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4455
12월31일 [성탄 팔일 축제 제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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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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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Yx-dQYqnI8c
[작은형제회 박희전 루케시오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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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주님 은총으로 충만한 한해를 마무리하며...>
또다시 한해의 끝자락에 서 있습니다. 참으로 다사다난했던 한 해였습니다. 이런저런 고통과 시련의 파도에 힘겨웠던 한해였습니다. 그렇지만 주님 은총으로 충만한 한해였습니다. 비록 이런저런 상처와 결핍, 부끄러움과 회한에도 불구하고 주님께 깊은 감사를 드리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젊은 사제 시절이 생각납니다. 도움이 필요한 아동 양육 시설에서 생활할 때였습니다. 불과 유난히 가까이 지냈습니다. 가출한 한 아이들이 마땅히 잘 데가 없다 보니 문구사를 뚫고 들어가 잠을 청했습니다. 한밤중이 되어 기온이 떨어지니, 너무 추웠던지, 불을 피우고 자다가 문구사를 홀라당 태워 먹었습니다. 현장에서 체포된 아이를 빼내느라 상상을 초월하는 합의금을 지출했습니다.
한번은 한 아이가 버린 담배꽁초로 인해 생활 시설 한 층이 홀라당 타버렸습니다. 다행히 아이들이 모두 등교한 후라 인명피해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물건들이 모두 잿더미로 변했습니다. 애지중지했던 것들이 자취도 없이 사라지니 그 허탈감이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아이를 향한 분노로 제 마음이 이글거렸습니다. 이 난관을 어떻게 극복해야 하나 괴로웠습니다.
괴로워하던 제게 한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인명피해 없는 것이 어디냐? 감사할 줄 알아야지!” 그 순간 원망과 미움의 감정이 순식간에 감사와 찬미의 노래로 뒤바뀌었습니다. “맞아! 이만하길 다행이지!”
저는 즉시 마음을 바꿔먹고 불난 층 대청소를 시작했습니다. 가만히 살펴보니 사람 부르지 않고 복구할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불탄 천장 재료들 잔뜩 싣고 와서 조금씩 공사를 시작했습니다. 고마운 분들이 갑자기 나타나셔서 도배도 해주셨습니다.
뿐만아니라 그 혼란의 순간, 제 머릿속에는 집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잃고 슬퍼하는 난민들, 강제 이주민들, 길거리에서 생활하는 노숙인들의 고통이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다가왔습니다.
고통스럽고 부끄러운 순간이었지만, 수도자로서 청빈 서원의 깊은 의미도 되새길 수 있었습니다. 깊은 고통을 품위 있고 우아하게 흘려보낼 수 있는 기술도 배웠습니다. 맨 밑바닥에서 다시 한번 새롭게 시작할 힘도 얻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고통에서 길어 올린 은총이었습니다.
무한한 주님의 은총과 축복에 힘입어 우리 모두 다시 한번 한해의 끝자락에 서 있습니다. 새해를 맞이하기 전 불놀이를 제대로 한번 하면 좋겠습니다. 갖은 걱정과 근심, 우울감과 상실감을 주님 성령의 짚단에 꽁꽁 묶어 아무런 미련도 없이 불을 붙여 활활 태워버리면 좋겠습니다.
한해의 마지막 지점에 서서 점점 줄어들고 사라져가는 것에 대해 아쉬워하고 불평불만하기 보다는 주님께서 주신 무한한 은총과 축복에 깊이 감사하며 그분께 찬미와 영광을 드리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그분의 충만함에서 우리 모두, 은총에 은총을 받았다.”(요한 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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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ycQMa5aFBpA?si=0NvpFZzFMwycuX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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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31일 [성탄 8일 축제 제7일]
요한 1,1-18
2025년, 당신은 빛이었습니까, 등불이었습니까?
찬미 예수님!
어느덧 2025년의 마지막 날입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오늘, 저는 여러분께 냄새나는 생선 이야기로 강론을 시작해 볼까 합니다.
중국 역사상 최초로 천하를 통일했던 진시황은 자신을 인간을 넘어선 신, 곧 영원히 지지 않는
태양이라 믿었습니다.
그는 죽음을 거부하며 불로초를 찾았고, 자신의 무덤 지하에 수은으로 강과 바다를 만들고 천장의 별자리를 보석으로 박아 영원한 빛의 제국을 건설하려 했습니다.
스스로 빛이 되려 했던 욕망의 끝판왕이었지요.
그의 최후는 어땠을까요?
그는 순행 중에 객사했습니다.
한여름이라 시신은 금방 부패하여 악취가 진동했습니다.
환관 조고는 황제의 죽음을 숨기기 위해 시신이 실린 수레 앞뒤에 절인 생선, 즉 썩은 생선을 가득 실어 시체 썩는 냄새를 생선 비린내로 덮어야 했습니다.
영원히 빛나려 했던 신의 육신은 썩은 생선 더미 속에 숨겨져 옮겨졌습니다.
이와 비슷한 인물이 성경에도 나옵니다.
사도행전 12장의 헤로데 아그리파 1세입니다.
어느 날 그가 은으로 짠 눈부신 옷을 입고 연설하자, 아침 햇살을 받아 옷이 번쩍였고 아첨꾼들은 소리쳤습니다.
"이것은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라 신의 목소리다!"
헤로데는 이 영광을 하느님께 돌리지 않고, 마치 자신이 진짜 빛인 양 으스대며 즐겼습니다.
그 즉시 주님의 천사가 그를 쳤고, 그는 구더기들에게 먹혀 비참하게 숨을 거두었습니다.
스스로 신이 되려던 몸은 가장 하찮은 벌레의 밥이 되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요?
인간은, 그리고 모든 피조물은 스스로 빛을 내는 '발광체'가 아니라 빛을 받아 반사하는 '반사체'로
설계되었기 때문입니다.
전구가 필라멘트를 태워 스스로 빛이 되려 하면 결국 끊어지고 타버립니다.
마지막에 웃으려면, 내가 빛이 되는 것이 아니라 빛이신 분과 연결되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의 요한 세례자는 이 진리를 가장 명확하게 알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요한에게 구름처럼 몰려들었고 그를 메시아로 착각했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요한은 시대의 등불 행세를 하며 영광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단호하게 선을 긋습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나는 그 빛이 아니다."
그는 자신을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 즉 형체 없는 도구로 낮추고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며 무대 뒤로 사라졌습니다.
그가 스스로 빛이 되기를 거부했기에, 예수님은 그를 "여자가 낳은 이들 중에 가장 큰 인물"이라며 진짜 별처럼 높여주셨습니다.
만들어진 존재가 좋은 마지막을 맞이하려면, 만드신 분께 영광을 돌리고 그분을 전하는 거울이 되어야 합니다.
영화 '아폴로 13'의 실화를 기억하십니까?
우주선 고장으로 궤도를 잃은 아폴로 13호의 비행사들은 지구로 돌아오는 길을 찾기 위해 창밖의 별자리를 봐야 했습니다.
그런데 우주선 안에서 켜둔 계기판 불빛들과 떠다니는 잔해들이 반짝거려 밖의 별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살기 위해, 길을 찾기 위해 우주선의 모든 전원을 껐습니다.
내부가 춥고 캄캄해지자, 비로소 창밖으로 그들을 인도할 진짜 별들이 선명하게 보였습니다.
내 빛을 끌 때 별들이 보이고 갈 길이 보입니다.
지난 1년, 우리는 내가 이룬 성취, 내 자존심, 내 계획이라는 불빛을 너무 밝게 켜놓고 살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정작 나를 인도하시는 주님의 별을 보지 못한 것은 아닙니까?
오늘 밤, 나의 빛을 끄십시오.
그리고 먼저 참 빛을 바라보고 그 빛으로 사람들을 인도하십시오.
그러면 내년 이맘때, 우리는 훨씬 더 뿌듯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한 해를 마감하게 될 것입니다.
저도 올 한 해를 돌아봅니다.
'하.사.시.' 연구 모임을 만들고, 번역을 하고, 책을 내고, 강의를 다녔습니다.
많은 냉담 교우들이 다시 성당에 나오는 기쁨도 맛보았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 중에서 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저는 그저 스피커였고, 몽당연필이었습니다.
제가 사라지고 오직 제가 증언한 주님만이 남는다면, 그것으로 제 한 해 농사는 대성공입니다.
마지막으로 루르드의 성녀 베르나데트의 이야기를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그녀는 성모님을 18번이나 만난 기적의 주인공이었지만, 수녀원에 들어가 평생 궂은 일만 했습니다.
한 수녀가 "당신은 기적의 증인인데 왜 이렇게 숨어 지냅니까?"라고 묻자 그녀는 답했습니다.
"저는 빗자루입니다.
성모님은 청소할 때 저를 쓰셨고, 일이 끝나면 문 뒤에 세워두셨습니다.
빗자루가 스스로 나서면 안 되지요."
그녀는 빛을 반사한 뒤 철저히 그림자 속으로, 문 뒤로 숨기를 원했습니다.
그 결과는 어땠습니까?
스스로 태양이라 칭했던 진시황과 헤로데는 썩어 문드러졌지만, 스스로 빗자루라 칭했던 베르나데트의 시신은 100년이 지난 지금도 썩지 않고 잠자는 듯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빛을 전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2025년은 빛이 되려는 해였습니까, 아니면 빛을 전하는 해였습니까?
새해에는 내가 빛나려 하지 말고, 주님의 빛을 세상에 반사하는 맑은 거울이 됩시다.
내가 작아질수록, 내 안의 하느님은 커지십니다. 창조자가 아닌 피조물로 살아야 합니다.
내년 이맘 때는 스스로 타오른 재가 아닌, 빛을 머금은 별의 모습이었으면 좋겠습니다.
한 해 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하기를 빕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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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2025년의 마지막 날입니다. 대한민국은 작년 비상계엄 이후 지난 6월 대통령 선거가 있었습니다. 이재명 정부가 등장했습니다. 미국도 대통령 선거가 있었고, 지난 1월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했습니다. 2025년 4월 21일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하느님 품으로 가셨습니다. 후임 교황으로 미국 출신인 레오 14세 교황님이 267대 교황이 되었습니다. 달라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에도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사순 특강이 있었고, 세례식과 견진성사가 있었습니다. 성모의 밤이 있었고, 성령 기도회가 있었습니다. 주일학교 여름 행사가 있었고, 부주임 신부님이 비자 갱신을 하였습니다. 본당의 날 행사가 있었고, 걷기 대회가 있었습니다. 대림 특강이 있었고, 성탄 미사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송년 미사가 있습니다. 지난 1년 동안 수고하신 봉사자들에게 감사드립니다. 함께 해준 부주임 신부님, 부제님, 수녀님께 감사드립니다. 지치지 않고 여기까지 올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다가오는 2026년은 ‘말띠 해’입니다. 말처럼 힘차게, 주님께서 마련하신 길을 향해 달려가는 한 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복음을 전할 때도, 기도할 때도, 서로를 위로할 때도 말처럼 힘차게 걸어가는 은총의 한 해가 되길 바랍니다.
살면서 ‘마일리지와 포인트, 캐시백’이라는 말을 듣게 됩니다. 마일리지는 항공사에서 항공권을 구매하면 적립해 줍니다. 신용카드를 사용하면 적립해 줍니다. 저도 지난번 한국 휴가 갔을 때 적립한 마일리지를 이용해서 다녀왔습니다. 마일리지를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사람은 비즈니스 좌석으로 승급해서 여행 다니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포인트도 있습니다. 한국 사람이 자주 가는 ‘H mart’도 포인트 카드가 있습니다. 자주 이용하면 포인트가 적립되고 현금처럼 사용할 수 있습니다. 커피 전문점도, 제과점도, 포인트를 적립해 줍니다. 마일리지와 포인트는 기업과 고객에게 도움이 되는 제도입니다. 기업은 안정적인 고객을 확보할 수 있습니다. 고객은 적립된 마일리지와 포인트를 현금처럼 사용할 수 있어서 좋습니다. 캐시백은 일정 금액의 카드를 사용하면 은행 계좌로 적립금을 보내주는 제도입니다. 2026년에도 마일리지, 포인트, 캐시백을 많이 적립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다면 신앙에서는 어떨까요? 2025년을 보내며 저는 ‘신앙의 마일리지, 신앙의 포인트, 신앙의 캐시백’을 묵상해 보았습니다. 신앙의 마일리지는 하느님 나라에 쌓이는 것입니다. 매일 미사에 참석하고, 이웃의 아픔을 함께 아파해 주는 마음은 하느님 나라에 적립되는 마일리지입니다. 신앙의 포인트는 공동체 안에서 모이는 것입니다. 본당 미사와 피정, 구역 모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분들은 신앙의 포인트를 차곡차곡 쌓아 가는 분들입니다. 신앙의 캐시백은 하느님의 사랑으로 되돌아오는 은총입니다. 기도하는 가정, 그리스도의 향기를 드러내는 삶, 용서와 이해의 마음은 하느님 나라에서 은총으로 되돌아오는 캐시백’이 됩니다. 세상에서 적립되는 마일리지는 언젠가 소멸하지만, 하느님 나라에 쌓이는 마일리지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습니다. 2026년에는 신앙의 마일리지와 신앙의 포인트, 신앙의 캐시백이 더욱 풍성해지기를 소망합니다.
2026년을 맞이하면서 저는 우리가 ‘제2의 그리스도’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의 말과 행동에서 위로를 느끼고, 우리의 삶에서 희망을 발견하고, 우리의 미소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보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바로 이 시대에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입니다. 다가오는 새해를 위해 교우 여러분과 나누고 싶은 사자성어는 동상동몽(同床同夢)입니다. 같은 자리에서 같은 꿈을 꾸는 삶입니다. 우리는 세례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고, 성체성사로 자라났으며, 교회의 가르침을 통해 신앙의 어른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꿈꾸는 것은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보는 것이며, 하느님과 함께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품으셨던 꿈을 우리가 함께 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을 우리가 함께 걸어야 합니다. 나의 신앙이 나의 삶과 하나가 되도록, 동일한 자리에서 동일한 꿈을 꾸는 ‘동상동몽’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2026년, 주님과 함께 동상동몽의 길을 걷는 우리 공동체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주님, 지난 1년 동안 저희와 함께 걸어 주시고, 기쁨 속에서도, 눈물 속에서도 당신의 뜻을 찾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다가오는 2026년, 저희가 주님과 같은 꿈을 꾸고, 주님과 같은 길을 걷게 하소서. 신앙의 마일리지와 포인트, 캐시백을 하느님 나라에 차곡차곡 쌓아 가게 하시고, 말처럼 힘차게 복음을 향해 달려가게 하소서. 주님의 사랑이 가득한 새해를 맞이하며 지난 1년 동안 베풀어 주신 은총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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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삼의 딸들 수녀회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님]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14)라는 구절을 그리스 말 표현으로 옮기면 “말씀이 살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천막을 치셨다.”입니다. 당시 유목민의 거주지로 쓰이던 천막은 우리의 몸을 가리키기도 합니다(2코린 5,1-4 참조). 구약 성경에서 천막은 하느님 현존의 상징이요 아브라함이 천사들을 대접하던 환대와(창세 18,1-15 참조) 친교의 자리였습니다.
이제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 취하신 ‘인성’이라는 천막 안에 이스라엘 백성만이 아닌 모든 인간을 모아들이십니다. 그분께서는 언젠가 죽어 없어지는 사람의 몸을 입으시어 우리와 같은 입장에서 연대하시고 친교를 이루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신 것은 사람이 하느님처럼 되도록 하시기 위함이었다고 합니다. 우물 바닥에 있는 인간이, 사람이 되신 말씀이라는 두레박에 담겨 올라가듯이, “그렇게 우리 인간들은 말씀의 육신 안에 담겨 그분을 통하여 신화되었습니다”(성 아타나시오). 주인께서 종을 구하시고자 “종의 모습을 취하[신]”(필리 2,7)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부유하시면서도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여러분이 그 가난으로 부유하게 되도록 하셨습니다”(2코린 8,9). 그러니 “부유하신 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신 이날에, 부자들도 가난한 이들을 자기 식탁에 앉혀야”(성 에프렘, 『성탄 찬미가』)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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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1,1-18: 모든 것이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다.
오늘 복음은 “태초의 말씀”에 대한 장엄한 서두로 우리를 이끌어 준다.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1절) 이는 단순한 시적 표현이 아니라, 하느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밝히는 가장 근본적 진리이다. 말씀은 하느님의 자기 계시이자, 모든 피조물의 근원이시다.
1. 말씀: 하느님의 자기 표현
우리는 말을 통해 마음과 생각을 드러내듯, 하느님께서는 “말씀”을 통해 당신 자신을 드러내신다. 그러나 우리의 말은 불완전하고 때로는 진실하지 못하다. 하지만 하느님의 말씀은 진리 그 자체이며, 한 점 한 획도 변하지 않는 생명이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말한다. “만물을 지으신 하느님의 말씀은 바로 하느님 자신이시다. 스쳐 지나가는 소리가 아니라, 영원히 머무는 실체이시다.”(In Iohannis Evangelium Tractatus I,5)
2. 말씀은 생명과 빛
요한은 이어서 이렇게 선포한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4절) 말씀은 단지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과 빛을 주신다. 이 빛은 어둠을 몰아내는 구원의 빛이며,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해방시키는 빛이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 말씀을 해설하면서 강조한다. “이 빛은 감각적 빛이 아니라 영적인 빛이었다. 단순한 빛이 아니라 생명이며, 사람들의 생명이다.”(Homiliae in Ioannem II,2)
3. 말씀은 살이 되셨다.
가장 놀라운 선포는 바로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14절) 하느님의 영원한 말씀이 시간 속에 들어오시고, 하느님이 인간이 되셨다. 성 예로니모는 이 신비를 묵상하며 말한다. “말씀이 사람이 되신 것은, 사람이 말씀(곧 하느님)이 되도록 하기 위함이다.”(Epistula 121,2) 곧, 살이 되신 것은 단순히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신 사건이 아니라, 인간이 하느님과 친교에 들어가도록 이끄는 은총의 사건이다.
4. 말씀을 받아들일 때
요한은 또 말한다. “그분께서는 자기 백성에게 오셨지만, 그들은 그분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분을 받아들인 이들, 그 이름을 믿는 이들에게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다.”(11-12절)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주석한다. “그분은 당신의 소유에게 오셨으나 그분의 사람들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분을 받아들이지 않은 이들은 유다인들이고, 받아들인 이들은 이방인들이다.”(Tractatus in Iohannis Evangelium II,13) 곧, 말씀을 믿고 받아들이는 이들은 누구나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은총을 받는다.
5. 오늘의 메시지
오늘 우리는 새해를 맞이하며 ‘말씀 안에 머무르는 삶’을 결심하고 있다. 말씀은 우리 삶의 근원이고, 어둠을 몰아내는 빛이며, 인간을 하느님의 자녀로 변화시키는 힘이다. 따라서 새해의 첫걸음을 말씀과 함께 시작해야 한다. 단순히 말씀을 “듣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그 말씀을 “살아내는” 삶을 결단하여야 한다. 성 아우구스티노의 말처럼, “말씀은 마음에서 들려야 하며, 삶 안에서 실천되어야 한다.”(Sermo 119,3)
결론
말씀은 하느님의 영원한 자기 계시; 말씀은 생명과 빛; 말씀은 사람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사셨다. 말씀을 받아들이는 이는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새해의 첫날을 준비하는 이 시점에서, 우리는 “말씀을 닮은 삶”을 결심해야 한다. 우리의 말과 행동이 모두 하느님의 말씀을 반영하는 삶이 되기를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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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나 있음에 그만큼>
요한 1,1-18 (머리글)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그분께서는 한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요한이었다.
그는 증언하러 왔다.
빛을 증언하여
자기를 통해 모든 사람이 믿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 사람은 빛이 아니었다.
빛을 증언하러 왔을 따름이다.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다.
그분께서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분께서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당신의 이름을 믿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다.
이들은 혈통이나 육욕이나
남자의 욕망에서 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난 사람들이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
요한은 그분을 증언하여 외쳤다.
“그분은 내가 이렇게 말한 분이시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다.’”
그분의 충만함에서 우리 모두
은총에 은총을 받았다.
율법은 모세를 통하여 주어졌지만
은총과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왔다.
아무도 하느님을 본 적이 없다.
아버지와 가장 가까우신 외아드님
하느님이신 그분께서 알려 주셨다.
<나 있음에 그만큼>
“그분께서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당신의 이름을 믿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다.”(요한 1,12)
말씀께서 나에게
늘 오십니다
나를 빚으시어
말씀으로 삼아
말씀이 된 나를 통해
세상을 빚으시기 위함이니
나 있음에 그만큼
세상이 늘 빚어지기를
빛께서 나에게
늘 오십니다
나를 밝히시어
빛으로 삼아
빛이 된 나를 통해
세상을 밝히시기 위함이니
나 있음에 그만큼
세상이 늘 밝아지기를
생명이 나에게
늘 오십니다
나를 품어
생명으로 삼아
생명이 된 나를 통해
세상을 살리시기 위함이니
나 있음에 그만큼
세상이 늘 살아나기를
하느님께서 나에게
늘 오십니다
나를 좋게 하시어
당신으로 삼아
당신이 된 나를 통해
세상을 좋게 하시기 위함이니
나 있음에 그만큼
세상이 늘 좋아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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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 같은 존재.>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그분께서는 한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요한 1,1-5)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다. 그분께서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분께서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당신의 이름을 믿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다. 이들은 혈통이나 육욕이나 남자의 욕망에서 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난 사람들이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요한 1,9-14)
1) 연말연시를 맞아서 새해 계획을 세우는 사람이 많을 텐데, 계획을 세우기 전에 먼저 다음 말씀을 새겨들어야 합니다.
“자 이제, ‘오늘이나 내일 어느 어느 고을에 가서 일 년 동안 그곳에서 지내며 장사를 하여 돈을 벌겠다.’ 하고 말하는 여러분! 그렇지만 여러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생명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 도리어 여러분은 ‘주님께서 원하시면 우리가 살아서 이런저런 일을 할 것이다.’ 하고 말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여러분은 허세를 부리며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좋은 일을 할 줄 알면서도 하지 않으면 곧 죄가 됩니다."(야고 4,13-17)
여기서 ‘주님께서 원하시면’은, ‘주님께서 허락하시면’입니다. 우리가 하기를 원하는 그 일도, 그 일을 할 수 있는 시간도, 모두 주님의 주권 아래에 있습니다. 그러니 ‘주님의 뜻에 합당한 일’을 하려고 계획해야 하고, ‘주님의 뜻에 합당하게’ 일해야 하고, 일의 결과는 주님께 맡겨드려야 합니다.
2) 구약성경 ‘잠언’의 저자는 “마음의 계획은 사람이 하지만, 혀의 대답은 주님에게서 온다(잠언 16,1).” 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인간이 아무리 거창한 계획을 세워도, 주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는 뜻입니다. 사람들 가운데에는, “믿음 없는 악인들을 보면, 자기들이 하고 싶은 일을 다 한다. 주님께서 그 악인들의 ‘악한 일’을 허락하셨는가?” 라고 물을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주님께서 ‘악인들의 악한 일’을 허락하실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자들이 하고 싶은 일을 다 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그 일들을 인간의 눈으로만 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뜻을 거스르는 자들의 일은 모두 바벨탑처럼 허무하게 무너질 것입니다. 의인이든지 악인이든지 간에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 같은 존재라는 점은 똑같지만, 주님 마음에 들게 잘 살고 있는 의인들은 허무에서 벗어나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이고, 그들이 행한 선한 일은 영원히 남아 있을 것입니다. 반대로, 주님의 뜻을 거스르면서 살고 있는 악인들은, 회개하지 않으면, 그냥 한 줄기 연기처럼 사라질 것이고, 그들이 한 일도 먼지처럼 허무하게 소멸될 것입니다.
3) 요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은 세상도 또 세상 안에 있는 것들도 사랑하지 마십시오. 누가 세상을 사랑하면, 그 사람 안에는 아버지 사랑이 없습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 곧 육의 욕망과 눈의 욕망과 살림살이에 대한 자만은 아버지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온 것입니다.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 자녀 여러분, 지금이 마지막 때입니다."(1요한 2,15-18ㄱ)
세상과 세상 안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탐욕과 집착입니다.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라는 말은, 그런 것들은 모두 허무하게 사라진다는 뜻입니다. 영원하신 하느님께서 주신 것, 하느님에게 속한 것만 영원히 남아 있게 됩니다. 신앙인은 허무하게 사라지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이고, 하느님과 함께 영원히 존재하기를 희망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신앙인은 허무하게 사라질 것들에 대한 탐욕과 집착을 버리고, 영원한 것만 얻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4) 인간은 누구나, 태어나는 일은 자신의 의지로 한 일이 아니었지만, 어떻게 끝날지는 스스로 선택할 수 있습니다. 허무하게 사라질 것인가, 영원한 존재가 될 것인가는 ‘지금’ 어떻게 사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이미 지나간 과거는 우리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는 정해져 있지 않고, 우리가 ‘지금’ 만들어 갑니다. 지난 한 해를 반성하는 것은, 새해를 더 잘 만들어가기 위한 일입니다.
지나간 일을 후회하기만 하는 것도,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자기 마음대로 설계하면서 큰소리치는 것도, 다 어리석은 일입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주신 시간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조금이라도 시간을 더 주신 것에 감사드리면서, 겸손하게 새해를 맞이해야 합니다. 하느님은 ‘내가’ 죄 속에서 죽지 않고, 당신과 함께 살기를 바라시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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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생명, 그리고 빛>
한 해의 끝자락에 왔다. 지난날을 돌아보면 큰 은총 안에 머물러 있었다. 어려운 가운데 주님의 은총과 자비로 용서받고 치유 받아 죽음을 넘어 평화로이 새 삶을 살게 되었다. 감사드리고 또 감사할 뿐이다. 주님은 모든 것을 알고 당신의 품에 살려주셨다. 좋아서 호들갑 떨 것도, 좋지 않아서 실망할 것도 없는 주님의 품에서 좀 더 진중하게 감사하며 한 해를 시작해야 하겠다. 오늘을 살 수 있는 은총을 감사하고 내일의 시간을 축복으로 받아들이며 기쁨에 목말라한다.
“모든 것은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요한1,3-5).
사람들의 빛인 생명이 주어졌지만, 어둠에 가려졌다. 하느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 하느님의 계명을 사는 것이 생명이건만 그 참 생명을 깨닫지 못하고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래서 받아들이지도 못했다.(요한 1,10-11)
그러나 그 빛은 어둠을 몰아내고 밝게 비추었다. 그리고 그 빛을 맞아들이고 믿는 사람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다(요한1,12).
따라서 빛을 받아들이는 눈, 생명을 받아들이는 삶이 요구된다. 그러나 육으로는 그 생명을 볼 수 없다. 영적인 눈이 뜨여야 영적인 그분의 생명을 만날 수 있다.
“진정한 삶은 이 세상의 삶이 아니다. 영원한 삶을 누리도록 허락된 우리에게 이 세상에서 보내는 몇 년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영원히 살기 위해서라면 이 세상에서의 몇 년은 잃어버릴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영원히 살 수 있다면 무엇인들 못하겠는가?
(성 세실리아).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1요한 2,17)
생명은 살아있는 것이다. 하느님의 명이, 하느님의 법칙이 하느님의 뜻이 삶 안에 녹아나는 것이다.
생명은 곧 빛이다. 생명의 빛이 우리 모두를 비추도록 은총을 갈구하는 오늘이길 기도하며 한 해를 감사하고 새해를 주님의 이름으로 맞이하길 바란다.
“주님, 주님의 백성을 온갖 은혜로 다스리시니, 오늘도 내일도 자비를 베푸시어, 저희가 덧없는 현세에서도 위안을 받고, 영원한 세상을 향하여 더욱 힘차게 나아가게 하소서” 아멘.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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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박상대 마르코 신부님]
<전에도 지금도 내일도 계시는 하느님>
주님성탄 팔일축제 7일째이자 한해를 마감하는 12월 31일, 오늘 미사의 복음으로는 요한복음의 프롤로그(서문)가 봉독된다.
우리는 이미 성탄대축일 낮미사에 이 복음을 들은 바 있다. 요한복음의 심오한 가르침과 사변적인 신학은 어렵기로 정평이 나 있다.
따라서 요한복음을 단 몇 줄로 요약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복음사가 요한이 제4복음서를 저술한 목적은 요한 스스로가 에필로그(맺음말)에서 밝히고 있듯이, 사람들이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주님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20,31)
그렇다. 복음서는 저마다 나자렛 예수가 메시아이신 그리스도요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피력하고 또 증명한다. 우리는 복음서에 선포된 진리를 통하여 그리스도교 신학의 가장 중요한 부분인 ‘그리스도론’을 정립한다.
좀 어려운 말을 쓰자면, 신학자들은 복음서의 내용을 토대로 나자렛 예수에서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에 도달하는 ‘상향(上向) 그리스도론’과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에서 나자렛 예수로 향하는 ‘하향(下向) 그리스도론’을 논한다.
상향 그리스도론에서 출발점은 나자렛 예수의 유년시절과 십자가 죽음에 이르는 공생활이며, 하향 그리스도론의 관점은 예수의 부활과 승천, 그리고 성령으로 말미암은 잉태와 탄생사건이다. 이는 예수와 그리스도를 동일화 하는 작업을 놓고 아래에서 출발하는 관점과 위에서 출발하는 관점을 말하는 것이다.
더러는 아래에서 출발하는 그리스도론을 ‘함축적인 그리스도론’, 위에서 출발하는 그리스도론을 ‘현현적인 그리스도론’이라고 지칭하기도 한다.
그리스도론을 논함에 있어서 주의해야 할 점은 양방향의 어느 한쪽만 가지고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충분히 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요한복음이 그리스도론에 기여하는 점은 그리스도론의 또 다른 하나의 분야인 ‘선재(先在) 그리스도론’이다. 다른 말로는 ‘전실존적(前實存的) 그리스도론’이라고도 한다.
공관복음서가 고백하는 ‘예수는 그리스도’, ‘그리스도는 예수’라는 신학적 해제(解題)가 천지창조 이전의 시점에서도 거론될 수 있다는 것이다.
선재 그리스도론의 핵심은 “때가 찼을 때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되어 여자의 몸에서 태어나신 하느님의 아들”(갈라 4,4) 예수 그리스도는 이미 창조 이전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던 말씀이신 성자라는 것이다. 이 말씀은 하느님의 말씀이나 예수님의 말씀과는 다른 것으로서 성자에게 붙여진 전인격적인 호칭이다.
성자이신 말씀이 “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계셨다.”(1절)는 것은 창세기의 시작과 같은 표현으로 들리지만 사실은 그 의미가 완전히 다르다. 창세기의 ‘한 처음’(1,1)은 시간상 모든 시작의 시작을 의미하지만 요한복음 프롤로그의 ‘한 처음’은 시간을 초월한 영원을 뜻한다.
그 이유는 시간 또한 하느님에 의해 창조되었기 때문이다.(창세 1,3) 우주의 모든 것은 시간과 함께 존재하며 시간이 있기 전에 있을 수 있는 것은 하느님밖에 없다. 결국 이 말씀을 통하여 모든 것이 생겨났고, 생겨난 모든 것이 말씀으로부터 그 존재와 생명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말씀이 시간 속으로 들어와 인간의 육을 취하여 사람이 되었다. 사람이 되신 말씀은 사람들 가운데 살았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심이며, 예수 성탄의 심오한 진리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시고, 앞으로도 영원히 계실 분으로서 모든 시간과 공간 안에, 그리고 그 위에 존재하신다.
한해를 마감하는 오늘, 시간을 창조하시고 존재하는 모든 것이 존재할 수 있도록 그 이유 주신 말씀의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려야 함은 인간의 마땅한 도리가 될 것이다.
사실 시간이란 멈추는 법이 없지만 우리들 사람이 그 시간을 어제, 오늘, 내일로 나누어 쓰기 때문에 한해를 마감하는 이 시간,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릴 이유가 충분히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귀한 시간에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릴 수 없는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많아 못내 아쉽다. 많은 사람들이 찬미와 감사로 한해를 마무리하려 하기 보다는 억울함과 불만으로 접으려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일 다시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은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지는 기회가 될 것이기에 희망을 갖는다. 전국의 주요 일간지에 칼럼을 쓰는 교수들이 매년 한국의 정치를 결산하는 사자성어를 뽑았다.
2001년에는 오리무중을, 2002년에는 이합집산을, 2003에는 우왕좌왕을, 2004년에는 “같은 무리와는 똘똘 뭉치고 다른 자는 공격한다.”는 뜻을 가진 당동벌이(黨同伐異)를 손꼽았다고 한다.
하나같이 부정적이고 어두운 표현들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정치에 관심도 많고 예민하기까지 하다. 왜 우리나라의 정치는 이 모양일까?
우리나라 전체인구 대비 가톨릭 신자 비율이 약 9%라면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며, 많은 신자들이 정치에 직접 관여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정치하는 것과 믿는 것이 그렇게도 다른 것인가?
기원후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그리스도교의 자유를 인정한 다음해 314년 교황에 등극하여 그리스도교를 로마제국의 국교로 정비해야 할 커다란 숙제를 안고 있었던 성 실베스터 1세 교황처럼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세상 속에 그리스도의 정신을 심을 수 있는 새해를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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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이기양 요셉 신부님]
<늘 '한 처음'처럼 빛이 되십시오>
한해를 마무리하고 새로운 해를 맞는 이 시점에 우리가 들은 오늘 복음은 요한 복음 1장입니다.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그분께서는 한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요한1,1-3)
저는 이 요한 복음서의 서언을 들으면 구약의 창세기 대목이 바로 떠오릅니다. "한 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 땅은 아직 꼴을 갖추지 못하고 비어 있었는데, 어둠이 심연을 덮고 하느님의 영이 그 물 위를 감돌고 있었다."(창세1,1-2)
이어서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을 ‘말씀’으로 창조하시지요. 대단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무엇을 만들 때 손을 사용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무엇을 만든다고 하면 손이나 도구를 떠올리지요. 그런데 창세기에는 손으로 만들었다는 표현이 없습니다.
‘말씀’으로 창조하셨다고 묘사되고, 매 작업 후에는 "보시니 좋았다."라는 후렴이 붙습니다. 말씀으로 이 세상이 창조되었다는 이 창조 이야기는 심오한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구약성경 전체를 꿰뚫는 말씀이기도 하지요.
우리가 읽고 있는 구약성경은 단번에 쓰여진 책이 아닙니다. 약 천년의 기간 동안 조각조각 쓰여지고 모아졌던 글들이 어느 순간에 편집이 된 것입니다.
바빌론 유배시대에(B.C 586-538) 사제들과 제관들에 의해 전승과 기록들이 편집되었습니다. 조각 조각으로 남아있던 자료들이 창세기, 탈출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의 모세 오경으로 완성이 된 것입니다. 이 구약성경이 편집이 되고 엮어진 배경을 알면 말씀이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를 다시 한번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느님의 특은을 받고 주님의 백성으로 뽑힌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시나이산에서 애굽(이집트)의 노예살이에서 구원해 준 하느님과 계약을 맺습니다.
"이제 너희가 내 말을 듣고 내 계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들 가운데에서 나의 소유가 될 것이다. 온 세상이 나의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나에게 사제들의 나라가 되고 거룩한 민족이 될 것이다."(탈출19,5-6)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장엄한 순간에 하느님께서 내려주신 십계명을 지키며 열심히 살아갑니다. 그러나 왕정시대가 되면서 하느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왕들이 생겨나기 시작하고,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의 말씀 대신 인간의 욕망을 따르는 삶을 살게 되지요.
결국 나라는 남, 북으로 갈라지고 북 이스라엘은 B.C 721년 앗시리아에 의해서, 또 남유다는 B.C 587년 바빌로니아에 의해서 멸망하고 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빌론에 노예로 끌려가서 모진 고생을 하게 되지요.
노예살이를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깊은 고민에 빠집니다. 믿고 희망했던 그들의 하느님이 이 세상의 그 어떤 신에게도 지지 않는 최고의 신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분이 머물러 계신다고 믿었던 예루살렘 성은 초토화되었고 하느님의 백성인 자기들은 하느님을 섬기지 않는 바빌론 사람들에 끌려가서 노예살이를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바빌론의 신이 더 강한 것은 아닌가 하고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의에 빠졌으며, 노예살이 기간 동안에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버리고 이방의 신을 섬기는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이러한 즈음에 바빌론에 끌려갔던 이스라엘 제관들과 사제 계층 등 일부 식자층을 중심으로 깊은 반성이 시작되고 나라가 망한 것이 하느님의 말씀을 충실히 따르지 않았음에 연유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들은 하느님과의 계약을 되새기며 하느님의 말씀에 충실하지 못했던 자신들의 죄를 깊이 뉘우칩니다. 그리고 다시 하느님께 충실한다면 하느님께서는 반드시 이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자신들을 건져주실 것이라고 희망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그들이 무엇보다도 먼저 시도한 것이 바로 하느님 '말씀'의 정리였던 것입니다.
유배 전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말씀 없이 제사만 드렸습니다. 따라서 종교 지도자들은 모두 제사를 드리던 제관들이었지요. 그런데 예루살렘이 폐허가 되면서 제사를 드릴 수가 없게 되자 말씀에 충실하게 되고 말씀을 해석하고 가르쳐주는 율법학자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제관들의 역할이 서서히 상실되고 율법교사들의 활약이 두드러져 갔지요. 뿐만 아니라 말씀이 모아지면서 이제까지 하느님의 말씀을 전했던 예언자들이 사라집니다. 예언자들의 시대가 마무리되고 이제 율법학자들의 시대가 열리는 시대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느님의 말씀에 충실하게 살 때 제2의 출애굽이 일어나 제2의 모세, 메시아가 올 것이라고 믿기 시작하였습니다.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 하느님을 만나는 바탕이자 장이었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떠나서는 도저히 살아갈 수 없음을 깊이 체험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말씀의 중요성을 깨우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창조 이야기를 쓰며 하느님께서 손이나 도구가 아닌 ‘말씀’으로 이 세상을 창조하셨음을 강조하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말씀을 따라 살 때는 생명이요, 말씀을 떠나 살 때는 죽음이라는 진리를 후손들에게 심어주기 위해 많은 노력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로운 한 해를 맞는 이 즈음에 요한 복음사가는 세상을 창조하시고 구원하시는 ‘말씀’의 의미를 역설하며 우리 모두가 '말씀' 안에 머물러 살기를 요구합니다.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다. 그분께서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분께서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당신의 이름을 믿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다."(요한1,9-12)
그렇습니다. 말씀 안에서의 삶으로 우리는 하느님을 만나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모아놓은 책이 ‘성경’이지요. 그리고 이것을 우리의 실생활에 맞게 펼쳐놓은 것이 신심 서적입니다. 신심 서적은 말씀을 구체적으로 표현해 놓은 것으로써 말씀을 듣고 말씀을 실천하는 일에 큰 도움이 되는 도구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새기고 그것을 계속해서 우리 내면의 샘으로 만드는 바탕은 ‘기도’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말씀은 서서히 말라가다가 어느 순간 끊겨버리고 말 것입니다. 말씀을 담고 끊임없이 기도하면서 책을 읽는 것, 이것이 하느님의 말씀을 가장 잘 사는 바탕이 될 것입니다.
모쪼록 새해에도 성경과 신심서적을 통해 내 안에 오시는 예수님을 체험하는 은총의 일 년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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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박태정 토마스 신부님]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유태인 제자 한 사람이 랍비에게 찾아와 물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비록 가진 것은 없지만 힘이 닿는 데까지 서로 도우며 살려고 노력하는데, 저는 왜 그런 마음이 생기지 않는 걸까요?" 랍비는 잠시 무엇인가 생각하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창밖을 내다보아라. 무엇이 보이느냐?" "엄마가 자녀의 손을 잡고 다정하게 길을 걷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차 한 대가 한가롭게 달려가고 있군요."
"그렇다면 이번에는 벽에 걸린 거울을 자세히 들여다보아라. 무엇이 보이느냐?" "제 모습 밖에는 보이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자 랍비는 조용히, 그리고 단호하게 제자에게 말했습니다. "창이나 거울 모두 유리로 만들어졌지만 유리에는 칠을 하게 되면 자신의 모습 밖에는 볼 수 없는 것이지."
오늘 복음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아무도 하느님을 본 적이 없다. 아버지와 가장 가까우신 외아드님 하느님이신 그분께서 알려 주셨다.”(요한 1, 18.)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볼 수 있게 하는 창이십니다. 당신 자신을 드러내시기 보다는 그 창으로 아버지 하느님을 바라보게 해주셨습니다.
한 해의 마지막 날을 보내고 있는 지금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이려고 발버둥친 한 해가 아니었는지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자신을 들어높이기 보다는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처럼 다가오는 새해에는 우리 자신을 드러내기보다 예수님을 세상에 증거 할 수 있는 우리들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한 해 동안 베풀어 주신 하느님의 은총에 감사드렸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다가오는 새 해에도 하느님 축복 가득한 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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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요즘이야 거의 모든 분이 아파트에 사시지만, 예전에는 거의가 주택에 살았습니다. 저 역시 주택에서 오랫동안 살았는데, 아파트에 살기 직전의 주택이 아직도 기억에 많이 남습니다. 이 집에는 다락방이 있었습니다. 우리 집의 가장 꼭대기에 있는 다락방이 저와 제 바로 위의 형님과 함께 지내는 방이었습니다. 벌떡 일어나면 천장에 머리를 부딪힐 수밖에 없는 아주 낮은 다락방이었지만, 너무 좋았습니다. 왜 그럴까요?
아이들은 누구나 좁고 아늑한 곳을 좋아합니다. 엄마 뱃속에 열 달 동안 살았던 기억 때문일까요? 그래서 굳이 식탁 밑이나 책상 아래 공간에 들어가서 놀기를 좋아하는 것처럼, 제게는 좁은 공간인 이 다락방이 너무나 편안했고 좋았습니다.
자기에게 편안함을 주는 공간이 필요합니다. 화력하고 멋질 필요는 없습니다. 보호받고 있음을 느낄 수 있는 공간에 머물러야 어렵고 힘들 때 다시 힘을 내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직접 이런 공간이 되어주십니다. 그래서 어렵고 힘든 이들은 모두 당신께 오라고 하시지 않습니까? 세상의 공간은 시간의 흐름 속에 사라지고 맙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절대로 우리 곁을 떠나지 않으시면서 계속 우리에게 편안함을 주십니다. 무조건 주님과 함께하고, 주님의 품에 머물러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전례는 12월 31일이라는 시점과 맞물려 우리에게 ‘처음과 끝’을 묵상하게 합니다. 그래서 독서에서 “자녀 여러분, 지금이 마지막 때입니다.”(1요한 2,18)라고 말하고, 복음에서는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요한 1,1)라고 전해줍니다. 세상의 시간은 흘러가고 한 해는 저물지만, 영원하신 말씀은 시간의 시작이자 마침이라는 것입니다.
특히 주님께서는 어둠 속의 빛이십니다(요한 1,5 참조). 어둠이 빛을 이긴 적이 없다는 것을 기억할 때, 주님께서는 어둠을 이기기 위해 빛으로 오신 것입니다. 실제로 올 한 해 동안 우리 삶에 어두운 순간이 있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그 어둠 속에서 주님께서는 빛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고 보호해 주십니다. 이를 요한 사도는 “그분의 충만함에서 우리 모두, 은총에 은총을 받았다.”(요한 1,16)라는 이야기하십니다.
이렇게 우리 삶의 모든 부분에서 함께해주신 주님께 감사드리는 시간을 가지는 오늘이 되었으면 합니다. 특히 삶의 어두운 순간에 빛이 되어주심을 깊이 묵상하면서, 내년에도 주님과 함께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올 한 해 정말로 수고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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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우리가 '하느님이 되는' 길>
오늘은 '성탄 8부 내 7일'이며, 2025년을 마감하는 올해의 마지막 날입니다.
지난 한 해를 돌아다보며, 오늘을 가져다 준 지난날들에 감사드려야 할 일입니다. 사실 우리는 그분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결코 보낼 수 없었던 한해를 보냈습니다. 오늘 우리는 독서를 통해서는 ‘마지막 날’에 대한 말씀을, 복음을 통해서는 ‘한 처음의 날’에 대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 ‘한 처음’의 놀라운 일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14)
여기서 '사람'은 직역하면 ‘살을 취하였다’는 것으로 약함 안으로 들어온 것을 말하고, '사셨다'는 것은 ‘천막을 치고 우리와 함께 거주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는 하느님이 오시기만 한 것이 아니라 사람이 되시어 오셨고, 사람이 되시어 오시기만 한 것이 아니라 우리 가운데 사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하느님의 아들이 참으로 인간의 본성을 취하여 사람이 되셨다’는 믿음과 ‘그분이 우리 가운데 천막을 치고 함께 거주하고 사신다.’는 믿음은 초기 교회 때부터 그리스도교 신앙의 기초이자 핵심 교리가 되었습니다.
이를 사도 바오로가 인용한 초대 교회의 찬미가에서는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필리 2,7)
이는 단지 하느님이 사람이 되신 이야기가 아니라, 사람을 하느님 되게 하신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하느님이 인간이 되시기만 한 것이 아니라, 우리 가운데 사시면서 하신 일인 것입니다.
이는 어마어마한 사실을 말해줍니다. 곧 ‘엄청난 사랑’을 말해줍니다.
교부들은 “하느님이 인간이 되신 까닭은 인간이 하느님 되기 위함이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에는 두 개의 변모가 있습니다. ‘하느님이 인간이 되신 변모’와 ‘인간이 하느님이 되는 변모’입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자신을 ‘비우는’ 일이 있고, 그와 ‘같아지는’ 일이 있고, ‘하나 되는’ 일이 있습니다. 여기에는 단순히 ‘본받는’ 일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심도 깊은 신비적 차원의 일이 벌어집니다.
곧 베드로가 표현한대로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게”(2베드 1,4) 되는 일이 있고, 바오로가 표현한대로 “그분의 모습을 지니게”(1코린 15,49), “그리스도를 입고”(로마 13,14; 갈라 3,27; 콜로 3,10), “같은 모상이 되는”(로마 8,29) 일이 벌어집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타자에게 자신의 자리를 비워주고 내어주어, 그로 하여금 당신께서 누리는 가장 귀하고 좋은 것을 함께 누리게 해 주는 것입니다. 곧 ‘사랑’입니다. 그러니 이렇게 타자가 자신 안으로 들어오게 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자리를 그에게 내어주는 것만으론 충분하지 않습니다. 나아가 자신이 그의 자리로 들어가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내어주는 것은 곧 들어가는 일이 됩니다. 곧 자신을 내어주고 나아가 상대에게 들어가기에, 동시에 자신의 그 빈자리에 그를 받아들이는 일이 됩니다. 그래서 상대를 취하고 상대를 받아들여 상대와 같아지고, 비로소 하나가 됩니다.
그래서 교회 전통에서 전해져 오는 격언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오직 같아지는 것만이 구원할 수 있다.” 그렇습니다. 진정으로 ‘비우는’ 행위의 종착지는 ‘같아지는’ 것이요, ‘하나 되는’ 일입니다.
그런데 묘하게도 그것은 또 다시 당신에게로의 변형을 가져옵니다. 곧 이러한 변화는 변화 자체에 머물지 않습니다. 또 다른 차원의 변화로 끌고 갑니다. 우리 가운데서 우리와 ‘같아짐’을 통해 우리와 자리를 바꾸는 지점까지 나아가기 때문입니다. 곧 인간을 하느님이 되기까지 이르게 합니다.
그래서 옛 교부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느님은 본질 자체로 하느님이시고, 우리는 은총으로 하느님이 됩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그래서 옛 교부들은 이를 '놀라운 교환'(admirabile commercium)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하느님이 되는' 길은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신 바로 그 길뿐인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에게도 이와 마찬가지의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곧 자기를 온전히 비우고 그저 자기 자신의 ‘아무 것도 아님’ 안에 머물면, 하느님께서 그 안에 들어와 ‘전부’가 되실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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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 · 샘 기도>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요한 1,4)
주님!
한 해의 마지막 날을 보내면서,
제 발길이 당신을 향하여 있는지, 제 마음에는 당신의 평화가 들어와 있는지를 봅니다.
그렇습니다.
당신께서는 이미 제 안에 생명의 빛을 불어넣으셨으니, 이제는 죽음의 어둠에 물들지 않게 하소서.
제가 당신 생명으로 새로워지고, 세상에 당신의 생명을 드러내게 하소서.
온 세상이 생명의 빛으로 차오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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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1.14)
<신앙생활의 본질인 재육화의 삶!>
오늘 복음(요한1,1-18)은 '요한 복음의 머리글'입니다. 이 머리글을 '로고스(Logos) 찬가', 곧 '말씀 찬가'라고 부릅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오신 예수님께서는 한처음부터 있었던 말씀이 육화되신 분입니다. 말씀이신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신 분입니다.
"그분의 충만함에서 우리 모두 은총의 은총을 받았다."(요한 1,16)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은총을 받아먹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은총을 너에게 전하는 사람들'입니다. '은총의 구체적인 모습인 사랑과 기쁨과 평화를 나를 통해 너에게로 흘러넘치게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인 재육화의 삶'입니다.
'나의 생각과 말과 행위가 말씀이신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재육화의 삶'이 바로 '신앙생활이며, 본질'입니다.
지금 여기에서, 말씀이 사람이 되신 예수님이 되려고 노력합시다! 그리스도의 빛이 되려고 노력합시다! 재육화의 삶을 살려고 노력합시다! 그러한 은총이 나에게 쏟아지도록 날마다 하느님이시며 예수 그리스도이신 말씀을 가까이 합시다!
'푸른 뱀의 해인 2025년 을사년 한 해의 마지막 날'입니다. 한 해 동안 나를 지겨주시고 보호해 주신 하느님, 지금까지 이렇게 살아 있게 해 주신 하느님께 먼저 깊은 감사와 찬미를 드립시다! 아직 풀지 못한 것이 있으면, 얼른 내가 먼저 용서와 화해로 풀도록 합시다! 나의 모든 죄를 자비로우신 하느님 아버지께 다 내어 드립시다! 그렇게 해서, '붉은 말의 해인 2026년 병오년 새해'를 기쁘게 힘차게 맞이합시다!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성자의 탄생으로 참된 믿음을 일으키시고 완성하셨으니, 저희를 인류 구원의 샘이신 성자의 지체가 되게 하소서."(본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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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14)
하느님의 길은
말씀이
사람이 되신
계시의
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격 그 자체로
당신을
드러내십니다.
그 어떤 삶도
하느님에게서
멀리 떨어진
삶은 없습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신
실천으로
드러납니다.
말씀이 되신 신비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신뢰하시는지에 대한
가장 깊은 고백입니다.
사람이 되신
그 자체가
이미 복음의
선포입니다.
하늘의 뜻은
멀리 있는
이상이 아니라
사람을 통해
드러납니다.
말씀은
우리의 삶
그 자체가 됩니다.
한 사람의
삶 전체가
하느님의
말씀이 된
것입니다.
진리는
멀리 있지 않고,
생활 속에서
우리와 함께
살아갑니다.
함께 살아야 할 존재로
우리를 선택하셨습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신 신비는
하느님과
우리 사이의 거리가
사랑 안에서
완전히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거리가 완전히
사라졌기에
서로 사랑할 수
있는 사랑의
관계가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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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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