 날개로 업어 구원하시고 인도하시는 크신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세상을 구원하는 거룩한 제사장 나라 백성으로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그들을 험한 광야로 끌어내사 강훈련을 시키셨습니다. 이는 얄팍한 감정적인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인간적으로 사랑하지 않으시고 영적으로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를 훈련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하나님의 훈련을 감당할 때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게 됩니다.
카프만 부인의 <광야에 샘>이라고 하는 책의 아주 짧은 이야기입니다. 어떤 날 그가 아주 주의깊게 누에고치에서 그 번데기가 변해서 나비가 되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그 누에고치를 보면 거기서 바늘구멍 만한게 뚤립니다. 번데기가 변해서 나비가 되어 나올 때 하루 종일 걸립니다. 몇 시간 걸려서 조금씩 조금씩 나오면서 고생을 합니다. 날개쭉지 하나가 나오고 퍼둥거리다가 또 한쪽이 나오고 퍼둥거리다가 또 몸이 안나와 가지고 퍼둥거리고 얼마나 고생을 하면서 하루 종일 그짓을 해가지고 겨우 나옵니다. 나와 가지고 몇 바퀴 돌다가 푸둥하고 날아 올라갑니다. 이걸 지켜보다가 ‘아휴 그렇게 고생스럽게 나오는구나.’ 라며 그 구멍이 너무 적다고 생각을 해서 가위로 구멍을 크게 뚫어 줬습니다. 뚫어 주니까 그 나비가 쑥 나왔습니다. 그 나오는걸 보면서 이 카프만 부인이 이런 생각을 했답니다. ‘내가 하나님보다 사랑이 더 많다. 내가 더 자비가 크다. 저 고생하지 않도록 내가 나오게 해 주었으니 내 가 더 훌륭하다.’ 하고 혼자서 빙그레 웃었더랍니다. 그리고 지켜보았더니 그렇게 꺼내 놓은 나비는 날지를 못 합니다. 빙빙빙빙 돌다가 그대로 죽어 버리더랍니다. 결국은 자기가 자비를 베풀어서 번데기가 나비로 변하는 시간에 그를 편하게 해준 줄 알았더니, 자기가 나비를 죽인 것 밖에 안되더라는 것입니다. 왜그럴까? 연구를 해보니까 그 나비가 작은 구멍으로 나오면서 몸부림을 칠 때, 그 몸에 있던 번데기 몸에 있던 영양이 날개로 건너갑니다. 영양가가 날개로 건너가면서 날개가 힘을 얻습니다. 그 좁은 공간으로 나오느라고 몸부림을 치는 가운데, 온 몸이 운동을 해서 힘을 얻어 가지고 그렇게 나와야 그 다음에 날아갈 수가 있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어리석은 짓 감상적으로 해가지고 그저 나비만 몇 마리 죽였구나 하고 반성했다고 합니다. 때로 우리에게는 가혹하리만큼 깜짝 놀랄 만큼 어려운 일들이 인생에 주어집니다. 그러나 그 고난과 아픔 가운데 하나님의 성공과 축복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예수 믿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가시도록 하나님께서 섭리하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과 섭리를 깨닫고 믿는 사람들은 그 모든 시련과 역경을 통해 더욱 더 강해져서 성공과 축복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 주어진 모든 고난과 역경은, 여러분을 시련하고 단련하시어 더욱 더 강하고 정금같은 인격과 성공적인 삶을 위해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다이아몬드와 인간의 가치를 결정하는 기준으로 ‘4C’가 있습니다. 첫째는 투명도(Clarity)입니다. 보석과 사람은 맑고 깨끗한 정도에 따라 가치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제사장 나라가 되기 위해서는 그 어느 백성보다 거룩해야만 합니다. 둘째는 무게(Carat)입니다. 가벼울수록 다이아몬드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처럼 생각과 행동이 가벼운 사람은 인정받지 못합니다. 환경과 처지가 좀 어렵고 힘들다고 해서 광야 이스라엘 백성처럼 곧 원망 불평을 일삼는다면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 될 수 없습니다. 셋째는 색깔(Color)입니다. 가치있는 보석일수록 신비한 빛을 발합니다. 인간의 삶에도 나름대로 빛과 향기가 있습니다. 가장 아름답고 멀리 퍼지는 빛과 향기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삶이 힘들수록 예수 그리스도의 색깔과 향기를 더욱 선명하게 드러낼 수 있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넷째는 모양과 결(Cut)입니다. 보석은 깎이는 각도와 모양에 따라 가치가 달라집니다. 하나님의 소유된 가장 귀중한 백성이 되는 길은 주어지는 여러 가지 연단과 훈련을 통해 하나님의 형상으로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그리할 때 주위를 향해 찬란한 빛을 발할 수 있게 됩니다. 독수리 날개로 품은 하나님의 뜻을 깊이 깨닫고 어떠한 환경과 처지에서도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하나님의 거룩한 제사장 나라가 되시어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제사장 나라가 되리라
출애굽기 19:1-6 / 이수영 목사
본문 3절에서 “너는 이같이 야곱의 집에 말하고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말하라.” 하신 것이나 본문 6절 하반절에서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 하신 것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해야 할 말씀이 하나님 자신의 말씀이고, 대단히 중요한 말씀이며, 이스라엘 백성이 경청하고 마음에 잘 새겨야 할 말씀임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말씀이 무슨 말씀입니까?
첫째는 본문 4절에서 보는 대로 “내가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하시기 위하여 하신 일과 그 일을 이루시기 위하여 이집트에서 행하신 일들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상기시키신 것입니다. 여기서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다”는 말씀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모세가 그의 말년에 이스라엘 총회 앞에서 읽은 노래(신32:1-43) 속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의 긴 노래의 일부분인 신32:9-14를 읽어보면 모세는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야곱은 그가 택하신 기업이로다.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이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의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 마치 독수리가 자기의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자기의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의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의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 같이 여호와께서 홀로 그를 인도하셨고 그와 함께 한 다른 신이 없었도다. 여호와께서 그가 땅의 높은 곳을 타고 다니게 하시며 밭의 소산을 먹게 하시며 반석에서 꿀을, 굳은 반석에서 기름을 빨게 하시며 소의 엉긴 젖과 양의 젖과 어린 양의 기름과 바산에서 난 숫양과 염소와 지극히 아름다운 밀을 먹이시며 또 포도즙의 붉은 술을 마시게 하셨도다.”
이 노래의 11절 상반절에서 “마치 독수리가 자기의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한 말의 뜻은 설명이 조금 필요할 것입니다. “어지럽게 한다”는 것은 휘젓는 것을 말합니다. 독수리는 새끼를 낳으면 처음에는 새둥지 안에서 먹이를 날라다 먹여주며 기르지만 때가 되면 새둥지를 휘저어서 새끼들을 밖으로 쫓아냅니다. 스스로 날 수 있도록 훈련을 시키기 위해서입니다. 무정하리만큼 새끼독수리들을 공중으로 내몬 어미독수리는 그러나 그 새끼들 밑에서 날면서 처음 제 힘으로 날개 짓을 하는 새끼들을 보호합니다.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다”는 말씀은 이집트 땅에서 큰 민족을 이루기는 했으나 하나의 독립국가를 이루어본 적이 없는 이스라엘이 자주독립을 하도록 이집트에서 내보내시고는 마치 어미독수리가 자기 새끼들보다 아래에서 날면서 새끼들을 보호하듯이 이스라엘 백성을 지키시고 인도하셨음을 상기시키신 말씀입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출발하여 시내산 기슭까지 이른 것은 그야말로 “독수리 날개로 업어 인도”한 것과 다름없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의 역사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출애굽은 쉽게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으며 이스라엘 백성들 스스로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집트의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을 놓아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의 땅에 내린 여러 가지 재앙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완강하게 버텼습니까? 그는 이집트의 온 땅에서 자기 자신의 아들을 포함하여 모든 장자들이 죽는 열 번째 재앙을 당하고서야 비로소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집트에서 놓아주었습니다. 출애굽 후에도 이스라엘이 간 길은 험난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놓아주고는 마음이 바뀐 바로의 군대가 맹렬히 추격해옴으로써 이스라엘은 앞에는 홍해 뒤에는 성난 바로의 군대 사이에서 절대절명의 위기에 처하기도 했습니다. 그 위기에서 벗어난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끊임없이 이동하는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마실 물이 없을 때가 많았습니다. 식량이 떨어지기도 했습니다. 아말렉 군대의 습격을 받아 힘든 전투를 해야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출애굽으로부터 시내산에 도착하기까지의 여정에서 온갖 사건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보여주신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스라엘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존되어 있는 민족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는 민족이라는 것입니다.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란 아무 것도 없다는 것, 그러나 아무 것도 없는 곳에서도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다 공급하시며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 사실을 요약한 것이 “내가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하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께서 독수리 날개로 업어 인도하시듯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이끌어내신 데는 하나님께서 뜻하신 목적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목적을 이렇게 밝히셨습니다. 본문 5절 하반절과 6절 상반절을 다시 봅니다: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하나님께서는 이 말씀을 하시기에 앞서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라고 하신 사실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세계와 모든 민족이 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지만 그 가운데서 특별히 이스라엘 백성을 당신의 소유로, 당신을 위한 제사장 나라로, 당신의 구별된 백성으로 삼으시겠다는 것입니다.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것은 바로 이러한 뜻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소유”가 될 것이라 한 것은 하나님께 특별히 보배로운 민족이 되고 하나님께서 특별히 아끼시는 나라가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된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제사장이란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서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가도록 도와주고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진리와 사랑과 정의와 은혜와 보호와 복주심을 누리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역할을 하도록 이스라엘을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일찍이 아브라함에게 처음으로 하셨던 언약의 성취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란에 거류하고 있던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시기를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창12:1-3) 하셨던 것입니다.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는 말씀이 바로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리라”는 말씀의 핵심적 의미인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 안에서 하나님을 잘 받들어 섬기며 다른 모든 민족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역의 도구로 쓰임 받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사용하시는 나라가 된다는 것입니다.
시내산에서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셨던 이 언약은 그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 이스라엘이 된 모든 주의 백성들에게 다 해당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벧전2:9-10의 말씀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우리 민족에게도 꼭 들어맞는 말씀입니다. 아니 우리 민족이야말로 이 시대에 하나님의 소유가 되고 제사장 나라가 되라고 특별히 선택받은 백성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 민족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어두운 데서 불러내시고 당신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백성입니다. 우리가 전에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입니다. 우리가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민족입니다. 굴욕과 설움과 가난으로 점철된 역사가 있었지만 오늘날과 같이 발전하고 상대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누리게 된 것은 독수리 날개로 업어 나르듯이 우리를 인도하신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것이었다고 우리는 고백합니다. 그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지 않을 수 없는 우리입니다. 그 사명을 감당하라고 택하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잠시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옛 이스라엘은 수많은 민족 가운데 하나님에 의해 유일하게 택하심을 받고 말로 다할 수 없는 놀라운 은혜를 입은 민족이었지만 하나님께 불충하여 나라가 망하고 이방 땅에 끌려가 살아야 했습니다. 예수님 이후로부터 이천 년 동안 전 세계에 흩어져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종교인 유대교를 온 세계에 전파하는 일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우리 민족은 어떻습니까? 우리 민족도 일본제국의 강점과 억압 때문에 많은 사람이 주변 나라로 이주해 살아야 했던 역사가 있습니다. 6.26전쟁도 경제적 빈곤도 우리 민족을 사방 다른 나라로 나아가게 만드는 요인이었습니다. 지금 북미주에만 적어도 이백만 명의 한인들이 살고 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칠백십만 명의 한인들이 외국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인들에게는 특이한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가는 곳마다 교회를 세운다는 것입니다. 현재 전 세계에 한인들이 없는 나라가 거의 없습니다. 한인교회가 없는 데도 거의 없습니다. 미국에 가보면 한인들이 처음에는 미국교회 예배당을 빌려서 예배를 드립니다. 그러다가 예배당을 빌려준 미국교회보다 교인이 더 많아집니다. 그래서 때가 되면 미국교회 건물을 아예 사버립니다. 그리고 미국교회에 세를 받고 예배당을 빌려줍니다. 그러다가 자꾸만 쇠약해지는 미국교회가 불쌍해서 선교 차원에서 아예 세도 안 받고 예배당을 쓰게 해주기도 합니다. 한인들 상대의 전도와 목회가 미국의 원주민 선교로 나아가고 더 나아가서는 미국인 자체를 향한 선교로 발전합니다. 이것을 디아스포라선교라고 부릅니다. 한국인의 디아스포라선교는 지금 많은 선교학자와 외국교회들의 주목과 연구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미국뿐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도 이루어지고 있는 일입니다. 이런 나라, 이런 민족은 지구상에 거의 유일합니다. 이것 하나만 가지고도 우리는 하나님의 소유이고 하나님의 나라 확장을 위한 제사장 나라로 택하심과 부르심을 받았음이 분명한 것입니다.
디아스포라선교의 또 다른 유형이 있습니다. 그것은 외국에 가 있는 자국민 선교가 아니라 우리나라에 와있는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선교입니다. 이 유형의 디아스포라선교는 지금 대단히 중요한 선교의 영역으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와 있는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선교하는 일은 그들 나라에 선교사를 파송해서 선교하는 것보다 훨씬 더 수월하고 효과적인 것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지금 우리 주변의 외국인들을 교회에 오게 해서 정성껏 도와주고 복음을 전해주며 신앙생활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들이 귀국해서도 계속해서 신앙생활을 해나갈 수 있도록 지속적인 관심과 기도와 연락과 도움의 손길을 모아주는 것입니다. 그 열매는 이미 베트남 같은 데서 확인되고 있습니다.
이제는 우리의 선교의 장을 보는 시각을 넓혀야 할 때입니다. 외국에 있는 한인교회들이 바른 믿음 위에 튼튼히 서게 하는 일에도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더 나아가 한인교회들이 그 나라 사람들을 선교하도록 격려하고 돕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 들어와 있는 외국인들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정성껏 돌보며 그들에게 믿음이 생기게 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귀국해서 모두 자기 나라의 선교사들이 되도록 용기를 주고 후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사장 나라로 부르심을 받은 우리가 해야 할 일들입니다. 이 일에 많은 관심과 기도의 성원을 보내는 우리 새문안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너희는 제사장 나라가 되게 하라
출 19:1-6 / 피종진 목사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나온 지 삼 개월이 되던 때 시내 광야에 이르렀습니다(본문 1절). 시내 광야는 시내 산을 둘러싼 광범위한 지역을 가리킵니다. 거기서 이스라엘 백성은 시내 산 기슭에 장막을 쳤습니다(본문 2절). 그리고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시내 산으로 올라갔고 하나님께서는 그를 부르셔서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이같이 야곱의 집에 말하고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말하라. 내가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본문 3-6절)
본문 3절에서 “너는 이같이 야곱의 집에 말하고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말하라.” 하신 것이나 본문 6절 하반절에서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 하신 것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해야 할 말씀이 하나님 자신의 말씀이고, 대단히 중요한 말씀이며, 이스라엘 백성이 경청하고 마음에 잘 새겨야 할 말씀임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말씀이 무슨 말씀입니까?
첫째는 본문 4절에서 보는 대로 “내가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하시기 위하여 하신 일과 그 일을 이루시기 위하여 이집트에서 행하신 일들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상기시키신 것입니다. 여기서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다”는 말씀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모세가 그의 말년에 이스라엘 총회 앞에서 읽은 노래(신32:1-43) 속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의 긴 노래의 일부분인 신32:9-14를 읽어보면 모세는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야곱은 그가 택하신 기업이로다.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이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의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 마치 독수리가 자기의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자기의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의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의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 같이 여호와께서 홀로 그를 인도하셨고 그와 함께 한 다른 신이 없었도다. 여호와께서 그가 땅의 높은 곳을 타고 다니게 하시며 밭의 소산을 먹게 하시며 반석에서 꿀을, 굳은 반석에서 기름을 빨게 하시며 소의 엉긴 젖과 양의 젖과 어린 양의 기름과 바산에서 난 숫양과 염소와 지극히 아름다운 밀을 먹이시며 또 포도즙의 붉은 술을 마시게 하셨도다.”
이 노래의 11절 상반절에서 “마치 독수리가 자기의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한 말의 뜻은 설명이 조금 필요할 것입니다. “어지럽게 한다”는 것은 휘젓는 것을 말합니다. 독수리는 새끼를 낳으면 처음에는 새둥지 안에서 먹이를 날라다 먹여주며 기르지만 때가 되면 새둥지를 휘저어서 새끼들을 밖으로 쫓아냅니다. 스스로 날 수 있도록 훈련을 시키기 위해서입니다. 무정하리만큼 새끼독수리들을 공중으로 내몬 어미독수리는 그러나 그 새끼들 밑에서 날면서 처음 제 힘으로 날개 짓을 하는 새끼들을 보호합니다.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다”는 말씀은 이집트 땅에서 큰 민족을 이루기는 했으나 하나의 독립국가를 이루어본 적이 없는 이스라엘이 자주독립을 하도록 이집트에서 내보내시고는 마치 어미독수리가 자기 새끼들보다 아래에서 날면서 새끼들을 보호하듯이 이스라엘 백성을 지키시고 인도하셨음을 상기시키신 말씀입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출발하여 시내산 기슭까지 이른 것은 그야말로 “독수리 날개로 업어 인도”한 것과 다름없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의 역사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출애굽은 쉽게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으며 이스라엘 백성들 스스로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집트의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을 놓아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의 땅에 내린 여러 가지 재앙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완강하게 버텼습니까? 그는 이집트의 온 땅에서 자기 자신의 아들을 포함하여 모든 장자들이 죽는 열 번째 재앙을 당하고서야 비로소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집트에서 놓아주었습니다. 출애굽 후에도 이스라엘이 간 길은 험난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놓아주고는 마음이 바뀐 바로의 군대가 맹렬히 추격해옴으로써 이스라엘은 앞에는 홍해 뒤에는 성난 바로의 군대 사이에서 절대절명의 위기에 처하기도 했습니다. 그 위기에서 벗어난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끊임없이 이동하는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마실 물이 없을 때가 많았습니다. 식량이 떨어지기도 했습니다. 아말렉 군대의 습격을 받아 힘든 전투를 해야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출애굽으로부터 시내산에 도착하기까지의 여정에서 온갖 사건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보여주신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스라엘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존되어 있는 민족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는 민족이라는 것입니다.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란 아무 것도 없다는 것, 그러나 아무 것도 없는 곳에서도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다 공급하시며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 사실을 요약한 것이 “내가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하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께서 독수리 날개로 업어 인도하시듯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이끌어내신 데는 하나님께서 뜻하신 목적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목적을 이렇게 밝히셨습니다. 본문 5절 하반절과 6절 상반절을 다시 봅니다: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하나님께서는 이 말씀을 하시기에 앞서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라고 하신 사실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세계와 모든 민족이 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지만 그 가운데서 특별히 이스라엘 백성을 당신의 소유로, 당신을 위한 제사장 나라로, 당신의 구별된 백성으로 삼으시겠다는 것입니다.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것은 바로 이러한 뜻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소유”가 될 것이라 한 것은 하나님께 특별히 보배로운 민족이 되고 하나님께서 특별히 아끼시는 나라가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된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제사장이란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서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가도록 도와주고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진리와 사랑과 정의와 은혜와 보호와 복주심을 누리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역할을 하도록 이스라엘을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일찍이 아브라함에게 처음으로 하셨던 언약의 성취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란에 거류하고 있던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시기를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창12:1-3) 하셨던 것입니다.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는 말씀이 바로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리라”는 말씀의 핵심적 의미인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 안에서 하나님을 잘 받들어 섬기며 다른 모든 민족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역의 도구로 쓰임 받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사용하시는 나라가 된다는 것입니다.
시내산에서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셨던 이 언약은 그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 이스라엘이 된 모든 주의 백성들에게 다 해당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벧전2:9-10의 말씀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우리 민족에게도 꼭 들어맞는 말씀입니다. 아니 우리 민족이야말로 이 시대에 하나님의 소유가 되고 제사장 나라가 되라고 특별히 선택받은 백성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 민족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어두운 데서 불러내시고 당신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백성입니다. 우리가 전에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입니다. 우리가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민족입니다. 굴욕과 설움과 가난으로 점철된 역사가 있었지만 오늘날과 같이 발전하고 상대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누리게 된 것은 독수리 날개로 업어 나르듯이 우리를 인도하신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것이었다고 우리는 고백합니다. 그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지 않을 수 없는 우리입니다. 그 사명을 감당하라고 택하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잠시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옛 이스라엘은 수많은 민족 가운데 하나님에 의해 유일하게 택하심을 받고 말로 다할 수 없는 놀라운 은혜를 입은 민족이었지만 하나님께 불충하여 나라가 망하고 이방 땅에 끌려가 살아야 했습니다. 예수님 이후로부터 이천 년 동안 전 세계에 흩어져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종교인 유대교를 온 세계에 전파하는 일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우리 민족은 어떻습니까? 우리 민족도 일본제국의 강점과 억압 때문에 많은 사람이 주변 나라로 이주해 살아야 했던 역사가 있습니다. 6.26전쟁도 경제적 빈곤도 우리 민족을 사방 다른 나라로 나아가게 만드는 요인이었습니다. 지금 북미주에만 적어도 이백만 명의 한인들이 살고 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칠백십만 명의 한인들이 외국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인들에게는 특이한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가는 곳마다 교회를 세운다는 것입니다. 현재 전 세계에 한인들이 없는 나라가 거의 없습니다. 한인교회가 없는 데도 거의 없습니다. 미국에 가보면 한인들이 처음에는 미국교회 예배당을 빌려서 예배를 드립니다. 그러다가 예배당을 빌려준 미국교회보다 교인이 더 많아집니다. 그래서 때가 되면 미국교회 건물을 아예 사버립니다. 그리고 미국교회에 세를 받고 예배당을 빌려줍니다. 그러다가 자꾸만 쇠약해지는 미국교회가 불쌍해서 선교 차원에서 아예 세도 안 받고 예배당을 쓰게 해주기도 합니다. 한인들 상대의 전도와 목회가 미국의 원주민 선교로 나아가고 더 나아가서는 미국인 자체를 향한 선교로 발전합니다. 이것을 디아스포라선교라고 부릅니다. 한국인의 디아스포라선교는 지금 많은 선교학자와 외국교회들의 주목과 연구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미국뿐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도 이루어지고 있는 일입니다. 이런 나라, 이런 민족은 지구상에 거의 유일합니다. 이것 하나만 가지고도 우리는 하나님의 소유이고 하나님의 나라 확장을 위한 제사장 나라로 택하심과 부르심을 받았음이 분명한 것입니다.
디아스포라선교의 또 다른 유형이 있습니다. 그것은 외국에 가 있는 자국민 선교가 아니라 우리나라에 와있는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선교입니다. 이 유형의 디아스포라선교는 지금 대단히 중요한 선교의 영역으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와 있는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선교하는 일은 그들 나라에 선교사를 파송해서 선교하는 것보다 훨씬 더 수월하고 효과적인 것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지금 우리 주변의 외국인들을 교회에 오게 해서 정성껏 도와주고 복음을 전해주며 신앙생활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들이 귀국해서도 계속해서 신앙생활을 해나갈 수 있도록 지속적인 관심과 기도와 연락과 도움의 손길을 모아주는 것입니다. 그 열매는 이미 베트남 같은 데서 확인되고 있습니다.
이제는 우리의 선교의 장을 보는 시각을 넓혀야 할 때입니다. 외국에 있는 한인교회들이 바른 믿음 위에 튼튼히 서게 하는 일에도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더 나아가 한인교회들이 그 나라 사람들을 선교하도록 격려하고 돕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 들어와 있는 외국인들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정성껏 돌보며 그들에게 믿음이 생기게 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귀국해서 모두 자기 나라의 선교사들이 되도록 용기를 주고 후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사장 나라로 부르심을 받은 우리가 해야 할 일들입니다. 이 일에 많은 관심과 기도의 성원을 보내는 우리 새문안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독수리 날개로
출애굽기 19:1-6 / 이상호 목사
오늘 본문 4절을 봅니다. “나의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광야에서 40년 동안 인도하여 주시고 보호하여 주시고 훈련시키시는 과정을 독수리가 새끼를 돌보고 양육하고 훈련시키는 모습에 비유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독수리는 새 중의 왕이라고 불립니다. 그래서 독수리는 확실히 다른 새와는 다른 데가 있습니다. 폭풍우가 불어 닥치면 일반 새들은 폭풍우를 피해 숨는데 비해 독수리는 오히려 폭풍우를 향해서 힘차게 날아올라갑니다. 바람이 불면 불수록 그 바람을 타고 더 높이 날아올라서, 구름 위에서 폭풍우가 치는 아래를 바라보며 유유히 날아다닌다는 것입니다. 독수리는 길이가 1m이며, 날개를 쫙 펴면 3m나 되는 대형 새입니다. 세찬 날개로 최고 높이 5000m까지 올라갈 수 있습니다. 시속 200km로 빨리 난다고 합니다. 독수리는 사람이나 다른 동물들이 접근하기 어려운 높은 나무 꼭대기나 절벽 바위틈에 둥지를 틀고 알을 낳습니다. 그리고 그 새끼를 훈련시켜서 성숙시키기까지 3-4년 걸립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40년 동안 광야에서 독수리 훈련을 시켜 오직 하나님만 섬기며 살 수 있게 하셨습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께서는 우리 성도들을 마치 독수리가 자기 새끼를 훈련하는 것처럼 훈련시키십니다. 그리고 축복받을 그릇으로 아름답게 빚어서 우리에게 복을 주시고 사명을 감당할 수 있게 하십니다.
1.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들입니다.
5-6절을 봅니다.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우리가 가장 먼저 알아야 하는 것은 내가 누구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 질문은 철학적인 문제입니다. 수많은 철학자들이 이 문제를 연구하다가 확실한 답을 얻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소크라테스마저도 자기가 확실한 답을 말하지 못하겠으니까 “너 자신을 알라”고만 말한 것입니다. 나는 누구인가에 대하여는 예수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은 자기 이름이 무엇이고 생년월일은 언제고 주소는 어디이고 자기 부모는 누구이고 직업은 무엇이고 하는 현실적인 면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내가 누구인가에 대한 본질적인 해답이 되지 못합니다. 이는 겉으로 보이는 육신적인 질문에 대한 답변에 불과한 것입니다.
우리 예수믿는 기독교인들은 이런 눈에 보이는 현상인 육신적인 답변에 더하여서 본질적인 답변, 영적인 답변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에 대하여 요한복음 1:12절에서 답변해주고 있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들을 창세전부터 이미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때가 되어 여러분을 부르시고 예수믿게 하시고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은 이제 천지를 창조하시고 우주만물의 주인되시는 창조주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며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베드로전서 2:9절에서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이렇게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기 때문에 부모가 자식을 책임지고 키우고 먹이고 입히고 양육시키듯이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 성도들을 책임지고 키우고 먹이고 입히고 양육시켜주시는 것입니다. 분명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하나님의 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전능하신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날개를 펴고 하늘 높이 올라가는, 성공하는 인생을 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사 40:31) 아멘!
어미 독수리는 자기 새끼 독수리를 새 중의 왕으로 키우기 위하여서 엄격한 훈련을 시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도 우리 성도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의 선택받은 하나님의 위대한 백성으로 잘 키우기 위하여서 우리를 푸른 초장으로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며 우리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라도 보호해주시고 광야학교에 보내서 훈련을 시키시는 것입니다.
2.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독수리 날개로 인도하십니다.
본문 4절을 다시 봅니다. “나의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하나님께서는 독수리 날개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 있을 때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셨습니다. 민수기 9:17절에 보면 “구름이 성막에서 떠오르는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곧 진행하였고 구름이 머무는 곳에 이스라엘 자손이 진을 쳤으니”라고 하였습니다. 구름이 멈추면 이스라엘 백성도 멈추고, 구름이 움직이면 이스라엘 백성도 움직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까지 인도하셨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다보면 고난의 깊은 골짜기로 내려가기도 하고 성공의 산꼭대기로 올라가 기도합니다. 우리의 인생살이는 때로는 배고프고 추울 때가 있는가 하면 때로는 모든 것이 풍성하고 배부를 때도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고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현재의 생활이 힘들고 어려울수록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시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고 더욱 소망의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목자가 되시며 우리는 하나님의 기르시는 양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셔서 맛있는 꼴을 먹게 하시고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여주셔서 목마른 우리들에게 맑은 생수를 마시게 하십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의 피로 우리를 구원하여 주신 우리 구주 예수만이 우리의 유일한 소망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셔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까지 인도해주셨듯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되시는 예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꿈과 희망이 있는 소망의 항구로 인도해주시며 마지막 종착점인 천국까지 무사히 인도하여주실 것입니다.
3. 하나님은 우리를 독수리 훈련시켜서 하나님의 위대한 백성으로 만들어 주십니다.
어미 독수리가 새끼 독수리를 훈련시키는 것을 보면 놀랍습니다. 독수리는 높은 나무 꼭대기나 절벽에 둥지를 틉니다. 이 둥지에 알을 낳고 알이 부화하여 새끼가 태어나면 독수리 암수는 정성스럽게 새끼를 키우는데 이 새끼 독수리들이 점차 몸집이 커지고 날 때가 되었는데도 날려고 생각하기는커녕 밖으로 나가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미 독수리는 새끼들을 자기 날개에 태우고 하늘높이 날아올라가서 떨어뜨립니다. 새끼는 살려고 퍼득퍼득하며 날개짓을 해보지만 날지 못하고 땅에 떨어지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어미는 재빠르게 날아서 공중에서 떨어지는 새끼를 날개로 받아 보호해줍니다. 이런 강한 훈련을 통하여 새끼 독수리로 하여금 하늘을 나는 법을 배우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독수리 훈련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연단하시는 과정과 같습니다. 우리가 무사안일주의에 빠져서 게으르고 나태하게 지낼 때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훈련시키시는 것입니다.
미국의 한 수영 선수가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고 난 뒤, 자신의 피눈물 나는 훈련 과정을 글로 썼습니다. 한번은 그가 수영장 바닥에서 미끄러지는 바람에 팔이 부러진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팔에 기브스를 하고 쉬고 있는데 코치가 자신을 수영장으로 데리고 가더니 팔은 기브스를 했지만 발은 멀쩡하니 발로 수영 연습을 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수영장으로 자신을 밀어 넣더니 아예 올라오지 못하도록 수영장에서 올라오는 사다리를 들고 밖으로 나가버렸습니다. 그는 빠져 죽지 않으려고 한참을 허우적거리며 발로 헤엄을 쳤습니다. 이렇게 한 15분쯤 지나자 코치가 그를 꺼내 주었습니다. 그는 당장 코치를 총으로 쏴 죽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때 비로소 자신은 발로 수영하는 진짜 수영법을 배우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목숨을 건 훈련을 통하여 다시 거듭났고 결국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게 되었노라고 고백하였습니다.
모든 성공한 사람들은 다들 남 다른 큰 절망과 고통을 극복한 사람들입니다. 그냥 성공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새끼 독수리들이 공중에서 떨어질 때 얼마나 무섭고 두려웠겠습니까? 앞이 캄캄하고 어쩔 줄 몰랐을 것입니다. 자기 부모가 미워죽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새끼 독수리는 이런 혹독한 훈련을 통해서 일생 동안 마음껏 푸른창공을 날아다니며 하늘에서는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새들의 제왕으로 군림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처해 있는 환경이 어떤 환경입니까? 현재의 상태가 어렵습니까? 고통스럽습니까? 아픕니까? 그렇다면 어미 독수리가 새끼 독수리를 훈련시키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연단시키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나중에 크게 축복하시고, 건강과 능력을 주셔서 하나님 앞에 충성하는 일꾼이 되게 하기 위해서 지금 연단하시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크게 사용하시고 축복을 주시기 전에 반드시 연단하시고 훈련시키셨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도 훈련을 받았습니다. 야곱도 훈련을 받았습니다. 요셉도 훈련을 받았습니다. 모세도 훈련을 받았습니다. 다윗도 훈련을 받았습니다. 사도 바울도 훈련을 받았습니다. 이들은 모두 이 강한 훈련을 통과한 후에 축복받고 지도자로서 성공적인 훌륭한 삶을 살았습니다. 장교는 장교훈련을 받고 사병은 사병훈련을 받습니다. 장교훈련이 사병훈련보다 훨씬 더 길고 훨씬 더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 훈련을 잘 받으면 훌륭한 장교가 되어 많은 부하를 거느리고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큰일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훈련에서 땀 한 방울이 전쟁에서 피 한 방울과 같습니다.
우리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질병으로, 사업의 부도로, 각종 사고로, 자식들의 문제로, 기타 여러 가지 고난을 통하여 우리를 훈련시키십니다. 그리하여 이런 훈련을 통하여 우리의 교만을 깨뜨리고 죄악을 씻게 하여 축복받을 그릇으로 만들어서 축복을 주십니다. 교회에서 훌륭한 지도자로 일꾼으로 일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십니다. 용광로에 들어간 금이 여러 차례의 연단의 과정을 통하여 순수하고 깨끗한 순금이 되는 것처럼 우리 인생도 고난이라는 용광로를 통하여 많은 연단을 받고 정금같은 믿음을 가진 축복받을 사람으로 거듭나게 해줍니다. 그래서 고난이 우리들에게 유익이요, 축복의 예고편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고통과 어려움과 환난이 닥칠 때 낙심하지 말고 “아! 하나님께서 지금 나에게 더 큰 축복과 더 큰 일을 맡기시기 위하여 독수리 훈련을 시키시는구나”하고 하나님 앞에 더욱 충성하고 순종하고 헌신하시기를 바랍니다.
4.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독수리 날개로 보호하여 주십니다.
본문 4절을 다시 봅니다. “나의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어미 독수리는 새끼를 높은 곳에서 떨어뜨렸다가 제대로 날지 못하면 재빠르게 아래로 날아가서 새끼가 다치지 않도록 날개로 받습니다. 훈련은 시키되 새끼가 죽지 않도록 보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믿는 자들이 믿음의 날개를 활짝 펼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연단과 훈련을 시키십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 하나님을 찾고 기도하게 하십니다. 기쁘고 즐거울 때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하게 하십니다. 그러나 혹시 믿음의 날개를 펴지 못하더라도, 찬송과 기도를 하지 못하더라도, 다치지 않도록 사랑과 위로와 긍휼을 베풀어 주십니다. 그래서 병들었으나 죽지 않게 하십니다. 넘어졌어도 다시 일으켜 세워 주십니다.
시편 37편 24절에도 “저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손으로 붙드심이로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들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총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어미 독수리는 새끼 독수리가 다치지 않도록 재빨리 날아가 날개로 받습니다. 안전하게 보호합니다. 또한 어떤 대적이 위협하고 공격해도 철저하게 보호합니다. 암탉이 병아리들을 날개아래 품고 보호하는 것을 여러분들도 한번쯤은 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부모들도 자식을 보호하기 위하여 자신의 몸을 희생합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녀인 우리 성도들을 눈동자와 같이 보호하십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4절에서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태양빛이 뜨겁게 내리쬐는 뜨거운 여름날씨에 독수리 새끼들이 헉헉거리면서 더위에 고통을 당하고 있는데 갑자기 새끼들 머리 위로 그늘이 생기더니 시원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습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무더위에 죽을 지경이었는데 갑자기 시원한 그늘과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니 새끼들은 금방 장난을 치고 떠들며 신나게 놀기 시작합니다. 왜 그런가 하고 보았더니 어미 독수리가 날개를 쫙 펴더니 새끼들 머리 위에 그늘을 만들어 주고, 날개로 바람을 일으켜 주고 있는 것입니다. 새끼들은 그것도 모르고 그저 좋다고 놀고 있는데 어미 독수리는 그 새끼들을 위하여 하루 종일 날개를 펴서 시원하게 해주고 계속 지켜주고 보호해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독수리가 자기 새끼를 보호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보호하여 주셨습니다. 적군과 싸워 이기게 하셨습니다. 병들어 죽지 않게 하셨습니다. 만나를 내려 굶어 죽지 않도록 하셨습니다. 광야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을 돌봐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하나님을 부르고 믿음을 가지고 말씀에 순종하면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버리시지 않습니다. 결코 우리를 망하게 하시지 않습니다. 연단과 훈련을 통해서 더 큰 축복을 주십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사야 31장 5절에서 “새가 날개 치며 그 새끼를 보호함 같이 나 만군의 여호와가 예루살렘을 보호할 것이라 그것을 호위하며 건지며 넘어와서 구원하리라 하셨나니”라고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안전케 하십니다. 보호하십니다.
시편 121편 7-8절에서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케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켜주시고 보호하여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 41:10)
말씀을 맺습니다.
어린 독수리가 훈련과 연단을 통해서 독수리의 날개를 펴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주시는 훈련과 연단을 이기고, 믿음의 날개를 펴고 축복받는 성도가 됩시다. 독수리가 그냥 독수리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강한 훈련을 통해서 강하고 힘센 독수리가 되는 것처럼 광야에서 하나님은 독수리 훈련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제사장의 나라로 거룩한 구별된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의 모든 삶의 여정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훈련받듯이 우리도 인생의 광야학교에서 독수리 훈련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훈련은 훈련을 받은 후에 누릴 우리에게 장차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역전의 명수이십니다. 이제 여러분의 인생도 역전이 될 것입니다. 축복의 대로가 활짝 열릴 것입니다. 아니 이미 여러분의 인생에 인생역전이 시작되었고 이미 축복의 대로가 활짝 열렸습니다. 이 믿음으로 전진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앞길을 책임져주시고 형통케 해 주실 것입니다.
모세 언약의 특징
출 19:1-6 / 피영민 목사1
서론
출애굽기에 기록된 모든 사건들은 역사적인 의미보다 그 속에 담긴 영적인 의미가 더욱 중요합니다. 특별히 출애굽 사건을 읽어보면 개인적으로 구원 받게 된 경험을 생각나게 해 줍니다. 이러한 점에서 출애굽 사건은 거룩하신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들을 어떤 상황에서 구원해 내시고, 어떻게 인도하셨으며, 또 어떻게 교훈하시고, 어떻게 천국까지 인도해 주시는지 그림처럼 보여줍니다.
출애굽을 시작한지 두 달이 지났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세 번째 되던 달에 시내 광야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출애굽기 19장 1절에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올 때부터 제삼월 곧 그 때에 그들이 시내 광야에 이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1년을 머물렀습니다. 이것은 시내 산에서의 경험이 그만큼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행한 일은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일이었습니다. 이 언약을 체결한 장소가 시내 산이었기 때문에 이를 ‘시내산언약’이라고 하고, 이 언약을 중보한 사람이 모세였기 때문에 ‘모세언약’이라고도 합니다.
출애굽기 19장 7~8절에 “모세가 와서 백성의 장로들을 불러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그 모든 말씀을 그 앞에 진술하니 백성이 일제히 응답하여 가로되 여호와의 명하신 대로 우리가 다 행하리이다 모세가 백성의 말로 여호와께 회보하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세는 여호와께 고하였고, 중보자가 되어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전하고, 또 백성들의 반응을 전함으로 모세언약이 체결된 것입니다.
모세언약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서 성경에 대한 이해가 완전히 달라지기 때문에 모세언약을 바르게 해석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특별히 성경 전체를 이해하는 시스템에 따라서 신학이 크게 두 갈래로 갈라지는데, 하나는 루터와 칼빈이 가르친 개신교 정통신학인 ‘개혁주의 신학’이고, 또 다른 하나는 ‘세대주의 신학’입니다. 20세기 한국의 개신교는 세대주의 신학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그리하여 많은 문제점을 양산하게 되었는데, 그래서 저는 세대주의 신학을 매우 싫어합니다. 저는 개혁주의 신학자이기 때문에 지금부터 말씀드리는 것은 개신교 정통 개혁주의 신학에 입각한 이해임을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Ⅰ. 모세언약은 다른 언약들과 어떤 관계가 있나?
성경에 보면 많은 종류의 언약이 등장합니다. 아담언약, 아브라함언약, 그리고 다윗언약은 모세언약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갈라디아서 3장 15~19절은 모세언약을 이해하는 데 있어 대단히 중요한 구절입니다. “형제들아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사람의 언약이라도 정한 후에는 아무나 폐하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하느니라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의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이 없이 하지 못하여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 만일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니리라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은혜로 주신 것이라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아브라함언약이 먼저 있었는데, 후에 등장한 모세언약이 아브라함언약을 폐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이 죄를 짓기 때문에 모세언약의 율법을 더해 주신 것뿐이라는 의미입니다. 모세언약은 아브라함언약이라는 우산 아래 존재하는 것이지 그것을 폐지하거나 변경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너 구원을 받고 시내 광야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모세언약은 새로운 구원의 길이 아닙니다. 모세언약을 체결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미 홍해를 건너온 백성들입니다. 그들은 구원받은 백성들입니다. 이미 구원을 받은 백성들에게 새로운 구원의 길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모세언약은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 이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기준을 제공해 주신 것입니다. 십계명은 그것을 지켜서 구원을 받으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십계명은 구원받은 백성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삶의 기준을 제시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미국에서 20세기 초에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소위 『스코필드 주석 성경』이라는 책을 저술해서 떼돈을 벌은 스코필드 박사는 이런 개신교의 정통적인 이해와 완전히 다른 사상을 가르쳤습니다. 성경 역사를 일곱 가지 시대로 나눌 수 있는데, 무죄시대, 양심시대, 인간통치시대, 약속시대, 율법시대, 은혜시대, 천년왕국시대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 일곱 시대마다 각각 하나님이 새로운 구원의 길을 제시해 주셨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양심시대는 양심을 따라 살면 구원을 받고, 율법시대는 율법을 따라 살면 구원을 받는다는 식입니다. 그 때마다 다른 구원의 길을 제시해 주셨다는 교리였습니다.
그래서 율법을 지키면 구원을 받는다는 주장이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을 잘못 이해한 것이었습니다. 모세가 율법 지킬 것을 언약하였지만 사람들이 율법을 지키지 못하고 실패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은혜로 구원하신다는 주장은 율법과 은혜를 적대적인 관계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이는 율법과 은혜를 엄격히 구별해 놓았고, 지금 성도들은 은혜시대를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십계명은 우리의 신앙과 생활에 유일한 법칙이 될 수 없다는 말이 나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스코필드의 주장이었습니다. 이러한 세대주의 종말론은 “더 이상 율법이 필요없다”는 ‘율법폐기론’(Antinomianism)으로 이어졌고, 기독교의 윤리성이 짓밟혔습니다. 그러니까 기독교 인구가 증가해도 사회는 전혀 개선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구원을 받았지만 윤리적인 기준이 무너졌기 때문에 사회가 새로워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이 은혜아래 있기 때문에 율법의 속박에서 해방되었다는 말은 쉽게 오해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성도가 율법의 정죄에서 해방된 것이지 십계명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것이 세대주의 신학의 맹점이었습니다. 한국에서도 많은 부흥사들과 대형 교회 목사님들이 세대주의 신학에 기초한 설교를 많이 하였습니다. 기독교인들이 많아졌지만 이 사회는 도덕적으로 개선되지 않았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법을 외면하고 은혜만 강조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도적질하고, 간음하고, 거짓말하고, 남의 것을 탐내고, 살인을 저지르는 현상들이 비일비재하게 되었습니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나 다니지 않는 사람이나 아무런 차이가 없어졌습니다. 오히려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들의 “우리가 저들보다 도덕적으로 더 낫지 않느냐?”는 비난이 일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한국 기독교의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세대주의는 유사 기독교입니다. 이단은 아니지만 아주 잘못된 비윤리성을 가져오는 유사 기독교라고 생각합니다. 사회의 빛이 되지 못하는 기독교를 만들어낸 장본인입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많은 언약들이 있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한 가지입니다. 신구약 성경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은 한 가지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죄인이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가능하다는 것을 하나님은 일관성 있게 약속하셨습니다. 단지 그 약속이 여러 가지 언약들로 표현되었을 뿐입니다.
에베소서 2장 12~13절에 아주 중요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여기서 ‘약속의 언약들’(Covenants of the Promise)이라는 단어에 주목하십시오. 약속은 단수로 사용되었고, 언약은 복수로 쓰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 한 가지를 이루는 여러 가지 언약들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에 많은 언약들이 기록되어 있어도 결국 하나님의 약속은 한 가지입니다. 죄인 된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받는다는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언약은 일관성(Unity of Covenants)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5장 46~47절에 “모세를 믿었더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 그러나 그의 글도 믿지 아니하거든 어찌 내 말을 믿겠느냐 하시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모세의 가르침이나 나의 가르침은 동일하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내가 준 언약과 모세언약은 같다고 못 박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는 율법과 은혜를 대립하는 것으로 볼 수 없는 가장 확실한 근거가 됩니다.
율법은 하나님이 택하여 구원하신 백성들에게 삶의 원리가 됩니다. 세대주의 신학은 정통 기독교가 아니라 유사 기독교입니다. 이제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구원받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또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십계명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따라가야 할 삶의 원리입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십계명을 지킬 능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을 때, 성령님을 보내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의 내주를 통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법을 따라 살아갈 능력을 덧입게 됩니다. 그러므로 방언이나 통변과 같은 은사에 지나치게 집착하지 마시고, 그 법을 따라 살아갈 수 있도록 역사하시는 성령님을 신뢰하고 힘을 다해 수고해야 하겠습니다.
Ⅱ. 모세언약의 당사자가 누구인가?
‘언약’은 히브리어로 ‘베리트’이며, 헬라어로 ‘디아쎄케’입니다. 그런데 이 언약이라고 하는 것은 당사자들이 존재합니다. 모세언약의 한쪽 당사자는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출애굽기 3장 14절에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하시고(Self-Existent), 스스로 충족하시며(Self-Sufficient), 스스로 변함이 없으신(Self-Consistent) 분이십니다.
그러면 여호와 하나님과 모세언약을 맺은 다른 당사자는 누구입니까? 이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그것은 첫째로 ‘홍해를 건너온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하나님이 모세언약의 당사자로 이방의 모든 민족을 정하신 것이 아닙니다. 홍해를 건너온 이스라엘 백성들과 모세언약을 체결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떤 백성입니까? 4절에 “나의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독수리 날개로 업어 구원하신 백성입니다.
신명기 32장 11~12절에도 “마치 독수리가 그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그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 같이 여호와께서 홀로 그들을 인도하셨고 함께 한 다른 신이 없었도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노예 생활을 하고 있을 때, 모세를 통해 둥지를 흩트려 놓으셨습니다. 바로의 핍박이 거세지고, 새끼가 나무 위 둥지에서 떨어지듯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통 중에 부르짖을 때 어미 독수리가 쏜살같이 내려가 떨어지는 새끼를 날개로 받아내듯이 하나님이 어미 독수리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을 건져 여기까지 날아오셨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원받은 백성들입니다. 그러므로 모세언약의 체결 당사자는 이미 구원받은 백성들입니다.
둘째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특별히 구별되어 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Special Possession)입니다. 출애굽기 19장 5절에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구절은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 마땅히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언약을 잘 지켜야 될 것 아니냐?”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근거로 세대주의 종말론자들은 모세언약이 조건적인 언약이라고 해석합니다. 이것은 아주 심각한 난독증입니다. 이 구절이 “너희가 내 언약을 잘 지키면 비로소 내 백성이 된다”는 의미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모세언약의 체결 당사자는 이미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며 살아가는 것이 마땅하다”는 구원받은 백성의 표식(Sign)을 의미하는 것이지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 언약을 어기는 것은 합당하지 않은 삶이라는 말씀입니다.
셋째로 그들은 ‘하나님께 헌신된 백성’이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6절에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지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따로 구별하여 제사장으로 쓰신다는 것은 온 세상에 복음을 증거하는 백성들로 그들을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세언약의 한 당사자는 하나님이시고, 다른 당사자는 구원받아 하나님의 소유가 되어 하나님께 헌신된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모세언약은 불신자들을 대상으로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모세언약은 조건적인 언약이 아닙니다. 이런 잘못된 이해로부터 ‘율법주의’(Legalism)가 나오게 된 것입니다. 모세언약은 구원받은 백성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것이 마땅한 것인가를 보여주는 삶의 원리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법을 마음에 두고 십계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십계명을 다 지킬 수 없기 때문에 늘 성령을 의존하고 기도해서 그 분의 능력 가운데 거룩한 법을 따라 사시기 바랍니다.
Ⅲ. 모세언약의 3대 구성요소는 무엇인가?
출애굽기 20장부터 35장까지는 모세가 시내 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율법을 받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율법은 세 가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모세언약의 첫 번째 구성요소는 ‘도덕법’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신정통치 국가의 사회법으로 만든 것이 시민법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직접 통치하시는 국가이기 때문에 모든 시민법이 도덕법을 100% 반영하고 있습니다.
우리 대한민국도 이승만 초대대통령이 아주 좋은 법을 만들었습니다. 당시 제헌국회가 법을 만들 줄 몰랐기 때문에 일본의 법을 참고해 헌법을 만들었습니다. 영어를 하는 사람은 드물었고, 일어를 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일본의 법을 참고한 것이었는데, 일본의 법은 독일의 법을 모방해 만든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법은 간접적으로 독일의 법을 모방하게 되었습니다. 독일의 법은 하나님의 법이 많이 반영된 것이었기에 우리나라 헌법에도 하나님의 거룩한 법이 많이 반영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만일 그 때 중국의 법을 모방했다면 어떻게 될 뻔했습니까?
만일 대한민국의 법에 “불상에게 절하지 아니하면 징역 5년에 처한다”고 하거나, “김정일 동상에 절하지 아니하면 죽인다”고 했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우리가 그 법을 어떻게 거역할 수 있겠습니까? 국가 권력으로 강요하는 것이 법인데, 그렇게 좋지 못한 법이 지배하는 사회가 되었다면 우리나라는 이렇게 발전한 나라가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대한민국은 비교적 하나님의 법이 잘 반영된 법치국가라는 사실을 잊지 말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모세가 십계명을 받을 때, 하나님께 빌어서 받은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빌어서 받은 것이 아닙니다. 도덕법은 아담이 창조될 때부터 인간의 양심 속에 넣어주신 것입니다. 모세는 단지 그것을 기록된 법으로 받았을 뿐입니다. 하나님이 친히 손으로 쓰신 놀라운 법입니다. 십계명은 지금도 영원히 살아있는 거룩한 법입니다. 그런데 이 귀한 법을 필요 없다고 폐기한다면 우리는 무엇을 따라 살아가야 합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법 십계명을 사랑해야 합니다.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큰 평안이 있으니 저희에게 장애물이 없으리이다” (시 119:165).
두 번째 구성요소는 ‘희생제사법’(Sacrificial Law)입니다. ‘의식법’이라고도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십계명을 어겼을 때, 짐승을 가져다 죽여 피를 가지고 제사를 드리면 그 짐승의 죽음을 보고 죄를 용서해 주시는 속죄의 원리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희생제사법은 하나님의 백성이 도덕법을 어겨 죄를 지었을 때 속죄 받을 수 있는 원리를 말해 주신 것입니다.
세 번째 구성요소는 ‘성막법’(Tabernacle Law)입니다. 성막은 하나님과 화목(Reconciliation)을 이루고 교제(Fellowship)를 회복하기 위한 장소입니다.
그러므로 모세언약은 하나님의 백성이 십계명을 따라 성화를 이루고, 죄를 지었을 때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속죄함을 받고, 하나님께 나아가 교제를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성화, 속죄, 교제는 성도의 삶에 필수적인 3대 요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세언약은 복음과 다르지 않습니다. 복음의 핵심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것입니다. 모세언약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은혜언약은 결코 대치되는 것이 아닙니다. 한 분이신 하나님이 서로 반대되는 언약을 주실 리가 없습니다. 모세언약은 복음의 한 부분입니다. 오늘 우리는 십계명에 대한 말씀을 듣고 묵상해야 할 뿐만 아니라 우리 삶에 적용해야 할 절대적인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결론
모세언약의 핵심인 도덕법을 무시하는 복음은 교회가 쇠퇴하게 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 됩니다. 전 세계적으로 엄청난 부흥을 이뤄낸 한국교회가 왜 이제는 세상으로부터 욕을 먹고 사람들이 떠나고 있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모두 세대주의 신학 때문입니다. 신학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세대주의 신학에 기초한 설교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대주의는 마땅히 버려야 할 유사 기독교에 불과합니다.
여러분, 모세언약의 궁극적인 목적은 거룩하신 하나님이 택하여 구원하신 백성들을 구별해서 다른 백성들을 구원하는 거룩한 일꾼으로 쓰고자 하신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9절에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기 위해 부름을 받았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직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 못한 사람은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합니다.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오직 이 방법 외에는 구원받고 천국갈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그리고 구원을 받았으면 하나님의 거룩한 도덕법인 십계명을 존중하고 준수하며 살아가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 모든 성도들이 모세언약의 당사자들이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신앙의 패러다임을 알고 전환해야 합니다
출 19:1-6 / 노환영 목사
11월 마지막 주일 찬양예배에 오신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패러다임이 급하게 바뀌고 있습니다. 정치하는 사람, 기업하는 사람, 교육자, 종교인들까지도 이런 패러다임에 적응하지 못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시대의 흐름에 쳐지고 역사의 무대에서 퇴출을 당하고 맙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사람들은 과연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요? 오늘은 패러다임이 무엇이며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결단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먼저, 패러다임 쉬프트는 무엇입니까?
이 패러다임 쉬프트(paradigm shift)라는 용어는 토마스 사무엘 쿤(Thomas Samuel Kuhn)이라는 사람이 처음 사용했습니다. 패러다임 쉬프트는 빠른 사회의 변화에 발상의 전환을 표현했던 용어입니다. 모든 것이 너무 빠르게 진화되고 빠르게 변화됩니다. 이런 사회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그 변화의 속도에 맞추지 못하고 전환하지 못하면 도태되거나 패배자로 전락한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한순간에 이루어지기 때문에 더 무섭습니다.
20세기 중반을 넘어 1960년대 말까지도 스위스는 세계 시계 산업에서 타의 추종을 불어하는 선두주자였습니다. 1968년 당시 스위스는 전 세게 시계 매출의 65%를 차지했었습니다. 그리고 이익은 90%에 가까워서 시계업계를 지배하는 거대한 공룡과 같은 위치에 있었습니다. 정확하고 좋은 시계를 찾는 사람은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시계는 누구든지 스위스 명품을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후 10년 안에 그 어머 어마했던 공룡이 힘없이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기계장치로 만들어지던 시계가 새롭게 등장한 전자공학을 바탕으로 하는 전자시계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스위스 사람들이 중요하게 생각했던 시계 부품들이 소용없어 지고 말았습니다. 기계장치에 전념하던 스위스의 시계 산업이 하루아침에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스위스는 1979년부터 1981년까지 3년 사이에 1,600여개 시계업체 가운데 1,000개가 도산합니다. 시계 세계의 전문 기술자 62,000명 가운데 50,000면이 실직을 하게 된 것입니다. 스위스처럼 작은 나라에서는 너무나 커다란 충격이었습니다. 그런데 믿을 수 없는 일은 전자시계로 패러다임을 바꾸었던 기본적인 기술이 스위스에 의해 개발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1979년 스위스의 뉴 카텔이라는 연구소가 스위스 시계 제조업자들에게 혁신적인 아이이어를 제안했습니다. 기어도, 베어링도, 메인 스프링도 없는 단지 배터리 하나만 집어넣으면 돌아가는 시계였습니다. 하지만 스위스에서는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뉴 카텔 연구소는 스위스에서 외면을 당하자 그 새로운 아이디어를 세계 시계대회에 출품을 하였습니다. 그 대회에서 그 아이디어를 보게 된 일본의 세이코라는 회사가 즉각 계약을 하였습니다. 그 순간이 바로 시계산업의 중심이 스위스에서 일본으로 옮겨지는 운명의 순간이 되고 말았습니다.
결국 그 새로운 전자시계 산업기술을 샀던 세이코는 그 후 세계의 시계 산업을 주도하게 되었습니다. 일본의 시계시장은 전 세계 40%에 가까운 점유율을 갖게 되었고 높은 이익을 얻게 되었습니다.
1968년 당시 시계업계에서 시장 점유율이 1%도 되지 않았던 일본이었습니다. 전자 기술이 보급됨에 따라 전자시계의 시대가 올 것을 미리 내다 본 일본 회사 세이코의 지혜로운 선택과 전환이 바로 세계 시계시장의 판도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이 내용은 빌 벡햄이 쓴 제2의 종교개혁이라는 책의 내용입니다.
스위스의 시계 산업이 갑자기 몰락하고 그 자리를 일본에게 빼앗긴 원인은 무엇일까요? 그 원인은 바로 패러다임 쉬프트, 패러다임의 변화를 깨닫지 못하고 새로운 가치관, 새로운 시대를 받아들이지 않고 전환하지 못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도 이 시대의 패러다임이 어떻게 달라지고 있는지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패러다임의 변화를 보고 전환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음은 신앙에도 패러다임이 있습니다.
같은 날, 같은 곳에서 태어났던 에서와 야곱이 있습니다. 그러나 에서의 길이 있고, 야곱의 길이 전혀 달랐습니다. 이 쌍둥이 형제의 차이점은 무엇인지 아십니까? 우리는 성경을 통해 어떤 사람이 쓰임 받았는지를 주의 깊게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떤 선택을 하고, 어떤 길로 전환하느냐에 따라 그 삶은 확실하게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면 사람들을 변화시키고, 어떻게 하면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위대한 약속에 동참하는 사람으로 남을 수 있을까요? 여러분은 고민하고 있습니까? 지금 나는 어떤 길을 걷고 있는지를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출애굽기 19장 1절 -4절에 “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을 떠난 지 삼 개월이 되던 날 그들이 시내 광야에 이르니라 2 그들이 르비딤을 떠나 시내 광야에 이르러 그 광야에 장막을 치되 이스라엘이 거기 산 앞에 장막을 치니라 3 모세가 하나님 앞에 올라가니 여호와께서 산에서 그를 불러 말씀하시되 너는 이같이 야곱의 집에 말하고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말하라 4 내가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사람은 누구든지 어떤 길을 선택하고 전환하느냐에 따라 그 삶이 판이하게 달라집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따라가는 신앙생활도 성공하느냐,실패하느냐는 그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신앙의 패러다임의 전환은 이전의 삶에서 새로운 삶으로 변화를 선물합니다. 이전과는 구분되고 전혀 다른 삶으로 변모하게 해 줍니다. 그런 변화가 없었다면 세상의 변화와 마찬가지로 도태되어 버립니다. 그리고 여전히 사탄의 영향력 아래 굴복하고 끌려 다니는 불행한 사람이 되고 맙니다.
하지만 새로운 패러다임에 반응하고 전환하는 삶을 살면 세상에 영향력을 미치고 의미 있는 사람으로 세워지게 됩니다.
신앙의 패러다임은 에서의 길에서 야곱의 길로 변화를 줍니다. 제사장 엘리의 집은 망해 갔습니다. 그러나 선지자 사무엘은 흥하게 되는 차이점과 같습니다. 또한 사울의 집은 몰락하고 다윗의 집안이 세워지는 차이점이 무엇이었습니까? 신앙인으로써 여러분도 그 차이를 알아야 합니다.‘왜 저 사람은 망해 갈까?’ 하나님께서 한 때 쓰시려고 존귀하게 세우셨습니다. 그런데 저 가정이 망해가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여러분! 출애굽 했던 이스라엘 장정의 숫자는 60만 3천 5백 50명이었습니다. 그 사람들 중에 하나님이 약속하신 기업인 가나안 땅에 몇 명이 들어갔습니까? 여호수아와 갈렙 단 두 사람뿐이었습니다.
가나안 땅을 정탐할 정탐꾼을 뽑을 때 각 지파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을 선택했습니다. 지략과 용기가 있고 담대하고 능력이 가장 탁월했던 열두 명을 각 지파의 대표로 뽑아 정탐을 보냈습니다.
같은 지형을 40일 동안 정탐했습니다. 그런데 열 사람의 보고와 두 사람의 보고가 달랐습니다. 같은 상황을 같은 시간에 보고 왔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보느냐의 관점에 따라 견해는 젼혀 달랐습니다. 어떤 마음, 어떤 삶의 자세로 그 사건을 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를 얻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을 깨닫지 못하면 5년이나 10년이 지나면 의미 없는 사람으로 사라져 버립니다. 그러므로 그 두 사람과 열 사람의 차이점이 무엇이고 어떤 사람들이 쓰임 받았는지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의 패러다임입니다. 이 시대에 여러분도 신앙의 패러다임을 분별하고 바른 선택과 전환을 해야 합니다. 여러분도 신앙의 패러다임의 전환을 때마다 할 수있기를 바랍니다.
다음은 구원 받은 이후의 패러다임입니다.
출애굽기 19장 5절에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6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한 마디로 계속 변화 중에 살아간다는 말과 같습니다.
항상 같은 모습, 항상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한결 같은 신앙인은 성장할 수가 없습니다. 이전보다 더 나은 모습, 이전보다 더 다듬어지고 성숙해진 모습으로 성장해 가야 합니다. 이전에는 죄의 종으로, 사탄의 노예로 취했던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된 하나님의 자녀로서 사는 그 이후의 모습은 당연히 달라져야 합니다.
여러분! 구원받기 전에는 신앙적인 패러다임의 전환이 있을 수 없습니다. 무엇이 기준이 되는지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고 내 뜻대로 살던 삶이었습니다.
하지만 구원받은 이후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나의 분명한 푯대가 되십니다. 예수님만 바라보고 달려갈 수 있습니다. 예수를 믿겠다고 의지적 결단을 하고 받아들이는 순간부터 눈을 감을 때까지의 삶을 한 단어로 성화의 과정이라고 말합니다. 이 성화의 과정은 이 땅에 사는 동안 조금씩 아주 조금씩 변화되고 계속 성장해 가는 것입니다.
구원의 첫 단계는 피에 의한 신분의 변화를 얻습니다. 죄의 종에서 하나님의 아들로 신분이 변화되는 사건은 출애굽기 12장에 나오는 유월절 사건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교리적으로 칭의라고 합니다. 의롭다고 인정을 받는 것입니다. 이 과정은 모둔 사람들에게 똑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감사합나다”라고 말하고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면 누구든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커다란 특권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처럼 구원에서 첫 단계는 신분의 변화가 이루어집니다. 종, 노예, 심판받을 사람들이었습니다. 저주를 받아야 할 대상이었던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 됩니다. 양자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친자이시고 우리는 양자입니다. 우리의 특권이 친자인 예수님과 동일시 되었음을 에베소서에서 약속하고 있습니다 동양 문화권에서 생각하는 양자개념으로 생각하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로마시대의 양자는 친자와 똑같은 권한을 소유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로마의 네로 황제도 클라우디스 황제의 친자가 아니었습니다. 양자로 들어간 네로가 황제가 될 수 있었습니다. 이는 양자도 친자가 누리는 재산의 상속권, 그 집안의 부와 권력, 신분도 동일하게 보장을 받을 수 있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은 어떤 위기 상황에서도 “하나님 살려 주세요”라고 도움을 청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아무리 내가 잘못해도 우리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강청할 수 있는 관계가 이루어졌다는 뜻입니다. 그 아버지께 크고 작은 여러분의 모든 문제를 말하시고 응답 받으시기 바랍니다.
구원의 두 번째 단계는 세례입니다. 세례는 나를 부인하고 하나님을 내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는 결단입니다. “나의 인생의 열쇠를 하나님께 드립니다”라는 주권의 전환을 경험해야 합니다. 이 과정은 누구에게 주어지지 않습니다. 자신이 하나님께 주권을 주는 결단을 통해 다음단계로 업그레이드가 되는 과정입니다.
나의 내면세계, 마음과 생각의 주도권을 누가 갖고 있습니까? 전에는 바로가 나를 끌고 다니고 사탄에게 끌려 다녔습니다. 그러나 홍해를 건너면서 세례를 받은 이후로는 전혀 달라졌습니다. 내 주권이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세상과 사탄이 내 인생의 주인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 인생의 주인이 되어야 합니다. 이제 하나님을 따르겠습니다. 성령의 인도를 따릅니다. 주의 인도를 받아서 광야라도 좇아갑니다. 모든 내 삶의 주도권을 하나님께 이양시켜 드립니다. 이것이 세례 받은 사람의 변화된 모습입니다.
그러면 그 때부터 그 사람의 삶의 질이 달라집니다. 생각과 사상과 가치관이 변화되기 시작합니다. 돈도, 시간도, 건강도 계속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쪽으로 관심을 갖고 살게 됩니다.
요한일서 5장 8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은 합하여 하나이니라.” 세상을 이길 수 있는 믿음의 증거가 세 가지라고 알려 주신 말씀입니다. 이 세 가지를 누가 가지고 세상에 오셨을까요? 요한일서 5장 6절에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이시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증언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예수님께서 물과 피로 임하셨고 다른 보혜사 성령을 보내 주셨습니다.
세상을 이길 수 있는 첫 증거는 피의 증거입니다.
피의 증거는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신분의 변화를 선물합니다. 내가 할 일이 아무것도 없고 하나님이 다 해 주십니다. 한 단어로 “은혜”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기도하면 응답해 주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어떤 경우에도 내치지 않는 구원의 확신이 주어집니다. 내가 한 일은 의지적 결단만 했습니다.
구원의 확신은 무엇으로 갖게 될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구원 받았다는 것을 확신해야 합니다. 지금 유럽에서 활동하는 구원파는 몇월 몇일 날 구원 받았냐고 묻습니다. 모르면 구원받지 못했다고 하면서 성경을 공부하자고 합니다. 처음에는 교회와 똑같이 가르치지만 어느 순간 자신들의 교리를 가르치고 반복해서 세뇌시킵니다.
또한 문화와 환경을 통해 사람들을 모으고 미혹해 자신들의 교리를 가르쳐서 강요하고 종으로 만듭니다. 매 주일 교회에 나갈 필요가 없고 십일조나 헌금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서는 가정과 가족도 버리고 재산도 모두 바치라고 합니다. 그들의 유혹에 넘어가면 그들의 명령에 따르게 됩니다. 인류 역사에서 지금까지 모든 사이비 종교가 공통적으로 일으키는 사회적인 물의입니다.
여러분! 구원받은 날짜를 정확하게 몰라도 내가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그 순간 약속의 말씀대로 누구든지 예수 이름으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구원의 진리는 다른 어떤 것으로도 바뀔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분별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두 번째 물의 증거는 모든 주권을 하나님께 드리는 삶입니다. 여기서부터는 내가 하나님의 의도를 파악하고 반응해야 합니다. 내 인생의 주도권을 하나님께 드리고 나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나는 죽고 그 분이 사는 인생입니다. 이것이 세례 받은 사람의 삶입니다.
성부,성자,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나를 부인하고 그 분이 내 인생의 주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갈라디아서 2장 20절 말씀과 같이 “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고 고백을 할 수 있습니다. 이 훈련은 세례 받은 이후에 경험합니다.
마지막 증거는 성령의 증거로써 하나님의 영이 내 안에 들어오십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시면서 보내신 성령이 내 안에 들어오면 하나님의 사상, 하나님의 철학, 하나님의 가슴, 하나님의 인격이 내 안으로 자연스럽게 흘러 들어 옵니다. 그래서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인생을 살게 됩니다. 출애굽기 19장 6절에“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이는 제사장으로써 그분의 통치권으로 사람들을 도와주는 삶을 살게 됨을 의미합니다. 그 분의 언어로 사람들을 칭찬하고 격려하고 지지하고 움직이게 하는 삶입니다. 그 모습이 그리스도의 모습과 형상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대행하는 사람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 모습이 바로 성령의 증거를 가진 삶의 모습입니다. 이런 모습은 시내산과 성막예배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오늘 우리들에게는 예배중심의 삶을 말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삶입니다.
정리하면 출애굽기 12장 애굽에서는 유월절을 경험합니다. 출애굽기 13장-14장의 홍해를 건너면서 세례를 받습니다. 출애굽기 15장-18장의 광야에서는 세례에 대한 훈련을 받습니다. 출애굽기 19장-24장 시내산에서 말씀과 사랑으로 변화를 경험합니다. 출애굽기 25장-40장 성막에서는 거룩한 영이신 하나님의 인격을 내 인격에 받아들이게 하십니다. 나와 그리스도가 하나되는 연합의 깊은 세계를 경험하는 곳이 성막입니다.
성막에서 나올 때는 제사장으로 나오니까 사람들이 나를 볼 때 나에게서 주님의 얼굴을 보게 됩니다. 내가 선포하는 언어가 하나님의 언어가 됩니다. 제사장들이 성막에서 나와“너희 죄가 사해졌다”라고 선포하면 백성들의 모든 죄가 사해졌습니다. 언어의 권세가 달라집니다. 패러다임이 계속 바뀌는 것입니다.
이제 구원 받았다는 감격만으로 살아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구원 받은 이후에 어떤 성장이 있는지, 어떤 패러다임으로 전환할지 나의 신앙의 목표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이 원하시는 신앙과 삶으로 전환해야 합니다. 거기에 행복과 평안이 있습니다.
기도 우리의 삶에 함께하시고 인도하시는 좋으신 하나님 아버지! 빠르게 다가오는 시대의 흐름을 보는 눈과 소리를 듣는 귀를 주시고 반응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신앙의 패러다임을 보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반응하고 전환하는 삶을 살게 도와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