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방'이란 말이 유행이다. 원래는 먹는 방송(장면)이란 뜻에서 나온 말로, '보기만해도 입안에 침이 고일 정도로 맛있게 먹는 것'을 통칭해 식도락(食道樂)이란 뜻으로 먹방이라 부르고 있는 듯 하다. 어쨌든 먹방은 인간의 기본 욕망이며, 세월이 갈수록 더욱 각광받고 있다. 특히 생의 즐거움을 상실한 채 메말라가는 현대인들에게 맛있는 것을 먹는 일이란 매우 중요해졌다. 가을은 뭐니해도 식욕의 계절. 최고의 먹방 여행지를 찾아 전주(全州)로 떠났다.
서양식 전동성당과 한옥마을의 전통미가 공존하는 한옥마을에서부터 여행은 시작된다.
전주 IC를 나오면 강암 송성용 선생의 멋드러진 글씨로 쓴 '호남제일문(湖南第一門)' 현판이 눈에 들어온다. 다른 도시에서는 보기힘든 이 거대한 일주문을 통과하자마자 풍남동 한옥마을을 찾아가는 것은 무슨 회귀본능이라도 되나보다. 태어나 한옥다운 한옥에서 살아본 적이 없지만 전주에 오면 가장 먼저 한옥마을에 첫발을 디디게 되는 게 참 신기하다.
한옥마을은 지금 가을의 정취를 한껏 품고있다. 은행잎까지 물들면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터질 듯하다.
◇한옥마을로의 회귀
서너번 왔던 터라 이젠 길을 좀 안다. 내가 길을 아는 동네가 반도에 얼마나 될까. 아직 지난해 이사온 우리 아파트 단지도 잘 모르는데 전주 한옥마을에선 누군가를 안내할 수도 있겠다. 한옥마을은 이처럼 누구에게나 친근한 곳이다. 국민들의 공통적인 '고향마을'이며 '외갓집' 정도인 셈이다. 많은 이들이 찾아오자 국적불명의 카페도 하나 둘 생겨났고 전국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프랜차이즈 상업 공간도 가끔 눈에 띄지만 그래도 시옷(ㅅ)과 쌍시옷(ㅆ)으로 끝없이 이어지는 기와지붕의 그림자는 풍남동을 가득 채우고 있다.
한옥마을 경기전을 걸으면 예향 전주의 매력을 느껴볼 수 있다.
늘푸른 댓잎은 아름다운 가을을 더욱 화려하게 받쳐주는 '바탕색'이다.
새파란 하늘 아래 가을의 향기 잔뜩 품은 은행잎이 퍼르퍼르 날리고 있는 경기전을 걸었다. 댓잎도 사사사사 소릴 내며 여전히 나를 반갑게 맞아준다. 돌아왔다는 신고식을 치렀다. 이젠 전주에서 무엇을 먹을 것인가를 골똘히 생각했다. 개보수를 마치고 수려한 모습을 자랑하는 전동 성당에서 오목대까지 이어지는 길을 걸으며 머릿속으로 대충 코스를 정리해두고 다짐했다. '지금부터 오늘 하루 네끼. 내일 출발 전까지 기필코 여섯끼를 먹으리라.' 먹방은 오후 세시 반쯤 낮술부터 시작됐다.
◇가을, 막걸리가 부른다
전주에는 평화동, 삼천동, 서신동 등에 막걸리집들이 모여있는데 당장은 삼천동 막걸리집 골목을 찾았다. 입소문난 용진집에 전화를 하고 들이닥쳤더니 왜 벌써 왔냐고 툴툴거린다. "어젯밤에 늦게 끝나는 바람에 아직 밑반찬 준비도 못했는데 지금부터 들이닥치면 어쩔 것이여?" 빗자루만 안들었지 당장 내쫓을 기세다. 하지만 먹방이 아쉬운 여행객은 이에 굴하지 않았다. "멀리 서울에서 왔으니(최대한 정중한 표준어와 낮은 목소리로)될 때까지 가만히 가게에 앉아있겠다"고 사정했다. 태어나서 지어본 가장 선한 표정으로 또박또박 말을 이어나갔다. 딸을 데려가겠다며 배를 까고 마루에 드러누운 사위같은 단호함도 곁들였다.
전주 막걸리집의 기본 상차림만으로도 간단한 식사와 안주가 해결된다.
지금부터 시작해야 하는 딱한 개인사정도 있다. 막걸리집의 푸짐한 안주로 식사를 겸해 즐긴 후 가맥집을 가야하고 또 전주의 밤을 즐겁게 보낼 수 있는 카페를 가야하기 때문이다. 막걸리집을 염두에 두고 점심마저 걸렀기 때문에 이때 달려올 수 밖에 없었다. 전주에서 막걸리집이란 '먹방의 결정판'이다. 처음엔 2만원 짜리 술 한 주전자에 안주가 한상 가득 깔린다. 날치알 샐러드를 비롯해 꼬막찜 등 건건한 반찬류도 있고 탕과 생선찜, 오징어숙회같은 요리도 보인다. 투실한 머릿고기와 꽃게장, 조기구이도 보인다. 삶은 밤과 콩깍지도 한귀퉁이에 자릴 틀었다. 서울의 포장마차였다면 하나당 6000~7000원은 족히 받을 안주인데 술만 시키면 그냥 준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이후 주전자(이때부턴 1만5000원) 하나가 추가될 때마다 회나 찜, 불고기 등 '주방의 필살기'와 같은 고급 안주접시가 날아와 상에 내려앉는다. ET가 탄 비행접시를 봤대도 이처럼 반갑지는 않을 것이다. 양은 주전자에는 가라앉혀서 투명한 막걸리가 2병 정도 들어가니 둘이서 충분히 마실 양이다. 하나하나 맛깔나는 시원한 막걸리를 쉴새 없이 들이켰다.
삶은 오징어를 초고추장에 찍으며, 전주 막걸리집은 슈바이처 박사나 워런 버핏(그는 2006년 자신의 재산 중 99%인 약 460억 달러를 기부했다)처럼 인도주의적인 마음씨가 없으면 절대 경영할 수 없는 곳이란 생각을 했다. 아! 이건 사견이다.
가게에서 사 마시는 맥주에서 출발한 서민적 술문화 '가맥'. 황태포나 갑오징어처럼 간단한 안주가 특징이다.
◇술향기 속 깊어가는 전주의 밤
평소 술 깨나 마신다고 자부했지만, 고작 두 명으로선 세번째 주전자까지 주문하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림 속 달마대사처럼 배가 튀어나왔다. 어떤 굉장한 안주가 나올지 궁금했지만 일단 판도라의 상자를 닫고, 가맥집을 향해 부리나케 달려갔다. 가맥집은 '가게 맥주'를 줄인 말로 과거 '점빵(店房)'이라 불리던 구멍가게 앞에 간이 의자를 놓고 병맥주를 사다먹던 것에서 유래됐다. 이때 주인이 안주용으로 말린 갑오징어나 황태포 따위를 구워주던 것이 아예 가맥집이란 서민적 술문화로 자리잡았다. 전주에는 30~40곳의 가맥집이 있다고 한다. 보통은 간단한 메뉴지만 수제비를 주는 집, 계란말이를 잘하는 집 등 특색도 다양하다.
전주 가맥집 전일슈퍼의 갑오징어포 구이.
전주 가맥집 중 가장 이름난 곳은 풍남동 인근 '전일슈퍼', 갑오징어로 유명해 '전일갑오'란 또다른 이름을 가진 집이다. 예상대로 전일슈퍼는 벌써부터 사람들로 가득찼다. 황태포와 갑오징어를 모두 주문했다. 맥주 2병에 금색 황태포가 나왔다. 어떻게 구웠는지 부슬부슬한 황태포의 맛이 기가 막히다. 기름을 발랐나 표면이 바삭바삭하니 맥주 안주로 딱이다. 갑오징어는 또 어떤가? 명색이 '갑(甲)'인데 얼마나 맛이 좋을까. 딱딱한 망치로 한참을 두드려 짓이긴 다음 연탄불에 구워서 낸다. 술값도 슈퍼마켓 수준으로 저렴하다. 유래야 어쨌건 이제 '전주 가맥'이란 새로운 술문화로 손색없다.
언젠가 술은 홀수로 마셔야 된다는 말을 분명히 들은 기억이 있다. 그래서 다음 3차로 이동한 곳은 동문사거리에 있는 새벽강이다. 이곳은 전주의 지역 문화·예술인들이 아지트처럼 즐겨찾는 곳이다. 그냥 보기엔 2층 허름한 카페처럼 생겼지만 이곳에 오는 이들이 문화를 만들어가는 커뮤니티와도 같은 곳이다. 예술한다는 글쟁이, 환쟁이, 연극쟁이 등 '쟁이'들이 주로 모이는데, 술이 거나하게 오르는 깊은 밤에는 풍을 친다거나 노래자락을 읊어 예향다운 분위기를 만들어간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이날은 너무 일찍 온 탓인지 손님이라고는 우리 일행 밖에 없었다. 멀뚱멀뚱 맥줏병만 비우고 일어섰다. 이렇게 막걸리와 맥주를 연속으로 마셔도 될까?. 전주에선 된다. 콩나물국밥과 피순대국 등 해장을 책임지는 음식들이 즐비하지 않은가? 처방이 준비됐으니 마음껏 마셔도 된다는 결론.
전주 한옥마을은 나홀로 여행을 떠나온 젊은 여행자들을 유독 많이 만날 수 있는 곳이다.
세계적인 유명세를 떨치고 있는 전주비빔밥.
◇두고 오기 아쉬운 맛의 향연.
아침 일찍 일어나 동네 한바퀴. 남부시장에 들러 피순대국 한그릇 먹고난 후 노랫말처럼 동네를 돌아본다. 풍남동 한옥마을은 아파트단지 같지 않아서 좋다. 전주향교를 들러 요리조리 좁은 골목을 기웃기웃해 본다. 나른한 햇살을 피해 그늘에 쉬었다가 어리어리하던 정신이 돌아오니 그제야 이것저것 눈에 들어오는 것도 제법 된다.
전통술박물관, 김치 담그기 체험장, 전주전통문화센터, 최명희의 혼불문학관 등 한옥마을의 이름난 명소들을 쇼핑하듯 눈에 쓸어 담는다. 주전부리하기 좋은 간식꺼리도 몇개 봤지만 그냥 지나쳤다. 먹방여행의 대미를 장식할 비빔밥을 맛있게 먹기 위해서다. 전주에 왔으니 비빔밥을 아니 먹을 수 없다.
시원한 국물과 든든한 고기를 함께 맛볼 수 있는 피순대국.
밥을 비벼서 나오는 성미당을 갈까, 황포묵을 넣은 고궁을 갈까 고민하다 고궁을 찾았다. 놋그릇에 한 가득 산채 나물과 채소, 고기, 창포묵, 계란지단 등을 볶음고추장과 함께 올려 나온다. 손이 많이 가는 각 재료의 면면으로부터 다양한 색상의 조화로움이 무척 아름답다. 누군가 밤새 그려놓은 유화 캔버스를 채 마르기도 전에 모두 떡칠을 해버리는 느낌이랄까. 숟가락으로 뭉게 비벼 먹기가 아까울 정도다. 하지만 머리와 마음은 각각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 콧속을 단숨에 파고든 고소한 참기름 냄새에 그만 양손은 쓱쓱 밥을 비비고 있었다.
●막걸리집=삼천동 용진집이 손맛을 자랑하는 다양한 찬과 요리를 낸다. 첫 주전자 2만원, 추가시 1만5000원.(063)224-8164.●동문사거리 새벽강은 늦은 저녁부터 영업을 시작한다. 병맥주와 간단한 안주를 즐길 수 있다.(063)283-4388.●가맥=경원동 전일슈퍼는 황태포와 갑오징어, 계란말이 등을 저렴한 가격대에 맛볼 수 있는 가맥집이다.(063)284-0793. ●전주비빔밥=덕진동 고궁은 지난 2011년 '한국관광의 별 외식사업장'부문에 선정된 곳이다. 비빔밥 1만1000원.(063)251-3211. 중앙동 성미당은 미리 고추장으로 비빈 다음 다시 나물과 육회 등을 올린 비빔밥이 맛있는 집.(063)287-8800.
●피순대=남부시장 조점례피순대는 당면 순대가 아닌 숙주와 돼지고기, 채소, 두부를 넣고 여기다 신선한 선지(피)를 넣어서 만든 피순대를 파는 집이다. 순대국밥이 든든하고 맛있다.(063)232-5006.●콩나물국밥=경기전 뒷편 '왱이집'은 전통식으로 토렴한 국밥을 내는 집이다.(063)287-6979. 맞은 편 동문원은 동문원은 뚝배기에 펄펄 끓여 내는 곳으로. 초란 반숙에 뜨거운 국물을 떠넣고 모주 한 잔과 곁들여 먹는 방식이다.(063)284-3339.●간식=한옥마을 베테랑칼국수는 걸쭉한 들깨 국물에 김가루와 고춧가루를 뿌린 독특한 맛의 칼국수로 전국적 유명세를 타는 곳이다.(063)285-9898.
전주 | 이우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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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잘 다녀 야 합ㄴ다. 적지 않은 부분이 오해가 있으니......
달마대사님 잘보구 갑니다 잘 알겠습니다 ^^